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 론
김치는 한국인의 식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클 뿐 아니 라 정서적, 문화적 측면에서의 가치도 남다르다. 한국 음식 중 대표라는 위상을 갖다보니 근대 학문이 유입된 시기가 일 제강점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활발하게 영양학적 특성을 구명하는 연구가 진행되기도 하였다(Park 2017). 애초의 연 구목적이 물질적인 특성 구명이었다 하더라도 “왜?”라는 물 음을 좇다 보면 기원과 변천과정에 대한 역사적 관심으로 귀 결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관련 기록물 발굴이 필수적이었 고, 따라서, ‘1세대 식품사학자’들이 연구 초창기부터 중점적 으로 관련 연구자료 수집을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이들에 의해 김치의 기원, 제조방법의 변천, 중국·일본절임류와의 상관관계를 추론할 수 있는 김치관련 현전 기록이 상당량 발 굴되었다.
하지만 1세대 식품사학자들의 학문적 배경이 식품학, 농학, 영양학 등 자연과학분야였고 당시 참고할 만한 주변 학문분 과의 성과도 미미했기 때문에 이들에 의해 주도된 김치 역 사관련 연구는 해석의 깊이와 접근 관점에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한계와 오류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한 문 원전의 해독에 어려움을 겪던 후대 연구자들이 대개 이 들에 의해 1980년대 이전 번역 및 연구된 2차 자료에 의존 하다 보니 한동안 이 분야의 연구가 좀처럼 진전되지 못한 측면이 있었다.
최근 김치에 관한 새로운 원전 자료들이 추가로 확보되어 연구·발표되기도 하였고, 신라, 고려시대 목간(木簡) 발굴 을 비롯한 상고사(上古史), 고고학 및 언어학 등 주변 학문 에 의한 뒷받침도 가능해진만큼 상당부분이 개별 성과로 흩 어져 있는 이들 성과를 김치문화 및 제조사에 유기적으로 편 입시키고 충분히 검토·활용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새로운 연구 결과를 반영하여 기존의 통설을 재점검하는 일은 학문의 발전을 위해 매우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이 에 본고는 김치 역사와 문화에 관련된 가장 최신의 연구 성 과까지 포함해 김치의 기원 및 발달사에 관한 기존의 연구 들을 종합 검토하고 주요 쟁점에 대해 문화사적 관점에 입 각한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향후 김치 기원 및 문화 연구에 용이하게 활용할 수 있는 총괄적인 전거자료를 제공함과 동 시에 향후 연구의 방향을 제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II. 연구 내용 및 방법
1. 연구 내용과 범위
김치 역사는 크게 김치민속사적 영역과 제조발달사적 영 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 중에서 민속사 관련 분야의 연구 는 연구성과가 제한적이어서(Park 2012, 2013) 논점 재정리 의 필요성이 크지 않으므로 본고에서는 제조발달사 영역으 로 좁혀 고찰하고자 한다. 김치 제조발달사에서 주요 이슈는 김치 기원과 김치제조방식의 독자성 문제이다. 고추, 젓갈, 통배추 등 김치의 변천 및 발달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요소들의 유입과정과 시기 특정에 관련된 것이다. 본 연 구는 선행연구 내용을 원전자료와 대조 검토하여 기존 연구 의 오류를 수정 및 보완하고, 근래 새로이 발굴된 원전 및 인접분야의 최신 연구 성과까지 반영하여 김치의 제조방식 의 독자적 형성 배경과 변화 양상을 중심으로 김치의 역사 를 통사적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시기적으로는 절임채소가 만들어진 고대부터 통배추김치 제조법의 완성기인 19세기까 지를 포함하며 김치 어원과 관련된 내용은 별도로 발표될 예 정이므로 연구사만 간략히 다루고자 한다. <Figure 1>
2. 기존 연구 성과
김치제조사에 대해 최초로 문제의식을 가지고 연구를 시 작한 사람은 조백현(1900~1994)이다. 1938년「Jeochaego (菹菜考)1)」를 통해 김치의 주류인 통배추김치의 역사가 19 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며, 불과 100년 전까지 는 무김치가 주종이었음을 밝혔다. 하지만 당시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Donggugisanggukjip (東國李相國集)」(Lee GB 1200s), 「Sallimgyeongje (山林經濟)」(Hong MS 1643~ 1715), 「JeungboSallimgyeongje (增補山林經濟)」(Ryu JI 1766), 「Imwongyeongjeji (林園經濟志)」(Seo YG 1827)정도에 불 과해 김치의 제조변천사를 온전하게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 었다.
본격적인 문헌 수집을 통해 한국 김치 제조변천과정을 연 구함으로써 후속 김치 제조기술사 연구에 기본 뼈대가 완성 된 시기는 1970년대로 소위 1세대 식품사학자들에 의해서다. 「한국 저채류 제조사」(Jang 1972)와「한국 저채류 기원 고」(Jang 1975),「한·중·일에서의 김치류의 변천과 교 류에 관한 연구」(Lee 1975)는 한국과 중국, 일본 문헌에 흩 어져 있는 김치관련 기록을 수집하여 김치의 기원을 추론하 고 한국의 김치는 고추와 젓갈 양념을 이용한 2차 발효개념 이 존재한다는 ‘제조방법의 독자성’에 관한 이론을 처음으로 정립함으로써 이후 김치 역사 연구의 출발선을 제시하였다. 1980년대 접어들어, Yoon(1987, 1988)은 일본 고대문헌인 「Shosoinmonjo (正倉院文書)」(752)와 「Enkishiki (延喜式」 (平安 900~1000) 기록을 심도 있게 연구하여 일본 장류 및 저채류 등 발효음식의 원천기술이 한반도로부터 전수되었다 는 기존의 가설을 증명하였다. <Figure 2>
한편, Kim(1998a, 1998b)은 선학(先學)들이 한반도 저채류 기원을 중국의 저채(菹菜)에서부터 찾되 이후 독자성을 확보 하였다는 논지를 편데 반해, 오히려「Jeminyosul (齊民要術)」 (Ga SH 500s)의 저채(菹菜)가 백제에서 전파된 기술의 결과 라는 ‘한반도 역전파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소수설이긴 하 지만 고대사에 대한 사료와 고고학적 성과가 미미한 가운데 고대 저채류의 정체성을 규명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의 의가 있다. 왜냐하면 이들 연구가 발표된 이후 현재까지 식 품학계에서는 고대 저채문화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시도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고대사의 사료부족 문제 외 에도 후학들이 주로 자연과학자들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 은데 한중일 문헌사료에 대한 접근과 해석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다. 관련하여, 최근 황하문명 보다 시기적으로 1천년 이상 앞설 뿐 아니라 훨씬 더 뛰어 나다는 요하문명이 동이족 문화임이 밝혀지는 등 우리민족 과 관련 된 고대 문명과 문화에 대한 다양한 고고학적 연구 성과들이 나타나면서 김치 기원에 관해서도 새로운 이론 제 기의 계기가 마련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갖게 된다.
이후 한동안 김치 제조사 연구는 조선시대 농서와 조리서 류서류에 기록된 제조법 자체만을 통시적으로 연구하는 데 에 집중되어왔다(Yoon 1979;Lee 1988;Lee 1989;Lee & Ann 1995;Yoon 1991). 초창기 식품사학자들이 김치의 제조 법을 중국계 조리법과 조선식으로 구분하는데 무게를 두면 서 김치의 독자성에 집중하였던 것과 달리, 조리서 자체 기 록 내용에 국한하여 계량적인 분석을 하는 것이 주류를 이 루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문헌을 단순히 전재(轉載)한 것과 고유 속방(俗方)을 별도로 구분하지 않음으로써(Lee 1989;Lee 1994;Cho 1994; Ann & Lee 2007) 이 연구결과를 활용한 연구자들이 중국식 김치와 한반도 고유 저채문화를 혼동하는 사례도 생겨났다.
2012년, 이러한 연구관행과 방식을 환기시키는 성과가 발 표되었는데(Park 2012) 중국식 저채와 속방(俗方)의 김치를 구별 짓고 고대 절임채소를 의미하는 중국유래 한자어 저(菹) 가 어떤 배경에서 조선시대 한자 조어(造語)인 침채(沈菜)와 더불어 김치를 뜻하는 표기어로 혼용되었는지를 의례사와 연 계하여 풀어냈다. 이 연구 성과에는 초기 연구 이래 추가로 확보된 고조리서와 조선시대 문집 200여권으로부터 발굴한 김치관련 기록을 총 망라하여 조선이전 김치민속, 주요재료 유입과정과 그에 따른 김치제조법 변천과정을 광범위하게 다 루고 있다. 이 과정에서 새로이 발굴된 이서우(1633~1709) 의 시를 통해 김치제조에 고춧가루가 사용된 시기가 「JeungboSallimgyeongje (增補山林經濟)」(Ryu JI 1766)나 「Somunsaseol (謏問事設)」(Lee SP 1700s)보다 앞선다는 것도 밝혀낸 바 있다.
이후 조선중기 김치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조리서인 「Choissy Eumsikbeop (崔氏飮食法)」과 「Juchochimjeobang (酒醋沈菹方)」(Park 2015;Park & Lee 2015;Park & Kwon 2017), 「Gyemiseo (癸未書)」(Han & Kim 2018) 등 이 추가 발굴되면서 김치 제조사에 중요한 단서들이 보태어 졌고, 이를 통해 젓갈이 고춧가루보다 앞서 1400년대부터 김 치에 사용된 근거도 새로이 확보되었다. 근대 이후 김치제조 사 연구로는 김치의 대표격인 통배추김치 제조 변화과정을 일제강점기 인쇄매체 기록 연구를 통해 확인한 성과가 있으 며(Park 2006) 김치에 사용되는 고춧가루양의 증가 추세를 분석한 연구(Seo & Chung 2015)와 김치의 명칭에 관한 연 구(Cho 2007;Kim & Hong 2009;Kim 2012)도 있었다. 기록물을 통한 통시적 제조변천사 연구의 보완 차원에서 세 계김치연구소는 토속김치민속조사 및 탈북자를 통한 북한김 치문화 등 지속적으로 결과물을 구축하고 있으므로 이를 활 용한 공시적 연구도 활발히 이루어지길 기대해본다.
