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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225-7060(Print)
ISSN : 2288-7148(Online)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Food Culture Vol.34 No.6 pp.651-670
DOI : https://doi.org/10.7318/KJFC/2019.34.6.651

Analysis of Regional Food Specialities Status in Korea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rough 『Specialities of Joseon (朝鮮の特産)』

Gyung-Hee Cha*
Department of Korean Cuisine, Jeonju University
Corresponding author: Gyung Hee Cha, Department of Korean Cuisine, Jeonju University, 303 Cheonjam-ro, Wansan-gu, Jeonju, Jeonbuk, 55069, Korea Tel: +82-10-3481-4580 Fax: +82-63-220-2736 E-mail: injeulmi@jj.ac.kr
November 4, 2019 November 19, 2019

Abstract


This study examined the status of food specialties in Korea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rough『Specialities of Joseon (朝鮮の特産)』. The book recorded a total of 164 areas and 317 specialties, focusing on five railway lines and branch lines on the Gyeongbu, Honam, Gyeongui, Gyeongwon, and Hamgyeong. Among the specialities, 211 species were included, excluding overlapping ones. The food specialties accounted for 100 kinds in 159 regions or 47.4 percent of the specialties. There were 47 food specialties in 47 areas of the Gyeongbu Line, 21 food specialties in 20 areas of the Honam Line, 32 food specialties in 40 areas of the Gyeongui Line, 26 food specialties in 15 areas of the Gyeongwon Line, and 33 food specialties in 42 areas of the Hamgyeong Line. Among the specialties, the amount of fish and their workpiece was overwhelmingly the largest. Next came processed goods of fruits, grains, and vegetables. In modern factories, corn, tomatoes, blueberries, and sardines were made of processed goods. Factories have been constructed for glass noodles, sugar, and soju. Specialities and processed goods produced in each region were brought to Japa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朝鮮の特産』으로 보는 일제강점기 식품 특산물 현황 분석

차 경 희*
전주대학교 한식조리학과

초록


    I. 서 론

    일제강점기는 1910년 8월 국권피탈로 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기까지 35년간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식민통 치를 당한 시대였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효율적인 식민 지배 를 위한 탄압정책, 영구예속화를 위한 고유성 말살과 우민화 정책, 경제적 수탈정책 등을 끊임없이 펼쳤다(Lee & Park 2006). 특히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까지 조선을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병참 기지로 삼고 인력 강제동원과 물자공출로 전력화하였다(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1996). 이로 인해 조선은 극심 한 식량난에 시달렸고, 조선인의 삶은 피폐해졌다(Lee 2019). 한편으론 일본인과 서구인들에 의한 서구식의 식품가공기술 도입으로 식품가공공장이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또 농작물 재배기술의 발달과 대량생산을 위한 농장이 세워지며 전통 적인 식문화가 근대적인 식문화로 전화되는 시기였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효과적인 물자 공출을 위해 다방 면에서 조선의 현황을 파악하였고, 그 결과물들이 조선총독 부와 산하기관에서 발행되었다. 그중 하나가Specialities of Joseon: Which and Where (朝鮮の特産どこに何があるか) (이하 朝鮮の特産)이다.朝鮮の特産는 사토 사카에다 [佐藤技]가 1933년에 저술한 책이다. 사토 사카에다는 당시 조선총독부 철도국 영업과에 10년 가까이 근무하며 화물운 수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미 1932년에 A Practical Study on the History of Joseon Economic History (朝鮮經濟史の實踐的硏究-大量貨物はどう動く)를 저술하였으며, 일제강점기 조선의 산업 경제적 상황을 한눈 에 파악하고 있었다(Sato 1932).

    사토 사카에다는 책의 출간에 대해 세 가지의 전제를 달 았다. 첫째 저술은 철도국 조사 내용에 기반을 두고, 저자 자 신이 조선 여행을 더하여 관점과 표현이 일치하도록 하였다. 두 번째 책에 수록된 품목은 조선에서 일반적으로 대량 생 산되는 물품보다 각지 특산품에 초점을 두었다. 세 번째 책 의 서술순서는 한반도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는 지리적 방 향에 따랐다. 이는 책의 첫 페이지에 “관부(關釜) 연락선(連 絡船) 8시간, 건너면 조선의 맑게 갠 하늘, 기름진 벌판으로 이어지는 13도”에서 알 수 있듯 일본인들은 시모노세키항에 서 배를 타고 부산항으로 입국하였고, 부산에서부터 기차로 한반도의 여행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남쪽에서 내려 북쪽으 로 여행 할 일본인 여행자 또는 시찰자에게 노선 주변 산업 안내, 화물 안내를 하고자 한다.”라는 대목에서 이 책의 저 술 목적이 더욱 명확해진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식민지 홍보에 열을 올렸고, 그 결과 조선 관광안내서의 발간이 붐을 이루었다. 1905년 경부선과 경의선을 개통하며 철도국은Joseon Railway Guidance (朝 鮮鐵道案內), 1915년, 1918년, 1921년에Joseon Railway Travel Guide (朝鮮鐵道旅行案內), 1934년에 Report on travel to Joseon (朝鮮旅行案內記) 등을 발행하였다(Sul JH ed. 2018). 이들 책에는 조선관광을 위한 관광지 사진과 지 도, 지역별 산업현황과 풍습, 숙박시설 등 수많은 정보를 실 었다. 하지만 朝鮮の特産은 철도 노선별로 지역을 특산 물을 소재로 하였다는 점에서 기존의 서술과는 다른 관점의 조선 홍보 책자였다. 즉朝鮮の特産은 산업 경제적 측면 에서 당시 조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뿐만 아니라 특산물의 명칭, 용도와 품질, 재배면적과 생산량, 가격, 가공품 공장이 나 조합 설립자, 설립연도 및 규모, 자본상태, 원료 수급처, 철도 운송량과 운임비, 배송현황 등의 전국적 또는 일본과의 비교 등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어 기존의 물산지(物産志)와 차별된다.

    본고는朝鮮の特産를 통해 1930년대 수탈의 대상이 되 었던 조선의 농산, 수산, 축산, 임산 식품의 특산물 현황을 살펴보았다. 朝鮮の特産에서 다룬 경부선, 호남선, 경의 선, 경원선, 함경선 5개 철도 노선을 따라 총 164개 지역의 특산품 현황을 분석 고찰하여, 일제강점기 조선의 식품 특산 물과 특히 일본인들에 의해 식품가공 공장이 세워지는 근대 화의 면모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나라 근대 식품산업 연구에 기초자료를 제공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II. 연구내용 및 방법

    1. 연구대상 문헌 소개

    朝鮮の特産은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에 소장되 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본은 PDF로 서비스되고 있는데, 416~417쪽이 한글로 ‘빈면’으로 표기되며 유실되어 있었다. 아마도 PDF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유실된 페이지를 파악하 고 한글로 공란을 표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국회도서 관 소장본에는 책의 유실부분 없이 모든 부분의 보관 상태 가 양호하였다.

    책의 크기는 가로 12 cm, 세로 18.5 cm로, 총 624쪽 분량 이었다. 1933년 5월 5일 발행으로 푸른색의 하드커버로 장 전되어 있었다. 전체 일본어(日本語)로 표기되어 있고, 본문 은 한쪽에 13줄씩 한줄 당 37글자씩 세로쓰기로 기록되었다. 책의 발행처는 조선철도협회(朝鮮鐵道協會)이고, 정가는 1원 80전(金壹圓八十錢)으로 되어있었다. 국회도서관 소장본의 경 우 표지에 파란색 펜글씨로 저자와 책 제목이 필사되어 있 었다.

    책의 본문은 조선의 주요 5개 철도노선을 중심으로, 남에 서 북으로 위치한 각 지역별로 산출되는 특산물을 기록하였 다. 경부선(京釜線)은 경전남부선(慶全南部線), 동해중부선(東 海中部線), 경인선(京仁線)을 포함하여 47개 지역, 호남선(湖 南線)은 광주선(光州線), 경전북부선(京全北部線)을 포함하여 20개 지역, 경의선(京義線)은 평양탄광선(平壤炭鑛線), 평남 선(平南線), 평원선(平元線), 평원선(平元線), 만포선(滿浦線) 을 포함하여 40개 지역, 경원선(京元線)은 동해북부선(東海 北部線)을 포함하여 15개 지역, 함경선(咸鏡線)은 도문선(圖 們線), 대간선(大幹線)을 포함하여 42개 지역이었다. 각 철도 노선마다 지선을 포함한 각 지역은 본문 서술 전 특산물 목 록이 정리되어 있었다. 본문은 각 철도 노선별 지역 특징과 특산물 정보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본문에는 설 명되어 있으나, 지역의 특산물 목록에 누락되었거나, 목록에 는 있으나, 본문 설명이 누락된 경우도 몇몇 있었다. Figure 1

    책의 서문은 두 사람에 의해 작성 되었다. 먼저 모로도미 시카시로[諸富鹿四郞]는 1915~1933년까지 조선 철도국에 근 무한 저자의 상사였다. 그는 사토 사카에다가 조선 철도국 영업과에 10년 근무하였으며, 화물업무를 맡아 조선의 경제 사정에 대해 매우 해박하여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다고 칭찬하였다. 이미 조선을 소개하는 책자는 많이 있지 만, 대부분 인정, 풍속, 명소, 유적지 등에 국한된 한계를 벗 어나, 만주국 건설과 함께 조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즈음 에朝鮮の特産의 발간이 매우 시기적절하다고 추천의 의 사를 밝혔다. 두 번째 서문 작성자는 와쓰지 히로키[和廣樹] 는 오사카 아사히신문사 경성지국에 근무하던 언론인이었다. 그는 사토 사카에다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특산물에 주 목하였고, 이동경로와 전설, 풍습을 정확한 숫자로 서술하였 기에 이 책의 발간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 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저자는 매우 꼼꼼하며 자신의 직무에 철저한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2. 연구방법

    본 연구를 위해朝鮮の特産에 기록된 자료는 내용분석 (content analysis) 기법을 이용하였다(Yu & Kim ed. 1995). 내용분석을 위해 연구목적에 부합되도록 양적, 질적 분석을 위한 유목을 분류하였다. 유목은 첫째 각 철도노선의 지역별 로 전체 특산물의 물종과 수량을 파악하였다. 두 번째 지역 의 특산물을 식품 특산물, 조리를 위한 식기 및 조리용구, 기 타 특산물로 분류하였다. 이 중 식품 특산물만을 구별하여 특산물과 그 가공품으로 나누어 추출하였다. 추출된 텍스트 는 곡류, 두류, 서류, 채소류, 버섯류, 해조류, 과실류, 수육류, 조육류와 난류, 어패류, 우유류, 양념류, 주류 등의 식품군과 가공품으로 분석하였고, 특산물의 산지, 생산 현황, 가격, 유 통 형태, 배송량과 배송지 등을 살폈다. 분석된 내용은 선행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고찰하였다.

    III. 결과 및 고찰

    1. 지역별 특산물 현황

    조선 철도 경부선, 호남선, 경의선, 경원선, 함경선의 5개 노선과 지선을 중심으로, 남에서 북으로 위치한 총 164개 지 역의 특산물이 기록되어 있었다. 164개 지역에서 317종의 특 산물이 기록되어 있었다. 특산물 중 중복되는 물종을 제외하 면朝鮮の特産에 기록된 특산물은 총 211종이었다. 이중 식생활관련 특산물은 117종으로 전체의 55.5%였는데, 식품 특산물 100종이 159개 지역에서 기록되어 전체의 47.4%였 고, 식기 및 조리용구 17종이 22개 지역에서 기록되어 8.1% 였다. 기타 생활용품 및 광물이 94종이 136개 지역에 기록 되어 42.9%였다.

