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서 론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삼국시대에 우유 및 우유 제품을 식 용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도 왕가나 귀족층에서는 우유 이용이 이어졌다(Lee 1990). 고려시대 몽 고와의 교통 이후 국가 상설기관으로 유우소(乳牛所)가 생겼 으며 조선에서도 어용(御用)으로 이용되었다(Goryeosa vol. 135 http://db.history.go.kr/). 그러나 일반 백성들에게 우유는 매우 낯선 것이었다. 미국 감리교 해외 선교회 소속 의료 선 교단으로 조선에 온 윌리엄 제임즈 홀(William James Hall) 박사는 1893년 평양에서 자신이 마시는 차를 궁금해 하는 조 선 사람들에게 연유에 설탕을 타서 주었다. 그들은 맛있게 마셨는데 소젖으로 만들었다고 하자 금방 역겨워했다. “에이 더럽다! 소젖을 어찌 사람이 먹는단 말인가. 우리는 그런 것 은 마시지 않아!”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항의를 했다(Hall 1984). 이렇게 우유는 ‘왕실과 귀족들이 마시던 귀한 것’인 한편, ‘사람이 먹을 수 없는 더러운 것’으로 상반되게 인식 되었다. 그것은 그만큼 조선에서 우유가 낯선 것이었다는 방 증이기도 했다.
개화기 조선에 들어온 서양인들은 조선에서는 우유를 마 시지 않으며 치즈, 버터 등의 유제품도 없다고 하였다. 농경 사회의 전통으로 소젖을 짜는 일에 대한 거부감, 유당불내증 등의 이유로 조선에서 일반인들의 우유사용은 매우 제한적 이었고 따라서 조선에 들어온 서구인들은 우유를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Lee 2013). 그러나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우유가 본격적으로 수용되고 확산되면서 우리 나라 식문화와 영양보급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그동안 우리나라 우유 수용에 관한 연구를 살펴보면 Lee (1990)는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헌을 통해 유문화(乳文化)를 역사적으로 고찰하였다. 그리고 우유 보급 에 대한 전반적인 역사는 「Sixty Years of Seoul Milk (서울 우유육십년사) (Seoul Dairy Cooperative 1997)」에 정리되어 있다. Velten H(2010)의 저서 「A Global History of Milk (밀크의 지구사)」에서는 전세계 우유사를 개괄하면서 아시 아 국가들의 우유 수용을 다루었는데, 전통적으로 우유를 마 시지 않았던 아시아 문화가 우유를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 것 을 ‘영양 식민화’라고 표현하였다. 이 책의 끝부분에 감수자 Joo(2010)는 ‘한국우유의 20세기사’를 간추렸다. 그리고 교회사 연구에서 Hwang(2011)은 선교사 마렌 보딩(Maren Bording) 의 우유급식 사업 과정을 밝히면서 공주·대전 지역의 우유 전파과정을 연구하였다. Lee(2013)는 근대시기 조선 식문화 를 연구하면서 우유 및 유제품에 대한 서양인들의 저술 기 록을 정리하였다. 근대 이후 한국인의 식생활 변천을 신문광 고를 통해서 연구한 An(2015)의 논문에서는 일제강점기의 우유 광고에 대해 알 수 있다. 이렇게 부분적으로 선행연구 가 진행되었지만, 여전히 우유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전반적 인 과정에 대해 알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본 연구의 목적은 전통적으로 극히 사용이 제한되었던 ‘우 유’라는 낯선 식품이 근대시기 우리나라에서 생산, 보급되며 정착하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다. 본 연구는 우리나라 우유 보급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라는 의의가 있으며, 여전히 현대 식생활에서 우유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식문화의 발전과정을 연구하는데 기초적인 자료를 제 공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II.연구 내용 및 방법
본 연구는 근대시기 우유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기 위해서 「Joseon Chongdokbu tonggyeyeonbo (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26~1939),「Joseon Chongdokbugwanbo (朝鮮總督府官報)」 (1938) 등 공식문서와 일본의 우유 산업에 대한 자료를 살펴 보았다. 그리고 「Joseongyeongjejapji (朝鮮經濟雜誌)」(1929) 등 잡지와 신문의 우유 관련 기사와 당시 사회상을 참고 할 수 있는 소설 등을 포함하였다.
연구에 활용한 신문과 잡지명은 다음과 같다.「Hwangseongsinmun (황성신문)」(1907),「Jeguksinmun (제국신문)」(1902, 1903),「Maeilsinbo (매일신보)」 (1913, 1929, 1937, 1938, 1941),「Gungminsinbo (국민신보)」(1910),「Dongailbo (동아 일보)」(1924, 1927, 1928, 1929, 1936, 1937, 1938, 1940), 「Jungangilbo (중앙일보)」(1933),「Asahisinmun (朝日新聞)」 (1941),「Maeilgyeongje (매일경제)」(1975),「Gyeong-seongilbo (京城日報)」(1916),「Joseongyeongjejapji (조선경제잡지)」 (1929),「Yusim (유심)」(1917),「Cheongchun (청춘)」(1918), 「Sinyeoseong (신여성)」(1932),「Donggwang (동광)」(1927) 등이다.
본 연구의 신문기사 인용문은 국한문 혼용(「Hwangseongsinmun (황성신문)」이나 한글 신문(「Jeguksinmun (제국신문)」, 「Maeilsinbo (매일신보)」)의 경우 최대한 의미가 변하지 않는 범위에서 필자가 현대 표기법에 맞게 작성하였다(Lee 2015).