김치의 기원과 더불어 어원문제도 주요 관심사이다. 김치 표기어 문제는 주로 ‘김치’의 어원을 풀기위한 관심에 집중 되어왔다(Lee 1999;Chung 2008;Kang 2012). 즉, 중국에 존재하지 않는 한자 조어 ‘沈菜’가 ‘팀채→딤채→짐채→짐치 →김치’로 음운변화를 거쳐 정착한 것으로 보는 입장과 고유 어로써 ‘딤채’라는 말이 먼저 존재하였고 이를 표기하기 위 한 용어로 한자어 ‘沈菜’를 차용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Baek(2016)은 2016년 세계김치연구소가 주최한 ‘김치학 심 포지엄’에서 그동안의 연구 내용과 최신 발굴 자료를 종합하 여 ‘팀채와 딤채’는 한자어 ‘沈菜’의 각기 다른 시기 발음이 라는 것을 발표한 바 있다. ‘김치’는 ‘沈菜’의 상고음(上古音) 혹은 중고음(中古音)인 ‘딤채’를 양반 지식인층이 과도교정 을 행해 만들어진 어형이고, ‘팀채’는 ‘沈菜’의 원대 근고음 (元代 近古音)으로 주로 문어체(文語體)에서 쓰인 것이라”는 결과를 통해 일련의 논쟁이 일단락 지어졌다.
III. 결과 및 고찰
1. 김치의 기원: 자생론과 전파론
현재 우리가 먹는 김치의 초기형태는 절임채소(이하 저채 류)이다. 겨울철 채소류를 저장하기 위해 시작된 가공방식으 로 농경생산에 의한 잉여작물을 일정기간 보관해두었다가 필 요한 때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정착생활이 시작된 농경문 화 이후의 산물로 본다. 한반도에서 저채류문화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 시원에 관하여는 여러 견해가 있다.
첫 번째는 ‘중국 전파론’이다. 대체로 초창기 식품사 연구 자들은 절임기술이 중국에서 시작해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전파되었다는 입장에 있었다.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당시 고도화된 기술의 발원지를 대부분 중국으로 보았던 사대주 의적 역사관이 깔려있다. 20세기 초에 퍼져있던 ‘문화는 중 심부에서 주변부로 퍼져나간다’는 문화전파론적 입장과도 일 맥상통한다. 이러한 생각을 강화시키는데 일조한 것은 저채 류에 관한 현전 최고 기록인 중국 「Sigyeong (詩經)」(BC 10C)의 구절이다. “오이를 절여 저(菹)를 만들어 조상에게 바 친다.”고 되어있는데 이때 저(菹)가 오이절임을 지칭한다. 더 욱이 저(菹)라는 글자가 조선시대 이래 김치무리를 지칭하는 글자로 쓰여 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한반도 김치가 중국의 저채문화를 계승한 것으로 연결시켜왔던 것이다.
두 번째는 백제의 김치문화와 중국 산동지역 저채문화의 뿌리가 같다는 ‘한반도 역전파론’이다. 앞서 선행연구 검토 에서 언급한 대로 1990년대 Kim(1998a, 1998b)이 제기한 가설로 중국 저채류 조리법에 관한 최고(最古) 기록인 「Jeminyosul (齊民要術)」(Ga SH 6C)의 저(菹)가 백제 저채 류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추정에 의한 것이다. 북위 (北魏) 산동지역이 고대 동이족 영향권이었으며 백제와의 지 속적 교류를 통해 저채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다. 「Jeminyosul (齊民要術)」을 집필한 북위(北魏) 고양군(高陽 郡: 현재의 산둥성) 태수(太守)였던 가사협(賈思勰)이 백제의 후손일 가능성도 제기하였다.
식품학자들이 주도한 중국 전파설과 한반도 역전파론은 중 국의 저채류가 초산(醋酸)의 신맛의 비중이 높은 반면 한반 도의 저채류는 장류와 소금을 담금원으로 활용하는 젖산발 효 비중이 높다는 차이에 대한 고찰이 기반되어 있다(Park 2013b)2). 그로 인해 한반도 저채류는 물김치, 양념김치 등 버 무림형태로 독자적으로 발전될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였 다. 전파론적 입장에서는 중국의 절임기술이 수용되는 과정 에서 초산보존기술은 쇠퇴하고 염보존문화만을 수용하였거 나(Jang 1972, 1975) 두 가지 모두 전파되었다가 초산보존문 화가 사라진 것(Lee 1975)이라 보았다.
세 번째는 1990년대 제기된 ‘자생론’으로 문화상대주의에 입각해 누군가에 의한 기술적 발명이 선행되고 이것의 전파 가 큰 사건을 계기로 이루어진다는 전제를 비판한 것이다 (Joo 1988). 소금은 물론 술, 식초문화도 고대부터 각 문명권 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였기에 북위 35~45도 지역에 거주하 는 농경사회에 이들 담금원을 이용한 저채류 문화가 보편적 으로 자생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렇게 단정 짓기 어려운 주장들이 제기 되고 있는 가운 데 고대사와 연계된 김치 제조기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는 좀 더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은 부분이 검증되 어야 할 것이다.
첫째, 요하문명의 발굴로 동이족 문화가 새로이 조명되면 서 보다 진전된 고대 저채류 문화에 대한 연구가 필요해졌 다. 저채류 문화의 시원이 중국(엄밀히 말하면 한족계열)인 지 한국(동이족 등 우리민족계열)인지를 따지는 민족주의적 접근이 아닌 보다 열린 자세가 요구된다. 1980년 이후 중국 고대사 기존 통설을 뒤집는 큰 성과로 황하문명보다 무려 1 천년 앞선 요하문명이 유적으로 확인되었다(Yang 2010)3). 요 하문명은 동이족4)이 향유하던 상당히 발달된 문화이다. 요하 문명의 주체인 동이족은 내몽골에서 만주, 고조선(한반도)으 로 이어지는 북방민족의 문화계통으로 우리 민족과 직결된 다는 주장도 있고, 중국 고대국가인 은나라(상나라), 주나라, 고조선이 동이족 계열에서 각기 동서로 분화·이동하였다는 주장도 있다(Wu 2006;Song 2014). 아직 요하문명의 주체 에 대해 고고, 사학계에서 통일된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으 며, 지속적으로 관련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 서 꾸준한 관심을 통해 새로운 연구 성과들을 포함하여 김 치의 ‘물질적 기원’과 함께 ‘문화적 기원’을 정립해 가기 위 한 연구자세가 필요하다.5)
또한, 고대 부족국가 단계의 국가와 민족의 개념은 지금과 사뭇 다른데다가 교류, 접촉, 이동이 지금보다 훨씬 유연했 다. 그러한 연유에서 저채류의 시원이 중국의 한족 계열인지 한민족 고유의 것인지를 구별하기 위한 연구보다 ‘왜 중원지 역의 저채는 신맛이 강한 쪽으로,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지역 의 저채는 아미노산계 감칠맛과 유산발효를 지향하는 방식 으로 분화되었는지’ 그 배경과 시기, 차이가 가져온 식문화 적 변화에 집중하는 연구로의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상고사 분야의 연구에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으 로 판단된다.
둘째, <Table 1>에 제시하였듯이 술과 식초가 자연발생 하 였다고 해서 이를 담금원으로 하는 저채류도 자연발생 하였 을 것이라는 주장은 허점이 있다. 기술 발전단계를 감안할 경우, 소금으로 1단계 단순저장·보관하는 기술과 한 차원 고도화된 담금원인 식초, 장, 메주, 술 등의 제조 선행기술은 신석기 농경문화 시작과 궤를 같이 하므로 오래 전 각자 문 화권에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소금을 제외한 고도화 된 담금원을 이용해 저장하는 것은 2단계 응용기술 로 맛/보존성 향상 기술을 수반해야하므로 상당시간이 경과 된 이후 발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7)
이 때 각기 음식문화와의 조화, 기호, 경제사회적 여건에 맞추어 중국은 초산발효 위주로, 한반도는 젖산발효 중심으 로 발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채소절임 방식이라도 소금절임 에 비해 장(醬) 및 식초절임은 기술집적도 수준에 차이가 있 기 때문이다. 채소절임에 필요한 담금원 제조 선행기술 중 초기형인 짠지형 저채류는 소금을 보유한 곳에서 자연스럽 게 생겨날 수 있다. 고염도 조건에서 미생물 생육 억제를 통 해 저장기간을 연장하는 방식은 고도화된 노하우를 요하지 않는다. 게다가 소금은 별도의 추가 가공단계가 필요하지 않 기 때문에 소금을 담금원으로 하는 단순 저채류 제조기술은 문화권별로 자생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메주, 장, 누 룩, 술, 식초 등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가공공정에 대한 기술 노하우가 확보되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염을 이용해 2차 가공한 장, 메주로 절임을 만 들거나 술 부산물과 식초를 이용한 저채류를 만들기 위해서 는 우선 담금원을 만드는 제조기술의 확보가 선행되어야 함 은 물론, 채소의 초기 미생물 제어를 위한 전처리 방식, 저 장성 향상을 위한 용기 제조 기술도 함께 발달하여야 한다. 따라서 절임채소의 시원을 2단계로 분리하여 보아야 한다. 소금에 절인 단순절임 저채류가 농경문화 초기 자생하였을 것이라는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2차 가공 담금원인 장, 식초, 술지게미 등을 이용한 기술은 좀 더 고도화된 기 술노하우를 각자 환경과 문화 여건에 맞게 발달시킨 것이기 에 자생론이 주장이 힘을 얻으려면 이 후행 기술 역시 각 문 화권에서 자생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어야할 것이다.
