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서 론
1876년 개항과 동시에 조선은 급속도로 변화하는 세계정 세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놓였다. 당시 국제 정세의 무게 중 심은 ‘중국’에서 ‘서양’으로 이동하고 있었고, 그 사이에서 일본은 서양을 전범 삼아 ‘신생제국’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Lee 2006). 이러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세계사적 대세에 따라 하루속히 ‘문명개화’를 통해 ‘부국강병’을 바랐던 조선 은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개화기는 ‘서구에서 기획되고 근대 일본에 의해 번역된 근 대’를 조선이 처음 체험하고 태동시킨 시기(Hong et al. 2006)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일상생활에도 나타나 조선의 음 식문화는 여태까지와는 다른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서양의 식품이나 요리법 내지는 식생활의 관습이 전해져서 우리나 라의 식생활이 한식과 양식의 혼합시대를 이루고 새로운 풍 조를 일으키게 되었다(Kang 1978).
이 변화를 주도한 것은 당대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외교 사절이나 유학생 등의 신분으로 신생근대 국가인 일본을 비 롯해서 미국이나 러시아, 유럽 국가들을 직접 돌아보는 기회 를 가졌고, 경험한 것을 공적 혹은 사적 기록으로 남겨서 조 선의 근대화를 앞당기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변화를 주도한 또 하나의 세력은 언론 매체였다. 국내 신문과 잡지는 새로 운 정보를 소개하고 뒤떨어진 우리의 구습을 타파하자고 주 장하며 개혁에 앞장섰다.
이렇게 조선시대까지 비교적 그 모습을 유지해오던 한식 에 외부 세계의 문화가 급격하게 들어오며 그 틀을 바꾸는 시기가 바로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이며, 따라서 이 시기에 대한 이해 없이는 한식의 변천과정을 이해하기 어렵다(Chung 2014). 개화기를 포함한 근대시기 식문화 관련 논문은 일제 시기 잡지인「Yeosung」(여성)을 분석한 연구(Lee & Cho 2008), 소설「Toji」(토지)를 중심으로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 기의 음식문화 연구(Kim & Chung 2011), 서양인 저술을 중심으로 근대시기 서양인 시각에서 본 조선음식문화를 고 찰한 연구(Lee 2013), 그리고 근대 이후 100년간의 식생활 변천을 신문의 식품광고를 통해 분석한 연구(An 2015)등이 있다. 이처럼 이 시기에 대한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기 존의 연구는 근대시기를 포괄적으로 다루었고 개화기만을 집 중적으로 다룬 연구는 1883년 ‘조일통상조약 기념연회도’를 통해 개화기 식문화를 다룬 Ju(2004)의 연구 외에는 찾아보 기 힘든 실정이다.
개화기는 근대가 형성되기 시작한 기원(Hong 2006)이며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거듭나며 주체적으로 처음 서구 문물 을 받아들였던 시기로,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그들의 필요 에 따라 왜곡된 수용을 했던 일제강점기와는 다른 변모를 보 였던 시기이다. 개화기의 명칭과 시기 설정에 대해서는 여러 학문 분야에서 다양한 논의가 있으나 본 연구에서는 1876년 개항이후부터 1910년 일제강점기 전까지를 개화기로 구분하 였다.
또한 “근대화란 19세기 중엽 서구에서 생겨난 용어(Kim 2003)”로 그 개념과 정의에 대해서는 학문분야와 학자마다 많은 논란이 있다. Anderson(1992)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이 선포된 후에 잇따라 온 산업과 기계의 가차없는 전진이라는 자본주의의 사회·경제 변화가 야기한 충격의 산물(Anderson 1992: Kim 2003, p 69 재인용)”이라고 하였다. Ju(2004)는 19세기 말 이후 한반도에 도래한 서양의 근대가 지향하는 목 표인 사회시스템인 ‘역사적 근대’와 사람들이 실제 삶속에서 실천적으로 지향하는 근대적 사고방식과 의식주, 각종 의례 등을 ‘사유와 생활의 근대’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Hong (2006)은 “전통적 가족제도에 묶여있는 집안과 아직 계몽되 지 못한 조선사회를 ‘내부’, 근대화·서구화된 외국, 즉 일 본 혹은 미국 등지의 서양을 ‘외부’로 규정하고 동경의 대상 이며 긍정적인 공간”으로 설정하였다. 이 연구에서는 “근대 =서구≒일본(Hong 2006)”으로 인식했던 당시 조선의 ‘외부 를 향한 개화(開化)’로 논의의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본 연구의 목적은 개화기(1876~1910년)의 ‘근대화’라는 시 대적 명제 아래 이루어졌던 조선 음식문화의 변화를 서양음 식의 수용을 중심으로 고찰하는 것이다. 개화기 각종 문헌에 나타난 음식과 식생활 관련 내용을 고찰하여 역사적 격동기 우리나라 식생활 변화를 점검하고 그 변화가 근대로 이어지 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II.연구 내용 및 방법
본 연구는 개화기 지식인들의 기행문과 회고록 등의 자료, 그리고 당시에 발행되었던 신문과 잡지, 그리고 외국인들이 남겼던 기록 등 접근 가능한 다양한 문헌자료 가운데서 음 식과 식생활에 대한 내용을 연구대상으로 하였다.
각종 문헌에 나타난 음식과 음식문화에 대한 내용을 분석 한 결과, 크게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었다. 1. 서구음식과 음식문화 경험 2. 서구적 음식문화 도입 3. 서구음식의 조선 유입과 확산 4. 서구음식 도입을 둘러싼 논란 등으로 나누어 각 내용을 고찰하고자 한다.
개화기 지식인들은 많은 기행문과 자료를 남겼지만, 그 가 운데 음식과 식문화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서구 신문물 을 통해 하루속히 부국강병을 이루고자하는 목적을 위해 주 로 정치·경제 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안타깝게도 음 식에 대한 것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진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개화기 지식인들은 조선에서 서양음식을 처음 접 해본 사람들이었고, 서양음식이 조선에 도입되는데 큰 역할 을 했다. 그들의 기록과 더불어 당시 신문과 잡지에 나타난 기사를 통해 개화기 조선의 음식문화가 서구 음식을 수용해 가는 모습을 최대한 추적하고자 했다.
연구대상 신문잡지명과 창간시기는 다음과 같다. 관보(官 報)이자 최초의 근대 신문인「Hanseongsunbo (한성순보: 1883.10.31.)」, 그 뒤를 이은「Hanseongjubo (한성주보: 1886. 1.25.)」, 최초의 민간 신문이자 순한글 신문인 「Dongnipsinmun (독립신문: 1896.4.7.)」, 독립신문의 영문판 「The Independent (디 인디펜던트: 1896.4.7.)」, 개신 유학자 전통의「Hwangseongsinmun (황성신문: 1898.3.8.)」, 하층민과 여성대상의 순한글 신문 「Jeguksinmun (제국신문: 1898.8.10.)」, 최초의 일간 신문 「Maeilsinmun (매일신문: 1898.10.26.)」, 대한제국시기 대표 적 항일지「Daehanmaeilsinbo (대한매일신보: 1904.8.11.)」, 그리고 최남선이 발행한 최초의 근대잡지 「Sonyeon (소년: 1908.11)」 등이다.
본 연구를 위한 신문 자료 수집은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구축한 ‘미디어가온(http://www.mediagaon.or.kr)’의 ‘기사통 합검색 Kinds’의 ‘고신문’ 검색 시스템을 이용하였다. 그리 고 제국신문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제국신문 미공개 논 설 자료집: 1907.5.17.~1909.2.28」을 참고하였다. 본 연구의 신문기사 인용문은 한문신문(한성순보), 국한문 혼용(한성주 보)의 경우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제공하는 번역본을 사용했 으며, 국한문 혼용(황성신문)이나 한글 신문(독립신문, 제국 신문, 매일 신문, 대한매일신보 국문판)의 경우 최대한 의미 가 변하지 않는 범위에서 필자가 현대 표기법에 맞게 작성 하였다.
그리고 연구대상이 된 저서와 작가는 다음과 같다.「Seoyugyeonmun (서유견문)」: 유길준,「Haecheonchubeom (해천 추범)」: 민영환,「Ildonggiyu (일동기유)」: 김기수,「Sahwagiryak (사화기략)」: 박영효,「Yunchiho ilgi (윤치호 일기)」: 윤치호. 이런 책들은 필자가 외교사절로 다른 나라를 방문했을 때 겪 은 공식적인 접대에서의 경험이 위주로 기록되어있고, 민간 에서의 기록은 담지 않은 한계를 지닌다.