이상 각종 문헌에 나타난 우유 관련 내용을 다음과 같이 나누어 살펴보았다. 먼저 전사로 (1) 대한제국시기의 우유 도 입에 대해 정리하고, 일제 강점기에 대해서는 (2) 우유 정책 과 산업, (3) 우유 소비, (4) 우유 가격으로 나누어 고찰하고 (5) 일제말기의 우유 수급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문헌자료에서는 여러 종류의 우유가 구별 없이 사용되어 혼돈을 줄 가능성이 있었다. 자료 인용시에는 원문 그대로를 사용했지만, 본 연구의 본문에서는 젖소에서 착유해서 소독 과정 정도를 거친 것은 ‘생우유’, 그리고 가공을 거친 연유 와 분유까지 모두 통칭할 때는 ‘우유’로 구분하여 논의를 전 개했음을 밝힌다.
III.결과 및 고찰
1.대한제국시기의 우유 도입
조선 최초의 젖소 도입은 1885년 7월 최경석에 의해서 이 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Sixty Years of Seoul Milk 1997). 최경석은 1883년 ‘보빙사(報聘使)’의 일원으로 미국의 농사 모범장을 시찰하고 귀국한 뒤, 이를 본받아 1884년 황실 직 속으로 ‘농무목축시험장(農務牧畜試驗場)’을 개설하고 관리 관을 맡게 되었다(Lee 1969). 농무목축시험장은 두 곳의 시 험장을 개설했는데 서울 남대문밖에는 농작물, 망우리 일대 에는 축산 시험장이 있었다. 축산 시험장에서는 가축개량을 위해 1885년 캘리포니아에서 25마리의 가축을 들여왔고 그 중 우유생산을 위한 젖소(Jersey)는 3마리가 있었다(Kim & Hong 2006).
1900년 12월 18일 오부네 고노스케가 당시 일본 영사관의 허가를 얻어 착유업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한국에서 착유영 업의 효시가 되었다. 그런데 1903년 8월에 전국적으로 우역 이 만연하여 수십만두의 소가 폐사되면서 우유생산이 일시 에 중단되기도 하였다(Seoul Dairy Cooperative 1997). 하지 만 1903년 말부터 전염병이 수그러들면서 다시 착유업이 자 리를 잡아갔다.
「Jeguksinmun (제국신문)」에는 1902년 3월 8일부터 “上 品牛乳 漢城泥峴 龜屋商”라는 한 줄짜리 광고가 실리다가, <Figure 1>에서 볼 수 있듯이 1903년 5월 1일부터 “上等牛 乳數百櫃今番米國셔輸着하였습니다 漢城 泥峴 龜屋商”라 는 내용이 보충된다. 즉 “상등우유 수백궤가 현재 미국에서 수입되어 도착했다”는 내용으로, 한성 충무로 2가에 있던 식 료품점인 가메야(龜屋)에서 광고한 내용이었다. 여기에서 우 유는 오랫동안 저장이 가능한 연유(煉乳)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생우유는 목장을 통해 공급되었다는 것을 <Figure 2> 광고를 통해 알 수 있다.「Hwangseongsinmun (황성신문)」 1907년 9월 21일자에는 한국축산주식회사의 우유 광고가 실 렸다. ‘한국축산주식회사’는 1906년 일본인 하도우, 하라, 고 에스카 세 사람이 발기인이 되어 10여두의 젖소를 수입하고 서울 남대문밖 반석방(지금의 중구 봉래동, 중림동)에 우유 착 유소를 건설했다(Seoul Dairy Cooperative 1997). <Figure 2> 광고에는 입구가 밀봉된 우유병 그림이 있고, “우수한 젖 소를 들여와 위생적으로 우유를 정제하고 있으며 전화나 엽 서로 주문을 하면 신속 배달한다”고 하였다.
또한「Gungminsinbo (국민신보)」1910년 1월 1일자에는 아라이(荒井) 목장 광고가 실렸다. 일본인 아라이는 1906년 일본에서 젖소를 들여와 한강변에 목장을 개설 하였다(Seoul Dairy Cooperative 1997). 광고내용을 보면 “육군위수(陸軍衛 戍)병원과 경성대한의원(京城大旱醫院)의 지정용으로 매일 검 사”한다고 위생을 강조하며 우유의 자양가치를 알리고 있다.
의사이자 선교사였던 미국인 알렌(Allen)은 “배탈에 걸릴 위험을 감수하면서 갓 나온 신선한 우유를 먹기보다는 깡통 에 넣어서 판매되는 농축 무가당 우유를 선호한다”고 했다 (Allen 1908). 이외에도 다른 많은 저술을 통해서 개화기 조 선에 왔던 서구인들은 주로 연유를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 다(Lee 2013).
한편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여성을 대상으로 순한글로 제 작된「Jeguksinmun (제국신문)」, 개신 유학자 전통의 「Hwangseongsinmun (황성신문)」, 친일단체 일진회 기관지인「Gungminsinbo (국민신보)」등에 실린 우유 광고의 대 상은 조선인들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것은 이들을 대상으 로 우유가 도입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대한 제국시기 조선에 서서히 소개된 우유 관련 사업은 일제강점 기가 시작되면서 본격화되었다.
2.일제 강점기의 우유 정책과 산업
1)우유 정책
일제강점 초기인 1911년에는 조선총독부령으로 ‘우유영업 취체규칙(牛乳營業取締規則)’이 제정되어 우유의 생산과 보 급에 법률적인 기준이 생겼다. 우유와 유제품의 범위에 대해 “우유라 함은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전유(全乳) 또는 탈지유 (脫脂乳)를 가리키고 유제품이라 함은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연유(煉乳) 및 분유(粉乳)”라고 정했다(Joseonchongdokbugwanbo 1911). Joo(2010)는 부칙을 포함해서 무려 40조에 이르는 상세한 규정을 통해 1911년 한반도에서 이미 우유가 생산과 판매에 엄격한 법률적 제한을 받았음이 확인된다고 하였다.
