I. 서 론
한국 외식산업의 발전과정을 태동기, 성장기, 성숙기 등으 로 나눌 때 그 시기 구분은 학자들에 따라 큰 견해 차이를 보인다. 외식산업의 시작인 ‘태동기’를 1900년대(Han 2005), 1920~1930년대(Hong 2003), 1950년대 이전(Kim et al. 2003), 혹은 훨씬 이후인 1974년 이전(Chong 2011) 시기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시기 구분 가운데서도 해방 이후부 터 1960년대 시기에 대해서는 한국전쟁을 겪으며 식량부족 과 어려운 경제적 여건 때문에 외식 활동이 활성화되지 못 했고, 전통적인 소규모 음식점들이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이 었다는 평가가 많으며(Park 2004;Jang 2006;Song & Kim 2019) 관련 연구도 거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은 이 역사적 격동기는 우리나라 외식업의 뿌 리가 형성되었던 기간으로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이 시기에 대해 단편적인 평가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다양한 자료들 을 활용해 구체적으로 각 지역 외식산업의 변화 과정을 살 펴보아야 한다.
그동안 지역 음식문화 연구는 주로 ‘특정 향토음식’에 초 점을 맞추어 왔다. 향토음식 연구 경향을 분석한 논문(Lee et al. 2017)에 의하면 국내 식품영양학 분야 학술지 게재논문 135편을 메타 분석한 결과, 2000년대 초반까지 특정 ‘향토음 식 자체’에 대한 연구가 주류를 이루었다면, 2005년 이후 향 토음식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이용실태’에 대한 연구, 그 리고 2010년 이후에는 향토음식을 바탕으로 한 ‘발전·응용 연구’가 눈에 띄게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한 지역의 식문화를 종합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 는 특정 음식을 중심으로 하는 연구에서 벗어나 지역 음식 전반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특히 한 지역의 전체적인 외식업의 형성과 변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가정에서 먹던 향토음식이 어느 시점에서 외식상품화 되는가 하면, 반대로 음식점에서 경험했던 향토음식을 가정에서도 만들어 먹는 등 상호작용 을 하며 밀접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외식업의 변화를 살 펴보는 것은 향토음식 연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한 지역의 외식업을 전체적으로 살펴본 연구는 전 주와 부산 정도로 매우 드물다. Yang(2015)의 연구는 일제강 점기 전주 지역의 외식업을 통해 당시 식문화를 짐작하게 해 준다. 부산 지역에 대해서는 “부산의 음식 생성과 변화(Park 2010)”, “대중매체 속에 비친 피란지 부산의 음식문화(Lee 2016)” 등 몇몇 흥미로운 연구가 이루어졌다. Lee(2016)의 연구는 신문기사, 소설, 부산상공명감 등을 활용해 1950년대 부산의 음식문화를 잘 정리했다.
마산은 1899년에 개항하면서 일본인, 중국인 등 외국인이 들어왔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으며, 해방 후에는 귀환 동포들이 몰려들었고, 6.25 전쟁 시기에는 피난 민이 내려와 정착하는 등 인구이동을 수반하는 다양한 역사 적 요인들의 영향을 받았던 지역이다(Lee 2004). 마산과 비 슷한 특성을 지닌 부산의 식문화에 관해서는 앞에서 살펴본 연구들이 있지만, 마산 지역 외식업의 변화는 관심 부족과 더불어 제한된 자료로 인해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특히 1950년대는 전쟁으로 인해 관련 문헌이 매우 빈약하고 활용할 수 있는 자료가 제한되어 있다. Lee(2012)는 해항 도 시인 마산, 제주, 대마도의 음식문화를 비교했는데 마산에 대 해서는 주로 아귀찜에 대해서만 언급했다.
그런데 당시 지역의 유일한 일간지였던「Masanilbo (마산 일보)」는 음식점의 광고를 소상히 담고 있다. 1946년 3월 1일「Namseonsinmun (南鮮新聞)」이라는 제호로 발행되기 시작하여 1950년 8월 7일에 「Masanilbo (마산일보)」로 제 호를 바꾼 뒤 1966년 12월 31일까지 발행되었다(National Library of Korea). 신문의 광고는 당대 소비문화를 함축하고 있는 사료라고 할 수 있어서 새로운 자료발굴의 의미를 가 지며, 지역의 식생활과 음식문화를 연구하는 데도 매우 유용 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An 2015). 신문광고에는 일정 규모 이상의 음식점만이 제한적으로 노출된다는 한계는 있지만, 외식의 정착과 더불어 식문화 변화의 큰 흐름을 보는 데는 매우 유용하다.
「Masanilbo (마산일보)」음식점 광고 이외에도「Masansanggongmyeonggam (馬山商工名鑑)」,「Masansisa (馬山市 史)」등 공식자료와 회고록, 지역과 중앙의 신문기사 등을 종합하여 살펴보았다. 또한 마산을 대표하는 외식업소 경영 자들을 인터뷰함으로써 문헌 자료를 보완하고자 했다.
본 연구의 목적은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마산 지역 식문화의 단면을 외식업의 변화를 통해 살펴보는 것이 다. 구체적인 연구문제는 첫째, 지역 일간지에 얼마나 많고 다양한 음식점이 광고를 하였는가? 둘째, 그 음식점들의 특 징은 무엇인가? 셋째, 그것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당시 외 식문화는 어떠한가? 등이다. 또한 이 연구를 통해 ‘해방 이 후 외식업의 변화에서 일본의 영향은 어떠한가? 6.25 이후 피난민의 영향은 어떠한가? 특히 냉면이 마산권까지 확산이 된 것은 어느 시기인가? 중식, 양식 등 다른 나라 음식점은 어느 정도 유행되었는가?’ 등 마산이라는 한 공간에서 시대 흐름과 맞물려 이루어진 외식의 변화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 펴보았다.
II. 연구 내용 및 방법
본 연구는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마산지역 외 식업의 변화를 살펴보기 위해 마산일보를 비롯한 문헌 연구 와 인터뷰를 병행하였다.「Masanilbo (마산일보)」는 해방 후 1946년 3월 1일 경상남도 마산(현 창원시)에서 창간된 첫 지역신문인「Namseonsinmun (남선신문)」에서 시작되었다. 그 후 1948년 5월 30일「Namjoseonminbo (남조선민보)」, 그리고 1950년 8월 7일에 「Masanilbo (마산일보)」로 바뀌 어 1966년 12월 31일까지 간행되었다(National Library of Korea).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구축한 ‘대한민국신문 아카이브’를 통 해서「Namseonilbo (남선신문)」1948년 2월 20일자부터 「Masanilbo(마산일보)」1966년 12월 31일까지 DB화된 신 문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검색으로는 음식점 광고를 다 파악 할 수 없기 때문에 약 18년 동안의 신문지면을 직접 살펴보 고 전 지면에 실린 음식점 광고를 수집, 분석하였다.
