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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225-7060(Print)
ISSN : 2288-7148(Online)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Food Culture Vol.38 No.1 pp.15-25
DOI : https://doi.org/10.7318/KJFC/2023.38.1.15

The Patterns and Changes of the Late 1940s Seoul Restaurant Industry in Newspaper Advertisements

Kyou-Jin Lee*
Department of Food and Nutrition, Kyungnam University
* Corresponding author: Kyou-Jin Lee, Department of Food and Nutrition, Kyungnam University, 7 Kyungnamdaehak-ro, Masanhappo-gu, Changwon-si, Gyeongsangnam-do, Korea Tel: 82-55-249-2512 Fax: 82-0505-986-2184 E-mail: aroma711@kyungnam.ac.kr
November 30, 2022 December 20, 2022 December 26, 2022

Abstract


This study researches the restaurant industry in Seoul during the late 1940s. The research was based on the four major newspapers in Korea. The data included a total of 227 businesses with 164 non-fusion restaurants that served single-nation type food consisting of 101 Korean, 31 Western, 20 Japanese, and 12 Chinese. Some examples of South Korean dishes are Masan, Daegu, and Jeolla-do-style local foods. As for North Korean food, Pyongyang-style bulgogi, Naengmyeon, Hamheung-style janggukbap, and Gaejangguk were introduced frequently. Chinese restaurants that appeared were highend places with Beijing-style cuisine. In the case of Japanese restaurants, they mostly had Sukiyaki with Joseon food served as well. Moreover, Western restaurants were fusioned with Japanese as in pork cutlet and curry rice. Others are comprised of “French Cuisine”, “Indian curry rice”, “Steak”, and “Russian soup”. This analysis indicates that foreign cuisines had actively entered the market.



신문 광고에 나타난 1940년대 후반 서울 외식업의 양상과 변화
- 4대 신문의 음식점 광고 분석을 중심으로 -

이 규 진*
경남대학교 식품영양학과

초록


    I. 서 론

    1945년 광복 이후부터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의 기간은 한국 현대사의 기본적인 틀이 형성된 시기로 평가된다. 일본으로부터의 권한 이양, 미군정과의 협의, 그리고 새로운 정부 수립을 위한 사회적 진통 등이 이 시기 핵심단어 이다(Seoul Historiography Institute 2021). 이러한 사회적, 역사적 변화는 음식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고 우리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때까지 한국 외식 산업사에서 1940년대 후반은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으며 해방 직후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으로 외식이 발전하지 못했고, 소규모 음식점들이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이었다는 평가가 많으며(Park 2004;Jang 2006;Song & Kim 2019) 깊이 있는 관련 연구도 거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 시기는 해방을 통해 우리가 비로소 주체적으로 외식산업의 기본적인 틀을 형성한 매우 중요한 기간으로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이 시기에 대해 막연한 추론이나 단편적인 평가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다양한 자료들을 활용해 구체적으로 각 지역 외식산업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특정 지역의 외식업을 전체적으로 살펴본 연구는 소수에 불과하다. 일제강점기 전주 지역 외식업에 대한 Yang(2015) 의 연구, 부산 지역에 대한 연구(Lee 2016)가 있다. 그리고 마산 지역 외식업에 대한 논문(Lee 2020;Lee 2022)이 있다. 그러나 정작 수도 서울에 대한 연구는 없는 상황이다. Joo (2014)가 “서울은 한국외식업의 중심이며 발신처”라고 표현 했듯이, 과거 중앙집권적인 구조 속에서 외식업에서도 서울에서 유행된 메뉴나 외식 트랜드가 각 지역으로 전파되어 반영되며 영향을 끼쳤으리라 추론되기에 이 연구를 통해 서울의 외식업을 파악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지역은 수도 서울 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경기도의 한 도시로서 경성부로 불렸던 이름을 서울시로 바꾸며 행정조직이 대거 개편되었다. 광복 당시 서울의 인구는 약 90만이었으나 해외에서 돌아온 귀 환 동포, 북에서 공산정권을 피해 내려온 월남 동포, 그리고 지방에서 일자리를 찾아 올라온 상경 구직자 등으로 인구는 계속 증가하여 1949년 서울 인구는 143만 명에 달했다 (Seoul Historiography Institute 2021).

    이렇게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서울의 음식 문화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동시에 일어났으리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음식은 일제강점기의 영향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해방 후 미국의 압도적 영향하에 놓였다. 그리고 월남 동포로 인한 이북 음식의 남하, 상경 인구로 인한 지역 음식의 입성 등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이 시기는 우리나라 외식산업 역사에서 ‘요리 점’과 ‘음식점’의 분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하 다. 그리고 이 많은 변화는 외식업을 통해 표출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이 연구에서는 1945년 광복 이후부터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우리나라 대표적 4대 신문인 Seoul Shinmun (서울신문), Chosunilbo (朝鮮日報), Dong-A Ilbo (東亞 日報), Kyunghyang Shinmun (京鄕新聞)에 실린 음식점 광고를 통해 당시 서울 외식업의 특성을 알아보고자 한다. 신문의 음식점 광고는 당대 소비문화를 함축하고 있는 사료 이며 지역의 식생활과 음식문화를 연구하는 데 매우 유용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An 2015). 신문의 음식점 광고는 음식점이 신문 구독자에게 적극적인 홍보를 한 것으로, 일정 규모 이상의 음식점만이 제한적으로 노출된다는 한계는 있지만, 외식의 정착과 더불어 식문화 변화의 흐름을 보는 데는 유용하다(Lee 2020). 또한 취급 메뉴에 대한 정보와 홍보문구가 있어서 새로운 음식의 유입 등 당시 외식 트랜드와 변화를 짐작 할 수 있다.

