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 론
우리나라는 1960년대 시작된 경제개발계획으로 1970년대 에서 1980년대에 걸쳐 고도성장을 이루면서 외식산업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외식산업 발전단계에 관해서는 연구자 들에 따라 견해 차이가 있지만 1960년대에 외식산업의 기초 가 마련(Han et al. 2005)되었고, 1970년대에 본격적인 외식 산업의 개념이 등장(Kim & Lee 1995)하고 프랜차이즈 시스 템이 태동(Na & Jo 1999;Jang et al. 2006)된 것으로 보 고 있다. 그리고 1980년대는 본격적으로 외식산업이 성장 (Han et al. 2005;Jang et al. 2006)한 시기로 평가된다. 이 런 변화는 수도권 뿐 아니라 지역에서도 나타났다.
이 기간은 경상남도에 위치한 마산시가 ‘경남지역 수부(首 府)도시’로 불리며 급격하게 성장한 기간이기도 하다. 마산 은 “하나의 도시가 농어촌이라는 소도시의 형태에서 공업화 라는 근대화 절차를 거치면서 대도시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영욕(榮辱)의 현장을 극명하게 나타내 보여준 도시(Kim 1995)”로 평가된다. 1949년 8월 15일 마산시로 개칭된 이후 1967년 국내 섬유산업의 선구자인 한일합섬이 설립되면서 본 격적으로 대도시화 되어갔다. 1970년에 마산수출자유지역이 지정되었고 1973년에는 수출자유지역 입주기업체가 115개에 달하는 등 성공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한편, 창원군 일부지역 을 편입하여 전국 7대 도시에 들어갔다. 1970년대 마산의 발 전상에 대해서는 마산수출자유지역의 건설과 입주, 동마산 개발사업, 남해고속도로, 구마고속도로와 철도 3역 통합 등 을 꼽고 있다(Masansi 1982). 그러나 1983년 7월 1일 경남 도청이 부산시에서 창원시로 옮겨지면서 마산시에 있던 도 단위 기관들이 창원시로 이전하였고, 마산시는 인구 감소와 시세 약화의 길을 걷다가 2010년 7월 1일부로 창원시로 통 합되면서 마산합포구와 마산회원구로 나뉘었다(Changwon City).
본 연구의 목적은 마산시의 공업화가 진행된 1960년대 후 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마산지역 외식산업의 변화를 살 펴보는 것이다. “마산의 공업화는 이 나라 근대화와 맥을 같 이 한다고 평가된다. 즉 오늘의 한국이 공업국가, 수출국가 라고 한다면 마산은 공업한국, 수출한국을 만든 중추(Lee 1991)”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산업화를 거치며 외식 산업이 발달된 과정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마산지역의 연구 는 하나의 중요한 예를 제시할 수 있다. 이렇게 특정 지역의 외식업을 전체적으로 살펴본 연구는 소수에 불과하다. 일제 강점기 전주 지역 외식업에 대한 Yang(2015)의 연구, 해항도 시 부산과 인천의 음식문화 변동 분석(Lee 2014)과 부산 지 역에 대한 연구(Lee 2016)가 있다. 그리고 마산 지역에 대해 서는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외식업에 대한 논문 (Lee 2020)이 있다.
본 연구의 연구대상 시기는 본격적인 마산의 산업화가 시 작된 1967년부터 경남도청이 창원시로 옮겨지기 전인 1982 년까지 16년간이다. 이 시기 동안 마산상공회의소에서 발행 한「Masansanggongmyeonggam (馬山商工名鑑)」에 실린 음 식점 목록을 정리하고, 또한 대표적 지역일간지 「Gyeongnamsinmun (慶南新聞)」에 나타난 음식점 광고를 분석하였 다. ‘마산상공명감’을 통해서는 마산지역의 전반적인 외식산 업 규모를 파악할 수 있고, 지역일간지 음식점 광고는 일정 규모 이상의 음식점이 당시 상대적으로 구매력이 있는 신문 구독자들에게 적극적인 홍보를 한 것임으로 새로운 음식의 유입 등 외식 트랜드와 변화를 짐작 할 수 있다. 이렇게 두 자료는 담고 있는 정보의 성격이 다르고, 각각의 특징과 한 계점이 있으므로 서로 대조하며 자료를 보완하고자 하였다.
II. 연구 내용 및 방법
본 연구에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마 산지역 외식업의 변화를 알아보기 위해 중심 문헌자료로 「Masansanggongmyeonggam (馬山商工名鑑)」의 음식점 목 록과 더불어 「Gyeongnamsinmun (慶南新聞)」에 실린 음식 점 광고를 분석하였다.
「Masansanggongmyeonggam (馬山商工名鑑)」은 마산상공 회의소에서 마산지역의 점포, 공장, 사업장을 체계적으로 조 사해 정리한 자료인데, 서비스 업종 항목에 음식점 목록도 포함되어 있다. 1959년 초판이 나온 이래 3-4년 주기로 발간 되었는데, 본 연구에서는 연구대상 기간 내에 발간된 1968, 1971, 1974, 1977, 1981년판 5권을 살펴보았다. 그런데「마 산상공명감」은 각 연도마다 분류체계나 기준이 통일되지 않 고 다르다는 한계점이 있다. 또한 음식점명이 누락되고 사업 자명만이 기록되어 있는 경우도 많고 취급 음식도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점주의 이름, 주소, 전화번호 등을 알 수 있 고, 마산상공회의소에서 일정 기간마다 음식점 목록을 수집 하여 발행되었던 유일한 공식기록이라는 점에서 연구 자료 로서의 의의가 있다.
지역일간지인「Gyeongnamsinmun (慶南新聞)」은 1946년 3월 1일「Namseonilbo (南鮮新聞)」으로 발행을 시작해서 제호를 여러 번 변경했다. 이 연구에서는 연구대상 시기 동 안에 발행되었던「Gyeongnammaeilsinmun (慶南每日新聞)」 (1967.1.1.-1969.3.14.),「Gyeongnammaeil (慶南每日)」(1969. 3.15.-1980.12.31.)」,「Gyeongnamsinmun (慶南新聞)」 (1981. 1.-1982.12.31.)에 실린 음식점 광고를 분석하였다(National Library of Korea). 신문의 음식점 광고는 일정규모 이상의 음식점만이 제한적으로 노출된다는 한계는 있지만, 외식의 정착과 더불어 식문화 변화의 흐름을 보는 데는 유용하다 (Lee 2020). 마산지역의 경우 산업화 초기에 상대적으로 수 도권에 비해서 음식점 광고가 많다. 또한 음식점 광고에는 취급 음식에 대한 자세한 정보와 홍보문구가 있어서 비교적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검색으로는 음식점 광고를 다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1967년부터 1982년까지의 약 16년 동안의 신문지면을 직접 살펴보고 전 지면에 실린 음식점 광 고를 분석하였다.
중심 문헌자료와 함께 그 외의 문헌으로는「ChosunIlbo (朝 鮮日報)」,「Dongailbo (東亞日報)」,「Jungangilbo (中央日 報)」,「Maeilgyeongje (每日經濟)」,「Gyeonghyangsinmun (京 鄕新聞)」,「Gyeongnamdominilbo (慶南道民日報)」등 중앙 과 지역 일간지, 잡지는 「Sunday Seoul (선데이 서울)」, 「Wolgansikdang (월간식당)」, 공식적인 자료는 「Masansitonggyeyeonbo (馬山市統計年報)」,「The Twenty Five Years History of Masan Free Export Zone (마산수출자유지역이십 오년사)」,「The Twenty Years History of Hanilhapseom (한 일합섬이십년사) 」,「Korea Food Service Yearbook (한국외 식연감)」, 그리고 마산 관련 회고를 볼 수 있는「The Story of Changdong (창동야화)」,「Stories from the Sisters (언니 들에게 듣는다)」등을 이용해서 최대한 당시 마산 외식산업 에 접근하고자 했다.
