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 론
한 음식이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시대·지리적 기원(時代·地理的 起源)과 어떤 재료로 어떤 방법과 절차를 거쳐 만들어지고 변화해 왔는지에 대한 형태적 기원(形態的 起源)을 찾는 것에 더하여, 어떻게 불려 왔는지에 관한 언어 적 기원(言語的 起源) 즉 어원(語源)을 찾는 것은 전통음식문 화를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작업이다. 왜냐하면, 이를 통 해 단순히 음식의 역사만을 찾는 음식사(飮食史, food history) 연구의 범주를 넘어 해당 음식의 원형, 재료, 가공, 활용 등에 대한 다양한 물리적, 문화적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 음식의 이름이 어떤 배경 속에서 어떤 의 미를 담아 지어졌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명칭의 탄 생과 의미 그리고 변화와 확산 과정 등 언어적 속성(言語的 屬性)을 밝히는 것은 해당 음식에 담긴 문화 이야기를 이해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이다.
‘가미·발효·절임·채소 식품인 김치’(Kim 2021)는 간단치 않은 정체성의 요소만큼이나 다양한 물질적, 문화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형태적으로는 단순하게 저장성을 늘리기 위한 목적으로 채소를 소금에 절이던 것에서 시작되어 무려 열대 여섯 가지의 재료들이 투입되는 현대의 김치에 이르기까지 매우 복잡한 변화과정을 거쳐 다양화되었고, 명칭 또한 여러 단계를 거친 변화의 과정 끝에 ‘김치’라는 기본 명칭(基本 名 稱)이 정착되었을 뿐 아니라 분화(分化)된 김치마다 이름 즉 개별 명칭(個別 名稱)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수백 종에 달 하는 김치류의 기본 명칭인 ‘김치’는 중국에는 존재하지 않 고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만들어 사용한 한자 단어인 침채(沈 菜)의 한국어 발음인 ‘딤’에서 시작되어 - 반대로, 김치를 나타내던 원래의 우리말을 침채(沈菜) 라는 한자어로 표현했 을 수도 있다. - 구개음화를 거쳐 ‘짐’로 바뀌었고 이어 ‘짐 츼>짐치’로 변화한 다음 과도교정에 의해 ‘김치’로 되었거 나, ‘짐’에서 곧바로 ‘김 >김츼>김치’로 되는 두 가지 경로를 거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Baek 2019;Kim & Xiao 2021).
모든 김치류는 ‘김치’라는 통칭(通稱)에 각각의 특징을 나 타내는 말을 복합 시킨 이름으로 불린다. 오늘날 김치를 대 표하는 배추김치와 갓김치, 열무김치 등은 주재료(主材料)를 이름에 넣었고, 보쌈김치, 깍두기, 나박김치, 물김치 등은 김 치의 제법(製法)과 형태적 특성(形態的 特性)을 이름에 담았 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Chonggak kimchi (총각김치)’만은 주재료나 제법 또는 형태가 아닌 ‘총각 (Chonggak, 總角)’이 라는 약간은 낯설고 이질적인 단어가 이름에 사용되었다.
본 연구는 음식사(飮食史)적 관점에서, 이렇게 독특한 이 름의 ‘Chonggak kimchi (총각김치)’가 언제, 어떠한 이유와 배경 속에서 탄생하였는지?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 의 위치에 자리하게 되었는지? 기원(起源)과 어원(語源) 그 리고 변화(變化)와 정착과정(定着過程)을 밝히는 것을 목적 으로 진행되었다. 더하여, 조사·연구 과정에서 밝혀진 영화 『Chonggak kimchi (총각김치)』 의 사례를 통해 전통음식문화 콘텐츠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보고, 음식문화 콘텐츠 연구의 활성화 방향에 관한 기본적인 정의와 제안도 시도해 보고자 하였다.
II. 연구내용 및 방법
본 고는 음식문화사적 관점에서 이 독특한 김치 이름이 언 제, 어떤 의미와 배경을 담아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는지? 또 어떤 연유로 그 이름이 확산 및 보편화 될 수 있었는지를 찾 아본 것으로, 고조리서 및 근현대 음식서와 신문, 잡지, 관련 논문 등 문헌 및 영상자료 조사를 비롯하여 관련 인사들에 대한 개별 면접과 현지 조사 등 인문·사회과학적 조사 방법 을 활용한 질적 연구로 진행되었다.
문헌조사는『Sangayorok (山家要錄)』, 『Suunjapbang (需 雲雜方)』,『Eumsikdimibang (閨壼是議方)』,『Jeungbosallimgyeongje (增補山林經濟)』,『Gyuhapchongseo (閨閤叢書)』, 『Imwongyeongjeji (林園經濟志)』, 『Siuijeonseo (是議全書)』 등 조선시대 주요 음식서(飮食書)와『Joseonyorijebeop (조 선요리제법 1917)』,『Joseonmussangsinsigyorijebeop (朝鮮 無雙新式料理製法 1924)』 등 일제강점기 이후 1970년대 사 이 발행된 조리서를 비롯하여 20세기 초·중반 국내에서 발 행되었던 신문 중 디지털 자료화 작업이 된『Joseonjungangilbo (朝鮮中央日報)』,『ChosunIlbo (朝鮮日報)』, 『Dongailbo (東亞日報)」,『Jungangilbo (中央日報)』, 『Gyeonghyangsinmun (京鄕新聞)』 등 신문, 그리고 1920년 대 이후 창간한『Yeowon (女苑)』,『Sinyeoseong (新女性)』, 『Jubusaenghwal (主婦生活)』 등 주요 여성 잡지 6종 등 다 양한 문헌 자료를 조사·분석하였으며, 이외에도 온라인 제공 학술정보자료들과 한국영상자료원의 영상·음악 및 기록 자 료들을 추가로 검색하였다.
채록(採錄)과 면접은 전통음식 전문가와 음식사학자(飮食 史學者) 및 영화·음악 관련 당사자들을 대상으로 녹음과 기 록을 병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코로나 19 상황으로 대면조사 가 어려운 경우 전화 통화로 진행하였다.
조사 작업을 통해 수집된 모든 자료를 분석 및 고찰한 후 에는, 수도권·충청·전라·경상 지역의 70대 이상 노인들을 대상으로 간이 인터뷰를 실시하여 도출된 결과에 대한 지역 별 차이 존재 여부에 대한 검증 작업을 진행하였고, 이를 통 해 본 연구의 결과가 전국적으로 동일하게 적용되는 상황이 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III. 결과 및 고찰
1. 떠꺼머리총각?
