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 론
김치는 오랜 기간 우리 민족의 식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비 중을 차지해왔기 때문에 단지 반찬이라는 식품 자체로써의 기능을 넘어 구성원 개개인과 강력한 정서적 유대감을 지니 고 있는 특별한 음식이다. 2013년에는 김치를 담그고 나누 는 김장문화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 었고 2017년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33호’로 지정되는 등 ‘김치가 한국 고유의 음식’이라는 사실에 대한 국내외적 인 증은 그 어느 때보다 공고해진 상황이다.
그런데 2020년 말, 중국 측에서 김치의 종주국은 중국이며 한국으로 기술을 전파해준 것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주장이 제기되자, 김치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식 부족으로 그들의 주장이 논리적 허점과 잘못된 근거에 기반하고 있음에도 제 대로 반박하지 못하고 감정적인 대응만 앞세우고 있는 우리 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이는 우리가 한국 대표음식이 라며 자랑삼던 김치에 대해 얼마나 부실한 배경지식을 가지 고 있는지 깨닫는 계기를 제공하였으며 우리의 전통문화 지 식 습득 체계의 부끄러운 민낯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과거에 비해 전통음식 연구의 중요성과 필요에 대한 공감 대는 상당히 제고되었으나 막상 방법론에 있어서, 음식자체 의 물질적 속성과 기능성 연구에 매몰되어 정작 가장 기반 이 되는 문화적 가치와 역사적 정체성을 정립하는 과정이 부 족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를 교훈삼아 전통음식문화 계승 의 본질을 이해함으로써 향후 연구풍토의 개선과 전통지식 계승의 체계를 공고히 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이에 본고는 김치 역사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 및 김치가 중국의 파오차이, 더 나아가서는 전 세계 채소절임문화와 어 떻게 다른지 김치의 독자적 정체성을 명확히 짚어내고 그 근 거를 제시함과 제조법의 변화과정에 반영된 문화적 가치를 조망함으로써 중국의 김치종주국 논쟁에 대한 대응 논리를 하나로 묶어내는데 일조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II. 연구 내용 및 방법
김치 기원과 제조변천과정에 대하여는 이전의 관련 연구 들을(Jang 1972;Jang 1975;Lee 1975;Yoon 1988;Yoon 1991) 총 망라하고 주변학문분과의 새로이 발굴된 기록과 유 적들을 종합하여 발표한 논문(Park 2019)에서 이미 깊이 있 게 다루어진 바가 있으므로 본고에서는 금번 중국발 종주국 논쟁에서 쟁점이 되었던 사안에 집중하고자 한다. 핵심 쟁점 은 중국이 김치의 기원 근거로 들고 있는「Sigyeong (詩經)」 이라는 기록물의 정체 즉, ‘중국이 김치의 기원이라고 주장 하는 「Sigyeong (詩經)」과 저(菹)라는 표기어 문제는 무엇 이며, 이 자료의 내용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라는 식품 사학적인 부분과 제조방식에 있어 ‘중국의 역대 채소절임류 와 다른 우리 김치의 정체성 및 독자적 특징이 무엇인가?’ 이다.
이를 위해서는 중국 파오차이문화와 한국김치문화의 유사 ·차이점 비교를 통한 한국 김치의 독자성 구명이 요구되므 로, 고대-조선시대 김치 역사문화에 관해 방대하고 체계적으 로 접근한 바 있는 ‘조선시대 김치의 탄생(Park 2013b)’ 및 김치의 기원과 변화과정 관련 국내외 연구성과를 총망라한 최신 성과인 ‘김치 기원과 제조변천과정에 대한 종합적 연구 (Park 2019)’, 그리고 비교문화사적 관점의 연구를 위해 세계 김치연구소가 2013-2016년 세계 석학들을 초청하여 진행하 였던 ‘김치학 심포지엄’ 연구결과(World Institute of Kimchi 2013;2014;2015;2016) 중 중국 채소절임의 역사적 변천 과정과 현재 문화를 다룬 자오룽광(Zhao 2013)과 리우샤오 춘(Liu 2013)의 논저를 참조하여 정리하였다.
III. 결과 및 고찰
1. 중국 기원론의 오해와 진실
1) 중국의 「Sigyeong (詩經)」(BC 10C-7C)과 김치의 관 련성
김치는 원시형 채소절임으로부터 출발하여 현재의 형태로 발전한 것으로 김치의 기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소금에 채 소를 절인 단순 채소절임의 역사부터 거슬러 살펴보아야 한 다. 채소절임은 잉여작물을 오랜 기간 저장 보존하기 위한 보편적인 수단이었기 때문에 인류가 농경사회에 진입한 신 석기-청동기시대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본다. 특히 채소의 장 기저장을 위한 절임은 추운 겨울이 있는 북위 35-45도 지역 에서 발달하게 되는데 소금이 인간의 생명유지와 직결되어 있어 인류의 탄생과 궤를 같이하였을 것이므로 소금에 채소 를 절여 보관하는 보존방식이 특정 문화권에서 기원해 다른 곳으로 전파되었다기보다는 자생했다고 보는 것이 최근의 통 설이다. 채소를 소금에 절이는 것은 건조법(乾燥法)과 더불 어 인류가 개발한 가장 오래된 식품저장법 중 하나이기 때 문이다(Ishige 2005).
