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Search Engine
Search Advanced Search Adode Reader(link)
Download PDF Export Citaion korean bibliography PMC previewer
ISSN : 1225-7060(Print)
ISSN : 2288-7148(Online)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Food Culture Vol.34 No.3 pp.241-254
DOI : https://doi.org/10.7318/KJFC/2019.34.3.241

Study on the Consumption Status of Beans and the Soybean Food Culture in the Mid-Joseon Period According to Shamirok

Mi-Hye Kim*
Department of Food and Nutrition, The Research Institute for Basic Sciences, Hoseo University
Corresponding author: Mi-Hye Kim, Department of Food and Nutrition, Hoseo University, Hoseo ro 79-20, Asan, Chungnam 31499, Korea Tel: +82-41-540-9663 Fax:+82-41-540-5638 E-mail: Kimmihye92@hoseo.edu
February 18, 2019 June 5, 2019 June 14, 2019

Abstract


This study researched the food culture and bean economy of the Joseon dynasty during the 16th century and according to the primary lifestyle reference『Shaemirok (尾錄)』. The research analyzed the textual contents of the『Shaemirok (尾錄)』. It is clear that the people of the Joseon dynasty produced more beans than grain, at a ratio of 41 to 50, respectively. The soy bean sauce consumption was split into family consumption and non-family consumption. It was evident that there was more family consumption compared to that of non-family consumption at a ratio of 7 to 3, respectively. People of the Joseon dynasty annually recorded their way of making soy sauce from 1595 to 1600. The Joseon writers edited the record six times for making meju and four times for making soy sauce. The recorded ratio displays the ingredients of soy sauce, which were: 6 Du of Mal Jang and 2 Du of salt. Mal Jang and salt had a three to one ratio, respectively. The most mentioned food was Tofu during the mid-Joseon period with fifty six mentions. The Joseon people regarded making Tofu in a Buddhist temple as a family-bonding experience. Porridge was the second most prominent food next to Tofu, among the bean-related food. Porridge appears thirty five times. There were 3 types of porridge named: bean porridge, bean powder porridge and mung bean porridge.



조선 중기 두류 수급 현황과 콩 음식 문화 고찰
- 오희문(吳希文)의『Shaemirok (尾錄)』을 중심으로 -

김 미 혜*
호서대학교 생명보건대학 식품영양학과 및 기초과학연구소

초록


    I. 서 론

    최근 미국과 유렵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식물성 육 류대체식품(plant-based meat) 소비 성향은 건강 지속 가능한 ‘슈퍼 푸드’로서 콩의 가능성을 증진시키고 있고, 가격 대비 만족을 추구하려는 플라시보 소비(Kim et al. 2017) 트랜드 를 이끌고 있다. 또한 콩은 영양성분이 풍부하고 경제적이라 식량안보에 기여하며 지속 가능한 농업을 조성하고 기후변 화 완화 및 적응에 기여하여 윤리적 소비를 가능하게 한다 (Hoe 2018). 두류는 고대부터 식량자원으로 활용되었고 오곡 (五穀) 가운데 하나이며 주곡의 위치를 갖고 있는 곡물이었 다(Park 2016). 두류를 활용한 음식은 우리 전통음식문화로 서 자리 매김 되었고 한민족의 정체성을 담은 음식으로 평 가받고 있다(Chung & Oh 2013). 특히 콩 음식은 우리민족 에게 부족하기 쉬운 단백질과 지방의 공급원으로서 그 의의 가 크다. 콩 단백질은 쌀 등의 곡류보다 2-3배 많은 단백질 함량을 보유하고 있고 훌륭한 식이섬유 급원이다. 콩의 영양, 기능성분 뿐 아니라 발효과정에서 생기는 유익한 성분으로 부터 각종 만성질환의 위험을 낮추는 효과가 증명되고 있다 (Park 2004).

    옛 맥족(貊族)의 발상지이며 고구려의 옛 땅인 만주는 야 생콩의 자생지역이면서 야생, 중간, 재배의 각형(各型)이 가 장 많은 곳이라 보는 콩의 원산지역이다(Lee 1997). 우리나 라는 기원전 600-700년 전부터 청동기 시대 이래 콩의 식용 및 생산이 활발하였고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도 벼 다음으로 중요한 작물로서 그 재배의 역사는 고대로부터 오늘날에 까지 기본적으로 이어져 왔다(Cho 2002). 콩은 중국의SiKyung (時經)속에 숙(菽 콩숙)으로 기록되었고, 외부에서 들어 온 콩을 숙(菽)이라 하였다. 기원 전후부터는 콩을 두(豆)라고 하였는데, 콩 꼬투리 열매가 마치 제기로 쓰이는 두(豆, 굽이 달린 나무그릇)와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한다(Yoon 2007). 우 리나라에서는 콩을 태(太)라고 하였다. 콩을 활용해 온 역사 가 오래된 만큼 콩을 이용한 음식도 다양하다. 조미료인 콩 으로 담근 장류를 비롯하여 두부, 비지, 콩국, 콩나물, 콩가 루, 콩기름 등의 가공식품과 함께 콩 볶음, 삶은 콩, 찐 콩을 비롯하여 밥, 죽, 면 등 주식과 더불어 국, 찌개에서부터 만 두 소, 떡, 다과류에 이르기까지 폭 넓게 활용되었다(Park 2016).

    조선시대를 음식사적으로 한식의 완성기로 분류하는데 임 진왜란(16세기)을 기점으로 새로운 식품 도입으로 한식 종류 가 크게 증가하였기 때문이다(Chung et al. 2013). 16세기는 정치적으로 중소 지주 출신의 사림(士林)이 성장하여 기존 훈구세력과 대립, 갈등하던 시기로, 경제적으로는 과전법(科 田法)의 붕괴와 함께 양반 지주층이 상속이나 매득, 개간들 을 통해 농장을 확대해 나갔으며, 사회적으로는 유교적 윤리 관이 기층사회까지 침투하여 문벌의식이 대두하던 급변의 시 기로 이해되고 있다(Chung 2003). 16세기 살았던 개인의 일 기로써 현재까지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이문건(李文楗, 1494- 1567)의Mukjaeilgi (默齋日記)와 유희춘(柳希春, 1513- 1577)의 Miamilgi (眉巖日記)그리고 권문해(權文海, 1534- 1591)의Choganilgi (草澗日記)등이 있다. 이런 일기류 는 당시대의 생활상에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에 서 최근 많은 연구 성과가 축적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기 류나 고문서의 연구 성과는 주로 인물과 계층에 따른 경제 생활, 관료생활, 의례생활, 향촌 생활 등의 연구가 주를 이루 었고 조선중기 생활사 연구 중 식생활에 대한 자료는 극히 부족하다.