    이 연구의 목적은 1940년대 후반 4대 신문의 음식점 광고를 중심으로 해방 직후 서울지역 외식산업의 단면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나라 1940년대 후반 외식산업의 동향 및 특성 파악에 기초자료 제시와 더불어 시사점을 제공하는 것이다. 구 체적인 연구 문제는 첫째, 서울지역 대표적 4대 신문에 얼마나 많고 다양한 음식점이 광고를 하였으며 주메뉴는 무엇 이었는가? 둘째, 한식 음식점은 어떤 곳이 있었으며 특히 북한 지역이나 남한의 타지역에서 전파되어 외식메뉴로 표출된 음식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셋째, 일식, 양식, 중식 등 다른 나라 음식은 외식업에 어떻게 반영 되었는가? 넷째, 1940년대 후반 서울지역 외식산업에서 요리점과 음식점의 분화가 이루어진 과도기적 양상은 어떠한가?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II. 연구 내용 및 방법

    1940년대 후반 서울 외식업의 규모와 특성을 알아보기 위해서 이 연구의 공간적 범위는 서울에 위치한 외식 업소를 대상으로 하였으며, 시간적 범위는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부터 1950년 6.25 발발 직전까지로 하였다.

    연구방법은 문헌 연구로 우리나라 대표적인 신문인Seoul Shinmun (서울신문), Chosunilbo (朝鮮日報), Dong-A Ilbo (東亞日報), Kyunghyang Shinmun (京鄕新聞)에 연 구기간 동안 광고된 음식점 광고를 모두 취합하여 분석하였다. 조선, 동아, 경향 세 신문은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naver.com)’에서 전 지면을 볼 수 있지만, 검색으로는 음식점 광고를 다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연구 대상 기간 동안 세 신문의 지면을 모두 살펴보고 전 지면에 실린 음식점 광고를 취합하였다. 그리고 온라인 검색이 안되 는Seoul Shinmun (서울신문)의 경우는 LG 상남언론재 단에서 발행된 영인본을 통해 전 지면을 살펴보고 음식점 광 고를 수집, 분석하였다(LG Sangnam Press Foundation 2005). 기본적인 연구대상 시기는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부터 1950년 6.25 발발 직전이지만, 신문에 따라 창간 또는 복간 연도가 다르고 일정 기간 휴간한 경우도 있어서 차이가 존 재한다. 분석대상 신문의 연구대상 시기와 자료 취합에 대해 서는 <Table 1>에 정리하였다.

    4대 신문의 음식점 광고를 취합한 후에는 우선 음식점 광고 빈도를 살펴보고 적극적으로 많은 광고를 한 음식점들의 위치와 메뉴 등 광고에 나타난 정보를 파악하였다. 그리고 광고에 나타난 메뉴를 중심으로 단일메뉴로는 한식, 양식, 일 식, 중식으로 나누었고 복합메뉴의 양상도 분석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이루어진 요리점과 음식점의 분화 양상을 관련 기사를 통해 파악하고자 했으며 이러한 현상은 음식점 광고에 어떻게 나타났는지 살펴보았다.

    신문광고 자료 이외에 조선연감과 서울시 관련 연감, 서울 역사편찬원의 자료, 한식당 조사발굴사업 보고서, 그리고 당 시 서울시장이었던 김형민(1946년 5월~1948년 12월 재임)의 회고록과 소설태백산맥등 다양한 자료를 종합하여 최대한 1940년대 후반 서울의 외식문화에 접근하고자 했다.

    III. 결과 및 고찰

    1. 4대 신문에 광고된 음식점 분류

    해방 직후 서울 음식점 수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다음과 같은Dong-A Ilbo (東亞日報)1947년 6 월 12일자 기사를 참고할 수 있다. “현재 서울 시내 각종 음 식점 수는 이천사백구십이개소라는 놀라운 숫자를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해방 전에 비하야 약 배 이상이 격증 되었고 이를 업종별로 나노아보면 요리점 45, 음식점 1,753, 식당 577, 카페 76, 다방 41”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카페와 다방을 제외하면 2,375개 업소이다. 그리고 Dong-A Ilbo (東亞日 報)1947년 8월 31일 자에서는 “서울 시내 각종 요리점, 음식점, 빠, 식당 등은 놀라웁게도 시내에만 삼천삼백십구개소” 라고 하여 같은 신문의 두 기사에서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편 연구대상 시기 4대 신문에 실린 음식점 광고를 분석 한 결과, 광고에 나타난 총 음식점 수는 227개 업소였다. 앞 서 기사에서 언급된 실제 음식점 수보다 신문에 광고한 음식점 숫자가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문 구독자들에게 적극적으로 광고한 음식점들은 일정 규모 이상의 음식점들로 국한되었으리라 생각되며, 신장개업이나 이전, 신 메뉴 출시 등의 특별한 계기에 광고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업소들을 취급 메뉴별로 분석하면 <Table 2>와 같이 단일메뉴가 164개(72.2%), 복합메뉴가 49개(21.6%), 미상이 14개(6.2%)였다. 단일메뉴 중에는 한식이 101개로 가장 많았고 양식 31개, 일식 20개, 중식 12개 업소로 나타났다. 복합 메뉴로는 한식+일식이 32개 업소로 가장 많았고 한식+양식 이 7개, 한식+중식이 3개, 양식+일식이 3개, 중식+일식이 1 개 업소였다. 그리고 3중 복합메뉴인 한식+중식+양식이 2개, 한식+일식+양식이 1개 업소가 있었다.

    이중 최다 광고 업소는 총 75회를 광고한 ‘만나관’이었고 두 번째는 ‘백운장’(43회), 세 번째는 ‘태양관’(40회)으로 나타났다.

    ‘만나관’은 서린동에 위치했던 한식 업소로 경향신문에 63 회, 동아일보에 12회로 두 신문에 집중적으로 광고했다. <Figure 1>의 “원시적 소갈비찜(Kyunghyang Shinmun (京 鄕新聞)1948.8.31)” 이외에도 “원조 조선요리(Kyunghyang Shinmun (京鄕新聞)1948.3.4)”, “용봉탕(Kyunghyang Shinmun (京鄕新聞)1949.9.19)” 등을 광고하였다.

    광고 이외에 ‘만나관’ 관련 기사로는Kyunghyang Shinmun (京鄕新聞)(1949. 7.1)에서 “김구옹의 슬픈 흉변을 애도하는 미충에서 시내 명월관, 국일관, 만나관 등 일류 요리점에서는 일제히 휴업”하였다는 내용을 볼 수 있다. 1949년 6월 26일에 일어난 백범 김구 선생의 피살 사건을 애도하는 의미에서 일류 요리점들이 휴업했다는 것인데, 만나관도 일류 요리점 중 하나로 꼽혔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번째로 많은 광고를 한 업소는 ‘백운장’으로 43회 광고 하였는데, <Figure 2>의 1946년 9월 18일자 Dong-A Ilbo (東亞日報)에 실린 광고를 보면 “조선요리업”이라고 되어있으며 호텔부와 요리부로 나뉘어 있었다. 종로구 청운동에 위치했던 백운장은 신문 광고뿐만 아니라 1947년판 조선통신사에서 발간한Joseonyeongam (조선연감)에도 동일 주소, 전화번호가 발견된다.

