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 론
어떤 음식의 탄생과 변화 과정을 추적하는 것은 매우 어 려운 일이다. 특히 과거에 음식문화는 기록으로 남길 정도로 중요한 분야로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에 문헌자료가 대단히 빈약하다. 따라서 온갖 추측이 난무하고 설만 분분할 뿐 정 확한 내용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마산의 대표적 향토음식으로 꼽히는 ‘아귀찜’의 등장과 확 산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려진 사실이 많지 않다. 아귀찜은 지역 향토음식에 머물지 않고, 수도권 등 여러 지역에 전문 ‘먹자골목’을 형성하며 소위 ‘전국화’에 성공한 음식이다. 이 렇게 널리 알려진 아귀찜에 대해서도 출처가 확실한 사실보 다는 떠도는 다양한 설들이 더 많은 실정이다. 아귀에 대해 서는 “옛날에는 그물에 걸려 올라오면 그 흉측한 몰골 때문 에 어부들이 바다에 던져버렸던 생선”이라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있다. 또한 아귀찜은 “마산의 혹부리 할머니가 어부가 가져다준 아귀를 던져버렸다가 나중에 말라있는 것을 발견 하고 찜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확실한 출처도 밝혀져 있 지 않은 상황에서 계속 재인용되고 있다.
아귀는 정약전(1758~1816)이 흑산도 유배 중에 지은 「Jasaneobo (玆山魚譜)」에 ‘조사어(釣絲魚), 속명 아구어(餓 口魚)’라는 이름으로 실려있다(Jeong 1814). 그리고 김해에 서 24년간의 유배생활을 한 이학규(1770~1835)는 1813년에 집필한「Nakasaengjip (洛下生集)」11권 ‘남식행(南食行)’ 에서 영남지역에서 먹는 다양한 물고기 가운데 하나로 “속 명 아귀어(餓鬼魚), 또 다른 이름은 수치(水雉)”를 소개하였 다(Institute for the Translation of Korean Classics). 그러 나 이후 조리서나 문헌자료에서 아귀 식용에 대한 내용은 찾 아보기 힘들다. 아귀찜에 대해서는 Choo et al.(1998)와 Kim(2002)이 각각 전라북도 향토음식, 그리고 부산향토음식 으로서의 표준조리법과 영양성분을 연구하였을 뿐, 정작 원 조라고 알려진 마산아귀찜에 대한 연구는 없다.
본 연구는 한때 버려졌다고 이야기되던 아귀를 이용한 음 식이 어떻게 전국화를 이루며 각광 받는 음식이 되었는지를 밝히려는 시도이다. 특히 여러 지역에 아귀 음식이 있었지 만, 유독 ‘마산아귀찜’이라는 이름이 브랜드화 되어 전국적 으로 사용되게 된 과정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한 지역의 음 식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어떤 요인이 영향을 미쳤으며 어떤 변화를 거쳐 왔는지를 밝히는 것은 향토음식의 발전과정을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이러한 시도는 음식에 스 토리텔링을 부여함으로써 관광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높아질 뿐 아니라 해당 지역의 이미지 제고에도 기여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크게 네 시기로 나누어 첫 번째 일제강점 기에는 주로 아귀 어획량에 대한 자료를 통해 아귀 식용의 가능성이 높았다는 사실을 밝힐 것이다. 두 번째는 광복 이 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로 주로 아귀를 탕으로 먹던 것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세 번째는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 대 말까지로 아귀찜이 등장하여 발전하던 시기이다. 지역별 아귀 음식의 특징을 조사하고, 아귀찜의 등장과 거기에 영향 을 준 것으로 추정되는 요인들을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 시 기는 1980년대 이후로 아귀찜이 전국적인 음식이 되어간 과 정을 추적할 것이다. 더불어 아귀 조리법의 변화와 아귀 소 비량의 증가의 상관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본 연구에서는 표준어인 ‘아귀’라는 표기법을 따르지만, 인용문헌의 표현이 나 고유 상호 등에서 ‘아구’를 사용한 경우는 그대로 표기하 였다.
II. 연구 내용 및 방법
본 연구에서는 문헌연구방법과 심층 인터뷰를 이용하였다. 문헌연구는 식민지 시기의「Hanguksusanji (韓國水産志)」, 「Joseon Chongdokbu tonggyeyeonbo (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30~1942)에 실린 아귀 기록과 생산량을 살펴보았다. 해방 이후는「Fisheries statistics of Korea (韓國水産統計年鑑)」, 「Susanyeongam (水産年鑑)」등의 공식문서와 통계청의 아귀 생산량, 수출입 물량 등을 통해 아귀 소비량의 변화를 조사하 였다. 또한 향토음식조사연구보고서, 시사(市史), 국어사전, 조 리서와 더불어 당시 신문 기사와 문학작품, 대중가요에 이르 기까지 아귀에 대한 문헌적 자료를 최대한 찾아보고자 하였 다. 연구에 활용한 신문명은「Donga ilbo (동아일보)」, 「Jungangilbo (중앙일보)」,「ChosunIlbo (조선일보)」, 「Maeilgyeongje (매일경제)」,「Gyeonghyangsinmun (경향신문)」, 「KyongnamdominIlbo (경남도민일보)」,「Jeonbukdominilbo (전북도민일보)」등이다.
더불어 문헌자료의 부족을 보완하고 현장의 생생한 목소 리를 담고자 마산, 군산, 서울의 아귀 음식점 경영자, 마산 어시장 아귀 유통업자, 전직 마산시 공무원과 소비자 등 다 양한 관계자들의 심층 인터뷰를 시도하였다. 또한 구술자료 와 문헌자료를 크로스 체크하여 최대한 객관적 자료로 검증 되는 내용을 정리해서 실체에 다가서려는 노력을 하였다. 심 층인터뷰 대상자는 <Table 1>과 같다.
III. 결과 및 고찰
1.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아귀는 ‘안코(あんこう)’, 한자로는 ‘안강어(鮟鱇 魚)’로 불리는데 옛날부터 고급 어종으로 취급되었고 즐겨 먹어온 식재료이다.
鮟鱇は, 江時代の頃の「三鳥二魚」と呼ばれる5大珍味の 1つであり, 歷史的にも名高い高級食材 (Food and Agricultural Materials Inspection Center).
아귀는 에도시대(17세기초)에 ‘三鳥二魚’로 불리는 ‘5대 진 미’ 중의 하나였고, 역사적으로 이름 높은 고급 식재료였다.
여기에서 ‘二魚’는 도미(魚周, タイ)와 더불어 아귀(鮟鱇, ア ンコウ)이다. Kim(2002)의 연구에 따르면, 일본은 아귀의 부 위별 요리가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나라로 내장부위(간, 아 가미, 지느러미. 위, 껍질, 뽈살, 난소)를 귀한 것으로 여겨 7 가지 부위별 메뉴가 있으며 그 중에서도 간을 가장 귀하게 취급한다. 일본에서 아귀는 구이, 튀김, 회 등으로 이용되어 왔고 아귀껍질요리는 복어껍질, 대구껍질요리와 함께 오래전 부터 먹어왔다.