‘우유영업취체규칙(牛乳營業取締規則)’의 제정은 우유관련 기초 법령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우유 생산의 체계화, 규격 화, 근대화의 시작으로 볼 수 있고, 이후에도 일제시기 동안 개정을 통해 그 틀을 계속 유지했다.
일제 강점기 초기에는 우유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주장이 많이 제기 되었다.「Maeilsinbo (매일신보)」1913년 1월 21일자 기사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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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람은 본래 우유를 즐겨하지 아니하여 장위의 자양과 신 체의 건강에 대하야 한가지 유감함이 적지 않더니 점점 위생 의 필요함을 감각하고 헤아리셔 인생의 가장 긴요한 자양품(滋 養品)을 먹지 아니하면 불가하다하고 작년중기부터 비상히 우 유 먹는 사람이 많아져서 우유발전상 보급에 다대한 이익이 적 지않음으로 일선인 우유 판매업의 조흔 결과를 얻는 중이라더 라(매일신보 1913.1.21.)
원래 우유를 안 먹던 조선 사람이 우유의 중요성을 인식 하고 “작년(1912년) 중기”부터 많이 먹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대로 1911년 조선총독부령으로 ‘우유영 업취체규칙(牛乳營業取締規則)’이 제정되면서 우유 산업이 틀 을 갖추어 가동되기 시작했던 것이라고 보여진다.
「Dongailbo (동아일보)」1924년 2월 11일자에서도 “古來 牛乳를 用하는 事는 거의 없었던바 近來基交力果를 알게되야 需要도 증가하고 營業者의 數도 增加 하엿으나 아직 少數에 불과하는대 十一年末의 乳牛數는 팔백십육두요 동년중의 한 액은 사천이백칠십팔석오십일우삼천사백육십사원에 불과하 였다.”고 보도하였다.
아래와 같이 목축업을 부흥시켜 육류와 우유를 섭취하고 영양부족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내용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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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밥과 菜蔬로 주식물을 삼은 인종은 육류와 우유로 주식물을 삼는 인종과 비견하여 나아가기는 어렵음도 사실이다. (중략) 朝鮮에 뜻 있는 농업가여 우리는 영양부족으로 기운도 없어 다 리도 못펴고 다니는 朝鮮 인민을 이 목축농업의 진흥으로 말 미암아 기상이 활발하고 늠늠한 朝鮮의 인민을 만들기를 기약 하여야 하겠다(동광 제12호 1927.4.1.).
2)생우유 산업
냉장 시설이 보급되지 않았던 당시 상황에서는 보존이 어 려웠기 때문에 생우유의 이용은 목장이 가까운 일부 지역으 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고, 배달을 통해 일반에게 보급된 것 으로 보인다.
아동문학가 방정환이 1918년 잡지「Yusim (유심)」에 발 표한 “고학생”과「Cheongchun (청춘)」에 발표한 “우유배 달부”라는 소설을 보면, 당시 생우유 배달에 대한 정보를 얻 을 수 있다. 두 소설은 비슷한 내용으로 고학생인 주인공 ‘창 호’와 ‘기영’이 목장에서 우유 배달부를 하며 겪는 일을 묘사하고 있다. “고학생”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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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장 생활의 제1야는 다다미 위에서 싸늘하게 지냈다. 새벽 4 시에 일어나 담아놓은 우유병의 수를 세어 주머니에 넣어 등 에 둘러메고 아직도 꿈속에 들어있는 시중으로 배달을 하러 나 섰다. (중략) 모표가 반짝이는 교모를 우그려 쓰고 걸음을 속 히 하여 감영 앞을 지나 죽첨정(竹添町) 서대문으로 들어와 당 주동 수창동 도렴 등을 지나 광화문통 태평통을 거쳐 정동으 로 돌아오면서 수용자의 집에 배달하고 오니, 때는 벌써 7시가 가까워 올 때다.(중략) 책은 들여다볼 사이도 없다. 두서너 시 간 저녁 우유를 배달하고 석반을 먹고 나니 힘이 빠지고 잡념 이 떠나지 않는다(Bang 2009).
주인공 고학생 창호는 “금화산록 봉원사로 넘어가는 길 옆” 에 있는 한 목장의 목부 겸 배달부로 취직했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소설에는 우유 배달의 경로가 자세히 묘사되었고 아침뿐만 아니라 저녁에도 우유 배달을 했음을 알 수 있다.
Min(2014)은 방정환의 평전에서 “목장 풍경이라든가 주인 공이 심경을 토로하는 장면에서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는 그 릴 수 없는 리얼한 묘사를 했다는 점에서 방정환이 실제 우 유배달부를 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앞서 언급한 1907년의 ‘한국축산주식회사’의 광고나 1917 년에 우유배달부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 나왔다는 것으 로 우유배달 시작시점을 가늠할 수 있다. 이미 살펴본 것처 럼 1900년 오부네 고노스케가 착유업을 처음 시작했으나, 1903년 전국적인 우역으로 젖소가 폐사하면서 우유 공급에 차질이 빚어졌다. 그러므로 배달을 통해 비교적 안정적인 생 우유의 보급이 이루어진 것은 1911년 ‘우유영업취제규칙’이 제정된 전후 시점이라고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되었던 「Jungangilbo (중앙일보)」1933년 1월 16일 기사에서는 “평 산(平山) 목장의 우유 배달부가 일년 동안 우유값 받은 천구 백원을 횡령”했다는 기사도 있어 당시 배달부들이 수금도 했 음을 알 수 있다.