또한 외국인들의 한국에서의 경험을 담은 다음과 같은 문 헌을 참고하였다.「The First Missionary of Korea (한국에 온 첫 선교사)」: Appenzeller,「Korea and Her Neighbors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Isabella B,「German Couple's Honeymoon Trip to Korea (독일인 부부의 한국 신혼여행)」: Rudolf Zabel,「German doctor of Gojong, Wünsch (고종 의 독일인 의사 분쉬)」: Richard Wünsch. 외국인들이 남긴 이 문헌들은 개인적인 경험에 국한되어 있긴 하지만, 그들이 가진 서양음식의 기준과 당시 조선에서 경험했던 서양음식 을 비교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자료라고 생각한다.
III.결과 및 고찰
1.서구음식과 음식문화 경험
개항 직후 조선의 지식인들은 일본을 통해 처음 서양음식 을 접하는 경우가 많았다. 1876년 일본과 조선은 강화도 조 약에 따라 ‘수신사(修信使)’를 교환하게 되었는데, 1차 수신 사로 일본에 갔던 김기수 일행이 연회에서 대접받은 것은 일 본음식이 아닌 서양음식이었고, 식사방법과 상차림등도 모두 서양식이었다. 김기수는 「Ildonggiyu (일동기유)」(Kim IS ed. 1998)에서 상차림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큰 탁자를 놓고 탁자 둘레에 앉았다. 각 사람의 면전 앞에다 제각기 이름을 쓴 종이며 제공될 음식차림 목록이 적힌 종이 가 있었으며(중략) 각사람의 면전에는 각기 두 개의 자기 접시 가 놓여있다. 하나에는 흰포(白布)를 담아 그 속에 빵을 놓았 는데 포(布)로는 방울방울 번지는 것을 받아내어 빵을 먹는데 도움이 된다. 하나에는 깨끗하니 아무것도 없고 빈접시의 왼쪽 에는 대, 중, 소 세 개의 수저가 갖춰있는데 이빨(주: 포크)로 는 들어올릴 수도 있고 찍을 수도 있다. 오른 쪽에 있는 칼 두 개 뒤에 두 개의 수저가 있는데 아울러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 았다. 이에 식사를 주는데 부드러운 국(주: 스프) 과 고기산적 은 불과 조금뿐이었다. 단단한 것이나 고기산적은 이빨달린 수 저가 다루고 칼로는 잘라내며 부드러운 것이나 국은 수저로 취 할 뿐이었다(Kim IS ed. 「일동기유」1998, p 42).
또한 「Ildonggiyu (일동기유)」에서 그는 이 연회자리에서 처음 경험한 신기한 서양 음식인 ‘빙즙(氷汁)’에 대해 묘사 했다.
빙즙(氷汁)이라는 것이 있는데 얼음을 갈아 가루를 만든데다 달걀 노른자에 설탕을 풀어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얼음이 하 나의 즙일 뿐이지 얼음이 아니었다. 한숟갈을 입에 넣으니 찬 기운이 이뿌리까지 스며 들었으니 이게 무슨 방법으로 만든 것 인가. 또 유명한 얼음으로 만든 것이 있는데 오색이 찬란하게 모양을 산처럼 쌓아 놓았는데 맛은 달콤하여 먹을만했다. 한번 입에 넣으면 폐부가 늠렬(凜烈: 살을 엘 듯이 추운 모양)해지 는데 역시 아주 기이했다(Kim IS ed.「일동기유」1998, p 46).
1882년 3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박영효 역시 일본으 로 가는 배에서 서양요리를 대접 받았다.「Sahwagiryak (사 화기략)」(Kim IS ed. 1998) 1882년 8월 9일에 “배는 신통 하고 장엄하게 만들어졌다. 선장이 서양요리를 대접했다.”라 고 했는데 이렇듯 당시 일본은 외교 사절단에게 일식이 아 닌 양식을 대접하였다.
적극적으로 서구를 모방했던 일본의 근대화 작업에 대해 서는 「Hanseongjubo (한성주보)」에서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일본은 明治(명치) 6년부터 維新(유신)의 정치를 改行(개행)하 여 매사에 서양법을 모방하고 있고,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뜯 어고쳐 도습되어온 구습을 一洗(일세)하였다. 철갑선을 만들고 포대를 건설하고 郵政(우정)을 설치하였는가 하면, 아래로 음 식과 의복, 일상생활의 사소한 예절에 이르기까지 또한 서양인 의 것을 받들어 법도로 삼고 있다(한성주보 1887.6.13.).
일본의 이런 적극적인 서양문화 수용의 결과는 외교사절 등 관리층 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을 통해서도 관찰되었다.
본인이 輪船(윤선)을 타고 上洋(상양)에서 동북으로 外東洋(외 동양)의 長崎(장기: 나가사키)까지 갔었다. 그 때 일본인 몇명 이 한 배에 함께 타고 가는데 모두 서양인의 복장을 하고 함 께 서양인의 선창에 들어가서 서양인과 함께 음식을 먹으며 서 양인의 식사도구·칼·수저·수건 등을 서양인과 다름없이 사용하였고(한성순보 1884.6.13.)
이렇게 우리보다 먼저 서구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을 통한 간접적인 경험과 더불어, 외교 사절단들과 유학생 등이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며 체험한 직접적인 경험도 소개되었다.
1883년 7월 민영익을 전권대사로 하는 보빙사절단(報聘使 節團)이 미국에 특파되었는데, “사절단의 파견목적은 보빙의 사명뿐 아니라 한미 무역에 큰 뜻을 두었고 미국의 선진문 물을 둘러보아 개화를 앞당기려는 의도가 있었다(Jo 1987).” “1883년 9월 16일자 뉴욕 헤럴드지는 일행이 식사의 변화에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으며 식사가 끝난 후에도 식탁을 떠 나지 않고 오래 자리를 지켰다고 전했다. 그들은 마치 현대 화된 나라의 노련한 외교관들처럼 늑장을 부리며 의젓한 행 동으로 식사를 즐겼다는 것이다(Jo 1987).” 이런 현지 보도 로 미루어 볼 때, 보빙사절단은 미국의 음식과 식문화에 대 해 미리 인지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고 짐 작된다. 그만큼 당시 조선에게 개화는 절실한 시대적 과제였 고, 미국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낯선 음식과 식문화 수용 에도 적극성을 보였다고 생각된다.
‘보빙사(報聘使)’의 일원이었던 유길준은 이미 1881년 ‘신 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파견된 경험도 있었는데, 「Seoyugyeonmun (서유견문)」(Chae H ed. 1982)에서 서양 의 스푼, 포크, 나이프 등 식사 도구와 접시, 잔 등 그릇을 소개하고 서양음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서양사람들의 음식물은 빵, 버터, 생선, 고기류가 주식인 셈이 고 차, 코오피 등은 우리나라에서 물마시듯 마시며 각종 생과 일, 마른 과일도 식사가 끝난 뒤마다 먹고 있다.(중략) 서양의 사의 말에 의하면 아침에 먹는 생과일을 금과 같다고 한다면 낮에는 은, 저녁에는 납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1888년부터 1891년 사이 미국 밴더빌트(Vanderbilt) 대학 교에 재학하였던 또 다른 유학생 윤치호는 대학기숙사 식사 를 1890년 8월 10일「Yunchiho ilgi (윤치호 일기)」(Park JS ed. 2005)에서 기록해 놓기도 했다.
일상의 식탁에 대하여 한 말씀 드립니다.
6시 30분에 아침식사: 양배추, 베이컨, 비스킷, 버터, 애플파이, 설탕, 시럽, 커피, 우유, 식사 후 단것들.
11시 30분에 정찬: 거의 위와 같음
해지고 등불 킬 때 저녁식사: 거의 위와 같음
웨슬리 홀에서 보다는 자주 달걀과 닭이 식탁에 오릅니다.