총각(總角)은 일반적으로 ‘장가가지 않은 다 큰 남자’를 가 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는데 한자로는 ‘(머리)묶을 총(總)’ 에 ‘뿔 각(角)’자를 쓰며, 고어(古語)에서는 머리 모양을 지칭 하는 단어가 아니라 ‘총각 하다’라는 동사로 사용되던 말이 다(Park 2013). 1481년 간행된『Dusieonhae (두시언해, 杜 詩諺解)』에는 ‘총각(總角)’이 “어린아이들이 머리를 양쪽으 로 묶어 두 개의 뿔 모양으로 동여맨 머리 모양을 뜻한다 (Park 2013).”라고 나와 있는데, 남자는 장가를 가거나 관례 를 치르게 되면 상투를 틀어 올리므로 이런 쌍 뿔 모양 머리 를 한 사람은 대개가 장가를 가기 전의 남자였기 때문에 총 각이라는 머리 맵시 표현어(表現語)가 어느새 ‘장가 안 간 남 자’의 의미로 사용되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뿔 같은 총 각 머리 대신 머리를 길게 땋아 내렸고 이렇게 땋아 내린 긴 머리를 흔히 ‘댕기머리’ 또는 ‘떠꺼머리’라고 하였기 때문에 결국 ‘총각’은 장가 안 간 성인 남자이자 떠꺼머리를 한 남 자라는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떠꺼머리 총각’이 나이 들어 서도 장가를 못간 노총각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지만, 어쨌거 나 장가 안 간 젊은 성인 남자임은 변함없다.
그런 ‘총각’이 어쩌다 김치의 이름이 되었을까? 총각김치 의 어원 관련하여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손가락 굵 기의 작은 무가 마치 아직 장가 안 간 총각의 생식기(男根) 를 닮았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에 달린 무청 이 총각들의 댕기 머리처럼 보여 총각무가 되고 그것으로 담 은 김치가 총각김치가 되었다’라는 설이다(Choi 2003). 이 두 가지 설은 ‘성기 모양’이냐 ‘머리 모양’이냐의 차이는 있 으나 ‘장가를 가지 않은 다 큰 남자’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 다.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Language (國立國語院)의 『Pyojungugeodaesajeon (標準國語大辭典)』은 총각김치를 “굵기가 손가락만 한 또는 그보다 조금 큰 어린 무를 무청째 로 여러 가지 양념을 하여 버무려 담근 김치”라고 풀이하고 있고, ‘총각 머리’는 “땋아서 늘인 남자의 머리. 예전에 총각 은 나이가 들어도 머리카락을 땋아 늘어뜨린 데서 유래한다.” 라고 하였으므로 무청이 달려 총각 머리처럼 보이는 무를 총 각무라 한 것 역시 아주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닌듯하다.
2. 총각무, 총각김치라는 이름의 시작
그럼 총각이라는 말이 언제부터 무나 김치의 이름에 쓰이 기 시작했을까? 195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어떠한 기록 자 료에서도 ‘총각무’나 ‘총각김치’라는 말이 나타나지 않는다. 조선시대 편찬된 음식서(飮食書) 등 고문헌 속에서도 ‘총각’ 이 김치나 무의 이름이나 별칭으로라도 등장하는 사례는 전 혀 없다. 1766년 의관(醫官) Ryu J.L. (유중림, 柳重臨, 1705-1771)이 편찬한 농서(農書)『Jeungbosallimgyeongje (增補山林經濟)』에 ‘Nabokamjeo (나복함저, 蘿葍醎菹)’라는 김치가 소개되었는데 ‘나복’은 ‘무’이고 ‘함저’는 ‘소금에 절 였다.’는 뜻이니 요즘으로 치면 ‘무짠지’ 같은 것인데, 제법 (製法)에서 총각김치와 약간의 유사성이 나타나지만 ‘총각’이 라는 명칭은 쓰지 않았다(Park 2013).
1935년 6월 3일 자『ChosunJungangilbo (朝鮮中央日報)』 에는 “입맛 업슬 때 조흔 넝/쿨/김/치 - 무청은 버리지 말고 이러케 먹읍시다.”라는 제목으로 무청에 무잎이 달린 채로 담는 김치를 소개하고 있다. “무청은 말할 수 업시 먹음직하 게 국직국직한게 쭉쭉 삐쳤습니다. 이것을 여러 토막에 내서 김치를 담그면 억세여서 그다지 맛이 업습니다. 따라서 보통 이것들은 만히들 버리게 되고 또는 국을 끄리는데 그러케 하 는 것보다도 무청을 무대가리에서부터 그냥 긴채로 잘라가 지고 누렁닙만 약간 제친후 깍뚜기 미창에다 넛다가 누러케 익은다음에 끄내서 밥우에다가 이 얼근하고 먹음직한 것을 그대로 척척노아서 먹고보면 그맛이야 말로 참으로 진미입 니다.”라는 내용이다. 무를 세로로 길게 쪼개서 잎이 달린 채 로 깍두기 양념 아래 넣어 두었다가 익으면 먹는 조리법인 데 현대 총각김치의 전 단계 형태로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이 김치의 이름이 ‘Neongkul kimchi (넝쿨김치)’라는 것이 다. 이파리가 달려 늘어진 모습은 같으나 ‘댕기머리’나 ‘떠꺼 머리’ 에 연결시키지 않고 더구나 ‘총각’이라는 이미지 연상 은 전혀 없이, 박이나 호박의 줄기처럼 넝쿨로 보고 그렇게 부른 것이다.
