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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225-7060(Print)
ISSN : 2288-7148(Online)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Food Culture Vol.31 No.1 pp.51-63
DOI : https://doi.org/10.7318/KJFC/2016.31.1.051

Food Culture of Tomb of An-Ak No. 3 in Koguryo Dynasty

Kyung-Hee Koh,
Department of Food Science and Nutrition, College of Human Ecology, The Catholic University of Korea
Kyung-Hee Koh, Department of Food and Nutrition, The Catholic University of Korea, 43-1, Gibong-ro, Wonmi-gu, Bucheon-si Gyeonggi-do, 14662, Korea Tel: 82-2-2164-4313 Fax: 82-2-2164-6583 E-mail: verokoh@catholic.ac.kr
January 29, 2016 February 25, 2016 February 26, 2016

Abstract

The aim of this study was to investigate food culture represented by the grain yard, water well, kitchen, and meat storagespace which were depicted in the mural painting of An-Ak tomb No. 3. The mural paintings of An-Ak tomb No. 3 were compared with those of ancient Chinese tombs before the 4th century in order to understand their characteristics. Above all, the tomb murals describe the form and function of the stove (buttumak) as well as the cuisine using the cauldron (sot) and steamer (siru) in a very interesting manner. The meat storage space of An-Ak tomb No. 3 shows whole carcasses of animals such as roe deer, dog, and pig. However, Chinese murals show that while small animals such as soft-shelled turtle, fish, chicken, duck, pheasant, rabbit, etc. were stored as whole carcasses without being cut into pieces, large animals such as cows and pigs were slaughtered and each piece of their carcasses such as the head, thigh, meat loaf, and cardiopulmonary part was separately depicted. These tomb murals vividly describe the food culture of Koguryo and China before the 4th century.


고구려 안악3호분의 음식문화

고 경 희,
가톨릭대학교 생활과학대학 식품영양학전공

초록


    I. 서 론

    고구려인은 원래 부여인의 한 갈래로 부여국의 권력에 반대하여 오랫동안 투쟁하다가 남쪽으로 이동하여 고조선령의 산간지역인 훈강상류 지방에서 독립적인 세력을 이루고 살았다. 고조선이 멸망하고 한무제(漢武帝, 142BCE-87CE)가 일부 지역에 한사군(낙랑樂浪·임둔臨屯·진번眞蕃·현도(玄菟)을 설치하자 고구려는 외래침략자를 반대하는 힘겨운 투쟁을 하였다. 기원전 1세기에 동가강 유역의 환인지역에 있던 흘승골성을 도읍으로 정하였고, 이후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 고구려(1BCE-668CE)는 국가체계를 갖추기 시작한다(Sawoekwahakwon Gogohak Yeonguso 1975).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와 역량을 가진 고구려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대륙으로 진출하여 중국의 고대 중원 국가 및 북방민족과 끊임없이 경쟁하면서 광활한 영토를 개척해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고구려는 이들 나라의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고 중국의 서역과의 문화적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Hwang 2007). 고구려 벽화무덤의 첫 발굴은 1949년부터 시작되었고, 특히 안악3호분은 영화(永和)13년으로 375년의 절대연대를 가지고 있는 고구려 초기의 고분이다. 그동안 안악3호분의 주요 관심사는 피장자에 관한 연구로 미천왕능설(Kogohak·Minsokhak Yeonguso 1957; Sawoekwahakwon Gogohak Yeonguso 1975)과 동수(冬壽)묘설(Chhae 1967)의 학설이 대두되었다. Kim(1978)은 이 두 학설을 중심으로 역사적 논쟁의 근거들을 자세하게 제시하였다. 그 이후 피장자에 관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되었다. 먼저 Lim(1995)은 안악3호분의 묵서명을 검토하여 동수묘설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동수는 전연(前燕, 337-370CE)시기 모용씨(慕容氏)의 휘하에서 고위관직을 역임하다가 내분에 의하여 336년에 고구려로 망명하였다가 357년에 사망한 동수라고 하였다. 다음은 안악3호분 주인공의 절(節)에 관한 연구에서 절은 고대 중국에서 황제나 군왕의 신임을 나타내는 일종의 신표(信標)로 사용되었던 물건이다. 안악3호분의 대행열도 벽화에는 주인공이 수여받은 절이 그려져 있고, 이는 주변에 자신을 과시하려는 의도를 알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무덤의 주인공은 고구려의 왕으로 판정하기 보다는 묵서의 주인공인 동수묘설을 피력하였다(Kong 2001). 그리고 안악3호분 주인공의 복식과 두식(頭飾)에 관한 연구에서 한·위진남북조(漢·魏晉南北朝)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피장자는 낙랑지방에 잔존한 토착 한인계 호족의 묘일 수도 있다는 의견 을 제시하였다(Chun 2002).

    고구려 음식문화의 선행연구로 먼저 Lee(1992, 1999)는 고대인의 음식재료, 조리와 가공, 식사풍습을 중심으로 풍속, 역사, 문화의 영역을 아우르는 연구들이 있다. Joo(2003)는 안악3호분, 약수리고분, 무용총, 각저총을 중심으로 일상생활, 연회식사, 취사시설과 자비용기의 특성과 조리방법 등을 이성우의 연구 등과 연결하여 필자의 논지와 함께 고구려 음식문화에 대한 다양한 시사점을 제시한 논문으로 의의가 있다. 다음으로 Kim(2010)은 집안(集安)권과 평양(平壤)권에 분포된 고구려 12기의 고분의 주택구조, 부엌의 취사시설의 부뚜막, 식사장면 등을 중심으로 비교하였다. 두 지역의 두드러진 식사풍습으로 집안 지역은 높은 의자에 앉는 입식(立式)과 평양·안악 지역은 좌식(坐式)의 두드러진 차이를 지적하였다. 이와 같이 집안지역의 입식용 의자는 중앙아시아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4-5세기의 고구려는 중국뿐 아니라 서역의 다양한 문화를 지리적 환경에 알맞게 수용하고 융합하여 두 지역의 식사풍습의 이원화된 특성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Jeon(2013)은 14기의 집안권과 10기의 평양권에분포된 고분벽화와 유물, 농기구, 곡류와 조리와 식사 등 광범위한 영역의 연구들을 종합하고 4-6세기의 고구려의 음식문화를 시도하였으나 자료의 한계성으로 고구려의 생활문화권 사이에 존재하는 음식문화의 차이와 특성을 규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하였다. SaGong(2013)은 고구려의 식생활 연구에서 고분벽화와 식생활, 고고학 자료를 통하여 남한지역 고구려 관방 유적을 아우르는 연구를 하였다. 이상과 같이 고구려의 고분벽화와 음식풍속에 관한 선행연구는 주로 집안지역과 황해도·평양지역 그리고 남한지역의 고구려 관방 지역의 특성을 비교하는 연구들이며 고구려의 음식을 중심으로 다룬 연구는 극히 드물다.