「Dongailbo (동아일보)」1927년 7월 3일자에서는 “경기 도 경찰부위생과에서 경성 부근에 있는 각 목장의 우유를 검 사한 결과, 대체로 양호했는데 이후에 계속적으로 불시에 검 사를 하여 부정한 것이 발견되면 엄중히 처벌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현재 경성 시내에서 판매되는 우유가 한홉 병 에 십삼전 십전 팔전의 세가지가 있어 팔전짜리는 순정 우 유가 아니라는 말이 있어 그 점도 검사하였으나 부정한바 없 고 값에 차이가 있는 것은 생산량에 다소 관계로 판명되였 다더라”고 하였다. 경기도의 경우 ‘경찰부 위생과’에 의해 지 속적으로 목장의 생우유와 시판 생우유의 품질이 검사되었 고 위법 시 처벌도 가능했으며 가격도 어느 정도 관리 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연유와 분유 산업
「A Global History of Milk (밀크의 지구사)」에 의하면, 연유는 게일 보든(Gail Borden)에 의해 개발되었는데, 생우유를 진공 용기에 넣고 저온에서 끓여 10퍼센트의 수분을 증 발시켜 만드는 제품으로 밀봉 보관하면 부패하지 않았다. 그 는 1856년 연유 특허권을 얻었고 미국에서는 1870년대 연유 통조림이 상용화되어 팔리기 시작했다. 1861년 미국 남북전 쟁 중에 정부가 연유를 대량주문 했는데 주로 커피 마시는 데 쓰였다. 전쟁이 끝난 뒤 보든은 경쟁사의 연유와 구분하 기 위해 미국 흰머리독수리를 상표로 쓰고 자사제품을 “독 수리표(eagle brand)라고 하였다(Velten 2010).
「Dongailbo (동아일보)」1929년 11월 15일자 기사에서는 “조선 내에 제조공장이 없어 모두 日本及外國(일본급외국)에 서 輸移品(수이품)인바 (중략) 鷲印煉乳(취인연유)의 消費高 (소비고)를 비롯하야 鳳凰煉乳(봉황연유), 森永煉乳等(삼영연 유등)으로 消費狀況(소비상황)”이라고 하였다. 일본에서 들어 오는 것을 이입(移入), 일본을 제외한 외국에서 수입(輸入)이 라고 구분했는데, 당시 조선에는 연유 공장이 없었기 때문에 전량이 輸移品(수이품)이었다. 그 중 가장 많이 소비했던 연 유가 鷲印煉乳(취인연유), 즉 네슬레 “독수리표(eagle brand)” 인 것을 알 수 있다.「Maeilgyeongje (매일경제)」1975년 7 월 31일 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연유 공장은 1963년, 분 유 공장은 1965년에 처음 만들어졌다. 따라서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소비된 연유와 분유는 모두 일본과 외국에서 들여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조선의 연유, 분유 수급 상황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일본의 상황을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일본은 19세기 말부터 연유를 생산했으나 생산량은 미미한 수준이었고, 1916년까지 는 연유를 주로 미국, 캐나다, 유럽에서 수입하였는데 대략적 인 비율은 미국 4할, 영국 3할, 캐나다 1할, 프랑스 1할, 기 타 1할이었다(京城日報 1916.10.16.-1916.11.14.). Sato(佐藤奬 平) (2014)에 의하면, 일본에서 연유가 대규모로 본격적 생산 이 된 것은 1917년으로 모리나가, 즉 삼영(森永)이 연유주식 회사를 설립해서 사업에 뛰어든 것이 계기가 되었다. 삼영에 서 1914년 ‘미루쿠 캬라멜’이 발매되면서 그 원료인 연유의 필요성이 점점 높아졌고, ‘미루쿠 캬라멜’의 수요가 급증하자 해외에서 수입하던 연유에 의존하던 것이 여의치 않게 되었 다. 그래서 원료를 자급하기 위한 차원에서 연유회사를 만들 어 대규모 생산을 하였다. 그 후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 나고 일본 내 연유회사가 많이 생겼으며 삼영도 1927년 공 장을 증설해서 생산량이 더욱 증가하였다(佐藤奬平 2014).
일본 내 연유의 공급량이 남아돌자 해외시장을 개척할 필 요가 생겼는데, 식민지 상태였던 조선은 손쉽게 개척할 수 있는 시장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소화4년(1929)의 「Joseongyeongjejapji (朝鮮經濟雜誌)」를 통해 1912년에서 1928년 사 이 조선에 이입(移入), 수입(輸入) 되었던 연유량을 볼 수 있 는 자료는 <Table 1>과 같다(Joseongyeongjejapji 1929).
<Table 1>에서 합계수량의 괄호 안의 숫자는 원본에 적힌 것인데 계산이 맞지 않아 오타로 사료된다. 1912년에 조선 에 들어온 연유는 일본에서의 이입물량 672근, 일본 이외의 지역에서의 수입물량이 64,862근으로 대부분 수입품인 것을 알 수 있다. 그 양도 미미했는데, 1922년에 이르러 수입량과 이입량이 모두 폭증한 것을 볼 수 있다. 그 후 수입량은 줄 어들고 이입량은 늘어나서 1925년에는 일본에서 들어오는 이입량이 더 많아졌다. 1926년부터는 수입량은 84,799근으 로 대폭 축소되고 이입량이 615,416근으로 크게 늘었다. 이 것은 조선에서 소비되었던 연유가 1910년대에는 대부분 수 입품이었다가, 1920년대 중반부터는 일본 제품으로 바뀌었 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는 위에서 언급한 일본의 상황과 연결해서 볼 때, 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연유 생 산량이 크게 증가하여 해외시장 개척의 필요성이 있었고, 잉 여분의 연유를 조선에 적극적으로 들여왔다고 보인다.