일제강점 직전인 1909년 조선총독부가 한반도의 수산자원 을 조사한 「Hanguksusanji (韓國水産志)」에 60종 어류 중 하나로 “안코(鮟鱇魚, あんこう)”가 발견된다. 또한 「Joseon Chongdokbu tonggyeyeonbo (朝鮮總督府統計年報)」를 통해 서 1930년부터 1942년까지 아귀 어획고를 살펴볼 수 있다.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서 아귀 어획고가 통계에 잡히기 시작 한 것은 1930년인데 1932년까지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어획 량을 나누어 조사하였고, 이후 1933년부터 1942년까지는 각 도별로 어획량을 조사하였다.
1930년부터 1932년까지의 아귀 어획고를 정리한 <Table 2>을 보면 일본인뿐 아니라 조선인도 아귀를 잡았다. 그리고 <Table 3>에 나타난 것처럼 충북과 평남을 제외하고 전국에 걸쳐 아귀를 어획하였다. 통계연보에서는 1930년부터 1932 년까지 수량의 단위가 관(貫)으로, 이후 시기는 kg으로 기록 되어 있었다. 이에 단위의 통일을 위해서 <Table 2>은 1관 을 3.75 kg로 계산하였고 소수점은 반올림해서 정리하였다.
아귀 어획고를 <Table 3>를 통해 보면 1935년까지는 함경 북도에서만 나타났고, 1936년에는 강원도에서도 소량 잡혔 다. 1937년부터는 서해, 남해, 동해 전역에서 잡혔는데 그 가 운데서도 북쪽에서는 함경도 지역, 남쪽에서는 경상도 지역 이 우세한 것을 볼 수 있다. 식민지 시기 수산물 어획고를 연구한 Kim(2016)에 의하면, 전체 어획고는 1930년대 전반 까지 경남과 전남, 1930년대 중반부터 1941년까지는 함경도, 이후 1942년과 1943년은 다시 경남과 전남이 우위를 보였다.
이렇게 잡은 아귀를 얼마나 조선인이 먹었는지에 대한 기 록은 찾기 어렵다. 그러나 앞서서 살펴본 것처럼 일본에서는 ‘5대 진미’로 꼽혔던 아귀를 당시 우리나라에 거주했던 일본 인들은 식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습을 목격하면서 자연 스럽게 한국인들도 아귀를 먹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일본 식 아귀탕인 ‘아귀나베(アンコウ鍋)’는 나중에 한국인들이 먹 었던 아귀탕으로 연결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위의 표에서 나타난 무게와 금액을 통해서 아귀 1 kg 가격 을 환산해보면 1930년에는 아귀 1 kg당의 가격이 0.032엔에 불과했지만, 1942년에는 4.598엔까지 올랐다. 즉 이것을 통 해 아귀는 버려지던 생선이 아닌, 수요가 있었고 상품가치가 있었던 생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Figure 1
2. 해방 이후
해방 이후인 1952년 판「Fisheries statistics of Korea (韓 國水産統計年鑑)」창간호에는 어류명표(魚類名表)가 실려있 는데, 56번째에 “아귀”가 수록되었으며 일본어명으로는 “鮟 鱇, 안고우”, 영어명은 “Angler”로 기록되어 있다(Central Fishery Products Inspection Station 1966).
그리고 국어사전에서 ‘아귀’, 혹은 ‘아구’를 발견할 수 있 는 시점은 현재까지 조사된 바로는 1958년부터다.「국어새 사전」에는 ‘아귀’가 수록되어 “아귀과에 딸린 바닷 물고기, 안강(鮟鱇)”이라고 설명하였고 아귀의 삽화까지 있다(Korean Language Society 1958). 한편 ‘아구’는 표제어로 수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같은 1958년에 발간된「표준국어사전」 에는 “아구: 안강과(鮟鱇科)에 붙은 심해어(深海魚)”라고 되 어있고, ‘아귀’는 생선 이름이 아닌 “늘 굶주리는 귀신”, “물 건과 물건의 갈리는 곳” 두 가지 뜻으로만 실려 있다(Mun SY 1958). 즉 1958년에는 ‘아구’가 표제어로 국어사전에 나 타나기도 했다. 그런데 1963년 사전에는 ‘아귀’만 있고 그 이 후로도 계속 ‘아구’는 생선이름으로 나타나지 않아 1960년대 초에 아귀가 표준어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1) 경상남도 지역의 아귀탕
1950년대 경남지역의 아귀 식용방법은 다음과 같은 두 문 인의 회고를 통해 볼 때 주로 탕으로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1941년 부산 출생인 김종해 시인이 「Siinsegye (시인 세계)」에 발표한 ‘술국 아귀탕’의 추억이라는 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열 살 무렵 겨울 새벽에 어머니가 끓여주는 술국은 큼직큼직 하게 썰어 넣은 무와 아귀의 물렁뼈, 아귀껍질, 생선살 그리고 아귀내장이 들어있어 입맛을 냈다.(중략) 우리 집은 막걸리를 팔고 있었기 때문에 동네 어른들이 새벽 노동일 나가기 전에 들러 막걸리 두세 잔과 찬밥 한 덩이를 넣은 뜨거운 해장국 아 귀탕을 맛있게 드셨다.
또한「Dong-A Ilbo (동아일보)」 1977년 11월 8일자 기사 에서는 1944년 경상남도 남해 출생인 작가 백시종의 회고에 서도 ‘아꾸국’이라 불렸던 아귀탕을 발견할 수 있다.
아꾸란 아귀의 경상도 사투리인데 터무니없이 입만 커서 살보 다 뼈가 많은 지저분한 놈이었지만 국으로 끓여놓으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술을 좋아하시는 아버지 때문에 아침 속 풀이용으로 아꾸국을 끓이던 어머니가 새벽같이 책보자기를 들 고 나오는 나를 부엌으로 불러들였고 그것을 쪽바가지에 듬뿍 떠서 건네주는 것이었고 속이 뜨뜻하게 훌훌 마시라고 강요하 는 것이었다. 생긴대로 뚝뚝 썰어 넣은 무가 몇 쪽 떴을 뿐인 데 왜 그것이 그렇게 맛이 있었을까.
김종해 시인이 열 살 무렵이던 1950년대 초반에 시인의 어 머니는 부산 지역에서 새벽일을 나가는 일꾼들이 즐겨 먹었 던 아귀탕 파는 식당을 했다. 그리고 백시종 작가가 가정에 서 어머니가 끓여주시는 아귀탕을 먹었던 시기도 비슷한 때 로 추정된다. 또한 Kim(1990)의 연구에 따르면, 1986년도부 터 1989년까지 조사한 경상남도의 향토 탕 중 하나로 부산 지역의 ‘물꿩국’이 포함되었다. ‘물꿩’이란 아귀의 경상도 방 언으로 생선의 맛이 좋아 물에 사는 꿩고기 같다는 뜻이며 ‘물꿩국’이란 아귀탕을 의미한다. 따라서 1950년대에 아귀탕 은 가정과 식당에서 먹어왔던 음식이며 경남 지역민들에게 향토음식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전라남도 지역의 아귀탕
전라남도에서도 “아구탕”을 향토음식으로 꼽았다. 1979년 ‘전라남도농촌진흥원’에서 펴낸「Collection of Local Foods (향토요리모음)」의 서문에서는 “향토지역에서 오래전부터 전 래 되어온 인기 있는 요리”를 발굴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수 집된 147개 요리 중 하나가 ‘아구탕’이다. ‘목포시 보광동 3 가 4번지 전용애’가 전수한 ‘아구탕’ 조리법은 “아구를 적당 한 크기로 도막치고 멸치국물을 만들어 된장을 풀어 넣고 끓 으면 아구와 고춧가루를 넣고 쑥갓, 미나리, 대파, 마늘, 생 강을 넣고 그릇에 담고 통깨를 뿌리고 참기름을 쳐서 먹는 다(Jeollanamdo Nongchonjinheungwon 1979)”라고 하였다.