    본 연구에서는 사신도(四神圖)가 전혀 없는 일상생활이 주로 기록된 고려 초기 고분인 안악3호분의 음식과 관련된 공간인 방앗간, 우물, 부엌, 발굴유물인 그릇과 항아리류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안악3호분의 육고와 4세기 이전 중국의 방앗간, 부뚜막과 관련된 명기(明器)들 그리고 육고와 관련된 벽화를 중심으로 식용 육류의 종류와 가공방법을 비교하였다. 육고와 관련된 중국의 고분벽화는 산서성(山西省), 내몽고(內蒙古), 하남성(河南省), 요녕성(遼寧省)지역으로 고구려의 집안 부근 지역들이다. 이들 두 지역의 음식과 관련된 고분벽화를 통하여 부엌과 육고를 중심으로 안악3호분의 음식 문화적 특성을 해석하고자 한다.

    II. 연구 내용 및 방법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육고가 묘사된 고분은 안악3호분(황해남도 안악군, 375년), 태성리1호분(남포시 강서구역, 4세기후반), 팔청리벽화분(평안남도 대동군, 5세기 전반), 마선구1호분(중국 길림성 집안현, 5세기 전반)이 있다. 태성리1호분은 안악3호분과 같이 부엌의 부뚜막과 육고에 걸린 고기와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일부만 남아있다. 팔청리 벽화분은 육고와 이층 창고가 있다. 육고에는 여섯 마리의 꿩이 걸려있다. 마선구1호분에는 고상식 창고가 있다(Kim 2010; SaGong 2013). 안악3호분은 고구려 초기의 벽화로 절대연대를 가지고 있는 채색벽화로 4세기 이전의 앞선 시기인 중국의 서한(西漢, 206BCE-25CE), 신(新, 9-23CE), 동한(東漢, 25-220CE), 전연(前燕, 337-370CE) 시기의 고분벽화와 비교하여 안악3호분의 부엌과 육고를 중심으로 해석하였다. 연구방법으로 첫 번째 안악3호분의 고분벽화와 유물에 관한 내용은 평양의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의「안악3호분 발굴보고」과 사회과학원 고고학 연구소의「고구려 문화」를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두 번째로 고구려와 관련된 음식관련 자료는「삼국사기(三國史記)」, 이성우(李盛雨)의「한국식품사회사(韓國食品社會史)」, 「한국요리문화사(韓國料理文化史)」와 강인희(姜仁姬)의「한국식생활사(韓國食生活史)」그리고 시노다오사무( 田統)의 저서를 번역한 윤서석(尹瑞石)의「중국음식문화사」등의 선학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고구려 음식문화를 해석하였다. 세 번째로 이성우는 고려이전 까지 한반도에는 요리와 관련된 서적이 없으므로, 중국의 자료를 참고하여 우리의 음식문화를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의「중국출토벽화전집(中國出土壁全集)」에서 4세기 이전 중국의 육고와 관련된 벽화를 선정하였다. 이들 벽화는 산서성, 내몽고, 하남성, 요녕성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고분 벽화에 관한 설명은 원본에 충실하였으며, 다만 간체는 번체로 전환하여 정리하였다.

    III. 결과 및 고찰

    1. 고구려의 안악3호분벽화

    안악3호분은 봉토석실분으로 1949년 황해도 안악군 유설리(黃海道 安岳郡 柳雪里)에서 발굴되었으며, 고국원왕 영화13년(357년)의 절대연대를 가진 고구려 초기 고분이다. <Figure 1>은 안악3호분의 평면도이며, 전실의 제3벽에는 장하독(帳下督)이 그려져 있고, 그 왼편 장하독 위에는 동수의 묘지(墓誌)로 보이는 묵서가 기록되어 있다. 서측실의 서벽 중앙인 제6벽의 묘주는 귀면을 그린 털 부채를 들고 붉은 줄이 내려 친 합임(合)으로 된 장의(長衣)를 입고, 머리에는 평편한 흑책(黑) 위에 뒷부분이 우뚝 솟은 흰 덧관을 쓰고 좌상(坐床)에 앉아있다. 제5벽에는 묘주 부인초상이 그려져 있다. 동측실의 좌벽에는 무덤주인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마구간(서벽, 제14벽), 외양간(남벽, 제15벽), 육고(肉庫)와 부엌(동벽, 제16벽), 우물(북벽, 제17벽)과 방앗간(서벽, 제18벽) 등이 그려있다(Kim 2001).

    1) 방앗간

    방앗간에는 발로 디디어 곡식 등을 찧는 디딜방아가 그려져 있다. <Figure 2>는 안악3호분의 방앗간을 묘사한 벽화로 땅에 돌확이나 나무로 된 확을 묻고 나무채의 한 끝에 공이가 달려있다. 공이가 달리지 않은 한 끝을 발로 밟았다 놓았다 하면 공이가 확으로 떨어져 빻아지도록 되어 있어서 절구 보다 기능적이다(Yoon 2002). 중앙에는 붉은 글씨로 “대(碓)”라고 표시되어 있다. 왼쪽에 있는 여인은 자갈색(赭褐色)의 윗옷을 입고 디딜방아를 찧고 있으며, 오른쪽에 있는 여인은 붉은색 계통의 윗옷을 입고 키질을 하고 있다. 아래 옷은 불분명하다. 두 여인은 모두 가체(加髢)한 머리를 얹고 있다. 방아의 형태는 디딜방아로 보이며, 방아의 확은 네모난 돌에 둥근 확을 판 것으로 되어 있다(Kogohak·Minsokhak Yeonguso 1957; Jeon 2004).