자료분석을 통해 당시 마산 외식업의 특성을 살펴보면서 그 밖에 다양한 문헌 자료를 종합해서 다음과 같은 연구 문 제들을 짚어보고자 한다.
‘마산상공명감’과 지역 일간지에 광고한 업체의 수와 음식 종류는 각각 어떠하며 특징은 무엇인가? 연구시기 동안에 나 타난 변화는 무엇인가? 그리고 두 자료 분석 결과의 공통점 과 차이점은 무엇인지를 비교하고자 한다. 또한 바다에 인접 해 있는 마산의 지역음식은 어떤 것이 있었는지 알아보려고 한다. 예를 들어 마산의 대표적 향토음식으로 꼽히는 아귀찜 이 본격적으로 상업화된 시점은 언제이고, 그 외에 어떤 향 토음식이 외식상품화 되었는가? 그리고 마산 지역에 오랜 세 월에 걸쳐 영업하고 있는 노포(老鋪)는 현재 어떤 곳이 있으 며 특징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당시 전 반적인 외식산업의 규모와 변화의 큰 흐름을 파악 할 수 있 으며, 마산지역 외식업의 변화와 특성을 알 수 있다.
III. 결과 및 고찰
1. 마산의 인구 변동
1960년대 후반부터 마산시는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근 로자의 유입이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1960년대 초에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면서 1967년 1월에 국내 섬유 산업의 선구자인 한일합섬의 가동을 시작하고 4월에는 한국 철강, 70년에는 수출자유지역이 설치(Gyeongsangnamdomasangyoyukcheong 1995)되어 많은 인구 유입의 원동력이 되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마산 인구 변화는 <Table 1>과 같다.「Masansitonggyeyeonbo (馬山市統計年 報)」1976년과 1980년 판을 비교, 종합하였고 수치가 다르 게 되어있는 부분은 괄호 안에 따로 표기하였다.
1968년 172,574명이던 마산 인구는 ‘마산수출자유지역’이 설립된 1970년에 190,992명이 되었고 공장의 입주, 가동이 정상화되어 기반 조성이 끝난 1975년에는 371,937명으로 증 가하였다(Masansitonggyeyeonbo 1976). 이렇게 전국에서 손 꼽히는 급성장 도시로 주목받게 된 당시 마산의 도심 분위 기에 대한「Jungangilbo (中央日報)」 2017년 6월 15일자 기사는 다음과 같다.
1970년대 전국 7대 도시였던 마산의 창동과 오동동은 90년대까 지 사람들로 붐볐다. 주말에 거리로 나가면 가만히 서 있어도 사람들에 의해 떠밀려 다닐 정도였다. 당시 마산수출자유지역 근로자 3만5000명과 한일합섬 근로자 1만5000명 등 5만명(전 체인구 38만 여명)이 퇴근 이후나 주말·휴일 창동과 오동동 일 대 다방·음식점·술집·재래시장 등을 찾으면서 누린 호황이었다.
당시 국내 대표 섬유기업이었던 ‘한일합섬’은 최고 1만 5 천여 명에 달하는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었으며, 1977년 가 동을 시작한 ‘경남모직’ 마산공장에도 최고 3천 2백여 명에 달하는 노동자가 있었다(Hanilhapseom Historiography Institute 1986).
한편 1974년 마산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창원에 대규모 국 가산업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하면서 마산, 창원, 진해로 이주 하는 인구는 크게 증가하였다. 여성 노동자를 선호하는 기업 들이 입지한 마산과는 달리 창원은 남성 고용이 집중되는 기 계산업 집적지로 육성되면서 지역 일대에 대규모 남성노동 시장이 성장하였다(Heo 2014).
또한 “1973년 남해고속도로의 개통과 77년 구마고속도로 의 개통은 마산에 사통팔달로 길을 열어주었고 연이어 77년 전 시민의 숙원이던 마산역 건설, 시외버스터미널 이전하고 공단이 들어선 지역에 8차선 중앙도로를 뚫었다. 도로 양면 에 고층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서면서 불과 몇 년 만에 동마 산이라 불리는 신시가지가 탄생하였다(Lee 1991)”라고 하여 교통의 발달이 당시 역동적인 마산 발전에 박차를 가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도시화, 산업화 과정에서 젊은 층 근로 자의 대거 유입, 교통망의 확장으로 인한 신시가지의 탄생 등은 마산지역 외식산업에 큰 영향을 끼치고 여러 변화를 가 져왔다.
2.「Masansanggongmyeonggam (마산상공명감)」에 기록 된 음식점
「마산상공명감」1968년판에는 “1967년 12월 31일 현재 마산시내에서 일정한 점포 공장 사업장을 가진 상공업자(年 間營業稅算出額이 5,000원 이상인 자)에 한하여 집록(輯錄) 하였습니다.”라고 되어있다(Masansanggonghoeuiso 1968). 그런데 1971년판은 “마산 시내에서 일정한 점포 공장 사업 장을 가진 상공업자(Masansanggonghoeuiso 1971)”라는 기 준만 밝혔고, 그 이후에 발간된 상공명감에서는 목록의 기준 이 언급되지 않았다.
연구대상 기간 동안에 발행된 5권의 마산상공명감에 기록 된 음식점을 분류하여 정리하면 <Table 2>와 같다. 음식점 목록은 공통적으로 서비스업에 속해있었으나 세부적인 음식 항목의 분류는 모두 달랐다.
<Table 2>에서는 ‘한식’, ‘일식’, ‘중식’, ‘양식’, 그리고 ‘한 식+일식’, ‘일식+양식’, ‘한식+일식+양식’, ‘분식’, 그 외 1차 자료의 분류가 모호한 것은 ‘기타’로 하였다. 그리고 음식점 이름이 누락되고 점주 이름만 있는 경우도 있어서 음식점 수 와 더불어 점주 수는 괄호 안에 따로 기입하였다.
총 음식점 수는 1,597개로 나타났으며 1968년 123개, 1971년 132개, 1974년 275개, 1977년 248개, 1981년에는 819개까지 늘어났다. 분류항목에서 한식이 674개(42.2%) 업 소로 가장 많았고, 기타가 573개(35.9%), 중식이 258개 (16.2%), 분식이 54개(3.4%), 일식이 9개(0.56%), 양식이 8 개(0.5%), 일식+양식이 13개(0.81%), 한식+일식+양식이 7개 (0.4%), 한식+일식이 1개(0.06%) 업소로 나타났다.
중식이 총 258개 업소인 것에 비해 일식이 9개, 양식이 8 개 업소에 그쳐 이 시기에 중식당이 크게 늘었음을 알 수 있 다. 이를 반영하듯 1974년에는 중국음식점을 따로 분류하기 시작했는데 45개 업소 이름과 점주 이름, 그리고 업소 이름 이 누락된 8명의 점주 이름이 나온다. 그리고 분식은 1977 년에 별도의 항목이 되었으며 1981년에는 53개 업소로 대폭 증가했다.
