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Search Engine
Search Advanced Search Adode Reader(link)
Download PDF Export Citaion korean bibliography PMC previewer
ISSN : 1225-7060(Print)
ISSN : 2288-7148(Online)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Food Culture Vol.40 No.1 pp.13-35
DOI : https://doi.org/10.7318/KJFC/2025.40.1.13

The Dietary Pattern of the Gentry Families of the 17th Century in the 「Hyeonpung GwakssiEonganc

Gyung Hee Cha*
Department of Korean cuisine, Jeonju university
* Corresponding author: Gyung Hee Cha, Department of Korean Cuisine, Jeonju University, 303 Cheonjam-ro, Wansan-gu, Jeonju-si, 55069, Korea Tel: +82-63-220-2016 Fax: +82-63-220-2736 E-mail: injeulmi@jj.ac.kr
January 10, 2025 February 6, 2025

Abstract


Hyeonpung GwakssiEongan」 (A collection of Korean letters)is of 176 letters. Of 176 letters, 83 letters are about dietary which are 47.16% of the total letters. In 83 letters of dietary, there are records of rice, glutinous rice, barley and buckwheat, and also yeast, malt, flour, wheat bran. For poultry and meats, there are beef, raw & dried pheasant, chicken, quail and other birds. For fish and shellfish, there are sea fish such as cod, herring, croaker, flatfish, and freshwater fish such as crucian carp. For main dish, there are cooked rice, porridge, noodles and dumplings. For side dish, there are soup, grilled dish, nureumi, stir-fried dish, steamed dish, fermented fish, raw fish, jaban and chimchae. For rice cake, there are ancestral rites cake, sanseung, gyeongdan, ssookddeok. In「Hyeonpung GwakssiEongan」, Ju Gwak instructed food preparation, grocery shopping, recipe, guest-welcoming, housekeeping, making bed, transportation, curfew for his kids and clothing for his wife one by one. Furthermore, there are records of dietary lifestyle of spring season and the month of November in lunar calendar. Lastly, there are birthday ceremony, coming of age ceremony, wedding ceremony, funeral ceremony and ancestral rites ceremony according to Confucianism ideal and their food recipe.



「현풍곽씨언간」에 담긴 17세기 사대부가의 식생활 양상

차경희*
전주대학교 한식조리학과

초록


    Ⅰ. 서론

    조선시대 기록되어 현재까지 전해지는 옛 편지는 한문으로 작성된 것과 한글로 작성된 것이 있다. 한문 편지를 간찰(簡札), 서간(書簡), 서신(書信), 서찰(書札), 서한(書翰)이라 부르는 것에 비해 한글 편지는 언간(諺簡), 언서(諺書), 언찰(諺札), 내간(內簡)이라고 한다(Lee 2015). 한문 편지는 발신자와 수신자의 신분과 계층, 학식 등의 범위가 국한된 반면 한글 편지는 임금부터 노비까지 발신자와 수신자의 폭이 넓다. 또한 편지의 내용도 특정 사안에 대한 지시나 명령, 교훈적인 가르침부터 개인의 사적 생활까지 다양하며 글쓴이의 일상사가 깊이 반영되어 있다(Hwang 2010). 언간은 특정 계층이나 성별 관계없이 모두가 주고받았는데, 특히 여성이 발신자나 수신자로 참여한다는 점에서 한문 편지와 차별되며, 여성의 삶과 생활사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Paek 2005). 발신자와 수신자는 언간을 통해 서로의 안부와 문안, 가사(家事), 병환(病患), 해산(解産), 혼사(婚事), 상사(喪事), 제사(祭祀), 인생사, 책력(冊曆), 재산관리, 노비관리 등을 의논했다. 편지는 부부, 부모, 자식, 형제, 친구, 지인 간 소통하며, 일상의 생활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전하는 가장 보편적인 수단이었다. 따라서 편지는 당시의 개인이나 사회의 실상이 그대로 담긴 생활사 자료가 될 수 있다.

    조선시대 한글 편지는 15-19세기 말까지 폭넓게 쓰였다고 알려졌다. 학계에 알려진 언간 자료는 3,000여 건이지만, 자료가 추가로 발견되면서 점차 늘어나는 추세이다(Bae 2018). 언간에 대한 선행연구는 필사본 자료가 가지는 특성으로 인하여 언어학적, 국문학적 또는 국어생활사적 연구자료로 활용되었다(Paek 2005;Baek 2006;Kang 2010;Lee 2012). 또한 언간의 가치를 각 학문 분야에서 인식하며 점차 서체적 특성과 조형성 분석을 연구한 서예학 분야(Park 2022), 생활사 연구를 위한 역사학 분야(Hong 2019;Lee 2020), 의생활 분야(Jo 2014), 여성사 분야(Ha 2017) 등으로 연구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그간 조리학자들의 식생활 연구는 고문헌에 기록된 음식 조리에 관한 연구였다. 고조리서는 음식 조리법의 기술과 가공에 대한 추적은 가능하나, 그 음식을 언제 어떻게 소비하고 누구와 향유했는지를 살필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언간 자료를 활용한 식생활사 연구가 기존의 음식문화 연구와 함께 접목된다면 우리 전통 음식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Hyeonpung Gwakssi Eongan(현풍곽씨언간)은 경상북도 달성군(達城君) 현풍면(玄風面) 대리(大里)에 세거하는 현풍 곽씨(郭氏) 집안의 편지이다. 현전하는 현풍곽씨언간은 총 176건이다. 이중 한글 편지가 171건, 한문 편지가 5건이다. 대부분 편지글이나, 종자분급기(種子分給記), 상사(喪事) 시소렴(小殮) 지시와 노비명부, 양조법(釀造法), 부조 받은 제물물목기(祭物物目記) 등 치부(置簿)의 성격을 가진 것도 있다. 176건의 언간 중 식생활 관련 기록이 나타나 있는 편지는 83건으로, 전체 언간의 47.16%에 달한다. 예나 지금이나 먹고 사는 문제는 우리 삶의 기본이었으며, 더구나 예(禮)를 중요시한 유교 사회에서 음식은 예의 표현 수단이었기에 소홀히 할 수 없었다. 편지 대부분의 발신자였던 곽주(郭澍, 1569~1617)는 벼슬은 하지 않았지만 현풍지역에 일가를 이루고 살았던 사대부(士大夫)였다. 곽주는 매우 세심한 성격으로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관장하며 아내와 수많은 의논을 나눈 편지를 통해 17세기 조선 사대부가의 이념과 생활환경을 엿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였다.

    본고는 현풍곽씨언간에 담긴 식생활 관련 기록을 추출하여 Eumsikdimibang(飮食知味方)(Paek DH ed. 2003), Yorok(要錄)(Anonymous 1680), Jubangmun(酒方文)(Lee HG ed. 2013), Juchanbang(酒饌方))(Paek DH et al ed. 2020), Imwongyeongjeji(林園十六志)Jeongjoji(鼎俎志)(Lee HG et al ed. 2007), Siuijeonseo(是議全書)(Lee HG et al ed. 2004) 등의 음식조리서 및 동시대의 기록인 Swaemirok(瑣尾錄)(Oh HM, late 1500s )와 Miamilgi(眉巖日記)(Ryu HC late 1500s) 그리고 식생활 관련 문헌과 고찰하여 17세기 조선 사대부가의 식생활 양상을 살펴보는데 그 목적이 있다.

    Ⅱ. 연구내용 및 방법

    1. 현풍곽씨언간의 특성과 가치

    현풍곽씨언간은 1989년 4월 현풍곽씨 후손들에 의해 경상북도 달성군(達城君) 구지면(求旨面) 도동리(道洞里) 석문산성(石門山城) 내 위치한 12대 조모인 진주하씨(晉州河氏, 1580~1652?)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묘 주변은 울창한 소나무 숲이었고, 그 송진으로 인해 공기가 차단되어 관이 진공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발굴 당시 진주하씨 관에는 ‘晉州河氏之墓’라는 명정(銘旌)이 선명히 남아있었다(Paek 2019a). 또한 관 속에는 고인의 미이라, 의복과 생활용품, 편지 다발 등의 유품들이 고스란히 보전된 상태였다. 이렇게 발견된 ‘진주하씨 묘 출토유물(晉州河氏 墓 出土遺物)’ 249점은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Korea Heritage Service), 현재 국립대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풍곽씨언간은 총 176건으로, 필사 연월일이 정확히 기록된 것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편지도 다수이다. 필사 시기를 알 수 있는 편지 중 가장 빠른 것은 ‘임인 시월 열예쇈날’(壬寅 十月 十六日, 1602년 10월 16일)이며, 가장 늦은 것은 ‘병슐 납월 슌구일’(丙戌 臘月 旬九日, 1646년 12월 19일)이다. 이 편지들은 곽주와 진주하씨 부부의 별거에서 시작되었다. 곽주는 첫째 부인 광주이씨(光州李氏, 1613~1647)가 죽자 진주하씨와 재혼하였다. 곽주에게는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었고, 진주하씨와 혼인하여 아들 3명과 딸 6명을 낳았다. 편지글에 나타나는 아들의 이름은 곽이창(郭以昌, 1590~1654), 곽의창(郭宜昌, 1613~1647), 곽유창(郭愈昌, 1615~1673), 곽형창(郭亨昌, 1617~1674)이며, 딸의 이름은 정례, 복례, 정렬, 정냥, 철례, 덕례인데 딸 중 한 명은 일찍 죽은 것으로 보인다(Paek 2019a).

    곽주와 진주하씨의 나이 차는 11살, 진주하씨와 전처 소생의 곽이창의 나이 차는 10살이었다. 이 때문인지 <31번 편지>에서처럼 재혼한 이후 진주하씨와 곽이창의 불화가 끊이질 않았다. 곽주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관계는 나아지지 않았으며, <32번 편지>에서 집안 어르신들께도 이 소식이 전해지자 곽주는 많은 고심 끝에 별거를 결정하게 된다. 곽주의 본가인 소례에서 반나절 정도 거리에 있는 논공으로 진주하씨가 주거지를 옮기기로 하면서 이른바 두 집 살림이 시작되었고, 양가의 소통은 주로 편지로 이루어졌다. 편지 원문 중 일부는 <Figure 1, 2>와 같다.

    현풍곽씨언간 의 발신자와 수신자는 곽주와 진주하씨 부부(夫婦), 진주하씨와 곽주의 아들들, 진주하씨와 출가한 딸들, 손자와 할머니, 곽주와 장모 합산댁, 매제와 매형, 사돈, 사촌형제 간 등으로 다양하다. 현풍곽씨언간 중 가장 많은 편지를 보낸 사람은 곽주였다. 총 176건 중 발신자가 곽주인 경우는 106건으로 전체의 60.2%였다. 이중 수신자가 미상인 편지를 제외하면, 아내 진주하씨에게 보낸 편지가 96건으로 곽주가 쓴 편지의 90.6%는 부부간의 소통이 그 목적이었다. 반면 진주하씨가 남편 곽주에게 보낸 편지는 4건에 불과했다. 다음으로는 출가한 딸이 아버지 곽주, 어머니 진주하씨와 또 다른 출가녀인 본인의 자매에게 보낸 편지가 47건으로 전체의 26.7%였다. 편지의 발신자와 수신자가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는 출가녀들은 경주에 사는 최동언(崔東彦, 1592~1672)과 결혼한 맏딸 정례를 비롯하여 ‘조생원댁’이라 표현된 조함철(趙咸哲)과 결혼한 딸, 밀양의 ‘박생원댁’ 박뢰(朴瓃)와 결혼한 딸로, 총 세 명의 출가녀 편지가 분류된다. Posangwakssidaedongbo(苞山郭氏大同譜) 에 의하면 곽주의 사위는 이들 외 여효정(呂孝程)과 이보(李溥) 까지 총 5명으로 확인된다(Ha 2022).

    진주하씨는 혼인 직후부터 본가로부터 반나절 정도의 거리에 있는 친정에 자주 머물렀다. 진주하씨의 반복된 출산과 친정어머니 벽진이씨(碧珍李氏)의 간병, 친정 집안의 문제 해결 등을 위해 창녕군 오야마을의 친정에 자주 가게 되자 곽주는 처갓집으로 좋은 식재료를 보내 자녀들과 장모의 식사를 돕고, <2번 편지>에서 장모에게 자녀들의 언문을 가르쳐 달라는 부탁도 하였다. 사돈간에는 집안의 혼사나 제사 같은 대소사에 서로 음식을 마련하여 보내고, 보낼 물건이 마땅치 않을 때는 송구한 마음을 편지에 담기도 했다. 곽주는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집에서 출발하여 경상도 김천, 화령, 상주, 충청도 충주와 세재를 거쳐 한양으로 가는 길목마다 진주하씨에게 편지를 띄워 과거 길의 여정과 상황을 자세히 전하고, 귀가할 날짜도 알렸다.

    편지가 쓰여진 1600년대 초반의 조선은 임진왜란 직후로 백성들의 삶은 매우 피폐한 상황이었다. 현풍곽씨언간에는 그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경제적으로 궁핍하여 양식을 걱정하는 모습, 역질(疫疾) 같은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과 초조함, 가장 부재 가족들의 치안에 대한 염려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불안한 시대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와 같이 현풍곽씨언간에는 17세기 초중반 경북지역 사대부가의 생생한 삶의 모습이 담겨있다.

    2. 연구방법

    1989년 진주하씨 묘에서 언간이 발견되고 학계에 알려지자 여러 학자들의 연구가 이어지면서 그 명칭이 분분하였다. Ahn(1996)의 연구에서는 ‘진주하씨 언간’, Paek(1997)은 ‘晉州河氏墓 出土 <玄風郭氏 諺簡> 判讀文’, 한국학중앙연구원 어문생활사연구소에서 수행한 한국연구재단 연구과제인 조선시대 한글편지 판독자료집의 명칭은 ‘진주하씨묘 출토언간’(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2013), Ha(2017)는 ‘진주하씨 묘 출토 편지’로 지칭하면서 언간의 명칭이 학자마다 상이하였다. 경북대 백두현교수는 2003년 현풍곽씨언간 주해로 주해서를 태학사에서 출간하였다(Paek 2003). 이후 발굴 당시 흩어졌던 편지를 다시 모아 현풍곽씨언간 주해 증보판이 2019년 도서출판 역락에서 출간되었다(Paek 2019a). 본 연구는 2019년에 출간된 주해서 증보판에 근거하여 분석하였고, 편지의 번호도 주해서를 기준으로 하였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진주하씨묘에서 출토된 한글편지를 ‘현풍곽씨언간’으로 통일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본 연구를 위해 첫째, 현풍곽씨언간의 내용을 상세히 파악하여 편지의 내용 중 식생활 관련 자료를 추출하였다. 이때 표제어는 하나의 편지에서 언급된 것을 1건으로 계산하였다. 둘째 추출된 자료를 식품군별, 음식 종류별, 계량도구와 단위, 조리도구 등 유목별로 나누고, 음식조리에 필수적인 요소들을 분석하였다. 셋째, 음식의 소비 양상을 살피기 위해 일상식, 접빈객 식사, 시절식, 통과의례식, 약방문 등을 분석하여 17세기 식생활 양상을 고찰하였다.

    Ⅲ. 결과 및 고찰

    1. 현풍곽씨언간에 기록된 식품와 그 가공품

    현풍곽씨언간에 기록된 식품과 그 가공품은 <Table 1>과 같다. 편지에서 추출된 식품은 곡류, 두류, 채소류, 해조류, 수조육류와 알류, 어패류, 양념류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① 곡류(穀類)

    곡류의 기록은 총 45건이었다. 곡류의 종류에는 쌀, 찹쌀, 보리, 메밀 등이 있었으며, 이 중 쌀에 대한 기록이 가장 많았다. 특정 명칭 없이 ‘양식’만으로 기록된 경우도 다수였다. 곡류가공품으로는 누룩, 엿기름, 면가루, 기울 등이었다. 쌀은 벼를 도정하기 전인 나락과 말[馬] 먹이를 위해 죽을 쑤기 위한 나락, 조생종인 되올벼(되오리)와 첫 수확한 햅쌀, 세금으로 내는 정조(正租), 흉년에 관아에 빌렸다가 되값아야 하는 환자쌀, 여행용 경비로 지출하는 해자쌀, 그리고 밥쌀, 뫼쌀(제물용과 진지용 쌀), 떡살(편쌀) 등 용도에 따라 구분하여 부르고 있었다. <65번 편지>에서는 환자쌀에 대한 절박함이 기술되었다. 환자(還子)쌀은 곡식을 사창(社倉)에 저장하였다가 백성들에게 봄에 꾸어 주고 가을에 이자를 붙여 거두던 곡식을 말한다. 즉 지난해 농사에서 얻은 쌀이 떨어져서 양식이 부족할 때 다시 새 곡식을 수확할 때까지 관아에서 보리나 쌀을 대출하여 생계를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88번 편지>는 여행 길에서 곡식은 물물교환의 수단이 되었다.