    한대(漢代, 206BCE-220CE)의 명기(明器)인《녹유마방(綠釉磨房)》은 1928년 하남성 민향현(河南省 閔鄕縣)에서 출토되었다. 마방은 대(碓)와 마(磨) 등의 기구로 곡식을 빻는 공방을 가리킨다. <Figure 3>의 마방은 대방(碓房)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碓)는 발로 밟아서 올리고 다시 내리는 돌로 된 쌀을 찧는 기구이다. 마(磨)는 장건(張騫 BCE ?-114 BCE)이 서역에서 도입하였다. 오른쪽 앞에는 둥근 맷돌인 원마(圓磨)가 있고, 뒤에는 대가 있다. 그리고 농부 한 명이 대(碓)로 찧는 조작을 하고 있다. 이 공방은 사각형으로 삼면에는 벽이 있다. 특히 좌측의 두꺼운 벽은 풍차(風車)를 표현한듯하며, 농부 한 명이 조작을 하고 있고, 옆에는 강아지가 있다(National Museum of History 1996). 안악3호분에는 《녹유마방》에서 보이는 대(碓)로 찧는 조작을 하고 있다. 소수림왕 2년(372년CE) 진나라 왕 부견이 사신과 중 순도를 파견하여 고구려에 불상과 경문을 보내 왔으며, 소수림왕은 사신을 보내 답례로 토산물을 바쳤다. 태학을 세워 자제들을 교육하였다(秦王符堅, 遣使及浮屠順道, 送佛像ㆍ經文. 王遣使廻謝, 以貢方物. 立大學, 敎育子弟.「三國史記」第18卷 高句麗本紀六 小獸林王 二年). 일본 후쿠오카현 다자이후시(福岡縣 大宰府市)의 간제온사(觀世音寺)에는 고구려의 승려 담징(曇徵, 579-631CE)이 만들었다고 전하는 둥근 맷돌인 원마가 남아있다(Yoon 2002). 특히 사찰에서는 단백질의 공급을 두부에 의존하기 때문에 콩을 한꺼번에 많이 갈 수 있는 매우 큰 맷돌이 필요하였으리라 생각된다.

    2) 우물

    우물은 목책이 세워져 있고, <Figure 4>와 같이 우물가에는 여러 개의 큰 토기 물 항아리와 물 긷는 여인이 있고, 물을 퍼 올리는 용드레 우물이다. 우물 위에 ‘정(井)’자와 ‘아광(阿光)’이란 글자가 붉은 색으로 쓰여 있다. 이는 한반도 북서부 압록강 중류지역의 자강도(慈江道)일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우물이며, 네모진 우물 부근에 끝이 뽀족한 자배기 한 개와 큰 항아리 두 개가 있다(Kogohak·Minsokhak Yeonguso 1957; Jeon 2004). <Figure 5>에는 안악3호분에서 출토된 토기 항아리의 실측도와 사진들이 있다. 큰 것은 구경이 9.7 cm, 높이 23.3 cm, 허리의 직경은 26 cm, 외저의 직경은 11.1 cm이다. 이 항아리는 붉으스름한 빛깔로서 배가불룩하고 어깨의 선이 은근하며 목이 잘록하고 아가리가 밖으로 퍼졌다. 중간크기의 항아리는 구경이 8.9 cm, 높이 21.5 cm, 허리직경은 22.4 cm, 외저의 직경은 11.3 cm이다. 빛깔은 검은 회색이며, 어깨에 선을 두르고, 위에는 사선을 총총 그었고, 그 위로 고수머리발 같은 중첩된 가는 선 무늬를 꾸불꾸불하게 휘여 돌렸다. 그리고 작은 것은 구경이 8.4 cm, 높이 19.6 cm, 허리직경은 20.1 cm, 외저의 직경은 12.7cm이다. 빛깔은 검은 회색이고 배가 약간 홀쭉하며 목이 다소 길다. 그리고 어깨문양은 두 줄의 평행선내에 중간 크기의 항아리와 같은 가는 선에 파상문이 휘여 돌려져 있다 (Kogohak·Minsokhak Yeonguso 1957). 안악3호분에서 출토된 항아리는 우물 왼편에 그려진 항아리와도 매우 유사하다. 안악3호분의 우물벽화에서 보이는 항아리 중에서 배가 넓고 입구가 좁은 두 개는 오늘날의 간장독의 형태가 유사하고, 보통 높이가 40 cm 이상으로 물·간장·된장·술을 담았을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장(醬)문화와 관련성을 나타내었다(Joo 2003). 안악3호분에서 출토된 항아리의 높이는 19.6-23.3 cm 으로 다소 작은 크기로 우물벽화에 있는 항아리의 형태는 장류 발효의 저장용기로 볼 수도 있으나 좀 더 자세한 관련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3) 부엌