「마산상공명감」에 최소 3회 이상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업소 명단을 정리하면 <Table 3>과 같다. 각 연도의 상공명 감에 업소 이름이 있으면 ‘○’으로 표기하였고, 상공명감에 는 기록이 없으나 기타 여러 자료에서 해당 연도에 영업이 확인되는 업소는 ‘△’으로 표기하였다. 도중에 대표자명, 전 화번호, 주소, 업종이 변경된 경우가 있는데, <Table 3>에서 는 가장 음식점 수가 많은 1981년 기록을 기준으로 하였다. 1981년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나이론’과 ‘일락식당’은 1974 년, 그리고 ‘시민식당’, ‘일신식당’, ‘진주집’은 1977년에 기 록된 내용이다.
이 중 ‘귀거래(歸去來)’는「마산상공명감」1968년판부터 1981년까지 지속적으로 목록에 나타나는데,「Gyeongnamdominilbo (慶南道民日報)」 2013년 5월 22일자 기사에 의하 면 1953년 문을 열었고 1960년 12월 1일 영업허가를 받은 ‘마산영업허가 1호점’이다. 하지만 2013년 5월 18일을 마지 막으로 60년 만에 영업을 종료하였다. 또한 기사에는 ‘귀거 래’라는 상호명에 대해서 김형윤 당시 마산일보 사장이 도연 명의 ‘귀거래사’를 차용한 옥호를 창업주 방성조 사장에게 건냈다고 소개되었으며, 주메뉴는 “소고기 육수에 일식 어묵 을 넣은 어묵탕, 옛날식 초밥, 생우동”이었다.
<Table 3> 목록 가운데서 현재까지 운영 중인 곳은 ‘골목 초밥’, ‘남성식당’, ‘불로식당’, ‘함흥집, ‘부엉이집’이다. 이 중 ‘골목초밥’은 상공명감 목록에 ‘한식’이라고 잘못 기록되 어 있어 일식으로 바로 잡았으며 현재는 ‘삼대초밥’으로 상 호가 바뀌어 영업 중이다(Lee 2010).
이에 덧붙여서 마산에 관한 회고를 담은 에세이집「The Story of Changdong」에서는 30-50년의 역사를 가진 현존하 는 음식점으로 ‘정근식당’, ‘고려횟집’, ‘삼도집’, ‘화성갈비’, ‘오복보리밥’, ‘부림곰탕’, ‘명동손국수’, 그리고 중국 음식점 으로는 ‘북경성’, ‘영생각’, ‘전앙장’을 소개하였다(Lee 2020). 이 가운데서 ‘정근식당’은 1981년 상공명감에서 “박기효, 산 호 10-6, 78.3.21”라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3. 지역일간지에 광고된 음식점
「Gyeongnammaeilsinmun (慶南每日新聞)」(1967.1.1.-1969. 3.14.),「Gyeongnammaeil (慶南每日)」(1969.3.15.-1980.12.31.)」, 「Gyeongnamsinmun (慶南新聞)」(1981.1.-1982.12.31.)에 실 린 16년 동안의 음식점 광고를 분석한 결과는 <Table 4>와 같다. 연구기간 동안 광고에 나타난 음식점의 수는 총 313개 이다. 1시기 1967-1971년 62개, 2시기 1972-1976년 97개, 3시기 1976-1982년 154개 업소가 광고에 나타났다.
연구기간 동안 100회 이상 광고를 한 음식점은 총 7곳으 로 ‘현대정(172회)’, ‘나이론(159회)’, ‘미도(157회)’, ‘오양식 당(144회)’, ‘오복장(124회)’, ‘평양면옥(124회)’, ‘삼오정(109 회)’이었다. 이 업소들의 메뉴를 살펴보면 ‘현대정’과 ‘미도’ 는 일식+양식이고, ‘오양식당’, ‘오복장’, ‘삼오정’은 모두 불 고기 등 고기구이와 냉면을 파는 한식당, 그리고 ‘평양면옥’ 은 냉면 전문 업소였다. 또한 ‘나이론 회관’은 1960년대 초 부터 한식, 일식, 양식에 이르는 다양한 음식을 유행에 따라 순발력 있게 상품화했던 업소(Lee 2020)였다. ‘나이론 회관’ 은 1968년「Gyeongnammaeilsinmun (경남매일신문)」이 주 최한 제1회 업종별 상점 인기투표 “최고인기상”을 수상 (1968.6.1.)했고, 1969년 제2회 “No. 1 인기점포”에도 선정 (1969.10.26.)되었다.
총 313개 음식점의 취급 메뉴를 살펴보면 <Table 5>에 나 타난 것처럼 단일메뉴 226개(72.2%), 복합메뉴가 42개 (13.4%), 기타가 45개(14.4%) 업소였다. 단일메뉴 중에서는 한식이 165개(52.7%)로 가장 많았고 일식이 29개(8.6%), 양 식이 24개(7.7%), 중식이 8개(2.6%) 업소였다. 복합메뉴에서 는 3중 복합메뉴인 한식+양식+일식이 19개(6.1%), 일식+양 식이 6개(1.9%), 한식+일식이 8개(2.6%), 한식+양식이 9개 (2.9%) 업소였다.
앞서 살펴본 「마산상공명감」과 지역일간지 음식점 광고 분석의 결과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총 음식점 수는 마산 상공명감에서 1,597개 업소, 신문 광고에서 313개 업소가 나 타났다. 두 자료 모두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한식 당으로 마산상공명감과 신문광고에서 각각 674개(42.2%), 165개(52.7%)였다.
한편 두 자료에서 큰 차이를 보인 항목도 있는데, 마산상 공명감에는 일식당이 9개, 양식당이 8개 업소인 것에 비해, 중식당은 258개 업소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에 비해 신문 광고에서는 일식당 29개, 양식당 24개로 나타났고 중식당은 8개에 그치고 있다. 이것을 통해 그 시기 상대적으로 구매력 이 있었던 신문구독자들에게 적극적인 광고를 했던 것은 일 식당과 양식당이었으며, 반면 중식당은 그 수가 많았으나 대 부분은 신문에 광고를 할 정도의 규모가 아닌 소규모 대중 식당이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분식의 경우는 마산상공명감에서 54개가 나타났고, 신문에 는 11개 업소가 광고를 했다. 신문광고를 한 분식점의 경우 는 ‘종합분식 맘모스’, ‘명동분식센타’, ‘대진종합분식’ 등 비 교적 큰 규모의 종합 분식센터의 형태였다. 또한 특이점으로 는 기타로 분류된 음식점 중에 ‘통닭센터’, ‘영양센터’ 등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통닭구이 전문점이 두 자료에서 모두 많 이 나타났다.
4. 마산 지역 외식업의 특징
문헌분석 결과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한식, 일식, 중식, 양 식, 그리고 기타음식점으로 나누어 마산지역 외식업의 특징 을 정리할 수 있다.
1) 한식 음식점
Lee(2020)의 연구에 의하면, 앞선 시기인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마산지역 한식당의 특성은 곰국의 전통 이 이어져 내려오며, 피난민의 영향으로 냉면이 확산된 것을 들 수 있다. 이후 시기인 본 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은 변화를 볼 수 있다.
(1) 한식당의 육식 메뉴 유행과 냉면과의 조합
한식당 메뉴로 고기구이가 많이 나타났고 특히 ‘불고기’가 유행했다. 앞서 언급했던 1968년과 1969년 연속 ‘경남신문 선정 인기업소 1위’였던 ‘나이론 회관’은 1967년 1월 13일 경남신문 광고에서 “연하고 부드러운 육절기제 불고기 전문 ”이라고 광고하였고, 뒤를 이어 1970년에 1위 인기업소가 된 ‘화성회관’ 역시 1967년 9월 27일 광고에 “한식의 원조 대중 식사, 한국요리, 즉석불고기”를 대표 메뉴로 내세웠다.