2. 주변국 기록과 유적을 통한 한반도 발효음식문화의 추정
동북아시아 절임채소 문화 존재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 된 기록은 기원전 10-7C까지의 시(詩)를 모아 공자가 엮은 중국의「Sigyeong (詩經)」이다. ‘밭 안에 오이가 있으니 이 것을 벗겨 저채를 만들어 조상(祖)께 바친다(獻)’는 내용이 있다. 통상 제사음식의 성격이 귀한 음식이라는 점을 감안하 였을 때 당시 의례음식으로서 저채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 게 해준다(Shin 2005). 주나라 예법을 기록한「Jurye (周禮)」 <천관총재>에는 해인(醢人)8)이라는 관직이 존재하고 있어 지배계층의 문화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고대 중국의 저채류가 신맛이 강하며 오래 저장해 물러지 지 않도록 만들어 오래 저장해 두고 먹는 음식이었다는 것 은 여러 고사(古事)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주나라의 문왕 이 창포저를 매우 좋아해서 공자도 이를 듣고 얼굴을 찌푸 려가며 먹었는데 3년이 지난 후에야 익숙해질 수 있었다.”는 「Yeossichunchu (呂氏春秋)」(Lu F, BC 235)의 기록은 저채 가 산미가 강한 음식이었다는 정보를 알려준다.
후한대의「Seongmyeong (釋名)」(Yu X, BC 200s)에 나 오는 저(菹)의 풀이를 보면 “저(菹)는 막는(阻) 것이다. 발효 시켜(釀) 차지도 덮지도 않은 곳(寒溫之間)에 두어 물러지지 않게(不得爛) 한 것” 이라 했다(Park 2013b). 즉, 발효라는 방법을 사용해 상하거나 물러지는 것을 막기(阻) 위한 저장 음식이라는 의미이다. 덧붙여 “소금(鹽), 곡물(米)로 저(菹)와 같이 발효시켜(釀) 익혀(熟) 먹는 것은 자(鮓)인데 이것이 바 로 저(菹)와 같은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저(阻)는 원재료가 상하는 것을 막는다는 의미로, 부득난(不得爛)은 저채로 담 근 뒤 물러지는 연부현상(soft decaying)을 막는다는 의미로 여겨진다.
이와 같이 고대부터 후한(後漢)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기 록을 보면 중원(中原)의 저채류는 곡물과 소금을 이용해 저 장함으로써 강한 산미(酸味)9)를 내게 된 음식물인 것으로 추 정 가능하다. 북위(北魏)의「Jeminyosul (齊民要術)」에는 식 초를 이용해 만든 저채류 제법 및 채소의 탈수 및 미생물 살 균법이 실려있어 싱건지류로 이행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 으나, 후한(後漢)대까지는 소금, 곡물, 장을 담금원으로 하는 초보적 저채류문화 수준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한반도의 발효문화를 추정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중국(220~280)「Samgukji (三國志)」<Wiseo (魏書)> 로 고구려인들이 발효식품 제조에 능했다(自喜善藏釀)는 정 보를 담고 있다. 백제의 발효음식제조 기술을 추정할 수 있 는 단서는 일본 나라시대(奈良 710~784) 평성궁터에서 발굴된 목간(木簡),「Shosoinmonjo (正倉院文書)」(752),「Enkishiki (延喜式」(900~1000)에 기록된 수수보리지(須須保利漬)이다. 소금 및 콩이나 쌀을 원료로 사용하여 만든 것으로 현재 그 명칭은 사라졌으나 일본 저채류 중 쌀겨나 된장을 이용한 저 채류의 원형에 해당되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일본에 양조 기술을 도입한 사람이 백제인 인번(仁番)으로 지금도 일본에 서 주신(酒神)으로 모셔지고 있는데 그의 또 다른 이름이 수 수허리(須須許理 スズコリ, 또는 수수보리)라는 것이다. 따라 서 일본 저채음식에 수수보리지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가 이 를 전달한 사람이 백제인 수수보리였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우리나라 학계의 다수설10)이다.
통일신라의 신문왕(683)이 김흠운의 딸을 신부로 맞으면서 보낸 납채 물목에도 발효식품이 포함되어 있다. 중국으로부 터 유학(儒學)을 받아들이고 의례서인 「Yegi (禮記)」를 수 입했던 신문왕이 유교적 예를 갖추어 신부에게 보낸 폐백품 목이 쌀(米), 술(酒), 기름(油), 꿀(蜜), 포(脯), 장(醬), 시(豉), 젓갈(醘)11) 총 135 수레였는데 장과 메주, 젓갈과 같은 발효 식품이 포함되어 있었다.
고고학적 유적을 통해서도 삼국시대이전 발효음식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제 1세대 식품사학자들이 삼국시대의 저채 류 문화 존재의 근거로 꼽아왔던 유적으로 속리산 법주사의 석옹(石甕)이 있는데 겨울철 채소를 절여 저장한 대형독이었 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법주사 관계자의 허가를 얻어 촬영한 석옹 내부를 보면 육면체의 돌을 항아리처럼 타원형 으로 쌓은 형태이다<Figure 3>. 돌 사이 틈이 벌어져 있으며 야외에 묻혀있는 것으로 보아 단순히 높은 염도의 담금원에 절인 함저형 저채류 정도를 만들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2000년대 이후 목간(木簡)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삼국시대 식생활 추정에 도움될만한 성과들이 있었다(Lee 2007;Kwon 2014). 출토된 목간은 가공식품 용기에 부착되었던 것 으로 내용물과 수량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신라 안압지 에서 출토된 목간에서는 젓갈에 해당되는‘醘, 醢(해, 젓갈)’, ‘助史'(‘젓’의 이두 표기)’와 동물로 만든 육장(肉醬)과 젓국 즙(水助史)과 장(醬)이라 추정되는 표기들이 확인되고 있어 발효음식 발달정도를 정교하게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12) 중 국「Jurye (周禮)」와「Yegi (禮記)」에 나오는 멧돼지(猪), 노루(獐)와 같이 수렵을 통해 확보할 수 있는 식재료로 만든 육장(醓)류가 상당수였다는 점은 고대사회 식문화의 유사성 을 시사하는 것이다. 어물을 이용한 저장음식이 많았던 조 선시대와 식재료 수급방식에 있어 확연히 비교가 되는 부분 이다.
2015년 10월에는 사적 제309호인 남원 실상사(實相寺)에 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고(醬庫, 장과 독을 보관하는 공간) 건물터와 항아리들이<Figure 4> 발견 됐다(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2015.10.27.).
2017년 12월에도 고고학적 발굴 성과가 있었는데 강원도 삼척 흥전리에서 발굴된 통일신라 절터에서 간장, 된장 항 아리 12개가 묻혀있는 장고터<Figure 5>가 확인됨으로써 일 상생활 깊이 자리잡았던 고대 저장음식문화를 파악할 수 있 게 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건물지 내부에 항아리 12 점을 묻어 둔 것인데 이러한 형태는 남원 실상사, 경주 황룡 사지 등과 유사한 형태로 사찰 주방의 부속시설인 장고(醬庫) 였음이 밝혀진 바 있다(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2017.12.5.).
아쉽게도 지금까지 김치형태를 직접적으로 특정할 수 있 는 기록이나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간접적인 정황으로 미루어 삼국시대까지의 저채류는 소금과 장을 위주였을 것 으로 보인다.
즉 고대 소금, 장, 곡물을 담금원으로 하는 중국과 한반도 의 유사한 저채류 문화가 달라지게 된 것은 짠지형에서 싱건 지형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분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중원 (中原)지역은 강한 산미를 지향하는 방식으로, 한반도는 아미 노산계 감칠맛을 선호하는 방식으로 변화해 갔기 때문이라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시기적으로는 중국의 경우 남북조시대 이 전, 한반도는 고려시대 즈음일 것이라는 가정을 해봄직 하다. <Table 2>
3. 김치의 재료와 제조방법의 변천 과정
우리나라 문헌 중 저채류를 직접 언급한 기록은 고려시대 이규보의 <가포육영>이 최초이지만 자세한 제조방법 파악이 가능한 조리서로 가장 오래된 기록은 2003년 학계 공개된 「Sangayorok (山家要錄)」(Jeon SU 1400s)이다. 따라서 저채 류 제조방법의 역사적 변천연구는 조선시대에 한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며 대개 원재료, 제조방법의 변화과정을 분석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왔다(Lee 1988;An 1994;Lee 1994;Cho 1994;Lee & Ann 1995;Chung 2008;Cho 2010). 2000년대 이후 신규기록이 발굴되면서 단서들이 추가되었고13), 문화사적 연구방법론의 흡수로 레시피의 변화에 미친 문화적 요인까지 고려하는 연구로 변모되어 갔다. 이에 본고에서는 현재 발굴된 기록물에서 찾을 수 있는 김치제조 변천 과정을 종합하고 주요 쟁점에 대한 해석을 재정리해 보았다.
1) 소금과 장으로 만든 김치; 겨울철 저장음식에서 4계절 부식으로
우리나라 초기 저채류의 경우 소금과 장류를 담금원으로 하는 것이 주축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문헌에서 도 소금과 장으로 담근 저채류가 확인되며, 그 명칭도 염제 (鹽虀), 지염(漬鹽), 염채(鹽菜), 침채(沈菜), 장과(醬瓜) 등으 로 표기하고 있다. 앞서 신라 진흥왕 553년 창건한 속리산 법주사의 석옹(720년 성덕왕 때 설치), 신라 흥덕왕 828년에 건립한 남원 실상사의 장고, 삼척 흥전리 통일신라 절터의 장고와 신라 승려 각연이 김치를 담가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 해진다는 덕유산 장수사(신라 소지왕 487년 창건)의 침채옹 (沈菜甕) 전설14)을 보더라도 소금과 장을 담금원으로 이용한 절임방식이 주를 이루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이규보(1168~ 1241), 이곡(李穀 1298~1351), 이색(李穡 1328~1396) 등 고 려 문인들이 남긴 글에도 소금과 장을 담금원으로 이용한 저 채류 기록이 보인다.