    부엌은 <Figure 6>과 같이 약간 비스듬하게 골이 진 기와로 이은 집 한 채가 있고, 부엌 안에는 아궁이가 있다. 녹색 타일을 붙인 것 같이 보이는 전돌과 흰돌로 된 면이 있고, 연도(烟道)는 직각으로 구부러져 집 밖으로 나온 乙자형 연통으로 되어 있다. 한 여인은 녹유(綠釉) 칠한 시루 앞에 서서 큰 국자(勺)를 들고 있으며 왼 손으로는 막대를 시루 안에 넣으면서 요리를 하고 있다. 그리고 부엌의 오른 쪽에 있는 한 여인은 갈퀴달린 소반 위에 놓인 접시 같은 식기들을 정리하고 있으며, 탁상에는 그릇들이 포개어져 있다. 다른 한 여인은 아궁이 옆에 앉아서 불을 지피고 있다. 그리고 앞마당에는 두 마리의 개가 있고, 지붕에 는 새 한 마리를 그려져 있다. 음식을 만드는 부엌의 정경을 잘 나타내고 있다 (Kogohak·Minsokhak Yeonguso 1957; Koguryo munhwajun silheng wiwonhoe 1985). 안악3호분에서 출토된 토기 접시의 실측도와 보시기의 사진은 <Figure 7>에 제시하였다. 먼저 큰 접시는 직경이 21.6 cm, 높이는 3.3 cm, 외저(外底)의 직경은 3.2 cm이다. 중간 접시는 직경이 20 cm, 높이는 2.8 cm, 외저의 직경은 17.3 cm이다. 작은 접시는 직경이 19.8 cm, 높이는 1.8 cm, 외저에 굽 모양으로 된 턱이 없다.빛은 심회색이며 질은 견고하지 못하다. 안악3호분 벽화에서 부엌의 소반 위에 쌓아놓은 접시와 유사하다. 보시기는 형태가 똑같으며, 크기만 다소 다르다. 하나는 직경이 13.4 cm, 높이 4.5 cm, 외저 직경이 8.9 cm이다. 다른 하나는 직경이 13.8 cm, 높이 5.5 cm, 외저 직경이 9.2 cm이다(Kogohak·Minsokhak Yeonguso 1957). Joo(2003)는 부엌의 오른편에 있는 여인은 밥과 떡을 익히는데 필요한 부엌세간인 시루에서 쪄낸 떡을 고이는 있는 장면으로 오늘날의 시루떡과 흡사하다는 논지로 떡 문화와의 관련하여 해석하였다. 일반적으로 발굴된 실물 유물과 관련하여 해석하는 방법이 우선적이므로 본 연구에서는 발굴보고서의 논지를 수용하여 접시인 그릇이 쌓여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안악3호분의 음식 조리와 관련하여 먼저 주목되는 것은 부엌시설인 부뚜막의 형태이다. 부뚜막은 아궁이 위에 솥과 시루를 놓을 수 있는 확 하나만 뚫려 있다. 굴뚝 구멍이 뚫린 방향도 고구려의 것은 90o의 각을 이루고 있어 부뚜막의 아궁이와 반대편으로 나와 있다. <Figure 8>은 평북 운산군 동신면 용호동(平北 雲山郡 東新面 龍湖洞) 1호분에서 출토된 굴뚝이 달려있는 쇠로 만든 부뚜막으로 안악3호분의 부뚜막과 매우 유사하다. 아궁이와 굴뚝이 반대 방향에 놓인 구조가 고구려 부뚜막의 가장 큰 특징이며, 이는 난방의 효율을 높이고 굴뚝으로 들어오는 맞바람을 막아 불이 꺼지지않고 잘 순환되도록 고안되었다(Kim 2010). 솥과 시루는 주방의 기본 조리 기구로, 솥과 시루가 출현되기 이전에는 곡식을 가루로 찧어 토기에 넣어 죽처럼 끓여 먹는 일이 일반적이었다(Bokcheon Museum 2005). 고구려 대무신왕 시기인 3세기 초에 고구려는 솥에서 밥을 직접 조리하였음의 가능성을 간접적으로 추측할 수 있다. 안악3호분의 부엌벽화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쇠솥 위에 시루를 얹어 뜨거운 증기로 음식을 찌는 조리법이 묘사되어 있다. 이는 취사기구인 솥과 시루의 유물과 함께 다룬다면 조리의 변천을 밝힐 수 있으리라고 본다. 시루와 관련하여 주식의 조리방법이 죽에서 떡, 그리고 밥의 순서로의 변천과정에 관하여 좀 더 자세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논지를 밝혔다(Joo 2003).

    필자는 선행 연구를 근거로 안악3호분의 묘주는 동수묘설을 수용하는 입장이다(Lim 1995; Kong 2001; Chun 2002). 동수는 전연(前燕, 337-370CE)시기에 고위관직을 역임하다가 고구려로 망명하여 357년에 사망한 인물이라는 의미에서 전연시기의 음식문화와 관련된 벽화와 비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Figure 9>는 전연시기의《봉식도(奉食圖)》 모본이다. 1982년 요녕성 조양시 12대영자향 원대자촌(遼寧省朝陽市十二臺營子鄕袁臺子村)묘에서 출토하여 원지에 보존되어 있고, 모본은 현재 요녕성박물관(遼寧省博物館)에 있다. 우측에 있는 사람은 검은 머리띠인 흑책(黑)을 쓰고, 옷깃과 소매는 검은 색이고, 긴 바지를 입고 있다. 오른손에는 칼(刀)을 잡고, 몸을 기울여서 도마인 조안(俎案)에 놓인 음식을 자르는 모습이다. 도마 옆에 야채를 담는 사각형의 쟁반이 있고, 밑에는 준(樽), 괴(魁) 등의 그릇이 있다. 앞에는 세 줄의 잔으로 된 배반(杯盤)이 있다. 좌측 여자 한명은 부뚜막인 조(竈) 앞에서 일을 하고 있다. 부뚜막 위에는 가마솥인 부(釜)가 있고, 여자 뒤에는 오층으로 된 대나무 찜통 시루인 용체(籠)가 있다(Xu 2012, vol. 8).《봉식도》 에서 4세기의 전연시기에는 다섯 층으로 된 대나무 찜통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안악3호분의 토기 시루와 다르게 대나무로 엮은 찜통으로 비교적 무게가 가볍고 조그만 형태의 음식 등을 찌는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Figure 10>은 서한(西漢, 206BCE-9CE)과 동한(東漢, 25BCE-220CE) 시기의 무덤에서 출토된 부뚜막인 조(竈)의 수량이 많고, 종류와 유색도 갈황유(褐黃釉), 녹유(綠釉), 회도(灰陶), 홍도(紅陶) 등으로 다양하다. 주로 서한 말기의 부뚜막이 동한까지도 유행하였다. 부뚜막의 형태는 직사각형(長方形), 곡척형(曲尺形)이 있다. 화덕을 화안(火眼)이라 부르며 개수에 따라 단일식(單眼), 쌍안식(雙眼), 삼안식(三眼) 이 있다. 굴뚝은 용수(龍首)모양으로 만들었다. 일부 부뚜막 뒤에는 당벽(擋壁)과 땔감 입구 밖에는 받침대가 있는 것과 없는 것 등이 있다. 이와 같이 부뚜막의 형태와 종류는 다양하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서로 유사하다(National Museum ofHistory 1996). 그러나 고구려 안악3호분의 부뚜막은 중국의 부뚜막과 다르게 아궁이 위에 솥을 걸기 위한 확 하나만 뚫려 있다. 굴뚝 구멍이 뚫린 방향도 고구려의 것은 90°의 각을 이루고 있어 부뚜막의 아궁이와 반대편으로 나와 있어서 조리와 난방겸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 반면에 중국의 부뚜막은 확의 크기가 다른 화안이 여러 개 뚫려 있어 솥 외에 조리용 기구 여러 개를 동시에 올릴 수 있고, 또한 부뚜막의 아궁이와 굴뚝 구멍이 뚫린 방향은 일직선을 이루고 있어서 고구려의 부뚜막과 서로 구별이 되는 부분이다(Kim 2010; SaGong 2013). 그 외에도 한강주변 지역에서 출토된 고구려의 시루(Choi 1998)와 부뚜막(Sikmunhwa tamguweoi 2008)과 식생활연구(SaGong 2013)에 관한 고고학분야의 연구 등이 다수 있다.

