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Search Engine
Search Advanced Search Adode Reader(link)
Download PDF Export Citaion korean bibliography PMC previewer
ISSN : 1225-7060(Print)
ISSN : 2288-7148(Online)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Food Culture Vol.31 No.5 pp.381-399
DOI : https://doi.org/10.7318/KJFC/2016.31.5.381

Study on Modern Food Culture History through Records from Foreigners’ Chosun Dynasty Travel in the Enlightenment Period

Mi-Hye Kim*
Department of Food and Nutrition, The Research Institute for Basic Sciences, Hoseo University
Corresponding author: Mi-Hye Kim, Research Institute of Eco Food, Hoseo University, Hoseo-ro 79, Asan, Chungnam Korea Tel: 82-41-540-9663 Fax: 82-41-548-0670 E-mail: Kimmihye92@hoseo.edu
June 1, 2016 September 9, 2016 September 13, 2016

Abstract

The study presented attempts to analyze and categorize Chosun’s food ingredients and culture through a Western perspective based on 32 representative Western documents pertaining to old Korea. Before modernization, Westerners visited Chosun during their visits to old China or Japan. Westerners were most active in Chosun from the open port period to the annexation of Korea to Japan occupation. They were teachers, missionaries, diplomats, and doctors visiting Chosun with personal goals. In 31 book traveler’s journal, it records Chosen’s mainly produced ingredients, such as grains, spices, fruits, cabbage, chicken, and chestnuts; foods from Chosen include kimchi, soup, and tofu. Foreigners especially liked foods made of eggs and chicken, but they did not enjoy Chosun’s lack of sugar and dairy. Thirty-one book foreigners’ records describe Chosun’s Ondol, kitchen, crock, fermented foods, low dining tables, and chopsticks. Chosun people liked dog meat, unrestrained drinking culture, sungnyung, and tea culture. Foreign documentation on Chosun’s food culture allows modern scholars to learn about Chosun people’s lifestyles, as if their lives were a vivid picture.


서양인의 조선여행 기록문을 통한 근대 식생활사(食生活史) 연구

김 미 혜*
호서대학교 생명보건과학대학 식품영양학과 및 기초과학연구소

초록


    Hoseo University

    I. 서 론

    최근 한식의 원형을 복원하고 세계화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아카이브 구축사업 및 사료의 발굴이 활발히 진행 중이다(Moon 2014). 한식 원형 발굴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집중되어 있고 그 이전의 사료 발굴이나 개화기 이후 근대 한식 문헌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미흡한 실정이다(Lee & Jo 2008). 이는 당시 자료의 부족 및 자료에 대한 제한된 접근성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한식문화가 현대의 식문화로 변화하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개화기의 연구가 필요하다. 개화기는 근대화 과정을 통하여 전통적 삶의 방식이 소멸되거나 다양한 양상으로 바뀐 시기이기도 하며 특히, 일반인들의 삶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식생활은 이전 시기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Kim & Chung 2011).

    한국사에서 근대라 표현되는 시대인 개화기는 조선의 마지막 시기에 해당하며 이 시기에 우리나라는 역사상 가장 큰 변화를 겪게 된다(Han 2002). 개화기의 시기적 등장은 1870년대부터라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이다. 우리나라는 개화기에 외국 기술을 받아들여 나라를 부강 시키고자 하였으며, 국권과 국민의 권리를 찾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기도 하였다(Nam et al. 2014). 하지만, 정치적으로 주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힘겹게 버티고 있었으며, 미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의 경제적 실리와 정치적 영향력을 위한 강한 요구를 끊임없이 받고 있었다. 수백 년 간 지탱해온 유교사상도 서구의 과학적, 실리적 사상에 의해 크게 흔들리고 있었던 변혁의 시기였다(Shin 1999). 또한, 다양한 목적으로 서구인들의 발걸음은 조선을 향하고 있었다. 구한말 서양인들에 대한 선행 연구는 선교사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 연구(Jo 1985; Hong 2002; Lee 2004), 선교사들의 한국 근대 교육 성격 연구(Jo 2001), 선교사들의 사회, 문화 활동에 관한 연구(No 1987; Cho 2006), 선교사들의 경제활동에 관한 연구(Lee 1988), 선교사들의 정치적 의미에 관한 연구(Kim 2001), 선교사의 한국시가 인식에 관한 연구(Kim 2011) 등 주로 선교사들의 한국에 관한 인식과 활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서양인들의 기록물 중 대부분은 조선을 여행하며 직접 조선인의 삶을 체험하거나 관찰한 것을 바탕으로 조선인들의 삶과 풍속을 적나라하게 표현 하고 있다. 서양인들의 조선에 대한 기록은 서양 천주교인들에게 대량으로 보급되었으며, 이를 통한 서양인들의 조선에 대한 지식을 축적하는 계기가 되었다(Kim 2008). 따라서 개화기 서양인들의 기행문은 당시의 삶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역사적 사료로써 가치가 있다. 개화기는 열강들 틈바구니 현실 속에서도 근대적 음식문화가 뿌리 내리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으므로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하겠다.

    현재까지 진행되어온 음식문화 문헌연구는 대부분이 고조리서의 분석연구로 이루어져 있으며(Lee 1992), 음식자체의 연구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그 시대 사람들의 의식이나 삶의 모습 등 문화적 요소를 놓칠 수 있다는 한계점이 있다. 개화기 서양인들의 기행문을 통한 음식문화 연구는 서양인들이 바라본 한국 음식문화의 여러 현상 고찰(Kim 2010)이 있었고, 구한말 조선에서 고용된 서양인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음식문화를 살핀 연구(Kim 2005), 서양인들의 조선 음식인식을 살펴보는 연구(Lee 2013) 정도가 있을 뿐이다. 이처럼 개화기 기행문 속 한국음식문화 연구는 미비하며, 특히 사회문화적 관점이 반영된 식생활문화사(食生活文化史) 연구는 거의 없는 상태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구한말 조선을 여행한 서양인 기록물 중 대표적인 기록물 31건을 중심으로 서양인 눈에 비친 조선 사람들과 식생활 습관 등에 관련된 내용을 파악, 분류하여 근대 한국음식문화의 특성과 의미 등을 조망해 보고자 한다. 개화기 기행문의 체계적인 고찰은 전통 한국음식 문화의 현대 음식문화로의 변이 과정을 이해하며 한식 정체성 연구에 대한 의미 있는 기초자료가 될 것이다.

    II. 연구 내용 및 방법

    1. 연구대상

    연구의 분석 텍스트는 농림축산식품부와 한식재단에서 구축한 한국 근대 한식문헌 아카이브 해제본을 바탕으로 하였으며<Table 1>, 번역서와 원서를 대조하여 음식관련 표현에 대한 오류를 최소화 하고자 하였다. 또한 연구대상의 음식문 화사적 고찰을 위하여 개화기 관련 2차 연구 사료들을 분석하였다.

    2. 연구방법

    연구방법은 내용분석(Contents Analysis)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내용 분석의 절차는 분석의 목적을 확인하고, 구인을 적절히 표상할 수 있는 특성들을 확인하며 분석 유목과 지표를 개발하고, 사전 검사를 실시하여 수정, 보완의 과정을 거친 후 내용 분석 타당성을 검증한 후 진행하였다(Park & Woo 2012).

    III. 결과 및 고찰

    1. 조선 여행 서구인의 방문 목적

    구한말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의 방문 시기와 방문목적을 살펴보면 <Table 2>와 같다. 서구인들의 조선 여행을 방문 시기별로 구분하여 보면 근대 개화기 가장 큰 특징인 개항(1880년대)과 한일합방(1910년)을 기점으로 크게 세 기간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첫째, 서양인들에 대한 쇄국의 문호를 연 개항(開港) 이전 시기이다. 1880년대 이전 조선을 방문한 자는 하멜표류기로 유명한 선무원인 하멜(Hendrick Hamel: 1630-1692)과 프랑스 신부 할데(Jean-Baptiste Du Halde: 1674-1743), 탐사를 목적으로 한 영국 군인인 바질 할(Basil Hall: 1788-1844), 탐사를 목적으로와 도굴사건으로 더욱 유명해진 오페르트(Ernst Jacob Oppert: 1832-1903) 등이 있었다. 이 시기는 개항 이전이기 때문에 주로 탐사를 목적으로 하였으며, 조선을 궁극적인 목적지로 하였다기보다는 일본이나 청나라를 가는 중에 방문하게 된 것이었다.

    둘째, 개항시기(1880년대)부터 1910년 한일 합방 시까지이다. 이 시기에 서양인들의 조선 방문이 가장 많은 시기였다. 총 31건의 기록물 중 23건(74%)이 여기에 해당되며, 구한말 서양인의 방문이 꽤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개항 이전 서양인들은 주로 표류 등으로 불가피하게 조선을 여행하였지만, 개항 이후 서구인들의 조선여행은 교사, 선교사, 외교관, 의사 등의 신분으로 자의적으로 또는 조선 국왕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 구한 말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선교사들이었다. 미국, 영국, 캐나다의 선교회에서 조선에 기독교를 전파할 목적으로 1880년대에 집중적으로 선교사들을 파견하였다(Han 2002). 이들은 종교적 신념으로 조선의 오지를 여행하였으며, 여행지에서 체험한 조선의 자연과 풍속 등을 상세히 기록 하였다. 게일(James Scanth Gale: 1863-1937)의 기록에 의하면 이들 선교사들 숫자는 성직자 90명, 비성직자 15명, 선교사 부인 85명, 기타 여성 선교사 58명 등 250여명이었다고 한다.