① 소금에 절인 염제 吐箇虹蜺萬丈氣
무지개 같은 만 길의 호기(豪氣) 토로하고 贈之氷雪三條詩
빙설처럼 청고(淸高)한 세 편의 시 주었으니 莫道鹽虀情味薄 소금에 절인 야채(野菜) 맛 없다 마소
「Donggugisanggukjip (東國李相國集)」<복답(復答)>
⑤ 병환 중에 보내온 오이장아찌 病裏醬瓜如蜜稀
병중에 오이장아찌가 꿀처럼 귀했는데 老年堂姉小相依
노년에 당내 누이를 약간 의지한 터라 凌晨赤脚擎來送
새벽에 하녀를 시켜 장아찌를 보내올 제
「Mogeunsigo (牧隱詩藁)」<즉사(卽事)>
④ 소금 김치 지염(漬鹽)
得醬尤宜三夏食 장을 곁들이면 한여름에 먹기 좋고
漬鹽堪備九冬支 소금에 절이면 긴 겨울을 넘긴다
根蟠地底差肥大 땅속에 도사린 뿌리 비대해지면
最好霜刀截似梨 좋기는 날 선 칼로 배 베듯 자르는 것
「Donggugisanggukjip (東國李相國集)」<가포육영(家圃六詠)>
소금과 장만을 침채원으로 사용한 이들 고려시대 저채류 는 젖산발효에 의한 은은한 신맛을 지니게 된다. 초산발효 저채류가 다른 음식에 산미를 제공하는 조미료로 쓰일 수 있 는데 비해 젖산발효가 주류인 고려시대 저채류는 곡류 위주 의 식사를 돕는 반찬으로서 역할에 주력하게 된다.
고려시대 저채류에 관한 기록 중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 은 <가포육영>에서 “한여름에 먹기 좋다(得醬尤宜三夏食)” 고 한 장(醬)에 절인 여름철 무김치이다. 이는 겨울철 저장 을 위해 만들어졌던 저채류가 계절성을 뛰어 넘은 주요 부 식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김치의 형태가 된 장에 박아 만든 형태인지 간장에 절인 형태인지, 즙장으로 만든 즙지히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렇지만 콩을 발효시켜 만 든 장류를 활용함으로써 젓갈을 사용하기 이전 시기 아미노 산계 감칠맛을 부여하는 제조법이 보편화되었다는 것을 명 백히 보여주고 있다(Park 2014). 단, 저온저장시설이 없는 고 려시대 여름 3개월이라고(三夏) 했으니 단기저장 형태로 간 장이나 즙장에 담은 저채류였으리라 추정된다. 간장과 즙장 을 이용해 만드는 저채류는 조선전기 조리서에서 자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고려시대 이래 지속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i) 조리서에 기록된 간장으로 만든 저채류는 주로 가지와 오이를 주원료로 하고 있다. 향신채인 파, 마늘, 생강과 함께 끓인 간장과 참기름을 부어 저장해두고 먹을 수 있게 만들 었다. 오이와 가지 수확이 가능한 5월부터 서리가 내리기 전 까지 두루 이용되었다. 조선중기에는 간장을 단독으로 사용 하거나 마늘, 산초, 형개, 생강 등 향신양념과 동시에 사용하 는 방식이 주를 이루다가 「JeungboSallimgyeongje」 이후 조리서부터는 오이와 가지 소에 두부나 고기까지 넣어 고급 반찬형태로 만든 경우도 등장하였다. 궁중 제사 때 필요한 목록을 적어둔 「Salleunghyangsuchaek (山陵享需冊)」(1897) 에는 더덕, 오이, 가지, 무로 만든 장김치(醬菹)가 제사음식 으로 기록되어 있어 장김치의 재료가 오이, 가지에만 국한되 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①「Suwunjapbang (需雲雜方)」 <香苽菹 향오이지>
어린 오이를 골라 물로 씻지 말고 수건으로 닦아 잠시 햇볕을 쏘이고, 위·아래 끝단을 칼로 베어내고, 삼등분으로 쪼갠다. 생강, 마늘, 후추, 향유유(香薷油) 한 숟가락과 간장 한 숟가 락을 함께 볶아 절개된 부분에 넣는다. 물이 새지 않는 항아리 을 바짝 말려 물기를 제거한 후 속을 넣었던 오이를 담아놓는 다. 다시 간장과 기름 을 잘 섞고 졸여 항아리에 부었다가 다 음 날에 쓴다.
【유사 사례】「Sangayorok (山家要錄)」, Juchochimjeo-bang (酒醋沈菹方)」, 「Eumsikbo (飮食譜)」(Anonymous, Late 1700s), 「Imwongyeongjeji (林園經濟志)」, 「Gyugon-yoram (閨壼要覽)」 (Anonymous, 1896)
【주재료】 데친 오이/ 말린 오이 칼집 냄
【향신채소】 형개, 산초잎, 생강, 마늘, 향유(香薷), 후추(파 or 고추추가)
【간】 달인 참기름+달인 간장
②「Sangayorok (山家要錄)」 <하일가즙저(夏日假汁菹)>
푸른 오이를 반나절 볕에 말려 세 갈래로 칼집을 내고 그 속 에 생마늘, 향유(香薷), 분지잎(粉知葉)을 넣어 장에 담가 하룻 밤을 두었다 먹는다.
【유사 사례】「Juchan (酒饌)」(Anonymous, 1800s) <과담침채>
【주재료】 데친 오이 or 말린 오이 칼집냄
【향신채소】 형개, 산초잎, 생강, 마늘, 향유(香薷), 후추(파)
【간】장에만 담금
③「Sangayorok (山家要錄)」 <하일장저(夏日醬菹)>
간장을 끓이며 농담을 잘 맞추어 항아리에 담는다. 새로 따온 오이를 끓는 물에 살짝 데쳐 그대로 간장에 담근다. 사오일 후 먹기 시작해 십여 일을 넘지 않게 하고, 계속 담가 먹으면 맛 이 굉장히 좋다.
【주재료】데친 오이
【간】끓인 간장 담금 *여름철 10일 이내 먹음
④「Imwongyeongjeji (林園經濟志)」 <장황과법(醬黃瓜法): 오이 장김치>
4~5월 밭에서 햇오이를 딸 때, 작고 어린 것을 따고 꼭지를 자 르고 반을 갈라 속을 빼낸다. 두부, 고기, 파, 천초 등을 곱게 갈아서 오이 뱃속에 채워 넣고, 먼저 오래 묵은 좋은 장과 쇠 고기를 익혀 넣어 자기항아리 안에 담아 하룻밤 묵으면 먹을 수 있다.
【유사 사례】「JeungboSallimgyeongje (增補山林經濟)」, 「Gyuhapchongseo (閨閤叢書)」, 「Sulbinneunbeop (술빚는 법)」 (Anonymous, End of 1800s),「Juchan (酒饌)」,「Siuijeonseo (是議全書)」
【주재료】오이 배 가름→속을 파냄→{두부+고기+파+천초} 섞 음→오이에 삽입→입항(入缸)
【간】{묵은 장+ 쇠고기} 졸임→입항
【보관】자기항아리 1일 보관
조선후기로 가면서 간장을 담금원으로 한 장김치에 오이 와 가지 외에 무, 배추가 들어가는 등 부재로 가짓수가 풍성 해지고 각종 해산물이 더해지면서 고급스러워졌다. 「Gyuhapchongseo (閨閤叢書)」(Bingheogak Lee, 1809)의 <장짠지법 >15)이 참고가 된다.
여름에 어린 오이와 무 배추 등을 슬쩍 삶아 청장에 절인다. 숨이 죽거든 파, 생강, 송이 길이로 저민 것, 생복이나 전복이 나 넓게 저미고, 마른 청각, 고추 등속을 켜켜이 넣고, 꾸미를 많이 넣어 좋은 장을 달이어 간을 맞추어 타 부어 익히라. 전 복이 없거든 큰 마른 조개의 혀만 대신 써도 좋다. 이 김치는 젓 등속을 넣으면 좋지 않다.
「Gyuhapchongseo (閨閤叢書)」<장짠지>
(ii) 즙장으로 만드는 저채류는 즙장용 메주로 묽은 장을 만 든 뒤 채소를 넣고 고온에 단기 숙성시킨다. 조선초기부터 근대 조리서까지 제조법이 기록되어있을 정도로 오랜 기간 일상적으로 즐기던 부식물이었다(Park 2014; Ahn & Mun 2015). 즙장용 메주는 장류용 메주와 달리 밀기울을 일부러 첨가하여 띄우는 시간도 단축시키고 여기에 소금물을 부어 묽게 갠 뒤 동아, 가지, 오이 등의 채소를 넣고 다시 고온에 서 속성 발효시킨 것이다. 장(醬)과 채소 두 가지를 모두 취 식한다는 점에서 장아찌와 김치의 중간 형태에서 시작된 것 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변형되어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에 즙 장, 쩜장, 집장 등의 형태로 불리며 장류에 가까운 형태로 흔 적이 남아있다.
2) 식초와 술지게미로 만든 김치
고대 저채류 문화 형성기부터 우리나라는 식초를 이용한 저채류가 크게 발달하지 않았으며 이것이 중국 저채류 문화 와 가장 큰 대비점이라는 것은 앞서 설명하였다. 대체로 소 금과 장을 담금원으로 하는 저채문화가 발달하였으며 식초 와 술지게미를 활용한 저채류는 일부 원료에 한정되며 방법 도 다양하지 않다. 식초를 담금원으로 하는 방법은 생강과 마늘절임16)에 한정되어 있으며 술지게미는 가지와 오이절임 에만 활용되었다. 조선초기 기록에도 나와 있는 생강초절임 은 중국의 방식과 유사하나 조리서를 그대로 인용한 것은 아 니어서 이미 토착화된 제풍(製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i)「Sineunji (神隱志)」(Zhu Q 1440s)와 「Geogapiryong (居家必用)」(13~14C)의 초강(醋薑) 만드는 법을 보면 ‘생강 을 볶은 소금에 하룻밤 절인 다음 소금물을 진한 식초와 함 께 넣고 몇 차례 끓여 식혀 생강에 붓고 항아리에 넣어 봉한 다’고 기록되어 있다. 1400년대부터 1700년대 조리서의 생 강초절임법을 보면 중국 제조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전 처리방법, 분량, 저장방식, 저장기간 등에서 조금씩 차이가 나고 있어 이미 오래 전부터 토착화하여 전승된 것임을 보 여준다.