    세 번째 광고를 많이 한 곳은 ‘태양관’으로 40회 광고를 하였다. 태양관의 주소는 ‘서울시 본정 2정목 38(전화번호 686)’으로 되어있는데, ‘본정 2정목(本町 2丁目)’이란 현재 ‘중 구 충무로 2가’의 일제강점기 명칭이다. 1946년 5월부터 1948년 12월까지 서울시장을 지낸 김형민 시장의 회고록을 보면 “나는 취임 즉시 서울시의 이름을 한성부에서 서울시로 개칭했다. (중략) 그 다음으로 내가 손을 댄 것은 시내의 각 동명(洞名)을 우리식으로 고치는 일이었다. 일본인들은 우리 동명에 동(洞)자 대신에 정(町)자를 써서 일본말로 ‘마찌 ’라고 불렀다. 그래서 이 ‘마찌’를 동(洞)으로 바꾸는 일에 착수했다. (중략) 황금정(黃金町)에 대신해서 을지(乙支)라 했다. 그리고 이충무공을 일본인촌 본정(本町)의 이름으로 대신케 하였다(Kim 1987).”라고 하였다. 일본식 동명은 1946년 10월 1일부로 우리식 동명으로 바뀌었다(Seoul Historiography Institute). 따라서 그 이전의 광고에서는 일본식 주소를 볼 수 있으며 이 기간이 주소가 바뀌는 과도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양관’은 <Figure 3>의Chosunilbo (朝鮮日報)1946년 3월 22일자 광고를 보면 상단에 “조선요리”라고 했지만, 하단부에는 “스끼야끼 정식, 일품요리”라고 하여 한식과 일식 복합메뉴 업소임을 알 수 있다.Chosunilbo (朝鮮日報) (1947.11.14) 에서는 “스기야기, 스시, 뎀부라, 오뎅 전문”으로 광고했다.

    2. 음식 종류별 특징

    1) 한식 음식점

    한식의 경우 단일메뉴 업소 101개, 복합메뉴 업소 45개로 총 146곳이었으며 음식점 광고에 나타난 227개 업소 가운데서 한식 취급 업소가 64.3%로 가장 많았다. 복합메뉴 49개 업소 중 한식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곳은 4개뿐으로 한식당 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앞서 살펴본 최다 광고 업소들도 ‘만 나관’과 ‘백운장’은 단일메뉴 한식 업소였고, ‘태양관’은 복합메뉴로 한식과 일식을 한 업소였다.

    한편 ‘역사성 있는 한식당 조사발굴사업(Korea Food Service Information 2012)’에 의하면, 1950년 이전에 개업한 서울의 음식점 가운데서 현존하는 곳은 23개이다. 그런데 이 중 4대 신문 광고를 통해 발견되는 곳은 ‘이문설렁탕’이 유일하다. 이문설렁탕은 <Figure 4>에서처럼 1948년 10월 2일 Seoul Shinmun (서울신문)을 시작으로 7회에 걸쳐 광고했다.Seoul Shinmun (서울신문)1949년 10월 31일에는 상호가 “이문설넝탕”으로 나오며 “종로의 명물”이라며 “값 100 圓, 150圓, 200圓”이라고 가격정보를 볼 수 있다.

    Dong-A Ilbo (東亞日報)1926년 8월 11일 자에 “탕반 하면 대구가 따라붙는 것처럼 설넝탕 하면 경성이 따라붙는다. 이만큼 설넝탕은 서울의 명물이다.”라고 할 정도로 설렁탕은 대표적인 서울 음식으로 꼽힌다. 그리고 Maeilsinbo (每日申報)1935년 5월 7일 기사에 ‘종로 리남옥 설렁탕 배달부 폭행’에 대한 내용이 실려 설렁탕은 배달 음식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연구자들의 서울 음식 분류에서도 설렁탕은 대표적인 서울 음식으로 나타난다(Yoon 1978;Hwang 1984;Han 1994;Lee 1995).

    4대 신문 광고에서 한식당은 구체적인 메뉴를 밝히지 않고 “조선요리”, “대중식사”라고 한곳이 대부분이었고, 일부 메뉴를 밝힌 곳들은 “백반 정식, 해장국, 설렁탕, 곰탕, 갈비국, 추탕, 연계 백숙, 개장, 갈비찜, 꼬리찜, 매운탕, 비빔밥, 전골, 갈비, 떡국, 만두, 장국밥” 등을 광고했다. ‘팔진원’ (Kyunghyang Shinmun (京鄕新聞)1949.10.30)은 “순 서울식 갈비 국 백반, 서린동 124”이라고 하여서 음식점 광고 문구에서 ‘순 서울식’을 표방한 음식은 이곳의 갈비국 하나였다. Chung et al. (1996)은 향토음식으로써 서울의 음식이 갖는 특징이 교통의 발달 등으로 증가된 타지역간의 교류와 타지방 주민들 의 유입으로 그 특색이 사라졌다고 지적하였다.

    이에 비해서 평양식, 함흥식, 개성식, 마산식, 대구식 등 타 지역 음식을 강조한 광고는 매우 다양했다. 북한 음식으로는 평양식, 함흥식, 개성식 음식을 하는 음식점 광고가 있었다. 먼저 평양식을 내세우는 음식점의 대표 메뉴는 불고기가 많았다. ‘남산’(Seoul Shinmun (서울신문)1946.9.8)은 “순 평양식 소육개시”라고 했다. 또한 이 곳은 “순 평양식으로 절대 자신 있는 소육(불고기) 간편한 식사와 을종요리 (Dong-A Ilbo (東亞日報)1946. 8.11)”라고 불고기 전문점 임을 내세웠다. 그리고 ‘백만장’은 (Seoul Shinmun (서울신 문)1946.11.4) “순 평양식 불고기, 갈비, 스기야기, 평양 미 기 접대”라고 하였고, ‘한일백화점식당(Dong-A Ilbo (東亞 日報)1946.4.6)’도 “평양식 불고기, 냉면 순 메밀국수”가 주메뉴였다. ‘평양관’(Seoul Shinmun (서울신문)1948.10.7) 은 “순 평양식, 순 조선요리, 암소갈비 소육”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당시 광고에서는 ‘불고기’와 ‘소육’이라는 명칭이 혼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불고기와 더불어 평양식 냉면도 크게 유행했는데, 대표적으로 청진동에 있었던 ‘신우면옥’은 “순 모밀 평양냉면, 38 선을 뚤코 너머온 진짜 평양냉면 꼭 한번 시식해 보십시오. (Seoul Shinmun (서울신문)1949.2.12)”라는 내용을 서울 신문에 5회, 경향신문에 3회로 총 8회를 광고했다.

