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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225-7060(Print)
ISSN : 2288-7148(Online)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Food Culture Vol.34 No.6 pp.671-682
DOI : https://doi.org/10.7318/KJFC/2019.34.6.671

Study on the Historical Genealogy of Bulgogi

Kyou-Jin Lee*
Department of Food and Nutrition, Kyungnam University
Corresponding author: Kyou-Jin Lee, Department of Food and Nutrition, Kyungnam University, 7 Kyungnamdaehak-ro, Masanhappo-gu, Changwon-si, Gyeongsangnam-do, Korea Tel: +82-55-249-2512 Fax: +82-0505-986-2184 E-mail: aroma711@kyungnam.ac.kr
November 5, 2019 December 18, 2019

Abstract


This study reviewed the literature on the changes in Maekjeok, Seoryamyeok and Neobiani. Choi Nam-sun first mentioned the Maekjeok in「Maeilsinbo」 as a “Buyeo·Goguryeo” style meat roast in 1937. Maekjeok was assumed to be made of various kinds of meat, including wild boars, and it was seasoned and baked as a whole. Seoryamyeok is a royal food found in Uigwe of the Joseon Dynasty and meat that was also eaten in the private sector. In 1609, the ingredients for the dish were pork, but beef was later used. The recipe has been simplified since the 19th century. Neobiani is known as royal cuisine, but it does not appear in official records. The first known record thus far is ‘Neobiani’ in「Siuijeonseo」. On the other hand, ‘Neobuhalmi’ which was presumed to be the same food as ‘Neobiani’, was found in a「Dictionnaire Coreen-Francais」(1880). In addition, ‘Neobiani’ was found in「A Korean-English dictionary」(1897). From Maekjeok, followed by Seoryamyeok and Neobiani, Korean roasting meat culture has a common feature of roasting pre-sauced meat, and this trait has continued to bulgogi.



불고기의 역사적 계보 연구
- 맥적, 설야멱, 너비아니에 대한 문헌고찰을 중심으로-

이 규 진*
경남대학교 식품영양학과

초록


    I. 서 론

    우리나라의 전통 육류구이는 고구려 시대 ‘맥적(貊炙)’에 서 유래하며, 불교의 영향으로 잊혀졌던 맥적이 고려시대에 ‘설야멱(雪夜覓)’으로 되살아나 조선시대에 걸쳐 이어졌고, 조 선 후기의 ‘너비아니’에서 현재 ‘불고기’로 연결된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Lee 1985;Kang 1987;Kim 1995). 그런 데 한편으로는 그 시초부터 각 변천 단계마다 이견과 논란 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불고기는 우리나라 대표 음식 중 하나로 불리지만 그 시 초와 유래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자료가 부족하고, 너무나 긴 시기를 다뤄야 하는 어려움 등으로 체계적인 연구가 거 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통념으로 근거 없는 주장이나 출처 없는 인용이 계속 확산되어 이로 인한 오류가 많이 발 견되고 있다. 최근 온라인상에서 불고기를 뜻하는 한자어인 ‘소육(燒肉)’과 일본의 ‘야키니쿠(燒肉, やきにく)’와의 관련 성을 놓고 많은 논란이 벌어진 것이 그 하나의 방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의 관련 연구는 맥적의 요리법과 연원에 대한 역사 적 고찰을 수행한 연구(Park 2013b), 조리서를 대상으로 설 하멱적의 제법이 후대 육류구이 조리법에 계승되고 변화된 과정을 추적한 연구(Park et al. 2011), 너비아니와 불고기의 개념과 의미에 대한 연구(Lee & Cho 2010) 등 맥적과 설하 멱, 너비아니가 개별적으로 연구되어 왔다. 그 밖에 Sung et al.(2017) 은 한우를 문화적 관점에서 접근하면서 시대별로 살펴보았다. Kim & Cha(2015)은 조선시대 고문헌에 나타난 소고기의 식용과 금지에 대해 연구하였고, Lee et al.(2018) 은 근대이후 조리서에 수록된 소고기 건열 조리법을 고찰하 였다. 이 중 Park et al.(2011)의 연구에서는 설하멱 제법을 중국의 ‘소육법(燒肉法)’과 비교하여 차이점과 특징을 분석 하고 우리나라 우육구이의 독창성을 밝혔다. 이렇게 불고기 의 각 발전 단계마다 연구 성과가 있었으나 그 상호 연관성 의 연결고리와 전체 흐름을 포괄적으로 살펴본 연구는 없다.

    본 연구의 목적은 우리나라 육류구이의 기원으로 여겨지 고 있는 맥적과 설야멱, 너비아니에 이르는 역사적 계보를 살펴보고 체계적으로 고찰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태까지 다 소 막연하게 불고기의 발전 단계로 생각해왔던 맥적, 설야멱, 너비아니의 흐름에서 어떤 점이 면면히 계승되어 왔는지, 또 한 변화된 점은 무엇인지 살펴보고 불고기가 역사적으로 거 쳐 온 발전단계를 고찰하고자 한다.

    II. 연구 내용 및 방법

    본 연구는 우리나라 전통 육류구이 발전 단계를 고찰하고 자 문헌연구방법을 이용하였다. 기본 자료로는 농림수산식품 부와 한식재단에서 펴낸Archives of the Korean Royal Cuisine of the Joseon Dynasty (조선왕조 궁중음식 고문헌 자료집)1~30권에 포함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조 선왕조의궤(朝鮮王朝儀軌), 음식발기(飮食發記), 기타 고문헌 을 살펴보았다.

    또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아카이브를 활용하여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조선왕조실록, 朝鮮王 朝實錄)(http://sillok.history.go.kr), The Daily Records of Royal Secretariat of Joseon Dynasty (승정원일기, 承政院日 記)(http://sjw.history.go.kr)에서 육류구이에 대한 기록을 검 색했다. 한국고전번역원(http://db.itkc.or.kr)에서 구축한 한국 고전종합DB에서는 개인문집 등에 기록된 육류구이를 명칭 을 중심으로 찾아보았다. 그리고 구체적인 조리법을 알아보기 위해서는Eumsikdimibang (음식디미방), Sallimgyeongje (山林經濟), Jeungbosallimgyeongje (增補山林經濟), Kyuhapchonseo (閨閤叢書),Siuijeonseo (是議全書), Joseonyorijebeop (朝鮮料理製法),Joseonmussangsinsigyorijebeop (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등의 조리서를 살펴보 았다.

    아울러 근·현대 시기 사전을 참고하였다. 국어사전을 비 롯해서 특히 새로운 문헌 발굴을 위해 구한말 선교사들이 편 찬한 사전인Dictionnaire Coreen-Francais (韓佛字典),A Korean-English dictionary (韓英字典)등을 살펴보았다. 그 밖에 Maeilsinbo (매일신보)등 신문자료, 소설, 그리고 최근 고고학 분야 연구 성과 등 최대한 관련 자료를 찾고자 했다. 자료의 음식명이나 설명문 인용 시 원문이 한자인 경 우는 한자를 먼저 표기하고 괄호 안에 한글을 병기하였고, 국한문 혼용과 한글본인 경우 원서의 표기법을 따랐다.