팔월보름께 통통하고 연한 놈을 골라 대나무 칼로 껍질을 벗 긴다. 생강 한 말, 소금 한 되, 끓는 물 세 말을 그릇에 담아 하룻밤 재워 물은 따라버리고 볕에 말린다. 덜 익은 술이나 식 초 찌끼를 함께 버무려 스무하루 후에 열어 쓴다. 만약 짜다 싶으면 찹쌀로 진밥을 지어 함께 버무려 먹는다. 「Sangayorok (山家要錄)」 <침강법(沈薑法)>
깨끗이 다듬어 씻어 항아리에 넣고 끓는 물에 소금을 합하여 부어 두어라. 사흘 후에 그 물을 다시 씻어 (씻은) 물은 버리 고 초를 많이 부어 두어라.
「Jubangmun (酒方文)」(1680s) <생강침 하는 법 沉薑法>
생강 겉을 깨끗하게 씻어 항에 넣고 뜨거운 물에 소금을 맞게 타 부어 둔다. 사흘이 되거든 걸러 그 물을 다 버리고 도로 항 에 넣고 초를 가득히 부어 두었다가 7일 후에 써라 「Eumsikbo (飮食譜)」 (End of 1700s) <침강법>
(ii) 마늘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조선중기까지 마늘절임은 소금을 담금원으로 하였는데 18세기 이후부터 “식초+간장 혹 은 간장 단독” 병용되고 있는 것이 보인다.「Sangayorok (山 家要錄)」(Jeon SE 1400s)에서는 끓는 소금물에 저장하였고, 「Eumsikdimibang (음식디미방)」도 소금에 절이되 천초를 3 알갱이 정도 넣어 저장성을 높이는 방식을 권하고 있다. 「Somunsaseol (謏問事設)」(Lee SP 1700s)에 ‘중국인이 전 해준 법’이라고 한 <초산(醋蒜)법>에 ‘벗긴 마늘을 식초에 담 가두면 몇 년이 가도 새큼하고 맛이 좋다’는 기록이 출현하기 이전에는 마늘 저장에 식초를 사용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19세기말 「Siuijeonseo (是議全書)」의 <마날앗 지법>에는 식초에 담갔다가 다시 간장에 보관하는 방식을 소 개하며 “초에 담그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고 하도 있어 마늘 의 저장도 식초에 전적으로 의존하지는 않은 형국이다.
중국인이 전해준 것. 법대로 담은 초 한 말을 항아리에 넣고, 껍질 벗긴 마늘을 거기에 담가 몇 달 혹은 몇 년이 가도록 땅 에 묻어두면 마늘 냄새가 없어져 무척 먹기 좋고 새큼한 맛 또 한 좋다.「Somunsaseol (謏問事設)」<초산법>
마늘쪽이 다 굳기 전에 캐서 씻어 물기를 걷은 후 통으로 초 에 담갔다가 건져 진장에 넣어 빛이 검고 다 삭은 후에 썰어 써라. 마늘쪽을 떼 껍질을 벗기고 진장에 넣어 쓰기도 한다. 초 에 담그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
「Siuijeonseo (是議全書)」<마날앗지법>
(iii) 술지게미를 담금원으로 하는 절임류 기록은 가지와 오 이에 국한되어 있다. 주로 중국 류서류(類書類)를 그대로 전 거(典據)한 기록이 대부분이라 조선시대 실생활에서 어떻게, 어느 정도 비중으로 쓰였는지 파악하기 어려우나 조선초기 기록인「Suwunjapbang (需雲雜方)」의 <오이지게미절임>을 보면「Geogapiryong (居家必用)」조리법과 조금 상이해 토 착화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후기 여성이 쓴 한글조리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워 완전히 정착, 계승된 것 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7~8월 사이에 연한 가지를 골라 꼭지를 따버리고 물을 끓여 식 힌 뒤 지게미에 소금을 섞어 가지와 버무려 병에 넣고 대껍질 이나 대 이파리로 주둥이를 막고 진흙으로 봉한다. 「Geogapiryong (居家必用)」<가지지게미>
납일에 술지게미와 소금을 섞어 독에 넣고 진흙으로 독 입구 를 발라둔다, 입구를 진흙으로 발라 봉해둔다. 여름이 되면 가 지나 오이를 따서 행주로 닦아 물기를 없애고 술지게미 항아 리에 박아두었다 익은 후에 먹는다. 물기가 있으면 벌레가 생 긴다. 혹시 납일이 아니어도 이 달을 넘기지 않으면 담을 수 있다.「Suwunjapbang (需雲雜方)」 <납조저(臘糟菹)>
이와 같이 한반도의 경우 술과 식초 등 고도 발효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일부 원재료에 제한적으로 활용된 것을 볼 수 있다. 마늘의 경우 이마저도 추후 담금원이 간장 단독 으로 대체되고 있어 비용이 상당히 투입되는 식초 이용 채 소절임법을 보편적으로 활용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사실 기술적 측면에서는 간장절임이나 식초절임 모두 미 생물 제어를 위해 원재료를 데치거나 말려 수분활성도를 낮 추고 저장용기를 밀폐시키는 기술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2 가지 방식 중 간장절임만을 선택적으로 수용한 것은 기술적 격차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아미노산계 감칠맛을 더 선호했 거나 자원의 제약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방식이 필요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시대 가양주 문화가 발달하였던 만큼 술지게미를 담 금원으로 한 저채류가 발달하였을 법도 한데 저채류 저장에 는 거의 활용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재고(再考)의 여지가 있 다. 일본과는 다르게 술지게미가 식초와 마찬가지로 한반도 에서 주된 담금원으로 사용되지 않은 배경을 경제, 환경, 기 호와 연계하여 추론하는 연구는 한국에서 유독 독특한 형태 의 김치가 자리잡은 이유를 밝히는데 필요한 주제일 것이다.
2) 물김치와 향신양념 활용 김치로의 발전
담금원과 주재료의 함량비에 따라 짠지(鹹菹)형과 싱건지 (淡菹)형으로 구분되고, 담저형 물김치는 다시 국물을 주로 먹 는 음용형과 건더기를 먹는 건지형으로 나뉘는데 음용형은 주 로 무를 원료로 하는 물김치가 많고 건지형은 오이, 가지를 원료로 하는 경우이다. 물김치형 제법이 조선초기 조리서에서 부터 출현한다는 점에서 고려시대 이미 완성되어 있었을 것 으로 본다(Jang 1972, 1975;Lee 1975;Yoon 1987, 1988, 1999). 고염도일수록 수분활성도가 낮아 미생물의 번식이 어 려워지므로 저염도의 싱건지형 김치제조를 하려면 항균물질 의 첨가, 원료 및 보관용기 중 수분의 제거 등 미생물을 제어 할 수 있는 노하우의 축적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짠지형 에 비해 기술적으로 한 단계 진보한 형태라 할 수 있다<Table 1>. 싱건지형 저채류는「Jeminyosul (齊民要術)」에서도 보 이지만 국물까지 먹는 방식으로 만드는 문화는 우리나라에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매우 독창적 형태라 할 수 있다.
(i) 음용형 무 물김치의 대표는 나박김치와 동치미이다. 현 전 가장 오래된 조리서인 「Sangayorok (山家要錄)」(Jeon SE 1400s)을 비롯해 1600년대 이전 조리서를 보면 고염저장 을 한 뒤 먹기 전에 탈염하는 짠지형 저채류 단계를 넘어 싱 건지형인 나박김치, 동치미, 무염(無鹽)김치 등이 확인된다.
조선중기까지의 나박김치는 ‘무(羅)를 얇게(薄) 썰었다’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통무로 만든 동치미와 모양만 다를 뿐 다른 제조방식은 차이나지 않는다. 물김치이기 때문에 소금 물을 부어 담금원으로 사용하는데 그 방법이 다양하다. 무를 얼렸다가 조각내서 소금을 타거나 찍어 먹는 방식, 무에 소 금을 뿌린 뒤 소금물을 붓는 방식, 무를 짜게 절였다가 퇴렴 한 뒤 맑은 물을 붓는 방식, 무에 끓는 소금물을 부어 익힌 방식 등이 존재했다.
반면, 소금을 쓰지 않고 담는 동치미법도 있다.「Sangayorok (山家要錄)」 <무염침채>,「Juchochimjeobang (酒醋沈 菹方)」의 <동침>, 「Yorok (要錄)」의 <동침>과 <무염침 채>로 1600년대까지의 조리서에서 보인다. 이 조리서 3편이 모두 남성이 쓴 한자 조리서인데다가 제조방법도 구체적이 지 않아 실존했던 김치인지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나 「Juchochimjeobang(酒醋沈菹方)」과 「Yorok (要錄)」(1680) 의 <동침법>을 보면 <무염침채>와 방법이 조금 상이하며, “무염(無鹽)으로 동치미를 만들었다가 먹을 때 소금을 발라 먹는다”고 취식방법까지 부연되어 실제 만들어 먹었던 김치 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Sangayorok (山家要錄)」의 토 읍침채 2가지 방문(方文) 중 두 번째 내용이 무염침채방식인 데 맑은 물 대신 끓여 식힌 쌀뜨물을 부어 온돌에서 익힌다 고 소개되어 있어 무로 만든 물김치 제법 중 가장 독특한 형 태를 띠고 있다.
겨울에 순무[蔓菁]를 껍질을 벗겨서 그릇 속에 담아두었다가 아주 잘 얼었으면 항아리에 담고 정화수를 붓는다. 주둥이를 봉하고 따뜻한 방안에 두었다가 익은 다음 먹는다. 먹을 때에 동치미 국물에 소금을 조금씩 찍어 먹으면 그 맛이 매우 좋다. 「Sangayorok (山家要錄)」 <토읍침채>
(ii) 오이와 가지를 이용한 싱건지(淡菹)는 소금물에 절였다 가 건더기를 먹는 건지형 저채류이다. 조선시대 오이김치와 가지김치는 대개 간장과 참기름을 병용하여 보존성을 높이 거나 ‘끓인 소금물+항균물질’을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전자 는 앞서 설명 하였고 후자의 경우 항균물질로는 할미꽃, 형 개, 분디, 산초, 박초, 생강, 마늘, 향유잎 등이 활용되었다. 여기에 끓여 식힌 소금물을 넣음으로써 초기 미생물 관리를 하였던 것이다. 고추가 도입된 이후에는 기존에 사용하던 할 미꽃, 형개, 분디, 산초, 박초 등의 향신채소 대신 고춧가루 로 대체되는 정황이 보이는데 오이김치류 제조변천과정에서 가장 잘 확인된다.