    셋째, 한일합방인 1910년 이후 시기이다. 이 시기의 기록물은 4건으로 국권을 상실한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은 많지 않았으며, 일제도 서양인의 방문을 금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일합방 이후에는 주로 학자들의 방문이 있었으며, 국제 문제에 관심이 많은 미국 문필가 켄달(Carlton Waldo Kendall), 한국사 연구에 관심을 가진 과학자 그리피스(Wiliam Elliot Griffis: 1843-1928), 동양학자이며 교육자인 영국의 드레이크(henry burgess Drake: 1894-1963), 생태학자이며 동물학자이며 ‘한국의 야생동물지’를 쓴 버그맨(Sten Bergman: 1895-1975) 등이 있었다.

    구한말 서양인들이 조선을 여행하는 것은 매우 열악하여 여행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들은 선교사, 의사, 지리학자, 외교관 등의 신분으로 조선여행의 동기가 순수관광은 아니었으나 수개월 또는 수년을 체류하면서 조선 주요 지역을 여행하였다. 여행자 대부분은 모험가적 여행관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며, 고통스러운 여행여건을 감수하고서도 그들은 새롭고 신비한 조선의 여러 곳을 탐험 한 것이다. 이들 대부분은 여행경로가 상당히 길어 오랜 기간이 소요되었고, 여행의 범위가 상당히 넓었다. 한양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은 물론 남한강, 북한강, 관북지방,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금강산, 경주, 제주도, 부산, 충주 등 다양한 여행지를 방문 하였다. 서양인들의 기록문은 조선의 인상뿐만 아니라 숙박, 운송수단, 여행 환경, 조선인들의 삶의 모습 등을 매우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마치 당시의 현장을 사진으로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될 정도이다.

    2. 구한말 조선의 식재료 및 음식 특성

    1) 기행문 속 조선의 물산

    (1) 가장 흔한 조선의 물산-곡류와 채소

    서양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에서 생산되고 유통되는 가장 흔한 물산은 다양한 곡류와 채소류이다. 곡류로는 쌀, 밀, 기장, 귀리, 보리, 수수, 콩 등이 주를 이룬다. 곡류는 대부분 주식으로 사용 되었다. J.R. Moose(1864-1928)는「Village life in Korea (조선에 살다)」에서 조선 곡류의 활용도를 기 록하고 있다. “The products of the farm are many, but the standard rice, which takes the place of bread, and, I might add, largely of meat also. This is cultivated in all parts of the country where the land will admit of it, of the country depending upon the water supply, for without water it cannot be successfully grown. In parts of the country the water supply is abundant, but the surface of the land is so hilly that no level fields can be made, and in such places rice culture is out of the question. In such sections the people depend largely on millet, oats, peas, beans, and such other grains as grow well on hillsides. Often I have seen farmers at work on the side of the mountains that seemed too steep for one to walk. In many parts wheat and barley are grown in considerable quantities, the barley being boiled and eaten like rice, while the most of the wheat finds its way into the hands of the beer and whisky makers. Next to the rice crop the bean ranks highest in importance; for what the rice is to man the bean is to the pony and the cow, taking the place of corn as the principal food for stock. Another important product is a sort of sorghum cane, which is not sorghum at all except in appearance, there being no more juice in it than in the stalk of Indian corn. This is cultivated on land that cannot be utilized for rice, and is used for many purposes about the house and farm. The seed, which looks just like the sorghum, is used for feeding chickens, and by the very poor is eaten instead of rice (농가의 생산 품목은 많지만, 단연 쌀이 그 중심을 차지한다. 이곳에서 쌀은 빵을 대신하고, 심지어 육류까지도 대신한다고 말하고 싶다. 어떤 곳은 물은 풍부하지만 지세가 매우 가팔라 평평한 농토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곳에서의 농사란 물어볼 필요도 없다. 이런 곳에는 비탈에서도 잘 자라는 기장, 귀리, 완두콩, 강낭콩과 같은 다른 곡물들을 많이 심는다. 밀과 보리는 여러 지역에서 꽤 많은 양이 재배되고 있는데, 밀은 대부분 맥주나 양조업자 손에 들어가는 반면 보리는 쌀과 같이 밥을 지어 먹는다. 쌀 다음으로 중요한 곡식은 강낭콩으로서, 쌀이 사람들의 주식이라면 강낭콩은 옥수수를 대신하여 당나귀나 소를 비롯한 가축의 주식이 된다. 또 다른 주요 생산품으로 일종의 수수같은 것이 있다. 씨는 사탕수수 씨와 거의 비슷한 모양으로 주로 닭 모이로 사용되지만 아주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은 쌀 대신 먹기도 한다.).” 조선인은 밥에 보리나 콩만이 아니라 여러 잡곡을 섞어 밥을 지었다. 여러 곡식을 섞어 지은 잡곡밥을 오곡밥이라 한다. 오곡이란 원래 다섯 가지의 중요한 곡식인 쌀, 보리, 조, 콩, 기장을 말하지만, 지방에 따라 넣는 곡물이 다르기도 하다. 찹쌀이나 멥쌀에 조, 콩, 수수, 팥 등을 섞어 지은 별밥, 차조로 지은 나속반, 콩을 맷돌에 갈아 끓이다가 쌀을 넣고 지은 비지밥, 거피팥을 맷돌에 타서 섞은 거피팥밥, 쌀과 팥 또는 쌀과 조를 반씩 섞어 지은 상반, 좁쌀, 팥, 콩을 섞어 지은 세아리밥, 멥쌀, 찹쌀, 삶은 팥, 대추, 밤을 넣고 찐 혼돈반 등의 잡곡밥이 있다(Han et al. 1998). 이렇게 다양한 잡곡은 벼가 재배되지 않거나 쌀이 부족한 백성들에게, 그리고 춘궁기 등의 식량난을 해결해주는 매우 중요한 작물이었다. H.B. Hullbert(1864-1949)의 기록물 「The passing of Korea」에서도 “Millet is the most ancient form of food known in Korea, and it still forms the staple in most places where rice will not grow. There are many varieties of millet, all of which flourish luxuriantly in every province. It is a supplementary crop, in that it takes the place of rice when there is a shortage in that cereal owing to drought or other cause. Barley is of great importance, because it matures the earliest in the season, and so helps the people tide over a period of scarcity. A dozen varieties of beans are produced, some of which are eaten in connection with rice, and others are fed to the cattle. Beans form one of the most important exports of the country. Wheat is produced in considerable quantities in the northern provinces. Sesamum, sorghum, oats, buckwheat, linseed, corn and a few other grains are found, but in comparatively small quantities (기장은 한국에서 재배된 농작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벼가 재배되지 않은 곳에서는 이것이 주식으로 되어 있다. 기장은 여러 가지 품종이 있으며 어느 지방에서나 많이 난다. 보리는 일찍 수확하여 춘궁기에 식량난을 해결해 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작물이 되고 있다. 콩은 10여 가지가 재배되는데 그 중의 몇 가지는 쌀과 혼식하며 소의 사료로 쓰는 것도 있다. 밀은 북부 지방에서 상당한 양이 산출된다. 이 밖에도 참깨, 수수, 귀리, 메밀, 아마(亞麻), 옥수수, 그리고 그 외에 몇 가지의 곡물이 재배되나 산출량은 비교적 적은 편이다.).”라고 하였다.