해방 직후 서울대에서 음식을 가르쳤던 Son Jeonggyu (孫 貞圭, 1896-1950?)가 1948년에 쓴『Urieumsik (우리음식)』 에는 “어리고 연한 청 달린 무를 정히 씻어 소금에 저려, 파·마늘·생강·막고추가루·소금·새우젓(또는 메르치젓)에 버 무렸다가 먹는 것으로 통무인 만큼 신선한 별미가 있다.”라 고 하여 이 무렵 이미 오늘날의 총각김치 만드는 법과 거의 흡사한 조리법을 제시했는데, 그럼에도 명칭은 역시 ‘알무깍 뚜기’로 되어있어 그때까지 지금의 총각무는 여전히 ‘알무 우’ 또는 ‘알타리무’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박채린의 연구 에 의하면, 화북의 작은 무 계통인 누루배기, 쥐꼬리무, 서울 봄무 등으로부터 분화되어 뿌리가 작고 단단하여 끝에 알처 럼 무가 달리는 품종을 ‘알달이’ 또는 ‘알타리’라고 하였다 (Park 2013). 앞 서의 유사 총각김치류의 기록들을 종합하여 보면, 총각김치는 애초 깍두기의 범주에 속해 있다가, 점차 작고 단단한 뿌리와 부드러운 잎을 가진 새로운 무 품종이 보급되고 거기에 이파리를 먹겠다는 욕구가 더해져 제조법 이 분화되면서 별도의 새로운 김치 종류로 자리 잡게 된 것 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주재료인 ‘알무’나 ‘알타리무’의 이름을 따서 ‘알타리무김치’ 또는 ‘알무김치’라는 이름을 붙 였다가 나중에 그 모양새에서 연상되는 형태에 어울릴 표현 어로 ‘총각’이 선택된 것이다. 이후 ‘알무’라는 명칭은 점차 사라졌으며, ‘알타리무’라는 이름 역시 지금도 일부 사용하 는 사람들이 있으나, National Institute of the Korean Language (國立國語院)에서는 1988년 표준어 및 맞춤법 개 정안에 의해서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 표준어로서의 생 명력을 잃었다.’라는 이유로 알타리무를 버리고 총각무만을 표준어로 인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야말로 굴러온 돌(총각) 이 박힌돌(알타리)를 밀어낸 셈이다.
조선시대 주요 음식서(飮食書)와 일제강점기 이후 1970년 대 사이 발행된 조리서를 비롯하여 20세기 초 이후 국내에 서 발행되었던 신문 중 디지털 데이터화 작업이 된 신문, 그 리고 1920년대 이후 창간한 주요 여성 잡지 6종의 기사들을 검색한 결과 ‘Chonggak kimchi (총각김치)’라는 이름이 최초 로 기록에 등장한 것은 1959년도이다(Park 2013). 당대 최고 의 여성 잡지였던『Yeowon (女苑)』은 단기 4292년(서기 1959년) 김장철인 11월 호(인쇄 10월 10일, 발행 11월 1일) 에 “김장에 관(關)한 백과(百科)”라는 8쪽 분량의 김장 특집 을 실었는데 두 번째 페이지의 “재료(材料)의 선택(選擇)과 구입(購入)”이라는 항목에서 무의 선별과 구입 방법을 소개 하는 중에 “또 손이 가지만 ‘총각김치감’이 있다. 자기가 농 사를 지으면 더욱 이러한 거리가 많이 있고 도회지에서도 일 부러 사서 ‘총각김치’라고 하여 아주 서민적이고 애교 있는 김치로 한겨울에 손에 들고 어적어적 먹는 시원한 맛은 겨 울이 아니면 얻을 수 없다.”라고 하여 처음으로 총각김치감 인 총각무와 그것으로 담는 총각김치를 언급하였다<Figure 1>.
그러나 이 시기를 전후하여 다른 매체에는 일체 총각무가 김치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도 이 명칭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한동안 보이지 않던 ‘총각김치’ 표현이 다시 나타난 것 은 2년 뒤인 1961년이 되어서다. 같은『Yeowon (女苑)』의 11월 호 “별미김장의 여러 가지”라는 특집 중 S.J.Han(韓淑 子)의 ‘총각김치’라는 Box 기사에서 총각김치를 ‘해마다 먹 는 김치’라고 하면서 재료에서 “잔무우···7-8센치 정도의 잎 사귀가 달린 것”을 쓰라고 하였다(Han 1961).
여기서 주목할 것은 총각김치라는 명칭이 다시 등장했다 는 점 외에 총각김치 담그는 무를 ‘잔무우’라고 한점이다. 1959년도 최초 기사에서도 ‘총각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총각김치감’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총각무’보다는 ‘총각 김치’라는 말이 먼저 사용된 후 그 ‘총각김치를 담는 무’라 는 뜻에서 ‘총각무’라는 이름이 붙여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Figure 2>.
같은 해인 1961년 11월 07일, 신문으로는 처음으로 『Gyeonghyangsinmun (京鄕新聞)』에서 ‘초겨울의 주부 살림’ 이라는 제목의 기사에 “겨울 동안에 결핍되기 쉬운 비타민C 를 보충하는 의미에서 무청이 달린 총각김치를 담그어 먹도 록 합시다.”라는 내용으로 ‘총각김치’라는 명칭이 등장하였 고, 이어 경향, 조선, 동아 등 주요 일간신문에 총각김치, 총 각무 관련 기사들이 속속 등장한다. 60년대 초반의 총각김치 관련 기사들은 다음과 같다.
“김장. 통김치·보쌈김치·동치미=맛있게 담그려면? (중략) 동치미 담그는 법 ② 무우는 못이 없고 몸매가 고운 것으로 골라 정하게 씻고 고운 소금에 약간 저린다. 총각김치무우를 큰 잎만 떼고 섞어해도 좋다. 국물을 부으리만큼 장만하여 소금에 간 맞춰놓는다.”
“김장이란 겨울부터 봄철까지에 먹을 김치·깍두기 동치 미 같은 것을 한 번에 많이 담그는 것을 가리키는데 배추세 박이, 배추무우섞박이, 무깍두기, 동치미, 또는 배추김치 가 운데에서도 각 지방의 특색있는 중 「개성보쌈김치」,서 울·경기도 지방의 특색물인「총각김치」(깍두기의 일종) 무 짠지 등의 몇 가지다.”
“鷄助(계조), 흔히 말하는 김장 중의 짠지는 복식으로 따 지면 웃 옷감이 되어 상하가 없겠지만, 동치미, 나박김치쯤 만 되어도 벌써 족보에서 찾아볼 수 없는 집안이 수두룩하 고 젓지에 갓김치 총각김치 등등을 외우게 되는 집안이면 벌 써 호별등급 십오 단위는 넘는 번지수이다.”
“로스안젤레스의 김치, 고교동창생 부인으로부터 총각김 치 한 그릇 얻어왔다. 미국인 주인이 돌아와서 무슨 냄새냐 고 난리다.”