이 음식은 앞서 경상도 출신 두 문인의 회고에서 나오는 아귀와 무로 끓였던 맑은 탕과는 확연히 다르다. 된장과 고 춧가루로 간을 하고 여러 가지 채소가 들어가며 통깨를 뿌 리고 참기름을 쳐서 먹는 것으로 보아 오히려 지금의 아귀 찜과 비슷한 면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자료에서 이 음식의 제목은 ‘아구탕’이라고 되어 있으며, 특기사항에 “몇 년 전 부터 기름기를 좋아하지 않는 분들이나 술을 좋아하시는 분 들이 속을 푸는데 시원한 국물로 많이 애호하고 있다.”라고 되어 있다.
3) 인천 지역의 아귀탕
인천 역시 아귀탕이 유명한 지역인데 한국전쟁 후 인천항 부근에서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인천항은 서해의 수산물이 집합하는 장소이기도 하며, 또 노동자들이 집합하 는장소였다(Incheonagwi, https://terms.naver.com/entry.nhn? docId=3568547&cid=58987&categoryId=58987). 그들을 위 해 당시 저렴한 생선이었던 생 아귀를 이용해 탕을 끓였다. 1972년 개업한 ‘성진 물텀벙’이라는 식당이 현재 영업 중이 며, 1999년 인천의 용현동에는 ‘물텀벙이 거리’까지 조성되 었다.
이것으로 보아 ‘찜’ 개발 이전의 아귀는 우리나라 남해안 지역인 경남과 전남뿐 아니라 서해안의 인천에서까지 ‘탕’으 로 많이 식용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각기 자기 고 장의 향토음식으로 여겼을 정도로 각 지역에서는 익숙한 음 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아귀찜의 등장과 발전
주로 ‘탕’으로 먹던 아귀는 1960년대 ‘찜’이라는 새로운 조 리법으로 소비되기 시작했다. 아귀찜으로 유명한 지역은 마 산과 인접한 부산, 그리고 군산을 들 수 있다.
1) 마산
아귀찜의 원조는 마산이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출신 언론 인 김형윤(金亨潤, 1903~1973)의「The behind history of Masan [馬山野話]」에 의하면, “최근 새로운 음식이 나타났 다. 즉 ‘아구’라는 것인데 3, 4년 전만해도 어망에 걸리면 어 부는 이걸 바다에 버리던 것이 갑자기 밥 반찬과 술안주로 대중의 총애를 받고 있다. 이게 지독하게 매운 약념으로 만 들어져서 도리어 구미에 매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먹을 땐 휴지나 수건을 갖고 있어야 땀, 콧물, 눈물을 닦을 수가 있다. 아주 맵다(Kim 1973).”라고 하였다.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은 “김형윤 선생이 1970년 10월부터 마산시사를 편찬 하면서 원고를 쓰기 시작”했으니 대략 아구음식의 등장을 “1966-1967년 경으로 생각되나, 구전에 의하면 1964년경 (Kim 2008)”이라고 하였다.
마산아귀찜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는데 첫째, 어 느 한 개인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주장이며 최초 개발자에 대 한 의견도 분분하다.「The history of Masan City (馬山市史)」 에는 “오동동에서 장어국을 팔던 ‘혹부리 할매’가 된장과 고 추장을 섞고 마늘, 파 등을 첨가해 만든 양념장을 꼬들꼬들 하게 말린 아구에 발라 북어찜처럼 구워서 팔다가 매운 맛 을 감하기 위해서 삶은 콩나물을 곁들인 것이 시초(Masansisapyeonchanwiwonhoe 2011)” 라고 했는데 혹부리 할머니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다.
한편 1965년에 개업한 ‘오동동원조 진짜초가집’ 박영자 창 업주가 최초라는 주장도 있다. “갑작스런 손님의 주문에 콩 나물에 말린 아귀를 넣고 고춧가루와 파, 마늘로 버무려 된 장으로 간을 해 쪄냈는데 그것이 바로 아귀찜의 시초(Korean Food Foundation 2012)”라고 한다.
또한 1973년 8월 28일자 「Chosun Ilbo(조선일보)」에 의 하면 “마산의 오동동 요정골목에서 음식점을 해오던 ‘구강 집’ 여주인 구봉악씨가 8년 전부터 애주가들의 기호에 맞도 록 막걸리 안주로 만든 것이 동기, 지금은 널리 퍼져 아구찜 파는 집은 마산시내만도 50여곳, 부산, 대구, 서울 등지까지 마산아구찜 전문이란 간판을 볼 수 있다.”라고 하여 최초 개 발자에 대해 이견이 분분하다.
아귀찜 유래에 대한 둘째 주장은 6.25때 피난민이나 반공 포로 등이 만들어 먹던 음식이라는 것이다. 마산향토사연구 소 이학렬 대표의 「Summary of Masan history (간추린 마 산역사)」에 의하면, 한국전쟁시기에 마산으로 몰린 피난민 들이 버려지던 아귀를 요리해 먹었다고 하였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6.25피난민들에 의해서 아귀찜이 나타났 다. 원래 아귀는 그물에 걸리면 재수가 없다는 속설이 있었다. 그러니 구마산 선창가에 가면 아귀는 그냥 버려져 길바닥에 쌓 여 있었는데 농민들이 이것을 비료로 사용하기 위해 가마니에 넣어서 가져갔던 것이다. 6.25 사변 때 일부 경기도 지방에서 피난 온 피난민이 버려져 있는 아귀를 주워서 매운 양념으로 찜을 만들어 부식으로 먹었다. 예부터 마산의 진미라면 대구깡 다구찜이나 미더덕찜이다. (중략) 아귀찜이 대구찜을 대신하고 아귀탕이 대구탕을 대신하게 되면서 오늘날에는 ‘마산 명산’이 라는 이름까지도 얻고 있다(Lee HR 2003).
한편「JoongAng Ilbo (중앙일보)」 2017년 11월 17일자 기사에서는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포로 수용소가 있었는데, 1953년 ‘반공포로 석방’이 이루어지면서 수용소 마을이 생기 게 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당시에는 흔했던 아귀를 주로 탕 으로 끓여 먹었지만 조려서 먹기도 했다. 간을 맞추기 위해 서 된장, 간장, 고추장, 고춧가루 양념을 썼을 것으로 추정되 는데, 1950년대 후반부터 집에서 그렇게 해 먹은 게 마산아 구찜의 원형이라고 믿는 현지인들이 많다.”고 했다.