1981년 마산상공명감 기록에서 음식점 상호 자체에 ‘불고 기’가 붙는 곳은 ‘장수불고기’, ‘마산불고기’, ‘오륙도불고기’, ‘월영불고기’, ‘유림불고기’, ‘진미불고기’로 6개 업소이다.
또한 고기구이와 더불어 냉면의 조합을 많이 볼 수 있다. <Figure 1>은「Gyeongnammaeil (慶南每日)」1972년 4월 17 일 “시내 일류식당 안내”광고인데, 6개 업소 중에서 불고기 또는 불갈비 취급 업소가 5곳이며 그 중 4곳은 냉면도 파는 곳이다. 그 외에도 「Gyeongnammaeil (慶南每日)」에 광고 한 ‘천락식당’(1967.11.23.), ‘제일옥(1967.12.11.), ‘이학식당’ (1969.4.16.), ‘평양면옥’(1971.1.1.), ‘삼오정’(1971.12.7.), ‘오 복장’(1972.11.15.), ‘장수불고기’(1977.12.16.) 등이 불고기 또는 불갈비와 냉면의 조합 업소였다.
(2) 지역 특화음식의 성장
이 시기 외식업소 메뉴로 등장한 마산지역의 향토음식은 ‘아귀찜’, ‘꼬시락’, ‘회백밥’, ‘충무김밥’, ‘미더덕찜’, ‘진주 비빔밥’을 들 수 있다.
마산의 대표적인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은 아귀찜이 가장 먼저 상업화된 것은 ‘진짜초가집’이며 1965년에 창업한 것으 로 알려져 있다(Lee 2019). 그런데 1981년 상공명감에는 ‘진 짜초가집’에 대해서 “대표자 이수석, 오동동 151-5, 설립년월 일: 63.1.30”이라고 되어있다. 하지만 상공명감의 창립년월일 은 오류가 많아서 추후 확인이 필요하다.
그리고 1973년 8월 28일자 「Chosun Ilbo (朝鮮日報)」에 서는 “오동동에서 음식점을 해오던 구봉악씨가 막거리 안주 로 아귀찜을 판 ‘구강집’”이 보도되었는데, 마산상공명감 1971년판에 상호가 누락된 채 “구봉악, 마산시 오동동”으로 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981년판에는 “구봉악, 오동동 185, 0492, 70.1.1 한식”이 확인되어 적어도 10년 이상 영업 했음을 알 수 있다.
1981년 마산상공명감 자료 중에서 상호자체에 ‘아귀찜’이 라는 단어가 있는 집은 ‘아구찜집’, ‘해성아구찜짐’, ‘마산아 구찜집’, ‘우정아구찜’이 있다.
한편 「Gyeongnammaeil (慶南每日)」에서 아귀찜 전문점 광고가 처음 실린 것은 <Figure 2>에서 볼 수 있듯이 1973 년 1월 30일이다. 이날을 시작으로 “아구찜 전문”으로 ‘마산 옛날 백초가집’이라는 상호의 음식점이 1973년에만 11차례 경남매일에 광고를 하였다.
당시 유명했던 또 다른 마산지역 음식은 ‘꼬시락’이었다. 망둥어과의 이 생선은 주로 회로 많이 먹었는데,「The Digital Local Culture Encyclopedia of Korea (韓國鄕土文 化電子大典)」에서는 ‘꼬시락회’를 “경상남도 창원 지역에서 농어목 망둑어과의 문절망둑[꼬시락]으로 만든 생선회”로 설 명하고 있다(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2015년 7월 17일자「Gyeongnamsinmun (慶南新聞)」에서 꼬시락에 대해 마산 출신 박형권 시인의 다음과 같은 글을 볼 수 있다.
‘꼬시락’을 아시는가? 마산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다. 눈이 약 간 튀어나오고 대가리와 입이 유난히 큰 이 물고기가 한때는 ‘봉암 꼬시락’이라는 이름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꼬시락의 어 원을 살펴보면 ‘꼬시다’라는 마산지방의 사투리에서 왔다는 걸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실제 꼬시락은 구워놓으면 매우 고 소하고 맛이 있다.(중략) 낚시를 좋아하는 아버지를 따라 봉암 에 간 것은 한창 수출자유지역이 터를 닦을 때였다.(중략) 그 때 아버지는 한일합섬에 다녔고, 우리 집은 합성동이고 해서 가까운 낚시터를 아버지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봉암에는 횟 집이 즐비했다. 아버지는 꼬시락을 낚을 만큼 낚아놓고서도 꼭 횟집에 들러 꼬시락회를 한 접시 시켰다.
‘마산고등학교 30회 동창회 다음카페’에는 1960-1970년대 “옛 봉암다리 밑 꼬시락횟집 모습”이라는 제목의 <Figure 3> 사진도 볼 수 있다(Masan High School Alumni 30).
꼬시락 전문점으로 「Gyeongnammaeil (경남매일)」에 광 고한 곳은 ‘산수장’(1969.6.25), ‘봉암장’(1969.6.25.), ‘여사장 집’(1971.8.7.)등이다. 꼬시락은 마산 인근 뿐 아니라 멀리 서 울, 부산, 대구, 광주 등지의 미식가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 후 마산만이 심하게 오염되면서 봉암 꼬시락도 1970년대 중반 이후로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Changwon City).
그리고 마산, 부산 등 바닷가 인접 지역에서 특별하게 나 타나는 음식 중 하나는 ‘회백밥’이다. 2007년 12월호 「Wolgansikdang (月刊食堂)」에서는 60년의 역사를 가진 ‘부 산명물횟집’의 대표메뉴 회백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 였다(Korea Food Service Information).
부산명물횟집이 60여년이 넘도록 유명세를 타는 가장 큰 이유 는 바로 회백밥이다. ‘회백밥? 혹시 회비빔밥인가’라고 생각하 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회백밥은 회비빔밥과 엄연히 다르다. 회 비빔밥이 말 그대로 밥에 작은 깍두기 처럼 썬 회를 넣고 고 추장에 비벼먹는 비빔밥의 일종이라면 회백밥은 회 한 접시에 밥, 생선뼈국, 그리고 몇 가지 반찬들이 함께 나오는 일종의 백 반과도 흡사하다. 60여 년 전 김복덕 할머니가 처음 개발한 회 백밥은 역대 대통령을 비롯해 부산에 온 유명인사들은 반드시 들르는, 업소명처럼 부산의 명물 횟집이 되었다. 이곳은 자연 산 도미와 광어만을 고집한다. 매일 아침 살아있는 도미와 광 어를 잡아 한 두 시간 정도 숙성시킨 후 제공하는 회 맛은 막 잡아 바로 먹는 회의 쫄깃함 보다는 숙성된 생선의 감칠맛이 강하다.
회백밥은 회가 밥 반찬의 한 가지가 된다는 점에서 한식, 숙성된 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일식의 성격이 결합된 형태 라고 볼 수도 있다. 마산에서도 한식당인 ‘삼오정’(1973.2.17) 과 ‘부엉이집 식당’(1973.5.23.) 등이「Gyeongnammaeil (慶 南每日)」에 회백밥을 메뉴로 광고했다.
그 밖에도 「Gyeongnammaeil (慶南每日)」를 통해 “충무 김밥, 미더덕찜”을 내세운 ‘승리술센타’(1975.10.28.)와 상호 자체가 ‘진주비빔밥’(1982.12.8)인 진주비빔밥 전문업소 광고 를 볼 수 있다. 이처럼 이 시기 지역 고유의 향토음식을 전 문으로 하는 업소들이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2) 일식 음식점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마산지역 외식업에서는 일본 음식점이 강세를 보였으며, 일본식 용어를 많이 사용했 고 양식당에서도 일식화 된 양식을 판매하는 등 외식업 전 반에 끼친 영향이 컸다(Lee 2020).