    Seoul Historiography Institute(2019)에 의하면, “평양지역 음식이었던 냉면은 이미 1920년 무렵 서울에 선보이기 시작 했고 관철동 부벽루, 종로 3가의 동양루, 광교 백양루 등 서울에 40여 곳의 평양냉면집이 있었다. 평양냉면은 자전거로 배달되어 대중적이고 이색적인 향토 별식으로 자리 잡았다.” 고 했다. 실제로 Seoul Shinmun (서울신문)1948년 5월 29일 자 “냉면 배달부 신설”이라는 광고에는 “냉면 전문 명동 고려정, 평양면옥 지점, 부벽루”, “수시, 하시, 원근을 불 구하고 신속히 배달함”이라는 문구와 함께 <Figure 5>와 같이 자전거로 냉면 배달하는 그림을 볼 수 있다.

    또한Kyunghyang Shinmun (京鄕新聞)1950년 4월 5일 자에는 “냉면 업자에게 낭보! 메밀가루”라고 했고, 같은 신문 1950년 5월 8일 자에는 “냉면 기계 동흥 철공소”에 대한 광고도 있었다. 따라서 냉면의 유행에 따라 음식점과 더불어 메밀가루와 냉면 기계 산업도 같이 활기를 띠었으리라 짐작 된다.

    함흥식 음식으로는 장국밥과 개장국 광고 업소가 많았다. ‘춘자원’(Seoul Shinmun (서울신문)1947. 5. 23)은 “함흥식 장국밥, 개장, 연계”를 광고했고, ‘함흥관’(Chosunilbo (朝鮮日報)1947.5.17)은 “함흥 명물 개장국, 장국밥(가리국)”, ‘부춘관’(Chosunilbo (朝鮮日報)1948.5.6)은 “개장국, 진짜 함흥식”, 그리고 ‘천일관’(Dong-A Ilbo (東亞日報)1949.4. 17)의 “함경도식 개장” 등의 광고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개성식 음식으로는 ‘풍미원’(Seoul Shinmun (서 울신문)1948.3.12)이 있었다. 주인은 “이기순”이며 주소는 “서울식 종로구 낙원동 195(2624)”인데 “개성식 조선요리”라고만 되어있고 구체적인 음식 이름은 소개되지 않았다.

    한편 남한의 타지역 음식으로는 경남 마산식, 대구식, 전라도식이 있었다. 경상남도 마산의 음식을 했던 ‘은정’은 Seoul Shinmun (서울신문)(1949.9.13)에서 “마산식 가리국, 가리찜”을 광고했고, 같은 신문 1949년 11월 4일 자에서 는 “주간: 스기야기, 마산곰탕, 야간: 주효요리, 남서미인, 서 울 종로 서린동 51. 마산 출신 김련수”라는 내용이 있다. ‘가 리국, 가리찜, 곰탕’을 마산식으로 제공했음을 알 수 있으나 구체적으로 마산식이 어떤 특징이 있는지는 광고에 나타나 있지 않았다. 곰탕은 한국인의 식생활에서 섭취빈도가 매우 높은 음식(Kwon et al. 1991)인데, 선행연구에서 곰탕은 마 산에서 ‘고음국’이라고 불렸으며 1930년대부터 마산의 명물로 이름이 나 있었다고 하여(Lee 2020) 마산식 곰탕이 서울 로 진출한 예로 생각된다. 그런데 ‘은정’이Seoul Shinmun (서울신문)(1949.12.16)에서는 “스기야끼, 전주비빔, 경남마산. 전국각지 미희”로 광고하여 마산과는 상관없는 전주식 비빔밥과 일본식 스끼야끼를 메뉴로 올리기도 했다.

    이 외에 대구식으로 ‘한양관’(Seoul Shinmun (서울신문) 1946.6.11)은 “순대구식 하절보탕 개장국”을 광고했고, 전라 도식으로는 ‘뷔너쓰홀’(Dong-A Ilbo (東亞日報)1947.8.31) 이 “제육 요리 전문, 애제(전라도식)”를 선보였다. 이러한 광고를 통해 당시 서울에 여러 지역의 음식이 적극적으로 유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일 음식임에도 지역색이 다른 음식으로는 개장국의 경우 함흥식, 대구식이 있었고, 가리국은 서울식, 마산식, 그리고 함흥식이 있었다. 한편 지역색이 뚜렷한 향토음식은 평양의 불고기와 냉면, 전라도의 애제를 비롯한 제육 요리를 들 수 있다.

    당시 서울 외식업에 대해서 Joo(2014)는 “서울 토박이들의 음식은 뒷전으로 밀리고 이주민들이 즐겨먹던 음식을 파는 음식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하였다. 또한 근현대 서울 사람들의 외식문화에서는 “각지에서 모여든 시골내기들은 서울에 새로운 외식문화를 만들어냈다. 서울이 전국각지 향토음식의 집합지가 된 것이다. (중략) 시골 출신 서울 사람들은 서울살이의 고단함을 풀어줄 고향음식점을 찾았다. (중략) 향토음식점은 지방색을 담은 상호로 동향 사람을 끌어들였다. 그렇다고 향토음식점이 고향 음식을 원형 그대로 복원할 수는 없었다. 서울은 고향과 기후, 조리환경, 식재료 등이 달랐다. 향토음식점을 찾는 소비자의 주머니는 가벼웠다. 이러한 여건에서 생긴 향토음식점은 싸고 손쉽게 구하는 식재료로 고향 음식을 새로 구현하였다(Seoul Historiography Institute 2019)”라고 해방 직후 서울 외식 산업에 대해 서술 하였다.

