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 론
개화기 이후 변화된 음식(료)을 언급할 때 우유는 이중적 모습을 가진 음식으로 간주된다. 지난 100년간 우유, 유제품 과 관련된 사례와 수치에는 증가, 정체, 감소 등의 양상이 모 두 나타나 있다.
개화기 이후 비로소 ‘음식’으로서 인지가 시작된 우유를 시작으로 분유는 한국전쟁 후 많은 어린이들을 배고픔에서 구제하였고(Lee at al. 1988), 1960년대 이후에는 학교에서 우유무료급식이 이루어질 정도로 식생활선진화 식품으로 국 가적 차원에서 보급화가 이루어졌다(Hwang & Gouk 2011). 경제성장이 안착된 1980년 이후에는 소비자 자발적 의지로 우유소비가 대중화되었으며(Song et al. 2007) 1988년 이후 부터 서서히 시작된 발효유 소비와 함께 2010년 이후로는 치 즈, 버터 등 섭취량이 증가하여(Baek & Lee 2002; Kwon 2013; Korea Dairy Committee 2015) 2015년 기준 국민 1 인당 연간 유제품 소비량은 75.7 kg으로 쌀 소비량(62.9 kg) 을 능가하였다(Korea Dairy Committee 2015; Food Grain Consumption Survey 2016).
그러나 이와는 다르게 소비가 한계에 직면하였음을 반영 하는 수치도 있다. 이러한 양상은 주로 유제품보다는 우유에 서 나타나 전 연령대에서 우유보다는 우유를 발효시킨 유제 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Kim et al. 1994; Wilson 2000; Fisher et al. 2001; Jung & Lee 2002). 100년 전과 비교하여 의심할 여지없이 우유절대섭취량은 증가하였으나 긍정영양에 대한 반론 등으로 1988년을 기점으로 우유 소비 량은 감소세로 돌아섰으며(Baek & Lee 2002) 연령별 우유 섭취는 연령증가에 반비례하는 추세이다(Tripp 1997; Cho 2000; Kim at al. 2000; Boyle 2003; Song et al. 2007). 초등학생들의 높지 않은 우유 선호도를 반영하는 사례로는 학생들이 우유를 남기는 일이 많아 우유급식은 의무사항인 학교급식사업에서 분리운영되어 현재는 의무사항이 아니며 주관도 교육부가 아닌 농림축산식품부등으로 분리되어 진행 되고 있다(Park 1996; You 1996; Park et al. 2002; Chuksannews 2018).
우리나라에서 우유에 대한 이중적 시각의 근원 고찰을 위 해서는 음식으로서 대중적 인지가 미미했던 시대부터 언급 해야 한다. 우유섭취에 대한 기록은 통일신라시대까지 거슬 러 올라가 보양식으로 섭취했던 왕실, 상류층과 이들에게 우 유를 바치는 입장이었던 대부분 농민들, 가깝게는 조선시대 에도 왕실, 일부 상류가정에서 보양식으로 섭취하는 등 우유 섭취는 상용화되지 못했다(Cho & Lee 2011). 그러나 재료의 희귀성 이외에도 주식인 밥과 어울리지 않는 맛, ‘농업’의 중 요 노동력으로 자랄 송아지의 유일한 먹이를 사람이 소비한 다는 통념 등이 우유를 마시지 않게 했던 주된 원인이었을 것이다.
개화기 초기의 우유란 살균이 되지 않은 형태의 생유가 대 부분이었고 유제품은 연유가 대부분이었다. 세균, 위생문제 로 조선 내에서 생산시스템이 이루어져야 했던 우유에 비해 연유는 문호개방 이후 서양으로부터 수입이 가능했다. 그러 므로 조선인들에게 우유보다는 연유가 먼저 알려지기 쉬운 환경이었다. 우유이던 연유이던 식품으로서의 인식변화를 이 끈 이들 중에는 1882년 조미수호조규(朝美修好條規) 이후 한 성으로 입성하여 수십년 이상을 조선에 머물렀던 서양선교 사들의 힘이 컸다. 특히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의료선교사들 은 서양종교 전파가 합법적이지 못했던 시대에도 비교적 조 선정부의 핍박을 받지 않고 조선인과의 접촉이 가능했다. 조 선 최초 서양근대식 병원을 운영하며 의사 대 환자로서 대 면과정에서 치료, 영양 목적으로 의도치 않게 우유를 홍보하 게 되었으며 특히 가당연유는 단맛으로 어린이는 물론 성인 들도 좋아하게 되었다(Allen 1908). 바로 이 시기가 우리나 라 사람들이 최초로 우유, 유제품을 영양, 맛 측면에서 인지 하게 된 시기였을 것이다.