분유는 1867년 리비그(Liebig)와 네슬레(Nestle) 두 제조사 가 유아용 분유를 먼저 개발했다고 주장하는데, 네슬레가 모 유를 소화하지 못하는 미숙아를 위한 분유를 성공적으로 개 발한 뒤부터 네슬레의 제품이 리비그의 제품보다 더 널리 알 려졌다(Velten 2010). 일본에서 분유가 언제부터 생산되었는 지는 정확하지 않은데, 1920년 모리나가 제과주식회사가 원 간식 건조기를 이용해 분유를 생산하기 시작(神田八郞 1937) 한 것으로 추측한다. 일본의 1925년에서 1934년까지 연유와 분유의 생산량과 가격을 살펴보면 <Table 2>와 같다.
<Table 2>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에서 1926년(昭和 1年) 에는 분유의 생산량 887,721근보다 연유의 생산량은 17,720,035근으로 월등히 많음을 알 수 있다. 가격은 1근을 기준으로 했을 때 계산해보면 분유가 1근에 약 0.74엔, 연유 는 약 0.36엔으로 2배 이상 분유가 고가였음을 볼 수 있다. 1934년(昭和 9年)에는 분유의 생산량이 2,397,203근으로 1926년에 비해 생산량이 약 2.7배 증가하였는데도 1근당 가 격은 1.17엔으로 더 비싸졌다. 연유 생산량은 29,716,365근 으로 1926년에 비해 1.9배 증가하였는데, 1근당 가격은 약 0.32엔으로 1926년 보다 0.04엔이 싸지면서 분유와 연유의 가격 격차가 더욱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생산량의 증가에 도 불구하고 분유의 가격이 계속 상승세에 있었다는 것은 일 본내에서 그만큼 분유의 수요가 지속적으로 늘어났다는 것 을 의미할 것이다. 따라서 일본내에 충분히 수요가 있고 고 가였던 분유보다는, 일본에서 남아돌고 상대적으로 저렴했던 연유가 조선으로 많이 들어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연유가 인공수유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었다. 잡지「Sinyeoseong (신여성)」1932년 3월호 “어린아 기 기르는 법”에는 성대 소아과(城大 小兒科) 의사인 이선근 (李先根)이 생우유, 연유, 분유로 인공수유하는 방법과 장단 점을 비교하였다. 생우유는 목장에서 소독을 하지만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하며 반드시 배달 후 일차균을 죽 인 후 사용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했다. 가정에서 살균 방법 으로는 ‘단순자비법(單純煮沸法)’을 추천하였는데, “보통 화 로의 炭火上에 우유를 남비에 담아 올려놓아 끓기 시작한 후 삼내지 오분 후에 사용”하면 충분히 소독의 목적 달성하고 우유 중 비타민 손실이 없다고 하였다. 연유의 사용에 대해 서 “우유로서도 유아를 양육함에는 대단히 곤란할 것이어든 항차 연유는 더한층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제조 법은 진공내에서 우유를 졸여 거기에다 다량의 사탕을 첨가 한 것으로, 사탕의 첨가 분량이 많을수록 열등한데, 일반이 많이 사용하는 것이 “미국제 수리표 연유”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무쪼록 연유영양은 폐하는 것이 좋으며” “향촌에 서 불가불사용”할 때로 이용을 제한하였다. 분유를 만드는 방법은 유병식, 원간식, 분무법 등이 있는데 당시 분유의 대 명사처럼 쓰였던 미국 네슬레 제품 ‘라구도겐’은 “쇠나 닛켈 로 만든 둥그런 통속에 증기를 통해서 덥게 한 후 그 표면에 우유를 발라 한번 돌리는 사이에 건조하게 만들어 가루를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 연유에는 설탕을 넣은 것과 넣지 않은 것이 있었다. 연유에는 “사탕을 넣은 솔개표의 것도 있고 사탕을 조금도 넣지 아니한 ‘카네숀 밀크’라는 것도 있고 (중략) 보통 가정 에서 많이 사용하는 것은 솔개표 연유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위장속에서 발효하는 작용이 많음으로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인공수유에 적합하지 않은 연유가 모유 대 용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동아일보 1928.5.4.).
3.일제 강점기의 우유 소비
대중적으로는 생우유보다 장기간 보존이 가능한 연유(煉乳) 나 분유(粉乳)의 사용이 많았으리라 생각되지만, 당시 생우 유, 연유, 분유의 소비량을 나누어 비교할 수 있는 자료는 거 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 중 생우유와 연유의 소비량에 대해 서 “경성상의(京城商議)” 조사 내용을 보도한 「Maeilsinbo (매일신보)」1929년 11월 15일 기사인 ‘우유와 연유’와 “「Dongailbo (동아일보)」1929년 11월 15일 ‘조선내 연유 와 우유의 소비량’(1929.11.15)”, 그리고 「Dongailbo (동아 일보)」1929년 12월 12일 ‘주요도시 우유수급 상황’ 세 기 사를 바탕으로 재구성하여 표로 만들면 <Table 3>과 같다.