    4) 육고

    <Figure 6>의 육고에는 노루, 개, 돼지 등이 통째로 큰 갈고리에 걸려있다. 왼쪽 기둥의 안쪽에는 ‘경옥(京屋)’이라는 붉은 글이 희미하게 남아있다(Kogohak·Minsokhak Yeonguso 1957). 음식재료에 관한 기록으로 노루와 사슴은 매우 귀하고 특별한 동물로 여겼다(Kim 1997).

    다음으로 개는「三國志」의 위지 동이전과「後漢書」 동이전의 부여에는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 加), 구가(狗加) 및 견사(犬使)라는 벼슬 이름을 가축이름으로 지었다. 다른 가축에 비하여 개는 구(狗)와 견(犬)으로 구분하여 두 번 언급을 하였다.「예기(禮記)」소(疎)에서 작은 개는 구, 큰 개를 견이라고 하였다(Lee 1995). 고구려의 경우「삼국사기」에서는 주몽전설 이외에 개와 관련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부여의 벼슬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견사는 제일 낮은 계급으로 고구려에서 개고기(犬肉)은 상류층에서는 먹기를 꺼렸을 것이고, 주로 서민층에서 식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뒷받침하는 고려의 자료로 최근 1260-1268년 사이에 침몰한 선박으로 알려진 마도3호선에서 발견된 목간이다. 수령자는 고려의 임시수도였던 강화도에 주둔했던 무신세력의조직인 우삼번별초로 보내는 개고기포이다(Lim 2012; Koh 2015).

    마도3호선의 동물류의 유존체에서 분리 동정된 개의 학명은 Canis lupus로 동정되었다(Koh 2012).

    다음으로 돼지는「三國志」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읍루(挹婁)에서는 특히 돼지사육이 많아서 그 고기를 먹고 가죽을 입으며 기름을 몸에 발라서 추위를 막는다고 하였다.「위서(魏書)」 고구려전(傳)에 의하면 주몽전설에 돼지가 나오고 또 돼지를 결혼선물로 삼고 있다.「진서(晋書)」사이전(四夷傳)에서는 숙신(肅愼, 고대 중국의 북동방면에 거주한 이민족)에서 돼지고기를 장례 때 관(棺) 위에 쌓아 놓는다고 하였다. 「三國史記」에서는 교시(郊豕)의 교(郊)는 하늘에 올리는 제사이며, 시(豕)는 돼지를 의미한다. 한반도에서는 돼지를 제사의 희생물로 사용하였다(Lee 1995).

    모든 기록의 공통점은 제사의 희생인 돼지가 달아났다는 기록이었다. 먼저 유리왕은 신하들이 달아나는 못하도록 돼지의 다리 힘줄을 칼로 잘라 흠을 내었다는 이유로 신하들을 죽였으며 또한 유리왕은 달아나는 돼지를 붙잡아 흠을 내지 않고 집에서 기르게 하였다는 내용이다. 마지막으로 산상왕의 기록에서 교시에 잡을 돼지를 관리하는 사람도 잡지 못하였는데 젊은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나 웃으면서 쉽게 돼지를 잡았다는 기록이다. 그 이후 이 여인은 산상왕과의 인연으로 얻은 왕태자의 이름을 교체(郊)라고 지었으며, 후일동천왕(東川王, 227-248CE)으로 추대된다. 이상과 같이 고구려에서는 흠집 없는 돼지를 교시의 희생으로 중요하게 다루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경우, 동중서(董仲舒, BCE198년-106)의「춘추번로(春秋繁露)」에는 양을 희생물로 쓰는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희생물로서 어린양을 쓴다. 양은 뿔이 있으면서도 이용하지 않으며 인을 좋아하는 자와 같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울부짖지 않으니 의에 죽는 자와 같으며, 젖을 빨 때는 무릎을 꿀으니 예의를 아는 자와 같다. 따라서 이것을 희생물로 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Lee 1995; Dong 2006). <Figure 11>은 북위 태연원년(北魏太延元年, 435年)의《재생도(宰牲圖)》이다. 2004년 산서성 대동시 동교사령촌 7호(山西省大同市東郊沙嶺村7號)묘에서 출토되었고 원지에 보존되어 있고, 벽화는 묘실 남쪽 벽의 우측 밑에 있다. 좌측의남자 하인 한명은 무릎으로 양의 왼쪽 앞다리를 억누르고, 양의 오른쪽 앞다리를 왼손에 잡고 있다. 우측에 남자 하인한명이 양의 오른쪽 뒷다리를 양쪽다리 사이에 끼워 고정하고, 오른손에는 짧을 칼을 잡고, 양을 도살하고 있다. 피는 밑에 있는 흑분(黑盆)에 흘러내린다(Xu 2012, vol. 2). 고구려는 돼지를 교시로 사용하는 반면에 중국은 양을 희생하는 것이 서로 다른 차별성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안악3호분의 육고에는 몸집이 큰 동물들이 통째로 매달려 있다. 고구려의 맥적(貊炙)은 양념된 고기를 꼬챙이에 꿰어서 직화에 쬐어 굽는 것으로 고려시대의 불교의 영향으로 침체되었던 것이 조선시대에는 설하멱(雪下覓)으로 되살아났으며(Lee 1985), 1800년대 말에는 너비아니로 그 이후에는 불고기와 연결된다는 연구(Kim 1995)가 있으나, 좀 더 상호연관성에 관한 충분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하였다(Park et al. 2011).