    III. 결과 및 고찰

    1. 맥적(貊炙)

    맥적을 우리 민족의 음식으로 처음 주목한 사람은 최남선 이다(Park 2013b). 그런데 최남선이 맥적을 처음 언급한 시 점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최남선은Gosatong (故 事通)(1943),Joseonsangsingmundap (朝鮮常識問答)(1946), Joseonsangsik (朝鮮常識)(1948)을 통해 ‘부여·고구려계 고기구이’를 언급했다. 1943년Gosatong (故事通)에서 “맥(貊)은 동북의 부여계 민족을 가리키는 것이다. 맥적(貊炙), 곧 부여식 고기구이(Choi 1943)”라고 하였다.Joseonsangsingmundap (朝鮮常識問答)(1946)에서는 “조선의 음식 만 드는 법에 무엇이 가장 유명합니까”라는 물음에 “첫째 고기 구이가 예로부터 유명하야 시방말로 하자면 방자고기, 산적, 섭산적 가튼 것이 부여, 고구려 시절에 크게 발달하고 이 법 이 중국으로 들어가서 중국의 음식내용에 혁명을 일으켰다” 고 하며 “원래 부여, 고구려는 북방 추운 지방의 나라로서 기름기를 많이 먹게 된 관계가 있으매 저절로 짐승을 많이 치고 또 그 고기를 다루는 솜씨가 특별히 발달(Choi 1946)” 했다고 하였다.

    그리고Joseonsangsik (朝鮮常識)(1948) 서문에서는 이 책이Maeilsinbo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던 글을 모아서 만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최남선은 1937년에 매일신보 부 사장이었던 이상협이 자신에게 “재료 정리의 의미로써 그 일 부를 성문(成文)하여 그의 주재하는 매일신보 학예면에 게재 하기를 종용”하여 신문에 글을 썼는데, 이 글들을 모아 일제 강점기에 책을 내려고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방 후 에 간행하게 되었다고 술회했다(Choi 1948). 실제로 맥적을 언급한 부분을Maeilsinbo (매일신보)1937년 3월 7일자 에서 <Figure 1>과 같이 찾아 볼 수 있으며, 이 내용은 Joseonsangsik (朝鮮常識)에 실린 것과 동일하다. 따라서 최남선이 맥적에 대해 처음 언급한 시점은 현재 알려진 바 처럼 Gosatong (故事通)이 발간된 1943년이 아닌, 1937 년Maeilsinbo (매일신보)로 거슬러 올라간다.

    매일신보1937년 3월 7일자에 실린 글의 제목은 “高麗 (고려)”인데, 1937년 당시 중국요리 중에 ‘고려’가 붙는 음식 들은 우리나라로부터 전래된 조리법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 다. 그 글 첫머리에 “조선인의 특징을 음식물의 방면으로 살 피면 무엇보담 牛肉一味的偏食(우육일미적편식)의 習(습)이 두드러진다”고 하고 중국 진(晋)시대의 Susingi (搜神記) 를 인용하였다. “晋代(진대)의 書(서)인 搜神記(수신기)에 이 미『胡床과 KJFC-34-6-671_img1.gif槃은 翟(異民族에 對한 賤稱으로 쓴 것)의 器 요 羌煮와 貊炙은 翟의 食이어늘 太始以來로 中國이 이것을 崇尙하야 貴人과 富室에 반드시 그 器를 작만해두고 重要한 宴饗에 몬저 이 음식을 내여노흐니 이것은 戎狄이 中國을 侵 하게 될 前兆이얏다』”하고 “맥적은 곧 고구려식의 고기구 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Haedongjukji (海 東竹枝)의 雪裏炙(설리적)에 대한 설명을 인용하며 “이 구 절은 읽기만 하여도 涎液(연액)의 泌涌(필용)을 금치 못할 것 이다(침이 솟아나는 것을 금치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글을 통해 최남선은 우리나라 육류구이의 전통이 부여· 고구려 시대의 맥적부터 고려 설리적에 이르기까지 이어지 고 있음을 피력하였고, 이 주장은 지금까지 계속 학계에 영 향을 주고 있다.

    이렇게 ‘부여’를 강조하는 경향은 Ryu(2019)의 연구에 따 르면, 1908년DaehanMaeilsinbo (대한매일신보)에 연재 된 신채호의 ‘讀史新論’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채호는 “부여 족은 곧 우리 신성한 종족인 단군의 자손들로서 지난 4천년 동안 이 땅의 주인공이 된 종족”으로 민족사의 주족(主族)을 단군의 후예인 ‘부여족’으로 설정했다. 일제에 의해 국권이 빼앗기는 상황 속에서 독립정신을 높이기 위해 신채호가 부 여를 강조한 이래 민족사학자들이 이 용어를 자주 사용했는 데, 최남선 역시 이에 영향을 받았다고 보인다.

    그런데 이런 최남선의 주장에 대해 최근 일부 국내·외 연 구자들이 맥적이 과연 우리 민족의 음식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움직임이 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맥적이 언급된 Susingi (搜神記)에 대한 신빙성 여부의 문제이다. 수신기 가 정통적인 역사서가 아닌 신비하고 괴기스러운 이야기를 모아놓은 설화집이므로 신뢰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 이다.Susingi (搜神記)는 4세기경 중국 동진(東晋)의 역 사가인 간보(干寶)가 편찬한 소설집으로 “六朝(육조) 志怪小 說(지괴소설)의 白眉(백미)”이며 “세상에 있을 수 있는 신비 하고 괴기스러운 온갖 사건이 총망라(Im 1997)”되어있다고 평가받는다. Joo(2003)는 “수신기는 기이한 이야기를 모아 놓은 일종의 소설책”으로 “이 내용의 사실 여부는 검증이 필 요하다. 다만 민간에서도 고구려의 맥적에 대한 이야기가 전 설로 전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가치가 있다”고 하였다. 따 라서 이런 설화집에 실린 맥적을 그대로 믿을 수 있는가 하 는 문제 제기인 것이다.

    그러나 맥적에 대한 기록이 단지Susingi (搜神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맥적에 대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은 후 한시대의 유희(劉熙)가 지은 한대(漢代) 일상용어집이라고 할 수 있는Seongmyeong (釋名)(Park 2013b)이다. Lee(1978) 는 “석명에서 맥적은 통구이하여 각자가 칼로 잘라가며 먹는 것으로 호맥(胡貊)에서 온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Park(2013b)의 연구에 따르면 “서진(西晉)의 장창(張敞)이 기 록한 문헌인 동궁구사(東宮舊事)에 따르면 맥적과 관련 된 소반과 그릇이 왕실에서 태자비를 맞아들일 때 쓰는 물 품목록에 들어있다. 맥적을 접빈객들에게 내어올 때 사용한 그릇이 ‘大函(대함)’이었다는 것에서 맥적의 부피가 상당했 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수신기뿐 아니라 다른 기 록을 통해서도 맥적의 존재가 확인된다.

