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서 론
중국은 차와 도자기의 발원지이다. 특히 차는 강남의 고월 족(古越族)이 생활하던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중국차의 생산 과 음용은 주로 사천지역을 중심으로 선진(先秦)시기에 이루 어졌지만, 진한(秦漢)이 전국을 통일한 이후의 차 산업은 다 른 지역으로 점차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대당제국의 건 립으로 수백 년간의 분열상태가 종식되면서 남북문화가 광범 위하게 융합되는 가운데 차를 마시는 풍습도 전국에 보편화 되었다. 최초의 차서(茶書)인 당나라의 육우(陸羽, 733-804)가 지은 「차경(茶經)」에는 “차를 마시게 된 것은 신농씨로 부 터 시작되었다(茶之爲飮, 發乎神農氏,「茶經」六之飮)”라고 하였다. 특히 당나라의 음차문화는 북방지역과 해외로도 전 파되었으며, 차구전용 청자용기가 대량 생산되었다(Yu 1999). 당에 이어 송·원·명·청대에도 차는 염(鹽)과 철(鐵) 다음 으로 국가재정의 주요한 수입원 중의 하나였고 동시에 비단, 도자기와 함께 중요한 수출물자의 하나였다(Kim 2008). 중국 의 차와 관련된 선행연구는 중국차의 전파와 음용법의 변천 (Kim 2008), 남송대 차의 생산과 동남지역의 차법(Suh 2011) 에서 중국의 차생산과 음용법에 관한 전반적인 연구를 하였 다. Jang(2007)은 고려시대의 차 문화와 청자다구(茶具)는 어 떠한 상관관계가 있는지를 발굴된 고려초기와 중기의 가마터 와 분묘를 대상으로 연구하였고, 또한 소비유적지의 출토 도 자를 통하여 고려청자의 수용은 다례(茶禮)와 밀접한 관련성 을 제시하였다(Jang 2011). Lee(2004)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차구를 열다섯 가지로 분류하고 종합적으로 고찰하였다. 또 한 차선(茶, Ko 2009a), 연차(石展茶, Ko 2009b), 타호(唾壺, Lee 2010a), 잔탁(盞托, Lee 2012) 등과 같이 차구 중에서 한 종류의 독립적 주제에 관한 논문들이 있다.
최근 중국 고분벽화의 주제와 구체적 도상은 시대적 사회 현실을 탈피할 수 없는 창작물로 당시 사람들의 사회행위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며(Yang, 2006), 도상분석이외에도 인문학적 시각으로의 해석을 시도하는 융합적인 연구 방법 론이 대두되고 있다(Zheng 2010). 고려의 음차법에 관한 문 헌기록, 고분벽화와 회화자료를 통한 구체적인 내용을 알기 에는 한계가 있다. 고려를 방문한 서긍(徐兢)의 「고려도경 (高麗圖經)」에서 “근래에는 음차를 제법 좋아하여 차구를 많 이 만든다. 금화조잔, 비색소구, 은화탕정은 다 중국 것을 흉 내 낸 것들이다(故邇來頗喜飮茶益治茶具金花烏盞翡色小銀爐 湯鼎皆竊效中國制度「高麗圖經」卷三十二 茶俎)”라고 하여, 고려의 차구 및 차 문화는 중국의 것과 유사함을 언급하였 다(Jang, 2014). 따라서 본 논문은 고려의 대외교류국인 송· 요·금·원의 차와 관련된 고분벽화에 나타난 차구와 음차 법을 살펴보았으며, 이러한 접근과 고찰은 차후 고려시대 청 자차구의 음식 문화적 인식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 기초 자료로 활용하는데 의의를 두고자 한다.