    고려의 육류 조리방법에 관한 기록은 1123년 개경(開京, 현재의 개성)을 방문하였던 송의 사신인 서긍의「고려도경」에서 고려는 불교의 숭상으로 살생을 경계하여 그런 의미에서 도살을 좋아하지 않았고 육류는 권력자의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전기의「고려도경」에서 도축의 방법은 일단 동물을 불속에 넣어 털을 제거하고 내장의 원활하지 못한 도살 기술로 국이나 구이의 냄새가 좋지 않았다는 내용이다(Cho 2004). 이런 상황을 뒷받침하듯이 고려후기에는 “원나라로부터 동물의 사육과 도살기술을 배웠다”는 기록에서 고려는 도살기술과 육류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Kang 1989).「후한서(後漢書)」에서 “맥(貊)은 고구려를 의미하는 것”으로,「의례(儀禮)」에서 맥적은 “미리 조미하여 구웠기 때문에 일부러 장에 무쳐 먹을 필요가 없다”라고 주석을 붙이고 있다(Lee 1995). 그리고 조선후기의「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통째로 간장에 절여 항아리에 넣어둔 것을 꺼내서 여기에 마늘과 아욱을 양념한 후 숯불에 구워 먹는 조리방법(Joo 2003)과 고구려 안악3호분의 육고에 멧돼지가 통째로 매달려있는 모습에서 고구려 맥적문화의 원천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2. 4세기 이전 중국의 부엌과 육고의 고분벽화

    4세기 이전 중국의 육류와 관련된 가장 이른 시기의 벽화는 <Figure 11>의 서한(206BCE-25년CE)의《적육도(炙肉圖)》이다. 1957년에 하남성 낙양시 교소구촌동 61호(河南省洛陽市郊燒溝村東61號)묘에서 출토되었다. 이 벽화는 묘실 뒤 북쪽 벽에 위치한다. 현재 낙양고분박물관(洛陽古墓博物館)에 보존되어 있다. 이 벽화에서 자색의 긴 옷(紫色長袍)을 입은 사람은 직사각형의 네 발 화덕 옆에 무릎 꿇고 앉아서, 손에 든 쇠스랑에는 고기가 꽂혀져 굽고 있다. 뒤에 있는 사람의 얼굴은 아주 빨갛고 검으며, 자색의 옷과 갈색 바지(紫衣褐)를 입고 있다. 긴 쇠스랑(長叉)을 잡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서 굽고 있는 고기를 쳐다보고 있다. 뒤편의 흰색 벽에는 소머리(牛頭)와 고기 덩어리(肉塊)가 매달려 있다(Xu 2012, vol. 5).《적육도》는 석쇠를 사용하지 않고 꼬챙이에 끼워 직화(直火)로 고기를 굽고 있는 장면이다. 적(炙)에 대해서「석명(釋名)」이란 중국 사전에서 “불 위에서 굽는 것으로 호맥(胡貊)에서 온 것”이라 하였고,「의례(儀禮)」에서는 “모든 적(炙)은 무장(無醬)이다”이라 하였다. 중국의 경우는 대부분 조미하지 않은 채로 굽거나 삶은 후 장에 무쳐서 먹는다(Lee 1985; Lee 1995). 그런 의미에서《적육도》는 조미되지 않은 소고기를 직화로 굽고 있는 장면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소고기를 어느 계층에서 식용하였는지는 다음의 기록으로 추정할 수 있다. 먼저 고구려의 경우「後漢書」 동이전의 부여에는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 加), 구가(狗加) 및 견사(犬使)라는 벼슬 이름과 다음의 기록에서 고구려의 소고기는 국가의 흥망성쇠의 요인이 되기도 한 음식으로 주로 권력층에서 식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Figure 13>는 신(新, 3-23CE)의《포주도(庖廚圖)》로 1991년 하남성 언사시 교룡향 신촌 서남한(河南省偃師市高龍鄕辛村西南漢)묘에서 출토되었다. 현재 언사상성박물관(偃師商城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이 벽화는 중실 서벽 남측에 묘사되어 있다. 중앙에 있는 요리사인 포정(庖丁)은 머리에 평 두건을 쓰고, 우임(右衽)의 자홍색 소매가 넓은 상의를 입고 있다. 소매는 걷어 올리고, 앞에는 도마(案) 하나가 놓여 있다. 왼손으로 도마 위의 물건을 누르고, 오른손에는 칼을 잡고 자르는 모습이다. 우측의 홍색 소매가 넓은 긴 옷을 입는 시녀는 무릎을 꿇고 앞쪽 대야(盆)에서 물건을 꺼내고 있다. 남쪽에는 탁반(托盤) 등의 물건이 놓여 있다. 포정의 등 뒤쪽에 있는 벽에는 돼지 넓적다리(豚腿), 생선(魚), 자라(鼈) 등이 매달려 있다. 포정 앞의 남자 두 명은 탁반을 들고 걸어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Xu 2012, vol. 5).《포주도》에는 몸체가 큰 돼지는 도살하여 부위별로 가공한 반면에 몸체가 작은 생선과 자라는 통 채로 가공하여 식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벽화에서 시사하는 점은 이 시기의 돼지 도살 및 가공 기술과 방법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고전적인 저장방법인 염장법과 건조법을 이용하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육류는 단백질이 풍부한 재료로서 도살 후 소금이 없었다면 육류를 이런 저장방식으로 표현할 수는 없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에서도 물고기와 자라를 식용하였으리라 생각된다.

    동명성왕 원년(37BCE) 압록강 동북쪽에 위치한 엄호수에서 주몽은 도망을 하는 길인데, 앞에 강이 나타나 뒤쫓는 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할지 모르는데 이 때, 물고기와 자라가 물위로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주몽은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러나 물고기와 자라는 곧 흩어졌으므로 뒤쫓던 기병들은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魚鼈浮出成橋, 朱蒙得渡, 魚鼈乃解, 追騎不得渡. 「三國史記」第13卷 高句麗本紀一 東明聖王 元年).