<Table 3>에서 세 기사의 생우유 소비고는 동일한데 매일 신보의 대구, 원산 두 곳만 달라서 오타가 아닌가 생각되며, 숫자가 다른 매일신보의 우유 소비고는 괄호로 처리하였다. 「Maeilsinbo (매일신보)」1929년 11월 15일자에는 전국 주 요도시 생우유와 연유의 소비고가 보도되었고, 「Dongailbo (동아일보)」1929년 12월 12일자에는 같은 도시들의 생우유 소비고와 착유고가 보도되었다. 두 기사에서는 자료의 출처 를 밝히지 않았는데, 같은 내용을 보도한「Dongailbo (동아 일보)」1929년 11월 15일 기사에서 “경성상의(京城商議)에 서 조사”했다고 출처를 밝혔다.
착유고에 비해 소비고가 높은 도시는 경성, 원산이었고 부 산, 군산은 소비고와 착유고가 같은 반면, 대구, 목포, 평양, 진남포, 신의주는 착유고에 비해 소비고가 낮음을 볼 수 있 다. 착유고와 소비고의 상관관계에 대한 자료는 현재 찾을 수가 없지만, 각 지역 구성인구의 특징과 비율, 목장의 수, 경제적 상황, 우유에 대한 인식 등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착유고에 비해 소비고가 높았던 경성과 원산의 인구를 살펴 보면 일본인과 외국인 인구 비율이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Joseon Chongdokbutonggyeyeonbo (朝鮮總督府統計 年報)」(1929) 호구조사 기록을 보면, 1929년 당시 원산은 전체인구가 42,988명으로 일본인과 외국인의 합계가 총 인 구의 26.3%이었다. 경성의 인구는 340,290명으로 집계되어 있는데 일본인과 외국인의 비율이 27.5%에 달한다. 이에 비 해 목장의 수는 1930년 조선의 축산 기록에 의하면 경성은 4곳, 원산은 1곳이었다(Seoul Dairy Cooperative 1997). 따 라서 경성과 원산은 우유의 주 소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일 본인과 외국인 인구 비율이 높은데 비해, 목장 수가 적은 것 이 착유고에 비해 소비고가 높았던 이유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경성의 경우는 착유고가 729석 밖에 안 되는데 비해 소비 고가 2,880석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부족분은 “교외에 산재 한 오착유소(五搾乳所)로부터 공급되는 것이 일천칠백석여 (소량교외지에서 공급하는 것을 합함) 철도편으로 他에서 공 급되는 것 일천백사십삼섬(동아일보 1929.12.12)”이라고 하 였다. 철도 공급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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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편에 의한 搬入은 夏期 특히 不足을 古하는 境遇만 멀리 大邱方面으로부터 供給되나 腐敗의 危險을 伴하기 쉬움으로 비 교적 短距離輸送이 便利하며 현재 충남 예산, 성환, 강원 난곡 을 供給圈內로 한다(동아일보 1929.12.12.).
당시 목장에서는 생우유를 대부분 고온 살균처리 후에 배 달, 수송을 했다. 「Maeilsinbo (매일신보)」1929년 11월 15 일 기사에 우유란 “전부 가공을 하지 않고그대로 소비한 것” 이라고 명시 되어있고, 연유는 따로 소비량을 잡고 있어서 철 도 입하분도 가공처리한 연유가 아닌 생우유로 보아야 할 것 이다. 그럼에도 하절기에 대구 방면에서 철도를 이용해 경성 으로 신선한 상태의 생우유를 공급하는 것이 가능했는지 여 부는 의문이 남는 부분이어서 이후 연구에서 확인이 필요하다.
한편 연유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에는 제조할 수 있 는 공장이 없었으므로 모두 일본과 외국에서 들여왔는데, 이 와 관련해서 참고 할 수 있는 기사는「Dongailbo (동아일보)」 1929년 12월 13일자다. “조선이 우유 생산비에 있어서 일본 보다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일본보다 우유가 비싸다”고 하면 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은 지적하였다.
첫째는 여유(餘乳)의 이용할 길이 전혀 없음, 둘째는 소비 자가 “고가(高價)의 것을 영양가치가 많고 양질유”라고 선호 하므로, 셋째로는 효율적이지 않은 배달 방법의 문제점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중 첫 번째 이유인 “여유(餘乳)”를 이용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은 당시 조선에서는 버터나 연유 등 가공유를 제조하는 시설이나 기술이 없었고, 따라서 남는 우 유가 있어도 이것을 이용할 수가 없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당시 생우유는 그 지역의 소비에 비해 공급량이 부족한 경 우 철도를 이용해서 원거리에서 공급했고, 조선에 제조공장 이 없었던 연유는 일본과 미국 등 외국에서 들여와 소비했다.
4.일제 강점기의 우유 가격
우유의 가격은 총독부 통계연보 물가(物價)를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는데, 물가 항목에 생우유가 등장하는 것은 1926년 부터이다. 이것은 1920년대 중반 정도부터 생우유 소비가 일 부 계층에서나마 증가되기 시작해서 통계에 잡혔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생우유 물가 정보가 있는 1926부터 1939년 까지 가격은 다음과 같다. 비교를 위해 같은 해 쌀과 쇠고기 의 물가를 함께 표로 정리하면 <Table 4>와 같다.
당시 쌀이나 쇠고기 가격이 등락이 심했던 것에 비해 우 유 가격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으며 또한 0.12원에서 0.08 원대까지 점차 낮아졌음을 볼 수 있다. 1926년 한 해만 비교 해보면 우유 1홉(180 mL)이 0.12원일 때, 쇠고기 百升 (375 g)가 0.43원, 쌀 一升(800 g)이 0.39원인 것을 볼 수 있 다. 즉 단순 계산을 해보면 우유 1홉의 가격이 약 쇠고기 105 g, 쌀 246 g에 해당했음을 알 수 있다. 1928년 소학교 교원의 평균 월급을 보면 조선인은 51.29원, 일본인은 112.29원이다(Park 1994). 위의 표에 의하면 같은 해 우유 1 홉(180 mL) 0.12원인 것으로 나타나 조선인과 일본인 소학 교 교원 월급의 각각 0.23, 0.1%에 해당할 정도로 고가였음 을 알 수 있다.
