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서 론
조선시대의 한자나 한문으로 남겨진 음식조리서는 「Ganbon Gyuhabchongseo (간본규합총서)」(Bingheogak Lee 1869)를 제외하고 모두 필사본이다. 양반가에서 봉제사 접빈객을 위 한 유교적 실천을 목적으로 저술한 사대부나 식치(食治)의 이념 실현을 위한 어의(御醫)는 한문필사본을 남겼고, 조리 의 주체였던 여성은 주로 한글필사본을 남겼다(Cha 2013). 한글음식조리서는 약 45종이 전해진다. 이중 대부분은 저자 나 저술연도가 불분명하고, 저자와 출처가 분명한 책은 「Eumsikdimibang (음식디미방)」(Andomg Jang 1670), 「Gyuhabchongseo (閨閤叢書)」(Jung YW ed. 1987), 「Onjubeob (蘊酒法)」(Anonymous the late 1800s), 「Jusiksiui (酒食是儀)」(Anonymous the late 1800s), 「Ueumjebang (禹飮諸方)」(Anonymous the late 1800s), 「Jusikbangmun (주식방문)」(Anonymous the late 1800s), 「Eumsigbangmun (음식방문)」(Anonymous the late 1800s) 등 7종 정도이다.
‘Jusikbangmun (주식방문)’이라는 제목의 한글음식조리서 는 현재 두 권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안동김씨 유와공 종 가의 개인 소장본이고, 나머지 하나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본이다. 유와공 종가 소장본은 출처만 명확하고, 국립중앙도 서관 소장본은 편찬 연대만 정확히 기록되어 있는 상태이다.
유와공 종가의 「Jusikbangmun (주식방문)」은 19세기 후 반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저자 미상의 한글필사본의 음 식조리서이다. 하지만 표지에 ‘안동김씨 노가재공댁’, ‘유와 공 종가 유품’이라는 묵서(墨書)가 있어 출처와 소장자가 분 명한 책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은 역시 한글필사본으로, 저자는 미상이나 표지 오른쪽에 ‘정미년 이월달에 베김’이라 기록되어 있다. 책을 베껴 쓴 때가 정미년(丁未年)이면 헌종 (憲宗) 13년 1847년과 고종(高宗) 44년인 1907년인데, 글씨 체가 노가재공댁의 「Jusikbangmun (주식방문)」에 비해 비 교적 현대어에 가깝고, 일정한 것으로 보아 1907년에 다른 책을 보고 다시 베낀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보고 쓴 책이 노가재공댁의「Jusikbangmun (주식방문)」인지는 단정할 수 가 없다. 기록된 양은 노가재공댁의「Jusikbangmun (주식방 문)」이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의 두 배 분량이다. 국립중앙 도서관 소장본은 전체 내용의 85.42%가 노가재공댁의 「Jusikbangmun (주식방문)」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두 책은 제목뿐만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 으므로 비교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본고는 노가재공댁「Jusikbangmun (주식방문)」과 국립중 앙도서관 소장본을 서로 비교하여 두 책이 가지는 서지학적 인 특징과 소장 가문의 내력에 따른 내용적 특성, 기록된 내 용을 조리학적으로 분석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필자는 한국 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된 필름 자료를 통해 두 책을 접하게 되 었으며, 먼저 한글고어를 연구하는 국어학자들과 고문헌을 연 구하는 조리학자들과 함께 원문의 현대어 번역과 언어적 고 찰을 하였다(Back 2014). 그리고 현대어를 바탕으로 기록된 음식의 조리학적 분석을 하였다. 본문 중 내용이 일부 유실된 부분은 당대의 다른 음식조리서들과 비교하여 고찰하였다.
II.연구 내용 및 방법
1.연구 대상 문헌
노가재공댁 「Jusikbangmun (주식방문)」은 현재 대전 양 근(陽根) 안동 김씨 유와공 종택에 소장되어 있다. 본 연구 는 2003년에 국학진흥연구사업으로 진행된 고문서 조사과정 중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전신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촬 영된 마이크로필름과 그 내용을 책으로 엮은 Kim & Jung (2003)의「Ancient Writings Timber (고문서집성)」 64권 수 록 내용을 토대로 진행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 에 소장된 「Jusikbangmun (주식방문)」도 촬영된 마이크로필름을 이용 하였다. 내용의 분석을 위해 현재 전해지는 조선시대 고조리 서와 선행연구논문(Cha 2003; Cha 2012; Cha 2013; Cha & Yu 2014) 중 동일 항목의 재료 및 조리법을 비교 고찰하 였다.
2.연구방법 및 세부주제 분류
본 연구 문헌에 기록된 자료는 내용분석(content analysis) 기법을 이용하였다(Yu & Kim ed. 1995). 내용분석을 위해 연구목적에 부합되도록 유목을 분류하였다. 유목은 조리서의 형태 및 구성, 기록된 조리법, 음식명과 내용에 따른 주.부식 분류, 사용된 식재료, 조리기술, 계량단위 및 조리도구 등을 분석단위로 하였다.
III.결과 및 고찰
1.「Jusikbangmun (주식방문)」의 서지정보
먼저 노가재공댁의「Jusikbangmun (주식방문)」은 19세기 후반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자 미상의 한글필사본 음 식조리서이다. 겉장인 표지에 백지 한지가 덧씌워져 있고, 책 을 묶은 실끈은 보이지 않는다. 책의 크기는 가로 17.4 cm, 세로 32.5 cm이고, 앞뒤 표지를 포함하여 총 27장이다. 표지 에는 다른 종이에 ‘쥬식방문’이라고 써서 왼쪽에 제첨(題簽) 되어 있다. 표지의 오른쪽에는 세 줄에 걸쳐 ‘안동김씨 노가 재공댁’, ‘유와공 종가 유품’, ‘(猶窩公 宗家 遺品)’이라 기록 되어 있다. 표지의 내용은 글씨체가 같은 것으로 보아 한사 람이 쓴 것으로 보인다.
권두 서명은 ‘쥬식방문’, 권말 서명은 ‘쥬식방문 국농보장’ 이다. 국농보장의 의미에 대해선 알 길이 없다. 책의 본문 상 단에는 작은 찌지가 전 장에 걸쳐 59개 붙어 있는데 음식명 이 시작되는 부분이지만, 모든 음식명에 모두 붙어 있는 것 은 아니었다. 본문의 첫 장과 24~25장 하단에는 손상된 부 분이 있고, 내용 일부가 유실되어 있다. 본문은 무계(無界)이 나, 11번째 장인 21~22쪽에 세로와 가로 줄 선이 희미하게 보인다. 1쪽당 11~12행의 글이 있으며, 1행에 21~24자가 기 록되어 있다.
내용은 한지에 한글 행서체로 기록되어 있는데, 다소 흘려 쓴 글씨이다. 본문의 마지막 3장은 글씨가 두꺼운 것으로 보 아 필기구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글자체가 같아 한사람이 계속 쓴 것으로 추정된다. 책에는 저술연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 하지만, 기록된 내용 중 음식물이나 계량 도구, 조리동사와 조리부사의 어휘적 특성상 구개음화 전과 원순모음화 전인 1800년대 말로 추정된다. 보다 정확한 저 술연대에 대해선 국어학적인 연구가 더 필요하고 생각된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은 역시 한글필사본으로, 저자는 미 상이나 편찬연대는 분명하다. 표지를 제외하고, 30쪽에 걸쳐 술과 음식을 만드는 법이 기록되어 있다. 크기는 가로 20.8 cm이고 세로가 24.7 cm이다. 본문은 무계이고, 1쪽 당 10행의 글이 있으며, 1행에 17~22자가 기록되어 있다. 표지 오른쪽에 실끈으로 다섯 군데를 묶어 제본한 것이 뚜렷하게 보이고, 오침표지 오른쪽에서 부터 ‘정미년 이월달에 베김’, ‘정미 이월 일 등츌 젼급’, ‘소뎡 니 일치 말고 두고 보라’ 라고 세 줄에 걸쳐 기록이 되어 있다. 등츌은 무엇인가를 베 껴 썼다는 말로 등초(謄抄)와 같은 뜻이다. 전급(傳及)은 ‘전 하여 미치게 한다.’의 의미이다. 저자는 내용을 베껴 쓰고, 소 중하니 잃어버리지 말고 두고 보라는 당부를 표지에 적었던 것이다. 표지의 왼쪽에는 ‘쥬식방문’이라고 서명이 있다. 본 문에는 음식을 설명할 때 ‘○’표를 붙였고, 22개의 음식엔 ‘연약과법 軟藥果法’처럼 한글 아래 한자를 부기하였다. 또 감사과의 조리법에서 ‘...쪄내되 蒸出...’와 같이 본문 중 한글 설명이 부족하다 생각된 부분에는 가는 붓으로 작게 한자를 부기하였다. 내용을 베껴 쓸 때 틀린 글자는 크게 동그라미 를 하고, 바로 옆이나 아래에 다시 명기하였다. 권두서명은 ‘쥬식방문’이다. 두 책 모두 처음을 과동외지히법, 지금 쓰는 외김치법, 생치김치법, 청장법 순으로 시작하고 있었다.<Figure 1>
2.「Jusikbangmun (주식방문)」의 특징과 가치
노가재공댁「Jusikbangmun (주식방문)」의 본문 내용은 25장, 즉 50쪽에 걸쳐 조리법만 기록되어 있다. 총 104종의 음식이 118회 기록되어 있었다. 주식류가 11종, 찬물류가 54 종, 떡류가 7종, 과정류가 20종, 양념류가 5종, 술 6종과 술 을 빚는데 필요한 서김 1종이었다. 이중 증편이 4회, 고추장 이 3회, 즙지히, 두텁떡, 동아정과, 연동아정과, 연약과, 강정, 중박계, 연사과, 요화, 열구자탕, 송이찜 등 11종은 2회씩 중 복 기록되어 있었다. 송이찜은 연달아 같은 내용이 반복 기 재되어 있었고, 다른 음식은 간격을 두고 기록되어 있었다. 본문의 내용은 침채류→양념류→찬물류→과정류→찬물류→ 과정류→주식류→찬물류 등으로 기술 순서가 일관되지 않아 필자가 틈틈이 생각나는 대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 앙도서관본은 총 50종의 음식이 51회 기록되어 있었다. 주 식류가 6종, 찬물류가 23종, 떡류가 2종, 과정류가 11종, 양 념류가 2종, 술 6종이었다. 이 중 증편은 2회 기록되어 있었 고, 계탕(鷄湯)은 2회였으나, 다른 내용이었다. 청명주, 삼해 주, 백화춘, 칠일주, 연일주, 송순주의 술 6종과 엿 고는 법 을 제외한 42종의 음식이 노가재공댁본과 동일하였다. 두 책 모두 음청류(飮淸類)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Table 1>
찬물류의 조리법으로 노가재공댁본은 찜류가 비교적 많았 고, 국립중앙도서관본은 탕류와 찜류가 많았다. 식품으로 닭 고기를 주재료로 한 음식이 10가지로 가장 많았고, 부재료로 도 애용되었다. 노가재공댁본 중 글자가 유실된 ‘□□계법’ 은 국립중앙도서관본의 ‘계탕’과 같은 음식이었는데, 붕어전 과 함께 술안주에 좋다고 한 것으로 보아 접빈객을 위한 음 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 동물성식품으로는 돼지고기와 꿩고기가, 식물성 식품으로는 외, 가지, 동아와 배추가 많이 쓰였다. 외를 이용한 침채류는 9종이나 되어 당시 저장용 절 임음식의 가장 중요한 재료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노가재공댁본의 표지에 기록된 노가재(老稼齋)는 조선 후 기 문인이자 화가였던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의 호이다. 김창업은 조선 후기 유학자이며, 노론의 실세로 영의정을 지 낸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평생 을 재야에서 문인으로 활동하였으나, 시문(詩文)에 능하였고, 특히 우리나라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에 영향을 미칠 정도 의 실력을 갖춘 화가였다. 형 김창집(金昌集, 1648-1722)이 1712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갈 때에 함께 연경(燕京) 에 다녀와 쓴 기행문인 노가재(老稼齋)「Yeonhangilgi(燕行 日記)」는 연행록 중의 백미로 평가되고 있다(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2016). 그 영향인지「Jusikbangmun (주식 방문)」에는 북경시시탕, 북경분탕과 같이 청나라에서 경험 한 음식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북경에서의 시식 경험을 살려 집으로 돌아와서도 기록하고 즐겨 해 먹었던 것으로 생 각된다. 또한 청장 송도법, 연약과 수원법 같은 지역의 유명 음식이 언급된 점이 특이할 만하다.