    <Figure 14>는 한나라(206BCE-220CE) 시기의《염정(鹽井)》으로 사천성도(四川成都)에서 출토된 한서상전(漢書像石專)의 탁본이다.《염정》의 우측 밑에는 소금물을 끓이는 부뚜막인 조(竈)과 다섯 개의 솥(釜)이 있다. 부뚜막은 길고, 한 사람이 불을 조절하고 있다. 좌측 밑에는 염정이 있다. 염정 위에는 높은 시렁이 있고, 시렁에 무게를 조절하는 통이 매달려 있다. 네 명은 시렁에 서서 염수를 받고 있다. 산에는 두 명이 염을 운반하고 있고, 다른 두 명은 동물을 사냥하고 있다(National Museum of History 1996).

    고구려의 경우 미천왕9년(308CE)에 소금에 관한 기록이 있다. 노파와 을불 그리고 소금과 관련된 기록에서, 소금은 음식의 저장에서 필수적인 귀한 재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고구려도 염장법을 이용하여 육류 등을 가공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다음으로 <Figure 14>는 사천성도(四川成都)에서 출토된 《팽임도(烹飪圖)》 한서상전(漢書像石專) 탁본이다.《팽임도》는 한나라 때 주방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생선(魚), 오리(鴨)들이 시렁에 가득 매달리고 있고, 사람들이 바쁘게 요리준비를 하고 있다. 사람들은 채소를 씻고, 썰고, 불을 지피고 있다. 주방 마당에는 두 마리의 개가 있다(National Museum of History 1996). 중국의 화식(火食)과 관련된 조리법에서 번(燔)은 직접 불 위에 굽는 것이고, 적(炙)은 꼬치에 꿰어서 굽는 방법이다. 포(炮)는 진흙 같은 것으로 싸서 굽는 것이고, 증(蒸)은 찌는 것이다. 팽(烹)과 자(煮)는 모두 삶는 것으로 구별은 확실하지 않다. 곡물의 경우, 곡물을 쪄서 햇볕에 말린 것을 비(糒)라고 하며, 보리와 같이 낟알이 큰 것을 거칠게 부순 것을 구(糗)라고 한다(Shinoda 1995). <Figure 6>의 안악3호분 부뚜막에는 시루가 크게 표현되어 있어 “증(蒸)”의 의미로 찌는 조리법을 묘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반면에《팽임도》의 부뚜막에는 솥만 걸려 있어서 “팽(烹)” 의 의미인 끓이는 조리를 하고 있는 장면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반면에《팽임도》와 안악3호분의 부엌, 부뚜막, 육고, 마당에 있는 두 마리의 개 등의 구도는 매우 유사하다.

    <Figure 15>는 동한(東漢, 25-220년)의《포주도(庖廚圖)》 이다. 1972년 내몽고화림락 이현 신점자향 소판신촌(內蒙古和林格縣新店子鄕小板申村)묘에서 출토되어 원지에 보존되어 있다. 이 벽화는 전실에서 남쪽 귀실로 연결된 통로 동쪽 벽에 있다. 그림의 위에는 도살된 닭(鷄), 생선(魚) 등이 매달려 있고, 밑에는 노비 두 명이 요리를 하고 있다. 부뚜막 위에는 “조(竈)”라는 방제(榜題)가 적혀있고, 왼편 아래쪽에는 붉은색의 불길이 묘사되어 있다. “조”는 부엌의 부뚜막에 있으면서 집안의 길흉을 주관하는 신으로 조신(竈神), 조왕(竈王), 조왕신(竈王神)을 의미한다(Xu 2012, vol. 3). 이 벽화에서도 몸체가 작은 닭과 생선은 통째로 가공하여 저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부뚜막은 불을 관장하는 신이 존재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Kim 1986). 3세기 이전에 이미 음식을 요리하는데 필요한 부뚜막의 불은 조왕신이란 존재로 벽화에 표현 하였다는 점이 새롭다. 그런 의미에서《포주도》의 벽화에는 부뚜막 위에 바로 도살된 닭과 생선이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서 부뚜막에서 나오는 연기와 화기를 이용한 훈연건조의 가공법을 활용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고구려 안악3호분에는 방아(碓), 우물(井) 등의 방제를붉은색으로 표시한 반면 부뚜막(竈)에 관한 방제가 없다는 것도 차이점으로 볼 수 있다.

    <Figure 16>는 한위(漢魏)와 제(際)나라 사이인 3세기의 《포주도(庖廚圖)》모본이다. 1955년 요녕성 요양시 삼도호 1호(遼寧省遼陽市三道壕一號)묘에서 출토되어 원지에 보존되어 있다. 모본은 현재 요녕성 박물관(遼寧省博物館)에 보존되어 있다. 이 벽화는 좌측 소실의 좌측 벽에 있으며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하부는 바닥이 둥근 회백색 도자옹기(圓底灰白陶翁)가 네 개 있다. 위에는 막대기가 그려져 있고 고기 덩어리(肉塊), 꿩(雉), 야생토끼(野兎), 심폐(心肺) 부위 등이 매달려 있다(Xu 2012, vol. 8).《포주도》에는 꿩, 야생토끼는 통째로, 나머지는 고기 덩어리 또는 심폐 부위가 매달려 있다. 어떤 동물의 부위인지는 알 수 없으나 몸체가 큰 동물을 도축하여 장기부분을 가공하여 부위별로 식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자는 대략 기원전 369-289년경의 인물로「장자(莊子)」의 <포정해우(庖丁解牛)>에서 요리사인 포정은 소와 칼이 완전히 합일된 상태, 주객을 완전히 초월한 비이분법적(非二分法的)인 도(道)의 경지에서 소를 다루는 기술을 보고 문혜군(文惠君, 기원전 4세기경)은 생명의 북돋음(養生)을 얻었다는 내용이 있다(Oh 1998).

    4세기 이전 중국의 고분벽화에 묘사된 큰 동물을 부위별로 나누어서 가공하여 식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안악3호분에는 멧돼지, 노루, 사슴 등이 통째로 걸려 있어서 고구려 안악3호분의 육류문화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4세기 이전의 육류요리 방법은 도축기술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안악3호분에 묘사된 동물들은 통째로 매달려 있는 회화적 차원의 진정성을 인정한다면 이 벽화에서 맥적의 기원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자문해본다. 중국과 같이 부위별로 도축하였다면 부위별 고유의 맛을 즐기는 차원에서 양념이 없는 요리방법을 선택하였으리라 본다. 고구려는 통째로 절여서 양념하여 먹는 새로운 기교를 발견한 점이 동 시대의 중국의 육류문화의 차별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육류요리의 발달은 도축기술, 주방도구인 칼과 같은 금속문화의 발달과도관련성을 지어 볼 수 있다. 안악3호분과 4세기 이전의 중국의 고분벽화에 묘사된 육류와 관련된 문화는 도살의 단계에서부터 차이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기성분인 음식이 유물로 남아있기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고구려의 맥적문화의 기원의 흔적을 남긴 안악3호분 벽화를 새롭게 느끼게 하는 시간들이었다.