    2) 양식 음식점

    양식은 단일메뉴 업소가 31개로 한식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고 복합메뉴로도 13개가 있어서 총 44개 업소가 양식을 취급했다. 1940년대 후반 서울의 양식당 이름에는 ‘그릴(Grill)’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곳이 많았으며, 양식당 중에서 광고내용에 구체적인 메뉴를 밝힌 곳은 <Table 3>과 같다. 표에 나타난 것처럼 이 시기 양식당의 메뉴는 ‘돈가스, 카레라이스, 함박스테이크, 스프’ 등이 많았다.

    근대 일본의 서양식 수용방식 연구에 따르면, 근대시기 서양과 일본의 요리재료와 요리방식을 서로 혼용하는 ‘절충요리’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카레라이스’, ‘고로케’, ‘돈카츠’ 등이었다(Kim 2015).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나라에 소개된 일본식 양식이 해방 직후 양식당에도 계속 나타난 것을 알 수 있다. 하야시라이스 역시 ‘Hashed Beef with Rice’가 일본화된 음식으로 보인다.

    일본식 양식 이외는 <Figure 6>의 ‘성림그릴’이 “순불란서 요리”를 표방하였는데 구체적인 메뉴는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카레라이스의 경우는 ‘지미(地美)’에서 “인도 카레라이스 ”라고 따로 구분해서 광고했고, ‘시온’의 메뉴 중 “을-밀”은 ‘오트밀’로 추정되며, ‘수도그릴’의 메뉴인 “테-기”는 ‘스테이크’로 생각된다.

    스프 가운데서는 ‘홰밀이 그릴’에서 “로서아 스프”를 광고 (Seoul Shinmun (서울신문)1946.10.31) 하였다. ‘로서아 (露西亞)’란 ‘러시아’를 의미하는 것으로, 경남 마산지역에서 발행된 MasanIlbo (마산일보)의 ‘전원그릴’이라는 1952 년 양식당 광고에도 역시 로서아 스프가 발견된다(Lee 2020). 또한 ‘로서아 스프’는 일제강점기 라디오 요리 프로그램에도 방송되었고, 1934년Joseonyorijebeop (조선요리제 법)에도 쇠고기와 양파, 양배추 등 각종 채소를 이용한 수프(Lee 2017)로 실려있다.

    이미 개화기에도 러시아와의 교류가 있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뒤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가 개최되는 등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활성화 되었다. 서울 주재 소련 총영사관 부영사인 남편과 함께 한국에 온 파냐 이사악코브나 샤브쉬나(Фаня Исааковна Шабшина, 1906-1998)는 저서식민지 조선에서를 통해 “나는 1940-1946년 기간 동 안 서울에 살면서 일한 적이 있다. 즉 한국 최근세사의 다난 한 시기이며 한 시대의 교차점이기도 했던 그 시기 -식민지 통치 기간, 식민통치에서 해방되던 시기, 그 후 사회주의 혁명이 전개되던 바로 그때- 에 나는 서울 주재 소베뜨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총영사관에 근무했었다.”고 했다. 이처럼 러시아와의 교류를 통해 일부 계층에 로서아 스프 등 러시아 음식이 소개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한편Chosunilbo (朝鮮日報)1946년 6월 20일 자에 실 린 <Figure 7>의 ‘보아 그랑’의 광고에는 “양식관”이라고만 되어있어 구체적인 메뉴는 알 수 없지만, “조선 유일한 냉방 장치”라는 광고가 눈에 띈다. 이 냉방장치가 무엇인지는 1938년 8월 9일 자Chosunilbo (朝鮮日報)기사에서 발견된다. “여러분은 가령 ‘뽀아그랑’의 냉방장치 속에 몸을 두어본 일이 잇겟지요. 그 안에 一步(일보)를 드러너키가 무섭게 흐르던 땀은 체내로 흡수되고 일순에 신체의 조직은 변해지는 것 같고 우리는 마치 晩秋(만추)의 밤 속에 잇는 듯 한 상태”라고 하여 ‘보아 그랑’의 냉방장치란 에어컨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37년 1월 14일 자Chosunilbo (朝鮮日報) 기사에서는 ‘보아 그랑’의 “영업주임이 거두어드린 외상대금을 가지고 도망했다”는 내용이 있어서 적어도 1937년부터 영업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7년에 일부 “우수 열차”에 “에어컨듸숀을 설치” (Chosunilbo (朝鮮日報)1937.6.28)했다는 기사가 있어서 이 시기에 에어컨이 우리나라 공공시설에 도입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으며, ‘보아 그랑’의 광고를 통해 음식점에도 에어컨 시설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3) 일식 음식점

    일식당은 단일메뉴 업소 20개, 복합메뉴 업소 38개로 총 58개였다. 복합메뉴 업소 중에는 한식+일식이 32개로 가장 많았는데 “조선요리와 스끼야끼”의 조합이 대부분이어서 일식 중에서도 특히 ‘스끼야끼(すきやき)’가 많은 인기를 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황금’(Seoul Shinmun (서울신문)1947.11.15)의 메뉴는 “壽司(수사), 天婦羅(천부라), 壽紀燒(수기소), 和定食(화정식)” 을 광고했다. ‘수사(壽司)’는 ‘스시’를, ‘천부라(天婦羅)’는 ‘덴 푸라(天ぷら)’를 의미한다. 그리고 ‘수기소(壽紀燒)’가 스끼야끼를 가리킨다는 것이 1949년 10월 24일Kyunghyang Shinmun (京鄕新聞)에서 확인되는데 해방 후 일본말을 우 리말로 바꾸는 과정에서 ‘스끼야끼(壽紀燒)’를 ‘전골’로 바꾼다는 내용이 있다.

    <Figure 8>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명동에 위치했던 ‘취향 (Dong-A Ilbo (東亞日報)1949. 4.17)’은 “들노리”용 스시와 밥, 반찬을 제작한 요리사 이름을 공개하기도 했다. 유부 초밥인 ‘이나리스시’와 김초밥인 ‘마기스시’는 “류문길 제작”, 밥은 “김현자 제작”, 반찬은 “김현자, 류래원 제작”이라고 하 여 요리사 이름을 내세운 적극적인 광고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주로 양식당에서 사용한 ‘그릴’이라는 이름이 일식당에서 쓰인 예도 볼 수 있는데 ‘대원그릴’(Seoul Shinmun (서울신문)1949.10.25)은 “和定食(화정식), 천부라, 스끼야끼”가 메뉴로 되어있고 ‘남산그릴’( Chosunilbo (朝鮮日報) 1949. 5.28)은 “折詰(절힐), 변밥”등을 광고했다. 이 경우 광 고에는 따로 양식 메뉴가 나와 있지 않아서 양식을 겸했는지는 알 수 없다.