유와공은 김이익(金履翼, 1743-1830)의 호로, 김창업의 증 손자이다. 이 가계는 조선을 통틀어 가장 많은 정승을 배출 한 명문가이다. 김창업의 6대조 김번(金王番, 1479-1544)이 백 악산 아래 장동에 기반을 마련한 이래 지위가 상승하면서 안 국동, 옥류동 등 여러 지역에 제택(諸宅)을 두고 서울과 양 주의 석실에 기반을 둔 경화세족(京華世族)이었다. 그중 오 늘날 서울 종로구 옥인동 부근인 옥류동의 육창헌(六靑軒)은 후일 김창업 형제의 출생지가 되었다(Kim & Jung 2003). 국혼(國婚)이나 당대 최고의 명문가들과의 혼인으로 가문은 더욱 번성했고, 화려한 저택이나 누정을 건립하여 상류문화 를 향유하였다. 김창업은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였으나, 손자 김이익 대에 경기도 양근(楊根)으로 이주를 했다가 다시 김 이익의 손자 대에 충청도 영동으로 이주를 하였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김이익의 후손들은 충청도에 거주하고 있다(Kim & Jung 2003). 그러므로 「Jusikbangmun (주식방문)」은 서 울, 경기, 충청도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Jusikbangmun (주식방문)」을 비롯한 노가재공댁의 고문헌 자료는 2003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조사할 당시 김이익의 7세손인 김태진(金泰鎭)의 소장이었다. 그러므로 저자는 명 확치 않으나, 안동김씨 노가재공댁의 누군가로 추정된다.
3.「Jusikbangmun (주식방문)」의 내용
1)음식의 종류
(1)주식류(主食類)
「Jusikbangmun (주식방문)」의 두 책에 기록된 주식류는 <Table 2>와 같았다. 노가재공댁본은 죽, 국수, 만두가 11종 이, 국립중앙도서관본은 6종이 기록 되어 있었다. 죽은 잣죽 과 대추죽으로 2종이었고, 국수는 국수부빔, 북경분탕은 공 통이었고, 노가재공댁본은 콩국수와 냉면이 더 기록되어 있 었다. 만두는 편수와 양만두는 공통이었고, 노가재공댁본에 는 냉만두, 생치만두, 수교의가 더 있었다.
먼저 잣죽은 백미와 잣을 1:1의 분량으로 쑤는 죽으로 백 미를 불리고 잣을 갈아 쑨다고 하였으나, 불린 백미와 잣을 같이 간 것으로 보인다. 「Sieuijeonseo (是議全書)」(Lee HJ et al. ed. 2004)에는 불린 쌀에 잣을 섞어 아주 곱게 갈아 가는 체에 걸러 쑤고 꿀도 곁들이라고 하였다. 대추죽은 대 추와 팥을 동량의 분량으로 끓인 죽으로 대추와 팥을 간 것 을 먼저 넣고 끓인 후 심을 넣어 달인다고 하였다. 심은 곡 식가루를 물로 반죽하여 뭉쳐서 넣는 새알심 따위를 말한다. 「Buinpilji (婦人必知)」(Lee HJ et al. ed. 2010)에는 생강즙 으로 반죽한 새알을 넣으면 좋다고 하였다.
국수비빔은 돼지고기 소고기 양지머리, 미나리 등을 넣어 국수와 비비고, 달걀, 석이, 표고 등을 고명으로 얹은 비빔국 수였다. 노가재공댁본에서는 도라지와 좋은 배추김치 흰 대 를 함께 넣으면 좋다고 하였다.「Jusikbangmun (주식방문)」 에는 비빔국수용 면에 대한 언급이 없었으나,「Buinpilji (婦 人必知)」(Lee HJ et al. ed. 2010)에는 ‘발 잘고 질긴 국수 를 그릇에 한 켜 한 켜 놓는다.’고 하였다. 북경분탕은 돼지 고기와 수면을 끓는 장국에 넣어 만든 온면으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중국 음식이다. 분탕은 연행(燕行)을 간 조선인 들이 북경에서 즐겨 사먹었던 음식이었다. 노가재 김창업(金 昌業)은「Yeonhagilki (燕行日記)」에서는 우리나라의 국수 과 같은 음식으로, 간장을 치고 달걀을 넣은 것인데 북경에 서 맛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하였다. 서유문{徐有聞)은 「Muoyeonhangrok (戊午燕行錄)」에서는 돼지고기 끓인 국 에 국수를 만 것이 분탕인데 가장 먹음직하다고 하여 타향 길의 조선인들 입맛에 잘 맞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국수 는 옥수수가루로 만든 ‘그뢰’ 것이라 설명하였으나, 「Yeonwonjikji (燕轅直指)」 와「Kyeongjayeonhangjabji(庚子燕行雜 識)」에서 같이 밀가루 국수에 대한 기록이 더 많았다(Institutes for the Translation of Korean Classics 2013). 국립중앙도 서관본에서는 북경수면탕(北京水麵湯)으로 음식명이 달랐다. 우리나라의 경우 수면은 삼짇날 먹는 음식 중의 하나로 녹 두로 국수를 만드는데 붉은 물을 들이고, 꿀물을 타서 먹었 다(Lee SH 1969). 국립중앙도서관본에서는 양념에 대한 언 급이 없었으나, 노가재공댁본에서는 분탕에 파, 마늘, 천초를 넣어 양념을 하여 먹는다고 하였다.
오늘날의 콩국수는 콩을 간 국물에 밀국수를 말아 먹는 것 을 말하지만,「Jusikbangmun (주식방문)」의 콩국수는 콩가 루가 들어간 면으로 만든 국수였다. 곱게 채친 밀가루에 생 콩가루를 3:1의 비율로 섞어 익반죽을 한 후 얇게 밀고 썰어 삶아서 장국이나 깻국에 낸다고 하였다. 냉면은 꿀을 넣어 담근 김치 국물에 면을 말아먹는 국수였다. ‘국수는 따뜻한 물에 흩어서’라고 국수를 삶는 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Eumsikbeop (윤씨음식법)」(Anonymous 1854),「Eumsigbangmun (음식방문)」(Cha & Yu 2014), 「Buinpilji (婦人必知)」(Lee HJ et al. ed. 2010) 등에서는 유자를 넣고,「Sieuijeonseo (是 議全書)」(Lee HJ et al. ed. 2004)에는 고춧가루를 넣는 것 이 다른 점이었다.
만두는 냉만두와 생치만두는 굴린만두이고, 편수와 수교의 는 밀가루로, 양만두는 소양으로 만두피를 한 만두이다. 냉 만두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차게 먹는 여름만두로, 노가 재공댁본 「Jusikbangmun (주식방문)」에만 기록되어 있는 음식이었다. 돼지고기 소에 메밀가루와 녹말을 반반씩 섞은 가루를 붙여 삶아낸 만두피가 없는 굴린만두이다. 삶아 낸 만두를 얼음으로 차게 하여 초간장에 생강과 파를 넣어 찍 어 먹었다. 여름에 얼음을 쓸 정도의 여유를 갖춘 집안의 음 식임을 알 수 있다. 생치만두는 생 꿩고기를 곱게 다져서 만 두소 같이 만들어 달걀을 묻혀 간장국에 끓여낸 만두이다. 냉만두에 비해 뜨거운 국물과 함께 먹는 것이 특징이다. 편 수는 만두소에 대한 언급은 없이 배추를 넣지 말고 두부를 많이 넣지 말라고만 하였다. 수교의는 밀가루를 반죽하여 얇 게 밀어 만든 만두피를 주름을 잡아 만드는데 소는 오이로 전병소를 만들 듯 한다고 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본의 편수 를 ‘일명 수교의’라 한다고 하였는데, 빚는 모양이 오히려 노 가재공댁본의 수교의에 가깝다. 노가재공댁본에서는 편수는 네 귀를 잡아 소가 빠지지 않게 집는 것에 비해 수교의는 모 두 잡아 소가 빠지지 않게 집는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Sieuijeonseo (是議全書)」(Lee HJ et al. ed. 2004)에는 밀 만두가 일명 편수라 하였고,「Eumsigbangmun (음식방문)」 (Cha & Yu 2014)과「Jusiksiui (酒食是儀)」(Cha 2012)에는 귀를 잡아 빚는 것을 변씨만두로 소개되어 있었다. 양만두는 얇게 저민 양깃머리에 만두소를 싸서 삶아낸 만두이다. 양깃 머리의 접착을 위해 실을 이용하여 꿰매고 녹말을 묻혔다. 양깃머리는 소의 첫 번째 위인 양의 두꺼운 ‘깃머리’ 부분을 말하는데 부드러우면서도 씹히는 맛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이나 사대부가에서 푹 다린 양즙을 보양식으로 이용하 였다(Ju & Kim 2012).