과거 한국의 1세대 식품학자들이 채소절임 기술의 중국 기 원론을 수용했던 데에는 당시 학계의 지배적 이론이었으나 현재는 비판을 받고 있는 ‘문화전파론(diffusionism)’, 즉 진 보된 문명이 주변으로 전파되면서 발전을 견인한다는 서구 의 제국주의에서 비롯된 연구 관점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이유가 크다. 그로 인해 ‘단순채소절임단계’와 진 전된 기술을 필요로 하는 ‘발효절임단계’를 구분하지 않고 통으로 인식하다 보니 중국과 한국이 각각 절임기술을 고도 화하는 분기점에서 처음부터 다른 지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는 점에 주목하지 못하였다는 한계가 있었다.1)
다시 말해 김치는 ① 원시절임단계→② 단순발효절임단계 →③ 가미발효절임단계→④ 복합발효절임단계를 거치며 현 재에 이른 것으로 특별한 기술을 필요하지 않아 어느 문화 권에서나 자생할 수 있는 ① 원시절임형으로부터 우리 고유 의 발효기술과 민족적 기호도, 환경적 여건에 맞추어 점차 다음단계로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의 「Sigyeong (詩經)」의 저(菹)는 원시형 채소절임에 해당하는 것으로 우리 김치의 직접적인 기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인류의 보편적 채소절임문화 존재를 파악할 수 있는 현 전 최고의 증거로써 기록사적으로는 중요한 의의를 지니기 때문에 사료로 인용되는 것이며, 최초의 기록이 중국문헌이 라고 해서 중국이 모든 원시형 채소절임의 기원이라는 의미 도 아니다.
중국의 주장에 확실하게 대응하기 위해「Sigyeong (詩經)」 의 저(菹)라는 글자는 무엇이며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지 살 펴보도록 하자.「Sigyeong (詩經)」은 중국 주나라 때부터 전승되어 오던 시가(詩歌) 300여 편을 춘추시대에 공자 (B.C.551-B.C.479)가 추려서 기록한 것인데 공자가 쓴 원전 은 소실되었고 후대 학자들이 복원하여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주나라의 존속시기가 BC 10C-7C이므로「Sigyeong (詩經)」속 내용은 지금으로부터 약 3천여 년 전 생활상에 해당되는 셈이다.
여기에는 ‘밭 안에 오이가 있으니 이것을 벗겨 저(菹)를 만 들어 조상(祖)께 바친다(獻)’는 내용이 있는데 저(菹)는 채소 를 오래 저장하는 과정에서 물기가 빠져나와 흐물거리는 모 습을 형상화한 상형문자로<Figure 1> 바로 원시형태의 채소 절임에 해당된다. 즉 늦어도 이 시기부터 인류는 원시형태의 채소절임을 식용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매우 단 편적인 단서에 불과하며 채소절임의 최초 발생지라는 내용 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전술하였듯이 이 자료는 인류가 적어도 언제부터 채소절임을 시작했는지 그 시기를 유추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물로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오히려 동이족 문화인 요하문명이 발굴된 이후 중국의 채 소절임이 북방 동이족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주나라는 고조선(B.C.2333-B.C.108년)과는 국경을 접 하고 있었고 황허(黃河) 하류와 산둥(山東) 일대는 중국의 고 대국가인 은나라(B.C.1600-B.C.1046년)와 주나라(B.C.1046- B.C.770년) 건국 이전부터 동이족의 세력이 분포하던 지역이 었기 때문에<Figure 2-3> 오히려 추운지역에서 거주하던 동 이족의 채소절임 문화가 중원(中原)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 도 제기되고 있다(Park 2019). 중국「Sigyeong (詩經)」에 보 이는 채소절임이 중국 동북지역의 비발효 채소절임인 옌차 이(月奄菜) 문화를 담고 있다는 점에 대하여는 중국 식문화학 자들도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Zhao 2013).
2) 조선시대에 김치를 ‘저(菹)’로 표기하게 된 배경
고대부터 적어도 6세기 때까지 중국에서 채소절임은 저(菹) 라고 불렸다. 북위 때의 농업기술서인 「Jeminyosul(齊民要 術)」(Ga SH 6C)에는 다양한 저(菹)의 조리법이 소개되어 있지만 저(菹)라는 명칭을 가진 음식은 당나라 때까지의 기 록에서만 확인이 되며 송나라 때부터 저(菹)라는 문자는 일 상생활 기록에서 사라졌다. 대신 중국식 채소절임음식은 엄 채(月奄菜), 장채(醬菜), 포채(泡菜) 등 제조방식에 따라 각기 다 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2)
이렇게 중국에서도 사라진 ‘저(菹)’라는 표기어가 조선시 대 접어들어 우리 고유음식인 김치를 지칭하는 표기어로 사 용된 배경은 Park(2013b)의 연구에 자세히 밝혀져 있는데 성 리학에 기반한 유교적 이상국가를 꿈꾸며 고대에 쓰여진 유 교경전들을 추앙하였던데서 이유를 찾고 있다.