이후 본 연구시기 신문광고에 나타난 일식당들의 특징을 보면 많은 업소에서 ‘정통 일본식’임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 였다. <Figure 4>에서 볼 수 있듯이「Gyeongnammaeil (慶 南每日)」이 선정한 “73년도 No. 1 인기점포”에 선정된 ‘방 자초밥’은 “순일본식 요리전문”(「Gyeongnammaeil (慶南每 日)」1973.9.11)임을 강조하였다. 또한「Gyeongnammaeil (慶 南每日)」의 광고에서 ‘송죽’은 “순일본식 전문”(1974.3.20), ‘금지’는 “순동경식초밥”(1974.7.24), ‘청림’은 “순일본식” (1974.7.3) 등 많은 일식당들이 일본식임을 강조했다.
3) 중식 음식점
1960-70년대 국가에 의한 ‘분식장려’는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로 값싼 밀가루가 도입되는 상황에서 밀가루 소비 증대 를 위해 국가가 우리 사회의 식량 소비의 패턴을 바꾸고자 한 국가동원 정책이었다(Kong 2008). ‘분식장려’로 인해서 1965년 우리나라 1인당 밀의 연간 소비량은 13.8 kg 이었는 데 1985년에는 7배 가까이 증가하였다(Song 1999). 새로운 식품이 한 나라 국민의 기호식품으로 정착하기까지 대개는 평균 100-200년의 시간적 경유를 통해 정착(Kim et al. 1998)된다고 볼 때, 이런 변화는 이례적으로 짧은 기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자장면으로 대표되는 중식이 크게 유행하 게 되었다. 무미일이 시행되는 동안 주로 백반을 팔아야 하 는 한식점은 타격을 많이 받았으며, 상대적으로 중국음식점 은 많이 성장했다(Kim 2009). 이런 분위기는 1969년 7월 3 일자 「Maeilgyeongje(每日經濟)」의 다음과 같은 글에서 느 낄 수 있다.
분식일에 중국음식점은 그들 특유의 고함을 더 지르면서 활기 띤 성시를 이루고 있으나 한식집은 한산하기 짝이 없는 까닭 은 한식집은 서민층을 위한 대중적인 분식이 극히 제한되어있 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분식일은 밀가루 조리법이 발달된 중 국 음식점을 위해서 마련된 것 같은 감이 없지 않다. (중략) 관 계당국은 보다 대중적인 한식분식 조리법을 지도하여 중국집 이 아니더라도 어느 한식점에서도 우리나라 고유의 맛을 음미 할 수 있는 아쉬움이 분식일을 당할때마다 여운을 남긴다.
중국음식점의 성장을 반영하듯이 마산상공명감에서도 1974 년부터 중국음식점을 따로 분류하였는데, 1974년 46개 업소 에서 1981년에는 173개로 급증하였다. 한 블로그에서는 당 시 마산의 유명했던 중국음식점에 관련된 다음과 같은 회고 를 볼 수 있다(Shutrumgeshuz 2013).
마산시내에서 제일 유명했던 중국음식점 중의 하나는 남성동 파출소 밑에 위치했던 쌍흥관이었다. 이곳은 90년대 초반까지 영업을 계속하다가 건물 주인의 빚에 따라 금융권에 저당 잡 힌 후 폐업되고 말았다. (중략) 중앙극장 밑의 리생원은 마산 에서 화교 중국인이 경영하던 오래된 중국집 중의 하나였다. 이 중국음식점의 주인은 다른 중국집과는 달리 이 집만의 특 화된 상술비법이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여름에 가지를 대 량으로 구입한 후 그것을 세로로 썰어 말려서 튀긴 후 우동과 짬뽕에 고명으로 넣어 서비스를 구사하는 전략적인 상술로 돈 을 왕창 벌었다. (중략) 이 집(춘화원)의 주인은 50년대 중반 부림동 근처에서 드럼통 위에서 호떡 장사를 하면서 짜장면과 짬뽕을 한 그릇씩 팔면서 돈을 벌어 모은 뒤 자수성가한 후 그 곳에 중국음식점을 열었다.
마산상공명감 1974년의 목록 중에서 위에서 언급된 중국 음식점을 확인 할 수 있다. ‘쌍흥관’은 “대표자 우원지, 남성 동 160, 2193”, 그리고 ‘이생원’은 “대표자 왕자의, 창동4, 5025”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춘화원’은 1981년판에 “대표 자 마세외, 추산동33, 2-4439”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대중 음식점 이외에도 고급 중식을 표방하는 ‘대진루’ 광고(1978.7.14.)를「Gyeongnammaeil (慶南每日)」에서 볼 수 있다. “일류 요리사 王재연”의 사진과 함께 “자유중국에 서 2명의 유명한 요리사를 초빙하여 고혈압 조절에 좋은 오 리고기 양고기를 순중국식 요리로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라고 하였다. 또한 「Gyeongnammaeil (慶南每日)」1980년 3월 22일에 ‘우성반점’은 특화된 “북경요리, 사천요리”를 광 고하였다.
4) 양식음식점
과거 해방 이후 1960년대 중반 시기에 마산지역 양식당의 특성은 한식, 일식과 함께 복합메뉴를 취급하는 곳이 많고 돈까스, 카레라이스 등 일본화된 양식이 주요 메뉴였다(Lee 2020). 하지만 그 이후 1970년대에는 ‘한밭양분식’ (「Gyeongnammaeil (慶南每日)」1980.11.22.)처럼 양식이 분식과 조합 을 이루는 경우가 많아졌고, 또한 메뉴가 다양해졌다. 이 시 기에 새롭게 등장한 것은 ‘햄버거’와 ‘피자’였다.
(1) 햄버거
서구 음식이 우리나라 도입되는 통로가 되었던 것 중 하 나는 주한미군을 통한 경험일 것이다. 1958년 무렵 미 8군 무대에서 활동하면서 햄버거 등 양식을 먹었다는 가수 현미 의 글은 다음과 같다.
미군부대 공연을 할 때면 특히 클럽에서 제공하는 햄버거를 먹 는 맛이 그렇게 황홀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입에 자주 대하기 시작하면서는 점차 시들해졌고 나중엔 제대로 만든 샌드위치 나 치킨에 커피를 곁들인 정식요리 등에 더 구미가 당겼다.
「Gyeongnammaeil (慶南每日)」의 첫 햄버거 광고는 1974 년 7월 18일자에 나타났는데, <Figure 5>의 ‘남궁 빅보이 햄 버거’가 “서구의 맛과 영양”이라고 홍보하였다.
‘빅보이(Big Boy)’는 영화배우 남궁원이 1971년 서울 명동 에 처음 문을 연 햄버거 브랜드이다(Kim 2017).
1972년 11월 5일자 「Sunday Seoul」에서는 “남궁스 Big Boy 햄버거” 광고를 볼 수 있는데, “72년 11월에 초대합니 다. 감미로운 음악과 낭만적인 무드 젊은이의 양지 빅보이!” 라고 했다. 메뉴는 “햄버거, 핫도그, 치즈버거, 함버거스텍, 후라이드치킨, 밀크세 , 아이스키림, 핫쵸코 ” 등이고, 위 치는 “명동 유네스코 회관 뒤”로 되어 있다.