또한 마산상공회의소에서 펴낸「Masansanggongmyeonggam (마산상공명감)」1959년 판과 1963년 판에 실린 음식 점 목록을 참고하였다. 1963년 판의 서문에는 “1959년 처음 발간하고 난 뒤 5년 만에 처음으로 마산상공명감을 내게 되 었습니다(Masansanggonghoeuiso 1963)”라고 하여 1959년이 초판임을 알 수 있다. 1959년 판에는 “1958년 12월 현재” 음식점 목록을 볼 수 있는데, 음식점명은 62개 업소가 대표 자 성명과 함께 밝혀져 있고, 음식점명이 누락된 대표자 성 명이 34명이 더 있어 총 96명이 기록되어 있다(Masansanggonghoeuiso 1959). 1963년 판에는 ‘음식업’ 76개 업소, ‘요 리업’ 8개 업소로 구분되어 있으며 대표자 성명은 124명이 다(Masansanggonghoeuiso 1963).
그 밖에도「Chosunilbo (조선일보)」, 「Dongailbo (동아 일보)」,「Gyeonghyangsinmun (경향신문)」, 「Busanilbo (부 산일보)」등 일간지에서 보도된 마산 음식 관련 내용과 「Masansisa (마산시사)」,「Masansitonggyeyeonbo (마산시 통계연보)」등 공식적인 자료, 관련 회고록 등 다양한 자료 를 이용해서 최대한 당시 마산 음식문화에 접근하고자 했다.
또한 마산을 대표하는 노포(老鋪) 가운데서 마산일보의 광 고나 마산상공명감 등 문헌을 통해 그 전통이 확인되는 ‘三 代(삼대)초밥’, ‘함흥집’, ‘不老(불로)식당’, ‘永生閣(영생각)’ 의 경영자들을 인터뷰함으로써 문헌 자료를 보완했다. 이 음 식점들은 1940년대 말에서 1960년대에 사이에 창업되어 현 재까지 이어지는 역사성이 있는 곳이다.
III. 결과 및 고찰
1. 마산의 인구변동
해방 후부터 6.25 전쟁을 거치면서 도시화되기까지 마산에 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배경의 인구 유입이 급격하게 진행 되었다.
첫째는 해방 후 귀환 동포이다. Lee(1988)는 “1945년 조 국이 광복을 되찾을 당시의 인구는 확실한 기록이 없으나 약 6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해방 후 수많은 귀환 동포들이 마 산항으로 찾아들었고 이 중에 약 2만 명이 마산에 눌러앉아 정착하게 됨으로서 마산의 인구도 크게 늘어나서 1947년에 는 8만 2,519명이 되었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에 는 9만 1,291명으로 늘어 갔다.”고 하였다. 마산시에서 발행 한「My Hometown Tradition」에서는 “1945년 해방으로 고 국을 찾은 해외(주로 일본 등지) 귀환 동포가 항구도시인 이 곳 마산에 대거 찾아들었다. 그들은 당시 일본군 군수물자의 창고로 사용하던 신포동과 월포동에 소재하던 假設板子屋(가 설판자옥)과 회원동에 있던 軍馬舍(군마사)에 집단 입주 (Masansi 1982)”했다고 하였다. Cha(2010)의 연구에서도 “1945년 마산 인구를 약 6만 명으로 추정하고 1947년 8만 2 천여 명으로 추정할 경우 약 2만 2천여 명의 귀환 동포에 의 한 사회적 증가로 보인다. 1946년 2월의 거주자 약 3만 명 의 2/3 이상이 그대로 마산에 정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귀환 동포들은 생활터전을 마련하고 마산에 정 착하기 위해서 “귀환 동포회를 조직했으며 특히 마산 귀환 동포회 회장을 맡았던 권태욱은 1, 2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 는데 귀환 동포회의 지원이 주효했다고 할 정도로 귀환 동 포의 단결력이 강했다(Cha 2010).”고 했다.
둘째는 한국전쟁 시기 피난민의 유입이다. 6.25 동란 중 마 산은 적의 침공을 끝까지 방어해 낸 최전선 방어기지였고 피 난민의 집결지였다. “당시 마산은 피난민의 집결지의 하나가 되어 무질서한 시가지로 팽창(Masansi 1982)” 되었는데, “1953년 휴전협정이 성립된 이후에도 고향을 찾아 돌아가지 못한 이북의 실향민들과 전후의 생활터전을 찾아 모여든 사 람들(Lee 1988)”이었다. Cha(2010)는 “전쟁 초기 마산에는 약 5만 명 정도의 피난민이 유입”되었고 “전쟁이 끝날 무렵 에는 약 2만 명 정도가 마산에 정착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셋째는 도시화가 진행되며 이루어진 근로자의 유입이다. Cha(2010)는 “1950년대 중반 이후 농촌경제의 붕괴와 도시 이주로 인하여 마산 인구는 1950년대 말 약 15만 명”으로 “해방 당시 약 6만 명의 인구보다 약 9만 명 이상 증가하였 다.”고 하였다.
Lee(2004)는 “1949년에서 1960년 사이에 마산 인구는 연 간 평균 5% 정도의 비율로 증가한 것으로 기록된다. 1950년 말에 한국 전체적으로 연평균 인구 증가율이 3% 선 정도이 므로 사회적 인구증가 요인이 적어도 마산시 인구증가 요인 의 반 정도를 점유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한국전쟁기에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급격한 감소가 두 차례 반복되고 이 후 서서히 증가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한국 전쟁 기의 피난민의 유입과 귀환, 그리고 일부 피난민, 특히 하층 민들이나 북한에서의 피난민의 정착, 농촌 지역에서 도시 지 역으로의 사회적 이동의 결과로 해석된다(Lee 2004).”고 하 였다.
결론적으로 마산의 인구변화를 연구한 학자들은 “해방 직 후에 마산에 정착한 인구가 2만 명, 한국전쟁 중에는 약 3만 여 명이 피난을 위해 일시적으로 이주하였고, 한국전 이후에 이북의 실향민과 피난민 중 일부, 그리고 농촌 지역에서 마 산으로 이주한 인구를 5만여 명으로 추정(Lee 2004)”하고 있 다. 그리고 “해방과 함께 외국에서 돌아온 귀환 동포, 한국 전쟁으로 남하한 피난민 등이 토박이들과 섞여 마산시민을 형성하였다. 마산시민의 다양한 출신 배경과 경험의 다양성 은 마산을 움직여 나가는 하나의 에너지가 되었다(Cha 2010)”고 분석했다.