실제로 마산시민의 인터뷰에 의하면, 아귀찜은 상업화되기 전에 가정에서 해먹었던 음식이었다. 김길자 씨(78)는 경남 대학교 앞에서 1973년부터 아귀탕과 아귀찜 전문식당을 운 영해왔는데, 2006년부터 그 뒤를 이어 온 이미선 사장(56)에 의하면, 김길자 할머니는 어려서 어머니가 자주 끓여주시던 아귀탕에 대한 기억과 그 맛을 바탕으로 창업 때부터 아귀 탕, 아귀찜, 아귀수육 등을 해왔고 그 메뉴는 현재 그대로 유 지되고 있다. 다만 아귀찜의 경우 초기에는 건아귀를 사용했 는데 1990년대 이후 생아귀를 사용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 미선 사장 본인은 어렸을 때 가정에서 아귀탕을 먹은 기억 은 없고 대신 어머니가 아귀찜을 해주셔서 먹었는데 당시 집 집마다 아귀찜을 많이 해서 먹었고 본격적으로 상업화 된 것 은 이후의 일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가정에서도 먹었던 아귀 찜은 1960년대 중반 상업화 되면서 비슷한 시기에 여러 음 식점들이 문을 열었다. 박희자 씨(75세)는 1965년 결혼과 동 시에 마산으로 왔고, 1960년대 말에 음식점에서 아귀찜을 처 음 먹어봤다고 했다. 당시 먹었던 기억을 되짚어보면 “정말 매웠던 것이 기억난다. 콩나물이 많고 아귀는 별로 없었다. 더구나 건아귀라서 아귀 살점은 별로 먹을게 없었다. 어떨 때 건조가 잘못된 아귀는 꼬리한 냄새도 났다.”고 하였다.
아귀찜 유래의 세 번째 주장은 기존 음식의 응용이라는 것 이다.「Traditional Local foods of Korea: Gyeongsangnamdo 」에서는 아귀찜의 유래를 ‘북어찜’의 응용이라고 보았다. “북어찜에 이용한 된장과 고추장, 마늘, 파 등을 아귀에 적용 한 것에서 시작되어(1960년대) 지금은 콩나물, 미나리 등의 채소를 첨가한 찜을 만들고 있다. 마산 아귀찜의 특성은 바 람이 잘 통하는 그늘에서 적당히 말려 꼬들꼬들한 상태의 아 귀를 사용하는 것이다(Culture and Public Information 2008).”라고 하였다.「Native local foods」에서도 아귀찜에 대해 “말린 아귀를 북어찜을 하듯이 파, 마늘, 된장, 고추장 을 넣어 쪄낸 것이다(Jeong & Cha 2007)”고 하였다.
또한 ‘복찜’을 대체해서 개발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어류 연구가 정해석은 “아귀가 귀여움을 받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중에서 ‘복’이 귀해지면서 대타로 등장했다 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중략) 그러던 것이 조리법도 발달 하고 또 복어 맛과 흡사해서 마산에서 경상도, 부산 바닷가 의 요리로 사랑을 받더니 급기야 서울의 술꾼들에게까지 귀 여움을 받는 물고기가 되었다(Jeong 1991).”고 하였다.
이 외에 하나 더 아귀찜에 영향을 준 음식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지지미’이다. 1948년 손정규(孫貞圭)의 조리서 「Urieumsik (우리음식)」에서는 ‘지지미’에 대해 설명하면서 “국과 찌개의 중간 정도인 음식”이라고 했다. 재료는 각종 생 선과 콩나물을 비롯한 채소가 사용되는데, “쇠고기 지방을 조금 넣고 된장, 고추장, 간장으로 간을 맞추고 굵은 고춧가 루, 파, 마늘을 넣는다. 건건찝찔하고 얼큰하며 구수하여 밥 에나 술에나 모두 잘 맞는다(Korean Traditional Knowledge potal http://www.koreantk.com/ktkp2014/kfood/kfood-view. view?foodCd=105820).”고 하였다.
아귀찜 조리법이 문헌에 등장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 요했는데, 1978년『전통향토음식조사연구보고서』에는 경상 도 향토음식 10개 중 아귀찜은 들어가지 않았다. 1984년에 이르러야「A Report of Korean National Folk」향토음식편 경상도지방 찬류(饌類) 목록에 ‘아구찜’이 수록되었는데, 현 재로서는 이 보고서에 실린 아래의 기록이 마산아귀찜의 가 장 오래된 조리법이다.
재료: 아구 마른 것, 콩나물, 미나리, 파, 멸치국물, 양념(고추 장, 마늘, 생강, 소 금, 된장, 고춧가루), 붉은고추, 간장, 설탕
-
마른 아구를 토막쳐서 물을 붓고 푹 삶는다.
-
콩나물은 따로 삶는다.
-
고추장에 마늘, 생강, 소금으로 양념하여 멸치 국물에 개어 놓는다.
-
아구 삶은 것에 고추장 양념을 넣고 끓이다가 콩나물, 미나 리, 파, 붉은 고추 를 넣어 끓을 때 된장과 양념을 넣고 간을 맞춘다.(Culture and Public Information 1984)
한편 1943년 조자호(趙慈鎬)의「Joseonyoribeop(朝鮮料理 法)」에 수록된 ‘명태 지짐이’의 재료와 조리법은 다음과 같다.
재료: 생명태, 정육, 파, 무, 콩나물, 마늘, 깨소금, 참기름, 고추 장, 간장
조리법: 1) 동태를 깨끗이 다듬어 내장을 꺼내고 대가리를 자 른 후 알맞게 토막을 낸다. 2) 고기를 조금만 잘게 썰고, 무는 얄팍하게 나박김치같이 썰어 넣는다. 3) 콩나물을 거두절미하 여 같이 넣어 갖은양념을 하여 고추장, 간장으로 간을 하고 물 을 알맞게 붓고 끓인다. 4) 콩나물이 거의 익으면 생선을 넣고 충분히 끓인다(Korean Traditional Knowledge potal http:// www.koreantk.com/ktkp2014/kfood/kfood-view.view?foodCd =109244).
1984년 보고서의 아귀찜 조리법과 비교해보면, ‘명태 지짐 이’의 조리법에서 2번을 생략하면 3번의 조리법은 아귀찜과 상당히 흡사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미 과거에 북어찜 같이 마른 생선에 고추장 양념을 해서 먹는 요리법은 일반적이었 다. 그리고 지짐이 같이 생선과 채소를 재료로 고추장, 된장, 간장으로 간을 맞추고 고춧가루, 파, 마늘을 넣어 얼큰한 맛 의 국물이 자작한 음식도 있었다. 그러므로 기존 요리법에 당시 마산에 흔했던 건아귀를 적용했다고 볼 수 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찜’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 양념을 한 고기나 채소를 찌거나 국물이 바특하 게 삶은 음식”이며, ‘볶음’은 “어떤 재료에 양념을 하여 볶는 조리법. 또는 그렇게 만든 음식”이다. 이러한 정의로 보면 현 재 생아귀찜은 볶음에 가까운 음식이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1984년 건아귀를 사용한 마산의 조리법은 “마른 아구를 토 막쳐서 물을 붓고 푹 삶는다.”라고 하였으므로 찜의 조리법 을 쓴다. 건아귀 조리를 위해서는 수분이 필요하여 찜으로 조리했는데 이후 생아귀를 사용하면서 볶음에 가까운 조리 법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명칭은 이미 알려진 ‘아구찜’으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2) 부산 물꽁찜
김영복은 “한국전쟁 후 1950년대 중반에 서면 미국부대 옆 물탱크 근방에 술도가가 있었는데, 이 술도가 창고에서 할머 니 두 분이 생아귀를 쪄서 양념장에 찍어 술안주로 먹을 수 있도록 조리했고 이름을 물꽁찜이라 하였다.(중략) 그 외에 도 물꽁집은 서면 일대에 몇 집이 있었으니 비록 음식의 이 름은 다르다해도 아귀어찜은 마산보다 부산이 먼저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부산의 물꽁찜이나 아구찜은 생아귀어를 주재 료로 한다.(중략) 그러나 아귀어 요리를 대중화시킨 마산의 아귀찜은 마른 아귀가 주재료이다(Kim 2008).”라고 하였다. “생아귀를 쪄서 양념장에 찍어 먹는” 물꽁찜은 ‘아귀로 만든 찜’은 맞으나 마산의 건아귀찜과는 다른 조리법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부산식 아귀찜은 마산식보다 덜 맵게하여 여러 가 지 해물을 넣는 것이 특징”인데, 부산광역시 중구 아귀찜 전 문 음식점인 ‘물꽁식당’은 1965년 홍계순씨가 창업했으며 생 아귀를 이용한 부산식 찜의 원조(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http://busan.grandculture.net/Introduce/Index?local= busan)라고 알려져 있다.