한편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세계일주(Cho 2007)”는 러 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1896년 4월 1일 제물포항을 출발했던 특명전권공사 민영환 일행의 여행이었다. 민영환, 윤치호, 김도일, 김득련, 손희영, 예브게 니 슈타인(Evgenii Fedorovich Stein) 등은 그해 10월 21일 까지 총 204일 동안 아시아, 북아메리카, 영국, 유럽횡단, 러 시아 전지역 일주를 했다. 민영환의「Haecheonchubeom (해 천추범)」(Cho JG ed. 2007) 1896년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러시아 음식과 연회 분위기를 소개하였다.
6월 3일
영접관리 파스코프가 청하여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술과 안주가 깔끔하게 갖추어져 있다. 생선탕이 있었는데 맛은 우리 나라 호서의 조기와 비슷하니 이를 최고의 탕이라고 한다. 러 시아의 풍속은 손님을 청하여 별도로 술과 안주를 한상 만들 어 먼저 먹게 하는데 우리나라의 주안상과 같다.
6월 4일
오후 8시에 궁내부 청첩으로 황궁의 무도회에 갔다. 행사장과 의식, 절차가 지난 28일 접객회 때와 같았다. 귀족남녀가 춤추 고 즐기는데 술과 차, 과일과 사탕을 여러곳에 벌여 놓아 많은 사람이 마음껏 마시고 먹기에 편하게 했다.
한편 민영환과 동행했던 수행원 김득련은 한국 최초의 영 문 잡지「The Korean Repository」에 1896년 러시아 궁중연 회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동방예의지국의 나라 조선을 떠나 난생처음 거대한 여객선에 몸을 싣고 보니 진기한 것 일색이로다.(중략) 양반네 진짓상에 웬 쇠스랑과 장도는 등장하는가? 입술이 찢기지 않으면서 접 시의 물건을 입에 넣는다는 것은 참으로 고역이구나. 희고 눈 같은 것이 달고 달기에 이번에도 눈 같은 것을 듬뿍 떠서 찻 종지에 넣으니 그 갈색물은 너무 짜서 삼킬수도 뱉을수도 없 더라. 노르스름한 절편은 맛도 향기도 고약하구나[(Cho JG ed. 「Haecheonchubeom (해천추범)」2007, p 85. 재인용].
수저문화권의 동양인이 처음으로 서양 식탁의 포크와 나 이프를 만났을 때 그것은 “쇠스랑”과 “장도”로 보였고, 그것 을 이용해 “입술이 찢기지 않으면서”하는 식사는 “고역”이 었다. 설탕인줄 알고 “갈색물” 커피에 소금을 넣고 곤란해하 고, 치즈로 추정되는 “노르스름한 절편”은 “맛도 향기도 고 약”하기만 했다.
「Min Yeonghwan and Yun Chiho went to Russia (민영 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Yun GN ed. 2014)에 따르면, 이 일행에 영어 통역 담당으로 간 윤치호는 1896년 5월 17 일 독일에서의 경험을 적고 있다. “정거장에서는 사내아이들 과 예쁜 처녀들이 맥주를 판다. 동양에선 마셔본 적이 없는 음료수다. 독일맥주는 꿀물처럼 달아서 알코올이나 다른 성 분이 들어 있는 것 같지 않다.”라고 하였다. 또한 베를린에 서 경험한 독일식사에 대해서 “아주 훌륭한 저녁식사를 하 다. 독일은 무엇이든지 특별나다. 식탁위의 창과 칼, 이쑤시 개와 그 외의 비품들이 모두 크다.”고 하였다. 그런데 정작 미식의 도시 프랑스 파리에서는 1896년 9월 7일 “러시아의 홍차”를 그리워하며 “식탁 위에 놓여있는 것이란 차가운 물 과 딱딱한 빵을 적셔 줄 쉬어터진 포도주 아니면 말라빠진 비프스테이크뿐”이라고 불평했다. 그러나 11월 20일 마르세 유에서는 “오랜 전통을 가지면서 가장 사랑받는 요리”로 “부 야베스”를 소개하며 “수프의 일종인데 다양한 생선들을 크 게 썰어 넣고 요리해서 그 묘미를 더해준다”고 하였다.
민영환 일행의 세계일주는 명성황후 시해와 아관파천이 일 어난 직후에 이루어졌고, 당시 조선은 일본을 배척하고 러시 아의 힘을 빌리고자 하였다. 또한 조선은 여태까지처럼 일본 을 통해 서양문물을 도입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직접 서양문 물을 접하고 근대화를 앞당기려 노력했다. Cho(2007)는 “민 영환의 기행은 ‘조선 근대화’라는 과제를 안고 선진문물을 면밀하게 고찰하고 이를 조선에 적용하기 위해 부심했기에 여타 세계일주와 큰 차별성을 갖는다.”고 하였다. 이들이 러 시아, 독일, 파리 등에서 서양음식을 접했다는 것은, 곧 조선 이 과거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고 일본의 한반도 지 배 야욕을 배척하며,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경험한 “근대초기 한국인의 생생한 지구촌 현장 확인(Cho 2007)”이라고 볼 수 있다.
2.서구적 음식문화 도입
「Hanseongsunbo (한성순보)」1884년 4월 16일자에는 서 양의 선진 기술을 받아들이자는 의미에서 “技藝院(기예원)” 을 소개하였다. 서양에서는 기예원을 건립하여 각종 기술을 연구하는데, 그 중 음식에 대한 과목도 포함된다고 하였다.
제11과에서는 음식의 副材料(부재료)에 대한 것을 과목으로 하 는데, 첫째로는 각종 酵麵(효면)을 만들고, 둘째는 大麥葉(대맥 비엽)과 葡萄汁(포도즙)을 만들며, 셋째는 과일이나 곡식으로 酸醋(산초)를 빚는다. 제12과에서는 製糖法(제당법)을 논하는 것을 과목으로 하는데 그 방법으로 때로는 사탕수수의 진액을 쓰기도 하며 혹은 사탕무우로도 한다(한성순보 1884.4.16).
“西洋(서양)의 技藝(기예)는 中國(중국)과는 같지 않”다고 하며 “技藝院(기예원)”에서 과정을 마치고는 공장에서 실무 를 하고 다시 돌아와 연구를 함으로써 “技藝(기예)가 날로 정밀”해지며 “물품은 훌륭해도 값은 싸게 되어 언제나 中國 (중국)의 舊法(구법)에만 얽매여 발전이 없는 것과는 다르 다.”라고 하였다. 거듭 중국과 서양을 비교하는 것으로 보아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과학적이고 실질적인 서양 의 기술을 받아들이고자 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서양의 기술은 “소 잡는 법”에도 이르렀는데, 「Dongnipsinmun (독립신문)」1897년 1월 16일자에서는 “조 선에 고칠 일도 많이 있지만 소 잡는 법도 고치자”라고 하였 다. 외국서는 소를 잡을 때 즉사시키는데, 조선서는 “방망이 로 때려죽이니” 너무 참혹하다고 하고, 또한 “조선서는 소 잡은 후에 피를 다 빼지 않는 까닭에 소고기를 음식으로 만 들면 누린 냄새가 나고 소고기 빛이 희붉지가 않고 선지 빚 같으니 이것은 소고기를 버리는 것이라”하였다. 따라서 “한 성부에서 서울 안에 있는 포사하는 사람들을 불러 외국 소 잡는 법을 한 번 가르친 후 그 법대로 시행하게 하면 첫째는 몹시 죽이는 풍속이 없어질 터이요 둘째는 고기 맛이 나아 질 터이요 셋째는 외국 사람들의 조선 사람들이 잡은 소고 기를 사 먹을 터이니 장사 하는데도 유조 할지라(독립신문 1897.1.16)”고 하였다.
서양의 선진 기술을 받아들임과 더불어 우리가 개선해야 하는 점도 지적되었다.「Dongnipsinmun (독립신문)」1896년 11월 14일자에서는 “조선이 지금은 혼자 사는 나라가 아니 라 세계 각국 사람들과 같이 사는 터인즉 그 사람들과 교제 를 아니 하여서는 못 할지라”고 하며, “외국 사람들에게 야 만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식사예절을 지키자고 하였다.
남의 집에 갈 때에 파나 마늘이나 냄새 나는 음식 먹고 가지 않는 법이요(중략) 음식 먹을 때에 소리나게 입맛 다시는 것과 국물 음식 먹을 때에 소리 나게 마시는 것은 모두 실례라 아 예 손가락으로 무슨 음식을 집어 먹지 말고 칼과 숫가락과 젓 가락을 소리 나게 상이나 접시 위에 놓지 말며 음식 먹을 때 에 아에 부정한 이야기 말며(독립신문 1896.11.14.)