2.「Masanilbo (마산일보)」에 광고된 음식점 분류
당시 신문사의 광고영업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로 “1950 년대 마산 그리고 경남신문(Kyungnam Shinmun YouTube) 이라는 영상물을 유튜브를 통해 볼 수 있다. 경남신문은 “이 영상물은 미국 공보원이 제작한 것”으로 1950년대 “마산의 거리 풍경과 함께, 경남신문의 전신인 마산일보의 취재 및 편집, 윤전 등 신문제작 과정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라고 해설하고 있다. 여기에는 광고영업에 관한 언급도 나오 는데, “광고는 신문사 수입의 일종입니다. 이미 주문 맡은 광 고 도안을 작성하는 동안 다른 광고부원은 시내 주문을 받 고 다닙니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광고부 직원이 직접 업소 를 다니며 광고 주문을 받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 고 문구를 보면 음식점들은 주로 창업이나 시설 보수를 했 을 때, 또는 계절에 맞는 새로운 메뉴 소개를 소개하거나 봄 이나 가을 등 행락철 시기에 집중적으로 광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신문 아카이브’에서 볼 수 있는「Namseonsinmun (남선신문)」1948년 2월 20일부터「Masanilbo (마산일보)」 1966년 12월 31일까지 약 18년 동안의 음식점 광고를 분석 한 결과는 < Table 3>과 같다.
연구기간 동안 광고에 나타난 음식점의 수는 총 92개이다. 5년 단위로 나누어 4시기로 정리하면 1시기 1946~1950년 18개, 2시기 1951~1955년 27개(광고를 한 29개 업소 중 ‘아 방궁, ‘우리집’ 1시기와 겹침), 3시기 1956~1960년 17개(광 고를 한 19개 업소 중 ‘식도원’, ‘미도’ 2시기와 겹침), 4시 기 1961~1966년 30개(광고를 한 37개 업소 중 ‘모란봉’, ‘나 이롱’, ‘해동집’, ‘미도’, ‘현대그릴’, ‘우정1’, ‘전원그릴’ 2시 기와 겹침) 업소가 광고에 나타났다. 5년 단위의 시기 구분 에서 몇 시기를 지속적으로 이어간 음식점의 경우는 처음 나 타난 시기를 기준으로 1개 업소로 세었다. 그리고 괄호 안에 화살표로 다음 시기로 이어졌음을 표시하였다. 취급 메뉴가 시기에 따라 바뀐 음식점의 경우도 역시 동일하게 1개 업소 로 처리하였으며 화살표에 이어 바뀐 메뉴를 표시하였다.
당시 음식점 광고는 주소나 메뉴를 밝히지 않은 경우가 많 았다. 같은 이름의 음식점이 동일 음식점인지 여부를 구분하 는 기준은 주소, 전화번호, 혹은 메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 이상이 같으면 동일 음식점으로 하였고, 세 가지 중 어느 것 도 같지 않거나 밝혀지지 않는 경우는 별개의 식당으로 간 주하였다. 예를 들어 ‘우정’은 ‘남성동’과 ‘오동동’ 소재가 있 어서 각각 ‘우정1’, ‘우정2’로 표기하였고 별개의 음식점으로 세었다.
취급 메뉴는 < Table 4>에 나타난 것처럼 단일메뉴가 49개 (53.3%), 복합메뉴가 28개(30.4%), 미상이 15개(16.3%) 업소 였다. 단일메뉴 중에서는 한식이 28개로 가장 많았고 중식이 9개, 일식이 8개, 양식이 4개 업소였다. 복합메뉴에서는 일식 +양식이 9개, 한식+일식이 8개, 한식+양식이 3개, 한식+중식 은 1개 업소였다. 그리고 3중 복합메뉴인 한식+양식+일식이 4개, 한식+일식+중식이 1개, 4중 복합메뉴인 한식+양식+일 식+중식인 업소도 2개가 나타났다.
음식 종류별로 살펴보면, 한식의 경우 단일메뉴로 한식을 하는 곳이 28개에 복합메뉴로 한식을 하는 곳이 19개 업소 로 총 47개였다. 일식은 단일메뉴 8개, 복합메뉴 24개로 총 32개 업소, 중식은 단일메뉴 9개, 복합메뉴 4개로 총 13개, 양식은 단일메뉴 4개, 복합메뉴 18개로 총 22개였다. 단일메 뉴 업소로는 중식이 9개로 일식 8개, 양식 4개보다 많았으나, 복합메뉴까지 포함하면 중식이 13개인 것에 비해 일식이 32 개와 양식 22개 업소로 훨씬 많았다.
한편, 상호 뒤 괄호 안의 숫자는 그 시기 동안의 광고 횟 수를 의미한다. 연구기간 동안 100회 이상 광고한 식당은 5 개 업소로 ‘미도(635회)’, ‘나이론(566회)’, ‘우래옥(295회)’, ‘장어집(216회)’, ‘서울집(117회)’ 이었다. 최다 광고 5개 업 소의 메뉴를 살펴보면, ‘미도’는 일식+양식, ‘나이론’은 초기 에 한식을 하다가 한식+양식+일식으로 변화하였다. ‘우래옥’ 은 평양냉면과 불고기를 주메뉴로 하는 한식, ‘장어집’은 일 식, ‘서울집’은 한식을 취급하였다.
이렇게 국적을 가리지 않는 혼종(混種)의 메뉴를 했던 곳 이 많았는데, 한식과 일식이 혼합된 식당들이 적극적으로 광 고를 하였다. 1952년 3월 25일 ‘일심식당’은 “진미의 백화점” 이라고 하고 “불고기, 설넝탕, 스시, 스기야기, 쟁반, 냉면”과 같은 한식과 일식이 섞인 메뉴를 소개했다. 또한 “신마산에 발전을 위하여 연중무휴에 노력하겠습니다”라고 하여 연중 무휴 영업을 했음을 알 수 있고, 같은 해 9월 20일에는 “초 밥, 스기야기, 곰국”을 광고하였다.
1952년 5월 2일 ‘우리집회관’의 경우는 “런치, 갈비, 스시, 평양식 냉면, 각종 요리, 대중식사”를 광고하여 양식, 한식, 일식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53년 3월 31일 ‘식도원’ 은 “순평양식 냉면, 고음국 전문”이고 “수시 일절, 우나기, 돈부리, 카레라이스, 하야시라이스, 기타 각종 요리”라고 했 는데, 여기에서 ‘수시’는 ‘스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며 한식과 일식 메뉴의 혼종이었다.
업소들 가운데서는 계속 메뉴를 바꿔가면서 그때그때 유 행하는 음식을 순발력 있게 상품화하는 업소도 여럿 있었다. 대표적인 곳이 566회로 두 번째 많은 광고를 한 ‘나이롱’이 다. 주소는 “창동 28, 전화번호 870”으로 상호가 ‘나이롱 주 점’, ‘나이롱집’, ‘나이론 회관’으로 바뀌었고 취급하는 메뉴 도 계속 변하였다. “곱창 백반, 갈비 백반(1958.10.17)” 등 주로 한식을 취급하던 나이롱은 1961년에는 “모리소바 (1961.4.19)” 등 일식을 추가했는데, 1961년 12월 4일의 광 고를 통해서 그 규모가 50명 좌석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즉석 불고기, 정골 수끼야끼, 곱창 백반, 설렁탕 (1962.3.6.)”을 하다가, 1962년 3월 22일자 광고를 보면 “함 흥식 냉면”을 추가하여, 면 종류만도 “함흥식 냉면, 일본식 모리소바, 냉국수”까지 다양하게 있었다. 1963년 6월 11일 광고에는 양식까지 추가되면서 한식, 일식, 양식이 섞인 다 양한 메뉴를 선보였다. 그 후 1965년 9월 19일 자부터는 “마산 요식업 최초로 입하한 육절기로 불고기 조리를 개시” 했다며 불고기만 적극 강조하고 있어서 당시 불고기가 크게 유행했다고 볼 수 있다. 불고기를 먹는 그림이 추가된 나이 론 회관의 1965년 11월 2일의 광고는 < Figure 2>와 같다.