전술하였듯, ‘菹’는 채소가 절여져 물이 빠져나온 원시형 채소절임의 모습을 형상화한 상형문자로 주나라의「Sigyeong (詩經)」을 비롯하여 주나라 왕실의 관직제도를 기록한 「Jurye(周禮)」는 물론 「Uirye(儀禮)」,「Yegi(禮記)」 등의 예법서에도 나온다. 모두 조선시대 선비들의 필독서였던 유 교경전들이다. 조선시대 유교경전은 정신적 가치와 생활의 규범으로 일상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경전의 지침을 따르려 해도 간혹 기록 속에 담긴 사물이 몇 천년 전의 것들이라 이 미 사라져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던 경우가 많았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채소절임음식인 ‘저(菹)’였 다. 조선을 건국하면서 바로 주나라의 「Jurye(周禮)」를 모 델로 한 중국 역대 국가의례의 규범이 적극적으로 조선왕실 의 사전(祀典)에 적용되었다. 제사음식 규정도 고대의 규범 에 따르게 되는데 ‘저(菹)’가 채소절임이라는 것은 파악하고 있었으나 구체적인 실체를 알 수 없었으므로 당시 조선에서 만들어 먹던 장과 소금에 절인 김치류가 사용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아동용 학습서인「Hunmongjahoe (訓蒙字會)」(Choi SJ 1527)에 ‘菹 딤 조’라고 풀이하고 있는데, 중국에서도 이미 사라져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저(菹)를 우리가 늘 먹는 고유음식인 ‘딤 ’라고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설명 한 것을 볼 때 ‘저=김치’라는 사회적 약속이 필요했었음이 간파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유교경전인「Jurye (周禮)」나「Yegi (禮記)」,「Uirye (儀禮)」등에 나오는 고대 채소절임인 ‘저 (菹)’가 자연스럽게 우리 김치와 동의어로 굳어지게 되었다. 조선시대 문헌에서 ‘저’라는 글자가 김치를 지칭하는 용도로 사용된 빈도가 많은 이유는 주로 문서를 생산한 이들이 남 성 지식인들이었기 때문으로 여성이 쓴 옛 조리서에서 김치 를 ‘저’로 표기한 사례는 발견되지 않는다.3)
따라서 ‘저(菹)’라는 소릿값이 문자가 아닌 구어(口語)로써 과연 일상생활에서 활용도가 높았을지는 의문이다. 결론적으 로 ‘저(菹)’는 음식 전파와는 전혀 무관하게 조선시대 이후 글자만 빌어 우리 고유음식에 붙여 사용한 것으로 중국 채 소절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렇듯 조선시대 접어들어 유교적 복고주의 영향으로 저(菹)라는 용어의 사용 빈도가 증가하면서 ‘저(菹)’가 김치를 지칭하는 한자 표기어로 정착 하게 되었다.
2. ‘김치’의 정체성과 독자성 형성 과정
앞서 중국 「Sigyeong (詩經)」의 저(菹)와 김치의 관련성 을 설명하면서 채소를 소금에 절이는 원시형 채소절임이 건 조법과 더불어 인류가 개발한 가장 오래된 식품저장법이라 하였다(Ishige 2005). 이후 기술의 진보, 노하우의 축적과 전 승을 통해 채소절임방식이 점차 진화된 형태로 발전하게 되 는데 지난 4월, ‘제 71차 (사)한국식생활문화학회 춘계학술 심포지엄’에서 다음과 같이 우리의 김치의 변화 단계를 시간 축에 따라 구별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 바가 있다(Kim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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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원시절임시대; 소금 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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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발효절임시대; 담금원 다양화(발효식품이 담금원으로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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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가미(加味)발효절임시대; 젓갈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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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복합발효절임시대; 전용 복합양념(고추, 파, 마늘, 생강, 파, 무 등)+버무림 - 한국만 존재
위의 기준은 한국 채소절임이 시간에 따라 기술적으로 변 화해 온 과정을 대표적 특징에 따라 작위적으로 구분한 것 이므로 의도를 잘 파악하여 사용할 필요가 있다. 김치를 제 외한 타문화권의 채소절임류는 ① ②의 형태에 한정되어 있 는데, ①에서→④의 방향으로 변화는 ‘김치’의 특이성을 설 명하기 위한 구분이지 우열을 나누거나 채소절임의 진화 방 향성을 제시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자칫 문화적 우월주의적 관점으로 비추어질 우려가 있고 현재도 모든 형태가 공존하 고 있기 때문에 ‘시대’라는 표현이 적합한지 용어와 시기의 구분에 대하여는 학계의 논의를 거쳐 좀 더 정교화할 필요 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김치의 정체성과 변화과정을 설 명하는데 매우 유용한 개념이므로 본고에서는 이를 차용하 여 정리해 보았다.