    특산물을 철도노선별로 분석한 결과는 <Table 1>과 같다. 특산물 수량이 가장 많은 노선은 경부선이고, 다음은 함경선, 경의선 순이었다. 이들 지역 중朝鮮の特産에서 가장 긴 분량으로 지역의 특징과 특산물을 상세히 설명한 곳은 경원 선 세포(洗浦)였다. 세포는 21쪽을 할애하여 목초, 숯가마니, 약재, 햄, 소시지, 우유, 냉동 두부 등 7종의 특산물을 설명 하여 특산물 수량도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경원선 원산(元 山)이 17쪽, 호남선 김제(金堤)와 함경선 회녕(會寧)이 14쪽, 경부선(京釜線) 대구(大邱)와 천안(天安)이 13쪽, 경부선(京 釜線) 부산진(釜山鎭)과 인천(仁川)이 12쪽 순이었다.

    1) 경부선의 지역별 특산물

    경부선은 부산에서 경성까지 450 km로, 9시간 반이 소요 되는 노선이었다. 삼랑진을 기점으로 조선 남부 연안을 통과 하는 경전남부선(慶全南部線), 대구를 기점으로 동해안으로 가는 동해중부선(東海中部線), 김천을 기점으로 하는 조철경 북선(朝鐵慶北線), 경성에서 인천으로 가는 경인선(京仁線) 등과 연결되어 있었다. 대전에서는 호남선과도 닿아 있어 조 선 팔도를 모두 연결하는 중요 노선이었으며, 조선의 주요 선로 중 여객 교통으로 많이 활용되고 있었다. 경부선이 지 나가는 지역은 비교적 문화가 발달한 조선의 남쪽 지방으로, 조선의 관문인 부산을 중심으로 일찍이 신문화(新文化)와 접 촉한 지역들인 만큼 특산품 생산이 많았다.

    경부선 28개 지역, 경전남부선 6개 지역, 동해중부선 8개 지역, 경인선 5개 지역을 포함하여 총 47개 지역에 기록된 특산물은 <Table 2>와 같다. 특산물의 수는 총 93종이었다. 이중 식품 특산물이 47종으로 전체의 50.5%였다. 사과, 수 박, 감, 밤, 참외 등 과실류의 비중이 높았고, 도기나 토기, 옹기 등의 식기와 보관용구의 생산지가 다수였다.

    2) 호남선의 지역별 특산물

    호남선(湖南線)은 대전(大田)을 기점으로 하여 목포까지 통 하는 260.6 km의 노선이었다. 광주선(光州線)과 경전북부선 (慶全北部線)의 지역을 포함하여 기술되었다. 호남선은 금강,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 유역을 포함하는 넓은 곡창지대와 서 해의 긴 해안지역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철도이므로 곡물과 수산자원이 풍부한 지역의 노선이었다. 그러므로 다른 철도 노선보다 경제적 유용성이 높았다(Railway Industry Information Center. 2010).

    광주선과 경전북부선을을 포함한 호남선 20개 지역에 기 록된 특산물은 <Table 3>과 같다. 특산물의 수는 총 48종으 로 이중 식품 특산물이 21종으로 전체 특산물의 43.8%였다. 강경, 몽탄, 목포, 군산 등의 수산물과 그 가공품이 많았고, 나주와 담양의 죽제품과 갈대와 골풀을 활용한 모자나 돗자 리가 생산되었다. 특히 군산은 경제상업 도시로, 특히 미곡 상업이 대단히 왕성하였다. 1930년대 초 군산 인구는 2만 5 천여 명으로, 목포, 원산을 뛰어넘는 발달 수준을 보였다.

    3) 경의선(京義線)의 지역별 특산물

    경의선은 서울을 기점으로 개성-사리원-평양-신안주를 거 쳐 신의주까지의 노선으로 총 499 km였다. 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 시작 후 대륙 침략의 목적으로 부설하였다. 경부선 과 함께 평시에는 원료 공급, 공업 제품의 수송을 맡았으나, 전시에는 일본 군국주의의 대륙 침략 노선으로 이용되었다. 서울 남대문과 만주의 장춘(長春) 간을 주 3회씩 직통 급행 열차가 운행됨으로써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국제철도의 일환이 형성되었다(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경의선 26개 지역과 평양탄광선, 겸이포선, 평남선, 평원선, 만포선 14개 지역을 포함하여 총 40개 지역에 기록된 특산 물은 <Table 4>와 같다. 특산물의 수는 총 65종으로 이중 식품 특산물이 32종으로 전체 특산물의 49.2%였다. 장단과 순천에는 콩이 특산물이었으며, 흥수, 순안, 숙천 등 8개 지 역에서 소주공장이, 사리원에는 당면공장이, 대동강지역에는 옥수수를 이용한 다양한 제품이 생산되었다.

    4) 경원선(京元線)의 지역별 특산물

    경원선은 경성~원산 사이에 부설된 223.7 km 철도로, 1914년 9월 6일 개통되었다. 경인선과 함께 국토를 가로질러 경성과 동서해를 잇는 간선 철도이다. 경성과 당시 동해안 제일의 항구였던 원산을 연결하는 중요한 노선이었다. 함경 선과 이어져 두만강 연안에 이르고, 국경을 지나면 대륙 철 도에 접속되어 산업군사상 막중한 위치였다(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경원선 15개 지역으로 동해북부선의 지역이 포함되어 기 술된 특산물은 <Table 5>와 같다. 특산물의 수는 총 36종으 로 이중 식품 특산물이 26종으로 전체 특산물의 72.2%였다. 식생활 관련 용품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서빙고와 철원은 천연얼음을 저장하였다가 공급하는 곳이었다. 덕정에는 꿀벌 애벌레 통조림을, 원산에는 토마토정어리통조림 가공공장이, 세포에는 햄과 소시지를 가공하는 공장에 있었다. 평강(平康) 은 잡경(雜景)이라 적고 메추라기와 꿩을 잡기위한 좋은 사 냥터라 하였다.

    5) 함경선(咸鏡線)의 지역별 특산물

    함경선은 함경남도 원산과 함경북도 종성군 상삼봉(上三峰) 사이에 부설된 철도로 총 길이 666.9 km였다. 일제강점기 일 본이 중국과 소련에 대한 군사적 목적과 한반도 북부지역의 풍부한 수산자원·수력자원·지하자원을 개발과 길림·간 도 지방과의 신속한 연결을 목적으로 부설되었다. 영흥·함 흥·길주 평야 등의 동해안 해안평야 지대와 정어리·명태 의 중요한 생산지인 군선을 통과하였다. 이 노선 부근에는 해안의 즐비한 기암·학사대·주을온천 등의 관광 명승지 가 있었다(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함경선 35개 지역과 웅기에서 남양까지 도문선(圖們線) 7 개 지역을 포함한 총 42개 지역에 기록된 특산물은 <Table 6>과 같다. 특산물의 수는 총 75종으로, 이중 식품 특산물이 33종으로 전체의 42.7%였다. 5개의 철도노선 중 가장 식생 활관련 특산품이 적었다. 이는 시멘트. 흑연, 철광석, 활석, 구석, 규석 대리석 등의 천연 광물자원과 목재의 양이 많았 기 때문이다.

    식품 특산물 중에서는 명태와 명란이 주를 이루었고, 경원, 훈용, 남양지역은 만주와 인접하고 있어 만주로부터의 대두 유통이 많았다. 나남은 들쭉을 이용한 시럽이나 진액, 와인 제품이 생산되었다. 정어리를 가공한 정어리 지게미와 정어 리유가 차호, 군선, 용현, 일신, 웅기지역의 특산물로 기록되 어 있었고, 다시 정어리 지게미는 영양어분으로, 정어리유는 경화유로 재가공 되었다.

    2. 식품별 현황

    각 지역의 특산물을 식품군과 그 가공품별로 나누어 본 결 과는 <Table 7>과 같다. 식품 중 어패류와 그 가공품이 41 개 지역에 26종 기록되어 가장 많았다. 이는 일본으로의 이 출을 위해 일본인들의 필요에 의한 작물 파악과 육성이 있 었던 시기이고, 생선을 위주로 한 식사를 하는 일본인들의 기호가 반영된 결과라 생각된다. 다음으로 과실류가 30개 지 역에 16종으로 많았다. 그중에서도 사과의 특산지가 6곳으 로 가장 많았고, 감이 5곳이었다.

    1) 곡류

    쌀은 호남선의 군산(群山)과 동해북부선의 통천(通川)이 특 산지로 기록되어 있었다. 군산은 전주평야, 김제평야, 강경평 야와 인접해 있고, 금강, 만경강, 동진강 하구와 7리 정도 떨 어져 있기 때문에 당시 많은 배가 모여들었다. 1931년 일본 이 조선에서 이출한 쌀 800만 섬 가운데 약 190만 섬이 군 산에서 이출되었다. 곡물의 양은 조선시대 내내 부피로 계산 되었으나, 일제강점기부터 점차 무게표시가 병행되었다. 또 일본상인들 사이에 쓰이던 가마니가 1909년부터 일반농가에 보급되었다. 1911년 전국상업회의소연합회에서 쌀 1가마니 는 5말을 표준으로 하고, 72 kg이었으니, 1섬은 2가마, 즉 144 kg에 해당되는 양이었다(Chung 2008). 조선정미주식회 사공장(朝鮮精米株式會社工場)과 구로다정미소공장[黑田精米 所工場]이 대표적인 정미공장이었다. 조선정미주식회사는 공 장인원이 130여 명으로, 당시 연간 원료 소비량은 벼 12,000 톤, 현미 1,300톤, 석분 250톤이었다. 생산액은 백미 6,400톤, 쌀겨 1,000톤이었다. 구로다정미소는 좀 더 규모가 크고 생 산량도 많았다. 기존 정미 공정은 벼에서 현미로, 현미에서 백미로 공정하는 단계적 방식이지만, 이 두 공장은 벼를 바 로 백미로 도정하였다.

    경원선 검블랑(劒拂浪)은 특산물 목록에는 메밀이 기록되 어 있으나, 본문에는 설명이 누락되어 있었다. 하지만 인근 지역인 삼방과 세포에서 꿀벌들의 이동경로에 메밀꽃을 언 급한 것으로 보아 이 지역들에 메밀밭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옥수수는 경원선 검불랑의 특산품으로, 해발 2,000척(尺) 의 높은 지대에서 잡곡과 함께 약 500톤가량 생산되었다. 만 주지역에서의 소비가 많아 경의선 대동강(大同江)에는 이를 가공하는 공장이 있었다. 원료는 평안도산 외에도 안동역과 진남포역을 경유하여 오는 수입품을 사용하여 연간 10,000 톤 안팎의 옥수수와 수수가 이 지역에 모여 여러 옥수수 제 품으로 만들어졌다. 대동강의 옥수수 가공공장은 ‘일본 Corn Products 주식회사’로, 1917년에 미국의 ‘Corn Products Refining Company’ 사업 방식에 착안하여 설립된 근대식 공 장이라 하였다. 생산 제품은 옥수수 전분과 전분에 화학적 처리를 하여 만든 설탕, 단당류(單糖類), 시럽, 글루텐 사료, 옥수수유와 옥수수샐러드유 등 여러 제품이 있었다.

    누룩의 특산지는 경부선 유천(楡川)이었다. 탁주는 원거리 이동이 불가능하여 대개 주막에서 양조하였으므로 대신 누 룩이 조선의 여러 곳에 유통되었다. 누룩은 보통 밀기울로 만들며, 상등품은 순수한 흰 보릿가루로 만들었다. 연간 생 산액은 약 900톤이었다. 철도 수송량은 1928년에 867톤이었 으나, 1930년에는 714톤으로 감소하였다. 배송지는 대구가 325톤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부산 45톤, 구마산(舊馬山) 이 33톤이라 하였다.

    2) 두류 및 두류 가공품

    두류로는 대두와 완두의 특산지가 기록되어 있었고, 두류 가공품으로 두부와 당면이 있었다. 당면 제조를 위한 원료로 녹두가 사용되었으나, 녹두의 특산지는 별도로 서술하지 않 았다.