우유는 1902년 프랑스인이 지금의 신촌역 부근에 젖소, 돼 지 등으로 목장을 운영하기는 하였으나 우역으로 20여두의 젖소가 폐사하는 등 우리나라에서 생산체계가 자리 잡는 데 에는 연유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그나마 대부분 일본인에 의해 운영되었고 특히 1910년 국권이 일본으로 넘어간 후에 는 젖소수입, 목장운영, 착유, 판매 유통 등 우유 사업은 거 의 일본인에 의해 주도되었다(Han 2002; Lee 2002; Kim & Hong 2006; Kim & Kim 2011)
본 연구는 이러한 초기 전파모습을 가진 우유, 유제품의 보다 자세한 수용과정 고찰하고자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까 지 우유와 유제품에 대한 기록을 적은 서양인 기록물과 신 문 광고를 이용하였다. 우유는 개화기 이후 식습관 변화와 관련하여 우유 소비(Lee et al. 1988; Baek & Lee 2002; Jung & Lee 2002; Song et al. 2007) 등에 대해 주로 이루 어졌고 개화기 이후 우유, 유제품 전파과정은 역사, 문화적 측면에서 다루어졌다(Joo 2012; Lee 2016).
이에 본고는 대표적인 서양식품, 영양식품으로 간주되었던 우유와 유제품이 개화기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약 50여년간 시대별로 어떠한 경로와 형태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전파 되고 수용되었는 지 변화에 중점을 두어 알아보고자 하였다.
II. 연구내용 및 방법
1. 시대구분
연구대상 기간은 1884~1938년 총 55년이었다. 이는 우유 유제품이 개화기 이후 소개된 음식(료)이었으며 광복을 기점 으로 많은 정치사회적 변화가 있어 광복 이후의 수용과정은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사 전 조사를 통해 1930년대 후반 이후에는 전시체제로 광고건 수가 감소하여 종료 시기는 1938년으로 하였다. 55년이라는 기간의 변화 양상 고찰을 위해 시대구분이 필요하다고 판단 되어 다음과 같은 기준에 의거, 분류하였다. 크게 ‘개화기· 대한제국기(1884~1909년. 26년)’과 ‘일제강점기(1910~1938. 29년)’ 로 양분되었고 이를 세분류하여 총 4기로 분류하였 다. 1기는 의료선교사 중 최초 장기체류자인 Allen (Horace Newton Allen) 입국 해인 1884년, 종료 해는 최초우유광고 가 있기 직전 해인 1895년까지 12년으로 하였다. 이 시기는 서양인 식생활을 직접 목도하지 않는 한 음식으로서 우유를 인지할 기회가 없었던 시기였다. 2기는 1896~1909년(14년) 으로「The Independent」(독립신문 영문판)」를 시작으로 「Hwangseongsinmun (皇城新聞)」,「Daihanmaeilsinbo (大 韓每日申報)」등에 우유 광고가 실렸던 시기였다. 3·4기는 일제강점기로 간주하였다. 3기는 1910~1919년(10년) 강점기 전기로 이 시기 신문은 총독부 기관지였던「Maeilsinbo (每 日申報)」가 독점하였다. 4기는 1920~1938년(19년) 강점기 후기 문화정치기로「Dongailbo (東亞日報)」,「Chosunilbo (朝鮮日報)」등 여러 신문들이 출간되면서 우유, 유제품이 신 문광고로 게재되었다.
2. 연구내용
조미수호조규 직후 조선 내 입국한 개신교선교사들은 초 기에는 선교보다는 교육·의료 분야에서 활동하였고 조선왕 실 도움 하에 최초 서양식 근대병원, 근대학교 설립 및 운영 을 주도하며 조선인과 접촉이 잦았다. 이러한 의료선교사들 을 비롯해 다른 서양인들은 조선인들이 넉넉지 않은 식량사 정에도 불구하고 우유를 마시지 않는 모습에 대해 기록을 남 겼다.
본고에서 주로 활용한 기록물은 Allen의『Things Korean』 (1908), Lillias Horton Underwood의『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of life in Korea』(1904),『With Tommy Tompkins in Korea』(1905), Oliver R. Avison의 글을 번역 한 『Memories of Life in Korea』이었다. 이들의 조선 최 초입국은 Allen, Underwood, Avison 순이며 체류기간은 순 서대로 1884~1905(22년), 1888~1921(34년), 1892~1934(43 년)이었다. Allen, Avison은 모국으로 귀국 뒤에, Underwood 부인은 조선에서 지내면서 저술하였다. Allen과 Avison의 저 서는 조선에서 수십 년을 지낸 후 경험을 기억해서 쓴 것으 로 일부 내용에 한해 정확한 연도가 제시되지 않은 것도 있 었다. 이 외 당시 조선 방문 후 기록을 남긴 다른 서양인 기 록물에서 우유, 유제품을 언급한 부분을 함께 고찰하였다. 이 러한 기록들은 편수가 많지 않지만 타자의 눈으로 본 조선 후기 우유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라는 점에 의 의가 높다. 그러나 개인기록물이라는 점에서 신뢰도에 한계 가 있어 기록 사실여부에 대한 고증과정이 필요하지만 참고 한 문헌들에서 우유, 유제품에 대한 언급내용이 동일성을 띠 고 있어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판단하고 연구를 진행하였다.