(2)찬물류(饌物類)
찬물류로는 노가재공댁본은 국 9종, 찌개 1종, 전골 2종, 찜 16종, 구이나 적 1종, 전 3종, 느르미 2종, 볶음 1종, 선 4종, 회 1종, 족편 2종, 침채류 12종으로 총 54종이었고, 송 이찜과 열구자탕이 2회 기록되어 있었다. 국립중앙도서관본 은 국 7종, 찌개 1종, 찜 7종, 구이나 적 1종, 전 1종, 볶음 1종, 선 1종, 회 1종, 침채류 3종으로 총 22종이었고, 계탕 (鷄湯)이 2회 기록되어 있었으나, 노가재공댁본과 대조한 결 과 하나는 노가재본의 닭탕법과 같았고, 다른 하나는 노가재 공댁본의 글자가 유실되어 음식명이 명확히 보이지 않는 □ □계법과 같은 조리법으로, 동일한 음식으로 판단된다. 따라 서 앞에 기록된 계탕은 국류였고, 뒤에 기록된 계탕은 찜으 로 보는 것이 타탕하겠다. 국립중앙도서관본은 노가재공댁본 에 비해 느르미와 족편에 대한 조리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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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국은 간막이탕, 게탕, 굴탕, 닭탕, 북경시시탕, 진주탕, 청어소탕이 있었고, 노가재공댁본에만 금화탕과 초계탕이 더 있었다. 간막이탕은 돼지 아기집에 고기와 버섯을 넣고 깻국 을 걸러 먹는 탕이다. 간막이탕은 조선시대 반가의 음식조리 서 중 유일하게 「Jusikbangmun (주식방문)」에만 기록되어 있었는데,「Wonhangeulmyojungliuigui (園幸乙卯整理儀軌)」 (Suwon city ed. 1996)에도 그 기록이 있는 궁중음식이었다. 화성에서의 잔치를 마치고 돌아오는 윤2월 15일, 자궁(慈宮) 께 올리는 주다소반과(晝茶小盤果)에 간막기탕(間莫只湯)이 기록되어 있다. 재료와 분량은 돼지간막기(猪間莫只) 1부(部), 소고기(黃肉) 1근(斤), 묵은 닭(陳鷄) 1/2수(首), 달걀 15개, 참기름 2홉, 후춧가루 1작(夕), 잣 1작, 해수(水) 1홉이었다. 즉 돼지간막기를 돼지아기집으로 볼 수 있겠다. 게탕은 게의 검은장과 누른장에 기름, 장, 파, 후춧가루를 넣어 섞어서 먼 저 찐 다음 썰고, 송이, 꿩고기, 순무를 넣어 끓인 맑은 국에 찐 게를 넣어 끓이는 국이었다.「Jubangmun (주방문)」에 비해 송이와 꿩고기가 더 들어가고,「Buinpilji (婦人必知)」 (Lee HJ et al. ed. 2010)에는 달걀을 풀어 넣었다. 굴탕은 굴과 머리골을 각각 지지고, 해삼과 돼지고기를 삶고, 달걀 을 함께 넣어 끓이는 음식이었다. 닭탕법은 국립중앙도서관 본에는 계탕(鷄湯)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암탉에 물을 부 어 반이 되도록 무르게 고고, 계란, 기름, 간장, 파 등을 넣 어 끓인 음식이었다. 북경시시탕은 말 그대로 북경에서 먹는 돼지고기 탕이다. 돼지고기를 삶아내고 국물에 양념을 미탕 처럼 하여 흰밥을 말아먹기도 한다는 것으로 보아 돼지국밥 을 연상케 한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에는 같은 내용이 ‘ 저육탕(猪肉湯)’으로 기록되어 있었고, ‘一名北京豕豕湯’이라 고 한자로도 부기되어 있었다. 진주탕은 닭고기와 꿩고기를 팥알만큼씩 썰어 메밀가루에 묻혀 간장국에 삶아 석이, 생 강, 표고를 넣어 끓인 국이다. 팥알만큼 썰어 익힌 고기가 마 치 진주처럼 보인다하여 붙여진 이름인 것 같다. 국립중앙도 서관본에서는 재료와 방법은 같으나, 닭이나 꿩고기나 고기 를 골패쪽 만큼 썬다고 하여 고기류를 써는 방법이 달랐다. 「Sulmandeunen-beop (술 만드는 법)」(Anonymous the late 1800s)에 기록된 진주탕이 숭어 같은 생선을 이용한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청어소탕은 청어는 2-3토막으로 내고, 청어 알과 이리,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넣어 양념하여 소를 만들고 이것을 청어알이 있던 배에 다시 채워 넣은 후 달걀을 씌워 지진다. 장국을 끓여 지진 청어를 넣고 마지막에 밀가루를 약간 풀어 마무리하는 국이었다. 청어의 알과 이리를 이용한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음식이었다. 금화탕은 닭 2-3마리를 사지를 뜨고 줄로 잘라 기름으로 먼저 지지고, 간장국을 넉 넉히 부어, 토란, 표고, 박오가리, 석이, 고사리, 동아를 넣어 오래 달여서 나물이 무르게 익으면 밀가루를 치고, 후추와 천초양념을 한다. 금화탕은「Wonhangeulmyojungliuigui(園 幸乙卯整理儀軌)」(Suwon city ed. 1996)나「Eumsigbangmun (음식방문)」(Cha & Yu 2014)의 금중탕과 유사한 방법 이나 토란, 표고, 고사리, 동아 등의 채소가 더 많이 들어간 조리법이었다. 초계탕은 ‘그저초계탕’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닭 손질법이나 가열을 하는 단계에 대한 설명은 생략되어 있 으나, 닭을 삶을 때 도라지, 박오가리, 오이, 달걀 등을 넣고 식초를 알맞게 치라고 하였다.「Wonhangeulmyojungliuigui (園幸乙卯整理儀軌)」(Suwon city ed. 1996)에의 초계탕에 비 해 도라지나 박오가리, 오이 같은 채소가 더 첨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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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찌개는 저육장 1종이었다. 저육장방이라고 기록되어 있 었는데, 생돼지고기를 모나게 썰어 기름에 볶고, 두부를 넣 어 젓국으로 간을 하여 끓인다고 하였다. 전골은 승기야탕과 열구자탕 2종이었는데 열구자탕은 2회 기록되어 있었다. 그 맛이 뛰어나 기생이나 음악보다 낫다는 승기악탕(勝妓樂湯) 은 ‘승기야탕’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조리법은 도미, 숭어, 좋 은 생선, 쇠골, 양깃머리, 생복, 꿩고기를 모두 저며 지진다. 돼지고기를 넣어도 좋다. 낙지, 전복, 홍합, 해삼을 실하여 썰 고, 진계(陳鷄) 오래 고아 건지는 건져내고, 그 물에 간장을 탄다. 닭 육수에 다시마, 순무, 박오가리, 도라지, 배추, 고비, 고사리를 모두 1치씩 잘라 두어 소끔 끓이다가 여러 가지 고 기 넣고 무르게 달인다. 천초 1줌을 넣고, 달걀을 두껍게 부 쳐 썰어 왼 파를 나물 길이와 같이 잘라 넣어 달인다. 먹을 때 왼 잣 뿌린다. 이학규(李學逵, 1770-1835)의「Kumguanjukjisa (金官竹枝詞)」(Institutes for the Translation of Korean Classics 2013)에 따르면 신선로로 끓여먹는 승가기(勝佳妓) 라는 고기국은 본디 일본으로부터 전래된 것이라 하였고(Cha 2012),「Eumsikbeop (李氏飮食法)」(Anonymous the late 1800s)에서도 “이것이 왜관(倭館) 음식으로 기악(妓樂)보다 낫다 하니, 고추장을 조금 뿌려 쓴다.”고 하였다. 때문에 우 리나라의 음식조리서에는 일본의 스키야키(鋤燒, すきやき) 를 음차한 표현으로, 승기악탕의 음식명은 ‘승기야탕, 승가기 탕, 승승기탕’ 등으로 혼용되어 전해진다. 궁중의 기록에서는 승기악탕(勝只樂湯)이라고 적고, 1848년·1877년·1887년의 궁중 잔치에 차려졌으며, 27-34가지의 재료가 사용되었다 (Cha 2012).「Gyuhabchongseo (閨閤叢書)」(Jung YW ed. 1987),「Eumsikbeop (李氏飮食法)」(Anonymous the late 1800s),「Jusiksiui (酒食是儀)」(Cha 2012) 등 1800년대 중 반까지의 기록에서는 주재료가 닭고기였으나, 이후 숭어로 변화하였고,「Jusikbangmun (주식방문)」에서도 생선류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열구자탕은 22가지의 재료가 들어가는 음식으로, 먼저 지 진 고기와 해산물을 열구자탕 그릇에 담고, 그 위에 달걀을 씌워 지진 각색 고명거리를 올리고, 떡과 견과류를 올려 뜨 거운 장국을 부어 끓이면서 먹는 즉석음식이다. 삶은 꿩고 기, 삶은 양, 익힌 무, 곤자소니, 돼지고기 새끼집은 삶아 썰 어 기름에 지지고, 생양깃머리는 볶고, 해삼, 전복, 닭, 박오 가리도 넣었다. 열구자탕 건지를 열구자 그릇에 국 건지를 알맞게 담는다. 생선, 꿀 송편만큼 빚은 어만두, 석이버섯, 데 친 미나리와 파를 각각 달걀을 씌워 지진 것과 표고버섯 썰 어 지진 것, 통구나 새옹에 구리돈이나 주석 자물쇠를 넣어 삶아 파랗게 된 다시마를 썰어 지진 것, 황백지단, 쑥을 넣 은 지단 등을 두둑이 썰어 고명으로 올린다. 돼지고기와 두 부를 넣어 만든 완자, 좋은 권모를 썰어 지져 넣고, 은행을 실하여 넣고 호두도 실하여 올린다. 여기서 권모(拳模)는 흰 골무떡을 말한다. 생 꿩고기와 고기를 삶은 장국을 따로 하 여 그릇에 담고, 장국을 부어 불을 놓는다. 그 남은 건지는 쟁반이나 왜반에 곱게 여러 겹으로 쌓아 담아낸다. 뒤의 반 복된 기록에서는 고추를 고명으로 올리기도 하였다. 여기에 사용된 고명으로 주목할 만한 것은 쑥지단이다. 애탕에 쓰는 쑥도 말갛게 씻어 쪄서 달걀을 씌워 두둑이 지져 썰어 넣는 다고 하였다.「Sieuijeonseo (是議全書)」(Lee HJ et al. ed. 2004)에서 게의 검은 장을 난백에 섞어 부치면 빛이 주홍 같 다고 한 것처럼 달걀에 색을 낼 수 있는 재료를 섞어 각색 고명으로 활용한 선조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찌개는 두 책이 공통으로 기록되어 있었으나, 국립중앙도서관본에는 전골류 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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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찜은 물가지찜, 붕어찜, 송이찜, 생복찜, 생치찜, 양소 편, 양찜, 양편, 오계찜, 저편, 전동아찜, 죽순찜, 칠계탕, 칠 영계, 천초계, □□계법 등 16종이었다. 이중 물가지찜, 죽순 찜, 송이짐, 전동아찜, 생치찜, 칠영계, 천초계는 노가재공댁 본에만 기록되어 있었다. 물가지찜은 물가지를 벗겨 가운데 잘라 열십자로 그어 꿩고기나 온갖 양념을 넣어 놋그릇에 담 고 밀가루 걸게 말고 찐 음식이었다. 붕어찜은 붕어에 닭고 기나 꿩고기를 이용하여 기름장을 치고 파, 마늘, 후춧가루, 밀가루 조금 넣고, 달걀을 넣어 조금 질게 소를 만들어 넣고 지진 음식이었다. 지질 때 노구 바닥에 수수대나 싸릿대를 놓고, 기름과 깻국을 잠길 만큼 넉넉히 부어 푹 끓인 후 가 루즙을 한다고 하였다. 붕어를 지질 때에 수수대나 싸리를 까는 이유는 붕어가 노구 바닥에 붙지 않고 마음껏 지지기 를 위함이라 이유를 밝혔다. 송이찜은 연달아 두 번 기록되 어 있는데 그 내용이 동일하였고, 동자송이의 껍질을 벗긴 후 열십자로 잘라 꿩고기 소를 채우는 가지찜과 같은 방법 이었다. 동자송이라 하여 갓이 피지 않은 어린 송이를 이용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생복찜은 두 문헌에 차이가 있었다. 노 가재공택본은 “ 복 을 가 오리고 녑흘 드 칼노 소 녀흘 만치 버히고 만도소 가 이 녀허 뵈예 즙 언져 니라.” 즉 생복찜은 생복의 가장자리를 오리고 옆을 (잘) 드는 칼로 소 넣을 만큼 베고, 만두소를 가득히 넣어 베 보에 싸 쪄내어 (베보를 풀고) 즙을 얹어 쓴다고 하였다. 그 러나 국립중앙도서관본에서는 ‘ 복짐 生全卜짐’은 “ 젼복 과 가오리을 드난 칼노 을 갈나 소을 너흘 만치 궁걸 고 고기와 두부을 두다려 만도소갓치 여 속의 늣코 베 보작이을 폐여 노코 실우 우의 셔 먹난이라”라고 하여 생전 복과 생가오리를 (잘) 드는 칼로 배를 갈라 소를 넣을 만큼 구멍을 낸다. 고기와 두부를 다져서 만두소 같이하여 속에 넣는다. 베보자기를 펴 놓고 시루 위에 쪄서 먹는다고하여 전복의 가장자리를 염접하여 하는 방법인지 전복과 가오리 를 함께 쓰는 것이지 불분명하였다. 생치찜은 꿩고기 다리를 각을 떠서 뼈를 발라내고, 고기소를 넣어 다시 다리 모양이 있도록 만들어 가루를 약간 묻혀 달걀을 씌워 기름에 지진 다. 박오가리와 무를 잡탕처럼 썰어 무르게 하고, 국물을 맛 있게 하여 잠깐 끓이고, 위에 달걀, 표고버섯, 석이버섯, 미 나리, 숙주를 얹은 음식이었다.
양소편은 양의 검은 껍질을 벗기고, 좋은 암탉과 전복, 해 삼을 매우 불려 그 양에 넣어 싸고 바늘로 감쳐 맹물에 무르 녹도록 고아, 푹 무르면 간장으로 삼삼이 간을 하고 오래 끓 인 음식이다. 양찜은 양소편과 유사하나 전복이나 해삼 대신 배추와 순무를 넣고 여러 번 단단히 싸매어 큰 솥 안에 넣 고, 질소라(陶所羅) 즉 소래기로 덮은 후 가를 틈 없이 흙으 로 발라 뭉근히 곤 음식이었다. 오래 끓이면 닭의 뼈가 다 녹는 듯하고 양 맛이 더욱 좋다고 하였다. 양편은 양을 깨끗 하게 껍질을 벗겨서 하얗게 하고, 속의 기름기도 제거한다. 가장 좋은 닭 하나를 속을 비우고 깨끗하게 손질하여 천초 를 넣고 양에 싸서 항아리에 넣고 기름과 장으로 간을 하고 국을 부어 항아리에 노불을 곤다. 항아리에 넣어 고면 빛이 옥같이 곱고 깨끗하다. 양이 무르녹아 좋으면 내어 약과만큼 썰고, 후추, 생강, 잣을 두드려 얹어 쓴다고 하였다. 오계찜 은 오계의 안집에 소고기, 후추, 잣, 파, 생강, 감장, 깨소금 을 넣어 소가 빠지지 않게 한 후 시루에 찐 음식이었다.