    또한 전통 한국음식의 원형으로 보는 조선시대 한식 연구 는 주로 고조리서가 간행된 조선 후기 이후에 집중되었다. 따라서 조선 전기나 중기의 음식문화사 연구가 미비한 실정 이다. 이에 16세기 음식문화사를 이해하는 사료로써 일기형 식의 고문헌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 錄)Nanjungilgi (亂中日記), Jingbirok (懲毖錄)과 함께 임진왜란 전황과 16세기 후반 조선 사회상을 잘 알려 주는 중요한 사료로 꼽힌다. 16세기 일기를 통한 음식문화사 적 연구는 Kim(2013)Miamilgi (眉巖日記)분석을 통 한 16세기 사대부가 음식문화 연구,Shaemirok (尾錄)분 석을 통한 사족의 음식문화 연구(Kim 2007),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을 통해본 16세기 동물성 식품의 소비현황(Cha 2007) 연구 정도가 있다. 고대 때부터 주요 곡물인 콩은 한 민족의 정체성을 담은 식품으로서 미래 식량자원으로 주목 받고 있으나 고문헌 분석을 통한 음식문화사적 연구는 전무 한 상태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16세기 생활사의 주요 사료인 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분석을 통하여 조선 중기 두류의 소 비 현황과 콩 음식 문화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Figure 1>

    II. 연구 대상 및 방법

    1. 연구 대상

    본 연구 대상은 해주(海州) 오씨 가문에서 지원하고 비영 리사단법인에서 번역 발간한 국역 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 (Lee MS ed. 2014) 2권을 2차 자료로 분석하였다. 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은 거의 매일의 일상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16 세기 당시 생활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평가된다(Shin 2012).

    Shaemirok(KJFC-34-3-241_img1.gif尾錄)은 일기 마지막 부분에서 밝히듯이 ‘쇄혜미혜(KJFC-34-3-241_img1.gif兮尾兮)’의 줄임말로 난리 중에 피란하느라 고 생하던 피란록(避亂錄)이다. 이 책은 저자 오희문(吳希文 1539~1601)이 임진년 이전인 신미년 1591년 11월 27일 한 양을 떠나 경기도 용인에 사는 처남 서당에서 머문 이야기 를 시작으로 1601년 2월 서울 집으로 환가할 때 까지 기록 이다.

    원본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의 구성은 <Table 1>과 같다. 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원본은 선조 24년(1591) 11월 27일 부터 시작하여 선조 34년(1601) 2월 27일까지 만 9년 3개월 간의 일기로서 모두 7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책의 수록기 간과 분량은 각각 다르다. 1책부터 3책까지는 거의 1년 동안 쓴 일기로 되어 있고, 4책은 2년 1개월, 5책은 7개월, 6책은 1년 4개월 그리고 7책은 2년 2개월 동안 쓴 일기로 구성되 어 있다.

    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은 개개인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생 활에 관한 정보를 읽어 낼 수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시 대 음식생활의 특징을 더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다는 장 점을 지니고 있다(Shin 2010). 반면 이 일기의 음식관련 내 용을 조선중기 음식사(飮食史) 전면적인 특징으로 일반화하 기엔 한계점이 있다. 또한 일기는 쓴 개인의 시각으로 파악 된 것이며, 일기 작성자의 집필 원칙, 경험의 강도, 심정에 따라 달리 결정된다는 한계점이 있다(Kim 2013).

    2. 연구 방법

    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문헌 고찰 연구방법은 내용분석 (Contents Analysis)을 통하여 이루어졌다(Anderson et al. 2001;Thayer et al. 2007;Park & Woo 2012). 내용분석은 텍스트를 분석 대상으로 삼고, 표면적 정보의 기술이 아닌 그 이면의 심층 내용을 추론해 내고자 하였으며, 이 추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체계적이고 객관적인 절차와 과정 을 거치는 것이다(Poldner et al. 2012). 따라서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문헌연구는 국역으로 번역 검증된 2차 사료를 분 석하였고, 일기에 기술된 식품이나 음식과 관련된 단어를 모 두 수집한 후 콩 관련된 식품 두(豆), 태(太) 그리고 콩 음식 과 관련된 시(KJFC-34-3-241_img2.gif), 장(醬), 죽(粥), 떡(餠) 등을 추출한 후 공 통된 특성을 갖는 것끼리 항목별로 분류 하였다. 본문 내용 의 스토리와 분류된 키워드를 중심으로 정보를 해석하였으 며, 관련 시대적 상황과 환경을 고려하여 그 이면의 심층 내 용을 추론해 내고자 하였다.