    KJFC-40-1-13_Inline-1.gif

    KJFC-40-1-13_Inline-2.gif

    쌀은 세금으로 납부되었는데, Gyeonggukdaejeon(經國大典) 호전(戶典), 녹과(祿科)에 의하면 조선 전기에는 현미(玄米), 중미(中米), 또는 백미(白米)로 징수했다(Institute for the Translation of Korean Classics). 관료들은 현미 또는 중미로 녹봉(祿俸)을 받아 도정하여 밥이나 떡, 술 등의 가공품으로 활용하였다. 나락 상태가 장기간 보관에는 유리하지만, 벼의 왕겨와 쌀겨가 차지하는 비율에서 부피와 무게 비율이 높아 조운(漕運)에 어려움이 있었다. 벼로 징수한다 해도 부피로 인한 창고의 보관과 관리, 한양에서의 대단위 도정 시설 설비 등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는 세금으로 백미로 징수하여 녹봉도 백미로 지급하였다(Chung 2024).

    찹쌀은 찹쌀 외 찰나락, ᄎᆞ찹쌀로 4건 기록되어 있었다. 곽주가 남긴 종자분급기 <104번 편지>와 <105번 편지>에 의하면 11명의 노복에게 나눠주는 곡식 종자의 종류 중 찰나락은 두 명에게만 한 말씩 지급되었다. 찹쌀은 제사에 쓸 떡과 술 빚는 재료로 사용되었다. 편쌀은 멥쌀과 찹쌀을 1.5:1로 섞어서 사용했다. 곽주가 남긴 양조법 중 죽엽주는 찹쌀을 쪄서 만들었고, 포도주는 덧술을 할 때 찰밥을 쪄서 더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주류에서 서술하겠다.

    보리는 쌀이 부족할 때 귀한 양식이 되었다. <46번 편지>에서 곽주는 “보리·란 ᄀᆞ장 됴케 닷겨 게 ᄒᆞ소. 보리리 세머로우면 강긔ᄒᆞ리 만ᄒᆞᆯ거시니 글란 됴케 닷겨 소.”라고 했다. 보리는 쌀보다 겨층이 많아 보리로 밥을 지으면 식감이 좋지 않다. 그러니 진주하씨가 보리쌀밥을 지어야 할 때는 도정에 신경을 써서 먹는 이의 불평을 듣지 않도록 하라는 곽주의 당부이다. <65번 편지>에서 곽주는 제물에도 아버님이 평소에 드시던 쌀, 보리, 팥을 섞은 뫼를 올릴 것을 이른다. 출가한 딸은 친정어머니께 보내는 <158번 편지>에서 형편이 어려워 친정에 보리쌀 팔 돈 즉 ‘보릿돈’을 보내지 못하는 점을 아쉬워했다. 보리밥은 수확시기와 특유의 질감 때문에 여름철 별미였지만, 언제나 쌀의 대용품이었다. 가을에 벼를 수확하여 겨울을 지나 봄이 되면 양식은 바닥이 났고, 보리마저 수확을 코앞에 두고 있는 6월 즈음은 맥령(麥嶺) 즉 보릿고개라하여 춘궁기를 보내는 것이 큰 고난이었다. 오희문(吳希文)은 Swaemirok(瑣尾錄)(Oh HM, late 1500s )에서 윤겸이 보리 30말을 실어왔으니 근일(近日)은 걱정이 없다고 하였고(1595년 6월 3일), 함열에서 보리씨를 얻어왔는데 요새 양식이 없어서 거의 다 가루로 만들어 조석으로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고, 어머님께도 역시 이것을 드렸으니 몹시 민망하다고 하였다(1595년 6월 24일).

    보리로는 엿기름을 만들었다. 보리에 물을 부어 놓고 새 물을 날마다 갈아주면 일주일 정도 지나면 보리에서 싹이 난다. 보리에서 파란 싹이 돋아 올라오면 바싹 말렸다가 맷돌에 갈아 낟알을 타개면 바로 엿기름이다. 보리에서 싹이 날 때 전분분해효소의 활성이 가장 왕성하여 당화력이 높아진다. 이 엿기름이 넉넉해야 식혜는 물론 조청과 엿을 고을 수 있어 반찬뿐 아니라 유사시 떡이랑 과자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4번 편지>에서 곽주는 살림이 서툰 진주하씨에게 엿기름 부족으로 행여 시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을까 노심초사하면서 엿기름은 이웃에 빌리기도 어려우니 5~6되씩 나누어 빨리 길러 준비해 둘 것을 재촉하였다.

    KJFC-40-1-13_Inline-3.gif

    술을 빚기 위한 필수재료로 누룩 또는 가루누룩이 있었다. 술 빚기는 집안 대소사에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누룩은 곡물의 기울로 만들었다. 누룩은 대개 더위가 시작되는 음력 6월부터 만들었다. 곽주의 집에서는 4월에 여뀌물을 준비하여 한달 정도 숙성시켜 이 물을 기울에 섞어 반죽한 후 누룩을 디뎠다.

    KJFC-40-1-13_Inline-4.gif

    현풍곽씨언간에 면(麵)이 자주 등장한다. 당시의 면의 원료는 주로 메밀이었다. 메밀은 교맥(蕎麥) 또는 목맥(木麥)이라 하고 껍질을 벗긴 쌀은 목미(木米), 가루를 내면 목말(木末)이라 했다. 메밀은 대개 껍질을 벗기고 제분하여 면을 만들면 하얀색이 되므로 백면(白麪)이라고 하지만, 껍질째 갈아 만든 가루로 국수를 만들면 색이 진한 이른바 막국수가 된다. 오희문(吳希文)은 Swaemirok(瑣尾錄)(Oh HM late 1500s )에서 아침 식사는 경우 변통해 먹었으나 저녁에는 메밀을 껍질째 갈아 국수(而夕則只以皮木作末爲麵)를 만들어 반 그릇 나누어 먹었다고 하였다(1595년 6월 27일). 당시 오희문의 집도 난리통에 먹을 것이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② 두류(豆類)

    두류는 콩, 팥, 녹두와 녹두를 가공한 스면가루가 있었다. 콩은 7건의 편지에 등장하는데, 대부분 말 먹이용이었다. 우리 선조들은 콩을 주곡(主穀)에 섞거나 장을 담그기 위한 재료로 이용하였다. 한반도와 만주지역은 다양한 콩 품종와 재배종이 발견되는 곳으로, 콩•콩과작물•화분 유체 등의 유물 발굴에서 선사시대부터로 이 땅에 살았던 선조들의 콩 이용이 확인된다(Park 2016). 특히 콩을 활용한 발효식품은 삼국시대부터 그 기술력이 이웃나라에까지 이름을 떨쳤다(三國志 卷30, 魏書 東夷傳 第30 高句麗傳, “其人契淸自喜, 善藏釀”). 또 왕실 혼례 시에는 시(豉)가 납폐례(納幣禮) 품목이었을 정도로 긴요한 답례품이었다(三國史記 卷8, 新羅本紀8 神文王 三年 春二月, “以順知爲中侍 納一吉湌金欽運少女 爲夫人 先差伊湌文穎 波珍湌三光定期 以大阿湌智常納采 幣帛十五轝 米・酒・油・蜜・醬・豉・脯・醢 一百三十五轝 租一百五十車”). 콩의 재배가 왕성했던 고려시대 이후에는 식용이자 가축의 사료로도 사용되어 사람과 가축의 생계에 필수적인 식재료이자 재화로 활용되었다(高麗史 卷79, 第33 食貨 二, “高宗十三年二月 令諸王及大小臣民 出豆有差 以助元軍 屯田牛料”). 팥은 떡의 고물이나 주곡의 생산이 원활치 못할 때 쌀과 섞어 잡곡밥으로 지어졌다(Institute for the Translation of Korean Classics)

    KJFC-40-1-13_Inline-5.gif

    KJFC-40-1-13_Inline-6.gif

    KJFC-40-1-13_Inline-7.gif

    녹두는 죽, 떡, 국수에 이용되었다. 녹두죽은 손님 접대용으로 올랐고, 제수용 떡의 고물로 이용되었다. 곽주는 <72번 편지>에서 스면 누르는 판이 없어 스면가루를 보낸다고 하였다. 스면가루는 스면을 만들기 위한 녹두가루이다. 스면은 ‘싀면’ 또는 ‘세면(細麪)’이라 하는데, 녹두를 수비(水飛)하여 녹말을 만들어 두었다가 말려두고 그 가루를 이용하였다.

    KJFC-40-1-13_Inline-8.gif

    ③ 채소류(菜蔬類)와 해조류(海藻類)

    채소류의 기록은 쑥, 생강, 자총이, 여뀌, 조피로 소략하다. 채소는 집안의 채마밭에서 가꾸면 자급이 되었기에 별도로 편지를 통해 요구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나마 쑥은 식용과 약용, 생강은 약용이다. 쑥은 다복쑥, 참쑥, 약쑥으로, 다북쑥은 봄날의 절식으로 쑥떡의 재료가 되었고, 학질로 고생하는 가족들의 치료제로 이용되었다. 생강의 표기는 ‘ᄉᆞᆼ양, ᄉᆞᆼ앙, ᄉᆞᆼ각, 앙’으로 각각 다르게 기록되었으나, 오기(誤記)로 모두 동일한 품종으로 생각된다. 당시 생강은 집안의 상비약으로, 질병이 생기면 가장 먼저 찾는 약이었다.

    KJFC-40-1-13_Inline-9.gif

    KJFC-40-1-13_Inline-10.gif

    KJFC-40-1-13_Inline-11.gif

    생강은 표사(表邪)를 발산(發散)시키고 추위를 풀어주며, 구토를 멎게 하고 담(痰)을 소통시키는 효능이 있다. 생것뿐 아니라 생강즙, 건강(乾薑), 외생강(煨生薑) 등으로 법제하여 생강주, 생강탕, 생강귤피탕, 생강부자탕, 생강감초탕, 생강환, 생강즙전 등의 약재로 쓴다(Traditional Korean Medicine DB). 또 생강정과, 생강엿, 생강단자 등으로 활용하였다.

    자총이[紫蔥]는 파의 일종이다. Saekyung(穡經)(Park SD, 1676)의 기록에 따르면 “마늘과 비슷하고 그 잎은 파와 비슷하다. 8월에 심고 이듬해 5-7월에 거두는데, 푸석푸석한 토양에서 잘 자란다.”고 하였다(Korean Intellectual Property Office). 자총이는 겉껍질은 누런 자줏빛이고, 속껍질은 자줏빛에 속은 희다. 땅속줄기가 작은 원뿔 모양으로 자라는데, 맛이 파보다 더 맵다. 입춘(立春) 즈음 잃었던 입맛을 되찾는 봄나물로 먹는데, 도가(道家)에서 수행을 위해 금기시하는 오훈채(五葷菜) 중의 하나이다. Jeungbosallimgyeongje(增補山林經濟)치선(治膳)의 기록처럼 자총이[紫蔥]는 단독으로 반찬을 만들 수도 있지만(Institute for the Translation of Korean Classics), 꿩고기나 생선류 조리에 이용하면 특유의 누린내나 비린내를 잡을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3번 편지>에서 곽주는 진주하씨에게 손님 접대를 위한 준비를 분주히 하며 생치(生雉)와 건치(乾雉), 여러 가지 건어물류를 챙기며, 자총이를 넣을 것을 당부하였다.

    여뀌는 술을 빚기 위한 누룩을 디디는 기본 재료였다. 여뀌를 찧어 한 달간 우린 물에 기울을 풀어 반죽하여 디뎌서 말리면 누룩이 완성된다. 여뀌는 잎과 줄기에 탄닌(tannin)의 함유량이 많아 항균 작용이 있으므로 누룩을 디딜 때 잡균의 번식을 막고, 술이 익을 때 잘 쉬지 않게 한다(Oh et al. 2016).

    조피는 초피의 방언으로 초피나무의 열매이다. 지역에 따라 제피, 지피, 젠피, 남추, 촉초라고도 한다. 맵고 얼얼한 맛을 가진 향신료이다(The Academic of Korean Studies). <145번 편지>에 출가한 딸이 조피를 챙겨서 어머니에게 보냈다. 당시에는 매운맛을 내는 신미료(辛味料)로 겨자, 후추, 초피, 산초 등이 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해조류로는 김[海衣]과 미역이 있었다. 김은 갑자(甲子, 1624)년 2월 17일에 출가녀가 어머니 하씨에게 보낸 <134번 편지>에서 한 번 등장한다. 김은 ‘짐’으로 기록되어 구개음화 현상이 존재했던 당시의 음운 형태를 그대로 보여준다. ‘머육’은 미역의 고어로 바다나물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1500년대 Soksamganghaengsilhyojado(續三綱行實孝子圖)부터 1700년대 Baktongsasinseogeonhae(朴通事新釋諺解)까지 일관되게 해채(海菜)를 ‘머육’ 이나 ‘메육’으로 기록하였다(Oh 2022). 김은 단위가 없으나, 미역은 네 단 또는 열 단씩을 보냈다. 발신자가 몇째 딸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수산물 구입이 용이한 경주로 시집간 큰딸 정례의 편지로 추측된다. 곽주와 진주하씨가 사는 곳은 논공과 소례는 내륙지역으로 바다와는 거리가 있으나, 어물장수로부터 구입을 해두고 긴요하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미역은 우리나라에서 출산과 탄생을 상징하며, 일상의 찬(饌)뿐 아니라 의례품으로도 활용되었다. <135번 편지>에 기록된 ‘딥세리’는 찹쌀과 미역 사이에 기록되어 식재료로 추정되나, 정확히 알 수 없다. 발음이 유사한 단어로는 ‘댑싸리’를 추정할 수 있다. 댑싸리는 명아줏과의 한해살이 풀로 여름철의 연한 녹색의 잎은 식용으로, 말려서 약용으로, 다 자라면 마당비를 만드는 재료로 활용하였다.

    KJFC-40-1-13_Inline-12.gif

    KJFC-40-1-13_Inline-13.gif

    KJFC-40-1-13_Inline-14.gif

    ④ 과실류(果實類)

    과실류는 감[柿], 모과[木瓜], 석류(石榴), 호두[胡桃], 밤[栗]이 기록되어 있고, 구체적인 종류의 언급이 없이 ‘실과(實果)’로도 기록되었다. 가장 많이 언급된 과실은 감과 모과이다. 감은 조홍(早紅) 또는 홍시(紅柿)로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의 감은 모두 떫은 재래종이었으므로 덜 익은 감은 소금물에 침지하여 탈삽(脫澁)시키거나 어느 정도 익어 껍질이 붉어지면 깎아 말려 건시(乾柿)를 만들어 두고 사용하였을 것이다. 감이 충분히 익어 떫은맛도 없고 과육이 부드러워지면 비로소 홍시가 된다. 조홍은 다른 감보다 일찍 익고 붉은 감을 말한다. <119번 편지>에서 곽주의 안사돈 주씨는 곽주의 대상(大喪)이 가까워 오자 진주하씨에게 위로의 편지와 함께 보내준 귀한 조홍을 받고 답례로 보낼 것이 없어 면목없는 마음을 전한다. 감은 왕실과 민간의 각종 제사에서 중요한 제수였다. 홍시를 올릴 수 있는 시기에는 홍시를 쓰지만, 대체로 건시(乾柿)를 제수로 이용하였다. 홍시를 건시로 대용한 일은 물선의 진상 때에도 있었다. Jeonhyangsailgi(典享司日記)에 따르면, 1820년(순조 20)에 육조(六曹)에서 물선을 진상하면서 원래는 홍시를 올려야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자 1월 초하루, 5월 초8일, 5월 15일, 12월 13일에는 홍시자(紅柹子) 대신 건시자(乾柹子)를 진상했다고 한다(Institute for the Translation of Korean Classics).

    모과는 모과나무의 열매이다. 과실 중 4건으로 가장 많이 기록되었다. 곽주의 집에서는 가을철 모과가 열리면 따서 말려두었다가 식용과 약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상비해 두었다. 모과는 정과를 만들어 다담상(茶啖床)에도 올렸다. 조선 왕실 모과를 약용으로 쓸 때는 다른 약재와 함께 섞어서 약을 조제하거나, 다른 약을 먹을 때 모과차와 함께 먹도록 했다. Seungjeongwonilgi(承政院日記) 1639년(인조 17) 11월 11일의 기록을 보면, 평위산(平胃散)에 모과 등의 약재를 더한 약을 왕이 복용하도록 하였고, 1724년(영조 즉위) 10월 2일에는 대왕대비의 담병(痰病)에 좋다는 사유환(蛇油丸)을 모과차에 타서 드시도록 하라는 내용이 있다(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특히 모과는 담증(痰證)이라 하여 가래로 고생하는 경우에 복용하였다. 광해군이 담증이 있어서 모과를 약으로 오래 복용하였고[Gwanghaegunilgi(光海君日記) 1년 10월 21일], 인조 역시 심한 담증 때문에 모과전(木瓜煎)을 지어 올리라고 하교한 일이 있었다(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석류는 제사의 부조물품으로 한 번, 다담상에 올라가는 수정과에 고명용으로 한 번 기록되었다. 석류는 고려시대 서아시아로부터 우리나라에 유입된 과실이다. Joseonwangjosillok(朝鮮王朝實錄)에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진상품이었다(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Jeungbosallimgyeongje(增補山林經濟)Chisun(治膳), 석류보관법(石榴收藏法)에 의하면 잘 익은 석류는 가지째 따서 새 항아리에 넣고 종이로 10겹을 봉하여 놓으면 오래 보관할 수 있었다(Institute for the Translation of Korean Classics). 단 것은 식용으로, 신 것은 약용으로 사용하였다. 잘 익은 석류는 말려서 약용을 하는데 삽장(澁腸)시키고, 설사(泄瀉)를 멎게 하고 출혈(出血)을 멎게 하며 수염을 검게 하고 구충(驅蟲)의 효능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류는 아름다운 붉은 꽃을 피워 관상용으로도 가치가 있었다. 우리 선조들은 석류의 씨가 많아 포도와 함께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과실로 여겨 이불, 치마, 활옷이나 원삼 같은 혼례복에 석류 문양을 새겼다. 석류가 열매를 많이 맺는 것과 같이 자손을 많이 낳으라는 기복적 의미를 담은 것이다(Gang et al. 2015).