    맥적과 관련해 제기하는 두 번째 의문은 Seongmyeong (釋名)에서 “맥적이 호맥(胡貊)에서 비롯”되었다고 했고, Susingi (搜神記)에서 “맥적은 적(翟)의 음식”이라고 한 것에 대해 일부 연구자 층에서 ‘호맥(胡貊)’이나 ‘적(翟)’이 우리 민족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중국학자 가운 데서도 의견이 나뉘는데 Park(2013b)은 맥적이 우리 민족과 관련 없다고 하는 왕인상과 강유공 등의 주장과 맥적이 고 구려계 음식이라고 하는 이근반과 난범의 주장에 대해 자세 히 정리해 놓았다. 그리고 “호맥(胡貊)의 호(胡)는 흉노, 맥(貊) 은 맥족”이고 “맥적은 비한족계 육류음식문화로 맥이 반드 시 고구려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맥족 계열 가 운데 고구려가 포함되어 있음은 분명하다.”고 보았다.

    Sung et al.(2017)에 따르면, “본래 맥이란 명칭은 중국의 춘추 전국 시대 문헌에서 맥(貊), 호맥(胡貊), 만맥(蠻貊) 등의 이름으로 등장한 이래 중국인들이 북방민족을 가리키는 일반 적인 칭호이다. 이후 사마천이 쓴사기에서 중국인들의 동북쪽에 있는 종족을 ‘맥족(貊族)’이라고 부르게 되었고,후 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에 보면 (고)구려는 일명 맥(貊)이라 한다고 해서 중국인들이 고구려를 ‘맥’이라고 불 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는 한문 사료에서 맥(貊,KJFC-34-6-671_img2.gif) 또는 고구려(高句驪), 구려(句驪), 고구려(高句麗), 구려(句麗), 고려(高麗)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따라서 맥적은 중국인의 동 북쪽에 있던 고구려인들이 즐겨 먹었던 음식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또한 “강자와 맥적은 적(翟)의 음식으로 중국의 전통 음식은 아니지만 3세기 이래 중국의 부유층이 즐긴 음식으로 묘사되고 있다. ‘적(翟)’은 적(狄)이라고도 부르며 중국인들이 북방민족을 가리킬 때 많이 사용하는 일종의 범칭이다. 여기 서 ‘강자’란 서북계 유목민들이 즐겨 먹는 고깃국을 의미하고 맥적은 맥족 계통이 즐겨 먹는 통구이 음식을 가리킨다(Sung et al. 2017).”고 하였다. 이렇게 관련 연구에서는 맥적은 중국 전통음식과 구별되는 비한족계 고기구이며, 맥족 계열 가운데 고구려가 포함되어 있음에 의견을 모으고 있다.

    맥적 관련 의문의 세 번째는 맥적이 과연 어떤 음식이었 는가 하는 것이다.석명에서 얻을 수 있는 “통구이”라는 단서 외에는 자세한 기록을 찾기 어려운 까닭이다. 통째로 조리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맥적은 일반인들이 아무 때나 먹 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라 동맹과 같은 제천행사에서 사용 했던 일종의 제사음식이자 잔치음식이다. 제사음식으로 만들 기 전에 수렵물이나 가축을 희생 제물로 신에게 바친다. 샤 머니즘의 영향을 받아 흠이 없는 동물들을 선별해 제사를 지 냈던 민족들에게서는 희생제 이후에 음식 만들 때도 통째로 조리하는 특성이 나타난다(Sung et al. 2017).”라는 견해를 볼 수 있다.

    Lee(1984)는 “맥적이란 고기에다 부추나 마늘을 풍성히 넣 고 미리 조미하여 구워먹는 것”이라 하였고 “다만 소, 돼지, 개 등 고기의 종류는 가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석명에서 맥적은 통구이라고 하였는데 수신기에서 는 모든 잔치에 나오는 적을 맥적이라 하고, 貊盤(맥반)을 중 심으로 한 잔치상을 맥적이라 하니, 이것이 통구이는 아닌 것 같다. 통구이라면 전체를 미리 조미하기 어렵다. 따라서 수신기에서 말하는 맥적은 역시 오늘날의 불고기처럼 미리 조미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석명의 맥적은 이 것과 다른 조리법인 것 같다. 맥족은 통구이의 맥적도 잘한 것 같다(Lee 1992).”고 석명과 수신기의 맥적 조리법이 다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Park(2013b)은 “이성우는 맥적이 후한 대에는 양념 통구이 음식이었지만 위진시대에는 전체를 조 미하기 어렵기 때문에 통구이 형태가 아닌 오늘날 불고기처 럼 고기를 썰어 조미한 형태로 맥적이 변했을 것이라고 추 정하고 있다. 하지만 서진시대에 맥적을 담는 그릇을 대함이 라고 묘사한 것으로 보아 맥적은 부피나 크기가 큰 음식, 즉 여전히 통구이 형태를 취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며 이견을 보이고 있다. 또한 “맥적의 주재료는 당시 주요한 가 축인 양, 소, 돼지, 말 등이 모두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지 만, 그 중에서도 양이나 돼지가 유력하다고 보았다. 즉 맥적 의 시작은 양념한 돼지 통구이였다(Park 2013b).”고 하였다.

    Yoon(1997)은 맥적이 특별히 좋은 음식으로 칭송을 받은 이유는 양념을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고기구이의 양 념으로 술, 소산류(小蒜類-야생달래 등), 장류 등을 들었다. Joo(2003)는 맥적이 “멧돼지를 통째로 간장에 절여 항아리에 넣어둔 것을 꺼내서 여기에 마늘과 아욱으로 양념을 한 후 그것을 숯불에 넣고 굽는 방식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많다” 고 하였다.

    한편 부여·고구려의 맥적 외에 신라에서도 ‘통돼지구이’ 를 먹었다는 고고학적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경상북도 경 주시 인왕동에 있는 월성(月城·사적 제16호)은 신라 건국 초기(101년)부터 멸망 때까지 무려 800년 이상 동안 왕이 살 았던 성으로 2014년 말부터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다. 국립 경주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신라인들의 동물이용 흔적들이 월성해자에서 확인된다. 해자에서 가장 많은 양을 보이는 것 은 멧돼지류”였다. 그리고 멧돼지 아래턱뼈를 조사한 결과 생후 6개월 안팎이 36%로 가장 많았다(Gyeongju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2019). 연구소 관계 자는 “신라인들이 어린 돼지를 식용 혹은 의례용으로 선호 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며 “5세기 신라에서는 멧돼지 사육 과 관리가 이뤄졌고, 이를 통해 안정적으로 돼지를 공급했을 것”이라고 했다(Yonhapnews 2019.4.2).

    5세기 신라는 아직 불교가 공인되기 전이므로 종교에 의한 육식제한은 없었다고 보이며 어린 멧돼지라는 것으로 보아 통돼지구이로 추정할 수 있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은 528년에 불교가 공인되었고 법흥왕 16년(529)에 살생금지령 이 내려졌으나, Lee(1984)는 “신라 사람들에게 육식엄금은 아니었던 것 같다”고 하였다. 한 예로삼국사기‘신라본 기 신문왕 3년(683)조'에 신문왕이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맞 아들여 비(妃)로 삼으면서 보낸 결혼예물 중에 포(脯)가 있었 다(Kang 1978).