오이를 씻어 물기를 말린 다음 산초(山椒) 열매(實)를 넣는다. 꽃(花) 뿌리(根)와 줄기(莖)를 씻어서 썬 다음 항아리에 섞어 넣는다. 먼저 오이를 넣고 다음에 산초열매 꽃, 뿌리, 줄기를 차례차례 넣는다. 오이 1동이 소금 3되씩에 물3동이를 넣고 한 번 끓여 식혔다가 붓는다. 물이 만약 항아리 입구에 아직 오지 않았다면 비록 때가 아니라도 냉수를 더 넣으면 색과 맛이 갖 추어져 해가 지나도 좋다. 먹을 때 오이 산초를 씻어 냉수에 담가 먹으면 더욱 맛있다.「Juchochim-jeobang (酒醋沈菹方)」 <오이김치 苽菹>
늙지 않은 오이를 취해 3면에 칼집을 낸다. 고추가루 소량을 넣고 마늘 4~5편을 끼운다. 백비탕에 소금을 넣고 아주 뜨거 울 때 항아리에 붓는다(오이를 먼저 항아리에 넣음). 입구를 단 단히 봉했다가 다음날 먹는다.「JeungboSallim-gyeongje (增補 山林經濟)」 <오이소박이黃瓜淡菹法>
(iii) 향신양념채소를 사용해 김치를 만든 사례는 조리서 외 에 문인들의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고려말 문인인 이 달충(李達衷, 1309∼1384)의 시 <산촌잡영(山村雜詠)>에 ‘여 뀌에다 마름을 섞어 소금절임(鹽漬)을 만들었다’는 내용과 와 서거정의 <순채포유작(廵菜圃有作)>에 ‘무청, 무, 상추, 미 나리, 토란, 자소, 생강, 마늘, 파, 여뀌로 담근 김치’라고 하 여 향신채가 김치에 사용된 정황이 나오고 있으니 조선시대 이전부터 이미 보편화되어 있었던 방식으로 추정할 수 있다.
(iv) 깨즙과 간장으로 감칠맛을 낸 물김치도 있다. 2013년 이후 새로 발굴된「Choissy Eumsikbeop (崔氏飮食法)」과 「Juchochimjeobang (酒醋沈菹方)」에는 종전의 조리서에서 찾을 수 없던 독특한 동치미 제조법이 보이는데 소금물에 볶 은 참깨와 감장을 넣어 고소한 감칠맛을 더한 것이다(Park & Kwon 2017). 젓갈을 사용하지 않은 물김치에 감칠맛을 더할 소재로 간장과 깨즙을 이용한 흔하지 않은 사례라는 점 에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할 주제라 생각된다.
무 뿌리와 잎 고운 것을【시든 잎】 없게 하되 무 몸이 상하 지 않게 모두 씻어 간하여 세 동이에 좋은 감장 한 사발을 흰 깨(백임자) 한 되 반 볶아 함께 찧어서 가는 베 주머니에 넣어 독 밑에 담고 무를 씻어 간을 잠깐 하여 독에 넣은 이튿날 정 화수를 가득 부어두면 맛이 각별히 좋으니라 「Choissy Eumsikbeop (崔氏飮食法)」 <팀채>
모양 좋은 무를 9월초에 생으로 캐서 털과 잎을 제거하고 물 에 깨끗이 씻어 3일간 담갔다가 건져낸다. 소금을 넣어 뒤섞고 씻은 다음 항아리에 넣는다. 참깨 볶은 즙에 간을 알맞게 맞추 고 넣는다. 항아리를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곳에 두었다가 익혀 먹는다.「Juchochimjeobang (酒醋沈菹方)」 <무깨즙김치 唐菁根荏汁沉菜>
3) 젓갈이 들어간 버무림형(交沈) 김치
앞서 언급한 삼국시대 젓갈류 문화에 대한 단서 외에, 2007년부터 2011년에 걸쳐 태안해역에서 출토된 고려시대 (1200년대로 추정) 목간에도 “古道醢(고등어젓), 蟹醢(게젓 갈), (魚)醢(젓갈), 卵醢(알젓), 生鮑醢(전복젓)”라는 기록이 있어17) 젓갈문화가 일찍이 발달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는 바이나 김치와 직접적 연결고리는 보이지 않았다. 조선 중종 때에 와서야 기묘사화(1519년)와 관련된 곤쟁이젓김치에 관 한 기록이 있어 1500년대에도 젓갈로 담근 김치가 존재했다 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지만 어떤 형태였는지 구체적인 정 보는 알 수 없었다. 2017년「Juchochimjeobang (酒醋沈菹 方)」(1500s or Early 1600s)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1700년대 이후 작성 된 기록에서만 젓갈이 들어간 김치 제조법을 확 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JeungboSallimgyeongje (增補山 林經濟)」(Ryu JI 1766)의 <황과해저(黃瓜醢菹)>는 늙은 황 과를 새우젓에 버무린 것이고 「Somunsaseol (謏問事設)」 (Lee SP 1700s)의 <청해(菁醢)>는 무에 새우젓과 고추를 넣 어 만든 깍두기 원형에 해당된다.
2017년「Juchochimjeobang (酒醋沈菹方)」의 발굴로 <감 동저(甘動菹)>가 어린 오이를 절여 곤쟁이젓(또는 감동젓, 자 하젓)에 버무린 김치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Park & Kwon 2017) 젓갈김치가 적어도 1400년대에 이미 존재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게 되었다.「Sejongsillok (世 宗實錄)」8년(1426)의 기록을 보면 중국에서 온 사신을 대 접하기 위해 “어린 오이(童子瓜)와 섞어 담근 곤쟁이젓(紫蝦醢) 2항아리”를 영접도감에 보냈다는 내용이 있는데 「Juchochimjeobang (酒醋沈菹方)」의 <감동저>법 “어린 외 (童子苽)를 따서 소금물에 하룻밤 재웠다가 꺼내 반건조시킨 후 자하젓(紫蝦醢)과 섞는다(交沈)”과 일치한다.
이로써「Sejongsillok (世宗實錄)」1426년 6월 16일 기사 의 자하해는 젓갈이 아닌 곤쟁이젓김치였음이 입증된 것이 며 따라서 젓갈로 만든 김치는 적어도 1400년대 이전부터 존 재했을 것으로 추정 가능하다. 그런데「Sejongsillok (世宗實 錄)」의 자하해 기록과 유사한 제법이「JeungboSallimgyeongje」 에도 존재한다. <자하로 젓갈 담는 법>에 “오이와 전복 소 라에 자하를 넣고 소금에 버무려 담으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 젓갈을 넣은 김치가 본격적으로 보급된 시기는 젓갈 의 생산 및 유통이 활발해진 18세기 이후부터로(An 2002) 「JeungboSallimgyeongje」에도 단 몇 개의 방문만 존재한다. 「Sejongsillok (世宗實錄)」과「JeungboSallimgyeongje」의 기 록으로 유추하건데 조선초기에는 젓갈을 담을 때 채소가 보 조적으로 첨가되다가, 18세기 이후 젓갈의 공급이 원활해지 고 고추를 통한 비린취 제어 효과가 검증되면서 점차 저채 류에 젓갈을 첨가하는 형태로 주재료와 부재료의 비중이 바 뀌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4) 고추의 사용 시기와 경로
우리나라 학계의 통설은 현재 한반도에서 식용하고 있는 붉은색 감미종 고추는 아메리카 대륙을 원산지로 하는 품종 에서 분화한 것으로 신대륙 발견 이후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우리나라에 유입되었다고 보고 있다.18) 현존 기록들을 종합 해보면 남미산 번초가 일본과 중국에 유입된 시기는 빠르면 임진왜란 발발 50년 전인 1542년경부터 1600년 사이이며 유 입경로는 기록마다 상이한데 여러 종류의 품종이 각기 다른 경로를 거쳐 들어온 것으로 추정한다(Park 2012, 2013b;Sasaki 2009).
유입 초기에는 식량으로 인식되지 않았는데 위를 다스리 는 약용 초장을 만들 때 산초대신 쓰이기도 하였으나, 식재 료로의 쓰임새가 없다보니 가난한 승려와 하층민들이 대체 식량으로 사용하다가 음식에 넣었을 때의 맛과 효과가 알려 지면서 점차 상류층으로 퍼져나간 정황이 보인다(Cha 2005;Park 2013b). 이규경은 조선 땅에 1618년부터 재배되었다고 하였는데 조선 땅 토착화에 성공하여 재배가 확대된 정황이 1700년대 중반 이후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박제가(1750∼ 1805)의「Jeongyugakjip (貞蕤閣集)」에는 “고추의 주산지 가 남방이며 이 신종 유입품종에 대해 마을에서 배우고 연 구하여 점차 중요한 식용작물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이 규경(1788~1856)의「Ojuyeonmunjangjeonsango (五洲衍文長 箋散稿)」 <번초남과변증설>에는 “번초를 우리나라에서는 왜 개자 혹은 왜초라 부른다. 연한줄기와 잎으로 김치(菹)를 만 들면 맛좋다. 푸르고 어린 고추 열매의 속을 제거하고 저민 고기를 채워 달인 청장에 넣으면 맛있는 반찬이 된다. 가루 로 만들어 장을 담그면 일명 초장이다. 순창군 및 천안군의 것은 우리나라 으뜸이다. 그 열매를 겨울에 액을 짜면 채소 가 맑고 담백해진다. 근간에 우리나라 초(我椒)는 왜관에서 상품으로 거래되는데 그 이익이 쏠쏠하다.”는 내용이 나온다. 김치 제법 중 18~19세기에 천초, 산초, 고추가 매운맛 내는 동시에 동물성 젓갈의 비린 냄새를 가려주고(Masking), 유산 균 발효를 도와 맛을 상승시키는 용도로써 서로 혼용 및 대 체되며 사용되고 있는 것이 명확하게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문인들이 남긴 글에서도 고추가 김치의 유산발효 효과를 확 실히 제고시켜주었다는 것이 나타난다.