    IV. 요약 및 결론

    고구려의 안악3호분은 375년의 절대연대를 가진 고구려 초기의 고분으로 본 연구에서는 음식과 관련된 공간인 방앗간, 우물, 부엌, 육고의 벽화를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또한 안악3호분의 음식문화적 특성을 파악하기 위하여 4세기 이전의 중국의 고분벽화, 한대 화상석 및 부장품 등과 비교하여 고찰하였다. 먼저, 안악3호분의 방앗간에서는 곡식을 찧는 디딜방아를 사용하였다. 우물의 벽화에 묘사된 크기가 다양한 항아리들도 발굴되었다. 항아리의 구경은 8.4-9.7 cm, 높이는 19.6-23.3 cm, 허리직경은 20.1-26 cm, 외저직경은 11.1-12.7 cm 범위의 크기를 가지고 있다. 안악3호분의 부뚜막의 확은 아궁이 위에 솥과 시루 등을 놓을 수 있도록 하나만 뚫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부뚜막 굴뚝 구멍이 뚫린 방향도 고구려의 것은 90o의 각을 이루고 있어 부뚜막의 아궁이와 반대편으로 나와 있어서 난방과 취사를 겸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중국의 부뚜막과는 다른 점이다. 솥과 시루는 주방의 기본 조리 기구로 솥에서 음식을 끓이고, 밥을 짓고 시루를 이용하여 음식을 찌는 방법 등의 조리법이 공존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안악3호분에서 발굴된 접시의 직경은 19.8-21.6 cm, 높이는 1.8-3.3 cm으로 부엌의 탁상위에 쌓여있는 접시의 모양과도 유사하다. 안악3호분 육고에는 몸체가 큰 노루, 개, 돼지가 도살하지 않은 채 통째로 걸려 있어서 도살의 유무와 어느 부위를 어떻게 식용하였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다. 미천왕9년(300CE)의 소금과 관련된 기록으로 보아 안악3호분의 육류는 염장과 건조의 가공법을 이용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구려는 돼지를 교시로 사용하는 반면에 중국은 양을 희생하는 것이 차별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의 요리 담당자는 여성이 주로 담당한 것으로 보이며 중국은 남녀 모두 요리를 담당한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4세기 이전의 중국의 부엌과 육고의 벽화에서 부뚜막의 아궁이는 붉은색과 조(竈)란 글씨로 표현하여 화식의 조리법에서 필수적인 불을 조왕신으로 인식하며 불을 다루고 요리하는 중국인의 정신세계도 읽을 수 있다. 대부분의 고분벽화에는 몸체가 적은 자라, 생선, 닭, 오리, 꿩, 토끼는 통째로 걸려 있었으며, 몸체가 큰 소와 돼지 등은 도살하여 머리, 넓적다리, 고기 덩어리, 심폐 부위별로 식용부위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어느 부위를 식용하였는지를 잘 알 수 있다. 특히 안악3호분의 육고는 육류도살기술과 요리법의 관련성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고구려 안악3호분과 4세기 이전 중국의 고분벽화,「장자」의 포정해우, 고려의「고려도경」, 태안 마도3호의 목간 등의 유물, 그리고 조선시대의 육류요리법 등의 일련의 기록들을 통하여 고구려의 맥적문화와 중국과 육류문화의 차별성을 해석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벽화를 통한 음식문화 연구의 한계성, 그리고 지역별 자연환경의 특성을 상세히 다루지 못한 점은 차후의 연구과제로 남기고자 한다.

    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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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ctional plane of An-Ak tomb No. 3 (Koguryo, 357CE).

    Source: Kim YJ (金瑢俊)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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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rain yard of An-Ak tomb No. 3 (Koguryo, 357CE)

    Source: Koguryo munhwajun silheng wiwonhoe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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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rain yard, green glaze (Han, 206BCE-220CE)

    Length 15 cm×Width 28 cm×Height 7 cm

    Source: National Museum of History,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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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ater well of An-Ak tomb No. 3 (Koguryo, 357CE)

    Source: Koguryo munhwajun silheng wiwonhoe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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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cavated jars of An-Ak tomb No. 3 (Koguryo, 357CE)

    Source: Kogohak · Minsokhak Yeonguso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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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tchen and meat storage space of An-Ak tomb No. 3 (Koguryo, 357CE)

    Source: Koguryo munhwajun silheng wiwonhoe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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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cavated bowls and dishes of An-Ak tomb No. 3 (Koguryo, 357CE)

    Source: Kogohak·Minsokhak Yeonguso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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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ron stove (Koguryo 1BCE-668CE). H: 29.1 cm, L: 67.2 cm, W: 23.0 cm

    Source: National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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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eparation for a meal, replica (Former Yan period, 337-370CE). Height 52 cm×Width 83 cm

    Source: Xu GG.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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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arthen ware and green glaze stoves (Han, 206BCE-220CE)

    Source: National Museum of History,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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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tchering (1st Year ot Taiyan Era, Northern Wei,435CE). Height ca. 25 cm×Width ca. 35 cm

    Source: Xu GG.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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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asting meat (Western Han, 206BCE-25CE, detail)

    Source: Xu GG.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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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oking (Xin, 9-23CE). Height 44 cm×Width 40 cm

    Source: Xu GG.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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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lt well (left) and Culinary preparation (right) (Han, 206BCE-220CE, tomb tile rubbing).Height 40 cm×Width 48 cm (left); Height 54 cm×Width 62.6 cm (right)

    Source: National Museum of History,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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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oking (Eastern Han, 25-220CE). Height 131 cm×Width 92 cm

    Source: Xu GG.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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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oking (Between Han and Wei, 3rd C. CE, detail). Original mural Height 116 cm×Width 90 cm

    Source: Xu GG. 2012

    Table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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