    백제의 경우는 384년 불교공인 이후 7세기 정도에 이르러 서는 육식이 절제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유적 발굴이 있 었다. 2019년 6월 전북 익산의 왕궁리 유적 터에서 왕궁의 고대 화장실 터가 발견되었다. 백제 30대 무왕(재위 600~ 641) 시기의 유적으로 추정되는데 “기생충 조사 결과는 백제 인들의 식습관을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도 제공했다. 발견된 기생충은 채식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감염되는 회충 과 편충에 집중됐고, 육식을 통해 감염되는 조충은 검출되지 않은 것이다. 이와 함께 민물고기를 먹어서 감염되는 간흡충 도 발견됐다. 백제인들이 주로 채식을 했으며, 육류보다는 주 변 하천에서 잡을 수 있는 민물고기로 단백질을 보충했음을 알 수 있다(Jungangsunday 2019.6.29).”고 하여 육식이 절제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에만 육식의 전통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삼 국 중에서 가장 불교가 늦게 전래된 신라의 경우 5세기에도 어린 돼지통구이를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불교 가 공인된 이후의 7세기 백제는 불교의 영향으로 육식이 절 제되는 경향을 띠었다고 추정된다. 이렇듯 불교의 전래가 우 리나라 육식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설야멱(雪夜覓)

    앞서 언급한 것처럼 최남선은 우리나라 육류구이의 시초 를 ‘맥적’에서 찾았고, 또한 Haedongjukji (海東竹枝)를 통해 고려시대 개성의 명물 ‘설리적’을 언급한 바 있다. Lee (1985) 역시 설리적을 이야기하면서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불교의 영향으로 도살법과 요리법이 잊혀졌으나, 몽고 지배 의 영향으로 맥적을 되찾게 되었고 몽고 사람과 회교도가 많 이 들어와 살던 개성에서 설하멱(雪下覓)이란 명칭으로 되살 아났다.”고 하였다.

    고려시대의 육식기피가 무너지게 된 것은 기록상으로 충 렬왕 34년인 1308년에 왕이 시효사와 왕륜사에 행차하였을 때 육선(肉膳)이 올랐다는 것에서 알 수 있으며 이것은 원 침 입 이후 몽고 음식문화가 반영(Kim 2010)된 것이다. 이렇듯 잊혀졌던 육류 조리법은 몽골 원나라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설야멱(雪夜覓)’이라는 명칭 자체는 송나라 고사(故事)에서 왔다. 설야멱은 재료나 조리법이 연관되어 있는 일반적인 음 식 명칭과는 다르게 고사와 관련된 문학적인 표현이 음식 명 칭이 된 특이한 경우로 볼 수 있다. 명칭과 관련한 고사를 소개하며 많이 인용되는 19세기Songnamjapsik (松南雜識) 외에도 영조 임금이 직접 이에 대해 언급했던 기록도 찾을 수 있다.

    壬辰/上御金商門, 頒柑試士, 居首進士權, 命直赴殿試。 是夜召 諸試官宣饌, 仍敎曰: “昔宋祖有雪夜故事, 今者君臣一堂同餐, 古 與今奚異也? 其毋忘共餐之至意。”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귤을 반사(頒賜)하고 나서 시 사(試士)하였다. 으뜸은 진사(進士) 권엄(權)이었는데, 직부 전 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이날 밤 시관(試官)들을 불러서 찬선 (饌膳)을 베풀고 나서 이어서 하교하기를,

    “옛날 송나라 태조(太祖)는 설야(雪夜)의 고사(故事)가 있었는 데, 이제 군신(君臣)이 한 전당(殿堂)에서 같이 음식을 먹는 것 이 옛날과 지금과 다를 것이 뭐가 있겠는가? 오늘 함께 음식 을 먹는 지극한 뜻을 잊지 말라.”하였다(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註에는 설야(雪夜)의 고사(故事)란 “송(宋)나라 태조(太祖) 개보(開寶) 2년(969)에, 태조가 눈 내리는 밤에 조보(趙普)의 집에 가서 주안상을 차려 놓고 함께 마시면서 국사(國事)를 논의했던 고사에서 나온 말”이라고 해설되어 있다. 영조 39 년인 1763년 영조 임금이 시관(試官)들에게 찬선(饌膳)을 베 풀면서 인용했을 만큼 널리 알려진 고사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설야멱은 조선시대 의궤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궁중에서 실제로 먹던 음식이었다. 의궤는 왕족들의 탄생일 과 각종 통과의례에 왕실의 위엄을 부여하기 위해 개최한 행 사인 연향의 전모를 기록한 것으로 현존하는 의궤의 종류는 637종(Song 2014) 혹은 654종(http://e-kyujanggak.snu.ac.kr) 등으로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조선의 국제교류 기본 원칙은 사대교린(事大交隣) 정책으 로 중국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영접도감’을 설치 하였으며 사신을 위한 영접 즉, 외교의전 및 준비에 관한 기 록으로 국가적으로 중요한 외교업무의 중심에 있던 중국사 신을 영접할 때에 ‘영접도감의궤’가 만들어졌다(Park 2013a). Kim(1995)의 연구에 의하면Yeongjeopdogamyeonhyangsaeguigwe (迎接都監宴享色)의 1609년 기록에는 “山猪雪阿 覓(산저설아멱)”이 있고, 1643년에는 “猪肉雪阿覓(저육설아 멱), 唐猪雪阿覓(당저설아멱)”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1600년 대에는 ‘설아멱’에 돼지고기를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765년Sujaguigwe (受爵儀軌)의 설야멱(雪夜覓)은 쇠고 기 구이였다.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국립고궁 박물관)이 펴낸Gugyeoksujaguigwe (國譯受爵儀軌)를 구 체적으로 살펴보면, 상차림을 담당한 ‘이방(二房)’ 미수(味數) 상 중에 “설야멱(雪夜覓)”이 있고, ‘예빈시(禮賓寺)’에는 “설 야멱(雪夜覓)”의 재료가 “소 뒷다리 60그릇 당 1척씩 3척과 외심육(外心肉) 1부, 참기름 6리씩, 소금 4사씩, 사지(絲紙)감 으로 세 가지 색종이 각 5장”이라고 되어있다. 註에는 재료 중 외심육을 “소의 등골밖에 붙은 고기”라고 해설하였고, 사 지(絲紙)에 대해서는 “제사나 잔치에 누름적, 산적을 꽂는 꼬 챙이 끝에 감아 늘어뜨린 좁고 가늘게 오린 종이. 제사에는 흰종이, 잔치에는 오색종이를 쓴다.”라고 하여 설야적을 구 울 때 꼬치에 꿰어 조리했다고 생각된다. Kim(2006)은 “재 료구성을 보면 쇠고기 안심육, 쇠고기 사태육, 참기름, 소금 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재료구성상 쇠고기에다 소금과 참기 름을 발라 불에 구운 음식이 설야멱”이라고 하였다.