1979년 ‘롯데리아’ 탄생 이전인 1971년에 이미 서울 명동 에서 ‘빅보이(Big Boy)’라는 햄버거 브랜드가 시작되었고, 1974년에는 마산지역까지 상륙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피자
「Gyeongnammaeil (慶南每日)」의 ‘성도(成都)’(1977.6.15.) 광고에서 “이태리 요리”, 그리고 ‘대진분식센타’(1976.4.26.) 광고에서 “특별메뉴 이태리 정식 450원”이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음식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런 데 <Figure 6>의 ‘형아’(1976.11.26.)에서는 “피자파이” 광고 를 볼 수 있다.
1967년 6월 30일자「Dongailbo(東亞日報)」기사를 보면, “제6대 박대통령 취임식 국빈 대접”에서 “구절판 등 한식 안 주 13종, 에그롤 등 중국식 안주 18종, 피자파이 등 양식 안 주 30종을 장만”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 피자는 ‘국빈용 안 주’였다.
피자의 한국 도입 초기 분위기에 대해서 박찬일 셰프는 다 음과 같이 소개했다(Park 2020).
피자는 당시 한국인에게 동경의 대상이던 미국 음식이었으며, 동시에 이탈리아라는 유럽의 뉘앙스를 가진 국제적 음식이되 가격은 비교적 저렴한 음식이었다. 본격적인 양식 레스토랑에 비하면 훨씬 싼 비용으로 국제적 음식을 먹는다는 자부심(?)을 주기에 충분했다. 서울의 경우 피자 전문 레스토랑은 아니지만, 1960-1970년대 호텔에 피자 메뉴가 간혹 등장했다고 한다. 워 커힐·반도·조선 호텔 등 당시 최고급 호텔은 외국인, 특히 미 국인(주한 미군)이 주로 묵는 호텔이었기에 이들의 기호에 맞 는 피자 메뉴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1960-70년대 ‘국빈용 안주’이자 ‘최고급 호텔메뉴’였던 피 자를 1976년 마산의 지역신문 광고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앞서 살펴본 햄버거와 함께 새로운 음식의 도입이 매우 빨 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Lee(1991)에 의하면, 1970년대 마산 은 “15세부터 59세까지, 이른바 생산연령층 인구가 시 인구 의 60%를 넘었고 취업인구의 절반 이상이 공업에 종사”하 는 도시였다. 새로운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높으며 구매력이 있는 이런 수요층이 있었기에 수도권 유행 음식의 빠른 수 용이 가능했을 것이다.
5) 기타 음식점
(1) 분식의 성행
국가적 분식장려 정책으로 마산지역 역시 쌀소비가 줄고 밀가루를 이용한 분식센타가 많이 생겨났다. 1972년 6월 8 일자 「Maeilgyeongje (每日經濟)」는 “마산부림곡물시장에 의하면 작년 동기(同期)만해도 쌀이 하루 1개 점포당 20-30 가마(80 kg들이)씩 매매되던 것이 요즘에 와서는 하루 1가 마 정도도 팔기 어려운 실정”인 반면, 밀가루는 1개 점포당 1-1백 50부대(22 kg들이)정도가 팔렸으나 올해는 약 2배가 넘는 3백 50-4백 부대가 팔리고 있는데 이는 “정부당국의 혼 분식 장려시책과 하루 1끼씩의 분식에 의한 식생활 개선의 영향”으로 “이 추세가 계속될 경우 쌀 도매업은 폐업이나 전 업이 불가피해질 것”이라고 보도했다.
줄어드는 쌀 소비에 반비례해서 늘어나는 것은 분식이었 다. 1970년대 초부터「Gyeongnammaeil (慶南每日)」에서도 분식센타 광고를 볼 수 있다. <Figure 7>의 ‘명동분식센타’ 는 “국가에서 장려하는 영양가 높은 분식”, “서울명동 특유 의 맛”이라는 광고 문구를 볼 수 있다(1972.3.9.). ‘맘모스 분 식센타’도 “최고의 영양식”이라고 광고를 했다(「Gyeongnammaeil (慶南每日)」1973.3.24.). 일본 음식점인 ‘미조리’ (「Gyeongnammaeil (慶南每日)」1972.5.13)의 광고에서도 “분식날 특 별메뉴”-온소면, 냉소면, 카레우동, 꼽창우동”이라고 하여 일 식당에서도 분식의 날 메뉴가 따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산지역에서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는 역사가 오래된 분식 점 중 ‘복희집’이 있다.「Gyeongnamdominilbo (慶南道民日 報)」2003년 4월 29일자 기사에 의하면, 복희집이 문을 열었 던 것은 1971년인데, 박옥희 사장은 “지금이야 남자분들도 많 이 오시지만 그때는 ‘금남의 집’이라고 불렀지예. 마(산)여고니 성지여고니 여학생들만 가득 차서 남학생들 들어오기가 민망 했을 겁니더.”라고 손님의 대부분이 여학생이었다고 했다.
1980년대 마산수출자유지역에서 일했던 여성 노동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은「Stories from the Sisters」에서도 당 시 ‘한일합섬’ 근로자였던 이연실의 분식집 관련 회고를 다음 과 같이 볼 수 있다(Masanchangwonyeoseongnodongjahoe 2015).
먹는 거라고 다 해봤자 밥이나 이런 게 아니고 분식, 튀김, 순 대, 떡볶이, 오뎅, 이런것들이죠.(중략) 사실 우리 기숙사의 밥 은 가스밥인가, 스팀밥이라 그래갖고 찜밥, 밥맛이 정말 없었 어요. 한 5년 된 쌀을 갖고 밥을 해주는 거 같애. (중략) 그런 거를 먹고 이래다보니 애들이 배가 고파갖고 늘 나가서 사먹 고 다섯끼 여섯끼 사먹고 그랬던 적이 있었죠.(중략) 일요일날 나가면 창동에, 부림시장 가운데 쭉 보면 때까리 없는 포장마 차들이 즐비하게 있지 않습니까. 서울집도 있고 부산집도 있고 토스트를 막 해요.(중략) 그 안쪽으로 들어가면 분식코너가 지 -인짜 잘됐거든요. 6.25 떡볶이 그때 있었죠. 여자애들이 떡볶 이 얼매나 좋아했어요. 순대 같은거 먹죠, 그다음에 잡채 같은 거, 우동은 또 끝내줬습니다. 그때는 라면보다 우동을 좀 많이 먹었던 거 같애요.
(2) ‘통닭센터’ · ‘영양센터’의 유행
「Korea Food Service Yearbook」에 따르면, 서울에서 통 닭구이를 파는 ‘영양센터’가 처음 선보인 것은 “1962년 명동 사보이호텔 옆에 문을 연 영양센터(Korea Food Service Information 2007)”가 그 시작이었다.
그 후「Maeilgyeongje (每日經濟)」1967년 12월 12일자 에 “서울명동 국립극장앞 자양쎈타”가 “연말연시 선물은 통 닭”이라고 광고를 시작했으며,「Maeilgyeongje (每日經濟)」 1967년 12월 22일자에는 “전기구이통닭 원조”라며 “서울 충 무로 영양쎈타”의 광고가 나온다. 1969년 4월 16일 「Maeilgyeongje(每日經濟)」기사에서도 “가끔 밖에서 식사 를 하게 되면 한식이나 양식집을 제쳐놓고 영양센터를 찾아 진다. 물론 통닭구이집. (중략) 날이 갈수록 느는게 통닭구이 집이지만 내가 즐겨찾는 곳은 충무로의 영양센터. 이곳에 발 길을 돌린지 벌써 4년이 넘었다.”라는 글을 볼 수 있다.