    곡류 다음으로 시장에 쌓여 있는 흔한 조선 물산은 채소였다. 그 중 산처럼 쌓아 놓고 파는 무와 배추는 서양인의 눈에 매우 인상적으로 비쳤으며, 시골에서도 시큼한 무와 배추가 없는 식사는 없다고 하였다. Vatslav Seroshevskii(1858-1945)의「Korea(코레야 1903년 가을)」에는 “한국인의 농업경영에서 야채재배는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 한국인들은 무, 순무, 당근, 파, 마늘, 고추, 가지, 토마토, 오이, 호박, 참외, 수박 등을 심는다. 감자만은 덜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감자를 혁명과 관련된 식물이라고 여긴-하긴 감자는 기독교 선교사들이 들여온 것이다- 정부가 오랫동안 재배를 막았기 때문이다. 양배추는 전혀 없다. 대신에 한국에서는 매우 크고 기다란, ‘배추’라고 불리는 중국식 야채를 재배한다. 그것은 절여서 시큼한 양배추처럼 식품으로 이용한다. 모든 야채 중에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먹는 것은 배추와 하얀 색의 매콤한 무다. 나는 서울 종로 근처에 있는 시장에서 산처럼 쌓아놓고 파는 이 두 종류의 야채를 보았다. 한국에서는 시골에서도 시큼한 무와 배추가 없는 식사는 없으며, 푸른 야채밭이 없는 마을도 없다.”라고 하였다. 조선인들의 식생활에서 채소와 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이 기록에는 채소 중 감자가 덜 알려져 있는 이유를 감자가 기독교 선교사들이 들여온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이유로 정부에서 재배를 막은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당시 정치적인 이유로 박해를 받던 기독교인들의 시각이라 생각된다. 감자가 조선에 들어온 연대는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서늘한 기후를 요구하는 재배조건이기 때문에 남미 안데스 고원지대가 원산지인 감자가 유럽을 거쳐 러시아,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만주를 거쳐 우리나라에 온 것은 근거 있는 추정일 것이다. 또한, 순조 32(1832)년 조성묵이 지은「Oneseobang (圓薯方)」 (Jo SM 1832)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감자가 처음 들어오기는 북개시(北開市) 영고탑(寧古塔)이니 이것을 북감저(北甘藷)라고 하는 바, 본디 중국의 서남쪽이 원산지인데 여기서 서쪽 또는 북쪽으로 전파되고 마침내 동쪽으로 전해졌다.”고 하였다(Lee 1984). 서양 선교사들이 감자 종자를 들여온 것도 사실일 수 있으나, 당시 감자재배가 조선 전역에 전파되지 못한 것이 단순히 정치적 이유라는 기록은 비약일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 최초로 감자가 유입된 시기는 선교사들의 방문보다 앞선 시기였다는 것이다.

    (2) 서양인이 선호한 식재료-닭과 계란

    선교사 J.S. Gale(1863-1937, 캐나다)은 조선 선교여행의 몇 가지 어려움을 말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쌀밥, 소금에 절인 배추와 무, 구운 생선 한 조각, 냄새가 지독한 고추장으로 구성된 음식이라고 하였다(Han 2002). 하지만 G.W. Gilmore(1857-?)는「Korea from its capital: with a chapter on mission (서울풍물지)」에서 조선의 토종닭과 달걀은 기막힌 육질 때문에 소고기 생각을 잠시 접어두게 할 정도로 질과 맛이 우수하다고 하였다. 조선의 물산 중 서양인이 가장 선호한 식재료는 닭과 계란이었다. “Chickens are plentiful and large, and are bought readily for about fifteen cents each. They therefore are quite an item in the foreigner’s bill of fare. Eggs are sold by the yard. They are placed side by side and rolled in wisps of straw, each wisp being nearly a yard long and containing ten eggs. These also are cheep, looked at from our standpoint. There are no turkeys in the country, but occasionally an enterprising foreigner secures one from China in order to grace a Christmas or Thanksgiving dinner-table (닭은 그 숫자도 많고 크며 마리당 15센트면 살 수 있기 때문에 외국인의 기호품이 되고 있다. 계란은 1야드 길이의 꾸러미로 팔고 있다. 그것들은 나란히 놓아 건조 짚으로 감싸고 있다. 그 길이는 약 1야드 정도 되는데 그 안에 열 개의 계란이 들어 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계란의 값은 싸다. 이 나라에는 칠면조가 없다. 그러나 때때로 기업열이 대단한 사람들이 중국으로부터 성탄절과 추수감사절을 기념하기 위해 칠면조를 수입한다.).” Varat Charles(1842-1893)도「Deux voyages en Coree (조선기행)」에서 “조선의 토종닭은 꽁지만 1미터가 넘고, 눈자위로는 두 개의 하얀 동그라미 무늬가 있어 마치 코친차이나 닭과 사촌처럼 보이는 데도 여우가 전혀 겁을 집어먹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제 와서 얘기지만 닭들의 그 기막힌 육질은 내게 소고기 생각을 잠시 접어두게 할 정도였고, 달걀 역시 자주 나의 식탁 메뉴로 등장하였다.”고 하였다. Vatslav Seroshevskii(1858-1945)의 「Korea(코레야 1903년 가을)」에도 “한국 닭들은 정말 맛있고, 알도 잘 낳는다. 메밀을 먹여 한국식으로 키운 닭들이 특히 그런데, 메밀은 달걀의 수를 늘려줄 뿐만 아니라 그 질과 맛도 향상시킨다.” 고 기록되었다. 조선시대 가축으로 그 수가 가장 많았던 것이 닭이고, 닭은 집집마다 사육되어 그 요리법도 다양하며 대부분의 고조리서에 닭요리법이 실려 있다. 기록에 의하면 복날이면 으레 영계찜을 먹었으며, 삼계탕을 먹는 전통은 현대에도 계승되고 있다.

    (3) 노점상과 시장 속 조선의 물산

    일제 강점기 민족문화 상식을 문답식으로 표현한「조선상식문답」에서 육당 최남선은 “조선은 대개 봄, 가을이 메마르고 여름에는 흐린 날이 많고 비가 흔하여 과수의 생육에 적당하며 토질이 또한 그 재배에 맞음으로써 각종의 과수가 널리 재배되고 있다.”(Choi 2007)고 하였다. G.W. Gilmore(1857-?)는「Korea from its capital: with a chapter on mission (서울풍물지)」에서 “If the visitor wakes early in the morning and takes a walk through the town, he will find the scene transformed; and as he nears the center the centre of the city the clanger of the morning market will assail his ears; he will find wooden dried fish, fruit, greens, rice and all the varied composing the Korean’s diet, and their owners crying out the virtue of their wares in thorough Western fashion; for the people are early risers, and in summer five to six o’clock is high market-time. By eight o’clock, or very little later, the streets are pretty well cleared of these articles of perishable mature, and then purchases must be made at the stores of booths (도심의 아침 시장의 떠들썩한 소리가 귀에 들리고, 거리 중간에 나무로 만든 진열대 위에 놓인 건어물, 과일, 채소, 쌀 등 조선의 식품을 이루는 다양한 물품들이 팔리는 것을 볼 것이다. 상인들은 매우 부지런해서 여름에는 새벽 5시에서 6시까지가 성시를 이루는 시간대이다.).” 라고 하여 당시 노점상 상인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묘사하고 있다. Bird, Isabella Lucy(1831-1904)는「Korea and her neighbours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에서 “In the booths are to be seen tobacco-pipes, pipe-stems, and bowls, coarse glazed pottery, rice bowls, Japanese lucifer matches, aniline dyes, tobacco-pouches, purses, flint and tinder pouches, rolls of oiled paper, tassels, silk cord, nuts of the edible pine, rice, millet, maize, peas, beans, string shoes, old crinoline hats, bamboo and reed hats in endless variety, and coarse native cotton, very narrow (노점에서 길고 짧은 담뱃대, 사발, 조잡하게 유약을 바른 오지그릇, 밥그릇, 일본제 딱성냥(lucifer match), 아닐린 물감, 담배쌈지, 돈주머니, 여러 색깔의 헝겊으로 만든 주머니, 두루마리 기름종이, 장식술, 비단끈, 잣, 쌀, 기장, 수수, 완두콩, 콩, 짚신, 낡고 뻣뻣한 천으로 만든 모자, 온갖 모양의 삿갓, 그리고 올이 성기고 폭이 매우 좁은 면포가 있다.).”고 하였다. Percival Lowell(1855-1916)도「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내 기억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에서 “Side by side with these are fruit-stands, or perhaps more appropriately nut-stands; for the fruits of Korea are nothing to speak of, while its nuts are exceptionally fine. Oranges, dried persimmons, pears that look like russet apples and are as hard and tasteless as potatoes, chestnuts, walnuts, and pinenuts are among the commonest kinds offered for sale (노점들과 나란히 과일 판매대가 붙어 있는데 아마 더 적당한 이름은 견과 판매대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조선의 견과는 아주 훌륭하다. 귤곶감 그리고 붉은 사과처럼 보이는 배들은 감자처럼 맛없고 딱딱하지만, 밤호두잣 등은 최상의 상품이다.).”라고 기록 하였다. 시장 노점상에서 파는 조선 물산에는 건어물, 과일, 채소, 곡식류 등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는데 쌀, 기장, 수수, 밀, 완두콩, 콩, 강낭콩과 같은 곡식류와, 곶감, 밤, 호두, 잣과 같은 견과류, 귤, 배와 같은 과실류가 주를 이루었다. 주식인 곡류를 제외하고는 건어물, 견과류, 과실류는 일상 식품이라기보다는 주로 제수용품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이후 성리학적 실천윤리가 양반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층에게까지 전달되어, 서민사회에서도 관혼상제를 행하는 분위기가 일반화되었다. 특히 제사를 지내는 풍조가 일반화되면서 제사에 필요한 물품이었던 견과류, 과실류, 건어물의 수요가 크게 증가하면서 노점상 판매 물품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18세기 중엽 이후 유통로의 발달, 화폐의 전국적 유통, 장시의 증가에 따른 전국적 시장권의 형성 등의 현상으로 어물 등의 판매가 증가하였던 것이다(Lee 2001).