현전 자료 중 김치가 고추에 들어간 가장 앞선 기록은 “고 추를 항아리 속 채소와 섞으니 김치는 맛이 있고” 라는 이서 우(李瑞雨 1633~1709)의 시 구절과 김창업(1658~1721)이 남 긴 “고추 열매가 향기로우며 김치에 넣으니 부드럽고 맛은 시원해지네(脆爽)”라는 글이다(Park 2013b). 이들의 생몰 시 기로 미루어 1700년대 중후반 기록인 「Somunsaseol (謏問 事設)」의 <청해>와「JeungboSallimgyeongje (增補山林經濟)」 의 <황과담저>에 사용된 것보다 적어도 80~100년가량 앞섰 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치에 고추가 사용된 배경에 대해 천초, 마늘, 파, 생강 등 향신채소에 대한 한국인의 높은 애호도가 고추를 식재료 로 받아들이는 밑바탕이 될 수 있었다는 입장(Jang 1972, 1975)과 18C 가례문화의 보편화로 의례의 시행이 잦아진데 비해 공급이 부족했던 소금의 역할을 이 고추가 대치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19) 어떠한 문화현상이든 그 집단에서 ‘선택→확산→정착’하기까지 결과는 하나이나 이유 는 제 각각이기 마련이다. 구성원 수만큼이나 다양한 이유와 배경이 존재할 수 있으므로 1, 2가지의 원인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에 관해서 더 많은 가설과 그에 대한 검증이 더해질수록 풍부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어찌 된 배경이든 조리서의 원료를 시대 순으로 정리한 결과에 따 르면 고추에 김치가 들어감으로써 맡은 주된 역할은 천초, 산초 등 초(椒)류의 대체였으며(Park 2013b), 버무림형 김치 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짠지형 김치문화가 쇠퇴한 것은 분명 하다.
이미 고추가 지닌 잡균 제어 및 유산균 발효 능력은 검증 된 바 있는데(Cho & Yi 1994 ; Kim 1995) “겨울에 그 열 매를 즙으로 짜 넣으면 채소가 청담해 진다고 한((其子冬月 作乳 爲蔬淸淡,「Ojuyeonmunjangjeonsango (五洲衍文長箋 散稿)」 <번초남과변증설>)” 이규경의 언급이나, 고추를 넣 은 물김치를 먹으니 “갑자기 살아있는 봄이 온 듯하다(生蔥 蠻椒子 作淡菹食之 令人頓生春意)”고 한 서유구의 기록 (「Imwongyeongjeji (林園經濟志)」(1827)」 <나복황아저법>), 김창업(1658~1721,「Nogajaejip (老稼齋集)」 2권 <야초(野 椒>)이 밭 고추의 “열매가 향기로우며 김치에 넣으니 부드 럽고 맛은 시원해지네(脆爽)”라고 한 말이 바로 고추로 인해 유산발효가 잘 일어나 상큼한 신맛이 증가된 현상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로써 유산발효과정 중 원재료에서 우러난 김치 국물까지 섭취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다른 문화권에서 찾 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문화라는 점에서 제조기술 발달단계 상 크게 의미있는 지점이라 하겠다.
5) 양념버무림 석박지와 통배추 김치
(i) 고추와 양념채소, 젓갈을 버무린 김치양념소를 주재료 와 합하여 만든 김치를 통칭하여 석박지라 하는데「Gyuhapchongseo (閨閤叢書)」에서는 이 형태의 김치를 한글로 ‘석 박지’ 또는 ‘셧박지’라 하였고 한문조리서인「Juchan (酒饌)」 (Anonymous, 1800s)에서는 ‘胥薄菹(서박저)’라고 음차 표기 하였다. 이때 주원료는 주로 동아, 가지 등이었고 배추와 무 는 부재료에 포함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주재료와 양념소 를 켜켜로 번갈아 항아리에 담는 형태로 만들고 있으며 배 추나 무만을 단독 주재료로 하여 만든 석박지는 찾아보기 힘 들다. 들어가는 재료의 종류나 김치를 항아리에 담은 뒤 국 물을 계속 붓는 방식으로 보건데, 배추 잎 사이에 양념을 넣 는 형식만 없을 뿐이지 오늘날 통배추김치와 다름없다. 오히 려 첨가되는 어육류와 젓갈의 종류가 더 다양하고 화려했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김치 양념의 기본인 향신양념채소, 젓갈, 고추 3가 지는 시대 순으로 김치에 추가되었고, 마침내 한꺼번에 들어 가 버무려진 매우 독창적 형태의 김치가 본격적으로 기록에 등장하는 시기는 1800년 전후이다. 서유구(1764~1845)의 「Imwongyeongjeji (林園經濟志)」, 김려(金金慮, 1766~1821)의 문집인 「Manseonwainggo (萬蟬窩月眷藁)」, 이규경(李圭景, 1788~ 1856)의「Ojuyeonmunjangjeonsango (五洲衍文長箋散稿)」, 서유구의 형수인 빙허각 이씨가(1759~1824) 쓴 「Gyuhapchongseo (閨閤叢書)」, 「Juchan (酒饌)」(Anonymous, 1800s) 등에 보이는데, 유중림(1705~1771)의「JeungboSallimgyeongje (增補山林經濟)」 이전까지 젓갈이 보편적으로 사용될 수 있 는 재료가 아니었기 때문으로 사료된다.20)
가을로부터 겨울까지 김장할 무렵, 가죽이 얇고 크고 연한 무 를 너무 짜게 말고, 좋은 갓과 배추를 각각 그릇에 절인다. 절 인 지 사오일 만에 맛있는 조기젓과 [준치, 밴댕이] 젓을 좋은 물에 많이 담가 하룻밤 재운다. (중략) 오이도 (소금에) 절일 적에 소금물을 끓여 더운 김에 붓고 (중략) 가지는 잿물 밭인 재를 말리어 켜켜이 묻어 단단히 봉하여 땅에 묻어 두면 갓 딴 듯하니 석박지를 담그는 날에 내어 물에 담가라. 생동과는 과 줄만치 베어 껍질은 벗기지 말고 속은 긁어 없이 하라. 「Gyuhapchongseo (閨閤叢書)」 <셧박지>
(ii) 중국 원산지인 배추는 고려이전 이미 한반도에 들어와 있었으나 재배가 잘 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사회에서 배추 는 상당히 귀하여 일부 상류층만이 제한적으로 활용할 수 있 었던 식재료였던 것으로 보인다. 배추가 대중적인 작물이 아 니었기 때문에 첫 수확을 하면 조상께 천신(薦新)21)을 올리 는 예물로 쓰이기도 했다. 성현(1439~1504)의 「Haedongjamnok (海東雜錄)」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숭채(菘菜)를 배추라 하여 한양 성문밖에 많이 심어 이익을 본다.”는 기록이 있으 나 아직 일부 계층의 사람들만 향유할 수 있었던 귀한 음식 재료였다(Cha 2005;Park 2013b). 비슷한 시기의 조리서인 「Sangayorok (山家要錄)」(Jeon SE 1400s), 「Suwunjapbang (需雲雜方)」(Kim Y 1540s), 「Yorok (要錄)」(Anonymous, 1680) 등에는 배추로 만든 김치가 소개되어 있는데, 배추를 절였다가 소금물을 부어 물김치형태로 담은 것으로 기록의 출현빈도가 높지 않은 비주류 김치였다.
깨끗이 씻은 배추 한 동이에 소금 삼 홉을 뿌려 하루를 재운 다. 다시 씻어 먼저처럼 소금을 뿌려 항아리에 담고 물을 붓는 다. 다른 채소 절임과 똑같이 한다.「Sangayorok (山家要錄)」 <침백채(沈白菜)>
조선에서 배추가 귀한 식재료였던 현황과 대조적으로 1800 년대 초반 경, 중국은 배추품종 중 경엽(莖葉)부가 발달한 결 구성 배추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1832년 6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김경선(金景善)이 청나라에 다녀온 사행기록인 「Yeonwonjikji (燕轅直指)」(Kim KS 1832)에 의하면 “순무 는 본 일이 없다. 중국의 배추는 한 포기에 수십 개의 잎사 귀가 붙어 있어 우리나라 것보다 크기가 배는 되며, 살이 무 척 연하다.”고 하여 당시 중국 배추 현황을 알 수 있는데 그 때문에 중국 방문길에 배추 씨앗을 구해와 채마밭에서 재배 하는 것이 지배층들 사이에 퍼져있었다. 1800년대 문인들의 시에는 텃밭에 키운 배추를 읊은 내용이 제법 나온다(Park 2018b). 하지만 한반도에 이식하면 3년이 지나지 않아 퇴화 되어 순무로 변해 버리다 보니22) 배추를 제대로 잘 기르기 위한 노력이 곳곳에 보인다.
마당을 절반 떼어 배추를 심었는데 / 菘葉新畦割半庭
벌레가 갉아먹어 구멍이 숭숭 났네 / 苦遭蟲蝕穴星星
어찌하면 훈련대 앞 가꾸는 법 배워다가 / 那將訓鍊臺前法
파초 같은 배추잎을 볼 수가 있을까 / 恰見芭蕉一樣靑
서울 배추도 훈련원(訓鍊院) 밭의 것이 가장 좋다 / 京城菘菜 唯訓鍊院田最佳
정약용(1762~1836) 「Dasansimunjip (茶山詩文集)」 <장기농가(長鬐農歌)>
갈증을 앓을 때 많이 먹으면 마땅하고 / 病渴宜漫喫
숙취를 막는데 잘게 씹으면 이로우니 / 害酲利細
미천한 나의 입과 배에 사치일세 / 鯫生夸口腹
숭은 방언으로 백채라 하네 / 謝爾鍾山客 菘方言白菜
만청과 유사한데 아주 기름지게 하얗지만 / 似蔓菁極肥白 種瘠 地 變爲蔓菁
마른땅에 심으면 변하여 만청이 되고 마네 / 種瘠地 變爲蔓菁 김려(1766~1821) 「Manseonwainggo (萬蟬窩月眷藁)」 <만숭(晩菘)>
(iii) 통배추김치는 우선 석박지형 김치양념소 제조법이 보 편화 이후 새로이 출하된 결구성 배추로 김치를 담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Park 2006, 2013b). 이파리가 많은 결구성 배 추에 석박지용 ‘김치 양념소를 배춧잎 사이에 넣어(이하 숭 엽내저(菘葉內菹))’ 만든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볼 때(Park 2006) 1800년대 중반까지 중국 품종의 배추를 들여와 재배 하여 연작하면 바로 퇴화해버렸으나 그나마 동대문 근처 훈 련원에서 키운 배추는 제법 품질이 좋아 왕실에 납품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중국 품종의 수입이 아닌 토종 결구성 배추 품종인 ‘서울 배추’와 ‘개성배추’는 1800년대 말에야 재배에 성공하여 명 성을 얻게 되었다. 1906년 일본인이 쓴 보고서에 이 품종에 대해 매우 우수한 평가를 하고 있는 내용이 나온다(Park 2006, 2013b).23) 이와 동시에 상대적으로 저렴한 중국의 호 배추도 대거 수입되면서 숭엽내저(崧葉內菹)형 김치가 급속 도로 빠르게 식생활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조백현(Cho 1928)이 당시 가장 일반적으로 먹고 있는 통배추김치의 제법 완성 연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점을 놀라워하는 것을 보면 상당히 짧은 기간 내에 퍼졌던 것을 알 수 있다.