1962년 1월 7일 ‘청운장’의 광고에는 “한식, 화식(和食), 양 식, 중화요리”를 모두 제공한다고 하여 4중 복합메뉴를 볼 수 있다.
3. 음식 종류별 특징
문헌 자료를 분석하고 심층 인터뷰 내용을 종합해서 해방 이후 1960년대 중반까지 마산지역 음식점의 특징을 한식, 일 식, 양식, 중식 등으로 나누어 정리하면 < Table 5>와 같다.
1) 한식 음식점
(1) 마산의 명물 “고음국(곰국)”의 전통
마산의 대표적 언론인 김형윤(1903-1973) 유고집「Masanyahwa (마산야화)」에 의하면, 마산의 명물을 “고음국”이 라고 하였다(Kim 1973).
지금은 경향 각지에서 곰탕이 없는 곳이 없다. 그러나 옛날엔 생활이 윤택한 가정에서만 끓여 먹을 수 있었다. 마산엔 구 삼 성병원 위에 박복년이라는 이가 곰탕 장수를 시작한 게 그 원 조로 손꼽을 수 있다. 이 집의 곰탕은 유명했지만 곁들어 깍두 기의 맛 또한 구미를 돋구었다. 이관용 박사가 이 집 곰탕과 깍두기 맛을 본 뒤로는 지방 순회강연으로 영남방면에 올 때 면 백사를 젖혀 놓고서라도 복년이네 집 곰탕을 먹고 가야만 맘이 후련하다고 했다. 조선일보 재직 시에 점심시간만 되면 사원들은 마산 복년이네 집 곰탕의 예찬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위의 글에 언급된 이관용 박사(1891~1934)는 1923년 연 희전문학교 부교장, 1924년 동아일보 기자, 1925년 시대일보 부사장을 지냈다(Daehaneolloninhoe 1992). 이 박사가 ‘복년 이네 집 곰탕’을 찾았던 시기는 1920~30년대로 생각된다.
역시 마산 출신 언론인 이학렬(1929~2008)도 “경남 음식 가운데서도 마산곰탕, 진주비빔밥, 충무김밥은 꽤 이름 있는 특미”라고 하면서 “마산곰탕이 대중의 음식으로 나타난 것 은 지금부터 90년 전 지금의 동성동 곰다방 뒤편에 박복년 이라는 여인이 장사를 시작한 것을 그 시초로 본다. 다른 지 방의 곰탕 맛과는 달리 마산곰탕은 순수한 소뼈와 고기를 삶 은 국물의 담백함이 특징(Lee 1988)”이라고 하였다.
두 글을 종합해 볼 때 1988년 이학렬의 저서에서 90년 전 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1900년대 초에 박복년에 의해 상 업화된 마산의 곰탕은 1920~30년대 ‘복년이네집 곰탕’이라 는 상호로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Chosunilbo (조선일 보)」1935년 8월 9일 자에서는 “탕반(고음국)” 한 그릇에 십 오전 하던 것을 이십 전으로 올리는 등 음식값이 폭등했다 는 내용을 전하면서 “마산의 명물이라고 하는 곰국”이라는 표현을 볼 수 있어 1930년대 중반에 곰국이 마산의 명물로 꼽혔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50년대 음식점 광고에도 곰국 전문 음식점을 볼 수 있 는데,「Chosunilbo (조선일보)」1950년 5월 29일자 “요리계 원조”라는 기사성 광고에서는 “마산에서 우리집식당이라면 누구나 다 입맛을 한번 다시는 유명한 요리집이다. 주(主) 이 계환씨는 해방 직후 고음국 전문으로 개업하여 박리다매로 서 대중의 호평을 받고 현재에는 손님들의 요청인 화식, 양 식도 전문적으로 일류 요리인을 사용하여 일반 손님에게 신 망이 높다.”고 하였다.
그 밖에도 1950년대 「Masanilbo (마산일보)」음식점 광 고에서 “곰국(고음국) 전문”임을 내세우는 음식점은 ‘일심식 당(52.9.20)’, ‘해인관(53.1.18)’, ‘식도원(53.3.31)’ 등이 있었 다. 또한 1959년 판「Masansanggongmyeonggam (마산상공 명감)」에도 “고음국집(고달순, 창동)”, “엉터리곰국집(임화 자, 동성동)” 2개 업소가 수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Masansanggonghoeuiso 1959).
(2) 냉면의 확산
1917년 발표된 김랑운의 소설 ‘냉면 한 그릇’은 냉면을 소 재로 한 최초의 근대소설(Kim et al. 2018)이라고 알려져 있 다. 소설에서 냉면집의 위치는 ‘서울 서대문’으로 묘사되어 있 다. 이외에도 서울의 경우는 문헌 자료를 통해서 1920년대에 는 종로를 중심으로 많은 냉면집이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현재까지 발견된 경남지역에서 냉면집 등장의 가장 오래 된 기록은 1935년 5월 11일자「Dongailbo (동아일보)」에 실린 이무영의 ‘영남주간기’이다. “하로(하루)를 마산에서 놀 고 함안을 지나 의령에 다흔(닿은)것은 구일 황혼, (중략) 밤 늦어 냉면을 시키어다 먹고”라고 했는데, 즉 당시 의령에 냉 면집이 있었고 배달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부분 적으로는 냉면집이 있었지만, 냉면의 본격적인 확산은 전쟁 이후 피난민의 영향이라는 것을 인터뷰를 통해 짐작 할 수 있다.
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위치한 ‘함흥집’ 1대 임이순, 최 화순 사장의 고향은 각각 평안남도 강서, 중화로 1951년 1. 4 후퇴 때 남한으로 피난하였다. 같이 내려온 친척들은 부산 에 정착했지만 임 사장은 마산 월영마을 자리 피란민 촌에 터를 잡고 정착했다. 초기에는 장사할 자본이 없었기에 1954, 55년경 찐빵과 보신탕 장사부터 시작했고, 2대 임석빈 사장 (65)이 중1 때쯤인 1968년에 임이순 사장이 ‘함흥집’을 인수 하였다. 임석빈 사장은 “함흥집은 원래 함흥 출신의 ‘백파’ 라는 사람이 처음 시작했다. 이후 ‘황씨’라고 불리던 사람이 경영을 하다가 임이순 사장이 인수”했다고 했다.