    2) 기행문 속 음식 특성

    (1) 밥, 국, 김치, 숭늉 위주 조선의 일상식

    Henry burgess Drake(1894-1963)는「Korea of the Japanese (일제시대 조선 생활상)」에서 “I bent to my table. There was a thin soup, pungent with red pepper; there were squares of bean curd; there were poached eggs; there were innumerable nameless dishes seasoned with garlic and onion; there were little pancakes, and what seemed to me to be celery fried in batter; there were miniscular fishes which one ate a dozen to the mouthful, highly savoury, and spotted as they lay contorted together with starting black shrimp’s eyes; and there was kimchi, the native pickle, whose reek of sour vinegar pervades the whole atmosphere of Korea; and there was rice. Plentiful rice, hot, white and dry, with every grain distinct. And if one wished to drink there was a shallow brass bowl of brownish fluid, the water in which the rice had been boiled (나는 밥상에 몸을 굽혔다. 고추로 매운 맛을 낸 멀건 국과 두부, 반숙한 계란, 마늘과 양파로 맛을 낸 이름 모를 많은 반찬들이 차려져 있었다. 조선의 피클이라 할 수 있는 김치는 신 초산의 역겨운 냄새를 풍겼다. 조선에서 김치는 빠짐없이 밥상에 오른다. 색깔을 낸 여러 잡곡과 함께 물기 없이 하얗고 뜨거운 많은 양의 밥도 차려져 있었다. 마실 것을 청하면 쌀을 끓인 갈색의 액체가 얕은 놋쇠 사발에 담겨 나왔다. 저녁은 아침 식단과 똑같이 차려지고 아침과 저녁은 전 날의 아침과 저녁의 식단이 똑같이 차려졌으며 점심은 남은 음식들을 재탕한다는 말은 이해가 되었다.).”고 하였다. 밥, 국, 김치로 구성된 조선의 밥상을 묘사한 것이다. 우리 민족은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밥을 주로 하는 식사를 해왔다. 밥은 단순한 주식의 개념을 넘어서 영양소의 대부분을 충당하는 역할을 도맡아 왔기에 많이 먹었다. 그리고 힘든 농업노동에 종사했기 때문에 많은 양을 먹지 않고는 생존하기 어려웠다 (Chung 2015).

    우리나라 사람을 탕 민족이라고 불릴 만큼 국에다 밥을 말아먹는 것을 좋아한다. 국에다 밥을 만 음식을 탕반(湯飯) 또는 장국밥이라 하며, 특별히 다른 찬을 갖추지 않아도 김치 한 가지만 있으면 간단히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Han et al. 1998). 조선시대 풍속화 중 주막이나 장터에서는 주모가 큰 가마솥을 걸어 놓고 국밥을 떠 주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국밥은 예부터 전쟁터나 노역장, 행사 때에 많은 사람에게 간편하게 급식할 수 있는 식단이었다.

    서양인이 마실 것을 청하자 쌀을 끓인 갈색의 액체가 사발에 담겨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숭늉을 묘사한 것이다. 숭늉은 주로 짠 발효음식을 반찬으로 먹는 우리네 식사 습관에서 포도당이 녹아 있어 염분으로 가득한 입속을 깔끔하게 씻어주어 개운하다는 느낌을 받게 해준다(Joo 2000). 우리나라에서는 부뚜막 아궁이와 온돌이 일체가 되어 있고 고정식인 솥을 씻기에 매우 힘이 들었기 때문에, 물을 붓고 끓이므로 숭늉을 마실 수 있고 동시에 고정식의 솥을 씻는 방법도 되는 것이다(Lee 1997).

    (2) 발효 음식과 개고기 음식

    J.R. Moose(1864-1928)는「Village life in Korea (조선에 살다)」에서 “This mixture is allowed to stand for several days or weeks before it is ready for use. It must be allowed to ripen. It first ferments, then it fumes, and then it s--s-- well, I didn't say it, but if you ever come within the range of it you will understand just what I mean. They have no dinner bells in Korean inns; they don't need them, For the Kimchie announces when the meal is ready (김치는 양념과 버무려 며칠 혹은 몇 주 동안 기다려서 숙성시킨 후 먹는다. 처음에는 발효되어 가스를 내고, 그런 연후에는 부풀어 오르는 데, 이를 말로 적절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내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것이다. 그것은 조선의 주막에는 저녁식사가 준비되었음을 알리는 종이 필요 없다는 점이다. 항상 김치가 그 냄새로 저녁이 준비되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캐나다 선교사인 James Scanth Gale(1863-1937)도「Korea in transition (전환기의 조선)」에서 조선의 냄새를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The second smell is due to a mixture of garlic, onions, cabbage, salt, fish, and other ingredients, that make up the Korean pickle so greatly enjoyed with their rice. This odor clings like that of Limburger cheese, and follows the native to church and into all the other walks of life (냄새는 마늘, 양파, 양배추, 소금, 생선 그리고 다른 성분들의 혼합물에서 나는 냄새이다. 그 혼합물은 한국인이 쌀밥과 함께 대단히 즐기는 절인 김치이다. 이 냄새는 림버거 치즈 냄새처럼 몸에 항상 배어 있어, 원주민이 교회나 그 밖의 생활의 어느 다른 분야를 가든 항상 그를 따라 다닌다.).” 고 하였다. 발효문화론자들은 한국인이 발효미를 감지하는 능력이 가장 잘 발달하였다고 한다(Lee 2000). 반찬의 거의 80%가 발효식품이기 때문이다. 발효음식은 독특한 발효향과 발효미를 갖게 되는데, 같은 문화적 공동체가 아닌 사람들이 다른 문화권에서 소비하는 발효음식을 접했을 때는 매우 불쾌한 경험과 기억을 가지게 되며, 이 기억이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부정적인 배타주의의 상징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Joo 2000). 이렇듯 서양인들이 기억하는 조선인은 고추, 마늘, 양파, 젓갈이 어우러진 김치 냄새가 나는 사람들로 분류 되고 있었다.

    서양인들이 손꼽는 냄새나는 또 다른 조선 음식으로 막걸리가 있다. Ernst Jacob Opeert(1832-1903)는「A forbidden land vouages to the Corea (금단의 나라 조선)」에서 “The Corean wine is generally made from millet, and resembles, in its smoky and disagreeable taste, the Chinese saki very much (조선의 술은 수수 등의 곡식을 빚어 만들며 중국의 술과 비슷하며 맛이 없고 탄 냄새를 풍긴다.).”고 하였다. 프랑스 고고학자 Bourdaret, Emile(에밀부르다레)도「En coree, plon-nourrit (대한제국 최후의 숨결)」에서 “Les boissons indigenes sont I’eau de riz et le soul. Ce dernier a une saveur detestable; un melange de fumee, d’alcool, d’huile de lampe tout a la fois (토속 음료수로는 술이 있는데, 술 냄새는 고약하다. 연기와 알코올과 등잔 기름 냄새가 한꺼번에 난다.).”고 하였다. Bird, Isabella Lucy (1831-1904)도「Korea and her neighbours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They vary from a smooth white drink resembling buttermilk in appearance, and very mild, to a water-white spirit of strong smell and fiery taste. Between these comes the ordinary rice wine, slightly yellowish, akin to Japanese sake and Chinese sarnshu, with a faint, sickly smell and flavour. They all taste more or less strongly of smoke, oil, and alcohol, and the fusel oil remains even in the best. They are manufactured from rice, millet, and barley (조선의 술은 외형상 버터밀크를 닮은 매우 감칠맛이 도는 하얀 음료에부터 매우 순하고 물로 희석된 강한 냄새와 타는 듯 독한 맛의 화주(火酒)까지 다양하다. 이 중간에 보통의 곡주가 있는데 약간 노란 듯한 일본의 정종과 중국의 삼수(samshu)와 유사한 것으로서 다소 역겨운 냄새와 맛을 지닌다. 술은 쌀이나 기장과 보리로 빚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의 술은 쌀이나 잡곡으로 빚는데 순한 막걸리에서부터 독한 증류주까지 매우 다양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탄 냄새가 나며 맛이 없다고 평하고 있어 조선술이 서양인들에겐 별다른 매력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 외교관인 Madame Claire Vautier(보띠에르)는 「Coree (프랑스 외교관이 본 개화기 조선)」에서 “서울에는 온갖 종류의 노래꾼과 거지와 행상인들이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행상인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초가집의 지붕과 거의 비슷한 모양으로 질그릇을 등에다 엮어서 지고 다녔는데 그 질그릇들은 아주 교묘히 서로 묶여져 있었고, 꼬아 만든 새끼로 기적같이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질그릇 가운데 어떤 것에는 발효된 음료수가 담겨 있었고 또 다른 것에는 둥근 떡과 잔칫날에서나 볼 수 있는 굽거나 끓인 개고기 조각들이 담겨 있었다. 어떤 질그릇에는 완전히 썩어버린 생선젓갈이 담겨져 있었는데 그 냄새 때문에 멀리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베트남의 통킹에서도 나는 이런 음식물을 본 적이 있는데, 한국 사회에서 이런 추접한 음식은 평민들뿐 아니라 상류사회에서도 아주 인기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 기록물에서 보듯 조선의 잔치음식으로는 떡과 막걸리, 그리고 개고기가 즐겨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Vatslav Seroshevskii(1858-1945)의「Korea (코레야 1903년 가을)」의 기록을 보면 “한국인들은 개고기를 즐겨먹는 까닭에 껍질이 벗겨진 개의 몸통고기가 정육점에 돼지고기, 쇠고기와 함께 나란히 걸려 있는 경우도 많다.”고 하였다. Wiliam Elliot Griffis(1843-1928)도「Corea, the hermit nation (은자의 나라 한국)」에서 “Dog-meat is a common article of food, and the canine sirloins served up in great trenchers are laid before the guests, each one having his own small table to himself. Dog-flesh is on sale among the common butchers’ meats, and the Coreans enjoy it as our Indians do (개고기는 흔한 식품이며 일반 푸줏간에서 개고기를 팔며 손님들마다 큰 나무 쟁반에 담은 개고기를 먹는다. 조선 사람들은 미국의 인디언들처럼 이 고기를 즐긴다.).”고 하여 개고기를 먹는 조선인들과 인디언들은 같은 미개한 종족이라는 백인 우월주의 시각을 표현하였다. 우리나라는 개고기를 식용하여 온 오랜 역사와 전통이 있다. 복날에는 보신탕을 먹고, 충청남도의 부여, 서천, 청양, 보령 지방에서는 장례식, 회갑, 생일 때는 개를 잡아서 손님들을 접대한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요리책에 무수한 개고기 요리법이 있다. 이같이 개고기 식용문화는 우리의 전통과 생활 곳곳에 깃들어 있다(Ann 2000). 개는 인간이 사육한 최초의 가축으로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 유물에서 개뼈가 출토되고 있고, 안악의 고구려 벽화에는 도살된 개가 그려져 있다. 여러 문헌에도 고구려에는 개, 돼지, 소, 말이 있다고 하였다 (Ann 1999).