개화기 이후 우유를 추정할 수 있는 또 다른 자료도 신문 이 있었다. 근대기에 등장한 신문은 지식보편화와 대중성, 근 대성을 지니고 있다(Mok 2010). 개항 이후 상거래관행에서 일어난 주요변화인 광고는 제한된 지면에 논리적, 감성적 설 득을 포함하므로 한 시대의 소비문화를 잘 함축하는 매체이 다(Lee & Kim 2004).
1기(1884~1895년)는 신문출간 이전이므로 서양인 기록물 을 이용하였고 2기는 1896년 출간된「독립신문」을 시작으 로「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등에 게재된 우유광고와 서양인 기록물을 함께 검토하였다.「독립신문」은 최초 순 한글 신문으로 영문판인「The Independent」도 출간하였으 며 유제품(연유) 광고가 실린 최초 신문이었다. 3기 (1910~1919년)는「매일신보」, 4기(1920~1938년)는「동아 일보」를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예비조사를 통해 광고 양에 따라 전수 혹은 격일조사를 하였으며(2기 전수조사, 3, 4기 격일조사) 검색사이트로는「매일신보」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의 미디어가온(http://www.mediagaon.or.kr) (bigkinds)을「동 아일보」는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http://newslibrary.naver. com)의 동아일보 DB자료를 활용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개화기 국내우유는 대부분 살균처리 되 지 않아 본고는 살균 처리되지 않은 경우는 생유(raw milk), 살균 처리된 경우는 우유, 진공상태에서 16% 수분 제거, 미 국에서 1870년대부터 상용화된 제품인 연유(condensed milk), 수분 제거하여 가루로 제조된 조제분유와 유사한 분 유(powdered milk) 등으로 구분하여 기술하였다. 저온살균법 은 미국에서 1886년에 기초가 완성되었고 1940년대에 이르 러 의무적 저온살균이 법제화(Velton 2012)되었다. 따라서 살 균처리 여부 파악은 본고 연구기간에서는 제한적이라 서양 인 저서의 언급된 ‘milk’의 앞뒤 문맥 내용을 근거로 생유, 우유를 구분하여 기술하였다.
<Table 1>에 시대구분과 각 시대별 연구내용을 정리하여 제시하였다.
III. 결과 및 고찰
1. 제1기- 구전을 통한 도입기 : 조선말 개화기(1884년~1895년)
1880년대 중반~1890년대 중반에 속하는 1기는 문호가 막 개방된 개화기로 ‘우유를 마시지 않는 조선인’이라는 서양인 시각과 ‘소젖을 마시는 서양인’ 이라는 조선인 시각 등 ‘우 유’에 대한 두 나라의 상반된 음식문화가 조우한 시기였다. 우유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서양인들과 이들을 목도한 일 부 조선인들에게 우유가 음식으로서 인지되기 시작하였다.
Allen은 ‘(우유는) 몹시 가난한 이 땅에 적절한 음식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어린이들, 병약한 노인들에게 사람 젖을 먹이는 것을 보면 조선인들은 우유사용법을 아는 것인 데 소에서 젖을 짜지는 않는다’ 라고 하였다(Allen 1908).
Underwood 부인의 2권의 저서 중『With Tommy Tompkins in Korea』에는 ‘조선인은 전혀 우유를 사용하지 않는다··· 우유, 버터, 치즈, 버터밀크, 생크림도 전혀 없다···가난하지 만 우유를 먹지 않는 것은 이상할 수도 있으나 어떻게 보면 조상의 지혜이기도 하다. (서양에서도) 어느 해인가 우유가 영아사망률의 25% 식품이 될 정도로 위험···안전 보장이 어 려워···(조선인들에게) 우유 권장은 어려운 일이다’ 라며 객 관적 입장을 보였다. 또한 같은 책에서 ‘(조선에서) 소에서 얻을 수 있는 우유 양은···얼마 되지 않아 하루에 7쿼터(약 6.6 kg) 얻기도 매우 드문 경우이며 젖을 짤 때 화가 난 소들 의 무례한···’이라며 조선소가 젖소와 달리 산유량이 많지 않 고 착유도 쉽지 않음을 언급하였다. 대표적 젖소품종인 홀스 타인종은 최대산유를 위해 개량된 것으로 젖소 1두당 평균 산유량과 비교하면 Underwood 부인이 언급한 소에서의 착 유량은 220온스(약 6.6 kg), 현대 홀스타인종은 811온스 (23 kg) (Tae 2004) 정도로 약 4배의 차이를 보였다.
Avison은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우유를 구할 수 없음에 놀 랐다’, ‘젖이 나오지 않는 산모의 아이에게도 우유를 주지 않 는다’라고 기록하였는데 ‘조선에 도착하자마자’라는 부분에 서 1892년으로 추정이 가능하며 Allen 입국 이후 8년이 지 난 시기에도 우유에 대한 조선인들의 생각에는 큰 변화가 없 었던 것이 유추된다.
인식변화가 언급된 부분도 있었는데 1894년 청일전쟁기의 평양에서 Underwood 부인은 ‘···깨끗한 우유도 구할 수 없 어 어느 가난한 조선인 아버지는 자식이 거의 굶다시피 하 는 것을 보며 (자신의) 아버지 집에 우유가 있음을 한탄했다’ 라는 내용을 남겼다.