실제로 1959년 명감에서 ‘함흥집(白波, 두월동)’을 확인할 수 있다. ‘함흥집’은 함흥 출신의 북한 피난민에 의해 시작 되었으며, 역시 피난민이었던 임 사장이 인수해서 지금까지 마산 지역의 냉면 확산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78년에 며 느리 김덕임 사장이 처음 운영에 합류했을 때는 북한식으로 꿩 육수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2대 임석빈 사장은 “그때 당 시 북한에서는 냉면이 가정에서 해 먹는 음식이었고 가정에 서 냉면 틀을 가지고 면을 뽑았다”고 하였다. “창업 초기부 터 북한 평양냉면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점차 남한사 람들의 입맛에 맞추어졌다. 처음 냉면을 접한 당시 마산사람 들에게 냉면은 색다른 맛으로 느껴졌을 것”이라고 하였다.
냉면을 처음 접한 남한사람들의 반응은 소설가 이호철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소시민’이라는 소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소시민’은 “우리 소설사에서 보기 드문, 아니 1951 년 부산의 피난 시절을 다룬 유일한 장편소설(Lee 1995)”로 평가받는다. 한국전쟁기 원산에서 피란 온 작가는 부산에서 제면소 직공으로 일했던 경험을 소설을 썼는데(Lee 2016) 냉 면이 전파되기 시작된 당시 부산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 현하고 있다.
주인과 주인 마누라는 부산에도 차츰 퍼지기 시작하는 평양냉 면 타박을 하기 시작했다. 그놈의 냉면인지 뭣인지 때문에 밀 국수가 안 나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날나리는 눈치 가릴 것 없이 평양 냉면을 칭송해 마지 않는다.
‘햐아, 그거 희한하드라이. 씨어언헌 것이, 입안이 쩡하구. 피양 냉면 말이다.’
이러면 팔도강산 두루 돌아다닌 김씨는 한술 더 떴다. ‘피양냉면도 피양냉면이지만 함경도 냉면은 더 독하요. 순 가 다꾸리(녹말가루)루다가 맵구 찔기구, 그건 안즉 유행 안 되는 가베. 허긴 그건 쩡쩡 추운 함경도 겨울이래야 제 맛이재(Lee 1995).’
따라서 소설에 의하면 부산에서는 1950년대 초반에 밀국 수가 안 나갈 정도로 평양냉면이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함흥냉면은 아직 유행하기 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Masanilbo (마산일보)」에서 냉면집 광고는 6.25 직전인 1950년 4월 15일에 처음 나타난다. < Figure 5>를 보면 “경 성관” 광고에서 “냉면 개시, 순 평양식 냉면”을 “4월 16일부 터 개시”라고 하였다. 그리고 1951년 7월 7일 “금곡원”은 “ 일류 숙수의 진미 냉면”, 1951년 9월 16일 “식도원”은 “순 평양 냉면”, 1952년 1월 16일 “은정”은 “평양냉면”, 1952년 5월 2일 “우리집회관”도 “평양냉면”, 1953년 3월 28일 “군 인식당”은 “냉면 전문”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냉면’, 혹은 ‘평양냉면’이 광고되다가 ‘함흥냉면’이 광고에서 처음 나타나는 것은 1961년 5월 25일 “원산옥”이 다. “순 함흥식, 20년 경력의 조리사”라고 하였으며 광고 문 구 중에 “신속배달”이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 그리고 1961 년 6월 8일 “진주집”은 “순 함흥식, 순 평양식”이 공존했다.
295회로 세 번째 많은 광고를 했던 ‘우래옥’은 1962년 3월 3일 첫 광고가 보이는데 주소가 구마산 남성동이며 ‘구 우정’ 이라고 밝히고 있다. ‘우정’은 1961년까지 광고가 나타나며 일식과 양식을 했는데, ‘우래옥’으로 바뀌면서 메뉴가 “불고 기백반, 평양냉면, 비빔밥, 만둣국, 갈비탕(1962.3.3)” 등 여 러 가지를 하다가 그 후 “불고기, 평양냉면” 전문점으로 자 리 잡았다.
117회 광고를 한 ‘서울집’은 1961년 4월 7일에 처음 나타 나는데 “구마산 시장 입구”에 위치했으며 “냉면, 보신탕 (1961.4.7)”이 주메뉴였다. 그 후 “소고기 육개장을 개시하며 한식, 양식(1961.8.31)”을 하다가 다시 “보신탕, 비빔밥 (1962.3.31)”을 광고하였다.
(3) 대중식사로서의 한정식
마산합포구 남성로에 위치한 한정식집 ‘불로식당’은 시할머 니(1대 백점순 사장), 시어머니(2대 양영자 사장), 며느리(3대 강혜영 사장)로 내려오는 3대째 업소이다. 1대 백 사장이 1951년에 ‘프롤레타리아’의 줄임말인 ‘프로’ 식당을 인수한 것 이 출발이었다. 비슷한 발음의 ‘부로’로 불리다가 ‘불로’로 바 뀌었다.「Kyongnamshinmun (경남신문)」 2016년 4월 14일 보도에 따르면 3대 강혜영 사장은 “‘한정식’이라는 이름이 주 는 뭔지 모를 부담과 격식이 아니라 편하게 먹을 수 있는 푸 짐한 우리네 밥상이라는 이미지를 유지”하는 것이 목표이고, “한정식치고는 저렴한 1만 5000원이라는 가격을 고수하고 있 다. 또한 식당의 시작이 ‘프롤레타리아’였던 것처럼 앞으로도 서민들이 즐길 수 있는 한정식을 만들고 싶다.”고 하였다.
강혜영 사장(55)은 “인수하기 전에 ‘프로’ 식당도 한식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불로’의 정확한 창업날짜는 알 수 없 는데, 초기에 생선국, 장어국 등을 하다가 1960년대 후반부 터 한정식집이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Masanilbo (마산일보)」1951년 9월 3일 자에는 < Figure 8>과 같이 ‘불로관’ 개업광고가 실렸고, “각종 요리” 라는 문구도 볼 수 있다. 따라서 불로관은 1951년 9월 3일 즈음에 창업되었으며 초기에는 간단한 식사뿐 아니라 ‘요리’ 라고 불릴 수 있는 메뉴도 취급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 ‘한정식’에 대한 이미지가 요릿집 등에서 향응을 위 한 거창한 음식이었다면, 강 사장의 말대로 ‘불로식당’은 서 민들이 편하게 먹을 수 있는 밥상을 추구하며 한정식을 대 중식사로 포지셔닝(positioning)했고, 그것을 1960년대 후반 부터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이상 한식 음식점의 특징을 요약하면 ‘마산의 명물’이라고 불리던 고음국(곰국)의 전통이 해방 후에도 이어졌으며, 한 국전쟁 이후에는 피난민들을 통해 냉면이 확산되었다. 또한 대중식사로서의 한정식이 등장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2) 일식 음식점
(1) 일식의 강세
광고에서는 ‘화식(和食)’, ‘왜식(倭食)’이라는 용어도 함께 사용되었는데, 일식을 하는 업소는 단독메뉴 8곳과 복합메뉴 24곳으로 32개 업소였다. 광고에 나타난 92개 음식점 가운데 서 메뉴를 알 수 없는 15개 업소를 제외하면, 전체 업소의 약 41.6%에 달하는 곳에서 일식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해방 직후인 1946~1950년인 1시기에는 단독메뉴로 일 식을 하는 업소가 4개로 한식 1개, 중식 2개, 양식 0개 중 가장 많았다.