    III. 결과 및 고찰

    1. 16세기 두류 수급(需給) 현황

    1) 오희문가의 곡류와 두류 생산 현황

    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에서 오희문은 한해를 결산하며 그 해 소출한 곡류에 관하여 정리하여 기록하고 있다. 1592년 부터 1596년은 유랑기로서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여 일정한 소출이 없어 기록하지 못하였으나, 평강에서 거주하는 1597 년부터 1600년은 <Table 2>와 같이 곡류 생산에 관한 기록 을 남기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1597년 소출은 기장, 피와 조가 합하여 4석 10두, 보리 4석 2두, 콩 8석 13두, 팥 5석 4두, 녹두 5두 총 합이 23석 4두이다. 1598년 소출은 기장, 피와 조가 합하여 22석 41두 9승, 보리 5석 13두 5승, 콩 23석 15두 5승, 팥 10석 26두 1승, 녹두 7두 5승 총합이 66석 12두 5승이다. 1599년의 소출은 기장, 피와 조가 합하여 32석 16두 5승, 보 리 8석 6두, 콩 32석 20두 6승, 팥 19석 13두, 녹두 1석 6 두 총합이 92석 61두 11승이다. 1600년의 소출은 기장, 피와 조가 합하여 7석 18두, 보리는 기록이 없으며, 콩 8석 11두, 팥 12석 11두, 녹두 7두 5승 총합이 30석 2두 5승이다. 보 리의 기록이 빠진 1600년을 제외하고 1597년부터 1599년의 소출 추이를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생산량이 증가하고 있음 을 확인 할 수 있다. 곡류와 두류의 생산량을 4년 합으로 비 교해 보면 곡류(기장, 피, 조, 보리) 생산량은 89석 2두 9승 이고 두류(콩, 팥, 녹두) 생산량은 127석 5두 2승으로 이는 41 : 59% 비율로 곡류 중 두류 생산량이 많음을 확인 할 수 있다.SejongSilokjiligy (世宗實錄地理志)물산을 분석한 결과 조선시대는 대두(콩)와 소두(팥) 및 녹두를 두류(豆類) 로 일괄 정리하였고, 대맥(보리)와 소맥(밀), 교맥(蕎麥 메밀) 은 맥류(麥類, 보리류)로 분류하였다. 또한 그 수록 순서가 쌀과 보리 사이에 콩을 놓고 있으므로 당시 주식류에서 보 리밥보다 콩 음식류가 더 일반적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Kim 2017)고 하였다.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에 기록된 오 희문가 두류 생산량은 기장, 피, 조, 보리를 합한 곡류 생산 량과 비슷하거나 더 많을 만큼 주요한 식량자원임을 확인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엔 도량형이 일정하지 않아 정확히 파악 할 수는 없지만 본 논문에서는 Kim(2013)의 연구에 의해 대 략 1홉(合)은 한 움큼(1/10升), 1승(升되)는 10홉(1/10斗), 1 두(斗말)는 10升, 1석(石)은 10두 정도로 계산하였다. 그 중 1석(石)은 짚으로 엮어 곡식을 담는 가마니와 유사한 개념의 부피 단위이기 때문에 내용물 종류와 시대, 지방마다 차이가 있었는데(Kim & Na 1994) 세종 28(1446)년에는 곡물을 계 량할 때는 15두를 1 소곡(小斛) 또는 1 평석(平石)으로 하였 고, 술, 기름 등의 액체는 20두를 1 대곡(大斛) 또는 1 전석 (全石)으로 하였으나, 광무 6(1902)년에는 15두를 1석으로, 광무 9(1905)년에는 10두를 1 석(石)으로 통일하였다.

    2) 오희문가의 두류 수증(受贈) 현황

    조선 중기는 서로 필요한 물건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선 물경제 시대였다(Sin 2006).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에 기록된 두류의 수입 내역을 살펴보면 주로 친지나 이웃들로부터 수 증 받은 것이었다. 특히 일기 기록 상황이 피란기였기 때문 에 친지와 지인들로부터 수증 받은 두류가 생존을 위한 최 소한의 두류 수입 내역이라 할 수 있다. 1593년부터 1600년 까지 8년간의 두류 수입 현황을 살펴보면 <Table 3>과 같다. 콩의 종류는 주로 ‘豆’, ‘黃太’로 표현되는 콩, ‘黑太’(검은 콩), ‘靑太’(청태), ‘赤豆’(팥), ‘綠豆’(녹두) 등이 기록되었으며, 말 먹이로써 ‘馬太’(마태)가 있다. 8년 동안 지인들로부터 수급 한 콩류를 합산하여 비교해 본 결과 황태(大豆) 74석 8두 4 승, 적두(팥) 17석 5두 4승 7홉, 녹두 14두 5승 5홉, 흑태 6 두 7승, 청태 8승 순으로 대두의 물동량이 가장 많았음을 확 인 할 수 있다.SejongSilokjiligy (世宗實錄地理志)기록 에도 조선시대 콩은 보통 누런 콩(黃豆)이라 표기하고 있으 며, 조선 8도에서 모두 생산되고 당시 주식하던 콩이 황두 종류였다. 적두(팥)는 경기, 충청, 전라, 황해, 강원의 5도의 주산물로 수록되었고, 충청과 강원도는 붉은팥(赤小豆)으로 수록되어 있어 붉은 팥 재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Kim 2017). 말 먹이용 콩인 마태(馬太)도 3석 12두 8승으로 많은 양 수급된 것으로 파악된다. 조선시대 말(馬)은 교통, 군사, 농업경작 등으로 활용되었으며 그 수요가 크게 확대되었고 말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Nam 1993). 말은 보통 건초와 약 간의 곡식류를 먹는다. 하지만Shaemirok(KJFC-34-3-241_img1.gif尾錄)의 기록 과 같이 피란기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음에도 불구하 고 말먹이를 위한 마태를 별도 수급하였다는 것은 얼마나 말 이 중요했고 말 관리를 귀히 하였는지 알 수 있다.

    3) 오희문가의 두류 소비 현황

    1593년부터 1600년까지 8년간의 두류 지출 현황을 살펴보 면 <Table 4>와 같다. 지출은 주로 가족과 노비들을 위한 집 안에서의 소비와 친지와 이웃들에게 지급하는 형태로 나눌 수 있다. 가족과 노비 등 식량을 위한 8년간 지출된 두류는 20석 2두 9.5승 5홉이며 친지와 이웃에게 지출한 두류는 21 석 5.5승으로 집안과 지인들에게 지출한 양이 거의 비슷하게 나타냈다. 두 항목에서 모두 지출이 큰 두류는 대두, 팥, 녹 두, 청태 순으로 나타났다. 또한 오희문가의 정착기로 본 1597년부터 1599년까지의 지출 추이를 보면 시간이 흐를수 록 콩 지출양이 많은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정착기에는 지 인들로부터 수증한 것과 직접 생산한 소출량이 합하여 두류 지출양이 늘어난 것이다.