저편은 돼지고기를 반 정도 익혀 나른하게 두드린 후 천 초가루, 마늘, 파, 생강 넣고 녹말 넣어 다시 두드려 기름과 간장으로 간을 맞추고 뭉쳐서 어레미에 놓아 찐 음식이다. 초간장을 찍어 먹는다고 하였다. 전동아찜은 외만 한 전동아 의 껍질을 벗기고, 꼭지를 작게 베어 속을 꺼내고 소를 가득 넣어 국물에 간을 맞추어 노구에 찐 음식이었다. 죽순찜은 연한 죽순을 삶아 물에 우린 후 가운데 마디를 파 버리고, 고기소를 채워 넣어 쪄내면 되는데 느르미즙과 같이 해서 얹 는다고 하였다. 칠계탕은 닭을 씻어 표고, 박오가리, 순무, 토 란, 다시마, 도라지 등을 넣고 간장과 기름으로 양념한 후 항 아리에 담아 중탕으로 끓이는 음식이다. 음식명에는 ‘탕’이 붙었으나, 국물에 대한 언급이 없고, 중탕하여 익히는 것으 로 보아 찜으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하겠다. 칠영계찜은 닭과 고기를 삶아 찢고, 도라지, 미나리, 기름 양념을 한 음식이다. 「Gyuhabchongseo (閨閤叢書)」(Jung YW ed. 1987), 「Gyugonyoram (閨要覽)」(Anonymous 1894),「Eumsigbangmun (음식방문)」(Cha & Yu 2014) 등에 기록된 칠향 계의 변형인 듯하다. 천초계는 사지를 떠서 둘로 자른 닭을 항아리에 넣고, 기름, 식초, 술, 간장국, 천초를 넣어 항아리 를 유지로 단단히 싸맨 후 중탕하여 무르녹게 고아 낸 음식 이었다. □□계법은 가장자리의 마모된 부분이라 두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국립중앙도서관본의 계탕과 조리법이 일치하였다. 암탉에 토란, 배추줄기, 전복, 해삼, 기름, 초간 장국을 넣어 김나지 않게 막아 덮고 매우 끓인 음식으로, 닭 찜의 일종이었다. 닭의 사지가 다 헤어질 만큼 오래 끓이고, 염담이 맞으면 술안주에 좋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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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구이/적은 잡산적 1종이었다. 머릿골을 전유같이 저며 끓는 물에 담거나 장국에나 넣어 데쳐 적꼬치에 살살 꿰어 밀가루 조금 뿌려 구운 음식이었다. 집신굴이나 파를 섞어 굽기도 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본에는 집신굴 옆에 ‘ 名집 신屈’이라는 표기가 있어 당시 굴의 한 종류로 생각되나 명 확히 밝힐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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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전은 붕어전, 간전, 닭회 3종이었다. 국립중앙도서관본 에는 닭회(鷄膾)만 기록되어 있었다. 닭회는 닭고기 살을 저 며 녹말을 묻히고, 지진 후 초간장에 찍어 먹는 음식이었다. 음식명은 닭회이나 조리법은 전이었다. 붕어전은 1치나 2치 정도 크기의 붕어를 깨끗이 씻어 간을 하고, 찹쌀가루나 녹 말가루를 묻혀 기름에 지진 음식으로 술안주라고 하였다. 간 전은 간을 얇게 저미고, 닭이나 꿩고기를 소로 양념을 넣어 볶아 어만두 싸듯 하여 녹말 묻혀 지진 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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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느르미는 노가재공댁본에만 있었는데, 난느르미와 가지 느름이 2종이었다. 난느르미는 달걀에 청주와 간장을 넣고 풀어서 그릇에 담아 익히고, 느르미 같이 꿰어 즙을 얹는 음 식이었다. 가지느름이는 가지껍질을 벗기고 1치만큼씩 납죽 납죽 썰어서 적꼬치에 꿰어 굽는데, 다진 고기를 섞은 즙을 발라 굽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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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볶음으로는 떡볶이가 있었고, 노가재공댁본과 국립중앙 도서관본에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떡을 잡탕 무보다 조금 굵게 썰어 장국을 맛나게 끓이고, 돼지고기, 미나리, 숙주, 도 라지, 박오가리를 넣어 양념하여 볶아 낸다. 석이버섯과 표 고버섯은 달걀에 부쳐 가늘게 썰어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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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선은 문주는 공통이었고, 노가재공댁본에는 동과선, 겨 자선, 배추선이 더 기록되어 있었다. 문주는 어린 호박을 둘 이나 넷으로 갈라 표면에 칼집을 내고 고기양념을 넣어 익 힌 음식인데, 맛난 고추장에 묽게 개어 바르고 기름을 발라 구우면 좋다고 하였다.「Jusikbangmun (주식방문)」에서 유 일하게 고추장을 넣어 조리한 음식이었다. 동과선은 센 동아 의 가장자리를 잘라 곱게 썰고, 솥에 기름을 조금 두르고, 동 아를 잠깐 볶는데 다진 생강과 마늘을 넣고, 좋은 식초를 섞 어 그릇 가장자리에 둘러내면 좋다고 하였다. 겨자선은 동아 를 잠깐 볶고, 겨자를 짭짤하게 개어 양념한 음식이었다. 배 추선은 좋은 배추를 손가락 길이만큼 잘라 솥에 넣고, 기름 을 쳐서 잠깐 볶는데, 이때 겨자를 조금 넣어 짭짤하게 하면 좋다고 하였다.「Eumsikbeop(尹氏飮食法)」(Anonymous the late 1800s)에서는 배추 손질을 좋은 주걱배추 줄기 흰 것을 잠간 데쳐서 실을 뽑아내고 반듯반듯 갸름하게 썰으라고 하 였고, 반찬과 술안주에 다 좋다고 하여 널리 이용한 음식임 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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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회로는 낙지회가 두 책에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좋은 낙지를 끓는 물에 데쳐 껍질이 다 벗겨지면 강회 파회만큼 썰어 양념간장에 찍어 먹는 음식이었다. 낙지는 실같이 찢어 써도 좋다고 하였다. 낙지의 크기를 강회 파회 만큼이라고 하여 당시 즐겨 먹었기 때문에 조리법의 쉬운 예가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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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 족편류는 노가재공댁본에만 기록되어 있었는데, 족편과 우족채 2종이었다. 족편과 우족채는 족을 무르게 고와 뼈를 추려내고 양념하여 굳힌 음식으로, 두 가지가 서로 우사하였 는데, 우족채는 부재료로 닭고기나 꿩고기를 사용하여 굳힌 후 가늘게 썬 것이 달랐다.「Gyuhabchongseo (閨閤叢書)」 (Jung YW ed. 1987),「Eumsigbangmun (음식방문)」(Cha & Yu 2014),「Sieuijeonseo (是議全書)」(Lee HJ et al. ed. 2004)에서는 족편에 닭고기나 꿩고기가 들어가지만, 「Jusikbangmun (주식방문)」에서는 더 세분화되어 있었다.「Gyuhabchongseo (閨閤叢書)」(Jung YW ed. 1987)에서는 족을 고을 때 기름을 걷으면 빛이 묽고 곱지 못하니 하나도 걷지 말 것 을 당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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⑪ 침채류(沈菜類)는 과동외지히법, 지금 쓰는 외김치법, 생치김치법 3종이 공통으로 기록되어 있었고, 노가재공댁본 에는 가지지히, 가지외지법, 물외지이, 산갓김치, 순무김치, 즙지히방문, 별즙지히법, 청과장법, 청지히법의 9종이 더 기 록되어 있었다. 이 중 외를 주재료로 사용한 침채류가 6종, 부재료로 사용된 침채류가 3종으로, 외는 당시 침채류의 재 료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노가재공 댁의 원문은 ‘즉금 외딤 법’과 ‘ 치 김 법’으로 표 현되어 있어 김치 용어인 ‘딤 ’와 ‘김 ’가 혼용되는 시기 에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과동외지히법은 겨울을 지날 수 있는 외지히를 담그는 법 이라는 뜻이다. ‘늙은 외를 젖은 행주로 몸에 묻은 것을 모 두 털고, 물기 없이 독에 차곡차곡 펄펄 끓인 짠 소금물을 부어서 외가 툭툭 터지는 듯하면 돌로 지즐러 둔다. 사나흘 이 되면 외를 꺼내고, 소금물에 소금을 더 넣어 다시 끓여 식혀 붓고, 십여일이 지나 또 끓여 식혀 붓고, 억새를 넣고 돌로 지즐러 뜨지 않게 하여 바깥에 두면 상치 않는다.’고 하 였다. 짜고 싱겁기는 장 담는 것과 같으니 알 맞추어 한다. 소금이 적으면 무르고, 외를 딴지 오랜 것을 하면 쇠여 연하 지 않다고 하였다. 소금물을 짜게 하여 세 번을 끓여 붓고, 날물기가 없이 하여 장기간 보관을 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 방법대로 하되 간을 슴슴하게 하여 어린 외로 담가 동침이 에도 넣는다고 하였다. 정확한 재료배합비를 명기한 다른 조 리법에 비해 소금물의 배합비가 기록되지 않는 것이 아쉽다 . 같은 조리법으로 국립중앙도서관본에서는 외담는법이라는 음식명이었다. ‘즉시 쓰는 외침채법’은 담가서 바로 먹을 수 있는 외침채를 말한다. 국립중앙도서관본에서는 ‘외김치 속 히 먹는 법’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외는 양쪽 끝을 잘라버리 고, 고부지게 끓인 물로 잠깐 데쳐내고 바로 찬물로 씻어 더 운 기운을 없앤다. 외에 칼집을 넣어 생강, 파, 마늘을 다져 서 외속에 넣고, 끓여서 식힌 소금물로 삼삼하게 간을 맞추 어 담는다고 하였다. 생치김치법은 외와 꿩고기를 썰어 각각 기름을 조금 쳐서 볶고, 속뜨물을 끓여 꿩고기 볶은 것을 넣 고 한소끔 끓인다. 파 흰 대를 찢어 넣어 잠깐 끓여 내어 동 침이국을 쳐서 맛을 맞추면 좋다고 하였다.「Jusiksiui (酒食 是儀)」(Cha 2012)에서 꿩고기를 백숙으로 삶아 고기는 찢 고, 국물은 기름기 없이 하여 동치미국이랑 섞는 것에 비해 꿩고기를 익히는 방법이 달랐다.