위 기사 내용 중 1961.11.18.자『Gyeonghyangsinmun (京 鄕新聞)』에 처음으로 ‘총각무’에 해당하는 내용이 나오지만, 표현은 아직 ‘총각김치 무우’로 표현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총각무’보다는 ‘총각김치’가 더 먼저 사용되었음을 다시 확 인할 수 있으며,『Dongailbo(東亞日報)』1962년 11월 24일 자 기사에서 “총각김치가 서울·경기도 지방의 특색물”이라 는 점과 함께「총각김치」 뒤에 ‘(깍두기의 일종)’이라고 설 명을 달아 놓은 점으로 보아 총각김치에 설명을 달아야 할 만큼 아직 일반에 알려지지 않고 전국적으로 확산도 되지 않 은 상황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마지막 두 기사는 음식과 관 련 없는 기사 중에 ‘총각김치’ 이야기가 들어있는 것으로 보 아 총각김치가 점차 보편화 되어 가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 이라 하겠다. 1959년에 처음으로 기록에 나타나고 1960년대 들어서서야 신문에 오르내리기 시작하였지만, 해당 매체에서 ‘총각김치’라는 말을 창작해서 쓰지는 않았을 터이므로, 신문 이나 잡지에 사용되기 이전 어느 시점에서 채소유통이나 음 식 관련 업계 종사자들 또는 문화나 유행을 선도하는 특정 계층에서는 사용이 되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렇게 새롭게 탄생한 총각김치라는 이름은 불과 10여 년 이 지난 1970년대 중반 무렵에는 이미 김치에서의 인지도와 중요도가 급상승하여『Gyeonghyangsinmun (京鄕新聞)』 1976 년 9월 14일 자 “김장김치 특성은 기후, 지세에 따라 달라” 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면 “시민들이 김장 때 하는 김치의 종 류와 비중이 배추통김치(100%)、깍두기(94%), 동치미(80%), 총각김치(92%)로 지역에 차이 없이 가장 많이 담그고 있다 ”라고 보도하고 있다. 총각김치가 김장김치의 필수항목으로 자리 잡았을 뿐 아니라 역사가 깊은 전통의 김치류인 깍두 기보다 비중이 높아진 것이다<Figure 3>.
3.『Chonggak kimchi (총각김치)』, 은유(隱喩)와 확산
1959년 처음으로 언론에 등장한 총각김치는 1961년 2건, 이듬해와 1963년도에 각각 1건의 기사가 실리는 것으로 주 춤했다가 1964년도에 급격히 증가한다. 1964년은 한 해 동 안『Gyeonghyangsinmun (京鄕新聞)』·『Dongailbo (東亞日 報)』·『Joseonilbo (朝鮮日報)』 3개 신문에서만 총각김치, 총각무가 언급된 기사가 무려 69건이나 검색된다. 이전과 다 른 것은 김장이나 전통음식 만들기 등 문화·생활면 기사가 아니라 대부분이『Chonggak kimchi (총각김치)』라는 영화 (映畫)와 관련된 연예면 기사 또는 당시 신문에는 고정으로 실리던 극장 상영 영화프로 소개라는 점이다. 거기에 수시로 영화 광고까지 신문에 실렸으니 1964년도에 ‘총각김치’라는 말이 신문에 노출된 횟수는 그 보다 훨씬 많았다.
영화『Chonggak kimchi (총각김치)』는 Kwak Illo (郭一 路) 작가의 각본을 그때까지 사극 연출로 이름을 날리던 Jang Ilho (張一湖) 감독이 연출한 멜로·로맨스 장르의 영화 였다.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였던 Sin Seongil (신성일, 申星 一)과 Eom Aengran (엄앵란, 嚴鶯蘭)이 주연을 맡고 최지희 등 젊은 배우들과 김승호, 김희갑, 서영춘, 트위스트김 등 기 라성 같은 선배 배우들이 함께 출연하였으며, 서울대 출신에 이국적인 마스크의 미남 엘리트 가수로 이름 높았던 유주용 (劉宙鏞)이 처음 영화에 출연한다 하여 촬영 전부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또한, 주제가를 비롯한 영화음악을 작곡 가 Lee Bongjo (이봉조, 李鳳祚)가 담당하고 주제가는 인기가 수 Hyeon Mi (현미, 玄美)가 부르는 등 당대 최고의 연예·예 술인들이 모인 작품이었다(Korean Film 2022)<Figure 4>.
런닝타임 100분짜리 이 영화는 1964년 8월 6일에 당시 주 관부처인 문화공보부의 상영허가를 득하고, 다음 날인 8월 7 일 태평로에 있던 개봉관 아카데미극장 등에서 처음 상영을 시작하여 ‘청소년 입장 불가’ 등급임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만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성공을 거두었다(Korean Film Database 2022). 1960년대는 일반적으로 관객 10만이 면 흥행 성공작으로 평가받던 시대였으므로 상당한 흥행실 적이었다(Ahn 2021).
어릴 때부터 서로 다정한 친구 사이인 미숙(엄앵란 粉)과 인범(신성일 粉)은 각기 결혼 상대자를 구한다. 인범은 사장 딸인 성자를 선택했으나 그녀의 오만함에 질려 절교하고, 미 숙은 이른바 ‘총각김치’인 재벌 아들 용선을 선택했지만 만 사를 돈으로 해결하려 드는 그에 실망하여 헤어진다. 이렇게 혼자가 된 둘은 우정의 관계를 넘어서 서로 사랑하게 되고 결국 결혼에 이른다는 것이 영화의 기본 구성이다. Korean Film Archive (KFA, 韓國映像資料院)이 보관 중인 영화 『Chonggak kimchi (총각김치)』의 필름 원본은 복원 작업이 이뤄지지 않아 현재는 영상을 직접 확인할 수 없으며, 영상 과 사운드 모두 다수의 결본이 있어 사운드 확인도 불가능 한 상황이나 다행히 본 연구는 영상이나 사운드 보다는 대 사의 내용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어서 검색·복사가 가능한 영 화의 대본을 분석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KFA가 보존관리 중인 영화의 대본은 오리지날 대본과 심의 대본 두 종류가 있는데, 촬영과 편집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계속 대본의 수 정·보완이 이루어지는 영화 제작의 속성상 심의 대본이라 할 지라도 그것이 최종 완성된 영화와 100% 일치하지 않을 가 능성이 크다는 한계가 있지만, 역시 총각김치와 관련된 대사 내용을 중심으로 하는 연구라는 점에서 오리지널 시나리오 와 심의용 시나리오를 서로 대조하거나 상호 보완하는 방식 으로 필요한 내용을 확인하였다.