「Jeguksinmun (제국신문)」1907년 10월 20일자 “음식 먹 는 습관을 고칠 일”에서는 우리나라 식습관의 고칠 점을 두 가지로 지적하고 있다.
조반석죽이라는 문자가 있어서 아침에는 밥먹고 저녁에는 죽 먹으니 이 풍석은 전혀 한가한데서 나왔도다.(중략) 아침과 저 녁을 바꾸어 아침에는 일찍이 먹고 저녁에는 반찬도 잘 차리 며 혹은 친구를 청하여 대접함이 가하다(중략) 늙은이는 먼저 먹고 그 다음에는 젊은이 먹고 그 다음에는 여편네들과 아이 들 먹고 그 다음에는 하인이 먹으니 식구 많은 집에서는 밥을 치루자면 두세시간을 가져야 되나니(제국신문 1907.10.20.)
외국사람들이 아침밥을 일찍 먹고 저녁에는 친구를 초대 하고 만찬을 먹는데 비해, 조선 사람은 “한가하고 편안함을 숭상”하여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 “조반석죽”으로 아침밥과 점심을 겸하여 밥을 먹고, 저녁은 죽을 먹는다고 하였다. 오 늘날의 관점에서는 저녁식사를 가볍게 먹는 것이 권장되고 있지만, 이 논설에서는 “아침을 일찍 먹고 저녁에 반찬도 잘 차리고 친구 대접도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서양 사람들은 집안 식구와 손님이 있을 경우 손님 까지 모두 식당에 모여 한상에서 화목하게 먹는다며, 우리도 따로 먹는 습관에서 벗어나 이렇게 바꾸자고 했다. 이 주장 역시 기독교 전통의 소가족 사회인 서양과 달리, 유교 전통 의 대가족 사회였던 조선의 당시 상황에서는 따라가기 어려 운 개선안이었다고 생각된다. 식사방식과 손님 초대 등을 포 함하는 음식문화는 각 나라의 종교, 문화와 사회구조에 영향 을 받을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고려하지 않고 서 양식을 따르고자 했던 당시 풍조를 볼 수 있다.
3.서구음식의 조선 유입과 확산
1883년 12월 20일자 「Hanseongsunbo (한성순보)」기사 를 통해서 구한말 조선에 수입되었던 외국음식 품목을 볼 수 있다.
輸入貨(수입화)
음식물·煙草類(연초류)는 값의 100분의 5를 관세로 받는데, 일본 음식물·生氷菓(생빙과)·곡물(곡물)·穀粉(곡분)·된 장·간장과 식초다. 값의 100분의 8을 관세로 받는 것은 소 금·茶(차)·肉(엄육: 절인고기)·魚(엄어: 절인생선) 및 식료 통조림·국수·葛粉(갈분)·寒天菜(한천채)·낙화생·레먼水 (수)·生姜水(생강수)·曹達水(소다수) 및 각종 음료수·白(백)· 黑糖(흑당)·蜜糖(밀당)·糖水(당수)·中國(중국)·日本(일본) 의 酒類(주류)·林禽酒(능금주)·別項(별항)에 기록되지 않은 일체의 음식물類(류)이다. 값의 100분의 10을 관세로 받는 것 은 赤(적)·白(백) 포도주·맥주다. 값의 100분의 15를 관세 로 받는 것은 氷糖(빙당)·精製糖(정제당)·點心(점심)<菓子( 과자)>類(류)이다. 값의 100분의 20을 관세로 받는 것은 炯類 (형유) 일체. 값의 100분의 25를 관세로 받는 것은 洋酒(양주) 월뭇·양주 卜爾脫(복이탈)·양주 瀉(사리)이다. 값의 100분 의 30을 관세로 받는 것은 양주 撲蘭德(박란덕)·양주 惟斯吉 (유사길)·양주 上伯允(상백륜)·櫻酒(앵주)·杜松子酒(두송자 주)·양주 九爾(리구이)·糖酒(당주)·4別項(별항)에 기재되지 않은 일체의 酒類(주류)이다(한성순보 1883.12.20.).
이 기사를 통해 각종 식재료에서 양념류, 통조림, 과자류, 차와 음료수 등 다양한 외국 음식들이 수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중에서도 특히 여러 나라의 각종 주류들이 눈에 띈 다. Ju(2004)의 연구에 의하면 1876년에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에서는 일본에서 조선에 술을 무관세로 수출하기로 했 는데, 후에 이들 술에 관세를 부과한 조약이 1883년 7월 ‘한 일통상조약’이다. 따라서 같은 해 12월인 이 기사를 통해서 는 주류에 이렇게 관세가 부여된 것을 볼 수 있다.
Jang(1988)의 연구에 의하면, “월뭇”은 Wermut (버무드 술), “卜爾脫(복이탈)”은 보르도(Bordeaux) 와인, “瀉(사리)” 는 셰리(Sherry), “撲蘭德(박란덕)”은 브랜디(Brandy), “惟斯 吉(유사길)”은 위스키(Whisky), “上伯允(상백륜)”은 샴페인 (Champagener), “櫻酒(앵주)”는 Kirschgeist, “杜松子酒(두송 자주)”는 진(Gin), “九爾(리구이)”는 리큐어(Liquor), “糖酒(당 주)”는 럼(Rum)을 의미한다. Jang(1988)은 “고종 13년(1876) 에 일본을 거쳐 유입되기 시작한 후 고종 20년(1883)에도 미 국과 공식으로 통상조약이 체결되므로 일본을 경유하여 유 입되고 있었던 서양주들이 서구제국과 직접 이어지면서 직 선유입경로와 함께 기존의 일본의 간접유입경로로, 이원적으 로 양주류들이 상륙”했다고 밝혔다.
이렇게 수입된 외국 식품이나 주류를 소비했던 층은 왕가 나 고위 관료, 외국 외교관 등 최고위층이었다. 고종과 명성 황후에게 정치외교 자문을 하는 등 중앙정계의 핵심군에서 활동했던 윤치호는「Yunchiho ilgi (윤치호 일기)」(Song BG ed. 2001) 1884년 5월 8일자 일기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 였다.
오후 4시에 미국공사부인, 영국공사부인과 같이 입궐하여 열 전(列殿)을 뵙다. 6시에 양요리 찬을 내리시고 이어 등불놀이 를 보여주시다.... 궐내에서 서양요리로 와인을 대접하는 것은 이날부터 비롯되었는데 각양접대가 하나도 흠이 없으니 기쁘 고 기쁘다.
윤치호는 궐내에서 서양요리를 대접하기 시작한 것이 1884 년 5월 8일 이날부터라고 적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 궁중에 서 외국 공사들에게 서양요리와 와인을 대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접대가 흠이 없었다”고 평했으니 식탁의 격식 이나 매너도 서양예절에 맞게 진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개화기에 서양음식이 궁중에 도입되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손탁(Antoinette Sontag)이다. Kim(1996) 의 연구에 따르면, 손탁은 “러시아공사 웨베르 처남의 처형 으로서 1885년 10월 6일 조선에 부임하던 그와 함께 내한했 다.” “웨베르의 추천으로 손탁은 조선 宮內府(궁내부, Korean Household Department) 外人接待係(외인접대계) 囑託(촉탁) 으로 일하게 되었다(Allen 1904. p 211:「Joseonjapgi (조선 잡기)」권2, p 98: Kim 1996, p 178. 재인용).” 손탁은 “서 양요리와 커피를 국왕에게 진상”했으며, “내외국인을 위한 각종 연회를 주관”하고 “특유의 프랑스 요리 솜씨로 국내외 귀빈들의 구미를 사로잡는” 등 “한국 서양요리 도입의 선구 자”가 되었다(Kim 1996). 또한 1895년 고종 탄신일에 마련 되었던 “서양식 연회의 책임자”로 활약하기도 하였다(「Mwiteljugyoilgi (뮈텔주교일기)」권1, p 361: Kim 1996, p 179. 재인용).