II.연구 내용 및 방법
연구내용은 고려 대외교류국인 송·요·금·원의 차와 관련된 고분벽화에 묘사된 차구와 음차법을 음식 문화적 차 원에서 살펴보았다. 연구방법은 첫 번째로 Xu(2012)의「The complete collection of murals unearthed in China (中國出 土壁全集)」에 수록된 차와 관련된 열여덟 점의 고분벽화 는 본문에서 그림으로 제시하였다. 두 번째는 중국학자들이 설명한 벽화 설명은 수정 없이 본문에 서술하였고, 간체(簡 體)는 한국식 번체(繁)로 변환하여 정리하였다. 세 번째는 고 분벽화에서 묘사된 차구는 송대의 채양(蔡襄)의「다록(茶錄, 1052)」, 북송 휘종(徽宗)의 「대관다론(大觀茶論, 1107)」과 심안노인(審安老人)의 「차구도찬(茶具圖讚, 1269)」을 기준 으로 분류하였다. 네 번째 한글의 경우, 참고문헌의 제목에 서 다(茶)로 표기한 부분은 원본대로 인용하였으며, 그 외의 경우에는 국립국어원의 표기법에 따라 차로 표기하였다.
III.결과 및 고찰
1.고려 대외교류국의 고분벽화
고려 대외교류국인 송·요·금·원의 차와 관련된 고분 벽화는 <Table 1>에 시대별, 주제별, 그리고 발굴 장소 및 년도 등을 정리하였다. 이들 벽화는 1974-2008년 사이에 발 굴된 것으로 하남성(河南省), 내몽고(內蒙古), 하북성(河北省), 산서성(山西省), 북경시(北京市), 섬서성(陝西省), 산동성(山東 省) 등에 분포되어 있다.
1)송(宋)의 벽화
송대에는 경제 발전을 바탕으로 붕당의 다툼은 치열하였 으나, 문학과 예술의 발전 위에 차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그리고 대외무역의 증가로 도자기와 차는 중국의 주요한 수 출품이 된다. 1074년 신종(神宗 熙寧7年) 시기에 차의 수출 을 국가에서 독점하고 서북방 변경에 차마사(茶馬司)를 두게 된다(Kim 2008). 송대 음차의 특징은 찻잎의 생산이 급격하 게 증가하여 황제부터 하층민까지 음차가 일상생활의 일부 가 되어 차관(茶館)이 일반화되었다(Song 2005).
고분벽화에는 묘주도(墓主圖)가 많이 그려졌으나, 제목에 서 차와 관련성이 명확하지 않아 본고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Figure 1>은 하남성지역의 북송대 1097년(紹聖四年)《비 차도(備茶圖)》벽화이다. 1999년 하남성 등풍시 흑산강촌 이 수귀(河南省登市黑山溝村北宋李守貴)묘에서 출토되어 원지에 보존되어 있다. 이 벽화는 묘실 서남벽에 그려져 있다. 벽화 윗부분에는 자색의 만장(帳), 녹색의 횡장(橫帳), 그리고 녹색과 자색의 끈으로 된 조수(組綬)가 있다. 중앙에는 네모 난 탁자인 방탁(方)이 놓여있다. 구름모양의 운상(雲狀)으 로 장식된 탁자 위에는 복숭아인 도자(桃子)를 담은 네 개의 과반(果盤)과 잔탁이 쌓여 있다. 탁자 좌측의 부인은 머리를 높게 빗어 올린 두소고계(頭梳高)를 하고, 이마에는 흰색 머리띠인 액파(額)에 보요(步搖)를 꽂고 있으며, 귀걸이인 이환(耳環)과 팔찌인 수탁(手)을 끼고 있다. 위에는 겉옷 인 배자(褙子)와 안에는 말흉(抹胸)을 입고 있다. 밑에는 흰 색의 주름치마인 습군(褶裙)를 입고, 코끝이 높은 나막신인 운 두극(雲頭)을 신었다. 오른손에는 차관(茶罐)을 들고, 왼손은 봉수차시(鳳首茶匙)로 찻잔에 차를 넣는 ‘점차(點茶)’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 탁자 뒤에 있는 부인의 머리는 두소고계를 하고, 이마에는 흰색의 액파를 두르고 있다. 윗옷의 겉에는 배자를 입고, 밑에는 흰색 주름치마인 습군을 입고 있다. 얼 굴은 탁자 좌측 여자를 향하며 손을 들어 가리키고 있다. 좌 측 부인 뒤에는 병풍이 하나 있고, 좌측 바닥에는 부집게인 화겸(火鉗)이 하나 놓여 있다(Xu 2012, Vol. 5).