    (3) 유제품과 설탕이 없는 식습관

    미국인 의사였던 Horace Newton Allen(1858-1932)은 「Things Korean (조선 견문기)」에서 “Speaking of cheese, it is remarkable that in Korea Where are to be found such fine large cattle, there is no use made of milk, and this too in a land of such poverty that it would seem that all proper foods would be cherished as such. True they know the use of milk, but the milking of cows is not practised by the people. Of late they have taken to the used of our sweet condensed milk, through the recommendations of the foreign physicians who have prescribed it for children (조선에서는 매우 우수하고 큰 소를 볼 수 있지만 우유 제품이 소용이 없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적절한 영양가의 음식이 그토록 소망스러운 조선처럼 빈곤한 나라에서 우유를 먹지 않는다니 더욱 신기할 따름이다. 어린아이, 환자, 병약자 그리고 노인들이 사람의 젖을 먹는 것을 볼 때, 조선 사람들이 우유의 용도를 알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 사람은 우유를 짜는 일을 하지 않는다. 최근에 외국인 의사들이 어린애들을 위해 처방하고 권고하여 그들도 이제는 미국제의 달콤한 연유를 사용하게 되었다. 지금 분유의 무역이 매우 성행되고 있다.).”고 하였다. Lillias Sterling Horton(1851-1921)도「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상투의 나라)」에서 “Milk, strange to say, they have never used, and they are therefore without a harmless beverage which they can offer their friends on convivial occasions (조선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그들은 결코 우유를 마시지 않으므로 연회를 벌이는 경우 손님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무해한 음료수가 없다.).”고 하였다.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우유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체질적으로 우유 속의 락토오스를 분해할 수 있는 락타아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한국인을 포함한 동아시아 사람들은 락타아제가 부족하여 우유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Marvin harris 1992). 우리의 식습관 중 우유를 활용한 음식은 거의 없으며, 일부 노인들의 보양식이나 영양보충제로 사용되었다. 19세기 빙허각 이씨가 지은「Gyuhapchongseo (閨閤叢書)」에서 우유로 만든 ‘타락죽’이 소개되고 있다. 조영석(1686-1761)의 그림 ‘채유’에서도 도포를 걸친 양반이 소 젖을 짜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Joo 2005) 우유로 만든 음식은 궁중이나 일부 특권층의 음식으로 사용되어졌다.

    Horace Newton Allen(1858-1905)의 저서「Things Korean (조선견문기)」에는 “There is now quite a trade in this article, which the people like because of its extreme sweetness-in a land devoid of sugar, except the sweet of honey, and that obtained from rice and similar grains. An American living at the gold mines, made some excellent maple syrup from the native maples growing there, showing that the poor natives have neglected some splendid opportunities eight at hand, notably milk and sugar (꿀의 감미 이외에는 감미료가 없고 단것이라고는 단지 쌀과 이와 유사한 곡식에서 구하는 이 나라 사람들은 향기로운 감미 때문에 연유를 좋아한다. 금광에 살고 있던 어떤 미국인이 그곳에서 자라는 토종 단풍으로 매우 뛰어난 단풍 당밀(糖蜜)을 만들었다. 이것은 가난한 조선 사람들이 감미료를 손쉽게 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좋은 기회를 소홀히 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고 하였다. 19세기 말 조선에는 설탕의 사용이 매우 제한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이전까지 설탕 소비문화는 생산지나 생산지와 교역이 빈번한 곳에서 발달했다. 그 이외 지역에서는 설탕이 희소한 제품으로 최상류층만이 사용하는 귀한 약재, 장식재였다. 우리나라에는 개항 이후 설탕 수입이 급속도로 증가하게 되었다. 개항 직후 1885년 1,070피쿨(picul, dir 64.2톤)을 수입한 이래 2009년 원료당 수입량 세계 4위인 1,645,950톤으로 수입량이 급증한 상품이다(Lee 2012). 1910년경 충북 청주의 조리서인「Banchandeungsok (반찬등속)」을 보면 김치와 고추장에도 설탕이 들어가는 등 다양한 일상음식에 설탕이 활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Kim et al. 2015). 개항이전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던 설탕은 수입되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급속도로 빠른 시간 내 실용화, 보편화 되었다. 개항이후 설탕 수입이 급증함에 따라 가공식품이 생겨나게 되고, 설탕이 조선의 음식과 융합하여 토착화되었다. 이렇게 설탕 소비가 확대되면서 조선인들의 음식 기호, 취향, 입맛이 변화하고 식사구조가 변화하고 있었다. 설탕과 유제품은 서구 열강 식품의 상징이며 근대화 문명의 상징 식품이었다. 문명한 나라일수록 설탕을 많이 먹어 머리가 좋아진다는 믿음이 있었다(Lee 2013)고 한다.

    3. 구한말, 조선의 식생활문화 특성

    1) 조선 온돌과 부엌의 모습

    목사이며 과학자인 Wiliam Elliot Griffis(1843-1928)는 「Corea, the hermit nation (은자의 나라 한국)」에서 개화기 조선의 부엌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The kang is characteristic of the human dwelling in north-eastern Asia. It is a kind of tubular oven, in which human beings, instead of potatoes, are bake. It is as though we should make a bedstead of bricks, and put foot-stoves under it. The floor is bricked over, or built of stone over flues, which run from fireplace, at one dnd of the house, to the chimney at the other. The fire which boils the pot or roasts the meat is thus utilized to warm those sitting or sleeping in the room beyond (구들은 동북아시아 지방에 있는 주택의 한 특징이다. 구들은 관으로 된 일종의 화덕으로서 감자 대신에 사람을 굽는다. 구들은 서양 사람들이 벽돌로 침대를 만들고 그 밑에 발을 따뜻하게 하는 난로를 설치하는 것과 꼭 같다. 집의 이쪽 끝에 있는 아궁이로부터 저쪽 끝의 굴뚝에 이르기까지 연관 위를 벽돌로 덮는다. 이와 같이 하여 부엌에서 주전자의 물을 끓이고 고기를 굽는 불은 저쪽의 방안에서 앉아 있거나 자고 있는 사람을 따뜻하게 하는 데 사용된다.).”고 하였다. 조선의 온돌 문화는 현재 아파트형 주거문화 속에서도 지속되고 있는 우리가 만든 독창적인 문화유산의 하나로써 자긍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개화기 외국인 선교사 눈에 비친 조선의 온돌 문화는 사람이 구워질 정도로 견딜 수 없는 고역 중 하나였던 것 같다. Ellasue Canter Wagner(1881-1957)도「Children of Korea (조선의 아동의 생활)」에서 “The most peculiar thing perhaps about the Korean house is the method of heating, which, although economical, is, to say the least, unsanitary and fatal to good ventilation (조선 온돌문화가 매우 경제적이다. 하지만 통풍이라는 점에서는 아주 비위생적이며 치명적이다.).” 라고 표현한다. 또한 여름철에도 매일 매일 밥을 끓여대야 하는데 그래서 방이 늘 설설 끓어 역한 냄새와 함께 참기 힘든 추억이었다고 한다. 온돌은 우리민족의 일상생활 속에서 강한 연대감을 형성하게 하였으며, 음식문화 중 탕(湯)문화를 발생하게 하였다(Kang 2010). 일본인들은 조선의 온돌을 문명과 근대에 역행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해체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온돌은 일제강점기에 산림 황폐화의 주요인으로 꼽히며 개량 내지 폐지해야 한다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Lee 2011). 하지만, 일제강점기 온돌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일본은 온돌에 대한 인식 변화가 있었고, 개량 온돌을 도입하여 일본의 건축에 온돌을 도입하였다(Kang SH 2006).