이처럼 해방 직후 일식을 하는 음식점이 강세를 보였다는 것은 그만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본 음식에 익숙해졌다 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삼대초밥’의 경우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3대 전봉준 사장(46)에 의하면, 1 대 전선도 창업주는 의령이 고향으로 1921년생이다. 해방 전 일본인이 운영하던 마산의 요정에서 일을 하다가 17세 때쯤 에 주인과 함께 오사카로 갔고, 본격적인 일식 요리 수업을 받았다. 한국에 돌아와 1947년 간판도 없이 서성동 분수 로 터리 옆 골목에서 장사를 시작해 ‘골목초밥’이라는 상호를 걸었고 생선 초밥, 생선 찌개, 어묵이 주메뉴였다. 전 사장은 해방 후 당시 분위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일본 지배를 받으면서 일식에 익숙해지니 일단 거부감이 없었 지요. 그리고 당시 분수 로터리를 기점으로 법원, 검찰청, 관공 서가 많고 상권이 좋았어요. 일본 음식은 고급에 속했는데 그 분들이 별미 음식으로 먹었고, 또 할아버지는 완전히 일본식이 아니라 마산사람들 입맛에 맞게, 한국 정서에 맞춰서 장사를 하신, 이 삼박자가 맞아서 장사가 잘되었다고 할아버지가 말씀 하시더라구요.
연구기간 동안 최다 광고 5개 업소 가운데서 ‘미도(635회)’, ‘나이론(566회)’, ‘장어집(216회)’은 3곳이 일식을 취급했으며, 이 세 곳의 광고 횟수는 무려 1,417회에 이른다. 가장 많은 광고를 한 음식점은 ‘미도(味都)’로 635회의 광고를 하였다. ‘미도’의 메뉴는 “고급 화식, 경양식, 도시락, 복요리, 장어 초 밥”으로 일식과 양식이 결합 되었다. ‘미도’ 광고는 1955년 9월 10일에 처음 나타났는데 “수성동”에 위치하고 9월 9일 부터 개업이라고 하며 “전 화풍”이라고 밝히고 있다.
‘미도’는 1955년 10회, 1956년 3회, 1957년 5회 광고를 했으나 이후 안 나타난다. 그러다가 1961년 8월 30일에 다 시 광고를 시작했는데 “수성동, 전화번호 470”이라고 하여 주소가 같은 것으로 보아 동일 식당임을 알 수 있다. 그 후 1961년부터 1966년 사이 무려 617회의 광고를 하여 매우 적 극적인 홍보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미도는 하절기에 “장어 초밥(1963.6.25)”, 가을에는 “송이 요리(1963.10.10)” 등 제 철 식재료를 이용한 음식을 계절에 맞추어 광고했다.
「Masansanggongmyeonggam (마산상공명감)」1959년 판 에는 “미도식당”이 있으며 “정태길, 수성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963년 판에는 “미도, 김양자, 수성동 45, 전화 번호 470”이라고 되어 있다. 1959년 판의 미도식당과 1963 년 판의 미도는 주소가 ‘수성동’으로 마산일보 광고의 미도 와 같은 업소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대표자가 정태길에서 김 양자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네 번째로 많은 216회 광고를 한 ‘장어집’은 1961년 4월 20일에 광고를 시작했고, 위치는 “구마산 은하당구장 앞”이 라고 소개했다. 장어요리 전문점이면서 “참새요리(1961.12.2)” 까지 했는데, 1961년 한 해에만 120번의 광고를 하였다. 그 후 “각종 왜식(1962.1.5)”으로 메뉴가 확장되었다.
2) 일본식 음식 명칭
해방 후에도 일본식 음식 명칭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1940 년대 후반 음식점 광고에는 ‘‘辨當(변당 べんとう)”, “折詰(절 힐 おりづ)”, 또는 “折瓣當(절변당 おべんとう)”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타난다. 도시락을 의미하는 일본어를 한자로 쓴 것인 데 해방 후에도 한동안 일본식 용어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1940년대 말에 광고를 했던 ‘마포식당’, ‘낙원식당’, ‘백랑’, ‘봉선각’ 등이 모두 도시락 전문점임을 광고하고 있는데 특 히 봄이나 가을의 행락철에는 광고가 다수 나타난다. 1948 년 4월 9일 자 ‘마포식당’ 광고에서는 “특히 절힐(변당) 주 문을 환영합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주문에 應(응)하야 배 달하오리다”라는 문구로 보아 배달이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해방 후 일제의 잔재를 없애는 작업 중 하나가 일본식 음 식 명칭을 바꾸는 것이었다.「Dongailbo (동아일보)」1955 년 8월 5일자 보도에 의하면 치안국에서 “왜식(倭食) 명칭통 일”을 추진하고 있으며 “8월 10일부터 전국 일제히 사용토 록 각 관하에 시달”하였다. 여기에는 “왜정식(화식), 왜전골 (스끼야끼), 도시락(벤또)” 등의 명칭변경이 포함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계속 사용되었던 ‘벤또’가 도시락으로 바뀌 게 된 시기는 1950년대 중반으로 보인다.「Hankookilbo (한 국일보)」보도(2005년 10월 6일)에 의하면, “도시락이 ‘음식 을 넣어 다니는 간편한 용기 또는 그 내용물’이라는 뜻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때는 1954년 무렵으로 보인다. 당시 여성 들에게 인기 있던 ‘여원’이라는 잡지가 ‘여성생활백과사전’ 을 만들었는데 여원의 편집진은 생활 정보를 알려주면서 동 시에 일본말의 잔재를 없애고 우리말을 찾아야 한다는 사명 감을 갖고 고어나 사투리, 혹은 조어를 통해 새로운 우리말 을 많이 만들었다.”고 하였다. 여기에 ‘도시락’이라는 용어가 소개되었는데 “1954~56년에 여원 편집장을 지냈던 최일남 씨가 고향인 전주에서 널리 쓰이던 도시락이라는 단어를 사 전에 등재시킨 것(Hankookilbo 2005.10.6)”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Masanilbo (마산일보)」광고에서도 “절변당”, “절 힐”, “벤또” 등의 용어가 나타나다가 1956년 3월 30일 ‘미도’ 광고에서 “도시락”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고 이후 다른 음식점 광고에서도 사용되었다.