1894년 한국에 왔던 영국인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 의「Korea and Her Neighbors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는 1895년 궁에서 왕비를 접견했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노란색 비단이 드리워진 수수한 방으로 안내되어 우리는 곧 커 피와 케이크를 정중하게 대접받았다. 그 후 저녁 식사 때는 상 궁이 궁중 역관의 도움을 받아 아주 아름답게 꾸며진 식탁을 앞장서서 주도해나갔다. 저녁 식사는 놀랍게도 서양식으로 차 려졌다. 수프를 포함해서 생선, 퀘일, 들오리 요리와 꿩요리, 속 을 채워 만든 쇠고기 요리, 야채, 크림, 설탕에 버무린 호두, 과 일, 적포도주와 커피 등등이었다.
그 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났고, 1896년 아관파천 기 간 동안 고종은 손탁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고종 은 비상히 서양요리를 좋아했다. 유명한 손탁여사가 여러 가 지 서양요리를 만들어 진상했기 때문에 손탁은 러일전쟁 발 발까지 고종의 ‘전속 요리인’이 된 것이다(「Joseonoegyobihwa (조선외교비화). p 182: Kim 1996, p 198. 재인용)”.
고종의 커피 애용은 1898년 김홍륙의 ‘독차음모사건(毒茶 陰謀事件)’이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이에 대한「Joseonwangjosillok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음력으로 올해 7월 10일 김홍륙(金鴻陸)이 유배 가는 것에 대 한 조칙(詔勅)을 받고 그날로 배소(配所)로 떠나는 길에 잠시 김광식(金光植)의 집에 머물렀는데, 가지고 가던 손 주머니에 서 한 냥의 아편을 찾아내어 갑자기 흉역(凶逆)의 심보를 드러 내어 친한 사람인 공홍식(孔洪植)에게 주면서 어선(御膳)에 섞 어서 올릴 것을 은밀히 사주하였다. 음력 7월 26일 공홍식이 김종화(金鍾和)를 만나서 김홍륙에게 사주받은 내용을 자세히 말하고 이 약물(藥物)을 어공(御供)하는 차에 섞어서 올리면 마 땅히 1,000원(元)의 은(銀)으로 수고에 보답하겠다고 하였다. 김종화는 일찍이 보현당(寶賢堂)의 고지기庫直로서 어공하는 서양 요리를 거행하였었는데, 잘 거행하지 못한 탓으로 태거(汰 去)된 자였다. 그는 즉시 그 약을 소매 속에 넣고 주방에 들어 가 커피 찻주전자에 넣어 끝내 진어(進御)하게 되었던 것이다 (「Joseonwangjosillok (조선왕조실록)」. 고종 38권, 35년(1898 무술/대한 광무(光武) 2년) 9월 12일)
손탁이 서양요리와 커피를 고종에게 진상함은 물론, 서울주 재 서양 각국인들에게 제공했던 것은 독일인 의사 리하르트 분쉬(Richard Wünsch)가 1902년 4월 9일에 쓴「Gojongui dogirin uisa Wünsch (고종의 독일인 의사 분쉬)」(Kim JD ed. 1999)에서 볼 수 있다.
저는 요리사를 지난달 말에 해고해버렸고 지금은 황실의 으뜸 시녀인 손탁(Sontag)여사한테 가서 식사를 합니다. 그 집 요리 는 일품입니다. 손탁여사는 한국에 온지 벌써 18년이나 되었 습니다. 벨기에 영사와 프랑스 공사의 비서도 거기서 식사를 하며 프랑스어로 대화를 합니다. 점심식사는 가져오게 하며 저 녁은 궁에서 퇴근하면 거기로 가서 먹습니다.
고종에게 공로를 인정받은 손탁은 가옥을 하사 받아 1902 년 정동 29번지에 ‘손탁 호텔’을 열었고, 그곳은 주요 정치 인물이나 서울 주재 외국인들이 머무는 공간이 되었다. 「Daehanmaeilsinbo (대한매일신보)」1906년 3월 11일자에 “無日不宴(무일부연)”이라는 제목의 가사가 날 정도로, “정동 손탁의 집(貞洞孫擇孃家)”은 각부 대신이 연일 연회를 열었 고 외국인이 적당한 처소를 얻기 전에 머물렀던 곳이며(대한 매일신보 1904.9.22.), 혼례잔치(대한매일신보 1904.12.29)가 열렸던 곳이다. 한편 친로·친미파 인물들을 중심으로 결성 되었던 정치단체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의 활동무대이기 도 했다. 또한 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이 연회를 열어 내외국 관리를 대접(대한매일신보 1907.9.4) 하였던 공간이었다.
이처럼 궁중에서 만연된 서양요리 연회는 민간에도 퍼져 「Dongnipsinmun (독립신문)」1896년 기사에는 다음과 같 이 영어학교 학도들이 서양요리로 손님 대접을 하였고, 정 2 품의 관직이었던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도 외국인들을 자신 의 집에서 외국음식으로 접대하였다는 보도를 볼 수 있다.
영어 학교 학도들이 배재학당 학도들을 그저께 청하여 남산 밑 에서 놀이를 하였는데 두 학교 학도들이 군법으로 행진하여 길 로 지내 가는데 복색도 다 정하고 알맞아 참 보기에 매우 좋 더라 거기 가서 배재학당 속에서는 양홍목씨가 연설을 하고 영 어 학교에서는 권유섭씨가 연설을 하였는데 말한 뜻과 소견들 이 다 문명 진보 하고 학문을 속히 배워 진충 보국 하자는 뜻 이요 또 애국가를 두 학교에서들 지어 노래들을 하고 영어 학 교 학도들이 서양 요리와 다른 음식을 많이 하여 손님 대접을 매우 잘 하였다더라(독립신문 1896.7.2.)
한성 판윤 이채연씨가 미국 철도 회사 사람들과 광산 회사 사 람들을 자기 집으로 이달 이십 이일 밤에 청하여 저역을 대접 하였는데 외국 음식으로 절차가 있게 잘 대접하여 외국 사람 들이 조선 관인들도 외국 물정을 알고 손님 대접 할 줄도 안 다고들 칭찬들 하더라(독립신문 1896.12.26.)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면서 많은 외국인들이 들어오게 되 었고, 이들을 위한 숙박시설이 필요함에 따라 한국 최초의 근대식 호텔인 ‘대불호텔’이 인천에 등장하였다. 대불호텔은 일본인 ‘호리 큐타로’가 운영했으며 1885년에 선교사 아펜젤 러가 투숙한 경험을 담은 기록에서 “일본의 호텔에서는 유 럽식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Lee 1985)고 한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에서부터 서양음식이 마련되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호텔은 서양인이 주로 머물게 되는 특성상 서양음 식이 보급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독립신문 영문판인「The Independent (디 인디펜던트)」1898년 1월 4일자에 등장한 ‘서울 호텔’의 광고는 조금씩 수정되며 1898년 11월까지 등 장한다. 그 중 2월 8일자 광고는 다음과 같다.
SEOUL HOTEL.
This Hotel situated within the Imperial Palace grounds, has spacious, commodious and well fitted bed rooms. The cuisine is of the best French style.
Just received: Swiss and Italian Cheeses, Italian wines and saurages, Table butter, Champagnes, Californian wines, Cognacs, Rums, Bitters and Milk expected daily.
F. Bijno Proprietor, Telegraphic Address. Bijno-Seoul. (독립 신문 영문판, 1898.2.8.)
<현대어역> 서울 호텔
이 호텔은 황궁 구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탁 트인 널찍하고 잘 갖추어진 침실이 있음. 요리는 최상의 프랑스 스타일임. 막도 착한 상품: 스위스 및 이탈리아 치즈, 이탈리아제 와인과 소시 지, 식탁용 버터, 샴페인, 캘리포니아산 와인, 꼬냑, 럼주, 비터 와 우유가 매일 대기 중. F. Bijno, 소유주, 전신주소. Bijno- Seoul. (Lee SW ed. 2012)의 번역에 따름)
“서울호텔은 1897년 4월에 개설되었으며 그 위치는 공사 관 거리, 16호”였는데, “이 호텔의 운영 주체는 삐이노 (Bijno)”라는 이름의 이탈리아인으로 알려져있다. “삐이노는 정동에서 장사를 계속하다가 1899년 내지 1900년에 근거지 를 제물포로 옮겼는데, 서울호텔은 약 2년가량 존속한 것으 로 보인다(Lee 2012).”