    호두는 ‘추자’로 기록되어 있는데, 호두는 한자어로 胡桃, 楸子, 唐楸子라 하는데, 경상도지역에서는 호두를 추자라 한다. <103번편지>에는 곽주가 상을 당하자 이웃사람들이 부조(扶助)한 과실 목록이 나온다.

    KJFC-40-1-13_Inline-15.gif

    밤[栗]은 밤나무의 열매로,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밤이 유명했다. 마한(馬韓)에서 나는 크기가 배[梨]만한 밤은 Samgukji(三國志)Wuiji(魏志)Dongijun(東夷傳), Whohanseo(後漢書), Sooseo(隋書), Buksa(北史), Munhuntonggo(文獻通考) 등에 실려있을 정도이다(Institute for the Translation of Korean Classics). Goryeodogyeong(高麗圖經)(Cho DW et al ed. 2005)애서 서긍(徐兢)은 고려에서 가장 맛있는 과실은 밤인데, 그 크기가 복숭아만 하다고 하였다. Sejongsillok(世宗實錄)지리지에는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황해도, 평안도, 함길도의 36개 군현에서 밤이 토산으로 생산되었다(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밤은 다남(多男)을 상징하여 관혼상제에 빠지지 않는 과실이다.Mangiyoram(萬機要覽)(National Culture Research Institute ed. 1989)의 진상품목에 생률(生栗)과 황률(黃栗)이 기록되어 왕실의 의례에 반드시 사용되었다. 밤은 생으로 먹거나 삶아서 껍질을 벗겨서도 먹지만, 숙률(熟栗)이나 말린 황률을 가루 내어 죽이나 떡이나 과자의 재료로 이용하였다. 조선시대에 밤은 구황 식품으로도 이용되었다. 태종대(Taejongsillok(太宗實錄) 14년 7월 12일)에는 비상시를 대비하여 진자(榛子)•밤•밀랍(蜜蠟) 등을 축적해 놓도록 하였고(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Sallimgyeongje(山林經濟)구황(救荒)편에도 생률을 구워 먹으면 배고픔을 면할 수 있다고 했다. “황률•홍조(紅棗)•호도(胡桃)•건시(乾柹) 이 네 가지의 과실은 씨와 껍질을 없애고 방아 안에 넣고 함께 찧는다. 이것으로 둥글고 두터운 떡을 만들거나, 박아서 벽돌처럼 만든 다음 볕에 말렸다가 먹는다. 옛날에 기이한 중이 있었는데, 미리 이것을 여러 해 동안 구하여 많이 모아 두었다. 그 후 흉년이 되자 이것을 먹고서 살아났다.”고 하였다(Institute for the Translation of Korean Classics). <163번 편지>에서 “... 귀한 밤을 많이 보내니 기뻐하네, 나는 아무것도 없어서 변변치 않은 자반만 주머니에 보내네. 보고 웃으실가 염려하네...” 곽주의 출가한 딸들의 편지이다. 언니의 아이들이 아프자 여동생이 밤을 보냈으나 막상 자신은 답례로 보낼 것이 변변치 않다는 내용이다.

    ⑤ 수조육류(獸鳥肉類)와 알류[卵類]

    수조육류로는 쇠고기, 생치(雉), 건치(乾雉), 닭[鷄], 메추라기[鶉], 새가 기록되었다. 쇠고기는 <1번 편지>에는 ‘고기’, <87번 편지>에는 ‘오기’, <109번 편지>에는 ‘황육’으로 각각 기록되어 있다. <1번 편지>에서는 쇠고기 네 오리를 보낸다고 하였고, <109번 편지>에서는 지인에게 제사를 지내고 남은 고기를 조금 얻어 보낸다고 하였다. 하지만 <87번 편지>에서는 쇠고기의 양이 제법 많았던 것 같다. 곽주는 밖에서 장만하여 보낸 쇠고기의 용처를 자세히 밝히고 있다. 먼저 쇠고기는 식가제(式假祭)와 수리제(수리祭)에 올릴 포육(脯肉)용, 20일에 있을 집안 제물용, 그리고 장모님의 반찬거리 소용이었다. 곽주 자신은 서원(書院)에서도 소를 잡아 쇠고기를 얻었으니 본인에게는 쇠고기를 보내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곽주가 거주했던 현풍지역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의 불천위(不遷位)가 1616년부터 올려진 것으로 보아 달성(達城) 도동서원(道東書院)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Dalseong-gun 2014). 달성 도동서원은 조선 오현(五賢)의 중 사람인 한훤당 김굉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605년 지방 유림들의 공의로 현풍현 비슬산 기슭에 세워진 서원이다(Korea Heritage Service).

    KJFC-40-1-13_Inline-16.gif

    꿩고기는 생치(生雉)가 7건, 건치(乾雉)가 3건으로 총 10건으로, 수조육류 중 가장 빈번히 사용된 식재료였다. 꿩은 그물을 이용한 사냥보다 대개 훈련된 매[鷹]를 이용한 매사냥을 통해 잡았다. 매사냥은 왕실과 양반들의 유희이기도 했지만, 사냥이 이루어지는 가을과 겨울철 백성들의 중요성 육류 공급원이었다(Kim 2002).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朝鮮王朝實錄)에 매사냥은 총 354차례 언급되었으며 그중 세종 때가 총 172회로 가장 많다. 다음이 태종 112회, 세조 32회, 성종 14회 등으로 확인된다. 민간에는 매를 전문적으로 훈련하여 사냥하는 매꾼, 수알치, 매받이, 봉받이라는 매사냥꾼이 있었고, 나라에는 응방(鷹坊)을 설치하여 매의 사냥을 관리하고 응사(鷹師)를 양성했다(Lee 2022). 매는 다른 조류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맹금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참매, 그중에서도 어린 보라매를 선호하여 포획하고 훈련시켜 사냥에 이용하는데 인간들은 매의 배고픔 상태를 조절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4~5년간 사냥에 이용된 매는 그 후 번식을 위해 야생으로 되돌려 보냈다(Kim 2021). 대개 곽주의 편지 <27번 편지>에서 “..풍셰ᄅᆞᆯ 매 어드러 보낼 양으로 기ᄃᆞ리시니..” 라는 대목과 <28번 편지>에서 “매 가지러ᄂᆞᆫ 보내디 말라 ᄒᆞ셔ᄂᆞᆯ ...”이라는 대목이 나오고, <78번 편지>에서 “... 어제 치 언메나 잡아 왓던고. 잡아 왓거든 댱모 보내소..”라는 것으로 꿩 사냥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사냥한 꿩의 수확량이 많으면 팔거나 말려서 건치로 가공해 두고 활용하였다. 생치 조리법으로는 구이[炙]가 인기가 있었다. 이때 꿩은 다리와 앞가슴살을 분리하여 빠르게 건조 속도를 높이고 쓸 때 편리함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 중의 ‘돕지’는 꿩의 앞가슴살로 추정된다. 꿩고기는 <64번 편지>와 <72번 편지>에서 모두 구이로 조리되어 손님상에 안주로 올랐다. 꿩고기는 궁중의 잔치나 사대부가의 조리서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국수장국이나 떡국용 국물로 이용되었고, 익힌 살코기로 동치미국에 담아 생치침채로도 활용했다Kyuhapchongseo(閨閤叢書)(Jung YW ed. 2012). Swaemirok(瑣尾錄)(Oh HM late 1500s )에서 꿩은 제수로도 사용되었으며(戊戌日錄 11월 24일 / 11월 25일 / 12월 2일 / 2월 25일), 미역국과 연포탕의 부재료 등 일상의 식사에도 주요한 육류 공급원이었다(丁酉日錄 3월 5일 / 3월 10일 / 8월 27일 / 9월 10일).

    KJFC-40-1-13_Inline-17.gif

    KJFC-40-1-13_Inline-18.gif

    닭은 1회 등장하는데, 곽주는 <100번 편지>에서 ‘성주’와 ‘의성’에서의 행사에 닭을 5마리, 3마리, 4마리를 각각 보내라고 하였다. 이 글은 수신자가 모호한 물목 분송 내용만 기록되어 있다. 현풍곽씨언간에서 기록된 꿩과 닭의 사용 비율은 꿩이 압도적이다. 닭은 집 마당에서 사육할 수 있어 사냥으로 잡아야 하는 꿩보다는 획득이 용이했지만, 사료를 따로 주여 키워야 했고, 매일 알[卵]을 제공하는 중요 식재료였기에 식용이 쉽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 국물을 내야 하는 육수 용도로 꿩이 활용되었고, 꿩이 없을 비상시 닭을 사용했다. ‘꿩 대신 닭’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주는 꿩이요, 대체가 닭이었다. 조선 후기 조세법으로 대동법(大同法)이 실시되었지만, 지방관아에 소용되는 꿩이나 닭, 땔나무용 풀(柴草), 빙정(氷丁) 마련을 위한 잡역가(雜役價) 징수는 여전히 허용되었는데 이를 ‘치계시탄가(雉鷄柴炭價)’라고도 했다(Chung 2024). 또 Kyuhapchongseo(閨閤叢書)(Jung YW ed. 2012)에 조육류(鳥肉類)의 고기를 ‘치계류(雉鷄類)’라 하여 닭보다 꿩이 먼저임을 알 수 있다. 달걀도 귀한 식재료로 <98번 편지>에서는 제물로 이용되었고, <71번 편지>에서는 “... 양 열 블과 ᄀᆞᆺ나ᄒᆞᆫ ᄃᆞᆯ긔알 다엿낫만 유ᄅᆞᆯ 주워 일 새배로 ᄂᆞᆯ 건너 홍닙의 집으러 보내소...” 라고 하여 갓 나은 싱싱한 달걀을 이웃과 나누기도 하였다.

    메추라기와 새가 각 1회씩 기록되어 있는데, 새는 참새일 것이다. 과거 식생활에서 가축이 아닌 야생조류로 메추라기와 참새가 가장 많이 이용했는데 그물을 활용하여 잡았다. Gyemiseo(癸未書)(Han BR & Kim GY ed. 2021)의 ‘진조(眞鳥)’에는 참새를 구워 좋은 술에 담갔다가 참새고기를 먼저 먹은 후 그 술도 마신다고 하였다. 동지(冬至)부터 입춘(立春) 전에 잡은 새가 좋다고 하였다.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참새고기를 조리할 때 간장보다 소금과 기름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으나, 요록(要錄)에 기록된 참새자반[雀佐飯]은 감장(甘醬)을 이용했고, 참새지짐[煎雀]까지 두 가지의 참새조리법이 기록되어 있다(小雀削皮去嘴與足取肉洗淨粘米末交合更擣油煎進之). 규합총서(閨閤叢書)에 의하면 메추라기를 잡아 새장에 넣어 기르기도 했고, 채소와 함께 찜을 만들었다.

    ⑦ 어패류(魚佩類)

    어패류로는 대구(大口), 청어(靑魚), 조기, 광어(廣魚), 삼치[鰆魚], 준치[眞魚] 등의 바닷고기와 붕어[鮒魚], 누치[訥魚] 같은 민물고기가 고루 있었고, 구체적인 종류를 밝히지 않은 생선, 물고기, 어물 등에 대한 표현도 8건에서 기록되었다. 곽주는 편지에서 생선 한 마리 또는 생선 두 마리를 보내니 자식들하고 구워 잡수라 하기도 하고, 진주하씨가 보낸 생선 반 사발을 다시 보내니 아이들과 구워 먹으라 당부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생선은 귀한 찬거리였음을 알 수 있다. 생선 중에는 대구가 가장 많이 사용되었고, 대구알도 활용되었다. 이런 생선은 가가호호 방문 판매하는 어물 장수를 통해 구입하였다. 곽주는 집안의 행사가 있을 때는 어물 장수에게 오면 미리 필요한 어물을 부탁하기도 했다.

    KJFC-40-1-13_Inline-19.gif

    <146번 편지>에서 출가한 딸은 삼치를 48마리 보내니 어머니와 오라버니, 아우들에게 나누어 주고, 38마리로는 본인이 필요한 면화를 바꾸어 달라고 요청한다. 삼치의 양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이 편지는 바다가 가까운 경주에 사는 딸이 보낸 것으로 물물교환으로 살림살이를 장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61번 편지>에서 곽주가 강조하는 어물은 바로 전복과 마른 해삼이다. 전복은 ‘생포(生鮑)’ 또는 ‘뎐복’이라 표기하였는데 <97번 편지>를 보면 주로 생포는 회나 구이로 조리하였다. 당시 전복은 생것으로도 활용되었으나, 말린 건복(乾鰒)이 유통에는 훨씬 자유로웠다. Eumsikdimibang(飮食知味方)(Paek DH ed. 2003)에는 생전복을 오래 두려면 생전복에 참기름을 발라 단지에 넣고 또 참기름 한잔을 넣어 두면 오래 두어도 생것 같다고 하였다. 해삼도 역시 생것의 보관 방법이 마땅치 않았기에 말린 것을 마련해 두고 집안의 행사에 대비하였다. <72번 편지>와 <82번 편지>에는 해삼인 ‘믜’를 볶거나 생으로 만든 ‘믜볶기’와 ‘믜회’가 등장한다. 음식디미방에는 집안에 상비해 둔 마른 해삼을 손질하여 실제 조리에 응용하는 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 해삼의 활용이 많았다. 담치는 홍합(紅蛤)이다. 식용과 약용으로 두루 사용되었는데 주로 탕이나 조림으로 사용하였다. 대부분의 해산물은 맛이 짜지만, 홍합만은 싱겁기때문에 담채(淡菜)라 했다. Kyuhapchongseo(閨閤叢書)(Jung YW ed. 2012)에는 “홍합의 다른 이름은 동해부인(東海婦人)이다. 살이 흰 것은 수컷이고, 붉은 것은 암컷으로 맛이 더 좋다. 동해(東海) 것은 잘고 검지만 유익하기 때문에 으뜸으로 치고, 북해(北海) 것은 크고 살은 쪘으나 맛이 없다. 생으로 볶아서 국을 끓이면 매우 달고 담백하다.”고 하였다.

    ⑧ 양념류

    양념류에는 지령, 식초, 기름(참기름), 꿀, 조꿀, 정함가루가 있었다. <16번 편지>에서 접빈객을 위한 상차림에 술안주 외 간장, 식초, 기름을 빠짐없이 챙겨서 보내라 이르고 있다. 지령은 간장의 고어로, Eumsikdimibang(飮食知味方)(Paek DH ed. 2003), Siuijeonseo(是議全書)(Lee HG et al ed. 2004) 등의 음식조리서에 주로 등장하는 표현이다. 음식디미방에는 지령, 젼지령, ᄃᆞᆫ지령, 초지령, 지령국, 지령기ᄅᆞᆷ 등 지령에 대한 다양한 표현이 기록되어 있다(Nam at el. 2017). 기름은 5건의 편지에 기록되어 있었다. <29번 편지>는 출산을 앞둔 아내에게 약방문으로 ‘ᄎᆞᆷ기름’을 먹을 것으로 당부하였고, 나머지는 음식에 관한 내용에서 ‘기름’으로만 표현되어 있으나 모두 참기름으로 생각된다. <83번 편지>에서 곽주는 기름을 한 되 짜서 제수를 준비하며 하라고 당부했다. <134번 편지>와 <158번 편지>에서는 출가녀가 어머니에게 반찬거리를 보내는데 기름이 없어 자반을 지져서 보내지 못함을 아쉬워하는 것으로 보아 기름을 넉넉히 구비해 두기 어려운 형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꿀은 4건의 편지에 기록되었다. <64번 편지>는 접빈객을 위한 다담상차림의 곁반에 율무죽과 녹두죽을 올리는데 꿀을 담은 종지를 함께 올려 단맛을 원하는 분들을 위한 감미료용이었다. <29번 편지>와 <40번 편지>는 질병을 앓고 있는 아들의 치료와 분만을 앞둔 아내의 순산을 위한 약용이었다. <74번 편지>에는 조꿀이 등장한다. 편지의 내용으로 보면 조꿀은 천연의 꿀이 아니라 ‘집에서 만든 꿀’이라는 뜻으로 현재 우리는 조청이라 부르는 것이다. 곽주는 제사를 앞두고 꿀을 구하려 노력하였으나 허사가 되자 아내에게 당분이 있는 곡물을 고아서 꿀을 만들 것을 당부한다. 당시 진주하씨는 아직 조꿀을 만드는 법을 완전히 터득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래서 수영댁에게 배운 후 직접 해봄으로써 조꿀 만들기에 능숙해질 것을 바라며 재차 강조했다. 천연의 꿀이든 만든 조꿀이든 감미료가 있어야 찬물류 뿐 아니라 떡과 과자를 만들어 잔치 음식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KJFC-40-1-13_Inline-20.gif

    Juchanbang(酒饌方)(Paek DH & Park RD ed. 2020)에는 찹쌀이나 찰기장을 이용한 꿀을 만드는 법을 자세히 설명했다. 곡물가루에 보리엿기름과 누룩을 푼 물을 부어 반나절을 센불에 고고, 다시 반나절을 약한 불로 고아 만드는데 불을 천천히 때야 꿀이 되고, 너무 세면 흑당이 된다고 하였다. 즉 곡물의 당분이 전분분해효소에 의해 당화되어 식혜가 되면 이를 졸여 쓰기에 적당한 농도의 조청으로 만들 수 있었다.