‘원시절임시대’의 상황에 대하여는 앞장에서 설명하였으므 로 다른 문화권과 상이성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발효절임시 대’ 이후부터 한국의 채소절임류에 보이는 특징과 그 근거를 확인해 보고자 한다.
1) 원시절임에서 발효절임시대 진입(1-3세기); 중국과 한국 의 절임문화 분화
앞서 채소절임 발전 과정을 시대별로 구분하였던 것을 여 기에 적용해보자면, 문화권별 차이가 없는 ① 원시절임시대 를 벗어나 ② 발효절임시대에 접어들면서 중국과 우리나라 채소절임의 가공, 제조방식은 다른 특징을 띄기 시작한다. 어 느 문화권에나 존재하였던 원시형태 채소절임이 기술과 노 하우의 교류나 축적과정에서 각자 자연생태, 사회경제적 여 건, 민족적 기호에 영향을 받으며 달라지게 되는데 중국과 한반도 두 문화권이 서로 상이하다는 점이 중국 북위(北魏) 때 산동지역의 가사협(賈思)이 집필한 현전 최고의 농업 기술서인「Jeminyosul (齊民要術)」(Ga SH 6C)에서 확인된 다. 「Jeminyosul (齊民要術)」이 편찬된 시기는 한반도의 삼 국시대에 해당되므로 적어도 삼국시대 이전부터는 중국과 한 반도의 채소절임 문화가 각기 독자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 음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장지현은 고구려의 발효문화 발달을 근거로 이 시기를 1-3세기 경으로 추정하였다(Jang 1972).
「Jeminyosul (齊民要術)」을 통해 확인되는 원시절임시대 에서 발효절임시대를 구분 짓는 기술상 특징은 크게 ‘원료의 전처리법’과 ‘담금원의 종류’ 2가지 측면이다.4)
첫째, 한국은 생채소를 그대로 이용하는 반면 중국은 가열, 건조 등 전처리를 거쳐 초기 발효에 관여하는 미생물 수를 최소화시키려는 목적의 제조법 비중이 높다.
둘째, 1차 원료인 소금을 직접 담금원으로 활용하는 방식 에서 2차 가공품인 장, 식초, 술 등의 발효음식을 담금원으 로 하여 재발효하는 방식으로 발전하는데, 이 과정에서 중국 은 한국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술과 식초의 활용이 두드러진 다(Park 2013a;Park 2013b).
이와 같은 사실은 「Jeminyosul (齊民要術)」중 채소절임 방법을 담금원의 유형에 따라 정리한 <Table 1>에서 확인할 수 있다(Jang 1972). 단순히 소금에만 절인 방법은 배추를 원료로 한 제법 3종에 불과하고 우리나라 장(醬)과 유사한 두즙(豆支汁)이나 두시(豆豆支)를 이용한 절임은 2종만 찾을 수 있다. 총 37종의 채소절임 중 절반 이상에 해당되는 16건이 식초나 산미료인 오매(烏梅)즙, 초유(酢乳) 등을 담금원으로 이용한 것이며, 7건이 소금과 주조(酒糟)를 이용하였다. 나머 지 소금을 사용한 경우도 단독으로 쓰는 경우는 극소수이며 곡물죽과 전분 당화(糖化)를 위해 국(麴)을 섞어 사용한 경우 가 대다수이다(Park 2013b).
아쉽게도 우리나라 삼국시대 채소절임음식 제조방식을 구 체적으로 알 수 있는 근거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고고학 적 유물을 비롯해 주변국인 중국과 일본의 기록 등을 통해 담금원으로 소금과 장을 활용한 발효음식문화가 융성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Park 2019).
부연하자면 중국(220-280) 역사서인「Samgukji (三國志)」 의 <Wiseo (魏書)>에 ‘고구려인이 발효저장음식을 잘 만들었 다(自喜善藏釀)’는 기록이 있고, 신라 신문왕(683)이 김흠운 의 딸을 신부로 맞으면서 보낸 납채 물 술(酒), 장(醬), 메주 (豆支), 젓갈() 등의 발효식품이 포함되었다는 「Samguksagi (三國史記)」의 기록 등이 있다. 유적으로는 속리산 법주사의 승려들이 김장용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돌항아리(성덕왕 19년 720년 설치)가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창건된 전라도 남 원 실상사와 강원도 흥전리에서는 장과 젓갈을 보관하던 곳 간인 장고(醬庫)터, 젓갈을 항아리에 담아 운송했던 내용이 기록된 신라시대 목간(木簡) 등을 통해 당시 소금, 장, 젓갈 위주로 발달한 발효저장문화를 가늠할 수 있다(Park 2019).
또, 일본의「Shosoinmonjo (正倉院文書)」(752)와「Enkishiki (延喜式)」(900-1000)에는 소금 및 콩이나 쌀을 원료로 사용 하여 만든 채소절임인 ‘수수보리지(須須保利漬)’라는 음식이 기록되어 있는데 일본에 양조기술을 도입한 백제인 인번(仁 番)이 제조법을 전달한 것으로 추정한다(Yoon 1987, Park 2019). 이러한 근거들은 한반도의 채소절임문화가 삼국시대 이미 상당 수준 발달되어 있었고 주로 소금과 장을 담금원 으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이어져 왔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 이다.