의료선교사가 아닌 이들도 우유를 언급하였다. 1886년 조 선에 입국하여 1892년『Korean from It’s Capital』과 1894 년『Corea of TODAY』를 출간한 Gilmore는 ‘소는 밭갈이 나 짐을 나르는 짐승으로만 사육···외국인들은 낙농목적으로 소를 사지만 우유가 2쿼트도 되지 않아···조선인은 낙농업을 이해하지 못하여 우유 양을 늘리지 못한다···’ ‘조선인은 우 유도 버터도 먹지 않는다’(Gilmore 1894)고 하였다. 또한 1888년 입국한 선교사 Gifford는『조선의 풍속과 선교』에 서 ‘조선인은 결코 우유를 마실 줄 모르며 버터 냄새만 맡아 도 혐오감을 나타낸다’ 라며 조선인의 유제품 기호도를 언급 하였다(Shin ed. 1995). 당시 조선인들의 우유에 대한 거부감 은 상당히 높아 조선인들에게 우유는 송아지 먹이라는 생각 이 강했고 선교사로 활동했던 Noble 부인(Mattie Wilcox Noble)의 기록을 보면 ‘(조선인은) 소젖을 짜면 송아지가 그 만큼 성장이 늦어진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다(Kang & Lee ed. 2010).
이상을 보면 1884년 ‘소젖을 짜지 않는다’, 1886년 ‘···낙 농업을 이해하지 못하여···’, 1888년 ‘마실 줄 모르며 냄새에 도 혐오감’, 1890년, 1892년 ‘전혀 우유를 먹지 않는다’, 1894년 ‘아버지 집에 우유를 짤 수 있는 소가 있는데···’ 등 으로 미루어 서양인 입국 10년 만에 전쟁이라는 비상상황이 기는 하지만 일부 위급 시 어린이에게 우유를 줄 정도의 인 식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상기 언급한 서양인들의 주 활동무대는 한성, 평양 등이었는데 Ahn의 조선 선교사 분 류에 의하면 1880년대는 한성중심의 ‘선구자 시작시기’, 1890년대는 한성을 벗어난 평양, 원산, 함경도 등 북쪽지방 중심의 ‘선교거점 확보기’로 나눠진다(Kim ed. 2018). 따라 서 1기(1884~1895년) 우유인식 변화는 (의료)선교사들의 주 활동지였던 한성, 평양 등 큰 도읍지에서 먼저 시작되었다는 조심스러운 추정을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근대축산업에 대한 조선정부의 노력도 간과 할 수 없다. 1882년 조미수호조규체결 미국에 보빙사로 참 가하여 선진문물을 경험하고 온 무인(武人) 최경석의 노력으 로 1884년 황실직속 농무목축시험장이 망우리 일대에 개설 되었고 1885년 Jersey종의 암수 2두, 황수 1두 등 가축이 들 어왔으나 최경석 사망, 기술적행정적 문제로 성공하지 못하 였다(Lee 2002; Seo 2006).
1기는 최초 서양국과의 체결 직후 근대 축산업에 관심을 기 울였던 조선정부의 노력과 조선 내 거주했던 서양인들의 우 유공급을 위한 노력이 있었던 시기로 이러한 모습을 통해 조 선인들에게 ‘우유는 사람이 마시기에 적합한 음식’이라는 변 화가 시작된 입과 눈을 통한 ‘우유문화 도입기’라 볼 수 있다.
2. 제2기- 광고를 통한 소비자 확충기 : 대한제국기(1896년~1909년)
2기는 대한제국기로 1기와 가장 큰 차이점은 광고가 시작되 었으며 우유, 유제품으로 분류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서양의 료선교사에 의해 가당연유가 일부 조선인들 (예를 들어 서양 근대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사람들) 사이에 유행하였고 1900년 대 초에 조선 내에서 생산된 생유 광고를 볼 수 있었다.
1) 1896~1899년:「The Independent」,「독립신문」
한성의 정동, 진고개에 있었던 서양식료품점 ‘가메야’, ‘안 창상회’, ‘고샬기상회’ 등은 「독립신문」,「The Independent」 를 통해 상점 광고를 내었는데 판매품목 중에 연유, 버터, 치 즈, 크림 등이 있었다. 상품명이 정확하게 적힌 신문은「The Independent」지였다. 동일날자의 동일식료품점 광고라도 한 글판 독립신문은 ‘각색외국샹등물건을판다’라는 개략적 문구 가 있는 반면「The Independent」지는 품목과 가격이 자세 히 적혀 있었다<Figure 1-A, B>. 즉 초기 우유·유제품 광 고는 조선에서의 새로운 수요자 창출보다는 조선에 상주하 고 있던 서구인, 즉, 기존수요자를 겨냥한 판매를 위한 것으 로 해석할 수 있다.