    의료 선교사 Horace Newton Allen(1858-1932)은「Things Korean (조선견문기)」에서 당시 들은 격언의 유래를 설명하며 당시 부엌의 비위생적인 모습을 표현한다. “The natives themselves are wise in this regard and they will quote you a proverb to the effect that he who would enjoy his food should not look over the kitchen wall. A very dirty scullery maid had just prepared a pyramid of luscious persimmons on a little table. The maid stopped to take up the table, when a little whirlpool of dust came twirling along and sprinkled a column of grit all over the fruit, rendering it unfit to place before her royal master. it was time to serve the meal, and the tender skin of the persimmons would not bear wiping without bursting, and rendering them useless. Suddenly as she stood weeping, a bright thought came to her. She got a fresh table, and, picking up the fruit tenderly, one by one, she carefully licked off each one and set it on the new table all ready for the attendant to take in to the king. Hence the proverb (조선에는 음식을 맛있게 먹으려면 부엌을 넘겨다보지 말라는 격언이 있다. 그곳에는 매우 불결한 궁녀가 작은 밥상 위에 달콤한 감을 피라미드처럼 쌓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상을 들려고 허리를 앞으로 굽혔다. 그때 먼지의 회오리바람이 빙빙 돌면서 주방으로 날아 들어와 과일 위에 모래를 뿌려 놓음으로써 그것을 임금님 앞에 바칠 수 없게 되었다. 수라를 바칠 시간이 되었지만 껍질이 연한 감의 먼지를 닦아 내려 하니 터져서 쓸모없이 될 것만 같았다. 계집애는 서서 울고 있는 동안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빈상을 하나 꺼내더니 감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집어 혀로 핥은 후 새 상에 옮겨 놓고는 궁녀들로 하여금 임금님께 바칠 준비를 했다. 그런 후로 그러한 격언이 생겨났다.).”고 하였다. 조선시대 부엌은 한 집안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장소인 동시에 가장 다목적으로 쓰는 공간이기도 하였다. 조리와 난방은 물론이고 절구질 따위의 작업공간으로도 썼기 때문이다. 부녀자는 몸을 씻었고 아랫사람들은 밥을 먹었다. 따라서 부엌은 조리간과 목욕간 그리고 위안처의 구실을 하였다(Lee 2003). 재래식 부엌의 구조 개량은 일제강점기 생활개선 담론의 가장 주요한 화제였다. 재래식 부엌을 보다 위생적이고 가사노동 상 효율적인 구조로 개량하기 위해서는 취사와 안방의 온돌 난방을 겸하는 종래의 아궁이를 폐지하는 것이었다(Kim 2011).

    2) 장독대와 항아리

    개화기 서양인 눈에 비친 조선 가옥의 모습 중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집집마다 마당에 커다란 항아리가 늘어서 있다는 점이다. Lillias Sterling Horton(1851-1921)는「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상투의 나라)」에서 “In most of the inns, tall earthen jars, from two to three, or rarely four feet high, and two or three feet in diameter, in which Ali Baba’s cutthroat thieves could easily hide, are ranged along the side of the wall, but more frequently in the courtyard. They contain various kinds of grain, pickles, beer, wine, and there are always several holding kimchi (a sort of sauerkraut), without which they never eat rice (대개의 여관에는 커다란 흙 항아리가 있는데, 높이가 2-3피트이며 드물게는 4피트짜리도 있다. 직경은 2-3피트가 되어 그 속에서 알리바바의 흉악한 도둑들도 쉽게 숨을 수 있다. 장독은 담을 따라 놓여있지만 대개는 뜰에 있다. 그들은 그 속에 소금, 절인 오이, 음료, 과실주를 담으며, 항상 몇 개는 잘게 썬 배추에 식초를 쳐서 담근 독일식 사우어크라우트 (sauerkraut)를 닮은 김치를 담고 있다. 김치 없이 그들은 밥을 먹지 못한다.).”고 하였다. Vatslav Seroshevskii(1858-1945)도「Korea (코레야 1903년 가을)」에서 조선의 장독대를 “주위의 버드나무 울타리를 따라 평평한 돌들 위에 신 김치, 무, 순무, 그리고 지독히도 시큼한 냄새가 나는 콩가루 범벅이 담긴 여러 개의 커다란 항아리들이 있다. 한국인들은 이 콩가루 범벅으로 ‘간장’이나 ‘토장’을 만든다. 어린 아이 크기만 한 항아리들도 몇 개 있다. 모든 가정에는 장독대가 있고, 그곳에는 역겨운 유황 냄새를 풍기는 삭힌 뿌리음식이나 장이 들어있기 마련이다. 효모가 들어 있는 용기를 집안으로 들여놓아야만 하는 겨울에는 집안에 얼마나 냄새가 진동할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오랜 세월 동안 농경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곡식 위주의 주식과 채소나 콩으로 발효시켜 만든 장류를 부식으로 먹어왔다. 장이나 김치, 젓갈류 등의 발효식품을 담가 숙성시키고 저장하는 데에 옹기가 우수한 용기임이 오랜 세월 동안 경험으로나 과학적으로나 증명되었다(Kim et al. 2015). 옹기는 흙을 구워서 만든 용기이므로 물이 새지 않으면서 미세한 구멍을 내포한 다공질이어서 공기, 미생물, 효모 등이 통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온도, 습도 등도 흡수 조절할 수 있는 성질이 있어서 발효식품을 썩지 않게 오랫동안 숙성, 저장하는데 가장 큰 장점을 지닌 것이 옹기의 큰 우수성이라고 할 것이다(Kim 2007). 옹기는 발효와 숙성 단계를 거치면서 유용균의 발효에 적당한 조건이 유지되어 향이나 맛 등에서 우수한 품질을 가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건조곡물, 신선 과일과 채소류, 소금 등의 다양한 식품을 보관하거나 포장하는 용도로도 사용되고 있다(Seo et al. 2006). 또한, 옹기에서 간장이 발효되는 동안 갈변반응이 더욱 진행되고 항산화 활성이 증가하는 등 기능성을 높여준다고도 한다(Park et al. 2015). 생활문화에 있어서도 장독대는 집안의 여인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곳이다. 위급한 일이 생기면 정화수 한 그릇을 장독 위에 바쳐 떠 놓고 수없이 빌고, 절을 하는 곳이 장독대이다. 또한, 집안의 여인들에게는 온갖 정성을 바쳐 손질하고 가꾸는 정성의 대상물이기도 했다(Bae 1993). 장맛이 집안의 흥망성쇠를 좌우한다고 믿었던 전통사회에서 장독대 관리의 중요성은 말할 여지도 없다.

    3) 낮은 밥상과 젓가락의 마술사

    영국 해군 장교인 Basil Hall(1788-1844)이 기록한「Account of 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 (조선 서해 탐사기)」에서는 신안 해안가 지역 부엌의 모습과 부엌 안 식기구들이 묘사되어 있다. “On the wall opposite to the fire were shelves, having a number of cups, basons, and cooking utensils, principally of coarse stone ware, and some few of a sort of bell-metal. The number of inhabitants in one house must be considerable, if we can form an estimate from the quantity of their dishes and vessels. There were three neat small pieces of furniture on one of the shelves, the use of which we could not discover; they were made of wood, elegantly carved and varnished, with a round top about a foot in diameter, and four legs a foot and a half long (불 반대편 벽에는 선반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수많은 잔, 물동이, 조리 기구들이 있었다. 그 선반 한쪽에는 세 개의 조그맣고 깨끗한 가구가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에 쓰이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넓이가 약 1피트 되는 둥근 꼭대기와 1피트 반정도 길이가 되는 네 개의 다리가 달린 예쁘게 조각되고 칠한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었다.).”고 하였다. 낮은 밥상인 소반에 관한 기록이다. 조선시대는 온돌 문화가 보편화되면서 좌식 생활 문화가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주거지 공간은 문을 기준으로 분리되었으나, 식사를 위한 공간은 특별히 따로 없었다. 하지만 대개는 운반과 식탁기능을 겸한 소반을 사용해 식사공간을 마련했다. 조선 후기 전통소반은 좌식생활이라는 전통생활 습관과 식사하는 공간, 침실 공간, 거실이 따로 분리되지 않은 주거 환경과 온돌과 마루가 혼합된 주거양식, 그리고 여러 세대가 같은 주택에 거주하게 되는 대가족 제도 등 주변국가와는 다른 문화 환경에서 여러 용도로 사용하기에 편리한 합리적인 생활용구였다(Na 2002). 조선시대 전통 소반은 하나의 생활 용구를 쟁반과 식탁이라는 두 가지 기능으로 사용한 조선시대의 효율적인 생활 기물이었다(Han 2009). 한중일은 모두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하지만 지역과 가문에 따라 그리고 신분과 성에 따라 별상을 하기도 하였다. 가족 구성원들이 같이 모여 하는 식사를 통해 가문의 결속을 다지고 위계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특히, 좌식 생활을 하는 한국과 일본에서는 독상문화가 있어 신분과 계급에 따라 상 모양과 차림이 달라져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조차 그 위엄을 드러내고 지키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Lee 2003).