결구성 배추로 인해 배추김치는 이파리 사이사이 양념을 넣는 방식으로 바뀌는데 19세기 말 기록으로 추정되는 「Eonmunhusaengnok (諺文厚生錄)」(Anonymous, late 1800s) <셕박짐 담그난법>에 “통 의 양렴은 조긔 국 조긔 낙지 소라 굴 젼복 이 강 마눌 파 실고츄 각을 잘 게 쓸려 입 속의 겻겻치 느코 갓슬 양염으로 느어 담 으라”고 되어 있다. 동일시기 기록인「Siuijeonseo (是議全書)」 (Late 1800s)」에서는 배추한통과 양념 한 켜를 번갈아 담으 라고 되어있어 이때가 통배추김치 제조법이 바뀌는 전환기 로 보인다.
(iv) 통배추김치에 무를 채쳐서 양념채소와 버무려 소로 넣 는 방식은 「Joseonyorijebeop (朝鮮料理製法)」(Bang SY) 1918년판까지 보이지 않다가 1921년판에 나타나고 있다. 이 는 통배추김치가 석박지의 응용형태로 만들어졌기 때문으로 짐작된다.「Siuijeonseo (是議全書)」(Anonymous, Late 1800s) 의 <셧박지>법을 보면 “무는 둥글게 마음대로 썰고 배추와 갓은 적당하게 썰어 (중략) 독을 묻고 무, 배추를 먼저 넣고 가지와 동아 등을 넣고 젓을 한 번 깐 후 마늘, 파, 고추 등 을 위에 많이 펴고 채소를 차례로 떡 앉히듯” 만들었다. 이와 유사한 시기의 조리서인「Jusiksiui (酒食是義)」(Anonymous, Late 1800s)에는 “속이 좋은 무와 어리고 푸른 오이, 좋은 배추, 늙은 동아를 소금에 절인다 (중략) 미나리, 좋은 갓, 청 각, 배는 저며 갖은 양념 갖춰 하여 모두 섞어 배추통에도 넣고 혹, 무와 동아에도 조금씩 넣고 켜켜로 놓아 양념을 뿌 린다”고 되어있어 석박지를 만들되 그 양념소를 배추통에 넣 는다고 하였다. 즉 석박지는 배추, 무를 적당히 썰어 양념과 버무려 만드는데 초기 통배추김치는 이 버무린 석박지를 그 대로 통배추 잎 사이사이에 넣었던 것이다.
마늘 파 고쵸 생강을 채치고 또 갓과 미나리와 청각은 한 치 길이씩 썰어 함께 섞어서 배추 잎사귀 틈마다 조금씩 깊이 소 를 박고 잎사귀 한줄기를 잡아 돌려서 배추허리를 매고 또 무 를 정하게 씻어서 칼로 이리저리 비슷비슷 어여서 마치 비늘 박힌 모양으로 어여서 소금에 절였다가 고명을 그 어인 속마 다 넣어서 다한 후 독에 넣나니 무 한켜 넣고 배추 한켜 넣고 이렇게 번갈아 가며 다 넣은 후(넣을 때도 매 켜에 고명을 조 금씩 뿌리느니라) 배추 저렸던 물을 체에 밭쳐 부어 물이 배추 위에까지 올라오게 되거든 간을 짭짭하게 하여서 무거운 돌로 눌러놓고 뚜껑을 꼭 덮어 둔다.「Joseonyorijebeop (朝鮮料理 製法)」(1918)
무, 마늘, 파, 고추, 배, 생강을 채 썰고 또 갓, 미나리, 청각은 1치 길이씩 썰어 함께 섞는다. 배추 가운데 속을 헤치고 잎사 귀 틈마다 조금씩 소를 깊이 박고 잎사귀 한 줄기를 잡아 돌 려서 배추 허리를 맨다「Joseonyorijebeop (朝鮮料理製法)」 (1921)
결구성 배추의 출현으로 이파리가 많아지자 잎 사이사이 에 석박지 김치를 켜켜 넣게 되는데 잎 사이에 잘 들어가게 하려면 재료들을 잘게 썰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 때 무를 채를 쳐서 넣음으로써 모양새를 예쁘게 하는 방식으로 변화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통배추김치 제조법은 들어가는 재 료 가짓수도 많은데다가 배추를 절였다가 퇴렴하는 과정, 재 료를 전처리한 후 잘게 채치는 과정, 잎 사이에 소를 넣는 과정이 더해지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여느 김치에 비해 노동 력과 많은 시간이 투입되었고 3~4일에 걸쳐 공동으로 김치 를 만드는 김장이라는 독특한 공동체문화도 형성시키게 되 었다.
IV. 요약 및 결론
본고는 김치의 역사 중 김치의 기원 및 변천과정 등 제조 발달사적 영역에 대하여 기존 성과는 물론, 2000년대 이후 새로 발굴된 고조리서를 비롯해 조선시대 문집 등의 신규 발 굴 자료와 상고사, 고고학 및 언어학 등 주변 학문 분야의 최신 연구 성과까지 모두 포함·검토하여 종합적으로 정리 한 것이다. 한국 김치제조사는 동북아시아 3개국이 공통적으 로 향유하던 짠지형 저채문화가 한국만의 독자적인 형태로 변화하게 된 과정을 5단계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짠지형에서 싱건지형으로의 변화과정에서 국물 취식을 위주로 하는 동치미나 나박김치와 같은 음용형이 만 들어진 점은 다른 문화권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방식 이라 하겠다. 제조법에서도 재료를 열탕, 건조, 훈제하는 등 미생물 제어하는 전처리과정을 거치지 않고 유산균발효 유 도와 향신채소와 같은 방부기능을 지닌 부재료 첨가방식을 쓰고 있어 차별화된다.
두 번째, 동물성 발효식품인 젓갈이 김치의 소재로 쓰인 점이다. 이는 타문화권에서는 유사 형태를 찾기 힘든 독특 한 형태이다. 적어도 1400년대에 젓갈과 주재료를 섞어 버 무리는 형태로 김치를 만들게 되면서 버무림(交沈) 유형의 김치 틀이 갖추어졌다. 비록 극소수 상류층에 한정된 문화 였고 향신채소나 고추 없이 젓갈과 채소만 소금과 버무린 것이지만 젓갈이 들어간 김치제조 문화의 시발점이었다는데 의미가 있다.
세 번째, 고추의 유입에 따른 김치의 맛과 발효 효능 고도 화이다. 1600년 말~1700년 초에는 고추가 김치의 재료로 사 용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미 젓갈, 향신채소가 김치의 원료로 사용되고 있었으므로 마지막 고추의 첨가로 오늘날 김치의 원형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치에 고추가 들어가면서 유산발효가 더 효과적으로 일어나 맛과 영양면에서 한층 진 보한 형태의 김치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양념에 버무렸으나 저장과정 중 우러나온 침출액을 건더기와 함께 먹을 수 있 다는 점에서도 독보적인 유형이라 할 수 있다.
네 번째, 고추를 포함한 향신채소, 젓갈을 모두 한꺼번에 버무려 만드는 석박지(雜菹) 문화의 유행과 정착이다. 젓갈 유통과 고추 재배의 확산은 18세기경에야 확대되었으므로 본 격적으로 젓갈, 고추, 향신채소가 모두 들어간 석박지형(雜 菹) 김치는 18세기에 완전히 자리 잡았다고 하겠다. 젓갈에 만 버무려 만든 조선중기의 버무림형(交沈) 김치와 달리 여 러 종류의 젓갈, 어물, 향신채소 외 주재료인 배추, 무, 동 아, 오이, 가지 등 여러(雜) 재료를 모두 섞음으로써 현대 통 배추김치의 전신이 완성된 것이다.
다섯 번째, 오늘날 김치의 대표격인 통배추김치(崧葉內菹) 제조법 확립이다. 1800년대 말 결구성 통배추가 한반도 재 배에 성공하면서 재료와 제조법, 외관은 물론 맛과 영양기능 성 성분의 증가까지 김치는 매우 독창적 형태의 저채류로 자 리매김하게 되었다. 통배추김치 그 자체는 1800년대 말에 출 현한 것이나 제조방식은 결구성 배추 도입 이전에 완성된 석 박지(雜菹) 제조법을 그대로 새로운 통배추에 적용한 것이므 로 배추김치의 역사를 1700년대 말에서 1800년대 초로 소급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또한, 김치 기원문제에 있어서는 새로운 이론과 신규 연구 성과를 토대로 한 연구가 촉구된다. 요하문명의 발굴로 주목 받게 된 동이족 문화에 대하여 탈민족주의적 관점을 견지하 며 식품사 분야의 연구를 속히 진전시켜야 할 것이며, 최근 고려시대 이전 식생활관련 유적이나 목간이 새로이 발굴· 연구되고 있는 만큼 동아시아 주변국과 연계한 중세이전 김 치문화 연구도 진척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