    대두의 특산지는 경의선 장단(長湍)과 순천(順川), 경원선 의 서빙고(西氷庫), 함경선의 경원(慶源), 훈융(訓戎), 남양(南 洋)이었다. 장단은 금한(金汗), 연천(漣川)과 함께 유명한 대 두 생산지로, 연간 철도 수송량은 3,000~4,000톤이었다. 생 산 양 대부분이 인천(仁川)으로 수송되어 소량만 소비되었고, 나머지는 전부 일본으로 이출되었으니 쌀과 함께 일제 수탈 의 대표적인 식품이었다. 순천(順川)의 대두는 1928년 평양 탄광선이 개통되면서부터 순천역을 경유해 진남포(鎭南浦)에 서 배로 실어 날랐다. 당시 출하량은 연간 3,500톤 남짓으로 장단과 유사하였다. 서빙고(西氷庫)의 용산대두는 조선 대두 계의 핵심이라 하였다. 한강 유역 130여 리에서 생산하고 있 으며, 알맹이가 커서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한강물이 녹아 야 출하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지역생산품보다 섬당 가격 이 20~30엔 정도가 더 비쌌다. 연간 출하량은 5,000~10,000 톤이었다.

    강원도 평강군 고삽면 세포리에는 추운 날씨를 이용한 대 두를 이용한 냉동 두부공장이 있었다. 세포는 해발 2,000 피 트인 지역에 혹한기에는 영하 30°C까지 내려가기 때문에 10 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반 년 가량 자연 냉기를 이용한 냉 동 두부 생산이 가능하였다. 1929년도에 판매된 양은 1,000 개들이 상자 1,100개로, 철도 발송량은 1926년이 50톤으로 가장 많다고 하였다. 냉동 두부는 코우야두부[高野豆腐]와 유 바[湯葉] 같은 정진요리(精進料理)에 주로 사용되었으니 일 본인들을 위한 식품이었다. 가격은 한 모에 1전이며, 1상자 는 10엔 정도였다.

    완두는 조생청완두가 경부선 진해(鎭海)에서 생산되었다. 초완두(KJFC-34-6-651_img1.gif豌豆)는 온실과 반지붕온실[半溫室]에서 속성 재배 되어 4월 말~5월까지 생산되었다. 가격은 5월 상순에 1관(貫) 이 1엔 50~70전 정도였다. 1915년 일본인들이 히로시마의 완두 종자를 가져온 것을 조선인들이 시험 재배하면서 시작 되었다. 이듬해 약 300관을 수확하여 부산, 마산, 통영 방면 으로 판매처를 개척하였다. 1930년 대 초 연간 생산액은 10,000여 관으로 그 가격은 5,000엔에 달한다고 하였다.

    중국소면(支那素KJFC-34-6-651_img2.gif)이라 표기한 당면(唐KJFC-34-6-651_img2.gif)은 경의선 사 리원(沙里院)과 경인선 인천(仁川)의 특산물이었다. 사리원은 녹두 생산 조건이 우수한 지역으로, 당면의 원료로 녹두와 감자 전분을 사용하였다. 당면은 80돈(刃) 또는 50돈 가량을 다발로 묶어 80돈 다발은 큰 상자에, 50돈 다발은 석유상자 크기의 상자에 넣어 유통하였다. 1930년대에는 소매가격은 감자전분의 투입량에 따라 1근에 15전~22전까지이고, 50돈 짜리 다발 하나에 6~7전 가량하였다. 1921년에 세운 광흥공 장은 1930년대 들어 중국인 노동자가 50명에 1일 생산량은 3,000근에 달했다. 철도취급은 1928년이 415톤으로 가장 많 았다. 배송지는 국내는 물론 일본 오사카, 도쿄, 나가사키이 며 대만, 만주 방면에도 발송되었다. 일본 출하품은 감자전 분이 적은 고급품이 주로 배송되었다. 인천 당면은 외장의리 (外長意里) 대진두면공장(大津豆麵工場)에서 대부분 생산하 였다. 원료인 녹두는 만주와 조선 황해도 산을 사용하고, 전 분은 일본과 대만에서 들여왔다. 중국인 위주로 50여 명을 고용하여 연간 생산액 500,000근을 생산하였다. 인천당면은 녹두의 원산지인 사리원보다 수질이 좋아 당면의 윤기가 뛰 어나다고 하였다.

    저자는 조선인들은 당면, 시금치, 고추를 섞어 ‘잡채(雜菜)’ 를 만든다고 하였다. 조선시대 잡채는 이름 그대로 여러 가 지 채소를 섞어 놓은 음식이었다. 방신영의조선요리제법 1921년 판본에 기록된 잡채에는 드디어 당면이 나타났다 (Korean Traditional Knowledge Portal). 먼저 채소를 각각 볶고, 당면을 물에 불려 삶아 썰어 다른 재료와 섞는다고 하 였다. 일제강점기 당면잡채가 시작되었으니 불과 100년이 넘 었을 뿐이다. 당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요리강습을 할 때도 전통적인 잡채와 별도로 당면잡채가 소개되었다(Lee 2017).

    3) 서류 및 서류 가공품

    서류로는 감자와 고구마의 특산지가 기록되어 있었다. 경 원선 검불랑(劒拂浪)은 해발 2,000척(尺)의 높은 지대로, 감 자가 300톤 정도 생산되었다. 이중 1,000,000여톤의 감자는 경성으로 배송되었다. 고구마[甘藷]는 경인선 부평(富平)이 특산지였다. 부평의 고구마 재배는 1920년대에 시작되었는 데, 토양에 자갈이 많아 배수가 용이한 재배 적지였기 때문 이었다. 일본인과 조선인들이 운영하는 농장에서 총 140,000 ~150,000관의 고구마가 생산되었다. 부평 고구마는 옅은 복 숭아 색으로 달콤한 만생종을 주로 재배하는데, 군고구마용 이라 하였다. 만생종은 8월 중순~10월 중순까지 생산되었고, 출시 가격은 1관에 30~35전 정도였다. 저자는 날씨가 추운 탓에 조선은 고구마의 저장이 어려워 씨고구마의 가격이 비 싸다고 하였다.

    4) 채소류 및 채소류 가공품

    채소류로는 속성재배 채소류, 머위, 생강, 순채나물, 산초 나무순, 토마토가공품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경부선 대전(大 田)에서는 1905년경부터 일본인들이 채소 재배를 시작한 후 속성원예조합[促成園藝組合]을 결성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 서며 채소 재배 주안점을 ‘속성(速成)’에 두고 12정보(町步) 의 농장에 속성재배를 위한 채소를 키우며 채소의 특산지가 되었다. 주요 작물은 오이, 가지, 토마토, 조선고추 등이지만, 일본 품종에 대항하는 정호원(正護院)의 절성(節成)오이가 작 물의 대다수를 차지했다고 하였다. 일본인들은 껍질이 연한 중국 오이를 선호하지만, 정호원 오이가 일본산 오이에 비해 1개월 정도 빨리 출시되어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였다. 3~6 월까지는 일본인을 위해 경성으로 보내졌고, 6월 이후에는 경성 근처에서 중국 오이가 출시되므로 조선인을 대상으로 출하되었다. 가격은 3~10전 정도로, 온실 재배 생산비가 높 았지만 일본산보다는 저렴하였다. 그 외 조선고추, 가지, 토 마토의 주요 배송지는 경성으로, 발송량은 1929년에 440톤, 1930년에는 295톤이라 하였다.

    목포는 머위 생산지로 유명하였다. 목포 머위는 일본 나고 야 개량종으로, 1926년 시험재배를 시작한 뒤 점차 생산액 이 증가하였다. 생산지는 무안군 이로면(二老面) 목포원예조 합(木浦園藝組合)이었다. 재배면적은 10정보로, 연간 생산액 은 30 kg 상자 3,500~4,000개였다. 가격은 30 kg 한 상자가 1엔 40~50전이었다. 배송량은 총 1,000,000톤 안팎인데, 배 송지는 경성이 가장 많고, 평양이 그 다음으로 많았다고 하 였다.

    호남선 삼례(參禮)는 생강의 특산지였다. 전주 봉동면(鳳東 面)을 중심으로 고산, 삼례, 용진에서도 재배되었다. 재배 면 적은 대략 1,000,000정보이고, 연간 생산액은 1,300섬 안팎 이며 재배자 조합이 있었다. 생강은 8월에 가장 많이 생산되 지만 기온이 높고 잎이 나기 때문에 생강이 쉽게 물러졌다. 그러므로 장거리 배송을 위해서는 건강(乾姜)이나 분강(粉姜) 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생강조합에서 생강의 품질과 중량 검사를 통과하면 꼬리표를 달아 품질을 증명해주었다. 가격 은 1,500,000근이 6엔 안팎이었다. 벼 가마니 안에 생강 2근 과 황토 8근을 넣어 포장하였다, 11~12월의 출하량이 가장 많고, 주요 배송지는 경성, 평양, 대구이고, 경의선과 경부선 각 지역에 발송하였다.

    김제(金堤)에는 천년이 넘은 늪이 아니면 자랄 수 없다는 순채나물[蓴菜]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순채는 메이지[明治] 이전부터 가공되지 않은 그 모습 그대로 또는 꿀이나 식초 를 넣어 음료처럼 즐겼다. 김제 부근에서 순채가 자라는 총 면적은 대략 300만평으로, 그 중 현재 전북 김제군 공덕면 일대의 지내리 연못이 대략 50만 평으로 가장 크고, 생산액 도 가장 많았다. 순채를 상품화 한 것은 1912년 이시이 카메 타로[石井龜太郞]가 순채나물을 정제해 판매한 것이 그 시작 이었다. 귀한 순채의 부패 방지하기 위해 증기 살균한 병조 림으로 제조하였다. 김제에서 발송한 184톤 가운데 80%가 군산을 거쳐 오사카나 나고야, 시모노세키, 멀리는 요코하마 까지 배송되었다고 하였다.

    산초나무 순[山椒の芽]은 부산진의 특산물로, 봄을 알리는 전도사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주요 생산지는 동래면(東萊面) 동래읍(東萊邑)으로, 과거 산과 들에서 자생하던 것을 채취 했지만, 당시에는 재배를 하였다. 연간 발송량은 2,000근(斤) 이상이었다. 환기구를 뚫은 귤 상자나 판지 상자에 5근씩을 넣어 포장하는데, 1상자가 생산지에서 1엔 50전, 경성에서는 2~2엔 50전 정도였다. 처음 채취한 것은 주로 봉천(奉天), 장 춘(長春) 등 만주 방면으로, 이후에 채취한 것을 남쪽 지역 으로 보냈다.

    토마토는 경부선 대구와 대전이 특산지였다. 대전은 속성 재배하는 채소류 중 하나였다. 대구는 토마토 재배에 적합한 토질과 기후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생산된 토마토는 토마토 소스, 케첩 사딘(sardine)을 위한 펄프로 만들어져 캔과 병제 품으로 포장되었는데, 4엔 정도의 가격을 받았다. 대장흥농 원에서는 1922년부터 토마토를 재배하여 토마토케첩 제조하 고, 1931년에는 토마토소스에 조미한 정어리를 넣은 토마토 사딘통조림을 만들어 조선은 물론 일본 시장도 개척하였다. 경원선 원산(元山)에서도 1930년대 들어 토마토정어리통조 림을 만들어 토마토 펄프와 함께 신문에 대대적으로 홍보하 였다. 처음에는 소규모로 시작하였으나 토마토 재배가 증가 하고, 정어리를 어유(魚油) 재료로 쓸 수 없게 되면서 1931 년에만 30,000통을 생산하였다. 가격은 48개들이 한 상자가 4엔 70~80전, 소매가격은 1통 당 10전 내외였다. 경성 미쓰 코시[三越] 백화점 식료품부에서는 1통 당 8~9전에 거래되 었다. 이 통조림을 생산하기 위한 토마토는 펄프는 비교적 싼 값에 원거리 수송이 가능하나, 생 정어리는 원거리 수송 이 어렵기 때문에 통조림은 항상 정어리 원산지에서 주로 생 산되었다고 하였다.