    또한 1795년Wonhaengeulmyojeongniuigwe (園幸乙卯整 理儀軌)에서는 왕이 드시는 점심 수라인 주수라(晝水剌)에 “설야적(雪夜炙)”이 포함되어 있어 궁중에서 ‘설야적’으로도 불리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설야적은 炙과 炙伊 에 모두 나타나는데 Kim(2000)은 “굽는 요리를 炙과 炙伊로 구분하여 의궤상에 기록한 대표적인 것이 1765년 원행을묘 정리의궤”인데, “炙伊와 炙에는 근원적인 차이가 없어 보인 다”고 하였다.

    이 밖에 후대에는 한글 의궤에서도 설야멱이 발견된다. 그 동안 의궤 중 한글로 필사된 것은 순조 28년(1828)에 편찬 된Jagyeongdyeonjinjyakjyeongnyeuigwe (자경뎐진쟉졍례 의궤, 慈慶殿進爵整禮儀軌)가 유일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보다 앞선 시기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글본 Dyeongniuigwe (뎡니의궤, 整理儀軌)가 프랑스 동양어학 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Ok 2008). 왕실 간행물의 언해 작업의 목적은 대체로 왕실내부의 여성을 위한 것임이 추정 되며 한문 원문에 대한 한글의 번역양상을 파악하는데도 도 움이 된다는 평가를 받는다(Ok 2008).Dyeongniuigwe (뎡 니의궤, 整理儀軌)는 원행과 화성성역이 끝난 후인 1797 년 9월 이후부터 활자본 화성성역의궤가 편찬 완료된 1800 년 5월 이전에 편찬되었을 가능성이 큰데(Ok 2008) 1796년 1월 20일의 찬품내용 ‘점심 수라상 1상 18기’ 중에서 한글로 쓰인 “설야멱 일긔”가 발견된다. 즉 1700년대 말 궁중에서 한자어인 설야멱을 그대로 한글로 전환하여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Table 1>에서 볼 수 있듯이 설하멱은 궁중 의궤에 雪阿 覓(설아멱), 雪夜覓(설야멱), 雪夜炙(설야적), 설야멱(한글)으 로 나타났다. 또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연대가 불명 확한 다례발기가 있는데, 이중Cheongpodarye (청포다례) 에 올린 음식에서 한글로 적힌 “양셜아적, 간셜아적”이 있다 (Archives of the Korean Royal Cuisine of the Joseon Dynasty (6) 2012). 1924년 이용기의Joseonmussangsinsigyorijebeop (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서는 “양서리목(양雪 夜覓)”, “간서리목(간雪夜覓)”이라고 되어 있어서 민가에서는 설야멱을 한글로 ‘서리목’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Kyuhapchonseo (閨閤叢書)의 설하멱(雪下覓) 설 명에는 “눈 오는 날 찾는다는 말이니 근래 설이목이 음을 잘 못한 말이다(Jung 1975).”라고 되어 있어 ‘설이목’이라는 명 칭으로도 불렸음을 알 수 있다. Park et al.(2011)은 조리서 등의 문헌을 통해 설아멱, 설하멱(雪下覓), 설중멱(雪中覓), 설화멱(雪花覓), 서리목(雪夜覓), 설리적(雪裏炙) 등의 명칭이 나타났음을 밝혔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조리서 중에 설하멱이라는 명칭이 처음 기록된 책은 1670년경 쓰인 Eumsikdimibang (음식디미방)”이며(Park et al. 2011) ‘가 지느름적’과 ‘동아적’을 설명하면서 “설하멱처럼 하라”고 되 어있다.

    “동화적(동아적) 굵고 살찐 동아를 썰어 고기산적 꿰듯이 꿰여 설하적 꿰듯히 하여”

    “가지느르미 가지를 설하멱적처럼 단 간장, 기름, 밀가루를 얹 어 구워”

    (Han BR ed.Eumsikdimibang (음식디미방)2000)

    동아적 설명에서 “설하적 꿰듯이”라고 하였으므로 꼬챙이 에 꿴 것을 알 수 있으며 가지느르미 설명을 통해서는 “단 간장, 기름”으로 양념을 했고 또한 “밀가루를 얹어 구워”라 고 하여, 1670년 이전의 설하멱 조리법에는 밀가루 자체인 지 밀가루 풀의 형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밀가루가 사용되 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설하멱 조리법이 실질적으로 명확하게 나온 1718년 홍만선의 Sallimgyeongje (山林經濟)의 설하멱법에는 밀 가루 사용이 나타나지 않고, 함께 소개한Geogapiryong (居 家必用)에서만 밀가루 풀을 볼 수 있다.Sallimgyeongje (山林經濟)(Hong Manseon(洪萬選), 1718)의 내용은 다음 과 같으며, 한글 번역문은 한국고전종합 DB (http://db.itkc. or.kr) 에 따랐다.

    凡燒肉。忌桑柴火。<神隱>

    燒肉。用簽子。揷於炭火上。KJFC-34-6-671_img3.gif油鹽醬細料物。酒醋調薄糊。

    不住手勤番羽燒。至熟剝KJFC-34-6-671_img4.gif去皮。<必用>

    灸肉。用芝麻花。爲末置肉上。則油不流。

    (중략)

    灸牛肉煮熟燒。燒法見上。<必用>

    雪下覓灸 。取牛肉作片。以刀背擣之使軟。揷串和油鹽 壓置。待其盡入。用慢火燒之。乍浸水旋出更燒。如是者三。又 塗油荏而更燒之。極軟味佳。<西原方>

    대개 고기 굽는 데 뽕나무 장작불을 꺼린다. <신은지>

    고기 구울 때는 대꼬챙이에 꿰어 숯불에 올려 놓고 굽는데, 먼 저 기름ㆍ소금ㆍ장ㆍ갖은양념ㆍ술ㆍ초에 재었다가 묽은 풀을 슬쩍 발라 손을 재게 놀려 구워낸 뒤 고기에 입힌 밀가루풀을 벗긴다.<거가필용>

    고기를 구울 때, 참깨꽃을 가루로 만들어 고기 위에 뿌리면 기 름이 흐르지 않는다.

    (중략)

    쇠고기구이(炙牛肉)는 삶아서 굽는다. 굽는 법은 위에 있다. < 거가필용>

    설하멱적(雪下覓炙)은 쇠고기를 저며, 칼등으로 두들겨 연하게 한 뒤, 꼬챙이에 꿰어 기름과 소금을 섞어 꼭꼭 눌러 재워두었 다가 양념기가 흡수된 뒤에 뭉근한 불로 구워 물에 담방 잠갔 다가 곧 꺼내어 다시 굽는다. 이렇게 세 차례하고 참기름을 발 라 다시 구우면 아주 연하고 맛이 좋다. <서원방>

    그리고 이후 1766년「Jeungbosallimgyeongje (增補山林經 濟)」에서는 「산림경제」에서 인용했던 「서원방」의 방법 을 소개하면서 덧붙여「거가필용」에서 볼 수 없었던 밀가 루 풀 바르는 것과 함께 또한 마늘즙 곁 드리는 방법을 기록 하고 있다.