    마산지역 외식업에 관한 선행연구에서 해방 후 일본식 음식 명칭에서 ‘벤또’가 도시락으로 바뀌게 된 시기에 대해 1950년대 중반으로 보이며 마산지역에서는 1956년 3월 30일 ‘미도’ 광고에서 도시락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보고했다(Lee 2020). 그런데 1949년 10월 9일 경향신문에서 한글발표 503주년을 맞이하여 일본말이 섞인 간판을 고치자 고 촉구했고 도시락이라는 용어를 권장하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서울시 관수동 1239에 위치했고 ‘조선요리와 스끼야끼’ 를 주메뉴로 한 ‘觀水(관수)’(Seoul Shinmun (서울신문) 1950.4.1)라는 음식점 광고에서 “도시락(절변당)”이라는 문구를 발견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서울지역 음식점에서는 1950년에 이미 ‘도시락’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중식 음식점

    중식은 단일메뉴 12개 업소였고 복합메뉴로 6개 업소가 나타났다. 1940년대 후반 일간 신문에 광고를 했던 중국음식 점들은 상당한 규모를 갖춘 고급 음식점이었고, 북경요리 전문점이 많았다.

    ‘봉래장’(Seoul Shinmun (서울신문)1947.10.8)은 “고등 중화요리, 결혼식장 완비. 주인 영전원”라고 했는데 결혼식 장을 갖출 정도의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고 주인은 이름으로 보아 화교로 짐작된다. ‘평화루’(Seoul Shinmun (서울 신문)1948.7.13)는 “북경 고등요리”, ‘아서원’(Chosunilbo (朝鮮日報)1949.5.26)은 “북경요리”, 그리고 ‘차방원’(Chosunilbo (朝鮮日報)1947. 4.27)은 “북경요리” 등 여러 광고 에서 ‘북경요리’라고 밝히고 있다.

    이 중 ‘아서원(雅叙園)’의 경우 <Figure 9>에서 보는 것처 럼Chosunilbo (朝鮮日報)1949년 5월 26일 자 광고에는 “북경요리”라는 문구를 볼 수 있는 반면, 아서원의 역사를 소개하는 Chosunilbo (朝鮮日報)1973년 5월 9일 자 기사 에는 ‘광둥요리’ 전문점이었던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36년 11월 1일 서홍주씨 등 중국인 23명과 한국인 2명이 가산을 모아 서울 중구 을지로 1가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중국 식 요정을 차렸다. 서씨는 이 요정을 그의 조부와 부친 이름의 가운데 자를 따 아서원(雅叙園)이라했다. 종업원은 모두 15, 16 세 안팎의 홍안소년들을 썼고 장안서 이름있는 기생 6 0여명을 뽑아오자 아서원은 곡 서울서 1급요정으로 꼽혔다. 아서원이 생기기 전 수표동에 대관원(大觀園)이란 1급 중국음식점이 있었는데 아서원은 기름기가 적고 담백한 광동요리로, 대관원은 기름기가 많은 산동요리로 이름이 나있었다. 이 두 음식점은 그 맛에 있어 해방전후까지 쌍벽을 이루었지만 대관원은 서민 층에 인기가 더 있었다. 아서원은 처음에는 일본인들과 몇몇 돈있는 한국인들을 주로 많았으나 총독부 고관들이 단골을 삼으면서 한국인들은 거의 발길을 끊었다. (중략) 해방이 되고 얼마 안 가 이곳의 단골은 미군과 한국인들로 바뀌었다.

    주소가 서울시 충무로 2가 93으로 나타나는 ‘미향(味香)’ 의 경우는 Seoul Shinmun (서울신문)1949년 9월 23일 자에는 “회석요리, 천부라, 스끼야끼”라고 일식만 광고했으나, <Figure 10>의Dong-A Ilbo (東亞日報)1949년 10월 20일 자에서는 “각종 중식 400원, 鍋物中食 400원, 수기소 600원”이라고 광고하여 중식과 일식을 함께한 업소로 생각 된다.

    3. 요리점과 음식점의 분화

    이 시기는 우리나라 외식산업의 역사에서 ‘요리점’과 ‘음식점’의 분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때이기도 하다. ‘요리 점’에는 식사 이외에도 유흥과 연회가 이루어졌으며 이를 위해 기생이 동반되었다. 그리고 ‘음식점’과 ‘식당’은 “식사를 목적으로 하는 식당 음식점(Kyunghyang Shinmun (京鄕新 聞) 1949.3.5)”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요리점과는 구별되었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리점에 관해서는 <Figure 11>의 1946년Chosunilbo (朝 鮮日報)에 실린 ‘조선요리업조합’ 광고를 참고 할 수 있는 데 ‘명월관’, ‘국일관’, ‘송죽원’, ‘동명관’ 등 30개 요리점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실려 있어 당시의 대표적 요리점을 파악 할 수 있고 이들이 조합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형민 전 서울시장의 회고록에는 당시 대표적 요리점이 었던 ‘명월관’에 관한 회고가 나온다. 김시장은 해방이 된 후 영국군 포로 수용소를 찾아갔고 “수용소에 남아있는 80 여명의 포로들을 저녁에 요리집인 명월관으로 초대하여 성 대한 주연을 베풀었다. (중략) 이 연회에는 우리나라 기생들도 많이 참석해서 애국가를 부르면서 매우 성대하고 기쁜 자 리를 만들어 주었으며 (중략) 미군이 인천을 통해 서울에 들 어왔다. (중략) 나는 어느 날 밤 친구들과 명월관에 들렀다가 여기에서 윌리엄 딘(William Dean) 대령을 알게 되었다. 그는 미 8군에 소속된 308 비행부대의 부관이었다(Kim 1987).”라고 하였다. 이 글을 통해 당시 명월관은 80여명의 수용이 가능했고 외국인들도 출입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대중음식점’과 ‘요리점(요정)’으로 나뉘어 있던 분위기를 시대적 배경이 1945년 8월 15일 광복부터 1946년 10월 1일 대구 사건까지를 다루고 있는 김달수의 소설태백산맥의 다음과 같은 대목을 통해 짐작 할 수 있다.