    5) 버섯류

    버섯류 중에는 송이(松茸)가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송 이의 특산지는 경원선 석왕사(釋王寺), 함경선 주을(朱乙)과 부령(富寧)으로, 산간 지역의 진미였다. 함경북도 송이는 일 본산보다 약 1개월 정도 출하가 빨라 일본에서도 상당히 경 쟁력을 가지고 있었다. 1931년 부령역과 고무산역(古茂山驛) 에서 발송한 화물은 총 20,000 kg으로, 제철에는 100몬메에 2~30전 정도였다. 철도 수송양의 반은 경성으로 보내지고, 나 머지는 함흥, 시모노세키, 원산, 인천 순이었다. 영조(英祖, 1757~1765) 대에 조선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엮은 전국 읍지(邑誌)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버섯류가 총 217개 지역의 물산과 진공으로 기록되어 있었다(Byen JS ed. 2009). 이중 송이(松茸)가 85개 지역으로 가장 많았고, 석이 (石茸)가 69개 지역, 표고[香]가 37개 지역에서 생산되었다. 송이는 전국적으로 생산되었으나, 강원도 16개 지역으로 가 장 많았고, 함경도는 7개 지역이었으나,朝鮮の特産에는 함경도의 송이를 강조하였다.

    6) 해조류 및 해조류 가공품

    해조류는 미역, 다시마, 김의 특산지가 있다. 미역과 다시 마는 경부선 구마산(舊馬山)과 동해중부선 부조(扶助), 함경 선 일신(日新)이 특산지였다. 경남 진해만 통영 연안에서 생 산되는 미역의 연간 생산액은 약 70,000엔 정도로, 1929년 구마산역에서 발송한 양이 119톤이었다. 조선 전역에 걸쳐 배송되고 있는데, 경성, 평양과 김천 순으로 많았다. 경상북 도 해안에서 생산하는 미역은 영덕(盈德), 구룡포(九龍浦), 송 라(松羅)산 순으로 품질이 좋다고 하였다. 동해중부선 부조 미역은 구룡포산으로, 채취 시기는 4~6월까지였다. 미역은 길이 3~6척, 폭 4치, 두께 2~3분인 띠 모양으로 건조하여 10줄기를 1묶음으로 삼고, 다시 8묶음을 지푸라기로 감싼 뒤 새끼줄로 묶어 포장하였다. 생산지 원가는 1줄기에 5~10전 가량이나 거간꾼을 거쳐 부조 시장에 나오면 1줄기에 17전 이 되었다. 약 50 kg 1상자 가격은 15엔이었다. 조선 북쪽에 있는 신포(新浦), 신창(新昌), 명천(明川) 등이 유명하지만, 일 신지역의 해조류 품질과 수량은 으뜸이라 하였다.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김 생산지는 목포이고, 그 다음으로 유명한 곳이 바로 구마산이다 하였으나, 목포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구마산의 김은 하동군으로 섬진강 하구가 재배장이 었다. 당시 재배 면적은 1,100,000평이고, 연간 생산액은 250,000엔이다. 이 지역의 김 재배는 그 역사가 오래되었으 나, 일제강점기 재배 방법과 김 뜨는 방식을 크게 개량하여 품질이 개선되었다고 하였다. 가격은 50 kg 1꾸러미 당 50엔 정도였다. 생산된 김은 아사쿠사 김의 원료로 사용하기 위해 도쿄로 보내지고 정제하여 색을 밝게 만들었다고 한다. 1930 년 구마산역에서 발송한 철도 취급량은 87톤이다. 12월부터 3월 사이에 발송한 김 배송지는 경성이 27톤으로 가장 많았 고, 다음으로 대구가 18톤, 김천 9톤 등이었다.

    한천(寒天)은 호남선 장성(長城)의 특산품이었다. 장성 수 산리(壽山里)에 고리 시게타로(郡繁太郞)가 경영하는 조선한 천제조소(朝鮮寒天製造所)에서 생산되었다. 제주도 외 다도 해 연안에서 나는 천화채(天花菜)를 원료로 연간 8만 근 안 팎을 생산하였다. 장성 한천은 1912년 12월로 시작하여 1919년에는 최신식 공장을 증설한 이후 계속하여 발전하였 다고 하였다. 1931년 생산한 한천은 10만 근에 이르며, 당시 소련까지 거래를 하였다. 한천은 조선시대에는 우모(牛毛)라 했다.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남해안의 경상도와 전라도 10개 지역의 물산과 진공품이었다(Byen JS ed. 2009). 1450 년대 산가요록(山家要錄)에 우모전과(牛毛煎果) 만드는 법이 기록되어 있고(Han 2003), 조선시대 내내 꾸준히 진상 되어 과정류를 만드는 재료로 활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들 며 장성과 함께 1912년 대구 신암동에 조선총독부의 한천제 조시험소가 작업을 시작하였다. 오늘날 가장 대규모로 한천 을 제조하는 경남 밀양은 1913년에는 시작하여 현재까지 지 속되고 있다(Miryangagaragar).

    7) 과실류 및 과실류 가공품

    과실류는 사과[KJFC-34-6-651_img3.gif果], 감[甘KJFC-34-6-651_img4.gif, 盤木市, 澁木市, 土音木市], 수박[西 瓜], 대추[棗], 딸기[KJFC-34-6-651_img5.gif,], 멜론[メロン], 밤[栗], 배[梨], 복숭아 [桃], 앵두[櫻桃], 잣[松の實], 참외[甛瓜], 포도(葡萄), 호두[胡 桃]가 28지역의 특산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중 사과가 6지 역으로 가장 많았고, 감과 밤이 4지역으로 다음이었다. 과실 류의 가공품으로는 곶감[乾木市]과 들쭉가공품 생산지가 있었다.

    사과[KJFC-34-6-651_img6.gif果]는 경부선의 삼량진(三浪津)과 대구(大丘), 동해 중부선의 동촌(東村), 경의선의 황해황주(黃海黃州), 정주(定 州) 그리고 진남포(鎭南浦)에서 생산되었다. 재래종 조선 사 과는 과실의 크기가 작은 품종이었으나, 1930년대 재배하는 우량종은 1903년경 도미타[富田]가 진남포에 들여온 품종이 라 하였다. 이후 대구와 황주 등 유명 산지에서 시험 재배를 시작하였고, 시행착오 끝에 중생종(中生種)과 만생종(晩生種) 을 수확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의 사과 생산량은 약 1,000 만 관인데, 이 가운데 진남포에서 생산되거나 진남포에 집산 되는 사과의 양만 1931년도 기준 2,500,000관에 달했다. 황 해 황주 지역에 사과가 재배되기 시작한 시기는 1905년이었 다. 토지의 생산력과 기후가 알맞은 지역이지만, 많은 실패 를 거쳐 아오모리[靑森] 사과와 판매 경쟁을 벌이는 수준에 이르렀다. 경의선의 정주의 사과 재배면적은 100정보, 연간 생산액은 100,000관이 넘었다. 이 가운데 철도 배송양은 약 100톤으로, 배송지는 안동(安東)이 대부분이고 신의주와 선 천(宣川)에도 배송되었다. 대구 사과는 1892년 영국인 아치 발드 그레이 플레쳐(Archibald Gray Fletcher)에 의해 수입되 어 시험재배된 것이 러일 전쟁 이후 한반도로 들어온 일본 기업가들에 의해 대구과수재배조합이 설립되면서 조직적으 로 재배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치발드 그레이 플레쳐는 1908년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발령을 받아 입국하였고, 대구 제중원(濟衆院) 자대 병원장을 역임한 기록이 있어 대구 사 과재배의 발상에 대해서는 추후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판단 된다(Lee 2006). 1930년 대구 사과의 철도 운송량은 1,200 톤으로 압도적인 양이 일본으로 향했고, 당시 일본의 대표적 사과명산지인 아오모리 사과보다 더 좋은 품질 평가를 받았 다고 하여 대구사과 품질의 우수성을 추측할 수 있었다.

    감(木市)은 경부선의 청도(淸道), 황간(黃澗), 진영(進永) 그리 고 호남선의 두계(豆溪)가 특산지였다. 청도에서 나는 감은 씨 없는 반시(盤木市)였다. 1관에 40전으로, 주로 부산으로 출 하되었다. 1930년 3,700여 호의 농가에서 48톤을 생산하였 다. 황간을 중심으로 생산되는 감은 떫은 감[澁木市]이었다. 연 간 300톤이 생산되는데, 철도 수송량은 1930년도에 159톤이 배송되었다. 진영의 감은 단감[KJFC-34-6-651_img7.gif甘]이었다. 당시 조선에는 단감이 적었다. 일본 품종 단감을 이식하였어도 떫은맛이 났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영에서 생산되는 단감은 매우 귀한 대접을 받았다. 후유[富有]종의 재배가 가장 많아 150관, 젠 지마루[禪寺丸]가 100관, 그 외에 술을 담그는 이용하는 하 치야[蜂屋]가 500관정도 생산되었다. 조선에서 감이 가장 밀 집된 두계(豆溪)지역의 감은 술 담그기에 적합한 배감[培木市] 이 생산되었다. 배감으로 담군 술은 맛이 좋고 저장 기간이 길어 인기가 높았다. 전주(全州)에서는 생산되는 모든 감을 곶감으로 가공되었다. 전주 곶감은 건조 방법을 연구하여 조 청 빛깔에 표면에 흰 분이 피고, 수분함량이 적당하고 식감 이 좋았다고 평가하였다. 전주군 고산면 고산리에서 주로 생 산되는데, 최근 연간 생산액이 13,000관이었다. 곶감은 1백 개 씩 대바구니에 넣어 시장에 출하하는데, 가격은 한 바구 니에 2엔 50전 가량이었다. 철도 취급량은 연간 50~120톤 정도로 소량이었다. 경성으로 보내는 양이 제일 많고 다음으 로 군산, 목포 순이었다.

    경부선 구포(龜浦)는 배로 유명한 곳인데, 일원(一原), 박다 청(博多靑), 태백(太白), 이십세기(二十世紀), 장십랑(長十郞), 조생적(早生赤), 금촌추(今村秋), 만삼길(晩三吉), 명월(明月), 적룡(赤龍) 등 다양한 품종이 생산되었다. 1907년 시험재배 를 시작으로 당시 104호 농가가 7~8정보의 생산을 하여 연 간 생산량이 1,100,000여 관이 되었다. 구포에서 생산된 배 는 대부분 소형선에 실려 일본 큐슈로 갔고, 나머지는 철도 로 운송되어 전국에서 소비되었다.

    조선에서 수박[西瓜]은 경부선(京釜線)의 구미(龜尾), 대신 (大新), 심천(深川) 그리고 호남선(湖南線) 이리(裡里), 송정리 (松汀里) 등이 유명한 생산지였다. 심천은 1915년부터 심천 의 후쿠다농장[福田農場]에서 재배가 시작되어 온실 재배가 되고 있었다. 생산량은 연간 2,000~3,000톤으로 양은 많지 않았으나, 맛이 좋았다고 하였다. 부산에서 일본산과 경쟁 한 다는 것으로 보아 일본산 수박이 수입되어 팔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경부선의 금호(琴湖)와 대구도 주요 시장에 출하 하는 수박 공급지였다. 영천군은 금호면의 신대리, 삼호동, 덕성동, 냉천면 등을 중심으로 하여 당시 수박 생산액이 300~400톤에 이르렀다. 삼호강 근처가 모래땅이기 때문에 수 박 재배에 가장 적합하여 농가(農家)가 모두 수박을 재배하 였다.

    밤[栗]은 경의선의 평양(平壤), 경원선의 의정부(議政府), 경부선 조치원(鳥致院)과 안양(安養)이 특산지였다. 평양밤은 조선을 대표하는 상품인데, 평원군(平原郡) 함종면(咸從面)에 서 생산되었다. 보통 생밤 5말을 가마니 하나에 넣어 75 kg 정도 되는 양을 판매하였다. 가격은 일정하지 않지만 20엔부 터 24~25엔 사이였다. 1928년 발송량이 1,871톤에 달했지만 이후 불황이 심해져 점차 감소하는 추세였다. 일본으로 발송 되는 것이 대부분이며, 조선 내 소비는 약 200톤 정도였다. 의정부에서 생산하는 밤은 이른바 ‘양주밤’으로 불리는 가율 (茄栗)로, 알맹이가 큰데 경성을 중심으로 조선에서만 소비되 었다. 양주군의 밤 생산액은 연간 500톤 남짓으로, 품질과 수 량을 모두 충족시켰다고 하였다. 경부선의 조치원 밤의 철도 취급량은 1930년 172톤으로, 시즈오카, 시모노세키, 오사카 등지로 배송되었다. 안양에서 생산되는 밤은 크기로 유명하 였다. 크기가 평양 밤보다 세 배정도 크기 때문이다. 일본인 대농장주와 조선인들이 운영하는 밤 농장의 면적은 120여 정 보에 달했고, 나무의 수는 50,000여 그루였다. 배송지는 경 성이 제일 많았다.