고려시대 문헌에서도 염제(鹽), 지염(漬鹽), 염채(鹽菜), 장과(醬瓜) 등 소금과 장으로 담근 저채류가 확인되며 우리 나라 현전 기록 중 김치관련 내용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 는 가장 오래된 문헌인 이규보(1168-1241)의「Donggugisanggukjip (東國李相國集)」에 실린 <가포육영(家圃六詠)>이 라는 시에 ‘순무를 장에 넣으면 한여름(三夏)에 좋고, 소금에 절이면(漬鹽) 긴 겨울을 버틴다(九冬支)’라는 내용이 있다. 고 려 말 문신인 이색(1328-1396)의 시에는 ‘오이로 만든 김치 (醬瓜)’, ‘우엉, 파, 무를 한데 섞어 장에 절여 만든 김치(牛蒡 蔥蘿蔔幷沈菜醬)’가 나오는데 역시 소금과 장을 담금원으로 젖산발효를 유도해 은은한 감칠맛이 나는 김치가 주류를 이 루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Park 2013).
2) 가미(加味)발효절임시대(14-15세기부터)
무엇보다, 김치가 다른 문화권의 채소절임과 확실히 동떨 어진 위상과 차별적 정체성을 확보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동물성 발효식품인 젓갈의 첨가이다. 식물성 절임식품에 동 물성 해산물 절임식품을 함께 넣어 발효시킨 음식은 오롯이 한국 음식문화에만 존재하는 특이한 조합으로 다른 문화권 의 채소절임 방식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Ishige 2005)5) 김치 독자성의 핵심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젓갈문화는 이미 고대부터 발달해 있었기 때 문에(Yi 2000, Park 2019)6) 식물성 발효식품과 동물성 발효 식품이 만날 수 있는 여건이 일찍부터 마련되어 있었을 터 이나 이렇게 독특한 조합이 어떠한 연유에서 처음 시도되어 김치레시피의 전형(典型)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는지 그 배경 을 정확히 알아내기는 어려우므로 해석학(Hermeneutics)적 방법론으로 접근이 필요하다.
추정컨대 첫째로는 소금이 아닌 감칠맛을 내는 발효음식 으로 간을 하는 식문화의 영향이 작용했을 가능성을 들 수 있다. 한식은 나물을 무칠 때나 국물음식을 만들 때 소금이 아닌 된장, 간장, 된장(고추장), 액젓 등으로 간을 한다. 한식 의 근간을 이루는 기본 맛이 발효에 기반한 복합미라는 의 미이며 그만큼 복합발효조미 맛에 대한 기호도가 높다고 볼 수 있다. 된장에 절인 장아찌, 간장에 절여 만든 장김치가 젓 갈김치 이전에 먼저 존재했으니 채소절임에 젓갈 사용을 시 도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Jeungbosallimgyeongje (增補山林經濟)」‘조황과법(糟黃 瓜法)’ 항목 말미를 보면 ‘황과 늙은 것을 즙장7)이나 장에 담 그거나 소금에 절였다가 새우젓국을 부어 먹으면 좋다(黃瓜 未老者 同沈汁醬中 或 沈醬瓮中 或 鹽淹取出 投蝦汁 中 皆可)’는 설명이 있는데 바로 젓갈김치 제조법이 어떠한 방 향성을 지니고 완성되었는지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둘째로는 젓갈이 초기에 무, 오이, 동아와 같이 수분함량 이 높고 아삭한 식감을 지닌 재료부터 사용되면서 ‘김치’가 아닌 ‘젓갈’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최초의 젓갈김치에 해당하는 ‘감동저’는 ‘감동해’라는 이름 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으며8)「Juchochimjeobang (酒醋沈菹 方)」(1500s or Early 1600s)이 발굴되기 전까지 최초의 젓 갈김치 기록으로 알려져 있던 「Jeungbosallimgyeongje (增 補山林經濟)」의 ‘황과해저(黃瓜菹)’는 오이, 「Somunsaseol (聞事說)」의 ‘청해(菁)’는 무로 만들었다. 이로 미루어 오늘날 김장김치나 어리굴젓과 같은 양념젓갈을 만들 때 무 를 첨가하는데서 볼 수 있듯이 ‘젓갈의 짠맛 중화나 식감의 상승을 위해서 젓갈에 오이와 무를 넣었거나, 어쩌면 이들이 젓갈 발효와 맛의 상승에 도움이 되더라는 경험을 토대로 (diastase와 같은 전분분해효소 역할) 채소를 첨가했으리라는 가설’도 세워볼 수 있겠다. 이는 오늘날 통배추김치를 담글 때 무를 큼직하게 넣거나 무채를 상당량 첨가하는 것과 같 은 이치이다. 또, 젓갈과 유사한 동해안의 식해(食)류의 경 우 누룩이나 엿기름을 넣어 식해 속 곡물을 당화시켰고 대 구깍두기, 서거리깍두기 등 생선이나 해산물 비중이 높은 김 치가 주로 무김치류에 많다는 점이 가정을 어느 정도 뒷받 침한다. 이에 대한 연구는 추후 보완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 된다. 하지만 젓갈은 매우 귀한 식재료였기 때문에 조선초기 까지는 부유층만 접할 수 있는 김치였다. 중국 사신 접대나 귀한 선물용으로 활용되었던 기록이「Sejongsillok (世宗實錄)」 (1426.06.16.)과「Munjongsillok (文宗實錄)」(1450.10.17.), 그 리고 이자(李, 1480-1533)와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의 문집을 비롯해(Park & Kwon 2017), 유몽인의 「Eouyadam (於于野談)(16-17C)」등에 남아있어(An 2002) 일부 계층에 한정적이기는 하였으나 젓갈김치 제조법이 완성된 시기는 조 선 초기 이전부터였을 것으로 본다.