    2. 현풍곽씨언간에 기록된 음식

    현풍곽씨언간에 기록된 음식의 종류는 &Table 2>와 같다. 편지에서 추출된 음식은 주식류, 찬물류, 병과류, 음청류, 주류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① 주식류(主食類)

    주식류에는 밥, 죽, 국수, 만두가 기록되었다. 밥은 총 5건에 기록되었는데 밥, 나락밥, 보리밥, 젯뫼였다. 쌀은 주곡으로 식사의 기본이었으나 흉년이 들어 환자쌀조차 구할 수 없을 때는 보리밥을 먹어야 했다. <65번 편지>에서는 제상에 올리는 젯뫼도 생전처럼 쌀에 보리와 팥을 섞어 지어 올리라 한 것으로 보아 형편이 오랫동안 여의치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죽은 동지(冬至)에 먹는 죽, 즉 액막이용 팥죽과 손님 접대를 위한 율무죽과 녹두죽이 있었다. Hunmongjahae(訓蒙字解)에는 율무를 ‘응이[薏苡]’라고 했다(Chung 2024). 율무를 갈아 수비한 앙금을 말렸다가 죽을 쑤었는데 지금은 이 율무죽 자체를 응이라고도 부른다. 임원경제지정조지(鼎俎志)(Lee HG et al ed. 2007)에는 녹두죽은 녹두를 물에 불려 맷돌에 곱게 갈아 가라앉혀 맑은 윗물을 버리고 가라앉은 앙금을 취해 햇볕에 말린다. 사용할 때 물이나 오미자국에 말려두었던 녹두가루를 풀어 죽을 쑨다.

    본문에서는 국수를 먹는다는 내용은 없으나, 3건의 편지에 혼례와 상례 시 특별식으로 국수를 만들기 위한 분주한 준비 과정을 볼 수 있다. 곽주는 <83번 편지>에서 “... 메밀· ᄒᆞᆫ되닷홉조차 면에 게 가늬”라고 했다. 면의 재료가 메밀이라는 뜻이다. 메밀은 제면성(製麪性)을 높이는 단백질 성분이 적어 메밀가루에 물을 부어 반죽을 하면 국수틀을 이용해 압착방식으로 제면을 해야 한다. 이때 100% 메밀보다 소량의 밀가루나 녹두가루를 섞으면 면이나 만두 작업이 수월했다. Eumsikdimibang(飮食知味方)(Paek DH ed. 2003)에는 아예 메밀 5되에 녹두 1복자를 섞어 제분하여 얻은 가루를 ‘면가루’라 하여 집에 상비하였다. Wonhaengeulmyojeongniuigwe(園幸乙卯整理儀軌)(Lee HG et al ed. 2021)에서 혜경궁에게 올린 국수도 메밀가루와 녹두가루를 6:1의 비율로 섞어서 만들었다(木末 三升 綠末 五合 生雉 一脚 黃肉 三兩 鷄卵 三箇 艮醬 五夕 胡椒末 一夕). 만두는 잔치를 하기 위한 준비 과정 <73번 편지>와 <76번 편지> 2건에서 확인된다. 곽주는 만두를 아주 좋게 만들어 보내라는 것으로 보아 만두를 빚는 솜씨까지 세세하게 일렀다. Yorok(要錄)(Anonymous 1680)에는 메밀가루로 만두피를 만들고 고기소를 넣어 구운 만두가(木麥細末作圓餠膏肉入槊裏之塗酉醬灸進), Eumsikdimibang(飮食知味方)(Paek DH ed. 2003)에서는 얇게 뜬 생선살에 석이, 표고, 꿩고기, 잣을 함께 섞고 다져서 간장과 기름으로 양념한 소를 넣고 녹두가루를 뿌려 빚은 어만두가 기록되어 있다.

    ② 찬물류(饌物類)

    찬물류에는 탕, 구이, 누르미, 볶음, 찜, 젓갈, 회, 자반, 침채 등으로 다양하였다. 탕은 꿩고기를 이용한 생치되탕이 2건의 편지에 기록되었다. 생치되탕은 <82번 편지>와 <97번 편지>에 두 번 등장한다. 모두 ‘물’이라 되어 있다. 곽주는 ‘물’ 또는 ‘믜물’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였는데, 이때의 뫼물은 일상의 음식 상차림이다. <82번 편지>의 매물은 연육, 양느르미, 생치되탕, 해삼볶기, 해삼회, 생선으로 6가지였다. <97번 편지>의 매물은 6가지는 동일하나 연육, 양느르미, 생치되탕, 해삼회, 생전복회, 담치볶기로 두 가지가 달라졌다. 또 안주로 염통산적, 생치구이, 생전복구이 3가지를 곁들이라 하였다. 생치는 탕(湯), 찜[蒸], 전(煎), 구이[炙], 포(脯), 침채(沈菜) 등의 조리법으로 찬물(饌物)로 활용되었는데, Wonhaengeulmyojeongniuigwe(園幸乙卯整理儀軌)(Lee HG et al ed. 2021)에는 생치탕(生雉湯), 생치숙(生雉熟), 생치연포(生雉軟泡)가 기록되어 있다. 생치탕은 꿩고기, 소고기, 무, 표고버섯, 다시마, 간장이 필요하지만, 생치숙은 꿩고기, 소고기, 후춧가루, 간장, 소금만 기록되어 있고, 생치연포는 갱으로 소용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재료는 기록되지 않았다. 생치되탕은 어떤 음식인지 구체적인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구이는 6건의 편지에 기록되어 가장 많은 빈도를 나타냈는데, 이는 접빈객을 위한 상차림용으로 꿩고기, 염통, 생선류, 전복 등이 사용되었다. 누르미는 수조육류나 채소류를 지져서 가루를 풀어 걸쭉하게 만든 양념을 끼얹은 음식으로, 1700년대 이전의 문헌에 주로 보인다. 곽주는 접빈객을 위한 상과 지사를 지내기 위한 제물로 누르미를 챙겼는데, 소의 첫 번째 위인 양[羘]으로 하는 누르미와 조개로 만드는 누르미가 있었다. Jeongildangjapji(貞一堂雜識)(Jungildang Nam 1856)의 양누르미는 양깃머리를 길쭉길쭉하게 썰어 녹말을 묻히고 끓는 물에 데쳐서 초간장 양념을 뿌려 만들었다. 청어는 <64번 편지>에서 손님상에 안주로 구워드리는 당부가 있고, <127번 편지>, <138번 편지>, <141번 편지>에서 출가녀가 어머니 하씨에게 편지와 함께 보낸 물품에 3번 기록되어 있었다. 임원경제지정조지(鼎俎志)(Lee HG et al ed. 2007) 할팽지류(割烹之類), 번적(燔炙)의 청어굽는법[炙靑魚方]에는 청어는 비늘이 있는 모든 생선과 같이 소금을 뿌려 센불 위에서 구으면 맛이 아주 좋은데, 소금을 뿌린 시간이 길어지면 맛이 없게 된다고 하였다.

    붕어찜은 <98번 편지>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는 거주지 주변의 강이나 하천에서 잡을 수 있는 민물고기의 수급이 원활했기에 붕어를 활용한 죽, 찜, 구이, 조림 등의 음식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중 가장 많은 활용은 찜이었다. Yorok(要錄)(Anonymous 1680)에 기록된 붕어찜[蒸鯽魚]은 “크거나 작거나 붕어의 등을 째고 등뼈와 갈비뼈를 모두 빼낸다. 여기에 무장(毋醬)과 밀가루와 참기름과 산초가루와 생강채와 파의 흰 부분 등을 섞어서 붕어의 배 속에 넣고 다시 꿰맨 후 찐다(或大或小割開脊背抽出脊脇骨毋醬和糆香油椒末薑絲葱白袋滿縫合蒸之).”고 하였다. Eumsikdimibang(飮食知味方)(Paek DH ed. 2003)에도 동일한 방법과 재료이나 무장이 ‘된쟝’으로 기록된 것만 달랐으니, 무장은 된장으로 해석된다. Somunsaseol(謏聞事說)(Baek SH et al ed. 2011)의 붕어찜(鮒魚蒸)은 방법은 같으나 붕어 뱃 속에 넣는 양념에 꿩, 닭, 돼지고기가 더 들어갔다.

    볶음은 ‘볶기’로 3건에 기록되었는데 해삼볶음과 홍합볶음으로 모두 제례나 혼례의 특별한 상차림에 올리는 찬이었다. Wonhaengeulmyojeongniuigwe(園幸乙卯整理儀軌)(Lee HG et al ed. 2021)에는 소고기나 닭고기뿐 아니라 천엽, 양, 콩팥, 골 등 육류 부산물을 활용한 볶기와 죽합볶기가 10회 이상 기록되어 있다.

    <38번 편지>에서 “... 스므날 졔예 식켜젓 미리 ᄃᆞᆷ기게 ᄒᆞ소 ...”로 제사용 식해를 미리 준비해 둘 것을 당부했다. 주(酒), 과(果), 포(脯), 해(醢)는 필수 제물(祭物)로, 조선 중기인 17세기까지 해(醢)는 주로 민물생선류를 이용해 담갔으며 꿩, 소양, 돼지껍질 등의 육류나 도라지, 죽순 등의 채소류로도 만들었다. 해산물로 만든 젓갈 중 식해(食醢)는 조선 후기 어업발달과 함께 보편화되었다(Shin & Park 2024). 주로 생선류를 이용해 젓갈을 담고 이를 제물로 활용했다. Sangayork(山家要錄)(Han BR ed. 2007)에는 생선, 양(羘), 돼지껍질, 꿩고기, 도라지, 죽순, 원미식해(元米) 등을 이용한 식해(魚醢, 羘醢, 豬皮食醢, 生雉食醢, 桔梗食醢, 元米食醢)가, Suunjapbang(需雲雜方)(Yoon SK ed. 1998)에는 천어(川魚)를 이용해 담그는 어식해(魚食醢)의 조리법이 기록되어 있다. Jubangmun(酒方文)(Lee HG et al ed. 2013)과 Yorok(要錄)(Anonymous 1680)에는 생선을 이용한 식해법(徑久食醢法)이 기록되어 있는데, 생선을 소금에 절였다가 물기를 거두고 밥과 소금을 섞어 저장하는 법이었다.

    달걀은 <98번 편지>에서 ‘ᄃᆞᆯ긔알 디지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디지니’는 ‘지지다’의 구개음화 과도교정형으로 ‘지짐이’로 해석된다(Paek 2019a). 즉 달걀지짐이를 만들어 상에 올렸다. 유사한 조리법으로, 이시필(李時弼)은 Somunsasul(謏聞事說)(Baek SH et al ed. 2011)에서 연경에서 맛본 ‘계단탕(鷄蛋湯)’을 소개하며 기름에 지진 달걀음식의 부드러움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이 같은 조리법은 Siuijeonseo(是議全書)(Lee HG et al ed. 2004)에는 건수란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Jubangmun(酒方文)(Lee HG et al ed. 2013)의 난적(卵炙)은 계란에 간장, 후추, 천초, 찹쌀가루 등을 넣어 고루 풀어서 대나무통에 넣고 찜통에서 익힌 후 꺼내 다시 기름에 지진 음식이었다. Juchan(酒饌)(Yoon SK ed. 1998)에는 어육, 초피, 생강 등을 만두소처럼 넣은 달걀을 지져내는 계란병이 있다.

    회는 생선이나 해삼, 전복을 이용한 생회로 7건 편지에 기록되어 당시 회를 즐긴 것으로 보인다. 오희문은 Swaemirok(Oh HM late 1500s )에서 생선을 선물 받았으나 겨자가 없어 회로 먹을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다(1597.10.06.). 당시는 고추가 상용화되기 전이니 회는 겨자장으로 즐겼다.

    자반은 총 6건의 편지에 등장하는데 <87번 편지>를 보면 기본적인 찬이었기에 <158번 편지>, <163번 편지>에서처럼 송신자가 수신자에게 마땅히 보낸 물건이 없을 때 궁여지책으로라도 아쉬운 마음을 표시하기 위해 보내기도 했다.

    KJFC-40-1-13_Inline-21.gif

    KJFC-40-1-13_Inline-22.gif

    <134번 편지>에서 “... 짐ᄒᆞ고 젼츄 자반ᄒᆞ고 보내노이다. 기ᄅᆞᆷ업서 몯 지져 보내ᄋᆞᆸ노이다...”라고 하여 자반은 일정 시기마다 장만해 두고 반찬이 없을 때를 대비하여 마련해 두었다. 자반의 종류에는 소금이나 간장으로 간을 해서 말린 소고기나 꿩고기, 소금에 절여 말린 반건 어물류, 말린 해조류도 만든 매듭자반, 미역자반, 김자반 등이 있다. 자반은 한자어로 ‘佐飯’인데 밥반찬이라는 의미로, 반상, 죽상, 주안상 등에 오른 반찬이었다. Myeongmulgiryak(名物紀略)(Park JY et al ed. 2015)에 좌반은 ‘자반’이라고도 하는데 생선을 소금에 절인 것이라 하였다(佐飯좌반, 轉云자반 塩魚). Sangayork(山家要錄)(Han BR ed. 2007)에는 송자(松子), 더덕[山蔘], 표고(蔈古), 참새[小雀]좌반이 기록되어 있는데 재료에 간장으로 양념하였다가 말려서 쓸 때 기름에 지져서 먹었다. 이중 더덕좌반[山蔘佐飯]은 Suunjapbang(需雲雜方)(Yoon SK 1998)과 Gyemiseo(癸未書)(Han BR & Kim GY ed. 2021) 등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좌반이다. Wonhaengeulmyojeongniuigwe(園幸乙卯整理儀軌)(Lee HG et al ed. 2021)에 기록된 좌반의 재료에는 민어(民魚, 不鹽民魚, 民魚煎), 광어(廣魚, 廣魚茶食), 조기(石魚), 청어(乾靑魚), 대구(大口茶食), 전복(全鰒包, 全鰒茶食), 어란(魚卵), 김(海衣), 꿩고기(藥乾雉), 육포(藥脯) 등 다양한 수산물과 육류뿐 아니라 장볶기(醬卜只)도 올랐다.

    자잡채는 <64번 편지>에서 ‘아ᄌᆞ바님’의 방문을 위해 준비하는 다담상차림의 음식으로 등장한다. 잡채는 특별한 날의 음식으로 많이 준비되었는데 자잡채는 한자어로 ‘煮雜菜’ 여러 가지 채소를 볶아서 만든 음식으로 추정되나, 다른 문헌에 기록된 바가 없어 정확한 형태는 알 길이 없다. Eumsikdimibang(飮食知味方)(Paek DH ed. 2003)에 기록된 잡채는 오이, 무, 댓무, 참버섯, 석이, 표고, 송이, 숙주나물, 도라지, 거여목, 박고지, 냉이, 미나리, 파, 두릅, 고사리, 당귀, 동아, 가지, 꿩고기 등의 갖은 재료를 각각 기름과 간장으로 볶고 천초, 후추, 생강 등으로 양념하고, 참기름과 밀가루가 들어간 진말국을 곁들인 음식이다. Wonhaengeulmyojeongniuigwe(園幸乙卯整理儀軌)(Lee HG et al ed. 2021)에는 잡채뿐 아니라 도라지잡채[桔梗雜菜]도 기록되어 있다.

    김치는 ‘짐’로 표기되어 4건의 편지에 있다. 김치는 <34번>, <80번>, <87번>편지에서 일상의 찬이었기에 곽주는 아내에게 여러 차례 담가서 보낼 것을 재촉하고 있다. 당시는 오이[苽], 가지[茄苽], 무[菁, 眞菁, 蘿蔔], 동아[冬瓜], 토란대[芋], 백채(白菜) 등을 이용한 김치가 주를 이뤘다. 특히 <16번 편지>에서는 손님맞이 상차림을 준비하며, 곽주는 아내에게 ‘나박짐 만히 ᄃᆞ마 보내소’라고 하였다. 월동무를 이용한 겨울용 동치미에 비해 나박김치는 무를 납작납작하게 썰어 일상적으로 담아 먹는 김치였다. Sangayorok(山家要錄)(Han BR ed. 2007)에는 ‘蘿薄’으로 조리법이 소개되어 있다. Paek(2019b)은 짐는 ‘딤’가 ‘짐’로 변화되는 단계에서 나온 말로, 16세기 말부터 경상도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ㄷ→ㅈ구개음화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김치는 딤→짐→짐츼→짐치→김치의 변화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보고하였다.