일식 음식점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제강점기 를 거치며 이미 대중들은 일식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해 방 후 외식업에서 일본 음식점들이 강세를 보였다. 또한 고 급 음식에 속했던 일식은 당시 상대적으로 구매력이 있었던 신문 구독자들에게 적극적인 광고를 했다. 해방 후에도 일식 에 관해서는 일본식 용어가 사용되다가 일제 잔재를 없애는 작업 등을 통해 점차 우리말로 바뀌었다.
3) 중식 음식점
1940년 2월 17일「Busanilbo (부산일보)」1940년 2월 17 일자 “馬山の 金谷園 好評(마산의 금곡원 호평)”이라는 기사 를 보면, “구마산수정 중화요리 금곡원”의 점주는 한명석이 며, “南鮮一流(남선일류)의 중화요리점”이라는 평가를 받았 다고 하였다. 즉 1940년 구마산에 높은 평을 받았던 중화 요 리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Namjoseonminbo (남조선 민보)」1948년 1월 10일에 “마산 공립보통학교 제28회 졸업 생 동창회”가 “구마산 금곡원”에서 열린다는 광고를 볼 수 있어 ‘금곡원’이 해방 이후 1948년까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연구기간 동안 광고에 나타난 단일메뉴 중국 음식점은 8 개, 한식+중식 1개, 한식+중식+일식 1개, 한식+양식+일식+ 중식은 2개 업소이다. ‘창원식당’은 “간이 중식(1949.1.7)”이 라고 하였고, ‘태흥식당’은 “화상(華商)이 하는 북경요리 (1950.4.19)”임을 광고했다.
「Busanilbo (부산일보)」 1954년 9월 5일자 기사에는 “현 재 (마산) 시내에는 수십 명의 화교 접객업자가 한국인들 상 대로 영업”을 하고 있는데 그 중 “30여 명이 경찰 당국으로 부터 위생 관련 주의를 받았다”는 내용이 있어 당시 화교 운 영업소 규모를 짐작하게 해준다.「Kyunghyang Shinmun (경 향신문)」1962년 8월 3일자에는 “마산에 2백 94명의 화교들 이 살고 있다”고 하여, 당시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이 상당수였으리라 짐작된다.
마산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담은 「Changdongyahwa (창 동야화)」에 의하면, “현재 마산에는 정통 중국 화교가 운영 하는 중국집은 딱 세 집밖에 없다고 한다. 남성동 파출소 부 근의 현 북경성(北京城)과 옛 신마산 소방서 앞 인근에 있는 영생각(永生閣), 그리고 옛 신마산 반월동 사무소 맞은편 인 근에 있는 전앙장(全央壯)(Lee 2020)”이라고 하였다.
이 가운데서 ‘영생각’ 2대 사장 손유정 씨(45)는 “시아버 님인 1대 강언상 창업주는 1925년생으로 스무살 때인 1945 년쯤 중국 산동 지방에서 인천을 통해 한국에 왔다. 그런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마산까지 피난을 왔고 여기서 정착하게 되었다. ‘영생각’의 정확한 창립일은 알 수 없으나 1950년대로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생각 은 현재 간판에 “Since 1969”라고 되어 있는데, 그 이유를 물으니 “그해 정식으로 음식점 등록을 했기 때문”이라고 하 였다.
그런데 ‘영생각’의 창립일을 짐작 할 수 있는 것은 「Masanilbo (마산일보)」1965년 9월 18일자에서 볼 수 있 는 “신장개업” 광고다. 광고 문구를 보면 내부를 새롭게 단 장하여 다시 영업을 시작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창업은 1965년보다도 더 이전에 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1965년에 이르러 시설 보수를 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창업시점은 1950 년대로 추정된다.
한편 「Jungangilbo (중앙일보)」2019년 9월 18일자에는 현재 서울에 위치한 3대를 이어오는 화교 중식당 ‘락희안(樂 喜安)’에 대해서 “1945년 중국 산동 지방에서 넘어온 이연악 사장이 마산에 ‘신춘반점’을 창업”한 것이 시작이 되었다고 했다.
이 시기 중국집 광고에는 메뉴가 밝혀져 있지 않고 거의 “중화요리”라고만 되어 있는데, 유일하게 메뉴를 밝힌 곳은 「Masanilbo (마산일보)」1963년 11월 14일에 광고를 한 ‘우 일촌’이다. “마산에서는 처음 대만식 간이식, 순 대만식, 중 국남방식”이라고 했는데, 메뉴는 “북경장육, 광동향장소계, 중국신선로, 찐만두, 물만두, 군만두(1963.11.14.)” 등이 소개 되었다.
현대와 비교하여 보면, 중식에서 가장 대표적인 대중식사 로 볼 수 있는 짜장면이 이 시기 중국음식점 광고에서는 나 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1954년 8월 15일「Kyunghyang Shinmun (경향신문)」에 보도된 ‘해방 후 경제변천상’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면, 해방 당시 물가를 설명하면서 “짜장면 한 그릇에 10전(구화 10원)”이라고 하여 짜장면이 물가의 지 표로 쓰일 만큼 일반화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마산지역 에서도 짜장면이 광고에 소개할 정도로 특별한 음식은 아니 었다고 생각된다.
4) 양식 음식점
양식당은 업소 이름에 ‘그릴(Grill)’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곳이 많았는데, 단일메뉴로 고급 양식을 표방했던 ‘금슬 그 릴’을 비롯해서 ‘그릴과 다방’, ‘콘티넨탈’, ‘현대 그릴’ 4개 업소가 있었지만, 광고에서 구체적인 메뉴를 밝히지 않았다. 그 외 복합메뉴로 한식+양식 3곳, 일식+양식 8곳, 한식+양 식+일식이 5곳이었다.
한식+양식+일식 업소였던 ‘전원그릴’은 양식 취급 업소 중 가장 활발하게 광고를 했는데, 1951년 12월 1일에 ‘Grill’이 라는 이름으로 광고가 처음 나타났다. 1952년 메뉴로 “돈카 스, 로서아 스프”를 소개했는데, 광고에는 한자가 없지만 ‘로 서아’는 러시아를 의미하는 ‘露西亞’라고 생각되며 “특제 스 프”라고 광고했다. 또한 1952년 3월 10일 자에는 “서울 태 극 조리사를 초빙”했다고 하였다.「Busanilbo (부산일보)」 1952년 9월 15일 기사에 의하면 “마산 출신 해군 소령 홍성 은 씨는 금번 워싱통 아메리칸 대학에 정식 유학” 가게 되었 는데 그 송별회를 ‘전원 그릴’에서 했다”고 하였다. 이후 1954년에는 일식을 추가하여 “2층에 스끼야끼 좌석을 준비 (1954.10.27)”하였고, 신마산에 지점이 생기면서 “본점에서 호평받는 스끼야끼를 신마산 손님의 요청도 있고 더욱 외국 손님의 간청도 있어(1954.12.1) 개시”한다고 하였다. 1955년 7월 29일 광고에는 “샌드위치, 육류 요리, 생선 계란 요리, 사라다, 케이크, 토스트” 등이 나타난다. 1962년 11월 28일 광고에는 “양식과 한식의 전당”이라고 하고 “돈가스 30원, 함박스택 25원, 전골 50원, 꼽창 40원”을 광고하였다. 1964 년에도 “양식, 한식”을 하는데 “카레라이스 및 스프 전문”이 라고 하였고, “애주가 속풀이 ‘스프’(1964.1.21)”라고 하였다.