An(2015)은 당시 연유의 가격을 한국 노동자의 하루치 품삯과 비교했다. 연유 1개 가격은 12.5 센트로 한국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20센트로는 연유 2캔을 채 살 수 없을 정도로 비쌌다.
한편 분유에 대한 「Maeilsinbo (매일신보)」1937년 4월 15일 기사 “유아영양과 분유”를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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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루 우유는 20여종 이상이나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두가 지로 나눈다면 전유분이라고하야 우유에서 수분만 없애버린 것 과 또 하나는 가루우유에다가 당분이나 혹은 전분질을 넣어서 조합한 밀크푸-드가 있는데(중략) 현재 연유에 대하야는 법률 로서 여기에 함유한 당분의 분량이 일정되어있고 생유에 대하 야는 검사를 하야 부정상품을 방지하게 되어있으나 유독 분유 -가루우유-만은 아무러한 취체를 아니합니다(매일신보 1937. 4. 15.)
기사에 따르면 1937년 당시 분유의 종류가 20여종이나 있 었는데 단순히 수분만 제거한 것과 당분이나 전분질을 넣어 조합한 것이 있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분유에 대해서는 규 제가 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Table 5>는 동아일보 1940년 6월 8일자에 실린 연유과 분유 가격 기사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표이다. <Table 5>를 보면, 100 g당 가격을 비교했을 때 12전에서 15전대인 연유 에 비해 분유는 48전에서 52전대로 연유보다 더 비쌌던 것 을 알 수 있다. 연유는 가당(加糖)이 무당(無糖)보다 비싸며, 포장 단위가 작을수록 100 g당 가격이 비쌌다. 그리고 분유 는 포장 단위가 상당히 세분화되어 있었다. 이처럼 연유와 분유 가격 역시 상당히 고가였으므로 소비가 일부 상류층으 로 제한되었으리라 볼 수 있다.
5.일제말기의 우유 수급 변화
「Dongailbo (동아일보)」1937년 11월 12일자 ‘가축방역회 의’에 대한 내용을 보면, 총독부 위생과에서 ‘우유영업취체 규칙’을 개정했는데 “현재 조선내에도 우유의 보급이 상당하 나 각종 악균을 비롯한 불순물이 많이 들어있고 또 간간히 물을 다량으로 타서 판매하는 악덕상인이 있어 일반영양에 미치는 폐단이 없지 않으므로 금번 그 취체규칙을 개정하야 악질우유와 악덕상인을 철저히 퇴치하기로 되었다.”고 하였 다. 당시 우유에 위생적인 문제가 많았고 또한 상당히 고가 였던 만큼 물을 타는 등의 폐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Sixty Years of Seoul Milk (서울우유육십년사)」에 의하 면, 1930년 6월에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착유업자 실태를 보면 50여개의 목장은 대부분 일본인이 경영하며 비교적 대 규모였고 조선인이 경영하는 목장은 4곳에 불과했고 규모도 작았다. 착유업자들이 가격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우유를 직 접 판매할 수 없는 영세한 낙농업자는 우유처리시설을 가진 착유업자에게 싼 가격으로 원유를 팔아야 했다. 이러한 문제 를 해결하고자 1934년 4월에는 영세 낙농가들로 조직된 ‘청 량리농유조합(淸凉理農乳組合)’이 조직되었다. 그 후 청량리 농유조합을 중심으로 뭉쳐있던 낙농가들과 서울일원의 대규 모 낙농가 등 21명의 조합원으로 1937년 7월 11일 지금의 중구 정동 8번지에서 현 서울우유협동조합의 전신인 ‘경성 우유동업조합(京城牛乳同業組合)’이 창립되었다. 초대조합장 은 동아목장을 경영하고 조선축산협회 이사로 있던 고에스 카(肥正太)였다(Seoul Dairy Cooperative 1997).
그 후 총독부는 ‘조선중요물산동업조합령’에 의거해 1938 년 7월 11일 경성우유동업조합을 인가했다. 경성우유동업조 합 설립인가가 실린 조선총독부 관보는 <Figure 5>와 같다.
초창기 경성우유동업조합 1일 수유량은 2,070 kg 정도였는 데 필요한 기계나 시설은 대부분 일본에서 도입되었고 1홉 들이 백색 우유병도 일본에서 수입해서 사용하였다. 우유 처 리방법은 근대식 우유 처리기의 도입으로 저온살균방법(65oC, 30분 살균)이 최초로 시행되었다(Seoul Dairy Cooperative 1997).
경성우유동업조합이 설립되기 전 조선의 우유 시설을 짐 작할 수 있는 1936년「Dongailbo (동아일보)」기사는 다음 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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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병을 막는 마개는 반드시 일월요일(日月曜日)을 써서 날마 다 새로 갈아내는 것이라야 하지마는 아직도 조선에는 그런 곳 은 한곳밖에 없는듯하니 유감이나마 어쩔 수 없는 일이오. 또 우유는 고온살균보다 저온살균이라야 양분이 더 많은 것이지 마는 조선에는 아직 그런 설비를 한곳이 하나도 없는 모양이 니 이도 어쩔 수 없는 것이겠습니다.(동아일보 1936.8.13.)