2) 1900~1907년:「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
1900년대 신문의 광고특징은 첫째 유제품이 단일품목으로 광고되기 시작하였다는 점과 둘째 생유와 연유로 양분되었 으며 셋째 연유가 강세를 보였고 네째 광고문구가 한글·한 문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불과 2~3년 만에 광고 언어가 영어에서 한글로 바뀐 것은 조선인을 염두에 둔 광고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연유광고 강세는 연유의 단맛으로 보다 쉽 게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이고 반면 생유 생산 은 국내생산을 위한 기반이나 기술이 부족하여 시간이 더 필 요했을 것으로 본다.
1901.6.19 구옥상우유는 캔에 담겨져 있으므로 연유로 짐 작되며<Figure 1-C「황성신문」에 총12회 광고되었다. 총 3건이 광고된 대창양행의 광고 중 1904.9.21 광고<Figure 1-D>를 보면 ‘대창양행에서 새로 개발한 우유···신사라면 구매 하는 것이 당연···’ 이라고 적혔는데 ‘우유’라고 적었지만 대 창양행은 무역업이 주였으며 ‘12개를 사면···2원75전’이라는 부분은 냉장시설이 미비했던 당시 12병 구입은 보관과정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연유로 짐작되기는 하지만 확인 이 필요한 부분이다.
‘우유는···위생에 주의하여 마셔야···남대문 밖 도동에 우사 건축···우수한 서양젖소를 20마리 들여와···개화인이라면···전 화, 엽서로 주문···배달···’이라는 내용의 <Figure 1-E>는 1907. 9.21 한국축산주식회사의 광고로 원유공급처, 전문기 사, 위생적 기계 등의 근대착유업과 엽서, 전화, 배달 등 근 대유통체계, 개화인이라면 마신다는 감성적 소구까지 망라된 형태로 문호개방 후 30년만의 완벽한 생유 광고라 할 수 있 다. 한국축산주식회사는 이름과는 달리 1906년 일본인 3인 이 만든 회사(Lee 2016)였다. <Figure 1-F>는 1907.1.4 세 창양행에서 수입한 보든사의 연유광고로「대한매일신보」에 총 9번 게재되었다.
3) 서양인 기록으로 본 2기의 우유, 연유 수용
Allen의 글 중 ‘외국인 의사들이 가당연유를 어린이들에게 권장하면서···가당연유 사용 늘어나···’라는 부분과 Avison의 ‘병원에서 우유 요구도가 충분히 증가되어···’라는 부분에서 1896년 이후 우유, 유제품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위 두 문 장이 1896년 이후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보는 근거는 첫째 Avison이 제중원 관리를 직접 맡아 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한 해는 1896년 이후였으며 둘째 서양식 근대병원인 광혜원(후 에 제중원), 시병원, 보구여관 등이 환자들이 많아지자 확장 혹은 분원을 설치한 시기가 대략 1893~1904년 사이이기 때 문이다. 제중원은 1904년 남대문 밖 도동에 세브란스병원으 로 확장이전, Scranton의 시병원은 1895년 상동병원과 통합, 최초여성병원인 보구여관은 1893년 동대문분원을 설치하는 등(KOCCA 2018) 이 시기를 조선인들과 서양인의사 만남이 잦았던 시기로 추론하면 두 가지 근거가 겹쳐지는 기간이 1896년 이후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 가당연유, 생유는 병원 환자에게 필요한 식품이라는 광고가 늘어났고 1901~ 1907 년에 연유광고가 다수 볼 수 있었다는 점은 1900년대 들어 연유에 대한 수요, 공급이 증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생유는 위생문제로 국내 생산이 필수였는데 조선 최초낙 농장은 최경석의 농무목축시험장을 제외하면 1900년 ‘오부 네 고노스케’(Lee 2016) 혹은 1902년 프랑스인이라는 설이 있는데(Han 2002) 어느 것을 기준으로 해도 1900~1902년 사이를 최초 낙농장 설립기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결 론적으로 생유, 연유 모두 1900년대 들어와 수요와 공급 면 에서 적정선을 찾았다고 볼 수 있다.
1기 마지막해인 1895년과 2기 첫해인 1896년에 걸쳐 연유 에 얽힌 특이한 일화가 있었다.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후 1896년 2월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기 전까지 4개월간 고종은 끼니로 연유와 삶은 달걀을 자주 먹었다. ‘위험한 처 지에 놓인 왕(고종)은 한동안 왕이 자리한 앞에서 뜯은 가당 연유와 껍질 채 조리한 달걀만 먹었다’(Underwood 1904)라 는 기록은 조선 후기 혼란기에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최 고 권력자가의 서양유제품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부 분이다.
3. 제3기- 일본이 주도하는 생유, 서양이 주도하는 연유 : 일제강점 전기(1910~1919년)
3기는 일제강점 전기로 2기와 마찬가지로 생유, 연유로 분 류되었으나 차이점은 일본인이 운영했던 목장의 생유광고와 (1910년대 초 집중) 2기(1896~1909년)의 ‘OO양행’과 같은 무역상을 통한 광고와는 달리 브랜드가 전면에 부각된 연유 광고라는 점이었다. 생유는 주로 한문, 연유는 영어·일어· 한문·한글이 혼합된 광고였다.