실제로 독립신문 1899년 4월 28일자 광고를 통해서는 “정 동에 외국 사람이 하는 주막”인 “삐이노 전”에서 세간을 판 다는 내용이 있어서 이 무렵 사업을 정리했음을 알 수 있다.
정동서 외국 사람 주막 하는 삐이노씨 전에서 작일에 각색 세 간을 팔려고 미리 광고 하였더니 (중략) 마닐라 여송연과 이집 트 권연초와 법국(法國: 프랑스)과 영국과 미국에 여러 가지 다 과와 총과 육혈포와 총과 육혈포에 맞을 탄환과 탁자와 글시 쓰는 상과 여러 가지 상과 침방과 목욕방 세간들과 평상과 여 러 가지 교의들과 접시와 잔과 화덕이며 또 음식 만들기 좋은 미국 화덕과 또 여러 가지 좋은 물건을 많이 팔 터이니 첨군 자는 왕임 하심을 바라옵나이다(독립신문 1899.4.28.)
호텔뿐 아니라 일반 음식점에서도 서양음식을 취급하는 곳 이 생겨났는데 「Dongnipsinmun (독립신문)」에는 “홍릉 앞 전기 철로 정거장에 대한 사람이 새로 서양 요리를 만들어 파는데 집도 정결 하고 음식도 구비 하오니 내외국 손님들 은 많이 오시면 소청대로 하여 드리이다. 윤룡주 고백(독립 신문 1899.8.24.)”라는 광고가 실렸다.
Ju(2011)는 1903년 9월 17일에 개업한 ‘명월관’을 ‘최초의 조선요리옥’이라고 하였다.「Mansebo (만세보)」1906년 7 월 13일자와 「Daehanmaeilsinbo (대한매일신보)」1907년 1월 4일자의 광고를 종합하여 볼 때, ‘명월관’의 음식은 조선 음식이 주된 메뉴였지만 일본음식과 서양음식, 그리고 다양 한 각국의 술이 취급되었고 특히 “서양주는 잔으로 파오며 (대한매일신보 1907.1.4.)”라고 하였다.
음식점 뿐만 아니라 심지어 기차에서도 서양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은「Daehanmaeilsinbo (대한매일신보)」1909 년 11월 3일자 기사에서 알 수 있다.
경의철도 기차안에는 본월일(로부터) 양요리와 각색음식을 준 비하여두고 청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슝웅한다더라(대한매일신 보 1909.11.3.)
한편 당시 일본인들이 조선에 와서 서양음식점을 운영하 는 예가 많았는데, 이것은 서양음식의 확산에 적지 않은 영 향을 끼쳤다고 판단된다.
1884년 10월 17일 갑신정변은 우정국 개국 축하 만찬회를 이용하여 일어났다. 그런데 그 축하연의 음식을 담당한 것은 서양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로쿠료사(Rokugyosha) 주인인 일 본인 수기(Sugi)였다(Chung & Neff 2008). 따라서 당시 서 울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서양 음식점이 있었으며 출장연회 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Min Yeonghwan gwa Yunchiho Reosiae gada (민 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 (Yun GN ed. 2014)에 따 르면, 1896년 7월 18일의 「Yunchiho ilgi (윤치호 일기)」에 는 일본 공사관 야시로 중위가 “일본의 근시안적인 정책을 개탄”하면서 “서울에 잽싸게 진출하여 맛있는 카레 요리집 을 하는 일본 상인들”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서양 음식점이 서울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1904년에 아내와 함께 조선을 방문했던 독일인 루 돌프 차벨의「Dogirin bubuui Hanguk sinhonnyeohaeng (독 일인 부부의 한국 신혼여행)」(Lee SH ed. 1904)에 따르면, “부산에는 두 곳의 양식 레스토랑이 있었”는데 “주인은 일본 인”이었다. 그는 “이 식당들은 서양인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 기보다는 서양식 생활을 꿈꾸는 일본인의 허영과 사치를 위 해 존재하는 듯했다”라고 평했다. 식사는 코스요리로 나왔는 데 첫 번째로는 쇠고기 국물과 빵, 두 번째는 생선을 콩기름 에 튀긴 것이 나왔다. 그리고 세 번째로 나온 비프스테이크 와 커피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다.
비프스테이크마저 버터나 콩기름에 튀겨 나올까봐 우리는 ‘구 워’ 달라고 따로 부탁했다.(중략) 그런데도 이미 고기에는 또 다른 기름진 일본 양념이 발라져 있었다. 나로서는 그 양념의 정체를 알 길이 없었다. 우리는 코를 꼭 막은 채로 음식을 넘 겼다. 그러면 맛은 못 느끼더라도 어쨌든 고기 한쪽을 목으로 넘길 수는 있었다. 무사히 정식을 통과한 우리는 커피라고 나 온 갈색 혼합액을 제공 받았다. 열렬한 커피 애호가인 우리도 이 순간만큼은 차마 거기에 입을 댈 수가 없었다.
이처럼 일본인이 하는 음식점들이 곳곳에 생긴 것은 재조 선 일본인의 급격한 증가와 맞물린다. Oh(2004)는 “1905년 노일전쟁 종전과 함께 한반도의 식민지화를 위한 통감부가 서울에 설치되면서 거류 일본인의 수는 외국인거주의 범위 를 넘어설 정도로 증대하여 마치 서울자체가 일본인 지배하 의 도시라고 할 정도”라고 하였다.
제3차 통감부통계연보(統監府統計年報)에 나타난 1908년( 명치 41년 12월 말일 기준) 조선에 거주한 외국인과 일본인 의 숫자를 재구성하여 다음과 같이 <Table 1>에 정리하였다.
<Table 1>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조선에 거주한 외국인 은 일본인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淸國(중국), 北米合衆國(미 국), 英吉利(영국), 佛蘭西(프랑스), 獨逸(독일), 露西亞(러시 아), 기타 순이었다.
Ichikawa(2007)의 연구에 의하면, 재한일본인(在韓日本人) 은 1905-1910년 5년 사이에 약 4배 증가하였다. 이들은 일 확천금을 바라고 온 상인들, 일자리를 구해 한국으로 건너 온 빈민층,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온 사람들, 통감부 관리 등 으로 분류 할 수 있다. 이중 일본에서의 생활고 때문에 생계 를 위해 한국에 온 빈민층은 일본에서도 서양음식에 익숙했 던 계층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그런데 한편으로 재한일본인 중에는 한국에 와서 음식점 을 경영했던 이들이 상당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Takasaki (2006)에 따르면 1895년 평양의 일본인 거류민 112명 중 직 업별 구성은 잡화상 10호, 무역상 9호, 음식점이 6호순이었 고, 1910년 개성 일본인의 직업구성은 대금업 17명, 잡화상 14명, 요리점 13명 순, 그리고 일제강점기 초기 1912년 부산 일본인의 직업별 통계는 1위 관공리, 2위 소매상과 잡화상, 3위 고물상, 4위 백미 소매상과 음식점으로 각각 115명이었 다. <Table 1>에서 보듯이 1908년 당시 경성에만도 35,316 명의 일본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일본인들이 경영했던 음 식점이 상당수에 달했고 그 중 서양음식점도 있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경성에 거류했던 일본인의 1909년 직업별 통계를 보면 관리가 2,134명에 달했는데(Ichikawa 2007), 이 들은 이미 일본에서부터 서양음식에 익숙해졌을 가능성이 많 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재한일본인이 경영했던 서양음식점 의 주요고객은 개화성향을 가진 일부 조선인, 재한일본인 중 관리층, 그리고 다른 나라 외국인들이었으리라 짐작되며, 우 리나라에 ‘일본식 서양음식’을 전파하는데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한편「Maeilsinmun (매일신문)」광고에는 새로 개시한 ‘수 월루’라는 요리집에 대한음식과 더불어 “서양요리와 각색 술” 이 있다는 내용도 볼 수 있다.
광통교 남천변에 수월루 라는 요리집을 새로 개시 하였는데 대 한 음식과 서양요리와 각색 술과 희귀한 과실이 있삽고 한편 에 목욕탕이 있고 뒤로 정결하고 조용한 처소가 많이 있사오 니 사방 진신상고 제군자들은 와셔 노시기를 바라옵나이다 수 월루 주인 리시직 근백(매일신문 1898.8.20.)