    우리 민족은 정착 생활을 선호하는 농경민족이기 때문에 전쟁 소강기인 정유년(1597) 이후에는 콩을 활용한 두부, 두 장(豆醬) 가공이 많아졌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콩을 가공하여 콩나물, 두부, 두장 등 콩 가공 식품을 만드는데 매 우 능숙하다(Lee 1997)고 한다.Jeungbosanlimkyungjie (增 補山林經濟)(Yoon SJ ed. 2007)에는 장 담그기, 계란장, 생 황장법, 태맥장, 소두장, 청태장법, 유인장법, 만초장, 집장, 집장 별법, 전주방, 전시장법, 속전국장, 청국장 별법, 볶음장, 천리장, 급조만초장, 어육장방 등이 기록되었다. 또한 흉년에 장류가 없으면 비록 초목이나 채소를 먹어도 비위가 가라앉 지 않아 병고로 죽는 수가 있다고 하였다.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에서도 양식이 떨어졌을 때 콩을 쪄 간장에 섞어 식사 를 대용하는 장면이 많이 묘사되고 있다. 콩은 피란 중 생존 을 위한 가장 기본이며 중요한 식품이었다. 또한 콩은 길을 이동할 때 쓰는 자금인 노자(路資)로 이용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1596년 9월 16일 기록에 의하면 ‘성민복이 쌀과 콩을 각각 2두씩 언명에게 보내왔는데 서울 가는 노자에 쓰 라는 것이다. 나는 언명에게 녹두 1두, 팥 1두를 주어 노자 에 쓰도록 했다. 평강에서 온 하인들에게는 말 먹일 콩 3두 를 나누어 주고 그들로 하여금 말먹이를 주게 하였다’한다. 피난기간 동안 오희문가의 물품 거래 내역을 보면 지방 인 근 시장을 통해 각종 물품을 구매하는데 소액의 물품을 구 매할 때 콩(太)으로 결제한 경우가 많았다(Lee 2003). 이와 같이 조선 중기 때 콩은 일상식(日常食)으로서 그 의미가 클 뿐만 아니라 생존을 위한 구황식(救荒食) 그리고 여행할 때 행량(行糧)으로도 유용하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16세기 장류 수급(需給) 현황

    1) 오희문가 장류 수증 현황

    피란기 유랑민들에게 장류는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었다. 특히 곡물 위주의 우리의 음식문화에서 소금을 그냥 그대로 먹기보다는 장으로 만들어 먹는 것이 훨씬 입맛에도 좋고 짠 맛을 내는데도 소금보다 뛰어났기(Joo 2006) 때문에 장류는 반드시 수급해야 했다.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에 기록된 오 희문가 장류의 수급 현황은 <Table 5>와 같다. 1593년부터 1600년까지 8년 동안 오희문가에서 지인과 친지 등에게서 지 원 받은 장류는 간장 8석 10두 4.5승 13사발, 말장 3석 10 두 5승, 감장 3석 7두 1승 2행담(싸리나 버들로 결어 만든 길 가는데 가지고 다니는 작은 상자) 17사발, 막장 5두, 즙 장 1사발 등으로 집계 되었다.

    장류는 말장(末醬), 감장(甘醬), 간장(醬,) 즙장(汁醬), 막장 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 말장은Jeungbosanlimkyungjie (增 補山林經濟)(Yoon SJ ed. 2007)에 ‘민간에서는 말장이라고 부르고 또 훈조(熏造)라고도 부르는데 바로 지금의 메주이다’ 고 하여 말장은 메주를 일컫는다. 감장은Joseonmussangshinsikryolijebub (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Lee YG, 1924) 에 기록된바 장즙(醬汁), 장유(醬油), 청장(淸醬), 법장(法醬) 과 더불어 간장을 일컫는 말이다. 감장(甘醬)과 일반 장(醬) 으로 표시된 간장과 합하면 11석 17두 5.5승 2행담 30사발 로 간장이 가장 많은 양 수급되는 장류임을 알 수 있다. Sangayorok (山家要錄)(Rural Development Administration ed. 2004)에 말장훈조(末醬熏造 메주 제조법)가 수록되어 있 다. ‘1-2월 안에 콩을 씻어 불지 않게 삶아 찧어 덩어리를 만들어 단단하게 말린 후 가마니에 담아 풀로 묶는데 볏짚 을 깔고 메주를 겹치지 않게 늘어 놓거나 볏짚을 두껍게 덮 어 7-15일간 훈증하여 하얗게 띄운 것을 반을 쪼개어 볕에 말린 후 다시 가마니에 담아 띄워 햇볕에 말렸다가 사용하 였다’고 하였다.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에 기록된 오희문가 장류 수급 상황에서 보듯 한식 맛의 근원이며 기본양념인 간 장과 그의 주재료인 말장이 많은 양 수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오희문가 장류 소비 현황

    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에 기록된 오희문가의 장류 소비 현황은 <Table 6>과 같다. 장류 소비를 가족소비와 타인양 도 항목으로 나누어 보면 7:3의 비율로 가족소비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가족 소비는 주로 간장이나 된장의 원료인 말장이 많았으며 타인 양도는 간장, 말장, 감장, 즙장 순으로 간장의 비율이 높았다. 집에서 말장으로 장을 담아 기본양념 으로 사용하였으며, 굶주림 상황에서는 구황식 형태로 이웃 과 함께 나누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거란의 침입으로 추위와 굶주림에 떠는 백성들에게 소금과 장을 나누어 주었 다고 기록되어 있다(Yoon 2000). 조선 선조 정유재란 때 어 전 회의에서 ‘왕이 영변으로 피난 갈 것을 정하고, 백관이 몰 려가려면 장(醬)을 미리 준비해야겠다고 하니 신공을 합장사 로 삼아 영변 땅에 먼저 파견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논쟁 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Lee 1997). 이처럼 장은 전시 상 황에서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생필품이면서 구황품이 었다.

    17세기 이전의 장은 콩 메주로 담근 장(醬)과 콩에 기울을 섞어 만든 메주를 이용한 기화장, 즙장 등으로 분류 할 수 있다(Choi et al. 2007). 즙장(汁醬)은 집장이라고도 하며 충 청도, 전라도 등 중부이남에서 만들어 먹던 별미 장의 하나 이다(Han 2007). 특히Jeungbosanlimkyungjie (增補山林經 濟)(Yoon SJ ed. 2007)에는 전주지방의 즙장 제조법을 기 록하고 있다. 즙장은 속성장으로 채소를 많이 넣고 담기 때 문에 ‘채장’이라고도 하고, 삭은 집장이 검은색이어서 ‘검정 장’이라고도 한다. 보통 늦가을 채소를 갈무리 하면서 많이 담근다. 16세기 말엽에 쓴Joobangmoon (酒方文)(Rural Development Administration ed. 2010)과 고종말기에 편찬 된 것으로 추정된 Ewmsikbangmoon (飮食方文)(Rural Development Administration ed. 2010)에 즙장(汁醬) 제조법 이 기록되어 있어 즙장은 조선 중기 이후 널리 소비되었던 장류인 것으로 보인다.