1) 우유
1910년 10월 14일 황정목장<Figure 2-A> 광고를 시작으 로 평산목장<Figure 2-B, C>, 경룡목장우유<Figure 2-D> 등이 1910년부터 1913년 사이에「매일신보」에 총 43번 광 고를 게재하였다. 평산목장우유는 ‘우유대왕군의 독립’, 황정 목장우유는 ‘대한병원에서 특정어용, 소독, 순량···’ 등으로 특정병원에서 지정된 상품임을 강조하였으며 경룡우유는 ‘시 험제 소독우유’라는 문구로 위생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광 고들은 1910~1913년에 집중되었으며 1913년 이후로는 나타 나지 않았다.
연유에 비해 우유가 조선인 입맛에 맞지 않은 것은 사실 이었으나 일제강점기 조선에 머물렀던 외국인을 위해 우유 생산은 계속되었다. 1910년 착유업자는 61명, 유용 우두수는 452마리, 착유량은 588,500 kg이었던 것이 1940년에는 162 명, 1,618마리, 3,691,604 kg으로(Cho 2003) 강점기 전반에 걸쳐 우유(원유) 생산량은 비례양상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이 시기에는 우유광고를 거의 볼 수 없었다. 이는 고 정소비가 확보된 상품(우유의 경우 조선에 거주하는 서양인 들), 비용 대비 효율적 소비가 낮은 제품이라 거의 광고를 하 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생유광고 언어가 거의 한문이므 로 서양인보다는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혹은 조선인을 위 한 광고로 판단된다. 1884년 입국한 Allen의 기록 이후 한 세대가 지난 시점이지만 생유에 대한 인식변화는 이루어졌 의되 소비는 거의 변화되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2) 연유
1910년대 광고특징 중 하나는 양적으로 높은 연유광고로 1912. 12.7 게이바우유<Figure 3-A>를 시작으로 1913. 5.14 밀크마다<Figure 3-B>, 1914. 4.25, 8.1 인형표밀크<Figure 3-C, D>, 1914. 9.13 네슬레밀크푸드<Figure 3-E>, 1916. 12.15 사람표우유<Figure 3-F> 등이 등장하였다. <Figure 2>의 생유와 <Figure 3>의 연유광고는 게재 연도에는 큰 차 이가 없지만 광고언어에 차이를 보였다. <Figure 2>의 생유 광고는 한문만 사용된 반면 <Figure 3>의 연유광고는 광고 안에 4개 국어인 일본어, 영어, 한문, 한글이 병용되어 작성 되었다. 이 시기는 우유생산 필수 요인으로 위생문제가 부각 되고 생산자체는 일본인이 장악했던 때라 우유광고는 조선 내 거주하는 일본인과 문자를 아는 조선인을 위해 한문으로 제작되었다고 본다. 이에 비해 ‘부패’라는 자연현상을 기술 과학으로 해결한 연유는 기술을 보유한 스위스, 영국 등에서 제조되어 중간기착지로 일본을 경유하여 수입되어 문자를 아 는 조선인을 목표로 하여 4개 국어로 제작된 광고로 볼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교육제도는 1906년 설치된 <보통학교령>에 의 해 만8세부터 보통학교 입학이 가능했다. 이 때는 서당에 다 니는 어린이들이 많아 1919년 서당 재학생은 70%로 보통학 교 재학생에 비해 높았다(Choi 2013). 1919년 3.1운동 이후 국권회복에 실패하자 국권수복에 교육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나라를 되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보통학교 입 학률을 기하급수적으로 높였다(Park 2017). 1919년 일본어를 아는 조선인은 2~3%, 우리말을 아는 조선인은 20% 정도였 다고 한다(Choi 2013).
일본인이 장악했던 축산업, 새로운 소비자층을 조선에서 찾으려는 일본축산업자, 새로운 상품판매처로서 조선을 목표 에 둔 서구열강들의 의도가 그대로 반영된 1910년대 우유연 유 광고는 20세기 초 서세동점, 제국주의, 근대화 등 세계적 흐름이 드러난 결과라 본다.
4. 제4기- 일본이 주도하는 분유와 연유 : 일제강점 후기(1920~1938년)
4기 일제강점후기(1920~1938년) 유제품업계는 분유,연유 로 이분되었고 후기로 갈수록 분유가 강세를 보였다. 3기보 다 광고건수는 증가하였지만 내용면에서 분유 한가지 상품 이 압도적 우세를 보이는 상황에서 꾸준한 연유광고, 완전히 사라진 우유광고, 20년대 후반의 유산균음료, 30년대 후반의 버터, 치즈 광고 등이 나타났다.
1) 분유, 연유
연유보다 후에 출시된 분유는 연유보다 고가였지만 영유 아를 위한 고영양식품이라는 점을 앞세웠으며 초기에는 서 구제품이 주였지만 강점기 후반으로 갈수록 일본제품들이 ‘국 내산’이라는 이름으로 광고되었다. 1920년대 일본의 많은 유 제품회사들 제품이 영양, 과학, 편의성을 앞세워 새로운 시 장인 조선에 그대로 광고된 것이다.