<Figure 2>는 하남성지역의 북송대(960-1127)《비차도》 벽화이다. 2008년 하남성 형양시 귀서촌(河南省滎陽市槐西 村)묘에서 출토되어 원지에 보존되어 있다. 이 벽화는 묘실 북벽의 하단 우측에 그려져 있다. 벽화에는 두 명의 시녀는 높게 빗어 올린 고계머리에 비녀인 잠(簪)을 꽂고 있다. 좌측 시녀는 양손으로 황색의 사두를 들고, 사두 입구에는 작은 단지인 소관(小罐)이 놓여 있다. 좌측 시녀는 얼굴을 뒤돌아 우측 시녀와 마주보고 있다. 다리 옆에는 검은 고양이가 쪼 그리고 앉아 있다. 우측 시녀가 양손으로 들고 있는 원형그 릇은 함자(盒子)인 것 같다(Xu 2012, Vol. 5).
2)요(遼)의 벽화
차를 마시는 풍습이 중국 남방에서 유목민이 거주하는 북 방의 화북지역으로 전파되었다. 남방에서는 제차(製茶)기술 의 발달로 명차가 생산되어 대운하를 통해 북방지역으로 전 해지면서 차를 마시지 않던 북방인들도 쉽게 차를 마시게 되 었다(Kim 2008). <Figure 3>은 내몽고지역의 요대 1087년 (大安三年)《봉차도(奉茶圖)》벽화이다. 1997년 내몽고 파 림우기 소불일갈 숙목요경릉 배장묘 야율홍세(內蒙古巴林右 旗索布日蘇木遼慶陵陪葬墓耶律弘世)묘에서 출토되어 원지에 보존되어 있다. 이 벽화는 서쪽 귀실 복도 북측 벽에 그려져 있다. 벽화에는 한족(漢族)옷을 입은 남자 하인은 흑건을 쓰 고, 목둘레선이 둥근 홍색의 원령장포(圓領長袍)를 입고 허 리띠를 하고 있다. 양손으로 잔탁과 찻잔을 들고 있다(Xu 2012, Vol. 3).
하북성 선화(宣化)지역에 몰려있는 장씨 집안과 북경 주변 에 거주한 한족의 벽화에는 한족의 문화가 반영되었으며, 거 란인과 한족의 모습이 함께 묘사되어 있다(Han 2013). <Figure 4>는 하북성지역의 요대 1093年(大安九年7)《비차 도》벽화이다. 1993년 하북성 선하 하팔리 10호 장광정(河 北省宣化下八里10號張匡正)묘에서 출토되어 원지에 보존되 어 있다. 이 벽화는 전실 동벽에 그려져 있다. 벽화에는 차 를 준비하는 과정을 묘사하여 연령과 성별이 다른 다섯 명 의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에는 연차(石展茶)로 차를 가루 로 빻는 시녀와 풍로에 불을 피우는 남자 하인이 있고, 풍로 위에는 탕병이 하나 있다. 불을 피우는 남자 하인 뒤에는 오 른손을 들고, 왼손을 앞으로 내밀어 탕병을 꺼내고자 하는 남자 하인이 있다. 남자 하인의 양 옆에는 대함합(大函盒), 소함합(小函盒)과 탁자가 있다. 탁자 위에는 등투병(藤套), 집 호(執壺), 소함합(小函盒), 차선, 차시와 차겸(茶鉗) 등이 있 다. 시녀들의 머리에는 꽃 비녀인 잠화(簪花)를 꽂고 있다. 시녀는 윗옷인 오()을 입고, 밑에는 흰색의 주름치마인 습 군을 입고 양손으로 탁잔(托盞)을 들고 서서히 앞으로 가고 있다. 다른 한 명 시녀도 양손으로 탁잔을 들고 북쪽 방향으 로 서 있다(Xu 2012, Vol. 5). <Figure 5>는 하북성지역의 요대 1111년(天慶元年)《비차도》벽화이다. 1990년 하북성 선화 하팔리 4호 한사훈(河北省宣化下八里4號韓師訓)묘에서 출토되어 원지에 보존되어 있다. 이 벽화는 후실 동남 벽에 그려져 있다. 벽화에는 첨등(添燈)하고 있는 시녀와 제안(祭 案)주변에 있는 시녀 세 명이 있다. 제안 위에는 집호, 찻잔, 탁자 등이 놓여 있다. 탁자 주변에는 빨간색 난간인 주란(朱 欄)이 있고, 이 주란은 두 개의 입구가 있어서 물건을 꺼낼 때 편리하게 되어 있다(Xu 2012, Vol. 1).