    미국 선교사인 Ellasue Canter Wagner(1881-1957)는 「Children of Korea (조선의 아동의 생활)」에서 “The chop-sticks descend now and then into the little side dishes for bits of dried fish or bits of brine-soaked turnip, until the heaped bowl of rice has vanished. Much smacking of the lips is considered complimentary to the quality and flavour of the food (그들은 수북한 밥을 모두 치울 때까지 젓가락을 이용하여 접시 모서리에 있는 비쩍 마른 생선 토막이며 무 조각까지 먹는다. 그들이 얼마나 맛있는 소리를 내며 먹는가 하는 점은 그 음식의 질과 맛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해 준다.).”고 하였다. 프랑스 외교관인 Madame Claire Vautier(보띠에르)가 기록한「Coree (프랑스 외교관이 본 개화기 조선)」에서도 “한국 사람들이 식사를 할 때 쓰는 식기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사대부의 집이든 평민의 집이든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20센티미터 길이로 잘라 양 끝을 가늘게 깎은 두 조각의 막대로 음식을 먹는데 그것은 나무나 금속이나 칠기 혹은 은으로 만들어졌으며 한국 사람들은 이 젓가락을 숟가락으로도 포크로도 심지어 칼의 용도로도 사용한다. 그들은 젓가락을 마술사처럼 능숙하게 사용하여 음식을 집은 다음 목구멍 속으로 던져 놓고는 게걸스럽게 삼키곤 했다.”고 하였다. 젓가락은 한중일 삼국의 역사적, 문화적 특징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하다(Zhoo & Park 2002). 고대의 한중일 삼국에는 수저를 모두 병용해 왔으나 중국과 일본에서 점차적으로 숟가락의 기능이 상실되고, 한국에서만 현재까지 숟가락을 사용하는 수저병용 문화가 지속되고 있다(Chung 2009).

    IV. 요약 및 결론

    본 연구는 구한말 조선을 여행한 서양인 기록물 중 대표적인 기록물 31건을 중심으로 서양인 눈에 비친 조선 사람들과 조선의 식재료, 식생활 등에 관련된 내용을 파악, 분류하여 근대시기 한식문화를 조망해 보고자 하였다. 연구방법은 내용분석을 통하여 이루어졌고, 그 결과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서구인들의 조선 여행을 방문 시기별로 구분하여 보면 근대 개화기 가장 큰 특징인 개항(1880년대)과 한일합방(1910년)을 기점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개항 이전에는 주로 탐사를 목적으로 하거나 일본이나 청나라를 가는 중에 방문한 경우가 많았다. 개항시기부터 한일합방시기까지는 서양인들의 조선방문이 가장 활발한 시기였는데, 교사, 선교사, 외교관, 의사 등 자의적인 방문이 주를 이뤘다. 한일 합방 이후에는 서양인 방문이 많지 않았으며, 일제도 서양인의 방문을 금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구한말 조선에서 많이 생산되는 물산으로는 쌀, 보리, 수수, 메밀, 참깨, 옥수수, 밀, 기장, 귀리, 완두콩, 강낭콩 등과 같은 곡식류와 배추, 무, 순무, 당근, 파, 마늘, 고추, 가지, 오이, 호박, 참외, 수박, 토마토, 감자와 같은 채소류가 있었다. 조선인들의 식생활에서 배추, 무가 없으면 식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가는 곳마다 채소밭이 없는 곳이 없다고 할 정도로 채소 중심의 식단임을 알 수 있었다. 조선의 물산 중 서양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식재료는 닭과 계란이었다. 조선의 닭은 기막힌 육질 때문에 소고기 생각을 잠시 접어두게 할 정도라고 하였다. 곡식과 함께 노점상이나 시장 속에 가장 많이 팔리는 물산은 건어물과 과일이었다. 기행문 속에 묘사된 구한말 조선의 일상식은 주로 밥, 국, 김치를 기본으로 하고 몇 가지 반찬이 놓이거나 식사 후에는 숭늉을 마시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조선의 음식 문화에서 서양인들이 가장 힘들어 했던 부분이 바로 김치, 된장, 젓갈, 막걸리와 같은 발효음식의 발효취(醱酵臭)였으며, 개고기를 즐겨 먹는 식습관이었다. 서양인의 시각에서는 영양부족국가에서 우유와 유제품이 없는 것과 꿀 이외의 감미료가 거의 없는 것이 신기하다고 기록하였다. 조선의 식생활 문화에서는 온돌과 연결된 부엌의 모습, 발효음식이 보관되어 있는 장독대와 항아리, 다리가 낮은 소반과 젓가락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식습관 등에서 이국적인 호기심을 보였으며, 구한말 조선의 독특한 식사 풍습임을 묘사하였다.

    이와 같이 구한말 서양인들의 조선 여행 기록물들을 분석해 봄으로써 당시 조선인의 생활상을 마치 현장 그림을 보는듯한 느낌으로 생생히 알 수 있었다. 특히, 서울 중심이 아닌 전국 각지를 구석구석 다니며 기록한 기록물이니 만큼 근대시기 조선의 식생활 문화를 광범위하게 볼 수 있으며, 물산을 중심으로 하는 장시의 발달과 화폐 경제 활성화 부분도 살펴 볼 수 있었다. 다만, 선교사들이 들여온 감자가 보편적으로 재배되지 못한 것은 정치적인 박해로 인한 것이라든지, 역겨운 발효음식 냄새와 식용 개고기의 모습은 인디언들의 모습과 같다는 식의 표현은 당시 서양인들의 주관적인 백인 우월주의 시각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감사의 글

    이 논문은 2015년도 호서대학교의 재원으로 학술연구비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이며(과제번호: 2015-0139) 이에 감사드립니다.