<Figure 4>는 1920~1930년대 분유, 연유 광고이다. デリ ゴ-ル(이하 데리고루)<Figure 4-A>, ワシミルク(이하 와시미 루쿠)<Figure 4-B>, Glaxo(이하 글락소)<Figure 4-C>, クド -ゲン(이하 락구도겐)<Figure 4-D> 등이 서양제품이었고 森 永ミルク(모리나가 미루쿠)<Figure 4-E>, ‘キノミ-ル(이하 기 노미루쿠)<Figure 4-F)’, ‘호시고나밀크<Figure 4-G>’, ‘히시 표밀크<Figure 4-H>’, ‘메리밀크<Figure 4-I>’, ‘금선표밀크 <Figure 4-J>’, ‘홋카이도밀크<Figure 4-K>’, ‘메이지고나밀 크<Figure 4-L>’ 등이 일본제품이었다.
‘데리고루’는 1918년 설립된 미국의 Darigold사의 분유로 ‘와시미루쿠’는 수리표우유, 솔개표우유라고도 불렸는데 ‘eagle’의 일본어 단어인 ‘와시’와 한글 단어인 ‘수리, 솔개’ 등을 붙인 상품명들이었다. ‘글락소’는 1715년 영국 런던에 서 약제상으로 시작한 회사로 현재는 gsk(GlaxoSmithKline) 로 불리며 약품, 백신, 건강관련제품 등을 제작하는 회사이 다(Going global 2018). 이 회사에서 1904년 뉴질랜드의 낙 농장 Joseph Nathan & Co.’s와 함께 분유를 만들었는데 이 제품이 광고된 것이다. 다른 브랜드와 비교하여 후발 주자였 으나 제약회사 특징을 살려 분유에 어간유 성분을 함유시킨 것이 특징이었다. ‘락구도겐’은 네슬레사의 분유였으며 ‘모리 나가 미루쿠’는 1912년 설립된 삼영(森永, 모리나가)주식회 사의 상품으로 연유, 분유 모두 출시되었다. ‘기노미루쿠’는 일본최초로 분유를 개발한 和光堂제품이었다(Wakodo 2018). 분유, 연유가 영유아에게 적합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당시 광 고는 영유아에 한정하지 않았다. 특히 연유는 당시 한참 인 기를 끌었던 캬라멜 원료였으며 커피와 함께 먹기도 하였다. ‘락구도겐’의 경우 분유를 영유아용이 아닌 성장기 어린이, 성인에게는 자양음식, 계절음식 개념으로 광고하였다.
문제는 가격이었는데 영유아는 월령, 이유식 양에 따라 분 유섭취량이 달라지므로 정확한 비교가 될 수 없으나 체감물 가 기준에 따라 파악해 보았다.
이유식 제공 가능기인 6개월 영아를 기준으로 하여 분유 제품 800 g은 약 5일치 양이다. 같은 방법으로 1940년 시판 되었던 1,350 g 분유 1통은 약 8일치 양, 1개월 즉, 30일치 양이 818전(8.2원, 1940.6.11.「매일신보」기사 기준)으로 계산된다. 성인 1인 1끼니 쌀 양을 180 g으로 기준하면 쌀 한 되는 약 3일치 식량으로 쌀 한되 가격은 1940년 3월 7일 「동아일보」 기준 42전이었다. 성인 쌀 구입비용은 420전/월 이고 양이 많은 성인남성이나 부식, 간식비를 고려, 2배로 계 산하면 840전(8.4원)/월이다. 6개월 영아 분유값 818전/월, 성 인 식비 840전/월은 비슷한 셈이다.
분유값은 현재에도 저렴한 가격이 아니므로 타 기준으로 비교해 보았다. 동일연도는 아니지만 1936년 직종별 월급을 보면 월급의사 100원, 잡지기자 50원, 일반회사원 30원, 여 직공 일당 45전이었다(Park 2015). 6개월 영아 1명의 1개월 분유값은 각기 한달 월급 기준으로 의사 1/12, 잡지기자 1/6, 회사원 1/3.7, 여직공(25일간 근무) 1/1.3정도로 회사원월급 의 27%, 여직공월급의 72%가 이에 해당한다.
미곡 수탈, 1920~30년대 쌀값 폭락, 1920년대 후반 대공 황, 도시로 몰려든 농촌인구, 높아진 교육열과 고학력자 등 의 문제로 1920년대 이후 조선인 취업률을 매우 어려운 상 태였다(Choi & Yae 2010). 1930년 조선일보 조사에서 보통 학교 졸업생 중 75% 이상이 실직자(Sho 2011)였고 일자리 라 하더라도 단순사무직, 노동직이 대부분이었던 대다수 조 선인들에게 분유는 결코 쉽게 다가갈 가격은 아니었다.
2) 발효유, 버터, 치즈
‘모리나가고라스’로 대표되는 발효유는 1920년대 후반에, 버터·치즈 등은 1930년대 중반부터 나타났다.「동아일보」 1928. 3.20에 실린 ‘모리나가코라스’<Figure 5-A>는 일본의 대표적인 유산균음료로 현재도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음료이 다<Figure 5-A>. 광고의 문구를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코라 스에 함유된 특수한 유산균이 소화작용을 왕성하게 하고 청 량한 향미가 현대인의 요구를 만족하기에 충분하다’ 뜻으로 발효유가 가지는 특징을 잘 보여준다<Figure 5-B>.