젓갈김치가 보편화된 시기는 18-19세기경부터이다(Yi 2000;An 2002). 망(網) 어업 기술의 발달에 따른 어획량의 증가와 수산물 가공기술 및 유통의 발달로 젓갈의 이용이 수 월해졌던 것이다. 때마침 외래에서 유입된 고추를 넣으면 젓 갈의 비린 취 제어에 효과가 있다는 경험치가 확산되면서 이 후부터 젓갈김치가 김치레시피의 전형(典型)으로써 굳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젓갈김치의 보편화는 김치의 맛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을 뿐 아니라 김치문화에도 큰 반향을 가져다주었다. 겨 울에 김장을 담기위해서는 김치용 젓갈의 주 어종인 조기, 민 어 등 흰살생선류와 새우류의 주산지인 서해안로부터 각 어 획기에 맞춰 잡힌 어물들을 공수하여 미리 젓갈로 담가두어 야 하므로 ‘가미발효절임시대’에 접어 든 후에는 ‘젓갈담기’ 가 중요한 가정행사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 지방마 다 공급받을 수 있는 어종이 다른데다가 젓갈 역시 발효식품 인 관계로 맛이 담그는 사람에 따라 달랐기 때문에 젓갈은 김 치의 맛을 결정하는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하였고 지역마다 집 집마다 김치 맛이 천차만별로 다양해짐으로써 오늘날 김치문 화의 다양성을 제고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3) 복합발효절임시대(17-18세기부터); 김치 완성 단계
가미발효절임의 시작은 14-15세기부터이나 보편화된 것이 18세기 이후이므로 복합발효절임과 가미절임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전까지의 채소절임은 담금원에 채소를 그대로 직접 넣는 1차례의 과정으로 제조가 끝나는 방식이다. 고려-조선초기 기록에서 향신재료(생강, 마늘, 파, 여뀌, 자소, 형개 등)를 활용하는 사례가 확인되기는 하나 여 전히 직접 담금 형태로 파오차이나 피클 등 세계 여느 채소 절임 제조법과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김치의 경우, 재료별 최적의 사용 비율로 별도의 전용양념을 만들어 두고, 채소를 생채소 상태로 1차 담금원 인 소금에 절였다가 다시 2차 담금원인 전용 복합양념에 버 무려 발효시키는 방식으로 발전하면서 제조사(史)에 있을 새 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1차 담금원(소금물) 넣었다가 건져 씻어낸 후 다시 2차에 전혀 새로운 담금원(복합양념)을 쓰기 때문에 직접 담금법과 다른, 김치에 특화된 제조프로세스이다. 2차에 걸쳐 담금원 에 넣는다는 뜻에서 ‘2차 생채침채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 으며 우리 김치만의 특징이다(Jang 1975). 2차 담금원이 ‘젓 갈, 여러 채소부재료, 향신양념이 버무려진 복합양념’이기 때 문에 이 시기를 ‘복합발효절임시대’라고 명명하였다. 이때 담 금원으로써 젓갈, 향신채소와 고춧가루 등을 한데 버무린 전 용양념이 사용된다는 것도 독특하다.
코덱스 김치규격(223-2001)을 보면 김치가 유사 채소절임 류들과 다른 이와 같은 특징이 잘 제시되어 있다. 김치의 정 의를 “주원료인 절임배추를 여러 가지 재료(고춧가루, 마늘, 생강, 파 및 무 등)로 구성된 혼합양념으로 버무린 후 저온 에서 젖산생성을 통해 발효된 제품”이라고 하여 우리 김치 제조방식에 있어서의 차별적 요소를 다음과 같이 특징지은 것이다.
이를 제조공정과 원료 측면으로 분리해서 보자면, 첫째는 제조 프로세스의 차별성이다.