가지외지법은 젊은 가지와 외를 수건으로 씻어 잠깐 데쳐 적당한 항아리에 담고, 끓인 물에 소금을 타서 가득 부어 돌 로 눌러두면 싱싱하고 봄이 지나도록 좋다고 하였다. 가지지 히는 가을에 하는 것이라고 작게 기록되어 있었다. 가지를 씻어 물기 없앤 후 아래 위를 잘라 양끝에 소금을 많이 묻혀 항아리에 넣었다가 사흘 만에 냉수 부어 붉은 물이 우러나 면 그 물을 쏟아 버리고, 다시 새 냉수를 가득 부어 돌로 눌 러두면 한겨울에 써도 좋다고 하였다. 가지외지가 젊은 가지 즉 어린가지를 이용하여 여름철에 담그는 것에 비해 가지지 히는 좀 더 자라 단단해진 가지를 이용하여 그 보다 늦은 가 을철에 담그는 침채였다. 물외지이는 찬이슬 맞은 외를 씻어 볕에 널었다가 물기 없을 만하거든 상하지 않게 차곡차곡 넣 고, 나뭇가지나 억새로 항아리 부리를 막은 후 물 1동이:소 금 1줌으로 끓여서 싸늘하게 식힌 소금물을 가득 붓는다. 더 운데 두지 말고, 겨울에 얼리지 않으면 2~3월 되도록 좋다고 하였다. 물외지이 조리법에서 물 1동이:소금 1줌이 ‘건건하 게’라고 표현만큼 ‘짜게 풀어’라고 기록한 과동외지히의 소 금물은 소금의 비율이 더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산갓김치는 산갓을 씻어서 뿌리째 항아리에 넣고, 손을 넣 어 데이지 않을 정도의 온도로 물을 데워 항아리에 부어 익 힌 김치로, 찬 냉수를 손에 쥐어 뿌려서 더운 방에 묻었다가 익으면 쓴다고 하였다. 산갓김치[山芥菹]는「Domundaejak (屠門大爵)」에 처음 기록되어 있는데, 함경남도와 회양ㆍ평 강 등지에서 모두 나는데 맵고도 산뜻하다고 하였다(Cha 2003).「Eumsikdimibang (음식디미방)」에는 산갓김치를 익 힐 때 너무 더워서 산갓을 데워도 좋지 못하고, 덜 더워 익 지 않아도 좋지 못하니, 구들이 너무 뜨거우면 단지를 옷가 지로 싸서 익히고, 뜨겁지 않거든 솥에 중탕하여 익히라고 하였다(Andong Jang 1670). 산갓김치가 숙성되면서 매운 향 미가 잘 발현될 수 있는 온도 유지를 강조한 대목이다. 「Gyuhabchongseo (閨閤叢書)」(Jung YW ed. 1987)에서는 입춘 때 먹는 김치로, 봄뜻이 먼저 있는 고로 이름 하여 보 춘저(報春菹)라 한다고 하였다. 순무김치는 큰 순무는 1치 길 이씩 토막 내어 열십자로 쪼개고, 작은 것은 그냥 열십자로 자른다. 저민 생강을 넣고, 간을 하여 잠깐 뒀다가 간이 베 면 항아리에 넣는다. 깨소금을 베 헝겊에 싸 항아리 밑에 넣 은 후 그 위에 간을 친 무를 넣어 소금국을 알맞게 하여 붓 는다. 잘 익으면 맨입에 아무리 먹어도 싫지 않다고 하였다.<Table 3>
청지히법은 8월 20일을 전후하여 푸른 외를 따서 소금에 묻듯이 절이고, 이튿날에 외의 소금기를 제물에 흔들어 씻어 항아리에 넣고, 그 국을 가라 앉혀 항아리에 붓고 생강을 다 져 넣어 담는 법이었다. 청과장은 어린 청오이 하나를 2~3등 분으로 잘라 베어 열십자로 갈라 끓는 물에 넣어 잠깐 데치 고, 사이에 부추를 볶아 끼운다. 간장을 게젓국처럼 달여 붓 는데 저민 생강과 천초가루를 함께 넣어도 좋다. 오늘날 먹 는 오이소박이와 유사하나, 고춧가루 양념이 아니라 게장을 담듯이 간장을 끓여 붓는 것이 달랐다. 즙지히방문에 기록된 즙지히용 메주를 만드는 법은 먼저 콩 4되를 2~3일을 물에 담가 거품이 일고 쉰내가 나면 기울이 2말과 섞어 시루에 담 아 쪄서 찧어 잘게 쥐어 메주를 띄우는데 사나흘 후에 뿌옇 게 뜨면 밑을 갈라 두고, 다시 사나흘 만에 햇볕에 대엿새를 말려 찧어 체로 친다고 하였다. 이 메주가루를 소금물에 반 죽을 하는데, 기울 2말이면 소금 1되, 소금물에 절인 나물을 켜켜로 안친다. 손을 못 댈 정도로 뜨겁게 두엄을 띄워 즙지 히를 묻고, 나흘 만에 식전에 내면 극진하다고 하였다. 별즙 지히는 기울 대신 가을 보리쌀을 이용하여 만드는 법으로, 즙지히용 메주를 띄우는데 약 2주일이 걸리는데 비해 별즙 지히는 세이레 즉 21일이 소요되는 법이었다. 즙지히 재료배 합도 별즙지히는 엿기름과 꿀, 기름, 간장국을 함께 넣어 세 이레 동안 숙성하여 5배 이상 오래 숙성하는 별법이었다.
(3)떡류(餠餌類)
노가재공댁본에는 찐떡, 친떡, 지진떡이 7종 기록되어 있 었는데, 반복 기록된 것을 포함하면 모두 11회의 기록이 있 었다. 국립중앙도서관본에는 증편과 대추단자 2종만 기록되 어 있었다. 먼저 찐떡은 더덕편, 두텁떡, 증편 그리고 정확히 이름을 알 수 없지만, 볶은팥을 고물로 하는 찰시루편이 있 었다. 더덕편은 더덕을 찧어 잘게 찢어 메시루떡 반죽에 섞 어 고명을 박아 찌는 떡이었다. 노가재공댁본에 두텁떡은 2 회 기록되어 있었는데, 앞의 기록에서는 “찹쌀가루를 반죽하 여 자그맣게 뭉쳐 팥이나 밤이나 소를 넣어 대추와 밤을 썰 어 묻혀 체에나 쪄내어 볶은 꿀팥을 묻히면 좋다.”고 하였 다. 그런데 다음 기록에서는 “조그만 시루에 안칠 때 팥을 볶아 뭉쳐 방울을 놓고, 방울 위에 가루를 덮고, 팥을 뿌려 고명을 놓고 쪄 내면 좋다. 증편 테의 반죽을 알맞게 하여 팥을 볶아 밑에 뿌린다. 반죽한 것을 켜를 놓고 팥을 뭉쳐 방울을 놓고, 그 위에 반죽을 숟가락으로나 떠서 보이도록 고명을 놓고 팥을 뿌린다. (그것을) 시루에 여럿을 포개어 쪄 내면 더 좋다.”라고 하여 요즈음 두텁떡을 만드는 방법과 같 은 방법을 기록하였다. 저자는 ‘이 방법이 좋다.’라고 하였다. 증편은 노가재공댁본에는 4회 기록되어 있었으나, 네 번째는 ‘증편 기주하는 법’이라는 제목만 있을 뿐 내용은 유실되어 보이지 않았다. 국립중앙도서관본에는 2회 기록되어 있었다. 두 책 모두 반복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애용하던 떡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록된 내용은 중복이라기보다 부족 된 서술에 대한 보충의 개념이었다. 증편은 먼저 이틀 전에 죽을 쑤어 누룩을 더 섞어 기주가 일도록 두는데, 쌀 2되:술 1중발, 또는 쌀 9되:술 1탕기를 치고 냉수를 섞어 반죽한다 고 하였다. 당시 사용한 중발이나 탕기의 정확한 양을 가늠 할 수가 없어 아쉽다. 증편을 할 때 쌀가루에 끓는 물로 송 편반죽 만큼 반죽을 하여 기주를 섞고, 소금은 넣지 않고 들 어보아 처질만치 하면 질그릇에 담는다. 더운데서 밤을 재워 괴면 새벽이나 아침이나 찌되 위를 많이 덮어야 좋고, 센 불 에서 빨리 하여서 부풀기를 잘 한다고 하였다. 노가재공댁본 의 대추단자 바로 뒤에는 “□□□□ 곰아콤 흐러 갈을 증편 반 만치 □□□□기 팟 복가 밋과 우의 여 셕이 편쳐로 □□□□ 라”라고 되어 있다. 유실된 글자가 많아 정확히 어떤 음식인지 단정할 수 없지만, 볶은 팥고물 을 한 찰시루인 것으로 추정된다.
친떡으로는 대추단자와 밤단자가 있었다. 밤과 대추를 잘게 썰어 찹쌀가루를 알맞게 반죽하여 쪄서 석이단자처럼 베어 잣 가루를 묻혀 쓴다고 하였다. 밤단자는 일부의 내용이 유실되 어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게 모호하지만,「Sulmandeunenbeop (술 만드는 법)」(Anonymous the late 1800s)에 기록된 밤단 자 만드는 법을 참고하면 밤을 삶아 거르고 찹쌀가루를 반 죽 되게 하여 삶아 홍두깨로 꽈리가 일게 쳐서 밤을 꿀물을 묻혀 소를 넣어 밤가루를 묻힌 떡으로 보인다. 메떡 가루에 꿀을 치고 좋은 콩을 박아서 하면 좋다고도 하였다.
지진떡으로는 감태조악이 있었다. 감태조악을 만들 때는 감태를 여러 번 빨아 물기를 꼭 짜서 해야 부풀어 오르지 않 는다고 강조하였다. 감태를 구멍떡을 섞어 익혀서 쓴다고 하 였는데, 쌀에 대한 언급은 없었으나, 주악인 것으로 보아 찹 쌀을 이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4)과정류(菓類)
과정류로 노가재공댁본에는 유밀과류, 유과류, 정과류, 과 편류가 20종 기록되어 있었는데, 반복하여 기록된 것을 합하 면 총 27회였다. 그중 11종이 국립중앙도서관본에 기록되어 있었다. 유밀과류(油蜜果類)는 약과, 만두과, 타래과, 중박계, 채소과 등 7종이었는데, 약과는 약과, 대약과와 연약과로 세 분화되어 설명되었고, 연약과와 중박계는 2회 기록되어 있었 다. 대약과는 유실된 부분이 많아 밀가루 5말, 꿀 1말, 흑당 5되, 기름 1말 갸웃 정도만 보일 뿐이다. 두 문헌의 재료배 합비가 달랐다. 노가재공댁본에서는 밀가루 반죽에 기름으로 만 표기된 것에 비해 국립중앙도서관본에서는 ‘진유 반 쥬발 들길람 반 쥬발’이라 하여 참기름과 들기름을 반씩 섞어서 사용하고 있었다. 약과는 밀가루 1말:꿀 2되:기름 5홉:술 1 종지의 비율로 반죽하고, 밀어서 반듯하게 썰어 지진다. 즙 청 7홉만 하면 좋은데, 즙청용 꿀은 꿀 1되에 끓인 물 1종지 를 타 한소끔 끓여 과즐이 더울 때 담그라고 하였다. 약과를 지지는 기름을 넉넉히 하는 게 좋은 데, 5되 지지면 기름 5 홉 들고, 1말 지질 때는 1되 가웃, 즉 1되 반이 필요하다고 하여 약과를 지지는데 필요한 기름의 양을 기록한 것이 특 징이었다. 연약과의 2회 기록 중 앞의 기록은 유실부분이 많 아 재료의 일부만 알아볼 수 있을 뿐이었다. 노가재공댁본에 서는 연약과 수원법에서 밀가루 1말:꿀 1되 2홉:참기름 8홉 을 넣어 되게 반죽하고, 지져내어 즙청을 했다. 즙청된 약과 에는 후춧가루와 계피와 잣가루를 뿌렸다. 약과가 잘 되고 못되기는 반죽과 지지기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밀가루 1말에 꿀 4되, 기름 4되가 든다고 재료의 정확한 부피 양을 밝혔 다. 수원에서 연약과를 만드는 방법이 유명해서인지 수원법 임을 강조하였는데,「Gyuhabchongseo (閨閤叢書)」(Jung YW ed. 1987) <청낭결(靑囊訣)>의 동국팔도소산에는 약과는 수 원의 명물임을 밝히고 있다. 또, 유밀과를 약과(藥菓)라 하는 데 ‘밀(蜜)은 사시정기(四時精氣)요, 꿀은 온갖 약의 으뜸(百 藥之長)이오, 기름은 벌레를 죽이고 해독하기 때문에 이르는 말이다.’라고 약과 명칭의 유래를 밝히고 있다. 만두과는 약 과를 반죽하듯 기름을 먼저 쳐서 모양을 만든다. 소는 대추 를 두드려 찌고, 밤은 삶아 걸러 계피와 후추를 넣어 벌어지 지 않도록 단단히 빚어 지진다고 하였다. 타래과는 꿀물에 반죽하여 썰어서 접어 곱게 벌려 놓아 마르거든 지지는 것 이 좋다고 하였다. 노가재공댁본에서 중박계는 2회 기록되어 있으나, 재료배합비는 같았다. 즉 밀가루 1말:꿀 2되:참기름 2되로 반죽하여 두껍게 밀어 써는데 반촌 너비에 길이 1치 푼씩 정도로 썰어야만 알맞다고 하였다. 즉 1.5×3.3 cm 정도 의 크기로 썰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질 때는 기름이 매우 끓으면 넣어 익을 만큼 지지는데, 기름은 양이 처음 양의 반 으로 줄어든다고 하였다. 채소과는 대나무 막대를 두 갈고리 로 하여 붙지 않게 그 막대에 감아 번철에 뒤적여 지진다고 하여 리본형태의 실타래 모양을 만드는 과정을 설명하였다.