이런 상황에서 “철저한 살균기계장치와 유질향상 등(중략) 하루에 생산되는 우유는 20석인데 이것을 한곳으로 모아가 지고 다시 위생적으로 정제를 해야만 소비자에게 배급되도 록 하는 이상적 설비(매일신보 1938.7.13.)”를 갖춘 경성우유 동업조합의 등장은 생산체계의 표준화, 가격 통일, 저온살균 우유의 최초 시행 등의 의의가 있다. 또한 경성우유동업조합 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우유처리장의 효시라고 볼 수 있 다(Chung 2010).
경성우유동업조합이 겸하고 있던 ‘경성우유판매조합’에서 발매된 저온살균 우유 광고는 <Figure 6>과 같다. “경성부민 의 복음(福音)!”이라고 광고하며 저온 살균우유의 장점을 강 조하고 있다.
그러나 일제가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우 유의 생산과 소비는 통제를 받았고, 심지어 우유가 군수물자 화 되면서 우유 소비시장은 왜곡되고 제한되었다. 당시 군용 비행기의 원료인 철, 알루미늄 등 금속류가 고갈 되어 목제 (木製) 비행기를 생산하는데 접착제로 우유의 카제인이 사용 되면서 우유가 군수물자화한 것이다(Seoul Dairy Cooperative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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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제인은 牛乳中의 단백질로 교착제로 여러방면에 사용하는데 (중략) 가장 소비량이 많은 것은 베니야 제조용(製造用)일 것이 다.(중략) 이것의 대용품으로 가장 有望한 것이 大豆蛋白으로 이것은 大豆油 搾油後의 豆粕을 이용하야 제조하기 때문에 원 료도 풍부 또한 安價인 點은 저윽히 믿븐 點이다(동아일보 1938.6.29.).
전쟁 상황에서 군수용으로까지 소비되자 우유는 절대적으 로 부족해졌다. 우유 소비의 통제를 위해 1942년부터는 ‘조 선연유배급통제요령’이 제정되었고, ‘우유아(牛乳兒) 등록제 도’를 도입하여 등록한 사람에게만 우유가 배급되었다. 우유 배급의 1순위는 유아이며 2순위는 중병환자, 신장염, 결핵환 자 등, 3순위는 기타 병자, 임산부, 허약자 등이었다(Seoul Dairy Cooperative 1997).
하지만「Maeilsinbo (매일신보)」1941년 5월 3일자를 통 해서 이러한 우유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부내에 들어오는 연분유의 대부분이 다방이나 혹은 식당 등으로 자꾸 흘러가고 있는 것이 점점 드러났다. (중략) 젖먹이어린아이 있는 가정에 우선적 배급을 하도록 2일부로 통첩”했다고 하였다. 또한「Maeilsinbo (매일신보)」1941년 6월 27일자에 따르면, “분유와 우유의 품질이 최근 몹시 나 빠져 영양상 우려할 중대문제로 되었음(중략) 최근 전표 없 이도 구입할 수 있는 품질이 나쁜 분유가 많이 있어서(중략) 분유를 육아용과 일반용의 두 종류로 나누어” 상품에 명기 하여 매출하도록 했다고 보도하였다.
이렇듯 전쟁 상황에서 이제 갓 우리나라에 자리를 잡은 우 유 산업은 공급과 수요의 시장논리가 아닌 일제의 통제와 배 급으로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VI.결 론
본 연구의 목적은 전통적으로 왕실과 귀족층 소수만의 전 유물이었던 ‘우유’가 근대시기 조선에 생산, 보급되는 과정 을 살펴보는 것이다. 일제강점 직후인 1911년에 ‘우유영업취 체규칙(牛乳營業取締規則)’이 만들어지면서 우유의 생산과 보 급이 체계화, 규격화 되었다. 냉장시설이 보급되지 않았던 당 시에 우리나라에서 주로 소비되었던 것은 장기간 보존이 가 능한 연유와 분유였지만, 생우유도 전국적으로 생산·소비 되었다. 목장 인근지역은 생우유가 배달되었고, 소비량이 많 은 경성 지역 등에는 부족한 공급량이 타지역에서 철도편으 로 수송되기도 했다.
조선에서 소비된 연유와 분유는 당시 국내에는 제조 공장 이 없었기 때문에 전량 일본에서 들어온 이입품(移入品), 일 본 외의 지역에서 들어온 수입품(輸入品)이었다. 연유의 경 우 일본 내의 생산량이 많아지자 공급 여유분이 식민지 상 태였던 조선에 적극 도입이 되는 양상을 보였다. 생우유의 가격은 1홉(180 mL)이 8전~12전이었으며 연유는 100 g당 12 전~15전, 분유는 100 g당 48전~52전으로 1928년 조선인 소 학교 전체 교원의 평균 월급이 51.29원이었던 것을 고려할 때 상당히 고가였다.
1937년 창립된 현 서울우유협동조합의 전신인 ‘경성우유 동업조합(京城牛乳同業組合)’의 등장은 생산체계의 표준화, 가격 통일, 저온살균우유의 최초 시행 등의 의의가 있다. 일 제 말기에는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우유의 생산과 소비는 통제를 받았고, 심지어 우유가 군수물자가 되 면서 우유 소비시장은 왜곡되고 제한되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여전히 우유는 귀했고 가격이 비싸서 일반 대중들은 쉽게 접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대중화, 일반화라는 표현을 사용하 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 이전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우유 에 대한 중요성을 일반인들도 인식하고 점차 확산되었다. 이 러한 우유의 사용은 이후 한국의 식생활에 많은 영향을 주 었기에 지속적인 관련 연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