    Park et al. (2011)증보산림경제의 ‘설하멱’과거 가필용의 ‘소육(燒肉)’을 비교하였다. 공통점은 둘 다 양념 에 재운 고기를 꼬치에 꿰어 직화로 굽는 방식이며, 차이점 은 양념과 밀가루 코팅 방법인데,거가필용은 밀가루 옷 을 코팅제로만 사용한 반면,증보산림경제에서는 조리가 완료된 후에도 벗겨내지 않고 먹는 차이가 있다고 하였다. 또한 우리나라의 설하멱은 밀가루 양념풀, 냉수침지, 기름, 깨 코팅의 3단계 기법을 한꺼번에 적용한 발전된 방식의 구 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런데 “냉수 침지법을 사용한 우육구이 는 1809년규합총서를 마지막으로 사라지고,임원십육 지(1827),주찬(1855년 이전)등 19세기 초반의 문헌에 등장하던 설하멱 조리법은 이후 문헌에서 사라진다(Park et al. 2011)”고 하였다.

    즉 소육과 설하멱 조리법이 결과적으로 특별히 차이가 없 게 된 것이다. 그러자 고기구이를 지칭하는 용어에 있어서 설하멱이 사라지면서 고기구이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 인 ‘소육(燒肉)’에 흡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사에서 비롯 된 문학적 표현인 설하멱이라는 어려운 이름대신 소육이 널 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소육’은 중국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사용된 용어 이다. 14세기 문헌인 Baktongsa (朴通事)는 한어문으로 된 중국어 학습서로서 박씨성을 가진 역관이 저술하고 원말 명초에 간행되었다고 추정하는 책으로, 1510년경 최세진이 한자어를 직역하여 언해한 것이Beonyeokbaktongsa (飜譯 朴通事)이다(Jang SY ed. 2008). 그런데 이 책에 여기에 ‘燒 肉’이 나타나며 “구은 고기(현대역: 구운 고기)”(Jang SY ed. 2008)라고 되어 있다.

    1462년Sejosillok (世祖實錄)에는 “必先燒肉後酒(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즉 “반드시 먼저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신다”는 뜻으로 소육이 ‘고기를 굽다’라는 동사의 의 미로도 사용되었다.

    1639년The Daily Records of Royal Secretariat of Joseon Dynasty (承政院日記)에는 사신에게 제공하는 음식의 가짓 수를 줄이도록 명하였으나 소육만큼은 아침 점심 저녁 모두 빠지지 않고 상에 올려 주도록 하는데, “燒肉一器”(仁祖 17 년 1639년 3월 26일, http://sjw.history.go.kr/id/SJW-A17030260-00600) 라고 하여 “구운 고기 한 그릇”이라는 명사로 사용되 었다.

    이 밖에도 ‘소육(燒肉)’은 특히 18세기 유행하게 된 난로 회와 연관되어 한글본Dyeongniuigwe (뎡니의궤)에도 “난 로 쇠고기 1기”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난로회는 민간, 궁중을 가리지 않고 하나의 풍습이 된 것을 알 수 있 다.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의 문집에 나타난다. 박지원(1737~1805년)의Yeonamjip (燕巖集)의 ‘만휴당기’ 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余昔與故大夫金公述夫氏。雪天對KJFC-34-6-671_img5.gif。燒肉作煖會。俗號鐵笠圍。 “내가 예전에 작고한 대부(大夫) 김공 술부(金公述夫) 씨와 함 께 눈 내리던 날 화로를 마주하고 ‘고기를 구우며 난회(燒肉作 煖會)’를 했는데, 속칭 철립위(鐵笠圍)라 부른다.(후략)” (燕巖集卷之三 孔雀KJFC-34-6-671_img6.gif文稿 晩休堂記 http://db.itkc.or.kr/dir)

    또한 정약용(1762~1836)의Yeoyudangjeonseo (與猶堂全 書)1집 ‘시문집(詩文集)’에서는 ‘설중소육(雪中燒肉)’이라 는 독특한 표현을 볼 수 있다.

    달빛 아래 차를 끓여 중과 함께 맛을 보고/月下烹茶僧共澹 흰 눈 속에 고기 구워 손님 함께 즐긴다오/雪中燒肉賓俱悅 (與猶堂全書 第一集 詩文集 第一卷 http://db.itkc.or.kr/dir)

    이 시에서 ‘설중소육(雪中燒肉)’은 곧 눈과 관련된 고기구 이로 설하멱과 의미적 연관성이 있다. 설중소육은 설야멱의 고사를 연상시키면서도 고기구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서 훨 씬 이해하기 쉬웠을 것이라고 보인다. 즉 ‘설중소육’은 설하 멱을 쉽게 풀어쓴 것이라고 보인다. 그리고 후에 ‘설중’이 탈 락되고 소육으로 정착했을 가능성도 있다.

    설야멱은 그 이름 자체는 송나라 고사에서 왔으나, 조리법 은 중국의 소육과 구별되는 우리나라 고유의 제법으로 발전 된 고기구이였다. 17세기 의궤에서도 설하멱과 소육은 같이 나타났는데, 설야멱 조리법이 단순화되면서 조리서에서 그 명칭이 1800년대 중반 이후 사라진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에 중간단계로 보이는 ‘설중소육’이라는 명칭을 볼 수 있으 며, 후에 난로회와 관련해서는 ‘소육’이라는 명칭이 많이 발 견된다.

    3. 너비아니

    Kang(1987)은 “구이의 대표적인 것이 불고기와 같은 조리 방법이다. 이것은 예로부터 ‘설야멱’이라 했고 궁중에서는 ‘너 비아니’라고 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Lee(1985)는 “시의전 서에는 정육을 저며 잘게 칼질하여 양념한 다음 직화에 쬐 어 구이하는 것을 너비아니라 하였는데 너비아니는 불고기 의 궁중 용어로서 오늘날의 불고기를 뜻하는 것”이라고 하 였다. 이렇듯 너비아니는 궁중 용어로 알려져 있다.

    너비아니는 한말 궁중에서 일했던 상궁과 숙수의 증언에서 도 나타난다.Ijogungjeongyoritonggo (李朝宮庭料理通攷) 의 서문에서는 “조리에서 나오는 용어를 가급적 그 시대에 궁중에서 보통 쓰던 그 말대로 쓰기로 한 것(Han et al. 1957)”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구이류에 소개된 너비아니는 한희순 상궁이 “궁중에서 보통 쓰던 말”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Lee(2010)에 따르면, 조선조 마지막 임금인 순종에게 음식을 올렸던 숙설소 최고 책임자 도숙수와 손수남 옹이 조 선왕조가 없어진 후 당시 유명한 요리집을 돌면서 요리를 만 들었다는 증언에서 다음과 같이 궁중음식의 예로 ‘너비아니’ 를 들고 있다.