    대추[棗]는 경부선 황간(黃澗)지역의 특산이다. 대추는 연 간 생산량은 100톤 정도로, 말린 상태로 출하되었다. 철도로 는 1930년에 50톤이 수송되었다.

    참외[甛瓜]는 경부선 성환(成歡)과 경인선 오류동(梧柳洞) 이 특산지였다. 성환참외는 큰 것은 일본산 금참외(金甛瓜) 의 3배 정도로, 숙성한 참외의 과육은 두툼한 담황색이고, 과 즙이 풍부하며 매우 달콤하다고 하였다. 시장 출하는 일반 참외보다 약간 늦은 8월초로, 9월 상순까지 약 40일간이었 다. 가격은 맏물 때 1개에 6~8전(錢) 정도이고. 성수기 때는 4전이었다. 군농회(郡農會)에서는 성환참외조합을 조직하여 품질 검사를 거쳐 인증하였다. 오류동 참외는 외형이 푸른 바탕에 엷은 황색 줄무늬가 들어간 일반적인 조선 참외지만, 오류동의 윤기 나는 점토가 참외에 특유의 향을 주는 것으 로 인식하였다. 연간 생산액은 100톤 안팎으로 트럭으로 수 송되었다.

    복숭아는 경인선 소사(素砂)는 복숭아의 특산지였다. 소사 는 점토질로, 지세가 완만한 경사이고, 배수가 좋아 복숭아 재배의 적지였다. 소사역을 중심으로 한 소사면, 오정면, 소 래면에서 70여명이 과수원을 경영하는데 대부분 복숭아였다. 재배 면적은 150정보로 연간 생산액은 30만 관에 달했다. 복 숭아는 6월 말부터 9월 중순까지 시기에 따라 다양한 품종 이 생산되었다. 상자에 3관씩 넣어 경성, 평양, 안동, 신의주 등으로 배송되었다. 1930년대 재배 면적은 150정보에 달해 과일 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고, 생산자 조합에서는 복숭아 잼, 통조림, 시럽 등 가공품 생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경인선 소사에는 품질이 뛰어난 포도도 소량 생산되었다. 소래면 우메노농원[梅野農園]에서 주로 생산하는 포도는 연 간 20,000~30,000관 가량이었다. 우메노농원이 수년 동안 유 럽과 미국 품종 포도를 연구하여 시험 재배한 결과라 하였다.

    조선에서 널리 알려진 호두[胡桃] 생산지는 천안 부근이 유일하였다. 호두는 본문에서 ‘桃胡’라고 되어 있으나 ‘胡桃’ 의 오자인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 초 꽃이 피어 결실기(結 實期)에 이른 10년 이상 된 나무가 3,000그루 이상 있었다고 하였다. 1년 생산액은 500~600섬 정도였다. 발송양은 10~11 월이 가장 많았다. 배송지는 경성이 대다수이고, 그 다음이 인천과 강경 등이었다. 호두의 가격은 원산지에서 1섬에 30~50원(圓)정도이다. 극히 일부를 천안 호두과자와 호두양 갱으로 사용하는 것 외에 천안 내 소비는 거의 없었다. 호두 과자는 1930년 10월 의장등록(意匠登錄), 1931년 3월 부산 에서 개최한 조선총독부 주최 조선과자품평회(朝鮮菓子品評 會)에서 1등을 하였다고 하여 호두과자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함경선 훈융(訓戎)에도 호두가 특산으로 되어 있으 나. 열매가 목적이 아니라 특수 재료로 취급되는 목재에 주 목하고 있었다.

    잣[柏子]은 조선 중부지방과 이북지역에서 많이 생산되었 다. 특히 금강산 일대가 주요 생산지이며, 강원도 회양, 평강, 철원, 금화, 고성, 인제에서도 생산되었다. 북쪽 지방으로 출 하하는 물량은 고산역(高山驛)으로, 서쪽 지방으로 출하는 물 량은 동두천(東豆川)역에 모여 대부분 경성으로 배송되기 때 문에 경원선의 동두천이 특산지로 기록되어 있었다. 잣 생산 량은 50,000~60,000근이었다. 주요 생산지인 강원도 생산액 은 전체 생산액의 절반 정도로 연간 30,000근 안팎이었다. 철도 취급량은 연간 100톤 전후로, 대부분 경성으로 배송되 었다.

    들쭉액을 가공한 들쭉시럽, 진액, 와인제품은 함경선 나남 (羅南)의 특산물이었다. 들쭉은 조선 북쪽의 산업이 발전되면 서 일본에게 알려진 산간 지역의 특산품이었다. 1930년대 들 쭉채취량은 7백 섬으로, 시럽, 진액, 들쭉와인의 생산액은 80,000엔에 달했다. 들쭉 자생지는 함남 풍산군(豊山郡)이며, 약 530정보에서 들쭉이 집단으로 자라고 있었다. 이곳을 사 업소로 삼아 조선들쭉제조소는 저장고를 만들어 액즙(液汁) 을 제조하였다. 들쭉액은 4말들이 나무통에 넣어 북청역에서 나남역으로 보내지고, 시럽, 진액, 들쭉와인으로 가공되었다. 시럽의 가격은 4홉들이 병 4개가 36엔, 2홉들이 병 4개가 23엔이었다. 조선 내 수요가 70%, 일본과 대만, 만주가 30% 를 차지하였다.

    경부선의 대구(大邱)는 진남포(鎭南浦), 송정리(松汀里), 부 산진(釜山鎭)과 함께 앵두 생산지로 유명하다고 하였으나, 진 남포, 송정리, 부산진의 앵두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품종은 나폴레옹, 홍옥(紅玉), 히노데(日の出) 등이었다. 4월 중순~6 월 상순 까지 채취가 가능한데, 5월에 가장 성황으로 생과실 로 유통되었다. 앵두는 작은 상자에 1관을 넣어 시장에 출하 하는데, 보통 1관에 3엔 50전 정도였다고 한다. 연간 3천관 을 생산하였으며, 철도 운송량이 1931년 1,600관으로, 주로 일본 오사카, 고베, 교토 등지로 배송되며 고급과일로 취급 되었다.

    딸기는 호남선 송정리(松汀里)가 특산지였다. 1926년 속성 재배 원조인 호리노농원[堀野農園] 주인이 딸기 우량종을 개 발하였다. 생산지에서 판매하는 딸기 1상자의 값은 4월까지 는 1엔 50전이지만, 5~6월에는 60전이었다. 생산량은 해마 다 급증하여 1930년 12,000상자였다. 배송지는 경성이 가장 많았고, 평양과 만주 방면으로도 배송되었다.

    멜론의 특산지는 호남선 송정리(松汀里)로 조선에서 유일 하였다. 6월 초에 생산한 멜론은 경성 시장에서 100몬메(KJFC-34-6-651_img8.gif) 당 1엔 40~50전에 팔리고, 성수기에도 50~60전 밑으로는 떨 어지지 않았다. 1923년 호리노농원 주인이 영국에서 가져온 멜론을 시험 재배한 것이 시초였다. 여름 멜론은 6~7월 사이 에, 가을 멜론은 11~12월 사이에 출하되었다. 배송지는 경성 이 절대 다수이나, 여름 멜론이 많이 나는 시기에는 봉천, 무 순 등 만주 방면으로도 발송한다고 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Byen JS ed. 2009)에는 석류가 경 상도 전라도 100개 지역의 물산 및 진공품으로 가장 높은 빈 도로 기록되어 있었다. 다음으로 잣이 94개 지역, 귤, 금귤, 청귤, 감자, 산귤, 동정귤 등의 감귤류가 70개 지역, 배가 51 개 지역, 감이 50개 지역, 유자가 47개 지역, 호두가 39개 지역, 대추가 27개 지역, 밤이 20개 지역으로 주를 이루었다. 그 외 포도, 복숭아, 앵두 등이 생산되었다.朝鮮の特産 에서 강조한 사과, 수박, 딸기, 멜론은 전혀 없었다.

    8) 수육류 및 수육류 육가공품

    1930년대 조선의 축우(畜牛) 수는 약 2,000,000마리로, 전 국 어디에나 많지만 경원선 철원(鐵原)은 회령(會寧), 함흥 (咸興)과 더불어 특히 소가 많은 특산지였다. 철원에서는 철 도 개통 이후 1930년대에 연간 2,000마리 이상이 출하되었 는데, 주요 배송지는 부산진을 통한 일본이었다. 일제강점기 에는 구우계(購牛契)나 식우계(殖牛契), 종모우계(種牡牛契) 같은 여러 계(契)가 조직되어 소를 중심으로 한 금융 개념이 시작되었다. 조선에서 열리는 우시장은 대략 800개로, 이 시 장에서는 2~3년 정도 자란 소가 연간 250만 마리 정도 거래 되었다. 조선은 우금령(牛禁令)으로 농우의 도축을 엄격히 제 한하였으나(Kim & Cha 2015), 일제강점기 육우 생산을 위 한 노력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경의선 비현(枇峴)은 돼지의 사육과 거래가 많은 장터로 유명한 곳이었다. 평양북도는 특히 중국과 가까워 오래전부 터 농가 부업으로 돼지를 길러 왔고, 돼지 울음소리가 들리 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양돈업이 성황이었다. 1930년대 에는 도(道) 차원에서 요크셔(Yorkshire)와 버크셔(Berkshire) 같은 영국산 개량종을 보급하여 양돈 사업을 더욱 장려하였 다. 비현의 장날에서 거래되는 새끼 돼지의 수는 연간 7천 마리 정도였다. 생후 2개월 정도 돼지의 가격이 개량종은 15~30엔, 잡종(雜種)은 5~12엔, 재래종은 2~5엔 정도로 품종 마다 차이가 있었다. 철도로 수송할 때에는 평균 6마리를 한 상자에 넣어 보내는데, 연간 발송량은 약 200톤이었다.

    경원선 세포(洗浦)에 위치한 난곡기계농장은 200마리 정도 의 돼지를 사육하여 햄과 소시지를 만들었다. 난곡기계농장 은 일본이 제1차 세계대전 중 중국 칭다오에서 잡은 독일인 포로들에 의해 설립되었다(Miura & Kim 2008). 가격은 햄 1파운드에 70전~1엔, 소시지는 1파운드에 80전~1엔 20전이 다. 품질이 좋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일본과 조선에 거주하 는 외국인이 주요 구매 대상이기 때문에 대중성을 지니지는 못하였다. 연간 생산량은 햄 12,000엔, 소시지 6,500엔이었다.

    조선의 산에서 흔히 곰[熊]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평안북도 오지에서는 심심치 않게 발견되었 다고 한다. 과거 이 지역에서는 500마리에 달하는 곰이 돌아 다닐 정도였는데, 잡은 곰은 경의선 신안주(新安州)로 집결 되었다. 곰 사냥의 주목적은 쓸개 때문이지만, 가죽이나 고 기도 이용되었다. 가격은 곰의 크기와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데, 1930년대에 곰 한 마리(100근)당 쓸개가 30엔, 가죽이 20엔 정도라고 하였다. 철도 수송량은 연간 100마리 정도로, 무게로는 10톤에 가까웠다. 배송지는 평양과 경성으로, 대구 까지도 배송되었다.