    고원남은 종로에서 청계천 쪽으로 접어 들었다.(중략) 평안루 라는 간판이 걸린 식당 문을 밀고 들어갔다.(중략) 평안루라고 이름만 거창했지 안은 넓은 온돌방에 긴 나무탁자를 늘어놓고 주로 설렁탕이나 소머리, 내장 따위를 푹 고은 것을 파는 대중 식당이었다.(중략) 밤이 되자 이번에는 함양길이 기다리고 있을 을지로 쪽으로 갔다.(중략) 을지로 4가에 있다는 한양정이라는 데를 찾고 있었지만 좀체 눈에 띄질 않는다. (중략) 어쩌 면 한양정이라는 데는 점심때 고원남과 같이 들렀던 종로의 평안루같은 대중식당이 아니라 요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Kim 1988).

    이런 상황에서 1947년 10월 ‘유흥업 폐지법안’이 상정(Chosunilbo (朝鮮日報)1947.10.17)되었고, 1948년의 ‘고급요정 폐지방침’으로 요리점이 대중음식점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유흥업소와 음식점의 분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은Kyunghyang Shinmun (京鄕新聞) 1948년 10월 15일 기사에서 알 수 있다.

    특권계급만이 독점할 수 있었던 갑종요정을 폐지하고 명랑한 사교와 건전한 유흥을 꾀하여 잠정적 조처로 일반대중에게 이 를 개방한다는 것인데 명칭은 ‘대중요리점’이라하고 그 형식은 외국의 ‘레스트란트’를 본받어 순음식점으로 운영해 나갈 것이고 기생은 일체 요정에서 관계나 취급을 하지 않고 기생이 필 요하면 손님이 직접 권번과 교섭하여 다리고 오도록 하며 요리점에는 여자접대원을 배치하여 손님에게 편의를 주자는 案 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신문의 음식점 광고에서도 감지된다. Kyunghyang Shinmun (京鄕新聞)(1948.10.5)을 통해서는 “서울의 일류요정 명월관, 국일관 등 16개소 갑종 요리집이 작 4일부터 똑같이 문을 닫어 버렸는데(중략) 갑종요정으로 서는 큰손님으로 되어 있는 관리들도 최근에는 사람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무허가 요정으로 가고 있는 것도 또한 사실 이다.”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Jeong(2016)에 의하면 1917년 광주면에서 작성한 광주 지방사정에, “예기를 양육하는 요리점을 갑종(甲種)이라 하고, 서문 밖 일체의 작부를 양육하는 요리점을 을종(乙種)” 으로 칭하였다고 했다. 이러한 구분이 194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갑종(甲種) 요리집이란 고급요정을 의미했고, “을 종(乙種) 및 대중식당(Chosunilbo(朝鮮日報)1952. 5.27)” 과는 구분되는 유흥과 연회 위주의 요리점을 지칭했다.

    Seoul Shinmun (서울신문)1948년 12월 25일 자에는 “대 중음식점 합동광고”가 실렸다. “명월관, 청향원, 국일관”이 합동으로 낸 이 광고에는 “고급요정 폐지방침에 순응하야 종래 갑종요정의 업태를 변경하야 건전한 유흥과 명랑한 사교를 목표로 대중적 봉사를 하고저 하오니 倍前愛護하여 주시 기 仰望하나이다.”라고 했다. 업태변경 안내로 “대소연회 일체 수응, 결혼피로연 금수연기타 수응, 가격저렴, 친절봉사, 기생폐지와 동시 장안명기 접대부 배치”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급 요정 폐지방침’ 이후에도 여전히 여러 음식 점 광고를 통해서 유흥업소 성격을 가진 업소들을 다수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Seoul Shinmun (서울신문)1950년 4월 20일 광고에도 ‘대원정’이라는 한식당은 “장안월궁선녀 수십명 대기”라고 하였다. 그리고 조선요리 전문점 ‘금란장’ 은 “일류 숙수의 산해진미, 일류 명기의 명랑한 접대(Seoul Shinmun (서울신문)1949. 7.10)”라고 광고하였다. 한편으로 “낙원동 4가(3037)”에 있던 한식당 ‘낙원각’(Seoul Shinmun (서울신문)1950.1.20)의 경우는 “자동차로 모시어가고 또 모시어다 드립니다.”라고 하여 음식점에서 자동차 서비스도 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IV. 요약 및 결론

    본 연구는 서울의 대표적인 4대 신문의 음식점 광고를 분석하여 해방 직후 서울지역 외식산업의 단면을 살펴봄으로 써 우리나라 1940년대 후반 외식산업의 동향 및 특성 파악에 기초자료 제시와 더불어 시사점을 제공하고자 하였으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연구대상 시기 4대 신문 음식점 광고에 나타난 총 음식점 수는 227개 업소였다. 취급 메뉴별로 보면 단일메뉴 업소는 164개소로 한식 101개, 양식 31개, 일식 20개, 중식 12개 순으로 나타났다. 복합메뉴로는 한식+일식이 32개 업 소로 가장 많았고 한식+양식이 7개 업소, 한식+중식이 3개 업소였다. 최다 광고 업소는 총 75회를 광고한 ‘만나관’(한식) 이었고 두 번째는 43회 ‘백운장’(한식), 세 번째는 40회 ‘태 양관’(한식+일식)이었다.