    올해(1987년) 일흔 여덟살인 손수남 옹은 조선조 마지막 임금 인 순종에게 음식을 만들어 올렸던 마지막 숙수이다. (중략) 안 국동 별궁에는 음식을 만드는 숙설소가 있어 최고 책임을 맡은 도숙수, 그 밑의 부숙수를 비롯, 여러 명의 숙수가 음식을 만들 었다. (중략) (궁중에서는) 너비아니 구이만 해도 칼등으로 넓적 하게 다져 백탄에 구웠고, 고기요리는 주로 쇠고기를 많이 썼으 며 (중략) 별궁이 해체된 후 손옹은 도숙수와 함께 그 당시 유 명한 요리집이었던 대한관, 태서관, 명월관등을 돌며 요리를 만 들게 된다. 숙수가 귀했기 때문에 이런 요리집에서 받는 월급은 큰 상점 매상이 1백원이 채 못되었을 당시, 2, 3백원씩 한복 허 리띠에 띠고 다니며 쓸 정도였으나 그의 표현으로는 숙수라는 직업은 ‘홀랑 자랑할 만한 것’은 못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의문점은 설야멱이 조선왕조 의궤나 음식발기에 나 타나는 것과는 달리, 현재까지 조사한 바로 너비아니는 조선 왕조 의궤나 발기,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공식기록 문 서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글로 적힌뎡니의궤 에도 한자어 발음대로 ‘설야멱’이라고 적혀있어 너비아니라 는 한글 기록은 찾을 수 없으며 너비아니를 의미하는 한자 어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구한말의 경상대 소 장 궁중음식발기(1895-1921)에 수록된 고기 구이류는 “우육 누름적, 우육산적, 우육적, 우적”으로 기록되었다(Archives of the Korean Royal Cuisine of the Joseon Dynasty (7) 2012). 즉 19세기에 설야멱이라는 명칭이 사라지면서 이들 명칭에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도 너 비아니라는 음식 명칭을 찾을 수 없다. Figure 2

    따라서 앞서 증언에서 언급된 너비아니라는 명칭은 궁중 의 공식기록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구어체의 일상용어로 사용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혹은 왕조가 해체된 후에 민가로 나온 발언 시점 당시에 너비아니가 일 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그 명칭을 과거를 회상하며 궁 중 고기구이에 적용한 것일 수도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지금까지 ‘너비아니’에 대한 최초의 기록 은 1800년대 말경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Siuijeonseo (是 議全書)의 ‘너KJFC-34-6-671_img7.gif안이’다. Joo(2013)는 “저자가 알려지지 않 은 책으로 심환진의 필사본이 남아있는데 상주군수로 부임 한 심환진이 그 지역 양반가에서 소장하고 있던 조리서를 빌 려 부하 직원에게 필사를 시킨 것이다. 이 필사본 괘지에는 ‘대구인쇄합자회사인행(大邱印刷合資會社印行)이란 글자와 ‘상주군청’이란 글자가 붉은색으로 인쇄되어 있다. 대구인쇄 합자회사는 1911년 일본인이 대구에 설립한 회사이다. 이로 미루어 이 필사본은 대략 1919년 심환진이 상주군수로 부임 한 이후부터 그가 칠곡군수로 임지를 옮기는 1923년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Figure 3

    그런데 Pro-Japanese Dictionary(親日人名辭典)의 기록 을 보면 심환진(沈晥鎭)은 1914년 9월부터 1922년 4월까지 7년 7개월에 이르는 기간 동안 상주군수로 재직했다(The Center for Historical Truth and Justice 2009). 따라서 필 사된 시기는 1914년부터 1922년 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 그 런데 이 시기에 “심환진이 지역 양반가에서 소장하고 있던 조리서를 빌려” 필사를 한 것이고, 조리서가 처음 편찬된 연 대는 1800년대 말경이라고 막연하게 추정할 뿐 정확한 시점 은 알 수 없다.

    또한 상주지역에서 필사되었다고 해서 상주 반가 조리서 라고 단정 할 수는 없다. Joo(2013)는 “이 책이 경상북도 상 주의 반가음식을 소개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그보다 는 왕실이나 서울의 부자들이 즐겨 해먹던 음식들을 적어둔 것이라 보아야 옳다. 왜냐하면 이 책에 적힌 음식들이 상주 지역의 특징만을 오롯이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 였다. 궁중음식이라고 주장되는 너비아니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상주지역 양반가 조리서에서 처음 나타났다는 것은 그 양반이 서울에서 기거한 적이 있고 그동안에 편찬된 조 리서를 가지고 상주로 내려갔으며 이후에 조리서에 상주 음 식도 함께 보충되었을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Table 2

    한편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적 국어사전은 1938년 문세영 의Joseoneosajeon (조선어사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데 그 이전 시기 외국인에 의해 편찬된 이중어 사전 중에서 1897년 게일(Gale, James S. 1863-1937) 목사가 편찬한 A Korean-English dictionary (韓英字典)에서 표제어로 시의 전서와 동일한 표기법인 “너KJFC-34-6-671_img10.gif안이”가 발견된다.

    또한 이보다도 더 앞선 1880년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의 리델(Ridel, Felix Clair, 1830-1884) 신부가 주도해서 펴낸 Dictionnaire Coreen-Francais (韓佛字典)에서는 “너부할 미”라는 음식명을 찾을 수 있다. “너부할미”에 대한 설명은 “Esp. de rata, nom d’un fricot, tranche de boeuf, bifteck.” 라고 되어 있다. 한글로 번역하자면 “일종의 대강 만든 음식, 대강 만든 음식을 지칭하는 이름, 소고기의 슬라이스, 소고 기 스테이크”라고 할 수 있다. “소고기의 슬라이스, 소고기 스테이크”라는 표현에서 쇠고기를 잘라 구운 음식이라는 것 을 알 수 있으며, 이 음식이 ‘너비아니’를 의미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 사전에 “너비아니” 혹은 “너KJFC-34-6-671_img11.gif안이” 등의 표제어는 발견할 수 없었다.

    리델의Dictionnaire Coreen-Francais (韓佛字典)은 “근 대 한국 최초의 이중어 사전”이며 “서울말을 중심으로 삼았 다는 점에서 표준적 한국어를 대상으로 한 본격적인 이중어 사전의 효시(Hwang & Lee 2012)”로 평가된다. 따라서 1880년 당시 서울지역에서 “너부할미”라는 음식명이 있었음 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800년대 말에 편찬되었다고 추정되 고 1914년부터 1922년 사이 필사되었다고 짐작되는 Siuijeonseo (是議全書)에 비해 구체적인 시기를 알 수 있 으며 시기적으로도 앞선 기록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한편 게일 목사는 1897년, 1911년, 1931년 모두 3편의 한 영사전을 간행하였다. 1897년에 편찬한A Korean-English dictionary (韓英字典)에서는 표제어로 “너KJFC-34-6-671_img7.gif안이”와 “너 브할미”를 모두 발견할 수 있다. “너KJFC-34-6-671_img7.gif안이” 에 대해서는 “Broiled meat. See 셥산KJFC-34-6-671_img8.gif”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너브 할미”는 “ A broiled slice of spiced meat. See 너KJFC-34-6-671_img7.gif안이” 라고 하였다. “구운 고기”라는 의미의 너KJFC-34-6-671_img7.gif안이에 비해 너 브할미는 “얇게 잘라 양념해 구운 고기” 좀더 구체적으로 적 고 있다. 또한 “셥산KJFC-34-6-671_img8.gif”에는 “Dried slices of meat. See 너 부안이”라고 되어 있어서 얇게 썰어 말린 고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며 ‘너부안이’를 참고하라고 했지만 표제어에 따 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섭산적은 방신영 1921년Joseonyorijebeop (朝鮮料理製法)에서 “연한고기를 잘게 익여서 간장 기름 깨소금, 호초가루, 파 익인 것을 넣고 한참 주물 러서 얇게 반데기를 만들어 기름과 깨소금을 치고 굽나니라” 고 하여 사전의 “얇게 썰어 말린 고기”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