2차례에 걸친 담금원의 교체 과정을 통해 김치는 특별한 맛과 기능성을 지니게 되었다. 소금물 절였다가 물로 세척하 여 탈수하는 1차 과정에서는 초기 세균이 제거되고 채소의 수분함량이 낮아져 저장성은 높아지면서 좋은 발효조건이 만 들어진다. 이때 채소의 세포막과 원형질 사이에는 틈이 생긴 다. 버무린 복합양념을 담금원으로 2차로 과정을 거치는 동 안 채소의 분리된 세포막 안으로 양념이 침투하고 채소 속 성분은 도로 양념으로 흘러나오는 삼투압현상이 일어나면서 맛, 향미, 영양성분, 유산균총 등이 끊임없이 바뀌게 된다.
원재료가 열처리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아삭한 식감은 잘 유지되면서 물질교환도 잘 일어난다. 그래서 김치를 갓 담갔을 때부터 완전히 시어 버릴 때까지 김치의 맛과 물성 은 변화무쌍하게 달라진다. 김치가 겉절이부터 묵은지까지 다양하게 이용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담근 후 살균처 리가 불가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치는 ‘데침, 살균, 밀 봉 등의 제조프로세스 상에서 미생물 제어’를 하지 않고, ‘저 온보관이라는 저장조건의 통제’를 통해 미생물의 대사활동을 조절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때 미세한 공기구멍이 있는 우리나라의 옹기도 중요한 몫을 하였는데 공기구멍이 없는 도자기에 채소절임을 저장하는 중국과 차이가 나는 부분이 다(Park 2013a). 김치가 장기간 이송, 유통하는 중 부풀거나 빨리 물러지는 현상이 생긴다고 해서 중국의 파오차이처럼 살균공정을 거치지 않는 것도 김치가 추구하는 ‘생채침채 및 저온 자연발효유도’라는 제조 방향성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불편함이 오히려 김치 발효과정 중 일어나는 여러 성분과 미생물균총의 역동적 변화를 유발함으로써 새 로운 기능성 물질들을 찾아낼 수 있는 기회로 작동하고 있다.
둘째는 2차 담금원인 복합양념의 재료구성, 그리고 주재료 에 혼합하는 방식의 특이성이다.
이상발효를 막거나 맛을 상승시키기 위해 향신료 등을 추 가하는 방법은 다른 채소절임류에도 있다. 중국의 파오차이 도 유사한데 채소에 소금물을 붓고 여기에 팔각, 산초 등의 향신료를 추가한 뒤 식초, 술을 붓는다. 우리나라도 2차 담 금 프로세스가 도입되기 전에는 분디(제피, 산초라고도 함), 여뀌, 정가(형개), 자소 등의 향신채소를 원재료에 직접 첨가 하는 형태로 제조하였다. 단지 여러 재료를 곁들여 넣는 것 과 다지거나 채를 쳐서 표면적을 최대화 시킨 후 힘을 가해 버무리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부재료의 성분들이 침출되는 정도, 서로 섞이는 비율, 다 시 주재료의 물질들과 어우러지는 결합성이 다를 수밖에 없 기 때문이다. 김치의 양념은 우리말로 ‘비빔’, ‘버무림’, ‘섞 음’에 해당되는 물리적 교반(攪拌)을 통해 단지 ‘넣음’과는 다른 향미의 변화가 일어난다. ‘복합발효절임시대’에 들어와 무, 미나리, 갓, 파 등의 여러 채소와 고추, 마늘, 생강 등의 향신양념, 그리고 가미(加味)의 핵심원료인 젓갈을 한데 모 두 섞은 후, 물리적인 힘을 가해 별도의 양념으로 만들어 이 를 2차 담금원으로 쓰면서 가미발효절임의 효과는 한층 상 승할 수 있었다.
한편, 무엇보다도 김치의 시각적, 미각적 완성도를 높여준 계기는 고춧가루의 첨가이다. 외국인들이 김치에 대한 지니 고 있는 주도적 이미지가 바로 고추에서 비롯된 강렬한 빨 간색과 매운맛으로, 그들의 음식에서 좀처럼 경험하기 힘들 기 때문이다. 서구인을 대상으로 김치에 관한 인식과 이미지 를 조사했던 연구결과에서도(Kwon et al. 2019) 김치를 처음 접했을 때 가장 충격적인 요소는 외관으로 ‘빨갛고 흐믈거리 는 모양’이, 관능적으로는 ‘혀가 타들어갈 듯한 매운 맛’이 꼽힐 정도였다.
또 한 가지, 복합양념이 김치에서 시너지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최적의 조합을 이루어주는 배추의 공이 크다. 배추는 1800년대 중엽 이후 이파리가 많이 달린 결구성 품종의 재 배가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점차 젓갈과 갖은 향신양념을 함 께 버무린 섞박지형 양념소를 배춧잎 사이사이에 넣는 형태 의 김치가 주류로 자리잡아가게 되었는데 양념과 배춧잎 사 이의 물질교환에 더 유리한 방식이기도 하지만 양념이 배춧 잎으로 얌전히 감싸여진 모양새는 보기에도 예쁘다. 통배추 김치와 함께 결구성 배추 탄생이후 만들어진 개성식 쌈김치 는 아름다움의 정수라 할 만하다.