심의 대본 3페이지 영화의 첫 신은 주인공 미숙이 얹혀살 고 있는 자신의 언니 집 밥상 앞에서 언니 윤숙, 형부 윤오 와 나누는 대화로부터 시작된다.
# 1.
-
미숙의 집 마루
-
밥상 앞에 앉은 미숙
-
젓가락으로 큼직한 총각김치를 집어 들고 감정이나 하듯
-
이리저리 보드니 싱긋 웃고
-
캬메라를 향해서
-
미숙: 언니 이거 말야 꼭 그거 같지? 호호...
-
윤숙: 처녀 애가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
미숙: 괘니 오바쎈스야! 총각김치는 요새 미혼 남성에 대 한 대명사야.
-
윤숙: 대명사?
-
미숙: 싱싱하고 이해심 많고 스마트하고 거기다 외국까지 다녀온 돈 많은 남성을 총각김치라고 부르거던.
-
윤숙: (일손을 멈추고) 그렇다면 근사한거 하나 골랐니?
-
미숙: 욱어지 밖에 없어.
-
윤숙: 욱어지는 또 뭐냐?
-
미숙: 아무데도 쓸모가 없는 게 우거지지 뭐 달른 게 우 거지겠우?
-
윤숙: 오, 네 형부 같은 사람이구나.
-
윤오: 뭐 내가 우거지라구? 이것봐요 내가 비록 지금은 마 누라 재산에 붙어 먹고 살긴해도 나도 한때는 당당 한 총각김치 깜이였어.
-
윤숙: 에이그 아직도 입은 살아서
-
미숙: 언니 또 아침부터 싸움이유 다녀올게.
-
윤숙: (아기의 기저구를 갈면서) 우리집에 달구 나온 건 너 하나다. 제발 너만은 총각김치가 되다오. (* 현 대 문법을 적용하지 않고, 원문대로 정리하였음)
사실, 이 첫 장면만으로도 영화『Chonggak kimchi (총각 김치)』의 구성이나 주제 등을 어느 정도 상상해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당대 사회에서 총각김치와 총각무가 어떤 의미로 회자 되고 있었는지 단박에 파악할 수 있다. 대학을 갓 졸업 하고 상사(商社)에 취직한 발랄한 여사원인 미숙은 소위 서 구 청년문화가 봇물 터지듯 밀려들던 당대 처녀들의 사고대 로 “싱싱하고, 이해심 많고, 스마트하고, 거기다 외국까지 다 녀온, 돈 많은 남성”인 ‘총각김치’, 요즘으로 치면 킹카를 찾 고 있다. 2천 년대 초반 유행하던 표현인 ‘킹카’는 포커놀이 의 킹카드(K)에서 유래한 말로 잘생기고, 매너 좋고, 돈 많 고, 옷 잘 입고, 여자에게 잘해주고, 키 크고, 공부 잘하고, 겸손하고, 운동도 잘하는 최고의 남자를 의미하는 은어이다 (Food and Food Economy News). 그런데, ‘젓가락으로 큼 직한 총각김치를 집어 들고 감정이나 하듯 이리저리 보드니 싱긋 웃고 카메라를 향해서 “언니 이거 말이야 꼭 그거 같지 ? 호호.”’라고 하는 도입부에서의 ‘총각김치’는 영화에서 겉 으로 드러낸 킹카의 의미가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 일부는 알고 키득거리며 통용시켰을 은밀한 ‘총각김치’ 였음을 보여 준다. 거기에 미숙의 말에 대답하는 언니 윤숙이 “처녀 애가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라고 하는 말을 보면 진짜 ‘총각김치’ 는 바로 총각들의 성기를 은유한 성적(性的) 은어(隱語)임이 더욱 명확해진다<Figure 5>.
한국영화의 전성기로 불리던 1960년대(Kim 2002)는 기성 세대에 대한 반발을 내용으로 하거나 뚜렷하고 개방적인 사 고방식을 가진 청춘의 주인공들을 등장시켜 신문화를 느끼 게 하는 이른바 ‘청춘영화’라는 새로운 경향성이 나타났는데 이런 영화들을 통해서 젊은 관객들은 청춘스타들의 스타일 과 문화에 열광하게 되었고 이러한 호응에 힘입어 당시의 영 화는 점차 생동감 넘치는 젊은 느낌들을 공유하는 창구가 되 었으며, 당대 최고 청춘스타의 자리에 있던 스타 커플 신성 일과 엄앵란을 내세운『Chonggak kimchi (총각김치)』 역시 이런 흐름에 맞춘 영화였다.
이 영화에 대한 정보는 2022년 2월 한국 전통음식 전문가 인 Jeon H.J. (田熙貞) 명예교수를 대상으로 한 구술채록 과 정에서 처음 확인되었다. Sookmyung Women’s University (淑明女子大學校)에서 궁중음식을 강의하던 조선 마지막 수 라 상궁(尙宮) 출신 Han H.S. (韓熙順, 1889-1972) 선생의 조교를 맡고 있던 1960년대 초 어느 날, Altarimu kimchi (알 타리무김치) 실습을 하려는데 여학생들이 깔깔대며 ‘알타리 무김치’를 ‘총각김치’라고 부르면서 “총각김치를 만나고 싶 다”라거나 “어른이 아니라서 총각이 고추가 여물지 않아서 그랬나?”라는 등의 말을 하며 난리가 났었다는 것이다. 자세 히 들어보니 최고 인기스타였던 엄앵란·신성일 커플이 주연 을 맡은『Chonggak kimchi (총각김치)』라는 영화에서 “엄 앵란이 신성일 밥숟가락 위에 총각김치를 올려주면서 재밌 는 말을 했다”라거나 “총각김치가 그렇고 그런 의미(意味)다” 라는 것이었다. 전희정은 “마침 그 영화의 여주인공역을 맡 은 엄앵란은 같은 학교 같은 과 1년 선배여서 평소 학교에 서 인사를 나누던 사이였으므로, 오래전 일이지만 지금도 기 억이 생생하다.”라면서 “그 무렵부터 ‘총각무’나 ‘총각김치’ 라는 말이 처음 나돌기 시작하였고 그 이전에는 없었다. 한 희순 상궁께서도 그때 ‘총각김치’라는 말을 아예 모르고 ‘알 타리무김치’라고 하신 것만 봐도 확실하다.”라고 하였다. 더 불어 “그때 인기가수 현미가 『Chonggak kimchi (총각김 치)』 영화의 주제가를 불러 노래도 히트했었다.”라는 등의 제 보를 해 주었다<Figure 6>.