    9) 조육류 및 조육류 가공품, 계란류

    조선은 농업 국가로 축산(畜産)은 소 사육에만 집중되어 있었으나, 1930년대 들어 양계(養鷄)가 조금씩 부흥되었다. 계란은 경부선 경성(京城), 경부선 진영(進永), 호남선 함열(咸 悅)이 특산지였다. 조선 내 양계 호수(戶數)는 약 1,500,000 호(戶)이고, 닭은 대략 6,200,000~6,300,000마리로 어림잡아 연간 산란액(産卵額)이 약 2억 개정도라 하였다. 하지만 소 비량에 비해 부족하여 중국에서 매년 약 120,000~130,000근 을 수입하였다. 함열은 종계(種鷄)와 계란의 최대 생산지였 다. 함열의 양계업은 1921년부터 세키소이치로(關宗一郞)가 시작하여 대규모로 성장시켰는데, 닭에게 과학적으로 연구된 사료를 먹인 결과 우량하여 영양 가치가 높기 때문이라 하 였다. 진영에서는 일본인 12명이 동업하여 계란공판조합(進 永鷄卵共販組合)을 설립하여 계란을 생산하는데, 철도 취급 량은 16톤이었다.

    메추라기는 경전남부선의 진영과 경부선의 부산진이 특산 지였다. 이중 진영이 가장 유명하였고, 가까운 부산진이나 평 양, 북청에도 있었다. 메추라기는 중국에서 전라남도나 경상 남도의 연안으로 찾아드는 철새로, 벼 수확이 끝난 이후 북 서풍을 타고 찾아오기 때문에 포획의 적기는 9~12월 중순까 지였다. 김해군 진영면을 중심으로 당시 연간 6만 마리의 포 획이 가능하였는데, 가을에서 겨울까지 3개월간 부산진에서 포획하는 양은 대략 5,000~10,000마리에 이르렀다. 보통 한 마리 당 30~40전으로, 시세가 높을 때는 70~80전이며, 시세 가 낮다고 하더라도 쌀 한 되 값에 맞먹었다고 한다. 잡힌 메추라기는 일본상류층의 가이세키요리 재료로 반출되었다.

    호남선의 김제(金堤)는 쌀의 고장답게 논 주변에 참새가 많았다. 특히 쌀 수확 철이 되면 참새의 극성은 극에 달해 면사무소에서 1921년부터 참새 다리 두 개를 가져오면 1마 리 당 현금 8리를 추출장려금을 줄 정도였다. 이렇게 잡은 참새는 통조림으로 탄생되었다. 통조림은 참새고기를 간장, 미림, 아지노모토[味の素]로 양념하여 여러 번 구워 만들었 다. 통조림 하나에 10필이 들어간 4다스가 1상자에 들어가 고, 중량은 12 kg으로, 연간 1백 상자 정도가 생산되었다고 하였다. 한 상자 가격은 16엔 가량이었다. 연간 철도 취급량 은 약 100상자로, 경성이 50상자 안팎으로 가장 많았다.

    10) 어패류 및 어패류 가공품

    생선으로는 동해안 북쪽 원산은 명태가 남쪽 포항은 대구 가, 남서해안에서는 조기가 유명하다고 하였다. 통영, 삼천포, 여수, 남해와 함께 경부선의 마산(馬山)은 조선에서 유명한 어장이었다. 동해안은 정어리, 청어, 명태처럼 떼 지어 헤엄 치는 어류가 많은 반면, 마산 지역은 도미, 문어, 가자미, 고 등어, 갯장어, 전갱이, 삼치, 붕장어 등 흩어져 다니는 고급 어류가 서식하였다. 남해안의 1930년대 연간 어획량은 대략 500,000엔 정도였는데, 이를 위해 총 1만여 척의 다양한 어 획선이 있었다.

    진해만 특산품인 대구[魚雪]는 12월 말부터 1월 말까지 불과 20~30일 동안에만 많이 잡혔다. 부산, 통영, 구마산 세 항구 중 구마산 어획량이 가장 많았는데, 연간 생산액은 100,000 엔 정도였다. 철도 취급량은 500~600톤이었다. 대구는 말리 면 조리하기도 좋고 가격도 높았기 때문에 생물보다는 건대 구[平干]를 만들었다. 건대구 1마리는 10전 정도에 거래되었 다고 하였다.

    경의선 신의주는 압록강 유역에서 뗏목을 타고 잡은 뱅어 와 뱅어포가 유명하였다. 뱅어는 압록강의 얼음이 녹은 봄철 2개월 동안 잡을 수 있었다. 신의주에서 잡은 뱅어는 30,000 관에 달하였고, 뱅어포로 만들면 5,000관이 되었다. 판매액 이 100,000엔을 돌파하였지만, 당시의 수요를 다 충당하지 못하는 실정이라 하였다. 뱅어는 말린 뱅어와 뱅어포로 가공 을 했다. 말린 뱅어는 뱅어를 삶아 간을 한 뒤 그늘에 말린 제품으로, 다량의 조미료를 사용하여 완성된 상품은 약간 짜 고 매운맛이 있었다. 가벼운 안주용으로 좋은데, 그 맛이 좋 아 일본 황실에까지 납품하였다고 한다. 뱅어포는 뱅어를 전 병(煎餠)처럼 얇게 구운 것이었다. 재료의 원형을 유지하는 말린 뱅어와 달리 뱅어를 완전히 구워서 만들었다. 1920년 에 일본인 업자에 의해 전병 형태로 구운 뱅어를 판매하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압록강 뱅어는 생산량 대부분이 일본으 로 배송되어 주로 오사카, 고베, 도쿄의 일류 식료품점에서 독점 계약으로 판매되었다. 소매가격은 100문에 1엔 50전 정 도로, 말린 명태의 30배에 달하는 가격이었으니 뱅어포 제작 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함경선 청진 앞바다에는 오상진(五常津), 삼포동(三浦洞), 이진(梨津), 대양화(大良化) 등 방어 전문 4개의 어장이 있었 다. 방어는 연간 150,000엔 정도 어획되었는데, 냉동된 후 대 부분이 일본으로 이출되어 조선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대량 생산물이라 하였다. 6월에 잡히는 여름방어와 가을방어의 크 기는 차이가 없으나, 맛이 떨어져 여름방어가 가을방어에 비 해 20% 정도 저렴하다고 하였다. 가을방어는 냉동고에서 냉 동되어 1마리 당 20엔 정도에 판매되었다. 방어는 냉동장치 가 달린 배에 실어 일본 시모노세키로 보내지고, 조선 내에 서는 나남 지역이나 간도(間島) 지역에 있는 일본 군인들에 게도 보내졌으니 결국 일본인들이 모두 소비하는 셈이 된다.

    염장조기[鹽藏石首魚]는 호남선 강경(江景)이 특산지였다. 황해도 용당포(龍塘浦) 앞에 펼쳐진 연평도의 연간 어획량이 1,000,000엔 정도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금강 하구 군산 항과 청도(靑島) 부근이었다. 여기서 잡힌 조기는 강경에 모 여 염장조기로 가공되었다. 소금에 절여 색이 변하고 단단하 게 된 염장조기는 10마리를 한 지푸라기에 묶어 판매하였다. 가격은 작은 조기가 15~20전이며, 큰 것은 30~35전이었다. 철도 취급량은 1925년에 685톤 정도였다. 배송지는 호남선 여러 지역 외에 대전, 김천 등 경부선 여러 지역도 포함되었다.

    호남선 군산의 부둣가 인근에 위치한 경장리(京場里)에는 냉동 공장이 있었다. 군산 인근 서해바다에서 잡히는 주꾸미, 뱅어, 새우, 도미, 고등어, 넙치, 조기, 농어, 동갈민어 등이 영하 30~40°C로 냉동어로 가공되었다. 하루 10~20톤을 생산 할 수 있는 제빙 시설과 저빙고(貯氷庫)를 갖추고 있었다. 냉 동어의 대부분은 냉장 장치가 설비된 선박을 통해 시모노세 키 공장에 발송되었다.

    오징어는 함경선 청진(淸津)의 특산으로, 너무 손쉽게 어 처구니없을 정도로 많이 잡혀 ‘바보 오징어’라 불렀을 정도 로 당시 어획량이 많았다고 하였다. 어장의 규모는 청진 인 근에 있는 바다 2~3리 정도였다. 어획량은 8월 중순~9월에 가장 많았는데 연간 200,000~300,000마리 정도가 잡혔다. 청 진의 소매가는 가장 비쌀 때가 1전 5리(厘), 가장 저렴할 때 가 5~6리 정도였다. 오징어는 생물, 냉동, 건조하여 유통되 었다.

    해삼은 경부선 구마산(舊馬山)은 동해를 통해 일본과 제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조선에서 가장 유력한 해삼 공급지였다. 채취 시기는 10월 초부터 이듬해 5월까지로, 11~12월에 가 장 수확이 많았다. 진해만, 통영, 고성 등에서는 젓갈용으로 쓸 해삼내장을 분리했다. 해삼 내장젓은 일본에서 숭어알 젓 갈, 성게알 젓갈과 함께 일본 3대 진미 중 하나로 손꼽히기 때문이었다. 신선한 해삼은 석유캔에 100개씩 넣어 조선 각 지로 보냈고, 말린 ‘건해삼’은 중국에 수출하였다. 해삼 가격 은 1캔에 보통 1엔 20전 정도였다. 해삼 내장 젓갈 1캔은 맏물 시세가 50엔 가량이고, 음력 2월 말에는 8~9엔으로 값 이 떨어진다. 연간 생산액 30만 엔이고, 1930년 철도 취급량 은 159톤이었다.

    함경선 신포(新浦)는 조선에서 유일한 게 내장 젓갈을 생 산하는 곳이었다. 게의 알이 다 성장하기 전에 신선한 알을 채취하여 만들었다. 포장은 미국에 있는 앵커 캡(anchor cap) 회사에서 만든 일명 ‘속이 보이는 통조림’ 용기로, 뚜껑은 양 철이었다. 가격은 4타(打)들이 1상자가 도매가 21원이고, 경 성의 소매가 1캔의 값은 60전 안팎이었다. 배송지는 경성과 부산이 대부분이었으며, 출하는 12월부터 2~3월까지만 이루 어졌다.

    성게알젓은 함경선 일신(日新)이 특산지였다. 1927년 오오 타카 신스케[大高新介]가 성게알젓 제조 사업을 시작하여 1930년대에는 연간 1만 5천 엔에 달했다. 병에 담아 출하되 는데, 큰 병에 60문 정도, 중간 병에는 45문, 작은 병에 30 문이 들어갔다. 배송지는 주로 경성, 원산, 성진 등이었다. 소 매가로 작은 병은 30전 정도였다.

    전남의 금창만(金倉灣)과 담진(澹津) 강구(江口), 경남 가덕 만(加德灣), 진교만(辰橋灣) 등을 비롯한 한반도 각지에서 굴 이 생산되었다. 이 중에서도 경원선 원산 영흥만 부근의 송 전만 굴이 가장 유명하였다. 송전만은 굴 생산을 위해 1909 년 대한제국 어업법 허가를 받았고, 1931년 일본수산흥업주 식회사(日本水産興業株式會社)가 굴 양식장 대부분을 가지고 있었다. 양식법을 평면식(平面式)에서 입체식(立體式)으로 전 환하여 4,800,000평 정도의 굴 양식장에서 10만여 관을 채취 하였다. 조선 내에서는 생굴로 각지에 발송되고, 말린 굴은 일본 고베, 대만, 중국 등으로 수출되었는데, 매년 670,000엔 에 이르렀다. 원산의 철도 발송량은 30,000~40,000 kg이었다.

    명태는 함경남도와 강원도 두 바다에서 잡혔다. 경원선 원 산(元山)과 신창(新昌)은 명태의 특산지였다. 명태잡이는 함 남의 신포충(新浦沖)과 마양도(馬養島) 부근을 중심으로 이 루어졌는데 조선 굴지의 중요 어업이었다. 명태 제품은 생물 과 건어물 두 가지로, 생물을 파는 경우는 적고, 동건법(凍乾 法)과 일건법(日乾法)으로 말린 건어물 제품을 파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가격은 풍어기나 계절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보통 200마리 1태(馬太)당 신선한 명태는 60엔 전후이고, 말린 명태는 80~100엔 가량이었다. 명란(明卵)은 함경선 신포(新 浦), 퇴조(退潮), 서호진(西湖津) 등 함경선 5개 지역의 특산 이었다. 함경선 개통 이전에는 이 지역들의 생산품 전량이 선박에 실려 원산에 도착하였으므로, 원산은 명태와 명란을 파는 시장으로 유명했다. 명란은 조선 사람은 물론 일본인에 게도 인기가 많아 1930년대 초반 연간 300,000~500,000관에 달하는 명란이 일본으로 이출되었으며 러시아, 중국으로도 20,000관정도 수출되었다. 명란의 출하량이 10월 말부터 많 아지는데, 1관들이 용기부터 5관들이 용기까지 다양한 크기 가 사용되었다.