    KJFC-40-1-13_Inline-23.gif

    KJFC-40-1-13_Inline-24.gif

    KJFC-40-1-13_Inline-25.gif

    ③ 병과류(餠菓類)

    병과류로 떡류는 제사용 떡, 산승, 경단, 쑥떡으로 4종이, 과자류로는 세실과와 모과정과 2종이 기록되어 있었다. 떡은 5건에서 기록되어 있는데 2건은 제수용 떡이다. <83번 편지>에서 곽주는 보내는 쌀 중 떡에 사용할 멥쌀과 찹쌀의 분량을 명확히 제시하였다. 어떤 종류의 떡을 제수로 장만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녹두는 고물용으로, 팥은 떡소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74번 편지>도 역시 제물을 준비하는 내용인데 이 중 산승과 경단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기름 1되는 짜서 산승을 지지는 용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편은 멥쌀만으로 하면 쉽게 단단해지므로 멥쌀에 찹쌀을 섞어서 찌면 부드럽고 떡이 굳는 노화속도가 느려서 비교적 오래 두고 먹을 수 있었다.

    KJFC-40-1-13_Inline-26.gif

    산승과 경단은 제수용 편을 준비하고 그 웃기로 사용된 웃기떡 용도인 것으로 생각된다. 산승은 찹쌀을 익반죽하여 고루 치대어 매끈한 반죽이 되면 얇게 밀어 세 발 또는 네 발로 뿔나게 모양을 만들고 기름에 지진 후 즙청하여 잣가루와 계핏가루를 뿌린 떡이다. 찹쌀가루에 승검초가루[辛甘草], 감태(甘苔), 연지(燕脂), 치자(梔子) 등을 넣어 각색 산승을 만들기도 하였다. 궁의 잔치에서는 증병(沙蒸餠)이라 되어 있고(Jung et al. 2012), Eonmunhusaengnok(諺文厚生錄)(Anonymous late 1800s-early 1900s)에는 산승[莎蒸], Myeongmulgiryak(名物紀略)(Park JY et al ed. 2015)에는 ‘山僧餠 산승병, 莎蒸’이라고 하였다. 경단은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동그랗게 빚어 끓는 물에 삶아낸 후 콩, 깨, 대추채나 밤채 등의 고물을 묻힌 떡이다. <74번 편지>에는 제사를 위한 제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정함가루를 준비할 것을 당부했다. 정함은 콩가루로, 경단에 묻힐 고물이다. 정함의 한자어는 ‘丁含’으로, Yorok(要錄)(Anonymous 1680), Jubangmun(Lee HG et al ed. 2013), Taesangji(太常志)(A government compilation 1766) 등의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다. Yorok(要綠)(Anonymous 1680)에는 ‘경단병(敬丹餠)’를 만드는 법에 “찹쌀가루로 떡을 만들어서 삶아 익힌 후에 꿀물에 담갔다가 건져서 정함(丁含)을 바르고 그릇에 담아 꿀을 그 위에 붓는다(粘米末做餅烹熟,沉清蜜水極之, 塗丁含盛器, 加清。)”라고 하였다. Jubangmun(Lee HG et al ed. 2013)의 상화(霜花) 만드는 법에 정함을 떡소로 넣었고, Taesangji(太常志)(A government compilation 1766)에는 자박병(自朴餠)을 만들 때 찹쌀가루에 물을 넣어 반죽하고 여기에 정함, 꿀, 참기름을 섞은 소를 넣어 빚었다. 여기에 정함이 콩가루[太末]로 기록되어 있다. Siuijeonseo(是議全書)(Lee HG et al ed. 2004)의 경단은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밤만하게 빚어서 물이 끓을 때 삶아 건져 꿀을 바르고 콩가루를 묻힌다고 하였다. <16번 편지>에서 곽주는 쑥달임을 위해 다북쑥을 뜯고 매우 희게 찧은 쌀과 팥을 갈아서 보내라 했다. 연한 다북쑥을 이용해 쑥떡을 즐긴 풍속을 알 수 있다.

    세실과(細實果)는 제례(祭禮)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명칭으로, 조과류(造實果)로 판단된다. Ilseongnok(日省錄)(정조 16년 壬子(1792) 4월 9일, 정조 19년 乙卯(1795) 9월 19일)의 기록에 의하면 왕실 제례 시 소용되는 제기(祭器)에 면기(麪器). 갱기(羹器), 탕기(湯器), 건정과기(乾正果器), 수정과기(水正果器), 식해접시(食醢貼匙), 간람접시(看覽貼匙), 반상접시(盤床貼匙), 침채보시기(沈菜甫兒), 약과기(藥果器), 병기(餠器), 생실과대기(生實果大器), 생실과소기(生實果小器), 적기(炙器), 절육기(切肉器), 세실과기(細實果器), 세실과승(細實果升), 청밀보아(淸密甫兒), 종자(鍾子), 유대접(鍮大貼) 등이 기록되어 있다(Korean Intellectual Property Office). 약과나 정과를 담은 그릇이 별도로 있는 것으로 보아 세실과는 율란(栗卵)이나 조란(棗卵) 같은 숙실과류를 지칭한 명칭으로 보인다.

    모과정과는 고조리서에는 ‘모과거른정과’와 ‘모과쪽정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모과가 석세포가 많은 단단한 과실이므로 부드러운 질감으로 활용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Kyuhapchongseo(閨閤叢書)(Jung YW ed. 2012)에는 모과거른정과는 잘 익은 누런 모과를 무르게 푹 삶아 고운 체에 걸러서 꿀을 모과보다 많이 넣고 생강즙도 넣어 졸이는데 녹말을 되게 개어 넣고 조려야 빛이 곱고 잘 어린다고 하였다. 즉 이름은 정과이나 모과과편이다. 모과쪽정과는 모과를 무르게 삶아 삶은 국물은 싹 따라버리고 모과가 잠길 만큼 좋은 꿀을 넣어 졸인다. Siuijeonseo(是議全書)(Lee HG et al ed. 2004)에는 이렇게 만드는 모과는 잘 익어 못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 모과정과는 진연(進宴)•진찬(進饌)•진작(進爵) 등의 크고 작은 왕실 연회상에는 반드시 각색정과(各色正果)와 함께 올랐다.

    ④ 음청류(飮淸類)

    수정과는 접빈객을 위한 <64번 편지>에 다담상에 올리는 음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수정과는 생강과 통계피를 넣고 끓여 꿀로 단맛을 낸 후 곶감과 잣을 띄워 국물과 곶감을 함께 먹는 음료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궁중의 잔치를 기록인 Wonhaengeulmyojeongniuigwe(園幸乙卯整理儀軌)(Lee HG et al ed. 2021)를 보면 배에 통후추를 박아 꿀물에 끓인 배숙이나 꿀물에 채 썬 배와 유자를 넣고 석류알과 잣을 띄운 유자화채도 수정과라 칭하였다. 의궤(儀軌)에 비해 소규모 접대 음식이나 제사 등의 상차림 구성을 적어 놓은 Geongi(件記, 발긔)에도 두견수정과, 두충수정과, 복분자수정과, 사과수정과, 산사수정과, 배수정과, 앵두수정과, 은산사수정과, 준시수정과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Jung et al 2012). 따라서 조선시대 수정과의 재료는 생강, 계피, 석류, 감귤, 유자, 배, 연지, 꿀, 잣 등으로 다양했다. 곽주도 아내에게 수정과에는 석류 꼭 띄워야 함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 꿀물 화채일 가능성이 높다.

    ⑤ 주류

    주류로는 술, 제주(祭酒), 탁주(濁酒), 약주(藥酒), 소주(燒酒), 죽엽주(竹葉酒), 포도주(葡萄酒)가 기록되어 있었다. 술은 술, 좋은 술, 맑은 술 등으로도 기록되었는데, 접빈객을 위한 상차림을 준비하는 편지에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제례와 관례 등의 통과의례 시 필요하였는데 이는 상차림 부분에서 다시 서술하겠다. 또한 출가녀가 친정으로 보내는 편지에도 챙겨 보내는 물품에 자주 등장한다. <56번 편지>에서는 치전(致奠)을 위해 고리에 안주와 제주를 준비할 것으로 지시하고, <58번 편지>에는 “... 내 머글 것도 아ᄆᆞᆺ거나 ᄒᆞ여 내여 보내고 죵ᄃᆞᆯ 머글 탁쥬 술도 ᄒᆞᆫ 두롬이나 걸러내여 보내소. ...”라고 했다. 사달이라는 곳에 있는 곽주의 전답에 둑이 터져 이를 보수하기 위해 모인 노비들의 새참을 챙기는 곽주의 분주한 모습이 그려진다. 탁주는 맑은 술을 떠내지 않고 곡물로 빚은 그대로의 술이다. 술이 익으면 술 항아리에 용수를 박거나 체에 걸러 맑은 술을 얻는데 이것을 청주(淸酒) 또는 약주라고 했다. 탁주는 맑은 술을 떠내지 않고 그대로 빚는 것과 체에 밭쳐 놓고 주물러 걸러낸 것, 또는 맑은 술을 떠내고 남은 술지게미에 다시 물을 부어 다시 걸러낸 것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탁주는 막걸리, 탁백이, 막자라고 불렀고, Yeokkeoyuhae(譯語類解)(A government compilation. 1690)에는 훈주[渾酒]가 탁주(濁酒)라고 했다. 곡물이 있는 탁주(濁酒)는 종들의 허기를 달랠 수도 있었다. <132번 편지>와 <141번 편지>는 출가한 딸이 어머니 진주하씨에게 보내는 편지인데 소소한 반찬거리와 약주를 챙겨 보낸다는 내용으로, 친정 부모님에 대한 애틋함이 담겨있다. 소주는 <3번 편지>에서는 접빈객을 위해, <40번 편지>에서는 약방문으로 사용하였다. 소주는 양조주를 다시 증류하여 얻은 술이니 매우 귀한 술이었다.

    KJFC-40-1-13_Inline-27.gif

    <101번 편지>는 곽주가 쓴 양조법이다. 수신인이 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어 편지글이 아닌 단순한 양조법 기록일 수도 있다. 죽엽주와 포도주 방문인데, 양조법을 살펴보면 죽엽주는 단양주(單釀酒)이고, 포도주는 이양주(二釀酒)이다. 먼저 누룩 디디는 법을 설명했다. 누룩은 음력 4월에 여뀌물+기울 섞기→디디기→띄우기→말리기는 방법으로 제조하였다. 죽엽주는 찹쌀 1말 찌기→+가루누룩 1되7홉, 찬물 1말3되 섞기→3일 후 젓기→술이 맑아지면 쓰는 법으로 3일 만에 완성되는 속성주였다. 술 이름에 죽엽(竹葉)이 있으나, 재료에는 죽엽이 들어가지 않는다. Eumsikdimibang(Paek DH ed. 2003)에 기록된 죽엽주 양조법과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술 빛이 댓잎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였다. 포도주는 멥쌀 1말 찌기→+가루누룩 1되7홉, 찬물 1말 3되 섞기→3일 후 젓기→맑아지면 밑술 거르기→찹쌀 5되 찌기+가루누룩 1되를 섞어 덧술하기→맑아지면 쓰는 법으로, 술 빚는 시간은 약 12~15일 정도 소요된다. 역시 포도는 들어가지 않으니 술의 색이나 향으로 붙여진 이름이라 추측된다.

    KJFC-40-1-13_Inline-28.gif

    KJFC-40-1-13_Inline-29.gif

    보도쥬법, 뫼· ᄒᆞᆫ 마ᄅᆞᆯ 듀엽쥬법으로 비져서 ᄆᆞᆰ근 후에 즈의란 바타 ᄇᆞ리고 그 ᄆᆞᆯ근 수을로셔 비ᄌᆞ되 ᄎᆞ· 닷되ᄅᆞᆯ 실릐 셔 식거든 ᄀᆞᄅᆞ 누룩 ᄒᆞᆫ되ᄅᆞᆯ 섯거 그 ᄆᆞᆯ근 수레 비저 둣다가 ᄆᆞᆰ거든 라. 수이 면 열이ᄐᆞᆯ 마늬도 거니와 보ᄅᆞᆷ만이면 ᄀᆞ장 둇ᄂᆞ니라.

    3. 계량도구와 단위

    현풍곽씨언간에 기록된 계량 단위와 도구는 <Table 3>과 같다. 부피와 수량의 계량 단위와 도구가 기록되어 있었는데, 부피 단위로는 홉, 되, 말, 병, 두루미, 잔, 종지, 사발, 그릇, 당세기가 있었다. 홉[合]•되[升]•말[斗]은 곡식류의 계량 단위로 사용되었다. 당시의 부피 단위에 대한 정확한 용량은 알기 어려우나, 10홉이 1되이고, 10되가 1말이다. 되는 길되, 말은 댁말과 환잣말이 따로 구분되어 사용되었다. 길되는 여행길에 길에서 양식을 거래할 때 사용하는 되이다. 댁말은 ‘[宅]’+‘말’로 집에서 사용하는 말[斗]을 말한다. <10번 편지>에 의하면 당시 도량형에는 집에서 사용하는 도구와 외부 길에서 사용하는 도구의 부피 차이가 있어 길되로 서말 아홉되를 꾼 양식을 댁말로 너말을 주라는 사연이 확인된다. 말보다 큰 단위로 말의 10배에 해당하는 섬[石]이다. 왕실의 언간에는 자주 등장하나 사대부가의 언간에는 보기 어려워 당시 궁핍한 백성들의 삶에 그만큼 큰 단위의 양식 유통이 민간에서는 이루어지기 어려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KJFC-40-1-13_Inline-30.gif

    Goryeosa(高麗史)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문종(文宗)은 관청에서 쓰는 곡(斛)을 규격화하였는데 이중 말장(末醬)을 측정하는 곡의 경우 길이, 너비, 높이 등을 각 1척 3촌 9분으로 정했다. 이렇게 공납할 말장은 왕실이나 공무에 소용되었으며(Institute for the Translation of Korean Classics), 전쟁이나 기상재해로 피해를 겪은 이들이 발생했을 때 관에서 구휼품으로 사용하였다(卷84, 第38 刑法一, “文宗七年 判 內外官斛長廣高 方酌定 ... 末醬斛 長廣高 各一尺三寸九分 ...”). 조선에서는 15말(斗)를 1석(石)으로 하는 평석(平石)과 20말을 1석으로 하는 전석(全石)이 있었는데, 관(官)에서 세금을 징수하고 재정수지를 계산할 때는 15말 들이 평석을 쓰고, 민간에서는 20말 들이 전석을 사용하였다(Chung 2008). 조선시대 도량형(度量衡)은 세종(世宗), 영조(英祖), 대한제국 시기를 지나며 몇 차례의 개정이 일어났으므로 정확한 무게 환산은 어렵다.

    서유구는 Imwongyeongjeji(林園經濟志)Seomyongji(贍用志)(Imwongyeongje Research Institute ed. 2021)에서 “지금 민간의 말[斗]과 곡(斛)은 집집마다 제도가 다르다. 게다가 한 집 안에도 반드시 크고 작은 2가지 두(斗)를 두어서 받을 때는 큰 말[斗]을 쓰고 내줄 때는 작은 두를 쓴다. 이러한 방법으로 자잘한 이익을 이롭게 여기면서도 그것이 속임수를 키워 풍속을 무너뜨리는 일임을 스스로도 알지 못하니, 얻는 이익은 작지만 잃어버리는 신뢰는 크다. 일반적으로 원야(園野)에 땅을 골라 집을 짓고 일족이 모여 살거나,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규합하여 모임의 규약을 맺을 때는, 먼저 되와 말의 제도를 바로잡아 집집마다 서로 기준을 정하고 출납할 때는 되를 같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장재(張載)가 한 고을의 땅을 얻어 정전을 통해 실현하려고 계획했던 뜻이다.”라 하여 통일되지 않는 계량 도구 사용에 대한 도량형제도의 폐단을 지적했다.

    무엇보다 실생활에서 사용이 용이했던 부피 계량 도구는 잔, 종지, 사발 같은 일상에서 사용하는 그릇, 즉 생활형 도량형이었다. 꿀이나 기름 등의 양념류는 잔(盞)이나 종지[鍾子]로 계량하였고, 만두나 과실류는 그릇으로 단위를 표기하였다. 주류(酒類)의 계량 단위로 병과 두루미가 사용되었는데, 맑은 술은 병(甁), 탁주는 두루미 단위였다. 두루미는 목과 아가리는 좁고 길며, 배는 단지처럼 둥글게 부른 모양의 큰 병을 말한다. 정약용의 Aeongakbi(雅言覺非)(Kim JG ed. 2001)에 “선(鐥)이란 술을 되는 그릇으로, 우리나라에서 만든 글자이다. 지금 군현(郡縣)에서는 술 5잔(盞)을 대접하는 것을 1선(鐥)이라고 말한다. 우리말로는 대야(大也)라 일컫는 것이다.”라고 했다. 당세기는 멱둥구미를 일컫는 경상도 방언으로, 고리. 고리버들의 가지나 대오리 따위로 엮어서 만든다. 약을 담으면 약당세기, 바느질거리를 담으면 반질당세기, 옷을 넣으면 옷당세기가 된다. 곽주는 안주를 5~6가지 만들어 가까운 곳으로 보내야 할 때는 이 안주당세기를 이용하였다. 음식을 담아 운반하는 용도로도 사용한 것이다.