    Figure

    Table

    Research subjects

    Westerners who visited late period Chosun

    Chosun's food ingredients in the foreigners' records

    Food and symbolic products from the foreigners' records

    Reference

    1. A son Grebst. I Korea. In Kim SY editor. 2005. Cumlibro, Korea, pp 1-384
    2. Ann YG. 1999. Dog Meat eating history and culture in Korea. Korean J. Food & Nutr., 12:387-396
    3. Ann YG. 2000. Korean’s recognition on edibility of Dog meat, Korean J. Food & Nutr., 13:365-371
    4. B.B Bemedek.「Korea, a Hajnalpir Orszaga」. In Sin BY editor. 2005. Jimmundang, Korea, pp 1-198
    5. Bae DS. 1993. Customs of Jangdokdae. The Korean Folklore, 25(1):197-235
    6. Basil Hall.「Account of 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 In Sin BY editor. 1999. Jimmundang, Korea, pp 1-61
    7. C.L. Varat, C. Long.「Duex voyages en Coree」. In Sung GS editor. 2006. Noonbit, Korea, pp 1-336
    8. C.W. Kendal.「The truth about Korea」. In Sin BY editor. 1999. Jimmundang, Korea, pp 1-130
    9. Cho CR. 2006. A Study on Horace N. Allen’s Roles in Late Yi Dynasty. Korean J. Political Sci., 13(3):299-330
    10. Choi NS. 2007. Common Sense of Choseon. Doorimedia, Seoul. pp 61-62
    11. Chung HK. 2015. Humanities of Rice. ddabi. Seoul. p 53
    12. Chung MS. 2009. About the propagation, reception and transfiguration of the common meal instrument of East Asian three countries. J. Oriental Cult. & Design, 1(1):50-70
    13. E.C. Wagner.「Children of Korea」. In Sin BY editor. 1999. Jimmundang, Korea, pp 1-90
    14. E.G. Kemp.「The Face of Manchuria, Korea, Russian Turkestan」 In Sin BY editor. 1999. Jimmundang, Korea, pp 1-94
    15. E.J. Oppert.「A forbidden land vouages to the Corea」. In Sin BY editor. 2000. Jimmundang, Korea, pp 1-312
    16. Emile Bourdaret.「En coree, plon-nourrit」. In Chung JK editor. 2009. Geulhanari, Korea, pp 1-384
    17. F.A. McKenzi.「Korea’s fight for freedom」. In Sin BY editor. 1999. Jimmundang, Korea, pp 1-282
    18. F.A. McKenzie.「The tragedy of Korea」. In Sin BY editor. 1999. Jimmundang, Korea, pp 1-298
    19. G.W. Gilmore.「Korea from its capital-with a chapter on mission」. In Sin BY editor. 1999. Jimmundang, Korea, pp 1-252
    20. H. Hamel.「Verhaal van het Vergaan van het jacht de Sperwer」. In Sin BY editor. 1999. Jimmundang, Korea, pp 1-200
    21. H.B. Drake.「Korea of the Japanese」. In Sin BY editor. 2000. Jimmundang, Korea, pp 1-224
    22. H.B. Hulbert.「The passing of Korea」. In Sin BY editor. 1999. Jimmundang, Korea, pp 1-546
    23. H.N. Allen.「Things Korean」. In Sin BY editor. 1999. Jimmundang, Korea, pp 1-234
    24. Han BJ, Han BL, Hwang HS. 1998. 100 kinds of Korean food what we should know. Hyeonamsa. pp 56-159
    25. Han KS. 2002. Westerners’ Travel to Early Chosun During Korean Enlightenment Age: A Historical Overview. J. Tourism Sci., 26(3):223-253
    26. Han MH. 2009. Study on Practical Uses of Late Choson’s Traditional ‘Soban’. Dining Space Studies, 4:1-4
    27. Hong SH. 2002. French Perception toward Korea in the Late Korean Monarchy. Ewha management review, 24:117-145
    28. I.B. Bishop.「Korea and her neighbours」. In Sin BY editor. 2000. Jimmundang, Korea, pp 1-453
    29. J. Rober Moose.「Village Life in Korea」. In Moon MH editor. 2008. Bluehistory, Korea, pp 1-319
    30. J.B. Du Halde.「Kingdom of corea in the general history of china」. In Sin BY editor. 1999. Jimmundang, Korea, pp 1-72
    31. J.S. Gale.「Korea in transition」. In Sin BY editor. 1999. Jimmundang, Korea, pp 1-204
    32. J.S. Gale.「Korean Sketches」. In Jang MP editor. 1977. Jimmundang, Korea, pp 1-314
    33. Jo CK. 1985. A study abourt J.S. Gale's perception on Korea and activities in Korea. J. The Hansung Historical Soc., 3:61-115
    34. Jo JJ. 2001. A Study on the Historical Nature of the Role of American Missionaries on Modern Korean Education in Late Chosun Dynasty. Collected papers, 29(1):439-476
    35. Joo YH. 2000. Food War and Culture War. Four Season, Korea, p 148
    36. Joo YH. 2005. Food in the Picture, History in the Food. Four Seasons, Korea, pp 96-100
    37. Kang JC. 2010. A Theory of Poetry on the Persistence and Acculturation of the Traditions of Ondol (Underfloor Heating) Culture. Asian comparative folklore, 4:191-222
    38. Kang SH. 2006. A Study on the Change of the Japanese Architects’ Attitude to the Ondol and the Improved Models of Ondol. J. Architectural Institute of Korea, 22(11):253-260
    39. Kim EY. 2008. Korea Read by Occidental People-French Publications Produced before the Conclusion of the Korean-French Treaty (1886), The Western History Review, 99:201-237
    40. Kim HS. 2001. A Political Meaning of the American Missionaries’ Activity in the End of Chosun Dynasty. Oriental Studies, 31:175-188
    41. Kim HS. 2005. The Daily Lives and Activities of Employed Westerners in the Late 19th Century. Researchs in Recent Korean History, 34:7-36
    42. Kim HY. 2010. Point of View on Korean Culture of Food Experienced by Western People. Language and Cult., 6(1):89-108
    43. Kim MH, Chung HK. 2011. Study on Food Culture During the Late Chosun dynasty and Japanese Colonial Period in the Novel ‘Toji’. J. Korean Soc. Food Cult., 26(6):539-553
    44. Kim MH, Han JI, Chung HK. 2015. Specialized Research on Food Culture of Main Family in Chung-Buk through In-Depth Interview. J. The East Asian Soc. Diet. Life, 25(4):574-593
    45. Kim SH. 2007. Porous and Pottery with Dark Brown Glaze. J. The Korea Contents Association, 7:157-164
    46. Kim SM, No HG, Kim US, Cho WS. 2015. Study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Characteristics of Regional Onggis and Fermentation Behavior: (1) Scientific Analysis of Regional Onggis in Korea. J. Korean Ceramic Soc., 52:33-40
    47. Kim SU. 2011. Western Missionary, Homer B. Hulbert’s Perceptions of Korean Poetry in the Greater Korean Empire. Korean Classical Poetry Studies, 31:5-43
    48. Kim YB. 2011. A Study on the Discourse for the Improvement of Living Conditions and Housing through Modern Women’s Magazines. J. Korean Housing Association, 22(4):51-61
    49. L.H. Underwood.「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In Sin BY editor. 1999. Jimmundang, Korea, pp 1-312
    50. Lee GT. 2000. Korean Dinning Table Culture. Sinwonmoonhwasa, Seoul, pp 32-68
    51. Lee HK. 1988. Economy activity of protestant missionary in the latter era of Choseon Dynasty. J. Hansung Historial studies, 5:59-92
    52. Lee KJ, Cho MS. 2008. Foodways in Korea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Period by Analysis of the articles in the Yeo Sung Magazine. J. Korean Soc. Food Cult., 23(3):336-347
    53. Lee KJ. 2013. Westerner’s View of Korean Food in Modern Period-Centering on Analyzing Westerners’ Books J. Korean Soc. Food Cult., 28(4):356-370
    54. Lee SH. 2004. Perspectives on Korea among the American protestant missionaries in the period AD 1884-1919. J. Korean Studies, 27(2):123-146
    55. Lee SW. 1992. Hansik gosikmoonheon jipseong old cook book I. Suhaksa, Seoul, pp 299-310.
    56. Lee SW. 1984. Cultural history of Korean food. Kyomoonsa, Seoul, pp 230-233
    57. Lee SW. 1997. Cultural history of Korean food. Kyomoonsa, Seoul, pp 261-261
    58. Lee WS. 2003. Comparative analysis of space usage in traditional residences according to living behaviors among Korea, China and Japan. MS Thesis, Yonsei University, Seoul, pp 39-41
    59. Lee YH. 2001. Marketing distribution of seafood in the late Joseon dynasty. Korean Cult., 27:205-245
    60. Lee YH. 2012. The Development of the Modern Korean Sugar Consumer Culture. Korean History Studies, 157:191-223
    61. Lee YH. 2013. The Improvement of Dietary Life of the Upper Class in 1930s. History and Reality, 88(6):271-302
    62. Lee YS. 2011. The view on Ondol between Japanese and Korean people during the Japanese ruling era-Focused on『A Source Book Related To Housing Culture』 edited by Dankook University Institute of Oriental Studies. Practical Folkloristics Studies, 18(8):297-331
    63. M.C. Vautier.「(En) Coree」. In Kim SH editor. 2002. Thehaksa, pp 1-1,450
    64. Marvin Harris,「The sacred cow and the abominable pig」. In Seo JY editor. 1992. Hangil, Korea, pp 155-163
    65. Moon JH. 2014. Study on Measures of Utilizing Records for Establishing Korean Food Archives: Based on Royal Court Food in the Joseon Dynasty. MS Thesis, Kyunghee University, Seoul. pp 11-76
    66. Na SH. 2002. Small portable dining table. Daewonsa. Korea. p 59
    67. Nam KW, Park JS, Yi JH. 2014. A Study on the Commercial Terms in Seoyugyeonmun and Perspective on the time of Enlightenment. The review of Korean Cultural Studies, 45:261-300
    68. No GM. 1987. Social and Cultural activity of French missionary in the latter era of Choseon Dynasty. Church history Studies, 5:99-123
    69. O.N. Denny.「China and Korea」. In Sin BY editor. 1999. Jimmundang, Korea, pp 1-140
    70. P. G. von Moellendorff.「P. G. von Moellendorff - ein lebensbild」. In Sin BY editor. 1999. Jimmundang, Korea, pp 1-172
    71. Park SY, Lee SK, Park SI, Kim IY, Jeong YH, Yu SR, Shin SC, Kim MS. 2015. Antioxidant Activity of Korean Traditional Soy Sauce Fermented in Korean Earthenware, Onggi, from Different Regions. J. Korean Soc. Food Sci. Nutr., 44:847-853
    72. Park YJ, Woo YH. 2012. Content Analysis in the Field of Educational Technology in Korea: A Methodological Review. J. of Educational technology, 28(2):263-287.
    73. Percival Lowell.「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In Jo KC editor. 2001. Yedam. pp 1-312
    74. S. Bergmen.「In korean wilds and villages」. In Sin BY editor. 1999. Jimmundang, Korea, pp 1-318
    75. Seo KH, Song BS, An DS, Chung SK, Lee DS. 2006. Physical properties of Korean Earthenware (Onggi) as Food container. J of Korean Soc. of Packaging Sci. & Technology, 12:87-90
    76. Shin YJ. 1999. Diffusion and Influence of Western Political Thoughts in East Asian Countries. J. Social Science Review, 9:75-93
    77. Sieroszewski Waclqw.「Корея」. In Sin BY editor. 1999. Jimmundang, Korea, pp 1-264
    78. W.E. Griffis.「Corea, the hermit nation」. In Sin BY editor. 1999. Jimmundang, Korea, pp 1-658
    79. W.F. Sands.「Undiplomatic memories」. In Sin BY editor. 1999. Jimmundang, Korea, pp 1-254
    80. W.R. Carles.「Life in Corea」. In Sin BY editor. 1999. Jimmundang, Korea, pp 1-230
    81. Zhoo RG, Park GS. 2002. On several questions concerning the reaserch of Zhu culture. J. Korean Soc. Dietary Cult., 17(3):337-3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