다음과 같은 「Sunday Seoul」 1969년 9월 7일자를 통해 통닭센터가 붐을 이뤘던 당시 분위기를 알 수 있다.
통닭‘센터’라는 묘한 이름의 음식점이 제철을 만난 듯 성업하 는 ‘닭고기 좋아하는 서울’.(중략) 일명 ‘꼬꼬센터’라는 이 통 닭센터의 느닷없는 붐은 어쩐 셈일까. (중략) 서울서 성업 중 인 통닭센터는 지금 줄잡아 5백 여 개소. 이 가운데 절반이 넘 는 3백 여 개소가 명동, 충무로, 종로, 무교동 등 도심지에 밀 집해 있다. 지난해 연초의 통닭센터수가 고작 10여 개소였으 니 불과 2년도 못되어 그 숫자가 50여 배로 늘어난 셈.
위의 기사들을 종합하여 볼 때, 서울의 경우 1960년대 초 에 처음 시작된 ‘통닭센터’가 중반부터 인기를 얻기 시작하 다가 후반에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마산지역에도 1960년대 말에 ‘통닭’ 혹은 ‘영양센타’ 라는 명칭의 업소가 많이 생겨난 것을 신문 광고를 통해볼 수 있다.「Gyeongnammaeilsinmun (慶南每日新聞)」1968년 8월 9일자 ‘마산영양센타’의 “전기통닭구이 신장개업”이라는 광고를 시작으로 1968년 9월 11일 ‘삼양통닭센타’는 “천하 일미 영양보존, 서울에서 조리사 특별 초빙 경양식과 음료” 라고 했다. 같은 업소가 1970년 12월 22일 광고에는 ‘삼양 영양센타’로 상호를 변경하면서 “전기꾸이 통닭으로 8년간 시민에게 봉사해온 유일한 영양업체”라고 하여 이 내용에 의 하면 60년대 초반부터 영업을 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서울 에 처음 영양센터가 생기는 시점과 거의 비슷하게 마산 지 역에도 시작되었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 외에도「Gyeongnammaeil (慶南每日)」광고를 통해 ‘뉴 -영양센타’(1970.11.19.)가 신장개업을 알렸고, ‘고려정’이라 는 한식집에서도 “전기구이 통닭을 특설(70.12.17.)”했다고 광고했다. ‘미락통닭센타(1973.7.27.)’, ‘OB영양센타(1974. 1.1.)’에 이어 ‘남도영양통닭센타(1977.8.6.)’는 “통닭의 백화 점”이라는 문구와 함께 “전기구이, 삼계탕, 백숙, 닭찜”을 한 꺼번에 취급한다고 광고하였다.
1981년판「마산상공명감 (馬山商工名鑑)」에서도 ‘서울영 양통닭’, ‘해주통닭’, ‘남경통닭’, ‘남도영양통닭’, ‘대구통닭’, ‘덕창영양센타’, ‘마산통닭’, ‘만골장영양센타’, ‘멍통구리통 닭’, ‘새서울영양통닭’, ‘부림통닭(부림)’, ‘부림통닭(창동)’, ‘성 미통닭’, ‘아미미통닭’, ‘OB통닭’, ‘용마통닭’, ‘원통닭’, ‘유 상통닭’, ‘일미통닭’, ‘중앙영양통닭’, ‘칠천도통닭집’ 이렇게 21개 업소가 기록되어 있어 마산지역 역시 통닭센터 붐이 일 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80년대 들어서면서 새롭게 등장한 것은 “켄터키 치킨”이었다.「Maeilgyeongje (每日經濟)」1981년 2월 4일 자에서는 “지난 70년대에 성업을 이루었던 치킨센터”의 “새 모습은 켄터키 치킨”이며 “치킨센터에서는 닭을 통째로 전 기에 굽는데 비해 켄터키치킨은 토막을 친후 양념을 무쳐 고 압으로 튀겨낸 것으로 값이 1쪽에 5-6백 원에 머물러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어 인기가 높다.”라고 차이점을 설명했다.
「Gyeonghyangsinmun (京鄕新聞)」1981년 1월 31일자에 서는 서울에서 유행하게 된 켄터키 치킨에 대한 기사를 볼 수 있다. “유행상점의 대표적인 예는 켄터키 치킨. 불황으로 폐점이 속출하는 가운데 켄터키치킨집은 월평균 1백 개 이 상 새로 생겨나는 등 폭발적 신장을 거듭했다. 지난해 2월께 서울에 한두 곳씩 생겨나더니 이제는 1천 여 점포가 성업중 이다.”라고 했다. 이렇게 서울에서 “켄터키 치킨”이 1980년 2월 정도에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1980년 11월 2일자 「Gyeongnammaeil (慶南每日)」광고를 보면, 이미 켄터키 치 킨 마산영업소가 있었고 시범 시식업소가 운영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두 지역의 시차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Maeilgyeongje (每日經濟)」1980년 10월 28일 기 사에 의하면 “최근 시중에 성업 중인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이 미국 본사와의 계약도 없이 상표를 도용, 정확한 조리법 도 모르는 채 마음대로 조리해 팔리고 있다. 이 같은 가짜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은 일부 수입상들이 닭을 튀기는 압력 기름솥만을 수입, 닭에 밀가루와 양념을 넣고 튀겨내 세계적 으로 유명한 본래의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과는 거리가 먼 것 ”이라고 했다. 켄터키 치킨 마산영업소와 미국 본사와의 계 약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국일영양센타(「Gyeongnamsinmun (慶南新聞)」1982.11.22.)’ 광고에서 “삼계탕, 백숙, 통닭, 켄 터키치킨”이라는 문구를 볼 때 켄터키 치킨을 프랜차이즈 개 념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여러 닭 요리 중 하나로 생각했다 고 여겨진다.
(3) 음식백화점의 출현
과거에는 한 식당에서 한식, 일식, 양식 등 다양한 음식을 판매했다면 이 시기에는 현재의 푸드코트 같이 여러 종류의 식당이 모여있는 형태의 ‘음식백화점’이 출현했다.
「Maeilgyeongje (每日經濟)」1981년 4월 11일자 기사는 서울지역의 변화를 보여주는데 “도심지에 선을 보였던 음식 백화점이 최근에는 변두리까지 확산, 우후죽순격으로 늘어나 고 있다.(중략) 급격히 늘고 있는 음식백화점 수는 서울에서 만 60-70개로 헤아려지고 있으며 슈퍼마키트등 다른 업종도 속속 음식백화점으로 전환하고 있다.”고 했다.
즉 서울에서 1970년대 말에 음식백화점이 생겨난 것으로 보이는데,「Gyeongnammaeil (慶南每日)」의 “마산최초 최 대의 음식백화점”이라는 ‘대진분식센타’의 광고 날짜가 1976 년 3월 12일이므로 서울과 비교할 때 전혀 뒤지는 느낌이 없 다. 130평의 대형홀에 “분식부, 경양식부, 만두부, 스낵부, 음 료수부”가 있으며 “마산 최초로 엘리베이터를 운행”하며 “매 일 인기 DJ가 교체 출연”한다고 광고하였다.
이외에도 ‘시식코너’(「Gyeongnammaeil (慶南每日)」1980. 5.23.)라는 업소의 개업 광고에서는 “마산의 명물”로 “불고기 코너, 설렁탕 코너, 만두 코너, 튀김 코너, 칼국수 코너, 순대 코너, 오뎅 코너, 볶은밥 코너, 중국식 코너, 경양식 코너, 비 빔밥 코너, 빈대떡 코너, 생과자 코너, 주류 및 음료수 코너, 냉면 코너”인 15개 코너에서 “약 150가지 음식류”를 판매하 며 개업기념으로 아이스크림 2,000개를 증정한다고 하였다.