    둘째, 단일메뉴 업소와 복합메뉴 업소 모두 한식이 압도적 으로 많았다. 그리고 평양식, 함흥식, 개성식, 마산식, 대구식 등 타지역 음식 광고가 많은 것으로 보아 당시 서울에 여러 지역의 음식이 적극적으로 유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북한 음식으로는 평양식 불고기와 냉면, 함흥식 장국밥, 개장국이 많이 소개되었고 개성식 음식 광고도 있었다. 남한은 마산식 가리국과 가리찜, 대구식 개장국, 전라도식 제육 요리와 애 제 등에 대한 광고가 있었다. 동일 음식임에도 지역색이 다 른 음식으로는 개장국의 경우 함흥식, 대구식이 있었고, 가 리국은 서울식, 마산식, 그리고 함흥식이 있었다. 한편 지역 색이 뚜렷한 향토음식은 평양의 불고기와 냉면, 전라도의 애 제를 비롯한 제육 요리를 들 수 있다. 이 시기 서울에 진입 한 타지역 음식은 북한 음식이 강세를 보였고 현재까지도 불 고기와 냉면은 대표적인 외식 메뉴로 명성을 유지하고 있으나 남한 기타지역의 음식은 지역색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셋째, 양식당의 메뉴는 일본의 영향을 받은 돈가스, 카레라이스가 많이 나타났다. 일본식 양식 외에는 ‘순불란서 요리’, ‘인도 카레라이스’, ‘함박스테이크’, ‘스테이크’, ‘로서아 스프’ 등이 광고되었다. 식당의 이름에는 ‘그릴(Grill)’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곳이 많았고, ‘보아 그랑’이라는 곳은 1930년 대 후반경부터 에어컨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일식의 경우 주된 메뉴로 ‘壽司(스시)’, ‘天婦羅(덴푸라)’, ‘壽紀燒(스끼야끼)’, ‘和定食(화정식)’ 등이 나타났고 한식+일 식이 복합메뉴가 32개 업소로 가장 많았는데 주로 “조선요 리와 스끼야끼”를 광고해서 ‘스끼야끼’가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던 것을 알 수 있다. 1940년대 후반 일간 신문에 광고를 했던 중국음식점들은 고급 음식점이었고 특히 북경요리 전 문업소가 많았다.

    넷째, 1947년 10월 ‘유흥업 폐지법안’ 상정과 1948년 ‘고급요정 폐지방침’으로 요리점이 대중음식점으로 바뀌게 되면서 유흥업소와 음식점의 분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그러한 현상을 광고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본 연구의 시사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한국 외식 산업사에서 1945년 광복 이후부터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의 1940년대 후반은 시대적 혼란 속에서 외식이 발달 되지 못했다고 인식되었고 선행연구도 거의 없는 시기였다. 그러나 격동의 역사 속에서도 신문 광고에 나타난 수도 서울의 외식업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서울이라는 공간 안에 북한의 월남 동포, 그리고 남한 여러 지역에서 온 이동 인구와 더불어 그들의 음식도 적극적으로 유입되었다. 서울에 집결한 향토음식점은 초기에는 그 지역 이주민을 대상 고객으로 했지만, 점차 범위를 넓혀 지역 음식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다가가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 지역 음식은 적응을 위한 변용과 차별화의 경계선에서 상품성 있는 새로 운 맛을 찾는 단계를 거쳐 외식 상품으로 정착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 과정에서 북한 음식인 불고기와 냉면은 성공한 대표적 외식 메뉴가 되었다.

    그리고 해방 직후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일제강점기 동안 익숙해졌던 일본 음식이 계속 영향을 끼치며 특히 스끼 야끼가 대중적으로 큰 인기가 있었다. 한편 단일메뉴 식당이 양식 31개, 일식 20개로 메뉴는 비록 일본화된 양식을 취급 했더라도 신문에 적극적인 광고를 한 양식당의 숫자는 일식 당보다 많았다. 당시 구매력 있는 소비자들이 양식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중식당은 서울의 지리적 위치상 북경요리 전문점이 많았고 결혼식장 등을 갖춘 고급 음식점들이 광고에 나타났다.

    또한 이 시기는 우리나라 외식산업 역사에서 현대적 음식점의 개념이 도입되는 중요한 과도기였음을 알 수 있다. 유흥이나 연회를 위한 ‘요리점’과 식사를 위한 ‘음식점’의 분화 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때이기도 하고 일본식 주소가 우리 식으로 바뀐 시기이면서 한편 에어컨 같은 현대적 시설이 외식 업소에 도입된 것을 볼 수 있다. 여태까지 깊이 있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1940년대 후반 서울의 외식업은 이렇게 복합적이고 많은 변화가 있었다.

    본 연구의 한계로는 음식점 광고에서 구체적인 메뉴나 주소를 밝히지 않은 경우도 많아서 좀더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없었고, 전체 외식업 규모에 비해 광고에 나타나는 음식점은 매우 한정적이므로 1940년대 후반 해방 직후의 서울 의 전체 외식업을 파악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4대 신문에 광고를 했던 많은 음식점 가운데서 현존하는 것으로 확인되는 업소가 ‘이문설렁탕’ 밖에 없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 이다. 이 시기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해 서울에 있던 많은 음식점들이 피난을 가고 폐업, 이전을 하는 과정에서 역사가 이어지지 못한 것이 큰 이유라고 생각된다. 유서 깊은 노포들은 우리 외식산업의 소중한 자산이자 음식문화를 이어가는 산 증거이기에 한국전쟁 이후 시기에 대해서도 한국 외 식사가 더욱 구체적이고 깊이 있게 연구되길 기대한다.

    저자정보

    이규진(경남대학교 식품영양학과, 조교수, 0000-0002-9186- 0537)

    Conflict of Interest

    No potential conflict of interest relevant to this article was reported.

    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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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yunghyang Shinmun(1948.8.31.) ‘Mannagwan’ advertis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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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ong-A Ilbo(1946.9.18.) ‘Baegunjang’ advertis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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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osunilbo(1946.3.22.) ‘Taeyanggwan’ advertis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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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oul Shinmun(1948.10.2.) ‘Imunseolleongtang’ advertis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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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oul Shinmun(1948. 5. 29) ‘Naengmyeon’ deliv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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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ong-A Ilbo(1946. 11.28) ‘Seongnim Grill’ advertis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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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ong-A Ilbo(1946.6.24.) ‘Boageurang’ advertisement

    KJFC-38-1-15_F8.gif

    Dong-A Ilbo(1949. 4. 17) ‘Chwihyang’ advertis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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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osunilbo(1949.5.26.) ‘Aseowon’ advertis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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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ong-A Ilbo(1949.10.20.) ‘Mihang (味香)’ advertis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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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osunilbo(1946.1.1.) ‘Joseonyorieopjohap’ advertisement

    Table

    Four Newspapers subject to study

    The menu of restaurants advertised in the four major newspapers

    Western cuisine restaurants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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