「Traditional Local foods of Korea」에서는 마산과 부산 의 아귀찜을 구별해놓았는데 재료와 양념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마산 아귀찜(건아구찜)
재료: 말린아귀, 콩나물, 미나리, 대파
양념: 된장, 고춧가루, 들깨가루, 찹쌀가루, 다진마늘, 소금
부산아귀찜(생아귀찜, 해물생아귀찜)
재료: 생아귀, 아귀내장, 아귀간, 미더덕, 콩나물, 새우살, 홍합, 미나리, 대파
양념: 고춧가루, 감자전분, 육수, 다진마늘, 간장, 들깨가루, 설 탕, 후추가루, 참기름, 깨소금, 소금, 식용유(Culture and Public Information 2008)
3) 군산 아귀찜
「Gyeonghyangsinmun (경향신문)」1978년 1월 20일자 기 사에서는 한국의 향토별미로 “전주 비빔밥, 충남 담북장, 군 산 아구어찜, 제주 꿩찜, 설악산 감자떡, 함경도 가자미 식해” 를 꼽고 있다. 그만큼 과거에는 군산의 아구찜도 유명했는데 여기에는 “군산의 아귀찜과 동의어로 불리는 경산옥 주방장 김양식(「JoongAng Ilbo (중앙일보)」 1981.3.18.)”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작가이자 맛컬럼니스트인 홍성유(洪性裕)는 1978년 ‘월간문학’에 ‘맛과 멋을 찾아서’라는 음식 칼럼 “연 재를 시작하면서 아구와 복을 찾아 군산을 찾곤 했다”고 했 는데, “아구찜과 복찜에 관한 한, 군산을 따를 곳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거의 ‘경산옥’의 그것을 먹어보고 하는 말 (Hong 1992)”이라고 하였다.
또한 심지어 전라북도는 김양식의 인간무형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한 「Gyeonghyangsinmun (경향 신문)」1977년 11월 28일 기사는 다음과 같다.
전북도는 최근 군산시 신창동 39 음식점인 경산옥 주인 김양 식씨(39)를 인간무형문화재로 지정해 줄 것을 정부에 건의, 화 제가 되고 있다.... 김씨가 전문으로 하는 요리는 아귀찜과 복 찜 등 생선을 재료로 하는 음식, 특히 김씨가 만드는 아귀찜 요리는 전국의 식도락가를 매료시킬 정도의 일품이라는 것이 다..... 아귀어를 골라 배를 째어 내장을 모두 꺼내고 깨끗이 씻 어 길이 5 cm 정도로 먹기 적당하게 자른다. 그 다음 된장과 고춧가루를 푼 멸치국물에 넣어 20분간 삶은 다음 건져내 그 위에 삶은 파와 미나리, 조미료, 마늘, 참기름 등 갖은 양념을 섞어 만든다는 것이 김씨가 밝힌 아귀찜 요리법이다.
김양식 사장의 큰처남인 현(現) ‘원조 경산옥’ 이현효 사장 (72)에 의하면, 김양식 사장은 16세 때부터 일식집 주방에서 일을 했으며, 1973년에 독립해서 아귀찜과 복찜을 주 메뉴 로 하는 ‘경산옥’을 창업했다. 이현효 사장은 매형인 김 사 장을 도우면서 군산식 아귀찜 개발에도 참여했다고 하였다.
이 사장은 “그때 마산 아구찜이 유명하다고 들었고 먹어 보기도 했는데, 많이 매워서 그보다는 전라도 사람들은 된장 을 좋아해서 된장을 넣어 개발하면 어떨까 했지요. 식구들끼 리 먹어보고 의논해서 아구찜 맛을 조정했어요”고 하였다. 또한 “마른 아귀를 콩나물, 미나리와 함께 볶아내는 ‘마산식 아귀찜’과 달리, ‘군산식 아귀찜’은 생물 아귀를 쓴다. 다시 멸치 국물에 된장을 넣고, 간도 자극적이지 않고 양념도 그 리 진하지 않다. 콩나물 없이 전주의 미나리를 듬뿍 넣는데 계절이 아니면 대신 부추랑 양파를 쓴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사장은 “1980년대에는 근처에 풍원식당, 김천옥, 화신옥 등 아구찜 집들이 여럿 있었고, 그 중 가까운 사장님 네다섯 분은 정기적으로 모여서 어떻게 만드는 것이 더 맛 있는지 레시피를 공유하고 의논하던 공생관계였다”고 하였 다. 이 당시 군산 아귀찜의 인기는「JoongAng Ilbo (중앙일 보)」 1981년 3월 18일 자에 “군산 영화동엔 순전히 아귀찜 만 하는 전문집이 20여 곳이나 성업 중”이라는 기사를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또한「JoongAng Ilbo (중앙일보)」 1995년 2월 22일 기사 에 의하면, 군산시가 “경산식당(주인 김양식)의 아귀찜” 등 을 “97년 1월 전주와 무주에서 열리는 겨울 유니버시아드 대 회에서 세계인에 선보일 향토음식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1 억원의 식품진흥기금을 지원”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각광 받던 군산 아귀찜은 갑자기 2000년을 전후해 서 음식점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 원인을 이 사장은 “신 시가지 개발로 인한 구도심의 쇠락”과 더불어 “김양식 사장 개인적인 사정도 겹쳐서 경산옥이 경매에 넘어가게 됐기 때 문”이라고 하였다. 경산옥 자리는 근처에서 음식점을 하던 이웃이 1997년 인수를 해서 현재 ‘(구)경산옥 생뚝’으로 간 판을 걸고 운영을 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해, 이 현효 사장 은 군산시청 후문 쪽 경장동으로 이전해서 ‘원조 경산옥’이 라는 상호로 경산옥의 명맥을 잇고 있다. 이 사장은 “우리는 미나리만 올리는데 마산아구찜에 익숙한 손님들이 주문을 하 면 별도로 콩나물과 미더덕을 따로 내기도 한다. 마산아구찜 과 별도로 군산아구찜도 또 다른 맛으로 손님들 앞에 계속 선보였으면 한다.”고 소망을 밝히기도 했다.