    해파리를 대량 생산을 하는 곳은 학교(鶴橋) 뿐으로, 원산 지는 영산강 하류 전라남도 미암군 연안이라 하였다. 현재 지명이 바뀌어 학교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전라남 도 함평군 학교면(鶴橋面)으로 추정된다. 해파리를 가공한 병 조림[海月漬]은 전라남도 몽탄(夢灘) 특산품으로, 가격은 4병 들이 한 상자가 12엔, 한 병에 25전이었다. 주 거래처는 일 본으로, 생산량의 90% 정도가 목포를 거쳐 오사카, 나고야, 시모노세키로 보내지고, 나머지는 조선과 만주에서 소비되었 다. 바지락은 함경선 정평(定平)과 동해북부선(東海北部線)의 고저(庫底) 지역에서 생산되었다. 채취는 5월 초순~8월말이 었다.

    산천어(山川魚)는 함경선 부령(富寧)과 주을(朱乙)이 특산 지였다. 수성천(輸城川)의 상류지역인 부령은 급류에 산천어 가 많이 서식하였고, 주을천을 거슬러 서남쪽으로 2~3리 정 도 떨어진 보상동(甫上洞)으로 가면 시냇물이 가장 많이 몰 려드는 곳에 많았다.

    영산강은 유명한 뱀장어 포획지로, 몽탄에서는 뱀장어 통 조림이 생산되었다. 영산강 주변 무안, 나주, 관암에서 이른 봄부터 11월 사이에 잡은 뱀장어 포획량은 연간 7,000관 정 도인데, 30%는 생 뱀장어 꼬치가 되고, 나머지는 병조림으 로 가공되었다. 통조림 1백 몬메들이 한 통의 도매가는 80전 이고, 40몬메는 35전이었다. 40몬메들이 통조림 4개가 든 상 자 하나의 값은 16~17엔이었다. 장어덮밥을 좋아하는 일본 인들을 위해 주로 일본에 배송되었다.

    정어리는 식용으로 유통되지 않고, 지게미와 기름을 생산 하는 재료로 사용되었다. 또 이를 활용하여 어분과 경화유로 재가공 되었다. 정어리를 이용한 지게미와 정어리유 생산은 동해안 북쪽에 위치한 함경선 차호(遮湖), 군선(群仙), 일신(日 新), 웅기(雄基)가 특산지였다. 정어리 지게미는 비료용이고, 정어리유는 공업용으로, 주된 수요지가 일본이었다. 생산은 조선인과 일본인을 포함하여 차호지역에서 약 30호, 일신지 역이 25호, 군선과 웅기지역도 각각 수십호였다. 생산량은 정 어리 어획량에 따라 매년 다르지만 차호에서 보통 지게미가 15,000~23,000자루, 정어리기름이 50,000~70,000통 생산되었 다. 군선지역의 연간 생산량은 정어리 지게미가 10,000본(本), 정어리기름이 30,000여통이었다. 일신은 1920년대 중반부터 1929년까지 연간 정어리 지게미가 300,000본(本), 정어리기 름이 약 100,000통 정도 생산되는 성황을 누렸다. 웅기지역 의 연간 생산량은 정어리 지게미가 7,500톤, 정어리기름이 5,000톤이었다. 선박을 통해 오사카와 고베, 도쿄 등지로 운 송되었다(Shim & Ha 2017). 마키식[牧式]영양어분(魚粉)은 1932년 8월부터 제조 판매한 상품으로, 함경선 청진(淸津)의 특산물이었다. 영양가가 충분한 정어리 지게미를 식용분말로 제조하여 식품화한 것이었다. 어분은 1개월에 50톤가량 생 산되었는데, 25 kg들이 2천 5백 자루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오사카와 청진에 출하되었다. 경화유(硬化油)는 함경선 흥남 만의 특산품이었다. 정어리유가 원료인데, 조선질소비료주식 회사 흥남공장에서 수소(水素)를 이용하여 만들었다. 경화유 공장은 1931년 7월에 세워졌고, 조업은 1932년 3월에 개시 되었다. 계획하고 있는 연간 생산량은 약 15,000톤이었다. 경 화유는 양초와 비누용 원료나 고형지방(固形脂肪) 대용품으 로 소비되었다. 배송지는 일본, 조선, 인도, 유럽 등 세계 각 지였다.

    1931년 까지는 수산물의 이출이 수출보다 월등히 앞섰다. 그러나 1933년을 기점으로 이출과 수출이 역전되어 수출이 증가하였다. 경남지역 어시장의 수산물 수출이 가장 많았고, 다음은 함경북도였다. 1932년 만주국 건국과 1937년 중일전 쟁 등을 거치면서 만주와 중국지역의 수산물 수요가 급증했 기 때문이었다. 이는 1929년 경원선 개통과 1933년 웅기~회 령간 도문선(圖們線)과 만주 길림에서 함북 회령까지의 길회 선(吉會線) 등이 개통되면서 북만주와 길림성방면 배송을 원 활하게 도왔다(Kim 2017).

    11) 우유류

    우유는 경부선 노량진(鷺梁津)과 경원선 세포(洗浦)가 특 산지였다. 노량진에는 1906년에 창설된 아라이 목장[荒井牧 場]에서 연간 약 500섬이 생산되어 연간 30~40톤이 철도로 운송되었다. 세포에서는 미쓰하시목장[三橋牧場]과 난곡기계 농장에서 우유를 생산하고 있었다. 1916년 처음 승인을 받 아 1930년대 당시 젖소 40여 마리를 키워 1일 4섬(石) 가량 의 우유를 공급하였다. 주요 시장은 경성, 원산, 함흥 등이었 다. 1911년에 ‘우유영업취체규칙(牛乳營業取締規則)’이 만들 어지면서 우유의 생산과 보급이 체계화되었다. 냉장시설이 보급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생우유의 소비에 한계가 있어 일 본인들은 본국에서 들여온 연유와 분유도 소비하였다(Lee 2016).

    12) 양념류

    경부선 대전(大田)과 마산(馬山)에서는 일본식 된장[味口曾] 과 간장[醬油] 공장이 있었다. 1904년 츠지 킨노스케(謹之助) 가 대전에 창업한 공장은 1930년대 간장 5,000섬과 일본식 된장 20,000관을 생산하는 수준으로 성장하였다. 시장 가격 은 간장 1통(24 kg)이 4엔, 일본식 된장 1통(87 kg)이 9엔 가량이었다. 1930년에 철도 취급량은 간장 397톤, 일본식 된 장 168톤이었다. 경부선 마산에서는 일본인 6명에 의해 일 본식 된장과 간장이 생산되고 있었다. 원료로 함경남도, 함경 북도, 강원도의 대두와 경상남도, 경상북도, 황해도의 밀, 그 리고 관동주와 청도의 소금을 사용하였다. 1905년 업자 1명 의 양조량이 150섬이었던 것을 시작으로 매년 성장하여 1930년에는 간장 5,200섬, 일본식 된장 124,000관을 생산하 였다. 가격은 4말이 들은 간장 1병이 13엔 50전, 일본식 된 장 1병이 10엔 정도였다. 철도 취급량은 약 100톤 안팎이었 다. 경인선 인천에는 노다간장[野田醬油] 인천공장이 있었다 . 이 공장은 일본 노다간장에 버금가는 간장 생산지로 연간 10,000섬의 간장이 생산되고 있었다.

    경의선 선교리(船橋里)는 대일본정당주식회사(大日本精糖 株式會社) 조선지점 평양공장의 소재지였다. 조선 유일의 제 당(製糖)공장으로, 1920년 건설비 약 5,000,000엔을 들여 건 설되었다. 처음에는 경의선과 함경선 몇몇 지방에서 생산한 사탕무를 원료 일부로 충당하였는데, 1930년대에는 진남포 를 경유하여 수이입(輸移入)되는 고구마 원당(原糖)을 원료 로 사용하였다. 설탕의 연간 생산량은 16,000~17,000톤이었 다. 일제강점기 설탕의 소비는 문명의 우열기준이 되었다. 일 본인들에 의한 서구적 설탕문화의 소비는 제과제빵산업의 발 달과 함께 근대화의 시발점이기도 했다(Lee 2012).

    경인선 주안(朱安)은 소금 특산지인데, 염전 면적이 212정 보 남짓으로. 연간 생산양은 1천 7백만 근이었다. 경의선 맹 중리(孟中里)는 참기름 특산지였다. 원료인 깨는 대부분 만 주산(滿洲産)고, 연간 생산량은 약 100섬으로 가격으로는 13,000엔 가량이었다.

    면실유는 호남선 목포(木浦)가 특산지로, 목화산업의 부산 물이었다. 목화 최대 생산지는 전라남도이고, 목화씨로 만드 는 기름은 목포에서만 만들었다. 면실유 사업은 1916년 8월 에 처음 시작하였는데, 압착식 공법으로 목화씨 100근 당 기 름 10근, 면실박 44~45근을 추출하였다. 연간 생산량은 70,000상자로 대략 2,100여 톤이고, 이 중 철도 취급량은 10%인 200여 톤이다. 대부분 배에 실어 일본으로 보냈고, 조 선 내 배송지는 대구, 함흥 외 호남선 각 지역으로 보내졌다.

    경원선 삼방(三防)은 꿀벌 사육지였다. 삼방은 함남 안변 군 신고산면(新高山面) 남단이다. 7월 초 사철쑥이 피기 시 작하면 경성에서 양봉업자들이 이 지역으로 와 꿀벌을 기르 기 시작해 8월 하순까지만 이루어졌다. 사철쑥은 꿀벌의 유 일한 먹이로, 이 시기 삼방에 도착하는 꿀벌은 어림잡아 1,200~1,300마리라고 하였다.

    13) 주류

    주류는 포도주, 소주, 청주의 특산지가 기록되었는데 이중 소주의 특산지가 10곳으로 전체 특산물 중 빈도수가 가장 높 았다. 동해중부선 포항(浦項)은 삼륜포도주(三輪葡萄酒)의 특 산지였다. 포항 미츠와 농장 포도원에서 생산되는데, 연간 포 도 수확량은 100,000관으로, 최근 생산액은 생포도주 800섬, 브랜디 100섬, 달콤한 포도주 500섬이었다. 상표는 식탁용 생포도주(食卓用生葡萄酒), 식탁용 백생포도주(食卓用白生葡 萄酒), 달콤한 백포도주, 달콤한 적포도주, 브랜디, 올드브랜 디, 휴대용 올드브랜디, 휴대용 브랜디 등으로, 프랑스산 와 인과 견줄만한 품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생산 액의 99%가 배를 통해 일본으로 이출되었으나, 막걸리에서 당밀소주로, 이후 청주, 위스키, 브랜디로 조선인들이 술기호 가 바뀌어가고 있어 그 양이 줄어들고 있었다.

    소주(燒酎)는 경인선 인천(仁川)과 경의선 흥수(興水), 평양 (平壤), 서평양(西平壤), 순안(順安), 숙천(肅川), 남시(南市), 차련관(車輦館), 자산(慈山) 등이 10개지역이 특산지로 기록 되었다. 당시 도입된 맥주와 위스키가 일본 사케를 위협하고, 소주가 탁주를 위협한다고 하여 대중들의 소비가 높아지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조선의 신식 소주 소비량은 90,000섬이고, 가까운 시일 내에 소비량이 갑절로 늘어날 것 이라는 전망하였다.