    수량을 나타내는 단위는 오리, 낱, 갈래, 마리, 뿌리, 개, 뭇, 두름, 갓, 단, 동 등이 쓰였다. 이 중 뭇, 두름, 단, 갓, 고지, 동은 묶음의 단위이다. 오리는 가늘고 긴 조각을 세는 단위인데 여기서는 쇠고기를 셀 때 사용되었다. 갈래는 갈라진 낱낱을 세는 단위로, 문어는 다리를 잘라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뭇[束]은 생선을 묶어 세는 단위로, 한 뭇은 생선 열 마리를 이른다. 두름[級]은 물고기를 짚으로 한 줄에 열 마리씩 두 줄로 엮은 것을 세는 단위인데, 경상도에서는 두루미라고 했다. 단은 짚, 땔나무, 채소 따위의 묶음을 세는 단위이다. 미역을 셀 때 쓰였다. 갓은 굴비, 비웃 따위나 고비, 고사리 따위를 묶어 세는 단위이다. 한 갓은 굴비나 비웃 따위를 열 마리, 또는 고비나 고사리 따위 열 모숨을 한 줄로 엮은 것이다. 고지는 호박, 박, 가지, 고구마 따위를 납작납작하거나 잘고 길게 썰어 말린 것을 이를 때 쓴다. 여기서는 감[柿]으로 고지를 만들고 이를 개당으로 센 단위로 해석된다. 동은 굵게 묶어서 한 덩이로 만든 묶음을 이르는 말인데, 마른 모과의 단위로 기록되었다.

    4. 조리도구

    현풍곽씨언간에 기록된 식기는 잔, 종지, 그릇, 사발 등이 있었으며, 조리도구는 면판, 스면누른판, 부디기, 체, 시루, 막대, 절굿공이, 방아 등이었다. <73번 편지>에서 곽주는 집안의 잔치를 앞두고 국수를 만들기 위해 이웃으로부터 면판과 절굿공이를 이웃에서 빌려 보낼 것을 당부했다. 국수를 만드는 방법에는 면가루에 물을 부어 찰지게 눌러가며 덩어리를 만들어 넓고 얇게 밀어서 칼로 써는 칼국수 즉 절면(切麵), 반죽을 국수틀에 넣어 반죽을 눌러 압착하여 국수가 뽑히면 바로 아래 뜨거운 솥으로 들어가 익게 하는 압면(押麵), 부드러운 반죽을 두 손으로 잡아당겨서 눌려 가늘게 만드는 납면(拉麵)이 있다. 메밀로 국수를 만들 때는 두 번째 방법이다. 그러니 국수틀은 제면에 중요한 도구였다. Imwongyeongjeji(林園經濟志)Seomyongji(贍用志)(Imwongyeongje Research Institute ed. 2021)에는 2가지의 국수틀에 대해 설명했는데, 첫번째는 큰 통나무를 깎아서 만드는 국수틀[麪子]이고, 두 번째 속성국수틀[急須麪子]은 쇠로 만든 원통을 만들고 바닥에 구멍을 뚫은 후 솥에 양쪽 걸쇠를 걸고 원통 안에 반죽을 넣어 면을 뽑는 방법이다. 속성국수틀은 힘을 받을 수 없으니 반죽을 부드럽게 하면 만들기가 쉽고, 메밀가루에 녹두가루[綠豆粉]나 칡가루[葛粉]를 섞으면 면을 뽑기 용이하다고 부연하였다.

    KJFC-40-1-13_Inline-31.gif

    스면누른판은 녹두가루를 풀어 박으로 만든 바가지에 구멍을 뚫어 세면(細麪)의 면발을 만드는 도구이다. Juchanbang(酒饌方)(Baek DH et al ed. 2020)에는 박 밑에 손가락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구멍을 3개를 뚫어 녹두만 것을 담아 왼손으로 추켜들고 오른손으로 박을 두드리며 구멍을 열어 끓는 물에 스면을 익히라 하였다. 녹말이 익으면 미끌미끌 부드러우니 깻국이나 오미자국에 말아 음료용으로 즐겼다.

    부디기는 <73번 편지>와 <76번 편지>에 ‘븨더기’라 표기되어 있다. Korean Unabridged Dictionary(국어대사전)에는 부디기는 “면을 만들 때 국수틀에서 압출된 면이 뜨거운 솥에서 익어 그 면을 건질 때 사용하는 도구이다. 1 m가량 되는 휘추리나 굵은 철사를 휘어서 두 끝을 잡아매고 여기에 굵은 베주머니를 길이 1.7 m가량 되도록 잡아매어 만들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Lee 2018). Kyuhapchongseo(閨閤叢書)(Jung YW ed. 2012)에는 ‘부듁이’로 기록되어 있다. 밥풀산자를 만들 때 말린 강반을 고물로 쓰기 위해 지질 때 사용하였다. 본문에는 “굵은 베 한자 너비를 싸리로 네 귀를 맨 것‘이라는 주(註)가 달려있다. 즉 얼이 굵은 베를 자루 모양으로 만들고 아가리에 굵은 철사나 나뭇가지 등으로 손잡이를 달아 오늘날의 망체처럼 사용한 기구이다. 뜨거운 물이나 기름을 이용하여 조리할 때 손쉽게 재료를 건질 수 있는 용도의 조리도구이다. Wonhaengeulmyojeongniuigwe(園幸乙卯整理儀軌)(A government compilation. 1795) 기용(器用)편에는 부디기(浮豆只)용 포(布)가 10자(十尺) 필요하다고 하였다. Imwongyeongjeji(林園經濟志)Seomyongji(贍用志)(Imwongyeongje Research Institute ed. 2021)에 기록된 거름망[漏杓]이 이와 같은 용도이다. Somunsasul(謏聞事說)(Baek SH et al ed. 2011)의 이기용편(利器用編)에 기록된 읍두구(揖豆㪺)도 유사한 용도인데, 쇠로 바가지 같이 만들어 수십개의 구멍을 뚫고 나무로 손잡이를 만들어 콩 같은 것을 삶을 때 흘러나가지 않게 하면 편리하다고 하였다.

    식품의 보관과 운반 도구로는 독, 항아리, 고리, 당세기, 소반, 상, 발상 등이 있었다. 이중 당세기가 4건, 고리가 3건 기록되어 있었다. 당세기는 고리의 경상도 방언이다. 고리는 키버들의 가지나 대오리 따위로 엮어서 만든 상자를 말한다. 지역에 따라 코리, 당시기, 당세기, 당세이, 당시게, 당쥐기, 당지깨 등으로 불렸다(National Institute of Korean Language). <34번 편지>에서 “... 고리를 발라 쓰라 하시니 발라 쓰게 하소...”라는 글이 나온다. Somunsasul(謏聞事說)(Baek SH et al ed. 2011)에서의 뉴골옹(杻骨瓮)은 튼튼한 싸리나무나 가시나무를 엮어 항아리를 만들고, 석회가루, 어저귀, 기름, 진흙을 섞어 속에 발라 말리면 기름을 담아도 새지 않는다고 하였다. 형량[荊条]은 가시나무 곁가지로 엮어서 곡식을 담는 용도로 만드는데 소의 분뇨나 석회가루, 어저귀를 진흙과 섞어 안쪽에 발랐다. 곽주의 집에서 고리를 만드는 법이 이와 유사할 것이라 생각된다. Swaemirok(瑣尾錄)(Oh HM late 1500s )에서 어떤 사람이 버들고리를 지고서 마을을 돌며 사라고 외치기에 행담(行擔)과 고리 3개를 보리씨 1두 6되를 주고 샀다고 하였다(권4, 1959년(乙未) 6월 21일). 진주하씨는 곽주의 요구가 있을 때마다 술, 안주나 먹을거리를 장만하여 당세기에 담아 소례 본가로 보냈다.

    KJFC-40-1-13_Inline-32.gif

    KJFC-40-1-13_Inline-33.gif

    KJFC-40-1-13_Inline-34.gif

    KJFC-40-1-13_Inline-35.gif

    KJFC-40-1-13_Inline-36.gif

    KJFC-40-1-13_Inline-37.gif

    소반은 <73번 편지>에서 곽주는 혼례에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하는 과정이 묘사되어 기록되어 있다. 그 중 “... 손반 발 드린 것 여ᄉᆞᆺ만 보내되 ...”라고 한 것으로 보아 소반은 발이 달린 것과 발이 달리지 않은 것을 용도에 따라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손반’은 소반의 오기로 판단된다.

    KJFC-40-1-13_Inline-38.gif

    5. 상차림

    ① 일상식

    ‘아ᄎᆞᆷ밥’, ‘뎜심’, ‘진지’ 등의 단어가 기록되어 있다. 주로 접빈객을 위한 식사 준비에서 나온 단어들로 아침과 점심에 손님께는 반드시 진지를 올려 끼니를 가르지 않도록 했다. 접빈객을 위한 상차림을 제외하면 곽주 일가가 평상시 어떤 음식으로 일상식을 영위했는지 정확히 예측하긴 어렵다. 하지만 현풍곽씨언간은 1600년대 초반의 기록으로, 당시는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의 긴 전쟁 끝에 식생활을 비롯한 백성들의 일상생활은 궁핍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곽주도 몇 차례의 편지에서 양가의 양식을 걱정하며 양식을 보내거나 보내줄 것을 전한다. 예로 <6번 편지>에서 “뎡냥이 골히디 마소. 양식은 년하여 보내려 ᄒᆞ시” 라고 하여 분가 초기 진주하씨는 양식이 넉넉하지 않은 상황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65번 편지>에서는 환자쌀마저도 구할 수 없어 쌀밥은커녕 보리밥도 못 먹을 형편이 되자 “배고프면 상감도 보리밥을 자시는데 상감만 못한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소”라고 했다. 또한 조선은 농사를 위한 우금령(牛禁令)이 계속 발효되었기에 육류를 이용한 고기 음식보다 강이나 연안에서 잡은 어물류와 채소 반찬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에 가장 유용한 찬은 ‘짐’였다. 곽주는 진주하씨에게 김치를 연하여 만들어 보내고 곽주도 요구했다.

    KJFC-40-1-13_Inline-39.gif

    KJFC-40-1-13_Inline-40.gif

    또 밑반찬으로 집집마다 자반을 마련해두고 먹어 늘 상비된 음식이었다. 그래서 가족 간의 편지가 오갈 때 보낼 물건이 마땅치 않을 경우는 자반이라도 챙겨 보내며 때로는 기름이 없어 지지지 못한 채 보내는 것을 민망해했다.

    ② 접빈객 음식

    현풍곽씨언간에는 약 19건의 편지에서 접빈객을 위한 분주한 채비 과정이 담겨있다. 곽주는 본인이 거주하는 소례마을이나 진주하씨가 살던 논공으로 방문하는 손님들을 위해 장만할 음식의 종류와 양은 물론 장보기, 식재료를 활용한 조리법 선택, 식기나 빈객 맞이에 필요한 물품 준비, 집안청소와 잠자리 준비, 타고 갈 이동 수단, 자녀들의 출입 단속, 아내의 옷차림새까지 세세히 지시하였다. 곽주가 맞은 손님은 아버님, 아자비 또는 아주바님으로 기록된 집안의 어르신들, 서울에 사는 친구, 벼슬아치, 신세를 진 절[寺]의 중, 혼례나 제례에 오신 손님 등 다양하다. 손님들 중에는 1박을 묵고 가기에 진지를 두 번 이상 차려야 하는 경우도 허다했고, 인원은 한 사람부터 13명, 30명 등으로 규모는 때때마다 상이했다.

    접빈객용 상차림이 가장 상세히 기술된 편지는 <64번 편지>이고, <3번>, <16번>, <63번>편지에도 준비할 식재료와 필요한 음식이 비교적 자세하다. <3번 편지>는 곽주의 집에 잔치나 특별한 용무가 있었고 여기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모습으로 추측된다.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을 보면 문어나 전복과 같은 해산물이 집에 상비되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문어는 한 갈래만 전복은 두 낱만 사용하도록 수량까지 지시하는 것으로 보아 내륙에 사는 곽주가 귀한 어물 관리를 철저히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63번 편지>에서 “초계 아ᄌᆞ바님 엿ᄌᆞ와 뫼초리나 새나 어더 조차 며 보내소. 모새 붕어도 금동이 ᄒᆞ여 잡아보라 ᄒᆞ소. 술 두병을 ᄂᆞᆷ의게 어들만뎡 됴ᄒᆞ니로 두병을 보내소”라고 하여 비상 시 집에 없는 재료는 이웃에 빌리기도 하고, 식재료를 친지에게 구하기도 하였다. 또한 <3번 편지>에서 '조개도 자바 왓거든' 혹은 <63번 편지>에서 ‘모새 붕어도 금동이 ᄒᆞ여 잡아보라 ᄒᆞ소’라고 한 것으로 보아 가까운 강가나 못에서 민물조개나 민물생선을 잡아 찬거리로 애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KJFC-40-1-13_Inline-41.gif

    KJFC-40-1-13_Inline-42.gif

    <82번 편지>, <97번 편지>, <98번 편지>에는 손님들에게 제공되는 음식이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이 유사하다. 기본 상차림에는 여섯 가지 음식을 올라가고, 식사가 시작되면 술안주로는 첫째, 둘째, 셋째 순서로 술을 드시는 것을 보아가며 시차를 두고 안주를 올린 것을 알 수 있다. <82번 편지>에는 연육, 양느르미, 생치되탕, 믜볶기, 믜회, 생선, <97번 편지>에는 연육, 양느르미, 생치되탕, 믜회, 생포회, 담치볶기에 염통산적 → 생치구이 → 생포구이가 안주로 순차적으로 제공되었다. <98번 편지>에는 누치생선, 진어생선, 붕어찜, 달걀지짐이에 술안주로 금린어구이 → 회 → 잔생선구이를 내라 했다. 이 세 건의 편지를 종합해 보면 곽주의 집에서는 연육, 양느르미, 생치되탕, 해삼회나 볶기, 전복회나 볶기, 갖은 생선구이와 찜이 주로 접빈객을 위한 음식으로 제공된 것을 알 수 있다. 현풍곽씨언간에는 ‘믈’ 또는 ‘믜믈’이 자주 등장한다. 뫼물은 통상 제물(祭物)을 뜻하는 단어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잔치나 손님치레용 음식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Worinseokbo(月印釋譜) 21:125(King of Sejo(世祖). 1459)에 “산 것 주겨 眷屬 뫼 홀”라 하여 뫼가 진지의 뜻으로 풀이 되었고, Yeokkeoyuhaebo(譯語類解補)10(Kim HC(金弘喆). 1775)에도 “뫼 들이다 供飯” 진지를 올리다라는 뜻으로 해설되어 있다. 따라서 <21번 편지> ‘믈ᄒᆞᆯ’의 뫼물은 제물, <72번 편지> ‘믜므ᄅᆞᆫ’, <82번 편지> ‘므ᄅᆞᆫ’, <97번 편지> ‘믈’, <98번 편지> ‘믜믈’은 접빈객용 음식으로 생각된다.

    곽주는 손님 접대용 상차림 중 진지상과 다담상을 구분하고 있다. Mokminshimseo(牧民心書)예전(禮典)의 기록에 의하면 “오늘날 풍속에는 향례(饗禮)- 곧 다담(茶啖)-에 밥을 쓰지 않으니, 떡 종류 6가지와 국수ㆍ만두로써 8궤에 충당하고, 사례(食禮)에는 떡을 쓰지 않으니 비록 태뢰의 찬(饌)이 있다 하더라도 다만 홍백(紅白) 두 그릇의 밥만을 갖추고 그 이상 더하지 말 것이다.”라고 했다(Institute for the Translation of Korean Classics). <64번 편지>에는 손님 접대를 위한 진지상, 다담상과 곁상, 술안주 제공 순서까지 매우 자세하다. 다담상에는 절육. 세실과. 모과정과. 홍시. 자잡채. 석류를 띄운 수정과로 총 6가지 음식, 곁상에 율무죽과 녹두죽 2가지에 꿀을 반드시 올리고, 다시 술안주를 꿩고기구이, 대구구이, 청어구이를 차례로 구워드리도록 세세히 당부했다. 뿐만 아니라 진주하씨는 머리를 꾸미고 가리매를 써서 단장을 하고 있을 것을 강조했다.

    KJFC-40-1-13_Inline-43.gif

    <17번 편지>, <19번 편지>, <21번 편지>에는 집안의 일들을 도와주는 중들에게 먹일 맑은술과 소안주를 장만하여 보낼 것을 당부했다.

    KJFC-40-1-13_Inline-44.gif

    KJFC-40-1-13_Inline-45.gif

    KJFC-40-1-13_Inline-46.gif

    <25번 편지>와 <62번 편지>에서는 손님이 집에 당도하기 전 대청마루, 뜰, 방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방에 불을 지려 따듯하게 하고 이부자리를 곱게 깔아두라 이른다. 또 <90번 편지>에서는 손님이 계실 때 아이들의 출입을 단속하여 행동 범절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25번 편지>에서 손님들이 나루터에 당도하면 타고 갈 수 있는 소[牛]를 구하여 대기시키라 하고, 시장에서 손님맞이 장보기를 철저히 하여 대접에 소홀함이 없도록 할 것을 당부하지만 혼자 손님맞이 준비에 분주할 아내를 생각하며 ‘자네 혼자서 어찌할꼬’라고 걱정하기도 하였다.

    KJFC-40-1-13_Inline-47.gif

    KJFC-40-1-13_Inline-48.gif

    <61번 편지>과 <65번 편지> 에서는 손님의 진지를 부디 먹음직하게 잘 차려내고, 여러 명의 손님일 경우 상차림이 공평하게 똑같이 제공되어 손님의 마음이 상하지 않아야 함을 강조했다.