이 ‘수월루’는 작가이자 연극인이었던 윤백남(18881954)이 잡지「Sincheonji (신천지)」에 기고한 “한말 문화계의 점묘” 라는 회고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광통교 남천변에 水月樓란 이층집 하나가 생겼는데 아래층에 서는 목욕탕을 경영했고 이층에서는 양식을 판다해서 큰 명물 이 되었고 당시의 遊治郞으로서는 수월루 아래층에서 목욕을 하고 이층에 올라가서 지금 생각하면 엉터리 洋食을 한접시 먹 고나오지 안으면 행세를 못하는 것이었다. 이것도 내막은 日人 의 經營인듯해서 얼마아니가서 시시해저버리고 조금 高等의 인 사들은 서대문밖 아스터-하우쓰로 몰리기 시작했다. 이 호텔은 손택孃의 출자로 某米人이 經營을 했는데 여기서는 每日每夜 큰 賭博場이 열려서 有産子弟의 出入이 頻繁하였다. 여기서는 수위에 양코백이가 골통대를 물고 딱 버티고있어서 우리순사 는 뻔히 그 노름판이 버러지고있는 줄 알면서도 손까락하나를 대보지못하였다(신천지 7권 2호, 1952년 3월, p 91).
1888년생인 윤백남이 1950년대 들어서 과거를 회고해 봤 을 때, 수월루의 서양음식은 “엉터리 양식”이었다. “내막이 日人(일인) 경영인 듯”하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수월루에 서는 ‘일본식의 서양음식’을 팔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수월루에서 양식 먹는 것이 한동안 유행을 했지만, “高等(고 등)의 인사”들은 미국인이 경영하는 아스터-하우쓰호텔로 몰 려갔다. 즉 초기에는 ‘일본화된 서양음식’을 먹던 사람들이 점점 ‘정통 서양음식’을 원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민간인 층에서도 서양음식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 서「Dongnipsinmun (독립신문)」에서는 ‘서양음식 만드는 법’에 대한 요리책을 발간하였다는 광고가 실렸다.
서양 음식 만드는 법을 국문으로 번역 하여 본사에서 박혀 파 는데 영국과 미국에서 쓰는 각종 식물 二百七十一종유를 맨다 는 법을 다 자세히 번역 하였는지라 서양 식물을 만들기에 유 의 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긴요 하고 유익한 책이오니 첨군자 는 사 가시옵 값은 권에 五十전식이오(독립신문 1899.11.24.)
271종의 영국과 미국의 서양 음식 만드는 법을 번역하였 다는 것으로 보아, 조선에서 쓰여진 책이 아니라 외국 책을 번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이런 책이 발간되었다 는 것은 서양음식을 외식으로서만이 아니라 가정에서 만들 어 먹는, 혹은 추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는 일정 수요층이 있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Sonyeon (소년)」에 1909년 8월호에 실려있는 최남선의 기행수필 ‘반순성기(半巡城記)’에는 ‘두루마기’에 ‘캡’을 쓴 청년이 일본인의 과자포에서 ‘프랑스빵’을 사고 양식물포에 서 ‘잼’을 사는 등 그가 접하는 서양식 식재료가 다음과 같 이 나타난다.
大韓醫院(대한의원)압 어늬 日人(일인)의 菓子鋪(과자포)에서 내가 十八錢(십판전)으로 프랑쓰麵包(면포: 빵) 두조각을 사고 二十錢(이십전)에서 이전 남난 것으로 砂糖(사탕)을 사려하얏 더니 마참 업다하야 읏지할줄 모르던 次(차) 길저편을 건너다 본즉 조고마한 洋食物鋪(양식물포)가 잇난지라. R군이 大(대) 구發(발)노 삼십전에 한통을 사난데 사전은 더주난줄 알지 마는 하난수업다하고 들고나서니(소년 1909년 8월호, p.50)
근대 신문의 식품 광고면을 고찰한 An(2015)의 연구에 따 르면, 당시 신문들에 ‘가메야(Kameya)’, ‘수지(Tsuji&C)’, ‘안 창회사’, ‘고샬기 상회(A. Goshalki)’, ‘서울 식료품’등의 회 사 광고가 반복되어 실렸으며 다양한 서양 식품이 이들을 통 해 판매 되었다. 따라서 일반인들도 이런 식료품을 구매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을 정리하면 서양음식이 조선에 유입되 는 과정은 크게 서구에서의 직접 유입과 일본을 통한 간접 유입으로 나눌 수 있다. 직접 유입은 조선인이 서양을 방문 하여 체험하고 소개하거나, 또는 반대로 외국인이 조선에 들 어와 그들의 음식을 소개한 것이다. 손탁 여사가 궁중에 서 양음식을 도입하고 손탁호텔에서 서양음식을 판매한 것, 또 한 이탈리아인 ‘삐이노’가 경영했던 서울호텔에서 취급한 각 종 서양음식들이 대표적이다.
한편 일본을 통한 간접 유입은 조선인이 일본 방문시 체 험한 서양음식, 또한 일본에서 건너온 재한일본인들을 통한 서양음식 소개도 한몫을 차지했다. 일본을 통한 조선의 서양 음식 유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서양음식 도입과정 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Okada(2006)의 저서에 의하면, 1857년 나가사키의 일본 요릿집에서 서양요리를 처음 만들 기 시작해서 1863년 나가사키에 첫 서양요리 전문점 료린테 이가 생겼다. 1876년 일본 최초의 프랑스 요리점이 등장했 고 1879년 러시아 요리점이 등장하는 등, 1897년에는 도쿄 에 양식집이 1500집을 넘어섰다. 그중 1877년 무렵의 광고 를 보면 “메뉴에는 수프, 우육조류, 샐러드, 카레밥(라이스카 레), 커피, 우유, 빵, 버터 등(Okada 2006)”이 있어 서양음식 뿐 아니라 “카레밥” 같이 타국음식이 일본화된 음식을 판매 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일본은 조선보다 훨씬 서양음식을 빨리 받아들였 고, 일본식으로 바꾸어 조선에 소개하였다. 특히 재한일본인 들은 조선땅에서 호텔이나 서양 음식점을 경영하면서 일본 식 서양음식을 보급하였는데, 이것은 앞서 소개한대로 윤백 남의 표현에 의하면 “엉터리 양식”이어서 서양인들에게 환 영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조선인들도 점차 정통 서양음식을 원하게 되었다.
4.서구음식 도입을 둘러싼 논란
서구음식 도입과정에서 전통을 고수하고자 하는 반대의 목 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1898년 고종 ‘독차음모사건(毒茶陰謀 事件)’ 후에 전부호군(前副護軍) 현학표(玄學杓) 등은 죄인들 을 엄중히 다스릴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는데, 그 말미에 ‘서양 요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서양 요리는 바로 서양 사람들이 먹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 람들의 장(臟)과 위(胃)는 서양 사람들과 달라서 범인(凡人)들 도 마시거나 먹어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폐하께 진어(進御)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폐하께서는 색다른 맛이 나는 특이한 음식을 드시지 마시고 정식으로 바친 것만 드신다면 금 의(錦衣)와 옥식(玉食)에 대한 근심이 조금 덜어지고 합문(閤門) 안이 깨끗하고 엄숙해질 것입니다(「Joseonwangjosillok (조선 왕조실록)」고종 38권, 35년(1898 무술/대한 광무(光武) 2년) 9월 18일).
‘우리나라 사람들의 장과 위에는 안 맞아서 먹어서는 안 될 서양 요리’를 왕이 먹는 것을 걱정하며, “폐하께서는 색 다른 맛이 나는 특이한 음식을 드시지 말고 정식”만 드실 것 을 권유하고 있다. 즉 이 상소를 통해 왕실에서 커피와 서양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해 반대하고 저항하는 의견도 상당수 있 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커피에 독약을 넣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계기로 이러한 반대 의견이 수면으로 떠오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반대의 목소리가 서양 음식의 확산을 막는데 크게 영향을 주진 못했다. 이미 궁중에서만이 아니고 민간에 도 점점 서양음식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소비가 늘어가는 추 세였다.