당대 최고의 스타 Eom A.R. (엄앵란, 1936년생)은 워낙 많은 수의 영화에 출연하였던 탓에 첫 인터뷰에서는 당시를 어렴풋하게 기억하는 정도였으나, 영화의 포스터, 스틸 사진, 광고 자료 등을 제공한 뒤 진행한 두 번째 전화 인터뷰에서 는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었고, 영화의 주제가를 자신과 절친한 사이인 가수 Hyeon Mi (현미, 1938년생)가 불렀다는 사실도 증언해 주었다. 원로가수 현미와는 전화로 인터뷰가 진행되었으며 영화 얘기를 꺼내는 순간 바로 주제 가인『Chonggak kimchi (총각김치)』를 불러줄 만큼 영화와 노래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또한, 이 곡을 그녀와 특 별한 관계였던 Lee B.J. (이봉조) 선생이 작곡하였고, 영화 중 나이트클럽에서 본인이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들어있 었다는 것과 이 곡을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최희준·현미 TOP HITS’라는 타이틀로 발매된 음반에 포함되어 오랜 기 간 가요 순위 상위권 올라있었다는 사실 등 구체적인 내용 을 제보하였다<Figure 7>.
1965년 3월 24일 자『Gyeonghyangsinmun (京鄕新聞)』에 는 월남에 파병된 장병들의 상황을 다룬 ‘남국의 전장에서 어머님께 올리는 편지’라는 기사가 실렸는데, 기사 내용 중 에 “또 ‘아리랑’이나 이미자 양의 ‘동백 아가씨’, 현미의 ‘총 각김치’가 레코드의 음반에서 울려 나올 적이면 병사는 향수 에 젖어 본답니다.”라는 구절이 있어 이 노래가 이듬해까지 도 심지어 월남이라는 극한의 전쟁터에 파병되었던 젊은 군 인들 사이에서도 계속 인기를 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듬해인 1966년 2월 28일 자『Dongailbo (東亞日報)』 인기 연재소설 ‘서울은 만원이다’에도 “남는 것은 ‘동백아가씨’, ‘총각김치’ 등속의 유행가 가락뿐이다.”라는 구절이 있어 노 래가 나온 지 2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여전히 대중들의 머리 에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소설 8월 3일 자에는 노래 가 아닌 김치 종류의 하나로 ’총각김치‘가 언급되어 있어 이 무렵 총각김치라는 말이 어느 정도 확산하였음을 보여주기 도 한다(Korean Film).
『Chonggak kimchi (총각김치)』노랫말
1절
-
달래볼까 울어볼까 하소연해도/아무리 당신이 목석이래도 뜨거운 나의 볼(?)을 몰라 주실까/아무리 당신이 바보라 해도
-
(후렴)
-
매큼한 총각김치 새콤한 그 맛/그 이름 총각김치 무엇이 좋다고
-
울면서 매달려도 여자는 싫대 나요
-
2절
-
달래볼까 울어볼까 하소연해도/아무리 당신이 목석이래도 뜨거운 나의 뺨을 몰라 주실까/아무리 당신이 바보라 해 도 (후렴)
-
3절
-
때려볼까 할퀴어볼까 가슴터질 듯/아무리 당신이 목석이 래도
-
불타는 내 입술을 몰라주실까/아무리 당신이 바보라 해도 (후렴)
지극히 평범한 내용의 가사임에도 당시에는 사회적으로 물 의를 일으킬만한 내용으로 받아들여졌든지 당시 언론에는 이 노래에 대한 부정적인 평을 담은 기사들이 다수 등장하고 있 다.『Gyeonghyangsinmun (京鄕新聞)』은 1965년 01월 13일 자 “벗어야 할 저속성(低俗性)”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지 난해 우리 가요계를 살펴보면 ‘총각김치’, ‘내일 또 만납시다’, ‘맨발의 청춘’ 등의 재즈풍 가요 또는 ‘빨간 마후라’, ‘사랑해 봤으면’ 등의 창가조(唱歌調)나 ‘동백아가씨’ 등의 재래유행 가조(在來流行歌調)가 아니면 외래(外來)「폽·송」의 번역 가요(飜譯歌謠) 등으로 그 갈래를 나눌 수 있다. 그런데 대 부분의 가요가 지나치게 상업주의에 흘러 대중들의 오락심 리(娛樂心理)에 영합한 나머지 저속(低俗) 또는 비속(卑俗)하 여 건전성(健全性)을 지니지 못하였다.”라며 비판하였고, 6개 월 후인 1966년 7월 4일에는 ‘대중가요 채점표(採點表)’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예륜(藝倫)의 심의(審議) 결과 경박(輕 薄)한 재즈調, 애상(哀傷) 젖은 민요조(民謠調), 저속(低俗)·조 잡(粗雜)한 가사(歌詞), 상징미(象徵美) 아쉽고 거의가 일본 조(日本調)에 깊이 물든 작곡(作曲)”이라는 서두에 이어 “▼ ‘총각김치’(이성재 작사·이봉조 작곡·현미 노래)란 노래의 가 사 중 ‘매큼한 총각김치 새큼한 그 맛’이란 구절 등은 저속 하고 내용이 상징하는 뜻도 매우 야하다.”라고 당시 심의를 맡았던 Kwak J.W. (郭鍾元, 1915-2001)의 인터뷰 형식으로 부정적인 기사를 실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심의 의견 중에 “매큼한 총각김치 새큼 한 그 맛” 등의 구절이 “저속하고 상징하는 뜻도 매우 야하 다”라는 평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는 그 시대 ‘총각무’나 ‘총 각김치’가 영화 대사에서 나타내는 소위 ‘킹카 남자’라는 뜻 이상의 어떤 은유를 품고 있었다는 것이며, 그 은유는 바로 성적(性的)인 것을 의미한다는 방증이다. 실제 의미를 잘 알 고 있었던 기자와 심의관들은 “능력 있는 킹카”라는 겉으로 드러낸 공식적 이미지와는 다른 ‘저속하고 야하다’라는 숨겨 진 원래 이미지를 짚어 평을 한 것이다. <Figure 6>은 당시 신문들에 실린 영화『Chonggak kimchi (총각김치)』의 광고 포스터이다. 광고의 중앙에 보이는 남자주인공 신성일이 총 각김치를 입에 넣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오늘날이라면 B 급 영화 여자 주인공이 야릇한 표정으로 총각김치를 입에 문 것 같은 ‘매우 야한’ 상상을 불러일으킬 만한 장면이다 <Figure 8>.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60년대 군사정권하의 영화검열은 정치적 검열, 도덕적 검열, 경제적 검열로 구분되었는데(Seo 2008), 이때의 검열은 도덕적 기준을 들이댄 정치적 검열의 성격을 갖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심의에서 ‘일본조에 깊 이 물든 작곡’에 해당하는 노래가 되어 방송금지 처분을 받 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왜색조인 노래 자체보다는 ‘한 일 재수교’라는 정치·외교적 이슈와 반일감정에 연결되어 방 송금지 처분을 받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며, 이에 반해 『Chonggak kimchi (총각김치)』가 금기에 해당하는 성(性)에 연관된 도덕적 문제로 언론과 심의 기관의 강력한 지적을 받 았음에도 영화의 상영 금지나 노래의 방송금지 처분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도덕적 하자는 있으나 정치 문제와 직접 연 결되지 않는 사안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중문화가 정치적이 라는 것은 모든 문화연구자가 기본 전제로 삼고 있을 만큼 보편화 된 개념이며, 군사정권 문화정책의 목표가 오락영역 의 활성화를 통한 탈정치와 우중화(愚衆化)였던 사실’(Jo 2008)을 이해하면 가능한 추론이다.