참고로 중국 역대 조리서와 현재 광동성 객가족 채소절임 의 제조방법을 보면 김치와 ‘다름’에 대한 이해가 쉬워진다. 김치의 제조법과 비교해 결코 단순하거나 쉬운 방식이 아님 을 알 수 있다. 단지 서로 다른 것이다.
<청(靑)대 말기 『중궤록』의 스촨(四川) 파오차이(泡菜)>
항아리에 채소를 넣고 소금으로 절이는데, 반드시 채소가 잠기 게 물을 붓는다. 마치 방한 모자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된다. 물 을 채우면 공기가 안으로 들어가지 낳고, 채소는 상하지 않게 된다. 이 때 국물은 산초나무와 소금을 넣고 보글보글 끓이고 술을 조금 넣어 만든다. 모든 채소는 햇볕에 말려야 물에 담글 수 있다. 곰팡이가 생겼다면, 소주를 조금 넣는다. 채소를 추가 한다면 반드시 소금과 술도 더 넣어야 쉬지 않는다. 하루에 한 번 물을 갈아줘 마르지 않도록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맛이 좋 아진다(Zhao 2013).
<중국 광동지역 객가(客家)족의 채소절임류>
셴차이(절임 채소: 咸菜) 밭에서 채소를 말린 후 소금으로 문 지른 다음 자기항아리에 넣는데 물과 공기가 들어가지 못하도 록 한 후 밀봉하여 항아리를 뒤집어 보관한다. 공기가 들어가 는 것을 막고 안에서 생긴 소금물은 밖으로 빠져나오게 하기 위함이다. 염수로 절인 수이셴차이는 개채(갓)를 깨끗이 씻은 후, 말린다. 채소 자체의 수분을 없애기 보다는 생수를 제거하 기 위함이다. 셴차이를 담그는데 사용되는 염수는 끓여서 식힌 물로 만들어야 한다. 기타 옌차이류는 재료를 차가운 물에 담 가, 정량의 소주와 설탕을 넣고 밀봉하여 익히면 된다. 숙성시 간은 재료의 질감에 따라 다른데, 대개 한 달이면 된다(Liu 2013).
IV. 요약 및 결론
이상으로 김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근거로 제시되고 있 는 중국문헌과 우리 김치의 관계를 비롯하여 제조방법, 원재 료 등 김치자체의 속성에 나타나는 김치의 독특성과 그 형 성과정을 확인하였다.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김치가 채소 절임의 기원이라는 근거로 지목되어왔던「Sigyeong (詩經)」 은 보편적 채소저장 방식인 비발효 원시절임형태 음식을 기 록한 것으로 채소절임의 기원이나 전파 근원지를 의미하는 자료는 아니며 적어도 인류가 채소를 저장하여 먹기 시작한 시기를 파악할 수 있는 사료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을 제 시하였다. 또한「Sigyeong (詩經)」의 저(菹) 문화는 중국 북 부지역의 채소절임문화를 담고 있는 것으로 고대 이 지역은 한족(漢族) 이 아닌 동이족의 주 활동무대였다는 점도 상기 할 필요가 있다.
제조방법적 측면에서 김치의 독자적 특성은 동물성젓갈과 식물성재료의 조합이라는 원재료의 구성이 핵심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2차 생채침채라는 제조프로세스를 거쳐 완성시킨 데에 방법적 차별성이 있다.
김치는 가장 하위 기술에 해당하는 ① ‘원시절임시대’에서 벗어나 ② ‘발효절임시대(1-3세기부터)’에 접어들어, 생채소 를 이용해 주로 소금과 장에 기반한 담금원을 사용하면서 중 국의 채소절임과 ‘원료 채소의 전처리 방식, 담금원의 종류 에서 기술적 분화’가 되었으며, ③ ‘가미발효절임시대(14~15 세기부터)’에 동물성 발효식품인 ‘젓갈이 추가되며 전 세계 어떤 채소절임에서도 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정체성을 지 닌 채소절임이 탄생’하였고, 최종적으로 ④ ‘복합발효절임시 대(17-18세기부터)’에 들어 ‘1차 담금원인 소금물에 절였다 가 다시 고추가 포함된 별도의 전용양념을 2차 담금원으로 활용하여 만드는 기술적 진보’가 일어나면서 다른 어느 나라 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자적인 형태와 맛을 지닌 음식으 로 탈바꿈하게 되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
음식의 제조방법이 한 지역에서 식문화로 정착하는 과정 에서 자연환경, 기호, 신체에 대한 기능성과 이것을 받아들 이는 풍토, 전승적 조리가공의 기술, 식생활 양식, 사회적 정 세 등이 관여하기 마련이며 그로인해 유사한 환경과 기호를 공유하는 집단간에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Kimura 1991). 채 소의 장기저장을 필요로 했던 문화권에서 자생하였던 인류 보편적 채소절임음식이 이렇게 유별난 차이를 지닌 김치라 는 음식으로 변모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척박한 자연과 열악 한 조리환경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데 창의성을 발휘해야했 던 조상들의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