상소가 올려진 같은 해 1898년「Maeilsinmun (매일신문)」 12월 7일자 논설에서는 “개화병”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매일 신문의 전신은 1898년 배재학당 학생회인 협성회에서 창간 한 ‘협성회회보’이며, 배재학당은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학 교이다(Im 2010). 즉 매일신문은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세워 진 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운 지식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개화에 적극적일 것 같은 이 들에게서 다음과 같은 강경한 어조로 “개화병”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지금 우리나라에 전에 없던 큰 병 하나 생겼으니 이병은 개화 라 하는 병이라(중략) 하다 못하여 옷 한가지만 유난히 입어도 개화법이라 하며 음식 한 가지라도 이상한 것을 먹으면 개화 라하며 (중략) 나도 개화 너도 개화하여 밤낮으로 개화개화만 하면 이 개화가 필경 전국을 병들일 개화니 지금 참 개화에 유 의하는 이들은 개화 실학을 힘쓰고 개화의 화는 아주 떼어 버 리기를 깊이 바라오(매일신문 1898.12.7.)
“지금 우리나라에 전에 없던 큰 병이 하나 생겼는데 이 병 은 개화”라고 하고 무분별한 모방과 과다한 소비로 흐르고 있는 세태를 개화병이라 명명하여 “음식 한 가지라도 이상 한 것을 먹으면 개화”라고 한다고 비판하였다. 개화가 무엇 인지를 바로 알아서 ‘개화의 실학’에는 힘쓰더라도 ‘개화의 화’는 떼어버리자고 하여, 참된 개화의 방향에 대한 지식인 들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Daehanmaeilsinbo (대한매일신보)」에도 다음과 같이 ‘의 복과 음식의 수입품이 해마다 증가하여 나라가 빈약해지고 백성이 어려워진다’고 걱정하는 글이 실렸다. 또한 ‘외국 요 리에 너무 많은 돈을 소모하여 그것을 취하도록 마시고 배 불리 먹어야 문명인인 줄 아는’ 세태를 비판하였다.
근래에 일반인민이 외국물품을 좋아하여 의복음식의 절반이 넘 어 외국에서 수입함을 의뢰하는고 (중략) 수입품이 해마다 증 가하여 한있는 돈으로 한없는 물품을 사서쓰니 어찌 나라가 날 로 빈약하고 백성이 날로 곤난하지 아니리오(대한매일신보 1908.10.16.)
全國內(전국내)의 需用品(수용품)이 全賴外人(전뢰외인: 전적으 로 외인에게 의뢰함)하는 것을 枚擧(매거: 낱낱이 들어서 말함) 할 수 없거니와 飮食(음식)으로 말하여도 外國人(외국인)의 料 理(요리)들만 許多金젼消耗(허다금전소모)하야 旣醉且飽(기취 차포: 이미 취하고 또 배부름)하량이면 文明人物自處(문명인물 자처)하니 可痛(가통)한 일이 아닌가 (중략) 外人(외인)으로 말 하며는 他國中(타국중)에 있어서도 自國精神(자국정신) 지키기 를 뎌럿타시 牢確(뢰확: 견고하고 확실함)한대 諸君(제군)들은 어찌하야 自國內(자국내)에 있으면서 外國人(외국인)의 그른 風 俗(풍속) 골라 가며 模倣(모방)하니 可痛(가통)한 일이 아닌가 (대한매일신보 1909.3.24.)
이같이 서양음식의 수용에는 서로 다른 시각과 의견들이 있었다. 그런데 한편「Dongnipsinmun (독립신문)」1897년 9월 23일자에는 서양음식 도입에 대해 찬반 논란을 뛰어넘 어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관광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다음 과 같은 기사를 볼 수 있다.
조선도 외국 사람이 내지에 유람 하게 길을 정히 닦아 마 거 가 능히 다니게 되고 각 처에 외국 사람들이 유숙할 만한 상 등 숯막들이 있을 것 같으면 일본 청국에 오는 외국 유람 하 는 사람들이 조선에 의례히 올지라 (중략) 외국 사람이 거처 할 집을 지으며 마당과 화초를 정히 하여 놓으며 외국 음식과 거처 범절을 준비 하여 놓아야 외국 사람들이 와서 몇 달이라 도 편히 거처 하고 매 삭에 얼마큼씩 돈을 낼지라 몇 십 년이 고 몇 백 년 후면 조선에 이런 벌이 할 사람이 자연히 생기려 니와 오늘 우리가 미리 말 하여 두노라(독립신문 1897.9.23.)
“조선에 외국인들이 유숙할 수 있도록 외국음식과 거처, 범 절을 준비”하고 길을 닦아서 외국인들이 “유람”할 수 있도 록 하자고 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외국음식과 범절”준비를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였다. “몇 십 년이고 몇 백 년 후면 조 선에 이런 벌이 할 사람이 자연히 생기려니와 오늘 우리가 미리 말 하여 두노라”라고 하여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관광산업이 미래에 생길 것을 예견하였다.
IV.요약 및 결론
본 연구의 목적은 개화기(1876~1910년) 서양음식의 수용 을 중심으로 ‘조선음식의 근대화’라는 시대적 명제 아래 이 루어졌던 조선 음식문화의 변화를 살피는 것이다. 조선이 주 체적으로 처음 서구 문물을 받아들였던 개화기에 초점을 맞 추어 각종 문헌에 나타난 음식과 식생활 관련 내용을 고찰 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개항 직후 조선인들은 일본을 통해 처음 서양음식을 접하 는 경우가 많았다. 즉 초기에는 일본을 거치며 변형된 서양 음식이 유입되다가, 점차 서구 각국과도 국교 수립이 이루어 지면서 이들 나라에 파견된 관리들이나 유학생 등 지식인층 에서 직접 겪었던 일들을 소개하기 시작했고 이원적인 유입 이 이루어졌다. 서양에서는 음식에 대해 전문적인 기술이 연 구되고 있으며 도살 방법도 배워야 한다고 주장되었다. 또한 조선이 국제무대로 나서기 위해 음식 먹는 습관과 식탁 예 절 등이 필요한 점으로 꼽혔다.
개화기 구미 각국과의 국교 수립으로 대외관계가 활발해 지고 외국인의 내한이 급증한 가운데, 조선의 왕실과 상류층 에서는 이들과의 교류를 위해서 급속히 외국 음식과 음식문 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서구식 연회와 모임을 개 최하는데 필요한 각종 외국음식이 물밀듯이 조선에 들어왔 다. 여기에는 일제가 조선에서 그 세력을 날로 강화해가던 구한말의 특수한 상황에서 고종의 최측근이었으며 ‘한국 서 양요리 도입의 선구자’라고 평가되는 손탁의 역할이 컸다. 또 한 인천과 서울에 호텔이 생기면서 서양음식은 더욱 폭넓게 보급되었고, 민간인층에도 확산되어서 서양음식점이 곳곳에 생기기 시작했는데 경성뿐 아니라 부산 등지에도 서양음식 점이 확산되었다. 또한 명월관 등 조선 요리옥에서도 서양음 식과 주류를 취급하였으며, 심지어 경의선 기차에서도 서양 음식을 맛볼 수 있을 만큼 확산되었다. 이렇게 서양음식이 급속도로 보급되자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특히 1898년 에 고종이 애용하던 커피에 독을 넣은 사건이 발생하자 ‘우 리나라 사람들이 먹어서는 안 될 서양 요리’를 왕이 먹는 것 을 걱정하는 상소가 올려지기도 했다. 또한 민간에 날로 퍼 지는 “개화병”을 경계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적극 적으로 외국음식과 범절을 준비하고 외국인을 대상으로 관 광산업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볼 수 있었다.
개화기는 조선이 과거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신 생 제국 일본을 견제하며, 동시에 새로운 세계인 서양과 교 류하는 등 급속하게 변화하는 세계정세 속에 놓였던 시기였 다. 조선이 근대 국가인 ‘대한제국’으로 변모하며 근대를 처 음으로 체험하고 태동시키는 가운데 우리 식생활에도 많은 변화를 겼었던 시기였다. 서양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곧 ‘개 화가 서구화’라고 인식했던 당대 사람들이 서양에 대한 동경 을 실천하는 행위였다. 비록 일부 계층에 국한된 것이기는 했지만 개화기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서양음식을 먹었으 며, 이러한 서양음식의 유입은 폐쇄적이었던 한국음식 문화 에 다양한 형태의 변화가 나타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초기 서양음식의 유입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한국 식문화에 미친 서양음식의 영향을 이해하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개 화기 식문화 변화와 외국 문물의 수용은 현대 한국 음식에 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이어오고 있으며, 이에 대한 많은 관 심과 후속 연구가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