1950년대 말, 아마도 특정 분야나 특정 계층에 속한 소수의 사람끼리 통하는 유쾌한 은어로 은밀하게 전파되었을 ‘Chonggak kimchi (총각김치)’라는 말은 인기 절정의 스타 커 플이 등장한 영화와 정상급 가수의 노래라는 매체를 통해 급 속하게 전파되어 전국화, 보편화 되기 시작했다. 원래는 ‘장가 안 간 성인 남자의 성기(性器)’라는 뜻을 담고 있으나 점잖은 시대에 맞게 겉으로는 ‘총각의 머리 모양’이라 위장(?)되어 떠 돌던 ‘총각김치’는 검열의 시선을 피해야 하는 영화에서는 다 시 “돈 많고, 좋은 학교 나오고, 외국 다녀오고, 잘 생긴 킹카 ”로 포장되었다. 그러나 속뜻이 ‘총각의 성기’라는 점을 굳이 부인하지 않으면서, 중의적 의미와 스토리를 담아 짜릿한 소 문이 되어 입에서 입으로 급속하게 전파되어 나갔다.
예로부터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으로만 여겨 졌다(Choi 2021). 그러나 새롭게 등장한 미디어의 영향력이 커졌고, 미디어를 탄 소문은 더욱 확산하거나 소문이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발생한다(Matsuda 2016;Sim 2018). 총각김치 이야기 역시 그것이 소문이라는 필터를 거치면서 익숙한 이야기로 재구성되어 좀 더 광범위하게 집단적으로 소비되었고, 이것이 영화에서 다시 신문(新聞)이라는 공적 매 체에 실리면서 하나의 사실이자 객관적 의미로 완성되어 갔 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 ‘Neongkul kimchi (넝쿨김치)’로도 불렸던 ‘Altarimu kimchi (알타리무김치)’는 그 모양새에서 힌트를 얻은 장난기 많은 어떤 사람들에 의해 총각의 성기 로 묘사되면서 ‘Chonggak kimchi (총각김치)’로 은어화하였 고, 그 소문이 세상에 회자 되면서 청춘들의 관심을 끌 영화 의 소재로 콘텐츠화되었다. 콘텐츠화된 총각김치 스토리는 영화라는 매체를 타고 세상에 널리 퍼지고, 신문 기사 등을 통해 실체화되는 과정을 거쳐 사용이 일상화되면서 비속어 (卑俗語)였던 ‘총각김치’가 마침내 1988년 알타리무를 대신 하는 표준어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미디어는 소문의 전달 속도와 범위를 크게 키웠을 뿐 아니라 단순히 소문을 전하 는 수단이나 도구의 범주를 넘어 소문의 성립 그 자체에도 직접 관여한다(Matsuda 2016).’라는 말 대로 영화『Chonggak kimchi (총각김치)』는 성기를 나타내는 비속 은어였던 ‘총각 김치’를 ‘능력 있는 결혼 상대남’이라는 순화된 개념으로 변 환시키는 한편 그 속에 담겨있던 성적 이미지를 버리지 않 은 채 적절하게 활용함으로써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
4. 「총각김치」와 음식문화 콘텐츠
살펴본 바와 같이 전통음식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 『Chonggak kimchi (총각김치)』는 식품이 아닌 문화산업 분 야에서의 상당한 경제적 성과 창출하였으며, 더불어 ‘총각김 치’라는 명칭의 확산과 보편화 및 ‘젊은 남자의 성기’라는 총 각김치의 원래 의미를 ‘능력 있는 젊은 남자’ 또는 ‘총각의 머리’라는 긍정적 의미로 이미지 전환 시키는 의미탈락(意味 脫落)의 과정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런 점에 서 이 영화는 앞 세대 전통음식문화 콘텐츠화의 보기 드문 사례라는 특별한 평가를 받을만하다.
단지 관객들이 흥미 있어 할 만한 은어 하나를 빌어 왔을 뿐 영화의 주제나 전체 플롯(plot)이 직접적인 전통음식 이야 기를 하는 영화가 아니라는 이유로 본격적인 전통음식문화 콘텐츠화라고 평가할 수 있는가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도 있 을 수 있으나 경제적 성과에 더해 전통음식의 명칭과 그에 담긴 이야기가 영화의 모티브(motive, motif)가 되었다는 점, 영화 속 여러 장면에서 실제 총각김치가 등장하고 김치 관련 대사나 영상과 음악 등이 활용되고 있다는 점, 영화를 통한 총각김치 인지도와 이미지 확산 및 전환의 효과가 상 당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당시 영화 제작자들이 의도했 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 영화가 ‘콘텐츠가 그저 산업에 도움 을 주고자 하는 단순 응용학문의 차원을 넘어 전통적인 인 문학의 성과를 올바로 계승하여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다 양한 문화적 가치를 창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Kim 2003)’는 콘텐츠 학계의 주장에 비추어 보아도 ‘전통음식문 화의 콘텐츠화’라는 것이 더욱 명확해진다.