    KJFC-40-1-13_Inline-49.gif

    ③ 시절식

    시절식으로는 봄철의 쑥달임과 동짓달의 팥죽 먹는 풍속이 확인된다. <16번 편지>에 기록된 쑥달임은 따스한 봄날에 갓 피어난 쑥을 캐어 떡을 하여 먹고 즐기는 놀이를 말한다. 우리 선조들은 청명(淸明)을 즈음하여 갓 올라온 쑥을 캐서 쑥국을 끓이고 쑥버무리, 쑥인절미 등의 쑥떡을 해 먹으며 봄을 즐기고 건강을 챙겼다. 곽주는 이웃의 어르신들이 쑥달임을 하라하시니 새벽에 쑥을 캐어 보낼 것을 아내에게 기별했다. 참쑥은 질기니 연한 다북쑥으로 골라서 캐고, 떡쌀과 팥을 보내라 한 것으로 보아 팥을 고물로 한 쑥설기를 할 요량으로 보인다.

    KJFC-40-1-13_Inline-50.gif

    조선 중기의 문신 김광욱(金光煜, 1580~1656)이 지은 시조인 율리유곡(栗里遺曲)에 ‘쑥달임’이 등장한다. “최행수(崔行首) 쑥달임하세, 조동갑(趙同甲) 꽃달임하세, 닭찜 게찜, 올벼 점심은 날 시키소, 매일(每日)에 이렇게 지내면 무슨 시름이 있으랴” 라고 하여 자연과 순응하며 살고자 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Kwon 1999).

    <7번 편지>에서는 “... 열이튼 나리 동지라 ᄒᆞ니 아라셔 쥭 수워 잡ᄉᆞᆸ게 ᄒᆞ소. ...”라 했다. 전통사회에서 동지(冬至)는 아세(亞歲)라 하여 한 해의 시작으로 여겨진 명절이었다. 동지 팥죽은 양기(陽氣)의 회생(回生)을 위하고, 나쁜 악귀를 물리칠 수 있는 벽사(辟邪)를 의미를 담고 있다(Kim 2010).

    ④ 통과의례 음식

    현풍곽씨언간의 기록에는 생일(生日), 관례(冠禮), 혼례(婚禮), 상례(喪禮), 제례(祭禮) 등 유교적 이념을 실천하는 가례(家禮)의 핵심 통과의례(通過儀禮)와 그에 따른 의례 음식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39번 편지>는 첫돌을 맞은 대임이의 생일에 대한 이야기이다. 대임이는 둘째 아들 곽의창의 아명이다. 대임이의 생일에 곽주는 가질 못하였는지 돌잡이로 무엇을 잡았는지를 궁금해한다. 영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과거 첫돌 맞이는 매우 의미있는 일이었다. 돌상에 차려진 물건들을 잡는 것을 보고 그 아이의 장래를 예측해 보는 일은 이미 당시에도 익숙한 풍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쉽게도 첫돌 상차림에 대한 언급은 없다.

    관례는 전통시대 남자들의 성인식으로, 아이들이 자라 15-20세가 되면 어려서부터 땋아 내렸던 머리를 올려 상투를 틀어 주는 의식이다. <55번 편지>에 나오는 초거례는 관례 중 첫 번째 절차로, 오늘날은 ‘초가례(初加禮)’라 부르나, 이 편지는 ‘초거례(初擧禮)’의 의미로 적은 것으로 보인다. 곽주의 자녀들 중 관례를 치룰 정도이면 전처 소생의 곽이창의 관례인 것으로 생각된다. 관례는 마을의 어르신들과 의논하여 미리 택일을 하고, 의식이 거행되었으며, 관례 의식을 마치고 나면 준비한 음식을 서로 나누며 축하를 한 것을 알 수 있다. 곽주는 고을 어르신들이 오시니 안주를 보기 좋게 마련하여 보낼 것을 당부한다. 곽주는 술안주로 절육(截肉)을 준비해야 하니 장에 가서 대구나 절육거리가 될 만한 생선을 사오라 일렀다. Wonhaengeulmyojeongniuigwe(園幸乙卯整理儀軌)(Lee HG et al ed. 2021)의 진찬상의 절육은 황대구(黃大口)나 건대구(乾大口), 홍어(洪魚), 상어(沙魚), 광어(廣魚), 문어(文魚), 전복(全鰒), 염포(鹽脯), 추복(搥鰒), 오징어(烏賊魚), 건치(乾雉)를 높이 쌓은 것으로, 다른 음식보다 높이 1자[尺] 5치[寸]나 고였다. 절육은 말린 어포, 말린 오징어나 문어, 건전복, 육포, 건치포 등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오려 잔칫상에 고여 올렸다.

    KJFC-40-1-13_Inline-51.gif

    <61번>, <69번>, <72번>, <73번> 편지는 곽주 집안의 혼례가 있어 이를 준비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69번 편지>에서는 집에서 혼인에 쓰는 책을 찾아서 보내라 하고, <61번>과 <73번 편지>에서는 혼례에 필요한 의복류, 차양, 면판과 절굿공이, 그릇, 조리도구 등을 친인척에게 빌린다. 이때 차용한 물품들은 각각의 출처를 물건 뒤에 반드시 기록하여 돌려줄 때의 편리를 꾀했다.

    KJFC-40-1-13_Inline-52.gif

    혼례 준비를 위해서는 음식 마련이 우선이었는데 <61번 편지>에서 곽주는 진주하씨에게 어물장수가 방문하면 어물을 잘 준비할 것을 이른다. 해삼, 생전복, 홍합, 대구알, 고둥 등의 해물을 구하려 했지만, <72번 편지>에서 그것은 여의치 않게 되었다. 곽주는 애초에 생각했던 다양한 어물 대신 집에 비축하고 있던 해삼과 생선, 염통과 꿩고기로 음식을 갈음하기로 한다.

    KJFC-40-1-13_Inline-53.gif

    KJFC-40-1-13_Inline-54.gif

    혼례 시 잔치에 오신 손님들께 면을 만들어 국수를 말아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곽주는 면판과 면고 등을 빌리는 것을 특별히 신경 쓴 것으로 보아 당시 집집마다 국수틀을 두고 쓰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1번>, <56번>, <57번>, <96번>, <103번>편지는 상례에 대한 내용이다. <21번 편지>는 노비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안묘제(安墓祭)를 위해 제물을 성의껏 챙겨주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비록 집에서 부리던 노비였지만, 애도의 뜻으로 가장 좋은 술을 주고 면가루를 건네어 국수도 마련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56번>과 <57번>편지는 친인척의 상(喪)의 치전(致奠)을 위해 고리에 안주와 제주(祭酒)를 준비할 것으로 지시한다. 치전은 친척이나 지인 같은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 제물(祭物)이나 제문(祭文)을 마련하여 문상하는 일을 말한다(Jung 2010). 치전에는 주(酒)와 과(果)를 준비하며, 향(香), 차[茶], 촉[燭] 등을 올렸다. <57번 편지>에서는 곽주는 하루에 공주댁과 초계댁 두 곳에 치전을 올려야 했다. 두 댁의 치전 제물에는 차등을 두어야 했는지 곽주는 각각의 댁으로 갈 제물이 섞이지 않도록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 <96번 편지>와 <103번 편지>는 송수신자는 없고, 누군가의 장례를 위해 현훈(玄纁)과 구의(柩衣) 마련에 필요한 천의 분량과 상을 당하자 이웃에서 부조한 과실(果實)의 목록이 기록된 메모이다. 다섯 집에서 보내온 과실은 감, 석류, 모과, 호두였다. 감은 한 접씩이지만 다른 과실은 낱개로 그 양이 많지 않아 궁핍한 삶에 서로 십시일반한 모습이다. 하지만 곽주는 이를 잘 메모해 두었다가 자신도 예(禮)를 다해야 할 때를 대비한 것으로 생각된다.

    KJFC-40-1-13_Inline-55.gif

    제례에 대한 기록은 13건이 확인된다. 이 중 제물 마련에 대한 언급은 8건이다. <38번 편지>에서는 제사를 위한 식해(食醢)를 미리 담그라는 당부였고, <65번 편지>에서는 쌀을 구하기 어려워 젯뫼도 쌀에 보리와 팥을 섞어 밥을 지어 올리라 하였다. <83번>에서는 제사를 위한 떡을 하기 위한 편(䭏)쌀과 국수를 위한 메밀쌀을 보내고, <87번 편지>에서는 어머님의 식가제(式假祭)와 수리제(수리祭)에 쓸 포육(脯肉)을 미리 장만해 두라 하였다. <109번 편지>에서는 아들 유창이 어머니 하씨에게 제사에 입을 의복을 요청하며, 다른 이의 제사에 쓰고 남은 소고기를 보내노라 기별하고, <118번 편지>는 곽주의 장모인 합산댁이 곽주의 어머니 박씨에게 제물을 차려 보낸다는 내용이다. 진주하씨의 친정어머니 벽진이씨는 친정마을 지명을 따라 합산댁이라고도 불렸고 사돈간에 집안의 대소사에 서로 음식을 보내며 마음을 교류한 것을 알 수 있다. <119번 편지>와 <155번 편지>에서는 제사를 앞두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제수 마련을 위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사돈과 출가녀가 편지로 전하였다.

    KJFC-40-1-13_Inline-56.gif

    KJFC-40-1-13_Inline-57.gif

    KJFC-40-1-13_Inline-58.gif

    KJFC-40-1-13_Inline-59.gif

    6. 약방문

    현풍곽씨언간에는 두창, 홍역, 계절별로 나타나는 전염병 등에 따라 외출을 삼가거나 환자와 멀리 떨어진 곳에 몸을 피하여 조심하는 내용들과 종기, 곽란, 두통, 복통, 급체, 감기, 기침, 귓병, 눈병 등으로 가족들이나 노비가 고생하여 안부를 묻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4번 편지>에서 곽주는 귓병을 앓는 정렬이의 귀에 웅담(熊膽)을 넣으라고 지시하였다. 웅담은 곰의 쓸개즙[膽汁]이 담긴 담낭을 적출하여 말린 약재이다. 웅담은 청열해독(淸熱解毒)작용이 있어 염증에 요긴하게 사용되었다(Traditional Korean Medicine DB). 마른 웅담을 소량씩 미세한 가루로 내어 볏짚같은 작은 대롱을 이용하여 염증이 있는 부위에 입으로 불어서 도포하였다.

    <29번 편지>에서 곽주는 진주하씨의 출산을 앞두고 산기(産氣)가 있을 시 즉시 자신에게 기별을 하고, ‘꿀’, ‘참기름’, ‘염소도 종이에 싼 약’을 보내며, 산기가 돌면 바로 먹을 것을 권했다. 꿀과 참기름은 재료가 가진 미끄러운 속성 때문에 산모의 몸을 윤활하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경험방에 의한 믿음 때문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기록된 ‘염소도 종이에 싼 약’은 한의학 산과(産科) 전문의에게 문의한 결과 ‘달생산(達生散)’ 대한 기록이라는 조언을 받았다. 예로부터 임신부는 해산을 앞두고 순산을 돕기 위한 달생산이나 불수산佛手散)을 준비하고, 해산한 산부의 몸을 다스릴 미역[長藿]을 준비하는 풍속이 있었다. 달생산의 ‘達’은 Sulmunhaeja(說文解字)에 ‘어린양’이라 하였으니 양을 사육할 수 없었던 우리나라의 경우 염소의 의미로 쓰였다(ShuoWen). Somundaeyo(素問大要)Somunbusul(素問附說)의 ‘부인(婦人)’ 편에 순산을 돕고 산전 산후에 병증을 치료하고 예방하기 위한 달생산(達生散) 복용에 대한 글(臨月瘦胎 瘦胎如生達, 臨月瘦胎如生達 産前産後隨證行)의 주석에 “산달이 되어 태(胎)를 여위게 하면 염소가 순산하듯 쉽게 출산할 수 있다. 산전과 산후에는 증에 따라 치료한다.”라고 하여 염소를 비유하고 있다(Kim et al 2004). 즉 곽주는 아내 진주하씨의 순산을 위한 약 달생산을 준비하여 보낸 것을 알 수 있다.

    KJFC-40-1-13_Inline-60.gif

    <38번 편지>에서 기침을 계속하는 말을 위해 노비에게 지렁이를 날마다 잡아 먹일 것을 당부하였다. Donguibogam(東醫寶鑑) 권4 내경편(內徑編)에 의하면 지렁이는 구인즙(蚯蚓汁)이라 하여 한방에서 기(氣)를 통하게 하는 용도로 사용된 약재인데 동물에게도 경험방에 의한 처방을 한 것으로 보인다(Traditional Korean Medicine DB).

    석웅황(石雄黃)은 웅황(雄黃)이라고도 하는 천연 산출 광물이다. 등황색 또는 황색을 띄는데 주로 외용약으로 바르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곽주는 <40번 편지>에서 둘째 아들 의창(아명 대임이)이 종기를 나서 앓자 꿀을 탄 소주와 석웅황, 마른 모과 등으로 치료하였다. 명종실록(明宗實錄)(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에 “평안도 삼등(三登) 등의 고을에 전염병이 크게 성하였다. 석웅황(石雄黃)을 쓰면 전염되지 않는다고 하니, 이 약을 보내도록 하라.”(명종 3년 6월 27일)라고 한 것으로 보아 널리 사용된 약재였다. Jeungbosallimgyeongje(增補山林經濟)(Rural Development Administration ed. 2003)에는 두창(痘瘡)의 치료에 쓰였다. 석웅황은 살충(殺蟲)과 해독작용이 있어 피부질환에 사용되었다. 석웅황 중심에 끈을 꿰어서 부녀자들이나 아이들의 장식구로 의복에 차고 다니기도 하였다(Kim 2015).

    KJFC-40-1-13_Inline-61.gif

    Ⅳ. 요약 및 결론

    현풍곽씨언간은 경상북도 달성군 현풍면에 세거하는 현풍 곽씨 집안의 진주하씨 묘에서 출토된 한글 편지이다. 현전하는 현풍곽씨언간 총 176건 중 식생활 관련 기록이 나타나 있는 편지는 83건으로, 전체 언간의 47.16%였다. 주요 발신자인 곽주는 떨어져 사는 아내 진주하씨에게 편지를 통해 집안의 대소사를 의논하였고, 모자, 모녀, 부녀, 장모와 사위, 사돈간에 안부와 소통이 수많은 편지를 통해 이루어졌다. 본고는 현풍곽씨언간에 담긴 식생활 양상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현풍곽씨언간에서 곡류는 총 45건으로 쌀, 찹쌀, 보리, 메밀 등이었으며, 이 중 쌀에 대한 기록이 가장 많았다. 누룩, 엿기름, 면가루, 기울 등의 곡류가공품을 활용하기도 하였다. 두류는 콩, 팥, 녹두와 그 가공품으로 스면가루가 있었는데, 특별한 날의 잔치음식 재료로 쓰였다. 채소류는 쑥, 생강, 자총이, 여뀌, 조피로 소략하고, 해조류로는 김과 미역이 있었다. 과실류는 석류, 감, 모과, 호두, 밤이 기록되어 있고, 이중 감과 모과의 언급이 가장 빈번하였다. 감은 조홍 또는 홍시로 기록되었고, 모과는 모과정과로 먹거나 말려서 약재로 활용되었다. 수조육류로는 쇠고기, 생치, 건치, 닭, 메추라기, 새가 기록되었는데, 꿩고기의 활용이 가장 많았고, 이는 매사냥으로 공급되었다. 어패류로는 대구, 청어, 조기, 광어, 삼치, 준치 등의 바다생선과 붕어, 누치 같은 민물생선이 고루 있었다. 이 중에는 대구가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일상적으로 육류보다 어패류의 활용이 더 많았다. 양념류에는 지령, 식초, 기름, 꿀, 조꿀, 정함가루가 있었다. 지령은 간장의 고어이며, 조꿀은 곡물을 당화시키고 졸여서 만든 꿀인 조청으로 천연의 꿀을 대체한 감미료였다.

    주식류에는 밥, 죽, 국수, 만두가 기록되었다. 쌀에 대한 기록이 가장 많았지만, 춘궁기에는 보리밥을 먹었다. 손님을 위한 다담상에는 율무죽과 녹두죽도 올랐다. 집안의 잔치에는 국수가 주인공이었는데 메밀을 이용해 제면해야 하므로 국수틀을 준비했다. 찬물류는 탕, 구이, 누르미, 볶음, 찜, 젓갈, 회, 자반, 침채 등으로 다양하였다. 떡류로는 제사용 떡, 산승, 경단, 쑥떡이, 과자류로는 세실과와 모과정과가 기록되어 있었다. 떡과 과자는 제사와 잔치, 시절식용으로 소비되었다. 수정과는 접빈객을 대접하는 음료였고, 주류로는 술, 제주, 탁주, 약주, 소주가 등장하였는데, 죽엽주와 포도주는 편지글 형식이 아닌 양조법이 기록되었다.

    현풍곽씨언간에 기록된 계량 단위와 도구는 부피 단위로는 홉, 되, 말, 병, 두루미, 잔, 종지, 사발, 그릇, 당세기가 있었고, 곡식류의 계량에는 홉•되•말 단위가 사용되었다. 수량을 나타내는 단위는 오리, 낱, 갈래, 마리, 뿌리, 개, 뭇, 두름, 갓, 단, 동 등이 쓰였다. 식기는 잔, 종지, 그릇, 사발 등이 있었으며, 조리도구는 면판, 스면누른판, 부디기, 체, 시루, 막대, 절굿공이, 방아 등이었다.