    3) 오희문가 장 담그기 행사

    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 속에 나타난 장 담그기 풍습에 대 한 기록은 1595년부터 1600년까지 6년에 걸쳐 매년 기록되 어 있다<Table 7>. 메주 쑤기가 6회에 걸쳐 기록되었고, 장 담그기가 4회 기록되었다. 메주는 주로 1, 2, 3, 10, 11월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봄, 가을에 주로 쑨 것으로 본다. 또한 장 담그기는 5, 8월에 기록된 것으로 주로 여름철에 담근 것 을 알 수 있다.Jeungbosanlimkyungjie (增補山林經濟) (Yoon SJ ed. 2007)에 ‘장 담그기에 좋은 날(造醬吉日)로 삼 복기간 동안의 황도일(黃道日)에 콩을 물에 담그고 황도일에 찐다. 삼복날에 장을 섞으면 벌레가 생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1597년 5월 9일 ‘한 독은 비지 1항 아리 반을 먼저 넣은 후에 말장 13두와 소금 4두를 물에 타 서 담갔다’의 기록과 같이 피란기 당시 콩의 수급이 어려워 두부 제조 시 버려지는 부산물인 비지를 활용하여 구황장의 일종인 비지장을 개발한 것으로 보인다. 비지장은 주로 국이 나 찌개 등으로 식용했다고 한다(Im et al. 2004). 실제 비지 단백질은 다른 식물 단백질에서 부족 되기 쉬운 함 황 아미 노산과 lysine이 풍부하여 양질의 단백질로 평가되고 있으며 (Hackler et al. 1973), 식이섬유소가 풍부하여 다량의 펙틴 다당류를 함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Ma et al. 1996). <Table 8>

    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에 기록된 간장 재료의 비율은 보통 말장 6두:소금 2두, 말장 15두:소금 5두로 말장과 소금의 비율이 3:1 정도로 하고 있다. 이는Sangayorok (山家要錄) (Rural Development Administration ed. 2004)의 합장법(合 醬法)에 기록된 비율인 훈조 3말과 소금 1말을 기준으로 하 는 것과 같다. 이는 조선 중기 이후 장기간 저장하는 간장은 콩으로만 메주를 쑤어서 담았으며 소금물의 농도는 음력 2 월 기온을 기준으로 하여 20% 정도였다(Yoon 2000)는 연구 결과와 일치한다.

    3. 조선 중기 콩 음식 문화 고찰

    1) 사대부 친목모임 음식 두부

    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에 기록된 콩 음식 중 가장 많이 등 장하는 음식은 두부이며 56회 이상 기록되었다. 두부는 1월 부터 12월에 이르기 까지 계절에 상관없이 연중 내내 즐겨 만들어 먹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두부는 그 자체로 주로 먹 거나 두부구이, 두부국 형태로 섭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에서 확인 할 수 있듯이 하루 전날 콩을 보내 두부를 취송(取送)할 것을 부탁하면 주문자가 두 부를 받아오는 것이 아니라, 다음날에 두부를 만든 절의 중 이 직접 가져다주는 식이다. 두부는 주로 절에서 만들어 오 는데, 사찰이 두부 공급을 도맡게 된 것은 조선 건국 초부터 줄곧 이어져 온 현상이었다. 사찰들은 두부를 만들기 위한 별도의 건물을 경내에 만들어 두기도 하였다(Kim 2007). 사 찰에서 두부 만들어 먹는 것을 사족(士族)끼리 친목모임을 하는 계기로 삼기도 하였다.

    1593년 8월 6일 ‘저녁 식사 후에 경흠과 심원, 자중, 임현 의 무리는 도갑사로 올라가서 함께 잤는데 내일 두부를 만 들 계획이다’. 1593년 8월 7일 ‘이른 아침에 아우와 함께 절 에 올라가서 제공과 함께 두부를 먹고 혹 바둑도 두고 종정 도를 놀면서 웃음거리로 삼았다’. 조선 중기에는 대체로 사 찰에 두부콩을 미리 보내거나 가지고 가서 두부를 만들게 하 고는 바둑을 두거나 술을 마시면서 소일을 한 것으로 보인 다. 이러한 사찰에서 두부를 먹는 친목모임을 연포회(軟泡會) 라 부르는데(Joo 2017)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기록들은 조 선 중기 이후에 연포회가 사림의 생활 속에 점차 확산되어 갔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1500년대 초 에 쓰여진 Suunjappang (需雲雜方)(Yoon SJ ed. 1998) 에 연포(軟泡)가 기록되었는데, 닭 삶은 물에 기름에 지진 두 부를 넣고 삶은 닭을 다지고 석이, 표고, 생강, 파를 다져 넣 고 끓여 후추와 초피가루를 뿌려 먹는 음식이다.Suunjappang (需雲雜方)에는 양만두, 어만두, 처녑만두, 생치만두 등 다양한 만두가 기록되었으나 만두소에 두부가 들어가지 는 않았다. 연포 외에 두부를 기름에 지져 다양한 채소를 고 명에 넣고 끓여 먹는 소탕(蔬湯)이 있다. 조선 중기 두부는 사찰에서 먹는 사대부 음식이었으며, 기름에 지져 탕에 넣는 귀한 음식임을 알 수 있다.

    2) 회복(回復)과 기복(祈福)의 콩죽(豆粥)

    죽은 곡물로 만든 음식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음식으로 본 다.Imwonsibyukji (林園十六志)(Lee et al. 2007)에서는 장래(張來)의 죽기에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죽 한 사발을 먹 으면 배는 비어 있고 위는 허한데 곡기가 일어나서 보(補)의 효과가 매우 좋으며 부드럽고 매끄러워 위장에 좋다. 이것이 음식의 가장 좋은 묘책이다’고 하였다.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 錄)에 기록된 콩 음식 중 두부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음 식이 죽이다. 죽은 35회 등장하는데 종류는 콩죽, 콩 가루죽, 팥죽, 녹두죽이 있다. 계절별로 살펴보면 콩죽은 일 년 내내, 녹두죽은 봄과 가을에 팥죽은 주로 여름과 겨울에 즐겨 먹 었음을 알 수 있다.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에 기록된 콩죽은 피란기 구황식으로서 의미가 크다. 주로 양식이 없어 콩죽으 로 지낸다는 기록이 많다. 콩죽은 껍질을 깐 콩을 갈아서 체 에 거른 부드러운 콩물에다 불린 쌀을 넣어 죽을 쑤며, 한번 끓인 뒤 날 쑥을 넣고 한 번 더 끓인 다음 소금으로 간을 맞춘 음식이다(Han 2007). 선조실록(宣祖實錄) 28(1595)년 10월 1일자 기록에 의하면 홍문관 교리가 사직을 청하는 상 소에서 가난한 가운데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는 상징적 음식 으로 콩죽을 대접한다는 기록이 있다(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식욕이 떨어지는 봄철에 쑥과 같은 향긋한 봄나물을 넣어 만든 고소한 콩죽과 가난한 가운데 부모님 봉 양을 위한 최소 음식인 콩죽은 단백질 급원 별식이자 생명 을 연장시켜 주는 구황식이었다.