음식문화의 콘텐츠화 요소는 영화『Chonggak kimchi (총 각김치)』에서 볼 수 있는 명칭(名稱)과 명칭에 담긴 의미는 물론 기원(起源)과 변천 과정(變遷 過程) 등 역사. 관련 인물, 재료, 예절과 풍류 등 향유문화(享有文化), 도구, 주변 환경, 오감(五感)에서 느껴지는 관능 요소 등 다양한 내용이 포함 될 수 있다. 또한, 음식을 만드는 과정과 구성 요소들에 얽 힌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음식 이야기의 콘텐츠화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편, 산업화는 경제적 이익이 보 장되었을 때 활성화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전통음식문화 콘 텐츠화에서 초밥, 우동 등 음식문화 스토리를 이용한 만화와 영화, 드라마, 게임들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 일본이나 SNS나 모바일 어플 등 다양한 음식문화 콘텐츠를 활용 중인 유럽 등의 선진 사례 그리고 음식 및 음식문화가 핵심 관광 매력물(tourism attractions)로 자리 잡은 관광업계의 동향 (Kim 2019) 등은 참고할 만하다. 다만, 전술한 Kim(2003)의 주장대로 경제적 성과 외에 우리 전통음식문화를 대외적으 로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음식문화 콘텐츠 분야에서의 관심과 연구도 병행되어야 한다는 점은 놓치지 않아야 할 기 준이다.
전통음식문화 콘텐츠 개발 및 활용 활성화를 위해서는 음 식 학계의 콘텐츠 학문 분야에 관한 관심과 역량 강화 노력 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더불어 콘텐츠나 마케팅 관련 분야 학계와의 학제 간 융합 연구 체제의 구축과 협력도 적극적 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관련하여, 본격적인 음식문화 콘 텐츠로서 세계적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Daejanggeum (大 長今)』이 드라마 제작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전통음식 및 전 통문화 분야 학자와 전문가들의 협력을 통한 완성도 높은 콘 텐츠로 세계적 호평을 받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VI. 요약 및 결론
본 연구는 현대 대표 김치 중 하나로 꼽히는 ‘Chonggak kimchi (총각김치)’의 명칭이 언제, 어떤 이유로 만들어지고, 확산 및 보편화 되어 지금에 이르렀는지 그 기원과 과정을 찾는 것을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총각김치라는 명칭의 확산에 결정적 기여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 영화 『Chonggak kimchi (총각김치)』의 사례를 통해 우리 전통음 식문화의 콘텐츠화에 관한 관심과 논의 활성화 방안을 제시 하는 것을 부수적인 목적으로 추가하여 진행되었다.
‘Chonggak kimchi (총각김치)’라는 명칭은 1959년 김장철 인 11월 여성 월간지『Yeowon (女苑)』의 김장철 특집 기사 에 최초로 등장하였다. 실제로 사용되기 시작한 때는 이보다 조금 앞선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이전에 동일 또 는 유사 제법의 김치를 ‘Neongkul kimchi (넝쿨김치)’나 ‘Altarimu kimchi (알타리무김치)’ 등으로 부르고 기록한 것 으로 보아 문헌 기록보다 훨씬 앞선 시기는 아닐 가능성이 크다. 애초에는 김치 재료인 무의 생김새 탓에 ‘총각의 성기 를 닮은 김치’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지만, 당시 사회적 분 위기에서 도덕적인 비난을 고려한 순화과정을 거쳐 외면적 으로는 ‘총각의 머리 모양을 한 무로 담근 김치’로 의미 전 환이 되어 함께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Chonggakmu (총각무)’는 ‘Chonggak kimchi (총각김치)’라는 명칭이 형성 된 이후에 이 김치의 재료인 무의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따 라 붙여진 것이다. 성적(性的)의미를 담은 은어였던 총각김 치는 동명(同名)의 영화(映?)로 만들어지면서 ‘싱싱하고, 이 해심 많고, 스마트하고, 거기다 외국까지 다녀온, 돈 많은 남 성’ 즉 최고의 신랑감이라는 이미지로 포장되었으나, 대부분 은 그것이 단지 포장된 외부적 이미지일 뿐 실제로는 본능 적 욕구를 자극하는 뜻을 가진 유쾌한 은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쨌거나, 60년대 중반 청춘영화(靑春映?) 시대의 젊 은이들은 신성일·엄앵란이라는 당대 최고 청춘스타 커플이 출연하는 영화에 반했고, 온 국민은 인기가수 현미의 노래에 빠지면서 자연스럽게 ‘총각김치’라는 말이 일상 용어화되었 다. 이런 과정들을 거치며 이미지 전환에 성공한 총각김치는 확산과 보편화 과정을 거쳐 마침내 1988년 ‘Altarimu (알타 리무)’와 ‘Altarimu kimchi (알타리무 김치)’라는 원래의 명칭 을 대신하는 표준어(標準語)로 자리 잡게 되었다. 고유어 계 열의 단어가 생명력을 잃고 그에 대응하는 한자어 계열의 단 어가 널리 쓰이면, 한자어 계열의 단어를 표준어로 삼는다는 표준어 사정 원칙 제22항 기준 때문이다(국립국어원, 2022).
영화『Chonggak kimchi (총각김치)』는 콘텐츠라는 개념 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의 산물이지만 전통음식인 총각김치 가 갖는 표면적(表面的) 또는 이면적(裏面的) 의미들을 주제 와 소재로 삼아 제작하여 흥행에 성공한 이전(以前) 세대(世 代) 음식문화 콘텐츠화의 사례이다. 음식문화의 콘텐츠는 우 리 드라마『Daejanggeum (大長今 2003-2994)』이나 만화 『Sikgaek (食客 2002-2010)』, 일본의 음식 만화 『将太の寿 司 (미스터 초밥왕, 1991-1997)』과 드라마『孤独のグルメ (고독한 미식가, 2012-)』 등에서 보듯 직접적인 경제 효과를 얻을 수 있음은 물론 자국 문화의 이미지와 인지도 제고라 는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런 가능성 때문 에 정부와 산업계의 전통음식문화의 콘텐츠화에 관한 관심 과 욕구가 크지만(Kim 2021), 실제 우리나라에서 음식 인 문·사회 분야 연구 성과의 콘텐츠화 작업이나 음식문화 콘 텐츠 연구 자체는 미미한 실정이다. 향후, 음식문화 콘텐츠 활성화를 위해 학계의 관심과 역량 강화 노력 및 협력 체제 구축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콘텐츠화가 가능한 음식의 인 문·사회 과학 영역에서의 기초연구와 데이터의 축적이 선행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