4. 아귀찜의 전국화
1) 아귀찜의 확산
「Kyongnamdomin Ilbo (경남도민일보)」 2015년 2월 13 일자 기사에 의하면, 이미 1972년 서울 낙원동에는 마산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옛날집 낙원아구찜-처음집’이 있었다. 주인 전낙봉씨는 처음에는 아귀탕만 하다가 아는 사람이 찜도 해보라고 해서 시작했는데 우연히도 이 집 식당에 일 나오는 아줌마가 마산 사람이어서 맛에 그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1981년 4월 27일「Gyeonghyangsinmun (경향신문)」 기사를 보면 이미 당시 서울 명동 한복판 음식백화점에 아 귀찜이 등장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서울에 ‘음식백화점’이라 는 것이 생겼는데, “명동에 3층 규모의 대형 음식전문백화점 이 등장한 후 지난 3월 14개소, 4월 한 달 사이에 40여개소 로 늘어났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백화점은 대개 40~50가지의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중략) 한쪽에는 냉면, 곱창, 설렁탕, 불고기 등 한식전문코너가 마련되어 있고 다 른 한쪽에는 아구찜과 매운탕 코너를 마련, 남성들의 술맛을 돋운다.”고 하였다.
지역 음식으로서의 아귀찜은 마산뿐 아니라 부산, 군산, 인 천 등지에 있었지만, 전국적으로 퍼진 것은 ‘마산아귀찜’이 우세했다. 1981년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 여의도에 서 ‘국풍 81’이 열렸다. 이 행사에서 각 도의 향토음식을 알 리는 ‘팔도 味樂亭(미락정)’이 차려졌는데, 마산 ‘오동동아구 할매’ 대표이자 ‘아구데이’ 위원회 공동위원장인 김삼연 회 장(72)은 여기에 ‘마산아구찜’이 참여했다고 회고했다.
주영하 교수는 마산아귀찜 전국확산의 계기로 1982년 마 산에서 열린 ‘전국체전’을 주목했다(「Kyongnamdomin Ilbo (경남도민일보)」2015.2.13.). 전국체전 당시인 1982년 10월 16일자「Gyeonghyangsinmun (경향신문)」에서는 “마산에 아 구가 동났다. (중략) 제63회 전국체전에 참가한 1만 7000여 명의 임원과 선수들은 물론 수많은 관광객들까지 즐겨 아구 찜 전문음식점을 찾는다. 마산시 오동동 번화가에 자리잡은 ‘할매집’ 등 30여 군데 아구찜집엔 매일 300~500여 명의 손 님이 몰려 붐비는 바람에 일부 식당에서는 몰려드는 손님을 수용키 위해 아예 종합운동장 근처에 분점까지 내고 있을 정 도다.”라고 했다.
1982년 체전 당시 36세 나이로 위의 기사에 인터뷰를 했 던 김삼연 회장은 그때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체전 개막을 하니 사람들이 줄로 서데요. 신문기자들도 찾아오 더라구. 도대체 아구찜이 어떤 음식이냐고..... 그 후에 새마을 야시장, 86 아시안 게임, 88 올림픽 때도 내가 아구찜 홍보하 러 나갔지요. 처음엔 서울사람들이 아구를 보고 동태냐고 하더 라구. 시뻘거니까 사람들이 안오는기라. 그리고 처음엔 맵다, 별로다, 그랬어요. 관심이 없었어요. 그래서 영업은 별로였어. 그래도 나는 테레비 인터뷰는 했어요. 사람들이 아구찜을 너무 모르니까.... 한해 두해 계속 나가니까 조금씩 알려지면서 반응 이 점점 나아졌어요.
이러한 전국적인 행사와 방송을 통한 마산 아귀찜 홍보는 인지도를 높이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생각된다.
그 후 1985년 9월 26일자「Dong-A Ilbo (동아일보)」에는 “구마산 중심가인 오동동 골목에는 아귀찜 전문집이 처마를 맞대고 20여개나 몰려있다.”라고 하였고 이때를 기점으로 ‘마 산 아구 거리’가 본격적으로 형성됐다고 알려져 있다.
1983년 11월 16일「Gyeonghyangsinmun (경향신문)」기 사에는 “서울로 쳐들어 온” 향토음식의 목록에 마산의 아구 찜이 포함되어 있다. “해운대나 수원 갈비는 일찌감치 서울 에 터를 잡았고 전주 해장국이나 마산의 미더덕찜과 아구찜, 그리고 충무 김밥과 자갈치 시장의 횟밥이 뒤이어 서울로 쳐 들어 온 것이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 사이에 ‘낙원동 아 귀찜 거리’와 강남구 신사동 사거리에서 잠원동으로 가는 골 목, 방배동 등지에도 아귀찜 골목이 형성 되었다. 이러한 분 위기를 전하는 1997년 4월 12일자「Dong-A Ilbo (동아일보)」 기사는 다음과 같다.
서울 잠원동의 먹자골목이 마산아귀찜 골목으로 변모했다.(중 략) 10년 전부터 마산아귀찜집이 들어서기 시작해 지금은 10 여집이 성업 중이다.(중략) 모두 간판에 원조와 마산이라는 말 을 붙이고 있으나 실제로 정통 마산식 아귀찜을 내놓는 것은 아니다. 정통 마산식 아귀찜은 구덕구덕하게 말린 아귀로 찜을 하는데 양념을 많이 해 상당히 맵다. 마산아귀찜 골목이 형성 되기 전 초창기에 정통 마산식 아귀찜집들이 있었으나 서울사 람의 입맛과는 달라 모두 문을 닫았다. 현재 성업 중인 마산아 귀찜집들은 서울사람의 입맛에 맞춰 말리지 않은 생아귀를 쓰 며 아린듯한 매운 맛이 없고 색이 고운 무주진안 장수산 고추 를 빻은 고춧가루를 양념으로 넣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간판은 모두 ‘마산아귀찜’으로 달고 있으면 서 음식은 마산식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초창기 정통 마산식 음식의 실패를 교훈 삼아 생아귀를 쓰며 서울식 입맛에 맞 게 변형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서울에서는 마산식의 건 아귀를 구하기 힘들다는 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 신사동 아귀찜 골목에 위치한 ‘마산아구찜’의 2대 사 장 황혜숙 씨(54)에 의하면, 1대 창업주 손덕희 씨가 1977년 창업해서 41년째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데 시숙인 손 사장의 고향이 마산이다. 손 사장은 고향 음식인 아귀찜이 서울에서 도 인기가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 창업을 했고, 처음부터 생 아귀를 사용했다고 하였다.