    1911년판에도 세 단어가 동일한 의미로 등장한다. 그러나 1931년 판에는 “너KJFC-34-6-671_img7.gif안이” “Broiled meat.”, “너브할미” “ A broiled slice of spiced meat. See 너KJFC-34-6-671_img7.gif안이”로 되어 있고 섭산적은 표제어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Mun(1938)Joseoneosajeon (조선어사전)에서는 “너비아니: 쇠고기를 얇고 너븟하게 저미어 갖은 약념을 하 여 구운 음식”, 그리고 “너브할미: 너비아니의 사투리”로 나 타난다. 보통 “너비아니”라는 음식명의 유래에 대해 고기를 너붓하게 썰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같은 사전에 “너 븟하다”를 “형용사: 조금 넓다. 조금 평편하다, 너브죽하다.” 라고 풀이하고 있어서 쇠고기를 넓게 저미었다는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1946년Gugeosajeon (국어사전) 에는 “너비아니: 쇠고기를 얇고 너븟하게 저미어 갖은 약념 을 하여 구운 음식”으로, 1949년Joseonmalkeunsajeon (조 선말큰사전)에는 “너비아니: 저미어 양념하여 구운 쇠고기 (너브할미)”라고 되어 있다.

    Myeongmulgiryak (名物紀KJFC-34-6-671_img9.gif)은 황필수(黃泌秀)(1842- 1914)가 각종 사물의 명칭을 고증하며 1870년에 펴낸 책 (Park et al. 2015)으로 여기에서 “설야멱(雪夜覓)”이 발견된 다. 그런데 1880년 한불자뎐에 ‘너부할미’가 발견되고 설야 멱은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1897년 한영자전에 ‘너KJFC-34-6-671_img7.gif안이’, ‘너브할미’가 나타나고 설야멱은 없는 것으로 보아 1870년대 이후 ‘너부할미’, ‘너KJFC-34-6-671_img7.gif안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게 되 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전 이외의 조선말기 고전 소설에서도 “너부할미”를 찾 아 볼 수 있다. 작자 미상의Ichunpungjeon (李春風傳)은 “1900년 이후에 필사된 이본(異本)이 13종에 이르는데, 우리 가 현재 접하는 이춘풍전은 19세기 중엽에 형성된 것으로 이 시기의 사회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Jang 2001)”고 평가된다.Ichunpungjeon (李春風傳)을 보면, 숙종 때 서 울에 사는 이춘풍이 가정을 돌보지 않고 놀러 다니며 가산 을 탕진하는 장면에서 “맛 좋은 일년주(一年酒)며 벙거짓골 열구지탕 너부할미 갈비찜에 일일장취(日日長醉) 노닐 적에 ”라고 그가 먹었던 음식 중에 <Figure 4> 같이 “너부할미”를 볼 수 있다.

    이외에도 1924년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에서도 “석 쇠에서 빠지짓 빠지짓 구워지는 너비아니 구이(Hyeon 2003)”라는 구절을 발견 할 수 있다.

    Jung(2000)은 “손님상에 놓는 고기구이는 너비하니, 너비 아니, 혹은 너비할미”라 고 했다고 하여, 너비아니도 ‘너부할 미’, ‘너브할미’, ‘너비할미’, ‘너KJFC-34-6-671_img7.gif안이’, ‘너비하니’ 등 다양 하게 불리웠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좀더 심 층적인 국어학적 연구가 요구된다.

    IV. 요약 및 결론

    본 연구의 목적은 불고기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는 맥적부 터 설야멱, 너비아니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육류구이 문화 의 변화와 흐름을 살펴보는 것이다.

    최남선이 ‘부여·고구려계 고기구이’인 맥적에 대해 처음 언 급한 시점은 1937년 3월 7일자매일신보로 거슬러 올라간 다. 맥적은 멧돼지 등 다양한 육류를 이용했으며 양념한 고기 를 통째로 구운 음식으로 제사음식, 잔치음식이라고 추정된다.

    설야멱은 송나라 고사와 연관된 독특한 음식명이다. 조선 시대 의궤에서 발견되는 궁중음식이자 민간에서도 먹던 고 기구이로, 문헌에 변이된 다양한 명칭으로 나타난다. 설야멱 의 재료는 1609년 의궤에서 돼지고기를 사용한 경우도 보이 나, 이후 쇠고기나 소의 내장육이 사용되었다. 자른 고기를 양념하고 꼬치에 꿰어 구우면서 3번 냉수에 침지하는 우리 나라 고유의 제법이었지만, 19세기 이후 문헌에서는 조리법 이 간략화 되었다. 조리법이 바뀌면서 설야멱이라는 명칭도 우육적(牛肉炙), 소육(燒肉) 등의 명칭에 흡수되면서 없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너비아니는 궁중음식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왕실 의궤나 음식발기 등 공식기록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현재까지 알 려진 최초의 기록은시의전서의 ‘너KJFC-34-6-671_img7.gif안이’이다. 그런데 구한말 선교사의 이중어 사전인 1880년 리델(Ridel)의韓 佛字典에서 ‘너부할미’라는 음식명을 찾을 수 있으며, 고 전소설 이춘풍전에서도 동일한 음식명이 발견된다. 또 한 1897년 게일(Gale)의韓英字典에서는시의전서 와 동일한 표기법인 ‘너 KJFC-34-6-671_img7.gif안이’가 발견된다.

    맥적, 설야멱, 그리고 너비아니는 긴 역사 속에서 각 시대 적 상황을 반영하며 발전되었다. 음식 자체로 본다면 주재료 나 고기를 자르는 방법, 양념의 종류, 굽는 방법 등 조리법 에 있어서는 많은 변화를 보여 왔다. 따라서 동일한 음식이 라고 보는 것보다는 큰 틀에서 우리나라 육류구이의 흐름이 며 변천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맥적부터 설야멱, 너비아니에 이르는 우리나라 육류구이 문화는 미리 양념을 해서 구웠다 는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오늘날 우리나라 대표 음식 중 하나인 불고기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Conflict of Interest

    No potential conflict of interest relevant to this article was reported.

    Figure

    KJFC-34-6-671_F1.gif

    “Goryeo (高麗)” inMaeilsinbo (매일신보)(1937.3.7)

    KJFC-34-6-671_F2.gif

    “Neobuhalmi (너부할미)” inDictionnaire Coreen- Francais (韓佛字典)(1880)

    KJFC-34-6-671_F3.gif

    “Neobuiani(너안이)” inA Korean-English dictionary (韓英字典)(1897)

    KJFC-34-6-671_F4.gif

    “Neobuhalmi (너부할미)” inIchunpungjeon (李春風傳)

    Table

    “Seoryamyeok” in Uigwe

    The headwords “Neobiani” of dictionary in modern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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