또한 ‘음식백화점 종합분식맘모스’(「Gyeongnamsinmun (慶南新聞)」1982.4.26)도 개업을 알리며 “너무 큽니다! 160 평- 어휴 운동장 같구나!”라고 규모를 자랑하였다. 광고를 통 해 “분식부, 화식부, 양식부, 한식부, 만두부, 음료수”가 있었 음을 알 수 있다.
IV. 요약 및 결론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마산지역 외식업의 변화를 「마산상공명감(馬山商工名鑑)」과 「경남신문(慶南 新聞)」을 중심으로 살펴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연구기간 동안 발행된 5권의 「마산상공명감(馬山商工名 鑑)」에 기록된 총 음식점 수는 1,597개로 나타났으며, 1968 년 123개에서 1981년에는 819개까지 늘어났다. 분류항목에 서 한식이 674개(42.2%) 업소로 가장 많았고, 기타가 573개 (35.9%), 중식이 258개(16.2%), 분식이 54개(3.4%), 일식이 9개(0.56%), 양식이 8개(0.5%), 일식+양식이 13개(0.81%), 한식+일식+양식이 7개(0.4%), 한식+일식이 1개(0.06%) 업소 로 나타났다.
1967년부터 1982년까지 16년간 지역신문 광고에 나타난 총 음식점 수는 313개었으며 취급 메뉴를 살펴보면 한식이 165개(52.7%)로 가장 많았고 일식이 29개(8.6%), 양식이 24 개(7.7%), 중식이 8개(2.6%) 업소였다. 복합메뉴에서는 3중 복합메뉴인 한식+양식+일식이 19개(6.1%), 일식+양식이 6개 (1.9%), 한식+일식이 8개(2.6%), 한식+양식이 9개(2.9%) 업 소였다.
두 문헌의 분석 결과를 비교하면 총 음식점 수는 「마산 상공명감(馬山商工名鑑)」에서 1,597개, 신문광고에서 313개 업소가 나타났다. 두 자료 모두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한식당으로 명감과 신문광고에서 각각 674개(42.2%), 165개(52.7%)였다. 한편 「마산상공명감(馬山商工名鑑)」에 는 일식당이 9개, 양식당이 8개 업소인 것에 비해, 중식당은 258개 업소로 중식당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에 비해 신문 광고에서는 일식당 29개, 양식당 24개로 나타났고 중식당은 8개에 그치고 있다. 이것을 통해 일식당과 양식당은 신문광 고를 할 정도의 일정 규모의 업체가 많았으며, 반면 중식당 의 대부분은 소규모 대중식당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밖에 ‘분식센타’와 더불어 ‘통닭센터·영양센터’ 등의 이름으로 대 표되는 통닭구이 전문점이 「마산상공명감(馬山商工名鑑)」 과 신문광고에서 많이 나타났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도시화, 공업화로 인해 급속한 인구 증가가 일어난 마산지역 외식업의 변화를 그 이전 시기인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와 비교하 여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먼저 한식 분야에서 이전 시기에는 곰국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며, 피난민의 영향으로 냉면이 확산되는 경향을 보였 다면, 산업화가 진행되면서는 육식 메뉴가 늘어나며 불고기 등 고기구이와 함께 냉면의 조합이 유행되었다. 지역음식으 로는 ‘아귀찜’이 본격적으로 유행하여 현재에도 마산 대표 향토음식으로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한때 유명했던 ‘꼬시락’은 마산만의 오염으로 이제는 그 명성이 사라졌다. ‘회 백반’, ‘미더덕찜’, 그리고 인근지역의 ‘충무김밥’, ‘진주비빔 밥’도 마산에 유입되어 외식상품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식은 이전 시기에 외식업 전반에 걸쳐 일본 음식점이 강 세를 보였으며, 양식당에서도 일본식 양식을 판매하는 등 그 영향이 컸는데, 산업화 기간의 변화는 일식당들이 ‘순 일본 식’임을 강조하며 정통 일식을 표방하는 음식점들이 신문광 고에 많이 나타나며 고급화 경향을 보였다. 중식은 정부의 ‘분 식 장려운동’에 힘입어 중국 음식점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났 으며 대중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양식의 경우 과거에는 한식, 일식과 함께 복합메뉴를 취급 하는 곳이 많았고 돈까스, 카레라이스 등 일본화 된 양식이 주요 메뉴였지만, 산업화 시기에는 분식과의 조합이나 단일 메뉴화 경향을 보였다. 또한 ‘햄버거’와 ‘피자’ 등 새로운 서 구 음식이 도입되었다. 또한 기타 음식점을 보면, ‘분식센터’ 가 유행하고, ‘전기구이 통닭’ 전문점도 크게 증가했다. 그리 고 다양한 음식을 한 장소에서 맛볼 수 있는 대형 ‘음식백화 점’ 등이 생겨났다. 이런 새로운 변화는 수도권과 거의 시차 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빨리 도입되었는데, 마산지역이 산 업화, 대도시화 되면서 대거 유입된 젊은 층이 유행에 민감 하고 새로운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성향이었기 때 문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마산지역은 전통 있는 노포들이 오랜 역사를 이어오 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1940년대 말에서 1950년대 창업해 서 현존하는 음식점은 ‘골목초밥(삼대초밥)’, ‘불로식당’, ‘함 흥집’, ‘영생각’ 등으로 마산상공명감의 기록으로도 확인된다. 그 밖에도 마산상공명감과 기타 자료를 통해서 확인되는 30 년-50년의 역사를 가진 곳은 ‘남성식당’, ‘부엉이집’, ‘진짜초 가집’, ‘정근식당’, ‘고려횟집’, ‘삼도집’, ‘화성갈비’, ‘오복보 리밥’, ‘부림곰탕’, ‘명동손국수’, ‘북경성’, ‘전앙장’ 등이다.
마산지역 외식업에는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초까지 다 국적 혼종 메뉴나 일식의 확산과 함께 냉면의 유행 등이 나 타났다. 항구도시로서 일찍부터 일식이 발달해 있었고, 피난 민 유입으로 북한음식이 유입되었던 것이 영향을 주었다. 이 후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까지 서울의 새로운 음식 이 빠르게 유입되고 분식이 널리 확산되는 변화가 나타나는 동시에 새로운 지역음식의 발전이 나타나기도 했다. 급속한 산업화, 도시화가 이루어져 젊은 인구가 유입되고 서울과의 교통망이 확대되면서 빠르게 전국화가 나타났던 것이다. 한 편 아귀찜과 같은 해산물을 활용한 새로운 지역음식이 등장 해 전국화되고 이전 시대에 등장한 노포들이 굳건히 역사를 이어오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산지역의 외식업은 전국화 속에서도 지역적 특성을 잘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상 마산지역을 중심으로 외식산업사의 한 단면을 실증 적으로 살펴보았는데, 서울을 포함해서 다른 지역에 대한 연 구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심층적인 비교가 제대로 이루어지 지 못한 한계를 갖는다. 같은 남부지역의 바닷가 인접 도시 라도 사회적 여건과 교통망이 달랐던 다른 지역과의 비교나, 아예 자연적 조건이 다른 내륙 지역과의 비교도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이렇게 앞으로 여러 지역의 외식산업 연구가 축적 되어 지역간 비교연구가 활성화된다면, 한국 외식산업과 음 식문화를 총제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나아가 지역 외식산업의 연구 활성화는 한국음식 문화사의 지평 확장에도 기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