이 기사를 보면 이미 당시에 조리법과 상관없이 ‘아귀찜= 마산’이라는 브랜드 이미지가 만들어졌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여기에 도전장을 내민 것은 군산이었다. 1997년 12 월 8일자「Gyeonghyangsinmun (경향신문)」에는 ‘군산아구 탕아구찜 분점 모집’ 광고가 실렸다. 광고에 따르면 “군산 아 구는 20여 년 전 최초로 서울 마장동에 개업하여 현재 익산, 전주, 군산, 그리고 서울 대치동, 안암동, 일원동 등 전국에 10여개 점포가 개설”되어있다고 하였으니 1970년대 말경 군 산아귀찜도 서울에 상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1998년 7월 8일자「Jeonbukdominilbo (전북도 민일보)」에 따르면, “군산지역의 대표적 토속음식인 아귀찜 을 지역 특화상품으로 개발”하기로 하고 “상표권과 포장디 자인 특허 등록을 출원”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움직임이 마산에 알려지자 오히려 자극이 되 어, 마산시에서 먼저 2001년 6월 22일 ‘마산아구찜’ 캐릭터 에 대해 상표등록(등록번호 0496138)을 하게 되었다. 당시 마산시 환경위생과장으로 그 상표등록 업무를 했던 이삼용 씨(70)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그때 군산서 아구찜 상표등록을 할라고 하더라구. 아구찜의 원 조는 마산인데.... 그래서 우리가 군산도 쫓아가고 그랬어요. 지 방자치 단체끼리 경쟁인데.... 군산보다는 빨리 우리가 해야 안 되겠나.... 우리걸 지켜야겠다 싶어 서둘러 받았지. 2000년 3월 상표등록 출원, 1년 3개월만에 받았어요. 아구찜 등록은 전국 최초로 우리가 먼저 했지요. 마산아구찜 캐릭터 디자인을 경남 대학교 교수가 개발해줬는데, ‘마산아구찜’이란 상호는 누구나 쓸 수 있지만 이 캐릭터는 함부로 못쓰지요.
‘아귀찜’이 유명해지면서 국어사전에도 표제어로 실리게 되 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바로는 1991년 판「Korean language dictionary」에 ‘아귀찜’이 처음 나타나는데 ‘아귀 매운탕’도 함께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있다.
아귀찜: 아귀를 주재료로 하여 갖은 양념을 다하여 된장을 풀 어서 찐요리
아귀 매운탕: 아귀를 도막쳐서 콩나물과 미나리 등을 넣고 끓 인 고추장 찌개(Lee et al. 1991)
사전의 설명만 보면 아귀 매운탕이 현재의 아귀찜과 더 흡 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같은 해 조리서인 「Traditional Korean Food」(Hwang 1991)과 1992년「Korean Food」 (Yeom 1992)에는 경상도 음식 ‘아구찜’이 수록되어 있는 것 으로 보아 ‘아귀 매운탕’이 아닌 ‘아귀찜’이라는 명칭이 정착 된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아귀찜이 확산된 증거는 대중가요나 시의 소재 로 등장하는 것을 보고도 알 수 있다. 1993년에는 “마산 아 구찜”이라는 제목의 대중가요가 등장한다. 1993년 무학음반 에서 발매한 “김미진 신풀이 3집”에는 전주비빔밥, 마산아구 찜, 충무할매김밥 등 음식이름의 노래가 실려 있다. “마산하 면 아구찜이 아니요”라는 후렴구 가사를 통해 1990년대 초 반에는 아귀찜이 마산의 명물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 에도 2004년 최승호 시인의 시 “아구찜”, 2009년 김산의 “아 구찜이 좋아”라는 대중가요 등에서도 아귀찜이 등장한다.
「Dongailbo (동아일보)」1999년 1월 25일자에 실린 “동 아희평”에는 하루 전날인 24일 경남 마산역 광장에서 한나 라당이 당시 김대중 정부 규탄집회를 연 것과 관련해서 김 대중, 이회창 두 정치인의 캐리컬처를 통해 마산아귀찜의 매 운맛을 민심에 빗대어 그린 시사만평이 실리기도 했다.
「Kyongnamdomin Ilbo (경남도민일보)」 2015년 2월 13 일자 “간판에 ‘마산아구찜’ 달고 있는 곳”이라는 제목의 기 사에 의하면, 전국에 ‘마산아구찜’ 이라는 상호를 쓰고 있는 음식점은 515개에 달한다. 원조 마산에 21개 업소가 있는 것 을 비롯해서 경남에 57개, 부산에는 70개 업소가 있다. 그 외에 서울 135개, 인천 10개, 경기 123개, 강원 10개, 충북 16개, 충남 18개, 세종 1개, 대전 3개, 전북 4개, 광주 4개, 전남 3개, 경북 17개, 대구 22개, 울산 19개, 제주 3개 업소 등이다. 이를 통해 마산아귀찜의 전국화를 확인할 수 있다.
2) 아귀찜 전국화와 아귀 소비량의 변화
1960년대 아귀는 수출까지 하는 어업자원이었다. 1965년 판「Annual Report for Fishery Products Inspection (水産 物檢査)事業報告書)」에는 “유용자원(有用資源)의 개발에 주 력한 결과 지금까지 수출용으로 이용되지 않고 있던 어종을 가공하여 신제품을 생산 수출하였다(Central Fishery Products Inspection Station 1966)”고 하고 예를 든 품목 중 하나가 “아 귀냉동품”이었다.「Fisheries statistics (水産年鑑)』을 통해서는 아귀를 1967년에는 2,142마리(41,500 kg), 액수로 6,227,661원, 1968년에는 1,493마리(22,290 kg), 액수 3,782,789원 어치를 수출했음을 알 수 있다(Hanguksusangisulhyeopoe 1968-1969).
이렇게 수출이 되던 아귀는 아귀찜의 유행과 더불어 국내 아귀 소비가 급증하게 되자 1989년에는 불법 수입까지 이루 어졌다. 1989년 10월 7일「Maeilgyeongje (매일경제)」 기 사를 보면, 불법으로 수입된 수산물이 8백 39.5톤에 달하는 데 그 중 냉동 아귀가 42톤에 이르렀다.
<Table 4>는 1988년부터 2016년까지 국내 아귀 생산량과 수출, 수입량의 변화를 정리한 것이다. 정확한 국내소비량에 대한 자료는 찾을 수 없어서 국내 추정소비량을 생산량 -수 출 +수입으로 계산하였다.
<Table 4>를 통해 수출량을 보면, 1988년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는 점차 줄어드는데 비해, 아귀 수입량은 1993년에 아귀가 수입자유화가 된 수산물 20품종에 포함(「Maeilgyeongje (매일경제)」1993.1.4) 되면서 1,065t이 수입됐다. 그 후 4년 만에 10배 이상 폭발적으로 수입량이 늘어났다. 1990년대 중 반 이 시기는 아귀찜이 서울로 상경해서 아귀찜 거리를 형 성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국내 아귀 소비량의 증가는 안정적 이지 않은 생산량에 의존하기 보다는 수입의 증가로 이어졌 음을 알 수 있다. 이후로도 2007년경까지 아귀의 수입은 지 속적으로 늘어났다. 국내 추정 소비량은 2008년 최고조를 이 루고 이후 약간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마산에서 ‘나야 아구’라는 아구요리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 는 이태의 사장(48)은 시어머니 김옥순 여사(78)가 40년 전 작은 좌판부터 시작해 일궈 온 아귀 유통을 이어받아 마산 어시장에서 ‘마산생물아구’를 운영하고 있다. 오동동 아귀거 리에 들어가는 물량을 많이 해온 이 사장이 이야기하는 우 리나라 아귀 소비 현황은 다음과 같다.