그 외 메뉴가 밝혀진 또 다른 업소인 ‘서래옥’은 1956년 2 월 19일에 “카레라이스, 오토-밀”을 광고했다. 앞서 언급한 Yang(2015)의 일제강점기 전주 지역 연구에서 “서양의 음식 문화를 받아들여 일본식으로 재해석한 음식을 판매하는 화양 절충식(和洋折衷式)” 음식점이 있었던 것처럼, 1950~60년대 마산의 양식당에서도 돈가스, 카레라이스 등이 주요 메뉴였음 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정통 양식으로 보이는 메뉴들이 추가 되고 더불어 일식과 한식이 뒤섞인 복합메뉴가 제공되었다.
IV. 요약 및 결론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마산지역 외식업의 변 화를 살펴보기 위해 마산일보에 나타난 음식점 광고 등의 문 헌 연구와 인터뷰를 병행한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연구기간 동안 총 92개의 음식점이 마산일보 광고에 나타 났으며 시기별로는 1946~1950년 18개, 1951~1955년 27개, 1956~1960년 17개, 1961~1966년 30개 업소가 광고를 하였 다. 취급 메뉴를 보면 단일메뉴가 49개, 복합메뉴가 28개, 미 상이 15개 업소였다. 단일메뉴 중에서는 한식이 28개로 가 장 많았고 중식 9개, 일식 8개, 양식이 4개 업소였다.
광고를 한 음식점 92개 중에 메뉴를 알 수 없는 15개를 제외한 77개 중에 복합메뉴를 취급한 음식점이 28개(36.4%) 로 대단히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고 복합메뉴를 취급하 고 있는 음식점들은 대체로 한식과 일식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것은 식민지 시기를 거치며 일식이 우리의 생활에 깊이 들 어와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런 경향이 마산만의 특징인지는 앞으로 다른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와 비교 분석을 시 도해볼 필요가 있다.
연구기간 동안 100회 이상 광고한 식당은 ‘미도(635회)’, ‘나 이론(566회)’, ‘우래옥(295회)’, ‘장어집(216회)’, ‘서울집(117 회)’ 이상 5개 업소였다. 이중 ‘미도’는 일식+양식, ‘나이론’ 은 초기 한식에서 출발하여 ‘한식+양식+일식’으로 변화하였 다. ‘우래옥’은 평양냉면을 주메뉴로 하는 한식, ‘장어집’은 일식, ‘서울집’은 한식이었다. 광고를 많이 한 식당들은 대체 로 객단가가 높은 일식과 한식을 취급하는 곳이었다. 당시 신문을 구독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독자들의 경제적 수준이 비교적 높은 편이라는 점이 반영된 결과였을 것이다. 또한 일식과 한식을 다루는 식당이 적극적으로 광고를 했다는 것 은, 그만큼 일식과 한식이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렇듯 해방 후 마산지역의 외식업계에서 일식이 강세를 보였던 것은, 일제강점기 동안 일식에 익숙해져 거부감이 없 었고 또한 일본에서 귀국한 귀환 동포들도 일식의 확산에 영 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초밥, 장어, 복 전문점 등이 자리를 잡았으며 일식은 단독, 혹은 다른 메뉴와 복합적으로 선보였 으며, ‘辨當(변당 べんとう), ’折詰(절힐 おりづ)’ 등의 일본 식 용어가 사용되다가 후에 ‘도시락’으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부터 “마산의 명물”로 불릴 만큼 유명했던 음식 으로는 곰국이 있다. 1950년대에도 ‘고음국(곰국) 전문’이라 는 식당 광고가 다수 나타났을 정도로 지속적으로 인기를 끌 었다. 6.25 전쟁 동안 마산은 피난민의 집결지였다. 남하한 피 난민들의 영향으로는 냉면의 확산이 두드러졌다. 피난민들은 직접 냉면집을 차리기도 하고 고객이 되기도 하면서 1950년 대 초반부터 ‘평양냉면’이 광고에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한편 ‘함흥냉면’이 광고되기 시작한 것은 이후 1960년대 초였다.
중식당은 화교들이 운영하는 곳이 많았으며 “간이 중식” 부터 “북경요리”, “남방음식” 등 비교적 다양한 중국 음식이 선보였다. 양식당 광고에서 주로 언급된 메뉴는 “돈카스, 카 레라이스” 등 일본화한 음식들과 “샌드위치, 스프, 사라다, 케이크, 토스트, 오트밀” 등이다.
마산 지역에는 신문광고나 상공명감 등 문헌을 통해서 60~70년 정도의 전통이 확인되는 음식점들이 여러 개 현존 하고 있다. 그중에는 한식, 일식, 중식이 골고루 포함되어 있 어, 전시대에 일구어낸 식문화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음 을 체감할 수 있고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 음식점들이 오랜 전통을 잇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렇게 유서 깊은 노포가 존 재한다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고, 지자체가 더욱 관심을 가지고 지원과 홍보를 통해서 지역의 명물로 키워나갈 필요 가 있다.
음식점의 역사에 대해 경영자 스스로도 자부심이 부족하 여 정확히 역사적 사실을 파악하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으 며, 불확실한 사실을 주장하더라도 확인할 수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음식 문화적 측면에서 전통 있는 노포의 존재는 그 지역 식문화에 영향을 끼치며 큰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의 확인과 평가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기 울여야 한다. 또한 외식 경영적 측면에도 역사성 있는 음식 점들의 어떤 점이 긴 세월 동안 고객들의 선택을 받으며 오 늘에 이를 수 있었는지 더욱 구체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 다. 이러한 작업이 우리나라 외식산업의 기초를 다지고 음식 문화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해방과 전쟁을 겪으면서 마산 지역의 외식업은 역동적으 로 변화했고 그 단면을 음식점 광고를 통해 살펴볼 수 있었 다. 국적을 따지지 않는 혼종의 메뉴 구성, 일식의 확산, 냉 면의 유행 등은 우리나라 역사적 격동기와 맞물려 외식업에 서 표출된 변화였다. 마산의 경우를 하나의 케이스 스터디로 실증적 외식산업사의 한 단면을 보았는데, 앞으로 서울을 포 함한 다른 지역에서도 다양한 자료를 활용하여 이와 같은 연 구가 진행될 것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