    평양의 오히라양조[大平釀造], 마산의 쇼와주류[昭和酒類] 등은 이미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평양의 오히라양조, 즉 태평주조에서 만든 소주는 월선소주와 영월소주로, 1920년 대부터 해방이후 1960년대까지 인기가 있었다(National institute of Korean). 인천의 아사히양조주식회사[朝日釀造株 式會社]는 1919년 설립되어 조선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 닌 주조회사였다. 경의선 평양 소주는 1906년 다나카 슈스 케[田中周助]가 경제리(鏡齊里)에서 시작하였고, 1927년 사 토 큐타로[齋藤久太郞]가 대평양조회사(大平釀造會社)를 설 립하여 당밀을 원료로 한 저렴한 기계소주를 대량생산하였 다. 평양에서 발송하는 소주는 연간 5,000톤으로, 많은 해는 10,000톤에 이르렀다. 배송지는 경성, 부산, 대구, 전주 등 전 국 각지였다. 경의선 서평양역에서는 기림리(箕林里)에 있는 칠성소주(七星燒酒) 양조장에서 생산한 모든 상품이 출하되 었다. 경의선 순안(順安), 숙천(肅川), 남시(南市), 차련관(車 輦館)는 만주에서 생산된 조, 수수 또는 외국산 쌀 등을 원 료로 한 소주를 생산했다. 경의선 자산(慈山)도 역에서 동북 쪽으로 몇 정보 떨어진 곳에 있는 자산소주양조소(慈山燒酎 釀造所)가 있었다. 연간 생산량은 2,000섬으로 인근 지역과 경성, 세포(洗浦) 등지로 판매되었다.

    경인선 인천, 경부선 마산, 호남선 논산, 경의선 평양 등은 청주(淸酒)의 특산지로, 1931년도 조선의 청주 양조량은 대 략 6만 섬이었다. 이중 인천이 가장 유명한데, 조선양조주식 회사(朝鮮釀造株式會社)의 금강학, 마스다야상점[益田屋商店] 의 선학, 가노합명회사[嘉納合名會社] 의 백학의 품질이 좋 아 조선 외에도 만주와 대련 등 중국까지 판매되었다. 이 외 에도 인천에는 후카미상점[深見商店]의 성학, 대금, 히사고정 종[ヒサゴ正宗]이 있었다. 인천은 다른 기계소주가 감히 대 적할 수 없었다. 철도 취급량은 인천역에서 발송한 주류 합 계가 4,000여 톤이고, 그 가운데 일본주는 800여 톤이었다. 배송지는 경성이 500 톤으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다음으로 청진, 함흥, 원산, 김천 등이었다. 호남선 논산(論山) 은 명주(銘酒) 아침꽃[朝の花]이 유명하였고, 경부선 마산(馬 山)에는 빈학(濱鶴), 한모단(寒牡丹), 학림(鶴林), 염록(艶綠), 대전정종(大典正宗), 미생(彌生), 후쿠츠루 정종[富久鶴正宗], 소나무의 색[松の色], 아침의 나다[朝の灘], 달의 포구[月の浦], 사쿠라 정종[櫻正宗] 등이 생산되는 양조장이 13곳이나 있었 다. 경의선 평양의 청주는 1908년에 시작되었는데, 나카다 칸이치[中田勘一]가 평양 사쿠라마치(櫻町)에서 처음으로 양 조를 시작한 것이 기원이라 하였다. 1917년에는 사토 큐타 로[齋藤久太郞]가 사토주조합명회사(齋藤酒造合名會社)를 설 립하여 5,000섬에 이르는 대량 생산하였다.

    일제강점기 가장 큰 식문화의 변화는 주조(酒造)금지에 따 른 가양주(家釀酒)문화의 쇠퇴라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통 감부 시대에 공포된 주세법(1909)과 조선총독부제령 제2호 주세령(1916)은 오늘날과 같은 주세제도 형성의 시발점이 되 었다. 가가호호 계절마다 빚던 술을 세금으로 규제하고, 공 장 단위에서 양산하는 청주나 소주 생산체제로 바뀌었다(Lee & Gu 2017).

    14) 기타 식품류

    경의선 개성(開城)은 조선의 대표적인 인삼 특산지였다. 저 자는 개성인삼이 품질, 형태, 효능이 다른 나라에서 생산된 것보다 뛰어났다고 평가하였다. 인삼은 형태가 큰 것을 양품 (良品)이라고 하며 20편(片), 30편 등의 단위를 붙여 그 품위 와 가격을 정했다. 가격은 일정하지 않으나, 보통 1근에 8~9 엔에서 16~17엔 정도였다. 1930년 수삼 수확량은 약 437톤 으로, 이 중 148톤이 일본으로 이출되었다. 개성에서 보내는 인삼은 중국 수출용으로 인천에 100톤, 경성에 41톤이 수송 되었다.

    약재(藥材)는 경의선 중화군(中和郡) 상원면(祥原面)이 특 산지였다. 약 20년 전 중화군 천국면(天國面)에서 종자를 옮 겨 심은 것을 시작으로, 당시 약 20명의 재배자가 20,000엔 정도를 생산하고 있다. 경원선 세포에서도 약품, 약재의 수 송은 매년 꾸준히 증가하여 당시 연간 12,000톤을 돌파하였 다. 약재 종류로는 도라지, 세신(細辛), 만삼강활(滿蔘羌活), 당귀(當歸) 등으로 종류가 다양하였다.

    천연얼음은 경원선 서빙고(西氷庫)와 철원(鐵原)이 특산지 였다. 한강을 중심으로 서빙고와 강 건너편 노량진은 천연 얼음 채취 장소였다. 금강의 신탄진, 대동강의 사동, 압록강 의 신의주처럼 지역 천연 얼음을 채취하는 곳은 운송을 위 해 하천과 철로와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다. 서빙고는 하천에 가장 근접해 있어 얼음을 수송하기에 가장 적합하였다. 한강 천연 얼음은 1919~1920년 경 일본 큐슈로 이출되기 시작하 였다. 한 때 연간 12,000~13,000톤에 이르는 양이었다. 하지 만 일본에서 제빙 기술이 개발되면서부터 더 이상 이출은 이 루어지지 않았다. 1930년대 연간 채빙량은 1천 톤 안팎이며, 철도편에 의한 출하는 700~800톤으로 감소하였다. 봄이 되 어 한강의 얼음의 녹기 시작하면 철원에서 채빙하였다.

    ‘스가루(すがる)라 불리는 ‘꿀벌 애벌레’는 질그릇 냄비에 넣어 볶으면 고소한 맛이 나서 산간지역의 안주로 애용되었 다. 토종벌의 애벌레는 경원선 덕정(德亭)이 특산지이다. 경 기도 양주군에 있는 산림에서 채집하여 덕정리 금목농장(今 牧農場)에서 제조하였다. 1924년 9월부터 생산이 시작되었는 데, 1933년 계획은 300마리 정도 들어가는 80몬메(KJFC-34-6-651_img9.gif)짜리 통조림을 5,000개 생산이 목표라 하였다. 덕정역의 발송량은 1,500~2,000 kg 사이로, 일본 나카쓰가와, 가미스와, 다쓰노 등으로 배송되었다

    IV. 요약 및 결론

    朝鮮の特産에 기록된 철도 경부선, 호남선, 경의선, 경 원선, 함경선의 5개 노선과 지선을 중심으로 총 164개 지역 의 특산물을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각 지역의 특산물 은 총 317종으로 지역 간 중복되는 물종을 제외하면 211종 이었다. 이중 식품 특산물 100종이 159개 지역에서 기록되 어 전체 특산물의 47.4%였다. 경부선 47개 지역의 특산물 수는 총 93종이었는데, 이중 식품 특산물이 47종으로 전체 의 50.5%였다. 사과, 수박, 감, 밤, 참외 등 과실류의 비중이 높았다. 호남선 20개 지역에 기록된 특산물의 수는 총 48종 으로 이중 식품 특산물이 21종으로 전체 특산물의 43.8%였 다. 군산의 쌀과 서해안 연안 강경, 몽탄, 목포, 군산 등의 수 산물과 그 가공품이 많았다. 경의선 40개 지역의 특산물의 수는 총 65종으로 이중 식품 특산물이 32종으로 전체 특산 물의 49.2%였다. 장단과 순천에는 콩이 특산물이었으며, 소 주공장과 당면공장, 옥수수가공품이 생산되었다. 경원선 15 개 지역의 특산물의 수는 총 36종으로 이중 식품 특산물이 26종으로 전체 특산물의 72.2%였다. 원산의 토마토정어리통 조림, 세포의 햄과 소시지 같은 근대식 식품 가공공장이 있 었다. 함경선 총 42개 지역에 기록된 특산물의 수는 총 75종 으로, 이중 식품 특산물이 총 33종으로 전체의 42.7%였다. 천연지하자원이 많은 지역으로 상대적으로 식품 특산물의 양 이 적었다. 동해안의 정어리와 명태 활용이 많았다.

    식품군별로 살펴보면 방어, 명태, 고등어, 조기, 뱅어, 오징 어, 해파리 등의 어패류와 해삼과 성게 내장젓, 뱀장어통조 림 등 그 가공품의 양이 압도적으로 가장 많았다. 함경선의 동해안 연안 지역에서는 정어리가지게미와 정어리유로 가공 되어 일본으로 이출되었다. 과실류로는 사과, 감, 배, 참외, 복숭아, 수박, 밤, 잣, 딸기, 멜론, 앵두 등 한반도의 전통적 인 과일과 일본인들의 시험재배에 의한 서양과일들이 도입 되어 생산되었다. 채소는 속성재배기술에 따라 오이, 고추, 가 지, 토마토 등이 재배되었고, 토마토펄프를 활용한 토마토케 첩, 토마토정어리통조림이 생산되었다. 대두 만든 두부는 냉 동두부로 가공되고, 녹두를 이용한 당면이 생산되기 시작하였 다. 근대식 공장에서 설탕과 주류의 생산이 본격화 되었다.

    본 연구를 통해 첫째 일본이 일제강점기 동안 얼마나 많 고 다양한 물종의 조선 특산물 이출을 하였는지 알 수 있었 다. 물자의 효과적인 반출을 위해 일본은 우리에게 근대적 농사기술이 전수하여 농산물의 생산 증대, 외래종의 도입과 시험재배, 종자 개량화가 되기도 했다. 둘째 수산물은 건조 하거나 염장하던 전통적인 식품저장법을 벗어나 병조림이나 통조림, 추출과 여과를 통한 정유성분의 활용, 분말화 등 식 품가공기술의 발달로 근대적 식문화의 세계로 진입하는 시 점을 파악하게 되었다. 셋째 문화의 발전과 변용은 스스로의 성장 또는 타자에 의한 강제적 피동적 사건으로도 일어난다 . 일제강점기는 타자에 의한 강압과 수탈로 우리 역사에 큰 상처와 교훈을 남겼다. 이 과정에 식품의 생산과 소비문화도 크게 변모하였음을 확인하였다.

    감사의 글

    본 논문은 농촌진흥청 연구사업(세부과제번호: PJ0131120 32019)의 지원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Figure

    KJFC-34-6-651_F1.gif

    The cover and copyright ofSpecial products of Joseon (朝鮮の特産)

    Table

    Ratio of regional specialities throughSpecialities of Joseon (朝鮮の特産)

    Regional Specialities of Gyeongbu Line throughSpecialities of Joseon (朝鮮の特産)

    Regional Specialities of Honam Line throughSpecialities of Joseon (朝鮮の特産)

    Regional Specialities of Gyeongui Line throughSpecialities of Joseon (朝鮮の特産)

    Regional Specialities of Gyeongwon Line throughSpecialities of Joseon (朝鮮の特産)

    Regional Specialities of Hamgyeongwon Line throughSpecialities of Joseon (朝鮮の特産)

    Comparison of Regional Specialities throughSpecialities of Joseon (朝鮮の特産)

    Reference

    1. Chung YS. 2008. The Relatives Value of Unhulled Rice & Polished Rice and the Method of indicating their Quantity since Chosun dynasty. Quarterly Review of Korean History, 69:293-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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