아귀는 우리나라 삼면 바다에서 다 잡히는데, 남해에서 잡히는 것이 가장 맛이 좋고, 동해는 쫄깃하고, 서해는 부들부들하고 ..... 삼면 맛이 다 달라요. 국내에서 잡히는 아귀는 생물 아귀 와 국산 냉동으로 나뉘는데, 생물 아귀와 더불어 아귀에서 귀 한 부위인 간은 일정량 일본으로 수출됩니다. 반대로 국내에 수입되는 냉동 아귀는 주로 중국과 미국에서 많이 들어오는데, 중국산인 경우 애는 빼고 위만 달린 채 납작하게 진공 상태로 수입되요. 아귀 산지가 아닌 서울 등지에서 먹는 아귀찜에 내 장이 없는 이유가 주로 이런 수입산을 쓰기 때문이지요....(중 략) 마산에는 아귀 전용 덕장이 있어서 건조를 할 수 있는데 여름에는 아귀가 썩기 때문에 한겨울에만 건조해요. 옛날에는 바짝 말려 아귀를 하루 불려서 썼는데 과거에는 완전 건조였 다면 현재는 반건조를 더 선호하고, 젊은 사람들은 생물을 좋 아하지요.Figure 2
냉장시설이 빈약하던 시절에 건조한 아귀로 시작된 마산 아귀찜은 전국화 과정에서 건아귀 수급의 어려움, 생아귀를 선호하는 입맛의 변화 등의 이유로 변화되어 현재는 마산에 서도 생아귀를 많이 이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심층 인터뷰에 응한 김삼연 회장, 이삼용 선생, 이태의 사장 등 마 산 시민들은 한결같이 마산아귀찜의 정체성은 건아귀이며 생 아귀와 더불어 이 전통을 지켜나가야 하고 또한 적극적인 메 뉴개발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아귀를 이 용한 다양한 메뉴를 선보이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일본인 들은 아귀는 버릴 것이 없는 생선으로 생각하며 여러 부위 를 다양한 요리방식으로 즐긴다. 이에 비해, 중국에서는 아 귀가 전통적으로 즐기던 생선은 아니었다(Yun 2017). 그러 나 아귀가 건강식품으로 인식되면서 중국에서도 아귀를 이 용한 훠궈(安康魚火鍋), 마유아귀탕(麻油鮟鱇魚湯), 아귀그릴 구이(香煎鮟鱇魚) 등의 다양한 아귀요리가 인기를 누리고 있 다(https://www.tasteofregent.com). 또한 과거 서양에서는 아 귀를 ‘가난한 사람이 먹는 바닷가재(poor man’s lobster)’라 불렀으며 부자들은 먹지 않는 생선이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을 계기로 신선한 생선이 부족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먹기 시 작(Yun 2017)했다. 현재는 인기 있는 고급생선으로 인식되 고 있으며 아귀 소금구이는 물론이고 차우더(chowder), 소테 (saute), 부야베스(bouillabaisse) 등 각종 음식에도 사용되고 있다(https://www.cooks.com/rec/sch/0,1-0,monk_fish,FF.html). Figure 3
방한 관광객들의 한식 선호도를 조사한 논문에 의하면 (Youn et al. 2010), 중국 관광객들의 경우 매운 한식을 선호 하는 것으로 나타나서 아귀찜이 중국인들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는 메뉴라고 보인다. 실제로 인터뷰 대상이었던 서울 신사동의 ‘마산아귀찜’을 방문했을 때 대부분의 손님이 중국 인 단체 관광객들이었고, 아귀찜 골목의 여러 음식점에서도 줄을 서서 먹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한편 일본인들의 경우는 매운맛을 다소 불편하게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일본인 들과 매운맛에 익숙지 않은 서양인들을 위해서는 맛에 변화 를 주고 조림이나 튀김 등 다양한 메뉴개발이 필요할 것이 다. 고단백 저지방 심해어인 아귀는 단백질, 인, 철분의 좋은 급원 식품이며, 비타민 B1, B2, 비타민 C, 비타민 A 등 각 종 비타민이 풍부한 것으로 조사(Kim 2002)되어 앞으로도 건강 식재료로 각광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Figure 4
IV. 요약 및 결론
본 연구는 아귀찜의 등장과 전국화 과정을 추적하기 위해 서 ‘탕’에서 ‘찜’으로의 아귀 조리법의 변화를 살펴보고, 지 역별 아귀 음식의 특징과 전국화 되는 과정에 대해서 알아 보았다. 또한 아귀 조리법의 변화와 시대에 따른 아귀 소비 량의 관계를 포괄적으로 살펴보았다.Figure 5
19세기 초 문헌을 통해 전라도, 경상도 지역에 모두 아귀 가 있었으며, 특히 경남 김해에서 식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아귀는 주로 우리나라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에 의해 소비된 것으로 보이나, 조선인들도 전국에 걸쳐 아귀를 잡았다는 것이 확인되며 자연스럽게 식용으로 이어졌으리라 생각된다. 해방 후 경남, 전남, 인천 등지에서는 가정과 식당 에서 아귀를 주로 ‘탕’으로 먹었고, 각기 자기 지방의 향토 음식으로 인식했다.Figure 6
1960년대 마산에서는 건아귀를 이용한 아귀찜이 탄생했다. 마산아귀찜 유래에 대해서는 어느 특정인이 개발했다는 주 장부터 먹을 것이 부족했던 피난민들이 만들어 먹기 시작했 다는 주장, 그리고 기존에 있었던 북어찜, 복찜이나 지지미 같은 음식에 아귀를 적용해서 만들어졌다는 주장 등이 있다. 마산에서 건아귀에 ‘찜’이라는 조리법이 적용되고 마산시민 들에 의해 소비, 발전되면서 외식 상품화가 되었다. 이를 통 해 그때까지 귀하게 여겨지지 않던 아귀라는 식재료가 재발 견되었고 그 가치가 극대화 될 수 있었다. 또한 마산아귀찜 은 지역 음식에 머물지 않고 1982년 전국체전 등 국가적 행 사시 적극적인 홍보를 했으며, 이런 노력을 통해 타 지역에 도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전국화의 발판을 마련했다. 1970년 대 말부터 서울 낙원동, 신사동 등지에 아귀찜 음식점이 생 기다가 1990년대에는 아귀찜 거리가 형성되었다. 1990년대 중반에는 대중가요나 문학작품의 소재로도 아귀찜이 등장했다.
원조인 마산아귀찜이 건아귀에 콩나물을 넣어 만든다면, 군산지역에서는 생아귀를 쓰고 미나리를 듬뿍 넣은 군산식 아귀찜이 한동안 유명세를 탔다. 아귀찜 상표등록을 둘러싸 고 마산과 군산은 신경전을 벌였지만, 2001년 마산이 상표 등록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서울에 상경한 아귀찜은 마산을 앞세운 간판을 내걸었지만, 마산아귀찜의 가장 큰 특 징인 건아귀 대신 생아귀를 쓰며 서울사람들 입맛에 맞게 변 형되었다. ‘아귀찜’이라는 음식명 자체는 건아귀를 이용했을 때 적합한 이름이고 생아귀로는 ‘아귀 볶음’이 더 가까울 수 있지만, 이미 굳어진 아귀찜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며 향토색을 느낄 수 있는 마산이라는 지명이 합쳐져서 ‘마산아 귀찜’은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
1960년대 아귀는 주로 수출하는 어업자원이었다. 그런데 아귀찜 개발과 아귀거리 형성과 맞물려 국내 소비가 급증하 게 되자 1990년대부터 수입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이처럼 “흉 한 생김새 때문에 버려졌던 생선”이라고까지 일컬어졌던 아 귀는 조리법의 변화에 따라 소비량이 극적으로 달라진 식재 료이며, 아귀찜은 지역 음식을 넘어서서 비교적 짧은 시기에 전국화에 성공한 대표적 음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