유과류(油菓類)로는 감사과, 빙사과, 강정, 요화대, 연사과, 산자 6종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노가재공댁에서는 강정, 요 화대, 연사과는 각각 2회 씩 기록되어 있었다. 유과는 찹쌀 을 쪄서 쌀알이 없도록 많이 쳐서 바탕을 만들어 말려두었 다가 쓸 때 기름에 지져서 엿물을 바르고 고물을 입히는 한 과이다. 찹쌀바탕을 만드는 반죽의 되기와 바탕의 크기에 따 라 그 종류가 나눠진다.「Jusikbangmun (주식방문)」에서 감사과는 ‘흰 설기 반죽보다 많이 축축하게 하고, 빈사과는 되게 한다.’, 강정은 술로 반죽하는데 ‘주악 반죽보다 매우 눅게 하고, 산자와 연사과도 강정하듯 한다.’고 하였다. 요화 대 반죽은 ‘날물로 된수제비 반죽만큼’하라고 하였으니, 반 죽의 되기를 무른 순서부터 보면 강정·산자·연사과>감사 과> 빙사과>요화대 순이라 볼 수 있겠다. 감사과용 바탕은 부서지지 않을 만큼 말라야 좋은데, 물기가 많으면 만든 후 속이 비고 질겨서 좋지 않으므로 부디 말리기를 알맞게 하 여야 좋다고 당부하였다. 연사과는 잣가루를 고물로 묻히고, 율란이나 조란과 같이 찬합에 담는다고 하였다. 강정용 찹쌀 은 좋은 찰벼를 햇볕에 말린 것을 쓴다. 지지는 기름을 번철 에 먼저 데워 그릇에 덜어 내어 강정을 넣어 덥인 후 끓는 번철에 넣어 매우 저어 다 인 후 낸다. 산자용 강반은 찹쌀 을 사흘 동안 담갔다가 건져 쪄 내어 보자기를 덮고, 식은 후에 덩이가 없도록 뜯어 볕에 널어 말렸다가 지져서 만들 었다.
정과류(正果類)는 노가재공댁본에는 동아정과, 전동아정과, 쪽정과, 산사정과 4종이었고, 국립중앙도서관본에는 동아정 과와 연동아정과만 기록되어 있었다. 동아정과와 전동아정과 는 각각 2회씩 기록되어 있었다. 전동아정과는 연한 동아를 이용하는 것이고, 동아정과는 과숙하여 센 동아를 이용하는 것이 차이였다. 앞의 기록에서 동아를 사회(沙灰)에 물이 흐 르도록 문질러 다시 소래기에 담아 다시 사회에 재우는 것 에 비해, 뒤의 기록에서는 약과같이 썬 동아에 사회를 떡고 물처럼 묻혀 사나흘 지나 실 같은 것이 나올 때까지 두었다 가 쓰는 것이 달랐다. 사회는 굴 껍데기를 불에 태워 만든 가루인데, 사회 속의 무기염과 동아의 펙틴질이 결합하여 불 용성의 염을 형성하므로 단단한 질감을 얻게 된다. 앞의 기 록에서는 동아를 졸일 때 새옹을 이용하고, 뒤의 기록에는 통노구를 사용하였다. 전동아정과의 동아 전처리는 푸른 껍 질을 모두 벗긴 후 속을 긁어 버리고, 약과만큼 썰어 사회를 가득 푼 냉수에 이틀 동안 담그는 것이 달랐다. 동아정과를 졸일 때는 처음부터 꿀물을 가득히 하여 뭉근하게 졸여야 하 는데, 졸이는 중간에 새 국을 부어 졸이면 빛이 나지 않고 물러지기 쉽기 때문이라 당부하고 있다. 전동아정과의 다른 방법에서는 생강을 넣어 졸여도 좋다고 하였다. 쪽정과는 살 구 씨를 빼고 갈라서 잠깐 데친 후 꿀을 넣어 뭉근한 불에서 나른하게 익도록 살구쪽을 뒤집어 가면 졸이는 것이다. 산사 정과는 산사에 꿀을 넣어 졸인 것이다.
과편류(果片類)은 노가재공댁본에 살구편, 앵두편, 오미자 편의 3종이 기록되어 있었으나, 국립중앙도서관본에는 기록 되어 있지 않았다. 살구는 씨를 발라 쪄서 거르고, 앵두는 씨 째로 데쳐 체에 걸러서 각각 꿀과 우무를 넣어 졸여서 만든 다고 하였다. 오미자편은 오미자 물에 엉길 만큼 하여 끓여 다되어 갈 때 연지를 넣고 하여야 곱다고 하였다. 일반적으 로 과편을 만들 때 겔화제로 녹두전분을 사용하는데,「Jusikbangmun (주식방문)」에서는 살구편이나 앵두편을 우뭇가 사리로 만든 우무로 굳힌 것이 특이하다. 하지만 오미자편에 서는 겔화제에 대한 언급은 없이 착색을 돕기 위한 연지 ( 脂) 추가를 강조하고 있었다. 연지는 잇꽃과 주사(朱砂) 로 만든 붉은색 물감이다. 궁중에서 각색떡을 만들어 고일 때 떡가루에 물을 들일 때나, 한과류에 색을 들일 때 이용되 었다(Suwon city ed. 1996).
엿 고는 법은 국립중앙도서관본에만 있었는데, 엿 2말을 하려면 좋은 엿기름을 식되로 8되를 넉넉히 넣으면 좋다고 하였다. 엿을 고기 위해 어떤 곡물을 사용하였는지는 알 수 없었고, 다만 엿기름의 양만을 강조하였다.「Sieuijeonseo (是 議全書)」(Lee HJ et al. ed. 2004)의 엿 고는 법에서는 1말 을 고려면 엿기름가루를 어레미에 쳐서 찻되로 1되를 넣어 한다고 하였다. 지금은 당시의 식되나 찻되의 부피를 알 수 없지만 식되가 찻되의 1/4 크기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겠 다.「Sieuijeonseo (是議全書)」(Lee HJ et al. ed. 2004)에서 는 찹쌀을 사용하였고, 고명으로 볶은 깨, 강반, 잣, 호두 후 춧가루, 계피, 건강, 대추 다진 것 등을 쓸 수 있다고 하였다.<Table 4>
(5)주류(酒類)
술은 노가재공댁본에는 합주, 찹쌀청주, 송엽주, 소국주, 삼 일주, 두견주로 6종과 술밑을 만드는 서김방문이 기록되어 있었다. 일반 양조주가 4종, 솔잎을 넣은 약용주(藥用酒)가 1 종, 두견화를 넣은 가향주(佳香酒)가 1종이었다. 찹쌀청주, 송 엽주, 소국주, 삼일주는 단양주(單釀酒), 누룩 외 서김이 함 께 들어간 합주는 이양주(二釀酒), 두견주는 삼양주(三釀酒) 였다. 음식에서 두 책이 중복되는 내용이 많았으나, 술방문 은 전혀 중복되지 않았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는 청명주, 삼 해주, 백화춘술방문, 칠일주, 연일주, 송순주 6종이 기록되어 있었다. 일반양조주가 5종, 송순을 넣은 약용주가 1종이었는 데, 송순주는 혼성주였다. 노가재공댁본의 주조법은 단양주 가 많았으나, 국립중앙도서관본은 청명주, 백화춘, 칠일주, 연 잎주는 이양주이고, 삼해주는 삼양주였다. 노가재공댁본에 기 록된 두견주는 먼저 정월 해일에 백미가루, 물, 누룩가루, 밀 가루를 섞어 술밑을 빚는다. 2월 그믐~3월 초생에 다시 백미 와 찹쌀을 소국주 밥같이 되직이 찐다고 하였는데, 이때 「Sulmandeunenbeop (술 만드는 법)」(Anonymous the late 1800s)에서는 찹쌀과 멥쌀을 깨끗이 쓿어 불린 후 시루에 흰 쌀은 밑에 안치고 찹쌀은 위에 안쳐서 찐다고 하였다. 다른 문헌들에 기록된 두견화는 이양주가 주를 이루는데, 「Jusikbangmun (주식방문)」에서는 덧술에 두견화를 넣고, 열흘 후 술이 말갛게 괴어 꽃과 밥알이 위에 떠오른 후 다시 찹쌀 을 쪄서 넣고 덧술을 다시 하는 방법이 달랐다.「Jusik-siui (酒食是儀)」(Cha 2012)에는 두견주의 “빛이 곱고 맛이 기이 하니 술 가운데 상품이다.”라고 하여 진달래가 피는 춘삼월 빛과 향으로 마시는 술을 즐겼음을 알 수 있다. 송엽주는 백 미가루에 솔잎을 먼저 한 벌 끓여 물을 버리고, 다시 물 6말 부어 2말 되게 달인 물에 개어 누룩을 섞어 넣어 두었다가 세이레(27일) 후 먹으라고 하였다. 이 송엽주는 배의 냉기 있 는 사람과 바람증 있는 사람에게 좋은 약주(藥酒)임을 명시 하였다.
서김은 발효용 스타터(starter)이다. 술을 빚을 땐 술밑으로, 증편이나 상화를 만들 때는 발효제 역할을 하였다. “여름철 에 쌀을 빻아 항아리에 넣고, 끓는 물을 부어 흔들어 따라버 리고, 뚜껑을 덮어 더운 방에 놓아두었다가 이튿날 아침에 내어 흰죽을 되게 쑨다. 죽을 방고리에 퍼서 많이 개어 싸늘 하게 식으면 누룩과 먼저 만든 서김을 조금 넣어 따뜻한 곳 에 두고 만든다고 하였다.” 서김의 용도로 증편과 상화에도 좋다고 하였다. 곡물을 가루로 내고 죽을 쑤어 누룩과 섞어 알콜발효가 빠른 시간 내에 이루어지도록 한 방법이다.
삼해주(三亥酒)는 정월 첫 해일에 백미 2되 5홉을 담갔다 가, 가루 내어 풀떼를 쑤어 식힌 후에 누룩가루 1되, 밀가루 1되 섞어 버무려 넣는다. 다시 2월 첫 해일에 백미로, 또 3 월의 해일에 백미로 덧술을 하여 마시는 술이었다. 송순주는 백미로 풀떼를 쑤고, 섬누룩을 넣어 버무려 두었다가, 밑술 이 되면 찹쌀밥과 가루누룩을 넣고 버무리고, 송순을 켜켜 두었다가 삼칠일이 되면 위를 걷어내고 백소주를 부어 이칠 일이 지나 맛이 들면 마시는 술이었다.