    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에 기록된 팥죽은 동지 속절(俗節) 에 먹는 시절음식이며 제사의 제물로 올려졌다. 1593년 11 월 27일 ‘내일이 팥죽 먹는 속절(俗節)인데 집에는 한 되의 팥도 없고 또 얻을 곳도 없어 아이들의 청으로 부여군수에 게 팥을 빌어다가 죽을 쑤어 먹기 위해서다’와 같다. Dongkuksesigy (東國歲時記)에 ‘동짓날에는 팥죽을 쑤는데 찹쌀가루로 새알 모양의 새알심 떡을 만들어 그 죽 속에 넣 고 꿀을 타서 시절음식으로 삼으며 제사의 공물에도 쓴다. 그리고 팥죽 국물을 대문짝에 뿌려 상서롭지 못한 것을 쫓 아버린다고 하였다(Lee 1985). 赤豆粥(팥죽) 만드는 법은 고 조리서 규합총서, 부인필지 등에 설명되어 있다.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에 기록된 녹두죽은 환자 회복식(回復食)으로서 의 미가 있다. 1593년 8월 9일 ‘어머님 기후는 여전하시나 복통 이 끝내 아주 낫지 않으나 민망스럽다. 새벽에는 녹두죽 하 보시기를 드셨으며, 아침에는 흰죽 반 그릇을 드셨다’와 같 다. 승정원일기를 토대로 녹두죽 활용을 고찰한 연구에서도 조선시대 왕가의 녹두죽 활용은 주로 목숨이 위태롭고 죽음 이 다가오는 급박한 상황에서, 질병으로 인해 입맛이 없을 때 병의 회복을 위한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Park et al. 2016).

    3) 마음 나눔의 콩떡(豆餠)

    떡은 각종 제례, 통과의례, 명절의 행사 등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우리나라 고유의 음식이다. 대개 곡식가루를 반죽하여 찌거나 삶아 익힌 음식으로 각 지방마다 그 지역에서 산출 되는 농산물을 이용하여 만든 특색 있는 여러 종류의 떡이 있다. 떡의 주재료는 주로 쌀과 같은 곡식류가 사용되며, 고 물은 콩과 같은 두류가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Im & Park 2007).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에 기록된 콩으로 만든 떡은 팥떡과 콩떡이다. 피란기 곤궁한 상황 속에서 각종 제 례, 의례 및 행사를 치르기 위해 곡류와 두류를 이용한 콩떡 이 가장 현실적이며 보편적인 떡 형태였다. 민가의 찌는 떡 형태는 대부분 소가 없이 무리떡이나 켜떡의 형태로 쪘다 (Park 1994).

    1596년 12월 29일 ‘집사람으로 팥떡 2두(斗)어치를 보내서 조비 및 평강에서 온 사람들에게 나눠 주어 위로하게 했다’ 와 같이 기록되었다. 팥떡(赤豆餠)은 1800년대 말 고조리서 인 시의전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주로 멥쌀과 팥을 이용 하여 찌는 시루떡 형태이다. 1597년 1월 25일 ‘최경수가 상 하 식사를 대접하고, 콩떡 1행담을 만들어 탁주와 함께 보내 어 하인들을 먹이게 하니 폐가 적지 않아 미안하기 한이 없 다’와 같다. 이와 같이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의 기록과 같 이 조선 중기 콩떡은 곤궁한 상황 속에서도 떡을 만들어 사 람들에게 나눠 주어 위로하며 격려하는 마음을 나누기에 가 장 적합한 음식이었음에 분명하다.

    IV. 요약 및 결론

    본 연구는 16세기 생활사의 주요 사료인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분석을 통하여 조선 중기 두류의 수급 현황과 콩 음식 문화를 고찰해 보고자 하였다. 연구 대상은 해주(海州) 오씨 가문에서 지원하고 비영리사단법인에서 번역 발간한 국 역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2권을 2차 자료로 분석하였다. 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은 조선 중기 학자였던 저자 오희문 (吳希文 1539~1601)이 1591년 11월 27일부터 1601년 2월 서울 집으로 환가할 때 까지 거의 매일의 일상을 기록한 소 중한 사료이다. 본 연구 방법은 내용분석(Contents Analysis) 을 통하여 문헌 고찰하였다.

    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분석을 통한 16세기 두류(豆類) 수 급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오희문가에서 기록한 곡류와 콩류의 자가 생산 기록에 의하면 보리의 기록이 빠 진 1600년을 제외하고 1597년부터 1599년의 소출 추이를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생산량이 증가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곡류와 두류의 생산량을 4년 합으로 비교해 보면 곡류 (기장, 피, 조, 보리) 생산량은 89석 2두 9승이고 두류(콩, 팥, 녹두) 생산량은 127석 5두 2승으로 이는 41:59% 비율로 곡 류 중 두류 생산량이 많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두 류 생산량이 기장, 피, 조, 보리를 합한 곡류 생산량과 비슷 하거나 더 많을 만큼 주요한 식량자원임을 확인 할 수 있고, 당시 주식류에서 보리 등의 곡식보다 콩이 더 일반적 활용 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 오희문가의 1593년 부터 1600년까지 8년간 두류 수증 현황을 보면 주로 친지나 이웃들로부터 수증 받는 것이었다. 콩의 종류는 주로 ‘豆’, ‘黃 太’로 표현되는 콩, ‘黑太’(검은 콩), ‘靑太’(청태), ‘赤豆’(팥), ‘綠豆’(녹두) 등이 있었으며, 말 먹이로써 ‘馬太’(마태)가 있 었다. 8년 동안 생산된 두류 생산량의 합산으로 비교해 본 결과 황태(大豆) 74석 8두 4승, 적두(팥) 17석 5두 4승 7홉, 녹두 14두 5승 5홉, 흑태 6두 7승, 청태 8승 순으로 대두의 물동량이 가장 많았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셋째, 오희문가의 두류 소비 현황을 살펴보면 주로 가족과 노비들을 위한 집 안에서의 소비와 친지와 이웃들에게 지급하는 형태로 나눌 수 있다. 두 항목 모두 지출이 큰 순서는 대두, 팥, 녹두, 청 태 순으로 나타났다. 또한 오희문가의 정착기로 본 1597년 부터 1599년까지의 상황 추이를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콩 지 출양이 많은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정착기에는 지인들로부 터 수증한 것과 직접 생산한 소출량이 합하여 두류 지출양 이 늘어난 것이다.