최초 버터, 치즈 광고는 1935년 9월 17일 동아일보에 ‘설 표빠다치즈’ 였다. ‘꼭뻐터요리를!!, 엽서로 제품을 구입하시 옵···’이란 문구로 광고되었으며<Figure 5-C> 이 광고는 1938. 10. 13에 재등장하지만 일제강점기 시대 전체에서 2건 만이 게재되었다. 조선 최초 버터 생산은 1926년 일본인목 장에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고 1930년대 들어와 천안 성환 목장, 수원 모범농장에서 생산되었는데(Cho 2003) 이 시기 는 신문광고 게재시기와도 비슷한 시기였다.
이상의 각 시대별 우유(생유), 유제품 주요특징을 <Table 2>에 정리하였다.
IV. 결론 및 요약
본 연구는 우유가 음식으로서 가치가 있음을 인지하기 시 작한 시점부터 약 55년(1884년~1938년)간 우리나라 사람들 의 우유, 유제품에 대한 시각변화와 수용과정을 고찰하기 위 하여 55년을 4개의 시대(1884~1895, 1896~1909, 1910~ 1919, 1920~1938)로 분류, 서양인 기록물과 신문광고 분석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1884~1895년 1기에 조선에 입국한 서양인들 대부분은 열 악한 식량사정에도 우유를 마시지 않는 조선인 식습관과 우 유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던 자신들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 다. 문호개방 직후인 1기는 서양인과 직접 만남이 없는 한 음식으로서의 우유가치를 인지할 기회가 없었던 시기로 조 선인에게는 입을 통해 우유의 음식가치가 인지되기 시작한 ‘우유문화 도입기’였다.
1896~1909년 2기에 의료선교사들은 생유(때에 따라 우유), 연유를 병약자, 어린이에게 영양식으로 권장하였으며 단맛의 가당연유는 곧 어린이, 성인이 모두 즐겨먹게 되었다. 2기에 한성 내 거주하는 서양인들을 위한 잡화점에서 유제품을 판 매하였고 이 잡화점들은「The Independent」를 통해 영어광 고를 내었다. 1900년대 초 생유(때에 따라 우유)도 광고되었 는데 위생문제로 조선 내에서 전 생산체계가 이루어져야 했 던 생유생산은 외국인, 특히 일본인이 주도하였다. 2기는 우 유가 정식 대중매체인 광고로 가치가 인지되기 시작한 ‘광고 를 통한 소비자 확충기’였다.
3기(1910~1909년) 일제강점 전기 1910년대에는 우유, 연 유로 이분화되었으나 우유는 일본인에 의해 1910년대 초기 에 한정되었고 서양제 연유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1910년 대 우유광고는 대부분 한문으로 되었고 연유광고는 한글, 영 어, 일어, 한문 등이 섞여 있었다.
4기(1910~1938년) 일제강점 중기 이후에는 분유, 연유로 이분화되었고 특히 1920~1930년대 중반에 걸쳐 공급측면에 서 서양, 일본제품 등 양적, 질적으로 풍부한 시대였다. 후기 로 갈수록 일본제품이 강세를 보였으며 1930년대 후반에는 발효유, 버터, 치즈 등이 나타났으나 게재 건수는 적었고 연 유, 분유 가격은 비교적 고가로 대중성에는 한계가 있었다.
19세기 말 서양인들에 의해 음식으로서 가치가 인지되기 시작한 우유는 개화, 신문물, 영양을 상징하는 대표적 서양 음식이었으나 송아지먹이라는 오래된 사회적 통념, 익숙하지 않은 미각, 높은 가격 등과 개화기, 일제강점기 등 혼란한 시 대적 배경은 대중성을 띠는데 한계를 보였다. 1937, 1941년 에는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세계대전 등 전시체제로 접어들 면서 의,식생활이 강력하게 제한되었고 우유, 유제품 광고는 거의 사라져 다시금 대중성이 떨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본고 결과는 19세기 이후 동양·서양, 전근대·근대, 농 업사회·비농업사회 간 식문화변화의 대표적 변용과정을 반 영하고 있다. 동도서기 물결 속에서 의식주 전반에 큰 변화 를 가져왔던 개화기를 배경으로 당시 조선인이 목도했던 타 국 특히 개화되고 발전된 국가의 대표적 음식(료)으로 간주 되었던 우유, 유제품은 근대화된 식생활로 받아들여지기는 하였으나 식생활의 보수성을 설명하듯 수용과정은 쉽지 않 았다. 이러한 결과는 추후 국내 우유, 유제품 생산소비 예측 에 학문적, 문화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다만 자료로 활용한 서양인 기록물이 많지 않아 정확한 시 대적 고찰을 위해서 추가연구가 계속되어야 할 것이며 광고 량은 실제 소비량과 차이가 있으므로 실제 소비량 고찰을 위 해서 별도의 연구가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