(6)양념류
양념류로 노가재공댁본은 간장 1종, 집장 1종, 고추장 1종, 식초 2종으로 총 5종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고추장은 3회 기 록되어 있었다. 간장은 청장법이라 하였는데, 특히 송도법이 라 하여 송도지역에서 비법을 기록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본 에서는 청장과 집장 만드는 법만 기록되어 있고, 식초를 만 드는 법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먼저 청장을 만드는 법은 ‘메주 1말:물 1동이:소금 5되’의 비율로 담아 그늘에 두었다가 맛이 달고, 소금 맛이 덜해지 면 위에 낀 ‘니불’을 걷고, 시루에 받쳐서 “간장만 뭉근한 불 에서 양이 삼분지일이 되도록 달여야 빛이 곱고 두어도 상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1/3이라는 수학적 표현을 한 것이 이채로운데 당시 조선은 청나라로부터 수학책이 들어와 방 정식을 공부한 것으로 생각된다. 간장을 담그는 시기는 9~10 월이 좋고, 극한(極寒)과 극열(極熱)에는 못 담근다고 하였다. 마지막에 “찌꺼기는 소금 섞어서 띄워 먹는다.”고 하여 된장 을 만드는 법까지 설명하였다. 즙장은 7월 보름이 지난 망후 (望後)에 메주를 만드는데, 찐콩 1말:밀기울가루 3말:물:누룩 2되’를 섞어 쪄서 나른하게 찧어 북나무 잎을 놓아 띄운다. 항아리에 이 메주가루 1말, 소금 3홉, 말린 가지와 외, 동아 와 박을 틈 없이 넣고, 가지 잎으로 위에 여러 번 덮고, 유지 로 싸매고, 솥뚜껑을 덮고, 흙을 바른다. 두엄 가운데를 헤쳐 풀을 베어 덮고 항아리를 드려놓아 발효를 시킨다. 6~7일 정 도 걸리는데, 이때 두엄의 온도가 중요하였다. 그래서 ‘두엄 이 삭거나 마르거나 하면 낮에 여러 번 물을 길어 두엄 위에 부으면 쉽게 뜬다.’고 하였다. 즙장을 만드는 시기는 「Eumsikchaek (음식책)」(Danyangdaeg 1800s)은「Jusikbangmun (주식방문)」과 같이 7월이었으나,「Eumsigbangmun (음식방문)」(Cha & Yu 2014)은 8월,「Onjubeob (蘊 酒法)」(Anonymous the late 1800s)에서는 4-5월에 한다고 하여 차이를 보였다. 메주를 띄울 때「Onjubeob (蘊酒法)」 (Anonymous the late 1800s)에서는 닥나무를 이용하는 것이 달랐다.「Eumsigbangmun (음식방문)」(Cha & Yu 2014)에 서는 메줏가루 외 말린 채소를 넣을 때 풋고추, 마늘, 생강 등을 더 추가하였으며, 항아리에 재료를 넣고 두껍게 덮는 과정에서 콩잎을 사용하였다.<Table 5>
고추장은 처음 기록에서는 ‘굵은 메주가루 1말:고춧가루 3 홉반:콩가루 3되:깨소금 3되:소금 2되가웃’을 넣어 만드는데 질고 되기는 상인의 된콩죽 만치 하면 좋다고 하였다. 두 번 째 고추장 기록에서는 처음의 레시피가 마땅하지 못했는지 먼저 “고초장 이 법이 나으니라”라고 하며 ‘메주가루 1말:고 춧가루 7홉:콩가루 2되:깨 5홉:후춧가루 1술:꿀 3홉:찹쌀가루 7홉’의 비율로 만들면 좋다고 하였다. 깨의 양이 1/6으로 줄 면서 꿀과 찹쌀이 더 첨가된 배합비이다. 세 번째 기록에서 는 ‘메주 1말:기름 2되:후춧가루 5홉:천초 1홉:포육가루:고춧 가루는 짐작하여’ 넣어 간장물로 반죽하여 담는다고 하여 앞 의 두 가지 방법과는 달리 포육가루가 들어간 별미고추장을 만드는 방법이었다. 고추장 만드는 법을 세 번이나 기록했지 만 기록된 음식에서는 문주를 만드는 법에서만 고추장이 활 용되었다.
식초는 대추초와 도라지초를 만드는 법이 기록되어 있었 다. 대추초는 먼저 초를 담갔던 항아리에 반만 익은 대추를 넣고 물을 잠길 만큼 붓고 손으로 눌러보아 밥 안치듯이 손 등에 물이 오르게 하여 싸매어 둔다. 여러 날이 되어 골마지 가 끼이고 쉰내가 나기 시작하면, 대추 3되:쌀 1되로 밥을 지 어 식힌 후 누룩 1되를 섞어 술을 빚는다. 술이 괴어 멀겋게 되면 대추 1되를 더 넣어 만들었다. “오랜 두면 가라앉아 맑 으며, 시고 좋다.”고 하였다. 식초를 뜨고 나서 또 맑은 술 붓고 후주(後酒)도 있으면 부어 쓰다고 한 것으로 보아 완성 된 대추초 항아리에 후주가 생길 때마다 계속해서 이용한 것 으로 짐작된다. 도라지초는 껍질을 벗겨서 말린 도라지에 노 랗게 구운 누룩 3~4조각, 대추 1줌을 넣고 술을 가득 부어 삼칠일을 두었다가 보면 식초가 된다고 하였다.
2)식품 및 그 가공품
「Jusikbangmun (주식방문)」에 기록된 곡류는 백미, 쌀 또 는 떡쌀을 포함한 멥쌀이 가장 많았고, 찹쌀, 가을보리 등이 사용되었다. 곡류 가공품으로는 흰죽, 흰떡, 찹쌀가루, 심, 밀 가루, 밀기울, 녹말, 수면, 국수, 누룩, 엿기름이었다. 밀가루 는 밀가루, 진가루, 진말 등으로 혼용되어 표기되어 있었다. 밀가루는 콩국수, 편수, 수교의, 연약과, 약과 등의 주재료로 쓰였고, 붕어찜, 양찜, 물가지찜, 송이찜, 금화탕, 잡산적 등 의 부재료로 사용되었다. 누룩은 누룩가루과 섬누룩으로 기 록되어 있었다. 서류로는 토란이 유일하였다. 두류는 콩과 팥 이 있었고, 이를 이용한 메주와 두부가 이용되었다. 채소류 는 외, 동아, 무, 생강, 마늘, 파, 미나리, 숙주, 배추, 무, 호 박, 가지, 고추, 박 등이 있었다. 외와 동아는 늙은 외와 젊 은 외 또는 연동아 센동아 등으로 표현되어 과채의 숙성정 도에 따른 쓰임에 차등을 둔 것을 알 수 있었다. 외는 노가 재공댁본에서 청과장, 청지히, 외침채, 가지외지, 과동외지, 물외지이 등의 주재료이며, 즙지히나 생치김치의 부재료로 사용되어 당시 침채류의 중요한 재료임을 알 수 있었다. 청 과장용은 어린 외를, 청지히용은 8월 20일경의 외를, 물외지 이용은 찬이슬 맞은 외를, 과동외지는 겨울을 나기 위한 늦 가을의 외를 이용하여 외가 열리기 시작하는 여름부터 늦가 을까지의 외를 시기별로 다양하게 이용한 것을 알 수 있었 다. 동아는 전동아찜, 동아선, 겨자선, 동아정과 등에 이용되 었다. 배추는 배추선이나, 찜이나 만두의 부재료로 활용되었 다. 박과 호박은 말려서 오가리로 이용하였으며, 고추는 실 고추로도 활용되었다. 파, 마늘, 생강, 미나리 등의 향신채소 의 사용이 빈번하였다. 버섯류로는 송이, 석이, 표고가 이용 되었다. 송이찜을 만들 때의 송이는 동자송이라 하여 덜 자 란 어린 송이를 이용했다. 과실류로 대추, 밤, 살구, 앵두, 산 사, 오미자, 잣 등이 있었다.
수육류로 소고기, 돼지고기가 이용되었는데, 살코기뿐만 아 니라 소의 골이나 간, 양 그리고 돼지의 새끼집 등과 같은 부산물도 많이 이용되었다.「Jusikbangmun (주식방문)」에 는 소의 양을 이용한 찜이 세 가지나 설명되어 있다. 조리법 도 유사하여 손질한 양에 닭을 넣고 감싸서 무르게 고는 형 태인데, 부재료의 종류에 따라 음식명을 달리하고 있다. 소 의 위는 4개의 주머니로 되어 있다. 양은 그 첫 번째 위이다. 소위의 약 80%를 차지하기 때문에 부피가 크다. ‘깃머리’ 또 는 ‘양깃머리’는 양을 받치고 있는 근육조직으로, 거칠고 단 단한 근섬유다발이다. 탄력적인 결체조직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 쫄깃한 식감과 풍미가 있다. 양은 국이나 탕에, 얇게 썬 양깃머리는 구이용으로 사용되었다.「Donguibogam (東醫寶 鑑)」(Literature of Dongui ed. 2012)에는 양이 기운을 돋우 고 비장과 위를 튼튼하게 한다고 하였는데, 단백질 함량이 높아 예로부터 보양이나 치료식으로 애용되었다.「Goryusa (高麗史)」에서도 소의 양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시 대 유생들은 원기 회복을 위해 양즙이나 양탕, 양찜 등을 즐 겨 먹었다고 한다(Ju & Kim 2012). 저편, 저육장방, 북경시 시탕은 돼지고기를 주재료, 굴탕, 북경분탕, 간막이탕, 청어 소탕, 열구자탕, 국수비빔, 냉만두, 냉면, 떡볶이는 부재료로 활용한 음식이었다. 조육류는 닭고기와 꿩고기가 이용되었는 데, 천초계, 그저초계탕, 오계찜, □□계법, 칠계탕, 닭탕법, 금화탕, 닭회, 칠영계, 진주탕 등은 닭고기를 주재료 활용하 였고, 붕어찜, 간막이탕, 양찜하는 법, 열구자탕, 간 지지는 법에서는 부재료로 이용되었다. 꿩고기는 생치김치, 생치만 두, 생치찜으로 이용하였는데, 붕어찜, 게탕, 진주탕, 열구자 탕 등의 부재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달걀은 난느르미에는 주재료로, 기타 다양한 음식에서 전을 부치기 위한 부재료나 고명용 지단으로 사용되었다. 어패류로는 붕어, 청어, 게, 굴, 해삼, 전복 등이 이용되었는데, 청어는 청어알과 이리도 사 용되었다.
양념류로 간장, 소금, 고추장, 꿀, 흑당, 조청, 천초, 후추, 기름, 참기름, 후춧가루 등이 사용되었다. 간장은 ‘지령, 초지 령, 지령물’ 등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기름은 ‘길럼, 기람, 길 람’ 등으로 혼용되어 표기되어 있었다. 또 양념, 갖은양념, 초 간장, 초장, 양념간장, 유장 등의 복합양념장과 소금물, 장국, 간장국, 젓국, 깻국, 가루즙 등도 기록되어 있었다.