    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에 기록된 16세기 장류 수급현황을 살펴보았다. 1593년부터 1600년까지 8년 동안 오희문가에서 지인과 가족 등에게서 지원받은 장류는 간장 8석 10두 4.5 승 13사발, 말장 3석 10두 5승, 감장 3석 7두 1승 2행담 17사발, 막장 5두, 즙장 1사발 등이었다. 장류 소비는 가족소 비와 타인양도 항목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7:3의 비율로 가족소비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가족 소비는 주로 간 장이나 된장의 원료인 말장이 많았으며 타인 양도는 간장, 말장, 감장, 즙장 순으로 간장의 비율이 높았다. 집에서 말장 으로 장을 담아 기본양념으로 사용하였으며, 굶주림 상황에 서는 구황식 형태로 이웃과 함께 나누었음을 알 수 있다. 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 속에 나타난 장 담그기 풍습에 대한 기록은 1595년부터 1600년까지 6년에 걸쳐 매년 기록되어 있다. 메주 쑤기 행사가 6회에 걸쳐 기록되었고, 장 담그기 행사가 4회 기록되었다. 기록된 간장 재료의 비율은 보통 말 장 6두:소금 2두, 말장 15두:소금 5두로 말장과 소금의 비 율이 3:1 정도였다.

    Shaemirok (KJFC-34-3-241_img1.gif尾錄)에 기록된 조선 중기 콩 음식문화 를 고찰하였다. 콩 음식 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음식은 두부 이며 56회 이상 기록되었다. 두부는 1월부터 12월에 이르기 까지 계절에 상관없이 연중 내내 즐겨 만들어 먹은 것으로 보였다. 두부는 주로 사찰에서 만들었는데, 하루 전날 콩을 보내 두부를 취송(取送)할 것을 부탁하면 다음날에 두부를 만든 절의 중이 직접 가져다주는 식이었다. 사찰에서 두부 만들어 먹는 것을 사족(士族)끼리 친목모임을 하는 계기로 삼기도 하였다. 콩 음식 중 두부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음 식이 죽이었다. 죽은 35회 등장하는데 종류는 콩죽, 콩 가루 죽, 팥죽, 녹두죽이 있다. 계절별로 살펴보면 콩죽은 일 년 내내, 녹두죽은 봄, 가을에 팥죽은 주로 여름과 겨울에 기록 됨을 알 수 있다. 기록된 콩죽은 피란기 구황식으로서 의미 가 컸으며 주로 양식이 없어 콩죽으로 지낸다는 기록이 많 았다. 팥죽은 동지 속절에 먹는 시절음식으로 제사의 제물로 올려졌다. 기록된 녹두죽은 환자 회복식(回復食)으로서 의미 가 있었다. 또한 콩으로 만든 떡은 팥떡과 콩떡이었다. 피란 기 곤궁한 상황 속에서 각종 제례, 의례 및 행사를 치르기 위해 곡류와 두류를 이용한 콩떡이 가장 현실적이며 보편적 인 떡 형태였다. 조선 중기 콩떡은 곤궁한 상황 속에서도 떡 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눠 주어 위로하며 격려하는 마음을 나누기에 최고의 음식이었다.

    감사의 글

    이 논문은 2017년도 호서대학교의 재원으로 학술연구비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이며(과제번호: 20170319) 이에 감 사드립니다.

    Figure

    KJFC-34-3-241_F1.gif

    A treasure 1096 number OriginalShaemirok

    Table

    Configuration of OriginalShaemirok

    Oh-Hwee-Moon Ga’s Grain and Beans Production Tally(1597-1600)

    Oh-Hwee-Moon Ga’s Record of the Received Beans (1593-1600)

    Oh-Hwee-Moon Ga’s Annual Bean Spending (1593-1600)

    Oh-Hwee-Moon Ga’s Record of Received Soy Sauce (1593-1600)

    Oh Hwee Moon Ga’s Record of Soy Sauce Spending (1593-1600)

    Soy Sauce Production, fromShaemirok (尾錄)(1595-1600)

    Bean-related Food, fromShaemirok (尾錄)