    19건의 편지에서 접빈객을 위한 상차림 준비과정이 담겨있었다. 곽주는 손님들을 위해 장만할 음식의 종류와 양은 물론 장보기, 식재료를 활용한 조리법 선택, 식기나 빈객 맞이에 필요한 물품 준비, 집안청소와 잠자리 준비, 타고 갈 이동 수단, 자녀들의 출입 단속, 아내의 옷차림새까지 세세히 지시하였다. 접빈객용 상차림은 여섯 가지 음식을 기본으로 차리고, 식사가 시작되면 세 차례 정도 안주를 나누어 제공하였다. 시절식으로는 봄철의 쑥달임과 동짓달의 팥죽 먹는 풍속이 확인된다. 또한 유교적 이념을 실천하는 통과의례는 곽주의 둘째 아들 의창의 돌잡이 풍속, 첫째 아들 이창의 관례 준비, 집안의 혼례를 위한 다양한 준비와 큰일을 치루는 과정에서 이웃이나 친인척간의 십시일반 돕는 우리의 전통풍속을 살펴볼 수 있었다. 곽주는 지인의 상사를 맞아 제주와 제물을 준비하여 치전을 올렸으며, 노비의 죽음에 좋은 술과 국수거리를 내어주며 애달픈 마음을 표시하였다. 곽주 집안의 상사 때에는 이웃에서 받은 부조 물품을 빠짐없이 기록하여 보답하고자 했다. 집안의 제사가 있을 때는 사돈집에서 제물을 보내오기도 하고, 미리 식해와 떡 같은 제수거리를 마련하였다. 양식이 부족할 때는 젯뫼도 잡곡밥을 올렸다. 집안에 아픈 환자 치료와 출산, 전쟁으로 인한 전염병 치료를 위해 생강과 마른 모과가 늘 상비되어 있었고, 참기름, 꿀, 석웅황, 웅담 등이 약방문으로 쓰였다.

    현풍곽씨언간이 기록된 17세기 전반의 조선은 왜란과 호란으로 인한 여파가 채 가시지 않아 사회․경제적으로 곤궁한 상황이었으나, 한 사대부가의 가장과 아내가 웃어른들을 모시고 자식들을 건사하며 성리학적 예를 다하며 살림을 꾸리는 모습이 잘 담겨있었다.

    감사의 글

    이 논문은 2023년도 전주대학교 연구년 지원에 따라 이루어졌음.

    저자 정보

    차경희(전주대학교 한식조리학과, 교수, 0000-0003-4400-3863)

    Conflict of Interest

    No potential conflict of interest relevant to this article was reported.

    Figure

    KJFC-40-1-13_F1.gif

    Letter No. 64 (26.3×18.4 cm) of the Hyeonpung Gwakssi Eongan

    Source: Paek DH ed. Hyeonpung Gwakssi Eongan revised edition. p 658

    KJFC-40-1-13_F2.gif

    Letter No. 73 (29.8×23.2 cm) of theHyeonpung Gwakssi Eongan

    Source: Paek DH ed. Hyeonpung Gwakssi Eongan revised edition. p 652

    Table

    Food ingredients and their processed products in theHyeonpung Gwakssi Eongan

    Foods in theHyeonpung Gwakssi Eongan

    Measurement Units and Tools in the「Hyeonpung Gwakssi Eongan

    Reference

    1. Anonymous. 1680. &#x300E;Yorok (要錄)&#x300F;. Korea
    2. Anonymous. the late 1800s~early 1900s.&#x300E;Eonmunhusaengnok (諺文厚生錄)&#x300F;
    3. Anonymous.&#x300E;Jubangmun (酒方文)&#x300F;. In: Lee HG editor. 2013. Kyomun publisher. Kyounggido, Korea, pp 131, 136
    4. Anonymous.&#x300E;Gyemiseo (癸未書)&#x300F;. In: Han BR & Kim GY editors. 2021. Sunildang Co., Seoul, Korea, pp 87, 102
    5. Anonymous.&#x300E;Juchan (酒饌)&#x300F;. In Yoon SK editor. 1998, Shingwang publisher, Seoul, Korea, pp 274
    6. Anonymous.&#x300E;Juchanbang (酒饌方)&#x300F;. In: Paek DH, Park RD, Hong MJ, Kim MJ, Ahn JH, Jung SH, Bae EH, Song GH editors. 2020. Geulnurim Co., Seoul, Korea, pp 215- 219
    7. Anonymous.&#x300E;Siuijeonseo (是議全書)&#x300F;. In: Lee HG, Cho SH, Jung RW, Kim HS, Ryu AR, Choi YJ, Kim EM, Baek SE, Win SL, Kim SH, Cha GH, Baek HN editors. 2004. Shingwang publisher. Seoul, Korea, pp 172, 193, 213, 224
    8. A government compilation. 1690. &#x300E;Yeokkeoyuhae (譯語類解)&#x300F;. Korea
    9. A government compilation. 1766. &#x300E;Taesangji (太常志)&#x300F;. Korea
    10. A government compilation. 1795. &#x300E;Wonhaengeulmyojeongniuigwe (園幸乙卯整理儀軌)&#x300F;. Korea
    11. A government compilation.&#x300E;Mangiyoram (萬機要覽)&#x300F;. In: National Culture Research Institute (Korea university) editors. 1989. Minmungo Co., Seoul, Korea, pp 39-75
    12. Ahn GN. 1996. (A) study on honorifics of Ongan, Hangul letters-based on data of ongan from the sixteenth to the twentieth century. Doctoral degree thesis,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Korea, pp 7-19
    13. Bae YH. 2018. The Characteristics and Popularization Method of Eon’ gan (Korean Old Vernacular Letters) Resources. Journal of The Society of Korean Language and Literature, 76:7-39
    14. Baek NC. 2006. A Study on Forms and Contents of the Korean Old Vernacular Letters of the late Joseon Period. Korean Language Research, 18:161-195
    15. Chung YS. 2008. The relatives value of unhulled rice & polished rice and the method of indicating their quantity since Chosun Dynasty. Quarterly Review of Korean History, 69:293-321
    16. Chung YS. 2024. History of Korean Food Culture.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pp 50-51, 195-197, 233
    17. Dalseong-gun. 2014. &#x300E;Dalseong, the roots of Daegu&#x300F;1, Dalseong Cultural Foundation, Daegu, Korea
    18. Gang SJ, Kim MJ, Kim JH, Baek YJ, Lee EJ, Jo HS, Hong NY. 2015. Dictionary of Korean Costumes. Minsokwon, Seoul. Korea, p 438
    19. Ha YJ. 2017. Attempts to Stratify and Struggle with the Gender Stratification through the Change of Marriage Pattern in in 17th Century Joseon Dynasty -Focusing on the Letters of Ms Gwak of Hyeonpung-. PNU J. of Women's Studies, 42:71-103
    20. Ha YJ. 2022. Yangban Women’s ‘Married Life in a Woman’s Native Home’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the Search for a New Living Environment -Focused on Letters in Excavated from the Tomb of Ms Ha-. Women and History Academic journal, 37:1-34
    21. Hong IS. 2019. Daily Life and Culture of Noble Clan in the 19th Century through Eongan (Korean Old Vernacular Letters) -Focusing on the Old Hangeul Letters by a Woman of Chogye Jung’s Clan. The Research of the Korean Classic, 47:311-348
    22. Hwang, MH. 2010 On the Characteristics of Eon’gan (諺簡, vernacular letters) as Linguistic Materials. The Society Of Korean Historical Linguistics, 10:73-131
    23. Hwang PS.&#x300E;Myeongmulgiryak (名物紀略)&#x300F;. In: Park JY, Gu SH, Lee JH editors. 2015. Hakgosa Co., Seoul, Korea, pp 111-113
    24. Jang GH (張桂香).&#x300E;Eumsikdimibang (飮食知味方)&#x300F;. In: Paek DH editor. 2003. Kyungpook university publisher, Daegu. Korea, pp 125-127, 137-139, 141, 143, 158-159, 163, 173-174, 189
    25. Jeon SU (全循義)&#x300E;Sangayorok (山家要錄)&#x300F;. In: Han BR editor. 2007. Institute of Korean Royal Cuisine, Seoul, Korea, pp 160-165
    26. Jo JA. 2014. A Study on the names of costume in Eeongan by Kim Seong il of the Kim’s of Uiseong. JSG, 32:136-167
    27. Jung GJ, Lee JM, Park EH, Baek JJ. 2012. &#x300E;The royal rice cakes and sweets&#x300F;, Sopoong Co., Seoul, Korea, pp 50-52, 100- 107
    28. Jung HY (丁若鏞).&#x300E;Aeongakbi (雅言覺非)&#x300F;. In: Kim JG editor. 2001. Ilgisa Co., Seoul, Korea, pp 133-134
    29. Jung KJ. 2010. A Study on the literary genre to mourn the death, Daedongmunhak, 32:69-105
    30. Jungildang Nam (貞一堂 南氏). 1856. &#x300E;Jeongildangjapji (貞一 堂雜識)&#x300F;. Korea
    31. Kang HS. 2010. A Study on the Corrections of t-palatalization in the Hangeul Letter of Naju Lim Family. HAN-GEUL, 289:79-106
    32. Kim HC (金弘喆). 1775. &#x300E;Yeokkeoyuhaebo (譯語類解補)&#x300F; 10. Korea
    33. Kim HK. 2010. The annual customs and affliction in Royal Family of Joseon Dynasty, The Journal of Korean Historical-forklife, 33:187-233
    34. Kim IK. 2002. The 16th Century Hawking in Pyeongang area, Gangwon-do. Korean Journal of Cultural Heritage Studies, 36:313-334
    35. Kim JH. 2021. A Study on the Pattern of Folk Knowledge and the Value of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Related to the Falconry in Korea. Intangible heritage, 10:31-62
    36. Kim SJ. 2015. &#x300E;SansilchungChongkyu (産室廳叢規)&#x300F;. Minsokwon Co., Seoul, Korea. pp 66
    37. Kim SJ, Yoon WJ, Choi EL, Kim DI, Son YJ, Son Juchan RW. 2004. Effects of Dalsaeng-san on Duration of Lavor in Primiparas. J Korean Obstet Gynecol., 17(2):115-122
    38. Kim Y (金綏).&#x300E;Suunjapbang (需雲雜方)&#x300F;. In Yoon SK editor. 1998, Shingwang publisher, Seoul, Korea, pp 96-100, 117
    39. King of Sejo (世祖). 1459. &#x300E;Worinseokbo (月印釋譜)&#x300F;. Korea
    40. Kwon SH. 1999. The creative foundation and poetic orientation of &#x003CYullyyulgok (栗里遺曲)&#x003E. The Studies of Korean Literature 12:157-172
    41. Lee BH. 2022. The Capture and Utilization of Falcons in Goryeo. Journal of Seokdang Academy, 84:5-46
    42. Lee HG, Jung GJ, Jung RW, Ryu AR, Choi YJ, Kim HS, Kim EM, Cha GH. 2021. &#x300E;The 60th birthday of Hyegyeonggung Hong, Wonhaengeulmyojeongniuigwe&#x300F;. Kyomun publisher. Kyounggido, Korea, pp 275-292, 371-373
    43. Lee HS. 2018. Korean dictionary. Minjungseorim Co., pp 1646
    44. Lee NH. 2020. The life and life-world] of Hyegyeonggung Hong (1735~1815)-Based on her Eongan (諺簡) and Eongyo (諺敎). WJOH, 37:229-254
    45. Lee RH. 2012. Study of the Uses of Names of Places Appearing in the Korean Old Vernacular Letters in the Joseon Period. Korean Language & Literature, 83:37-68
    46. Lee RH. 2015. Characteristics and Values of Korean Old Vernacular Letters from the Joseon Dynasty Period. Korean Historical Linguistics, 20:65-126
    47. Lee SP (李時弼).&#x300E;Somunsaseol (謏聞事說)&#x300F;. In: Baek SH, Bu YS, Jang YS editors. 2011. Humanist Co., Seoul, Korea, pp 70-71, 86, 99, 105
    48. Nam GH, Park RD, Bae TD, Lim GY, Jang YS, Joo YH, Cha GH. 2017. &#x300E;Eumsikdimibang & Food Culture of the Joseon Dynasty&#x300F;, Kyungpook university publisher, Daegu. Korea, p 276
    49. Oh CH. 2022. Diachronic Study on Classification of Marine Algae from the Fifteenth to Twentieth Century-Focused on Miyok, Dasima, and Gonpo. Korean Journal of Intangible Heritage, 12:55-87
    50. Oh HM (吳希文). late 1500s.&#x300E;Swaemirok (瑣尾錄)&#x300F;. Korea
    51. Oh KY, Ahn SC, Oh SM. 2016. A Study of Shelf-Life and Antimicrobial Activity on Putrefactive Microorganisms related to Soybean Curd of Persicaria hydropiper L. extracts. CSHR, 22(3):198-211
    52. Paek DH. 1997. Analysis of the Eongan from tomb of the Ha family of Jinju. Korean Language and Literature, 31:19- 88
    53. Paek DH. 2005. A study of literal life of women in Joseon (朝鮮) period-centering around old Korean letters and old Korean documents, Korean Language and Literature, 42:21-56
    54. Paek DH. 2003. &#x300E;Hyeonpung Gwakssi Eongan annotation&#x300F;. Thaehaksa Co., Kyonggido, Korea.
    55. Paek DH. 2019. &#x300E;Hyeonpung Gwakssi Eongan revised edition&#x300F;. Youkrack Co., Seoul, Korea.
    56. Paek DH. 2019. Etymology of Kimchi: Philological Approach and Historical Perspective. J. Korean Soc. Food Cult., 34(2):112-128
    57. Park JS. 2022. A Study on the Relevance between the Calligraphic Styles of Gentry Men’s Correspondence Written in Chinese Characters and Hangeul in the Joseon Dynasty: Focused on the Correspondence Written by Kim Seong-il, Song Si-yeol, and Kim Jeong-hui, KSQ, 45(4):87-131
    58. Park SD. 1676. &#x300E;Saekyung (穡經)&#x300F;. Korea
    59. Park YM. 2016. Cultivation and Utilization of Pulse Crops by Ancient Koreans. The Journal of Gojoseon & Dangun Studies Academic journal, 35:83-108
    60. Pinghugak Lee (憑虛閣 李氏).&#x300E;Kyuhapchongseo (閨閤叢書)&#x300F;. In: Jung YW editor. 2012. Bojinjea Co., Kyounggido, Korea. pp 83, 99-100, 122, 128
    61. Ru JR (柳重臨).&#x300E;Jeungbosallimgyeongje (增補山林經濟)&#x300F;. Rural Development Administration (III) editors. 2003. Rural Development Administration, Korea, pp 159
    62. Seo G (徐兢).&#x300E;Goryeodogyeong (高麗圖經)&#x300F;). In: Cho DW, Kim DS, Lee KR, Lee SK, Hong GP editors. 2005. Hwangsojari publisher, Seoul, Korea, p 297
    63. Seo YG (徐有榘).&#x300E;Imwongyeongjeji (林園經濟志)&#x300F; 「Seomyongji (贍用志)」. In: Imwongyeongje Research Institute editor. 2021. Pungseok Cultural Foundation, Kyounggido, Korea, pp 393-395 (I), pp 178-188 (III)
    64. Seo YG (徐有榘).&#x300E;limwonsibyukji (林園十六志)&#x300F;「Jungjoji (鼎 俎志)」. In: Lee HG, Cho SH, Jung RW, Cha GH editors. 2007. Kyomun publisher. Kyounggido, Korea, pp 237, 295
    65. Shin DH, Park CL. 2024. The Use of Salted Seafood and the Evolution of Kimchi Recipes during the Joseon Dynasty -Focusing on Recipe Analysis -. SARIM 87:393-428
    66.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2013. Analysis of the old Korean-alphabet letter of the Josun dynasty. Youkrack Co., Seoul, Korea
    67. Yu HC (柳希春). late 1500s.&#x300E;Miamilgi (眉巖日記)&#x300F;. Korea Institute for the Translation of Korean Classics. Comprehensive DB of Korean Classics 2024. Available from: https://db.itkc.or.kr/, [accessed 2024.09.22.]
    68. Korean Intellectual Property Office, Korean Traditional Knowledge Portal 2024. Available from: https://koreantk.com/, [accessed 2024.10.02.]
    69. Korea Heritage Service. Korea Heritage Portal 2000. Available from:https://www.heritage.go.kr/, [accessed 2024.11.30.]
    70.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The Daily Records of Royal Secretariat of Joseon Dynasty. Available from: https://sjw.history.go.kr/main.do. [accessed 2024.10.03.]
    71.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The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Available from: https://sillok.history.go.kr/main/main.do. [accessed 2024.10.03.]
    72.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Language. Urimalsam (우리말샘) 2024. Available from: https://opendict.korean.go.kr/dictionary, [accessed 2024.10.20.]
    73. ShuoWen (說文解字). Available from: http://www.shuowen.org/, [accessed 2024.11.22.]
    74. Traditional Korean Medicine DB. Available from: https://mediclassics.kr/, [accessed 2024.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