3)조리법
「Jusikbangmun (주식방문)」에 기록된 조리방법 중 이물 질을 제거하기 위한 세척방법으로는 ‘씻다, 헹구다, 닦다’와 같은 표현이 있었다. 침지하는 방법에는 ‘담그다, 불리다, 우 리다’ 등이 있어 이미(異味)나 이취(異臭)를 제거하거나 핏물 이나 염분기를 없애는데 이용되었다. 써는 방법으로 ‘썰다, 자르다, 채치다, 저미다, 베다, 두드리다, 오리다, 긋다, 찢다, 뜯다, 가르다, 다지다, 이기다, 깎다, 뜨다’의 표현이 있었다. 썰 때는 ‘가늘게, 팥알만큼, 모나게, 곱게, 굵게, 갸름하게, 넙 죽넙죽, 어슷하게, 납작납작, 손가락 길이만큼, 얇게, 돈짝만 큼, 나른하게, 조각조각, 가장자리를, 열십자로, 실같이’ 등과 같이 크기나 모양을 설명하였다. 닭고기나 꿩고기의 경우 두 다리를 분리하는 방법으로 사지를 뜬다고 하였다. 교반과 혼 합을 위해서는 ‘섞다, 젓다, 풀다, 합하다, 만두소 만들다, 반 죽하다, 버무리다, 주무르다’ 등의 표현을 사용하였다. 분쇄 를 위해서는 ‘가늘게 갈다, 백세작말하다’ 등으로 표현하였 다. 모양을 만들기 위해 ‘빚다, 집는다, 주름잡다, 엉기게 하 다, 굳히다, 뭉치다, 쥐다, 꿰다’ 등의 표현이 있었는데, 떡이 나 만두, 메주를 만들 때의 모양을 설명하였다. 압착과 여과 를 위해서 ‘체치다, 거르다, 밭치다, 찧다, 물기를 빼다’ 등이 있었다. 차게 식히기 위해 ‘싸늘하게, 얼음 같이’와 같은 표 현이 있었다. 냉만두는 여름에 먹는데 얼음에 차게 식힌다고 하여 여름철 얼음을 이용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서울에 서빙고(西氷庫)와 동빙고(東氷庫)가 있었다. 서빙고의 얼음은 왕실과 고급 관리들에게 나누어주는 용으 로, 동빙고는 왕실의 제사에 필요한 얼음을 공급용이었다. 당 시 얼음 채취는 매년 1월 소한과 대한 사이에 뚝섬 근처에 서 주로 이루어졌다. 석빙고에 넣어둔 얼음은 양력 3월 말인 춘분(春分)일에 개빙제(開氷祭)를 열어 출하했는데, 「Kyungkukdaejeon (經國大典)」 <예전(禮典)>의 ‘반빙(頒氷)’ 조에는 얼음의 공급 및 사용처를 법규로 규정하고 있었다. 얼음은 음력 6월에 여러 관사와 종친 및 정3품 이상 관리, 내시부의 당상관, 70세 이상의 퇴직당상관에게 얼음을 나누어 주었다. 또한 활인서의 병자들과 의금부, 전옥서의 죄수들의 건강을 위해서도 지급하였다. 얼음을 받은 개인은 단기간 얼음을 보 관할 창고를 두고 제사 등에서 사용했다(Kim 2011). 18세기 영정조 시대 이후에는 물동량의 왕래가 많았던 한강변을 비 롯하여 전국 각지에 생선 보관용 얼음을 공급하던 개인 빙 고가 존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미를 위해 ‘양념하다, 치다, 타다, 붓다, 말다’와 같은 표 현이 있었으며, ‘꿀을, 기름을. 간장을, 장국에’ 등으로 구체 적인 조미료를 나타내는가 하면, ‘삼삼하게, 간간이, 슴슴하 게, 간맞추어, 염담이 맞거든, 알맞게, 맑게, 밀가루를 걸게, 넉넉히’ 등으로 간의 정도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 외의 표 현으로 ‘쓿다, 깨다, 굴리다, 호다, 끼얹다, 덮다, 곁들여 담 다, 바르다, 걷다, 괴다, 일다’ 등이 있었다. ‘쓿다’는 곡식을 찧어 겨층을 벗기고 도정하여 깨끗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호다’는 소양을 이용한 조리에서 닭이나 부재료를 양으로 쌀 때 바늘을 이용하여 꿰매는 표현으로 쓰였다. ‘괴다’나 ‘일 다’는 술을 빚을 때 알콜 발효의 정도나 증편을 만들 때 기 주에 의한 부피 팽창에서 쓰였다.
가열조리법은 습열조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습열조리 방 법에는 식품에 물을 부어 가열하는 ‘고다, 달이다, 끓이다, 데 치다, 삶다, 쑤다, 짓다, 졸이다’가 가장 많았고, 찌거나 중탕 을 하기도 하였다. 습열조리이나 ‘익히다’라고만 기록되어 있 는 경우도 있었다. 건열조리는 소량의 기름을 이용하는 지지 는 방법이 가장 많았고, ‘부치다, 볶다, 굽다’ 등의 방법을 활 용하였다. 저육장, 배추선, 동아선 등을 만들 때 주재료를 볶 기 위해서는 번철이나 솥을 먼저 달군 후 ‘기 조곰 스쳐 잠간 복가’처럼 기름을 두르는 표현을 ‘스치다’라고 한 것이 특징이었다.
4)계량도구와 조리기구
계량은 부피, 무게, 길이, 수량 단위 등이 있었다. 부피 계 량의 도구로는 홉, 되, 말, 술(숟가락), 종지, 중발, 탕기, 양 푼, 동이, 병 등이 있었다. 홉은 합(合)으로도 부르며, 180 mL 정도의 부피이다. 1되(升)의 1/10에 해당되며, 곡식, 가 루, 액체 등을 재는 단위로 쓰였다. 되는 국립중앙도서관본 에서는 식되와 장되가 있었다. 식되는 가정에서 곡식을 될 때 쓰는 작은 되로 가승(家升)이라고도 한다. 장되는 시승(市 升)이라고도 하는데, 시장에서 곡식을 판매할 때 쓰는 용도 로 관아에서 공인된 낙인을 찍은 것을 말한다(NAVER 2016). 1말(斗)은 18리터 정도의 부피로, 1섬의 1/10에 해당 되는 양이다. 땅을 세는 단위인 마지기는 1말의 씨앗을 뿌려 농사를 지을 만한 넓이의 땅을 말한다. 말의 정확한 양은 시 대에 따라 변하여 왔는데, 백제 근초고왕 당시에는 1말이 약 2리터였다고 한다(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2016). 중발(中鉢)은 조그마한 주발인데, 수량을 나타내는 말 뒤에 쓰여 액체의 분량을 세는 단위로 쓰였다. 양푼은 음식을 담 거나 데우는 데에 쓰는 놋그릇으로, 운두가 낮고 아가리가 넓어 모양이 반병두리 같거나 더 컸다. 동이는 아가리가 넓 고, 둥글고 배가 부르며, 양옆에 손잡이가 달린 질그릇이나 오지그릇을 말한다. 물을 길어 나르므로 흔히 물동이라고도 부른다. 크기는 대두(大斗) 1말들이가 보통이어서 액체를 셈 하는 기준도 되었다(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2016).
냥은 무게 단위로 사용되었고, 길이 단위로는 치와 푼이 있었다. 치는 촌(寸)이라고도 하는데, 미터법으로 약 3.03 cm 에 해당한다. 1치의 10배가 1자(尺), 즉 30.3 cm가 된다. 분(分) 또는 푼은 도량형에서 가장 작은 단위인 1/10을 의미했다. 길 이의 단위로 쓰일 때 1치는 10푼이었다(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2016). 기타 수량을 나타내는 단위로 개, 줌, 보, 마리 등이 쓰였다. 줌은 수량을 나타내는 말 뒤에 쓰였 는데, 주먹의 준말이다. 즉 한 손에 쥘 만한 분량을 세는 단 위이다.
조리도구와 기구 중 식기는 종지, 행기, 열구자그릇, 질소 라, 놋그릇이 사용되었다. 행기는 놋쇠로 만든 그릇을 의미 한다. 일반조리도구로는 숟가락, 칼, 체, 깁체, 어레미, 굵은 체, 베거미, 시루, 증편테 등이 사용되었다. 체는 메쉬(mesh) 의 크기에 따라 가장 고운 깁체, 굵은 어레미 등이 구분되어 사용되었다. 깁체는 깁으로 쳇불을 메운 체이다. 깁은 명주 실로 바탕을 조금 거칠게 짠 비단을 말하는데, 발이 가늘어 서 고운 가루를 치는 데 사용되었다. 어레미는 그물모양으로 성기게 짠 구멍이 굵은 체를 말한다. 베거미는 산자를 할 때 찹쌀바탕을 튀기는 튀김망으로, 베보자기 양쪽에 대나무 막 대기를 걸어 사용하는 도구이다. 유사한 것으로 「Gyuhabchongseo (閨閤叢書)」(Jung YW ed. 1987)에서는 굵은 베 1척 1폭을 네 귀를 매서 싸리로 맨 ‘부득이’를 사용한다고 하 였다. 가열도구로는 새옹, 노구, 통노구, 솥, 솥뚜껑, 번철 등 이 이용되었다. 새옹은 놋쇠로 만든 작은 솥으로, 배가 부르 지 않고, 바닥이 편평하며, 전과 뚜껑이 있다. 흔히 밥을 지 어서 그대로 가져다가 상에 올려놓는다. 노구는 놋쇠나 구리 쇠로 만든 작은 솥으로, 자유롭게 옮겨 따로 걸고 쓸 수 있 는 것이 특징이다. 번철(燔鐵)은 전을 부치거나 고기 따위를 볶을 때에 쓰는데, 솥뚜껑처럼 생긴 무쇠 그릇이다.
쟁반과 왜반은 운반도구이다. 쟁반(錚盤)은 운두가 얕고 동 글납작하거나 네모난, 넓고 큰 그릇이다. 목재, 금속, 사기 따 위로 만들며 보통 그릇을 받쳐 드는 데에 쓰였다. 왜반은 일 본사람들이 쓰던 짧은 다리가 달린 소반의 일종을 말하는 것 인지, 나무나 쇠붙이 따위를 둥글고 납작하게 만들어 칠한 예반의 오기인지는 알 수 없다. 저장용 보관도구로 항아리, 독, 버들그릇, 방구리 등이 있었다. 버들그릇은 키버들을 엮 어서 만든 것이다. 버드나무 중 강가 물이 들락거리는 '개'에 서 잘 자라는 갯버들과 비슷한 종류로, 털이 없고 가끔 마주 보기로 달리는 잎이 섞여 있는 키버들이 있다. 이 키버들은 고리버들이라고도 하는데, 쉽게 휘고 질긴 것이 특징이다 (Kim 2013). 우리 선조들은 키버들 가지를 엮어서 옻상자(고 리), 키, 광주리, 동고리, 반짇고리 등의 생활용품을 만들어 썼다. 방고리는 주로 물을 긷거나 술을 담는 데 쓰는 질그릇 으로, 모양이 동이와 비슷하나 좀 작았다. 그 외 메주나 누 룩을 띄우거나 효율적인 조리를 위해 삼베로 만든 보자기인 베보, 헝겊, 행주, 유지, 구리돈, 주석, 자물쇠, 수수대, 싸릿 대, 바늘, 돌, 거적, 헌 멍석 등이 역할을 하였다.
IV.결론 및 요약
「Jusikbangmun (주식방문)」이라는 책이름으로 전해지는 한글음식조리서는 노가재공댁본과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이 있다. 노가재공댁본은 유와공종가의 유품으로 출처가 명확한 데 비해 저자나 저술연대가 불분명하고, 국립중앙도서관본은 저자는 미상이지만, 정미년 이월에 베껴 썼다고 하여 저술시 기가 명확한 것이 특징이었다. 기록된 양으로는 노가재공댁 본이 두 배 정도 많은 분량이고,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은 그 내용의 85.42%가 노가재공댁본과 같았다. 다만 두 책에 는 각각 술이 6종씩 기록되어 있었는데 하나도 겹치지 않았 다. 기록된 한글로 보아 노가재공댁본이 더 앞선 것으로 생 각되나, 국립중앙도서관본이 노가재공댁본을 보고 베꼈는지 는 단언할 수 없다. 노가재공댁「Jusikbangmun (주식방문)」 에는 총 104종의 음식이 118회, 국립중앙도서관본은 총 50 종의 음식이 51회 기록되어 있었다. 본문의 내용은 침채류, 양념류, 찬물류, 과정류 등의 기술 순서가 일관되지 않아 필 자가 틈틈이 생각나는 대로 기록한 것으로 보였고, 음청류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조리법으로는 특히 찜이 많았다. 식품 으로 닭고기를 주재료로 한 음식이 10가지로 가장 많았고, 부재료로도 애용되었다. 그 외 동물성식품으로는 돼지고기와 꿩고기가, 식물성 식품으로는 파, 생강, 외, 동아가 많이 쓰 였다. 노가재 연행록의 영향인지 두 책 모두 북경시시탕과 북경분탕과 같이 청나라에서 경험한 음식이 기록되어 있었 고, 노가재공댁본에서는 청장송도법, 연약과 수원법 같은 향 토음식이 언급된 점으로 보아 다른 지역의 음식을 수용하고, 적극 활용하여 식생활에 반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반가의 조리서에는 없는 간막이탕이나 냉만두가 기록되어 있 었는데, 간막이탕은 궁중잔치에 쓰였던 음식으로 궁중음식과 교류를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계탕이나 닭회는 접빈객을 위한 좋은 술안주임을 강조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 본에서는 부피 측정을 위한 도구인 되를 식되나 장되로 정 확히 구분하여 재료배합비를 정확히 기록하려는 노력을 하 였다.
노가재공댁본과 국립중앙도서관본의 「Jusikbangmun (주 식방문)」은 1800년대 이후 조선의 음식문화를 잘 보여주는 음식조리서였다. 19세기 초반「Gyuhabchongseo (閨閤叢書)」 이후 음식조리서들은 비슷한 내용들을 서로 베껴가며 조리 법을 계승 전수하려는 노력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4종의 이본이 있지만 그 내용이 다른「Eumsigbangmum (음식방문)」 과는 달리「Jusikbangmun (주식방문)」은 상당히 많은 내용 이 공통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