    Reference

    1. Anderson T , Rourke L , Garrison DR, Archer W.2001. Assessing teaching presence in a computer conference context. Journal of Asynchronous Learning Networks, 5(2):1-17
    2. Cha GH. 2007. The consumption patterns of animal foods in the sixteenth century as observed through Shamirok. Korean Society of Food & Cookery Science, 23(5):703-719
    3. Cho JS. 2002. Changes in Korean soybean culture. Korea soybean Digest, 19(2):34-54
    4. Choi YJ , Cho SH , Chung RW , Kim EM , Won SI , Cha GH , Kim HS , Lee HG. 2007. Investigation of Fermented soybean sauce on Literatures before the 17th Century. Korean J. Food Cookery SCI. 23(1):107-123
    5. Chung HK , Oh SY , Kim MH , Ahn HJ. 2013. Food and Culture. Gyomoonsa, Korea, p 212
    6. Chung HK , Oh SY. 2013. What is the Jang for Korean. Hyoil, Seoul, pp 166-170
    7. Chung SM. 2003. A study on 『Shwaemirok』. Doctoral degree thesis, Wonkwang University, Korea, pp 3-10
    8. Hackler LR , Stillings BR , Ploimeni BJ. 1973. Correlation of amino acid indexes with nutritional quality of several soybean fraction. Cereal Chem., 44(1):344-638
    9. Han BJ. 2007. 100 Kinds of Our food 1. Hyunamsa, Seoul, Korea. p 518
    10. Heo MH. 2018. Health and vegetative meat alternatives for sustainable environment. Korean Soybean Society, 342(1):2-5
    11. Im HS , Park YM. 2007. A study on the literature of the materials used in steam rice cake. Janahnnonchong, 27(1):113-140
    12. Im SK , Yoo SM , Kim TY , Chun HK. 2004. Quality characteristics of Bijijang in different fermentation conditions. Korean J. Food SCI. Technol., 36(3):448-455
    13. Jeon Soon Eui (全循義).『Sangayorok (山家要錄)』In: Rural Development Administration editor. 2004. Rural Development Administration. Kyounggido, Korea. pp 89-90
    14. Joo YH. 2006. Food War Culture War. Four seasons, Korea, pp 75-81
    15. Joo YH. 2017. The Festival and Celebration Food of Chungcheong-Do Deoksan’s Household of the Gentry in 1609-1623: Focusing on Jo Geuksun’s Injaeillok. Jangseogak, 38(1):90-129
    16. Kim IG. 2017. Historical study on the dispersion of grains and the geography section of the annals of King Sejong as a folkloristic product geography in Joseon Dynasty. The Korean Cultural Studies, 33(1):135-174
    17. Kim MH. 2013. A Study on the 16th Century Food Culture of Chosun Dynasty Nobility in “Miam’s Diary”.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Dietary Culture, 28(5):425-437
    18. Kim ND , Jeon MY , Lee HE , Lee JY , Kim SY. 2017. Trend Korea 2018. Seoul University Consumption Trends Analysis Center. A future window, Seoul, pp 360-420
    19. Kim SB , Na YA. 1994. Review on the ancient Korean length, weight and volumetric measures. Korean J. The east Asian Society of Dietary Life, 4(1):1-18
    20. Kim SJ. 2007. The Living Culture of the Yangban in view of Shoaemirok. The study of Oriental chinese literature, 24(1):177-206
    21. Kim You (金綏).『Suunjappang (需雲雜方)』. In: Yoon SJ editor. 1998. Sinkwang Co., Kyounggido, Korea. pp 275-327
    22. Lee JS. 2003. Monetary circulations of Choson between the Mid- Sixteenth and the early eighteenth centuries investigated by everyday journals and records of land trades. History of Joseon Dynasty, 32(1):95-148
    23. Lee SW. 1985. Korean culinary history. Gyomoonsa, Kyounggido, Korea. pp 86-92
    24. Lee SW. 1997. Korean food culture history. Gyomoonsa, Seoul, pp 141-144
    25. Lee YG. 1924. 『Joseonmussangshinsikryolijebub (朝鮮無雙新式 料理製法)』. Youngchangseogwan. Korea. p 6
    26. Ma CY , Liu WS , Kwok KC , Kwok F. 1996. Isolation and characterization of proteins from soymilk residue (Okara). Food Res. Int., 29(1):799-805
    27. Nam DY. 1993. Supply and demand problems of horse in the Chosun Dynasty. The Hyangto Seoul, 53(1):93-150
    28.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The True Record of the Joseon Dynasty. http://sillok. history. go. kr, [accessed 2019.06.04]
    29. OhHee Moon (吳希文). 1601. 『Shaemirok ( 尾錄) 1, 2』In: Kim Min Soo editor. 2014. Olje. Seoul, Korea. pp 12-657
    30. Park GY. 2004. Health funtionality of Korean traditional Soyfermented food. Inje Food Forum, 11(1):1-49
    31. Park HW. 1994. A literature review on the characteristics of rice cake material. Journal of The east asian society of Dietary life, 4(1):137-160
    32. Park JY. Lee HY. Lee CJ. Ahn SW.2016. Study on use of Mung Bean Porridge reported in daily records of royal secretariat of Joseon Dynasty. The Korean Society of Food Culture, 31(6):541-553
    33. Park YJ , Woo YH. 2012. Content Analysis in the field of educational technology in Korea: A Methodological Review. J. of Educational technology, 28(1):263-287
    34. Park YM. 2016. Cultivation and utilization of pulse crops by ancient Koreans. Gojoseondangungak, 35(1):83-108
    35. Pinghugak Lee (憑虛閣 李氏). 『Kyuhapchongseo (閨閤叢書)』. In: Jung YW editor. 2008. Bojinjea, Kyounggido, Korea. p 53
    36. Poldner E , Simons PRJ , Wijngaards G, Vande Schaaf MF.2012. Quantitative content analysis procedures to analyse students’ reflective essays: A methodological review of psychometric and edumetric aspects. Educational Research Review, 7(1):19-37
    37. Rural Development Administration.2010. 『Gonoongseogukyukchongseo (古農書國譯叢書) 17』. Rural Development Administration. Kyounggido, Korea. pp 34-55
    38. Rural Development Administration.2010. 『Goohwangbanggomoonhunjibsung (救荒方古文獻集成) 1』. Rural Development Administration. Kyounggido, Korea. pp 175-176
    39. Ryu Jung Lim (柳重臨).『Jeungbosanlimkyungjie (增補山林經 濟)』. In: Yoon SJ editor. 2007. Jigumoonhwasa, Korea. Pp 365-368
    40. Seo Yu Gu (徐有). 『Imwonsibyukji (林園十六志)』. In: Lee HJ, Cho SH, Chung NW, Cha GH. 2007. Gyomoonsa, Kyounggido, Korea. p 236
    41. Shin BJ. 2010. A repository of life history in the mid-Jeseon period『Swaemirok (尾錄)』. Seonbi Culture, 17(0):8-14
    42. Shin BJ. 2012. A study of Oh Hui-mun’s personal journal Swaemirok -with a focus on his life as a refugee. Joseonsidaisahakbo, 60(1):37-70
    43. Sin DW. 2006. Changes in medical life in the late Chosun Dynasty:form a futures economy to a market economy. A Historical Criticism, 75(1):344-391
    44. Thayer, Alexander , Evans, Mary, McBride, Alicia, Queen, Matt, Spyridakis, Jan.2007. Content analysis as a best practice in technical communication research. J. of Technical writing and communication, 37(3):267-279
    45. Yoon DI. 2000. A study on the changes and development statues of the traditional fermented soy sauce products in korea. Kwandong Collection of essays, 28(2):257-286
    46. Yoon DI. 2007. A Study on the Asian fermented soybean sauce culture. Comparative folklore, 34(1):155-215
    47. Yoon SJ , Huh WD. 2008. A Study on Calorie and Proximate Components of Traditional Korea Gruel.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Food Science and Nutrition, 37(7):879-8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