<Figure 6>과 <Figure 7>은 하남성지역의 요대(1116)《비 차도》벽화이다. 1974년 하북성 선화 하팔리 1호 장세향(河 北省宣化下八里1號張世卿)묘에서 출토되었다. <Figure 6>은 후실 서벽에 그려져 있다. 중앙의 빨간색 탁자 위에는 찻잔, 자분(瓷盆), 칠합(漆盒) 등이 있다. 탁자 밑에는 목탄을 쓰는 화로인 원형의 탄분(炭盆)이 있고, 탄분 위에는 탕병이 하나 놓여 있다. 탁자 옆에는 차를 준비하고 있는 두 사람이 있다. 좌측 노란색 긴 옷을 입은 어른의 왼손에는 흑탁백잔(黑托白 盞)을 들고, 오른손에는 차시로 찻잔에 있는 차말(茶末)을 섞 고 있다. 우측 사람의 왼손은 탁자를 지탱하며, 오른손에 쥐 고 있는 황색의 탕병으로 점차를 하고 있다(Xu 2012, Vol. 5). <Figure 7>은 후실 동벽에 그려져 있다. 중앙의 빨간색 탁자 위에는 탁잔, 탕병, 향로, 염합(盒)과 황색의 함합(函 盒) 등이 놓여 있다. 탁자 가장자리에는『상청정경(常淸靜 經)』과『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이 있다. 두 명의 인물의 머리에는 흑색의 교각복두(交脚巾業頭)를 쓰고 있다. 우측 사 람은 조색의 긴 옷인 장포를 입고, 양손으로는 입구가 넓은 대반구탕병(大盤口湯甁)을 잡고 있다. 좌측 사람은 자색의 긴 옷인 장포를 입고, 옆을 돌아보면서 오른손 검지를 올리며 옆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 같다. 두 사람 뒤에는 격자 모양의 창문인 직령창(直)이 한 개 있다(Xu 2012, Vol. 5).
<Figure 8>은 하북성지역의 요대 1117년(天慶七年)《비차 도》벽화이다. 1898년 하북성 선화하팔리 5호 장세고(河北 省宣化下八里5號張世古)묘에서 출토되어 현지에 보존되어 있 다. 이 벽화는 후실 서남 벽에 그려져 있다. 화면 중간 위치 에 갈색 네모 탁자가 있고, 탁자 앞의 탄화화분(炭火火盆)위 에는 뚜껑이 있는 흰색의 탕병이 놓여있다. 탁자 위에는 차 구가 있다. 홍색의 함합, 잔탁과 찻잔 및 차선 등이 있다. 탁 자 뒤에 있는 여자의 머리에는 연잎모양의 연판연관(蓮瓣軟 冠)을 쓰고, 갈색의 짧은 적삼인 단삼(短衫)을 입고, 겉에는 녹색의 소매가 좁은 착수배자(窄袖褙子)를 걸치고, 밑에는 흰 색의 치마인 습군을 입고 있다. 양손에는 흑탁백잔의 찻잔을 받들고 있다. 탁자 우측에 있는 시녀의 머리는 거란족의 독 특한 장식을 하고 있다 이는 거란족의 곤발(發)머리의 영 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겉에는 녹색의 긴 적삼인 교령장 채를 입고, 안쪽에는 자홍색의 긴 옷인 장포를 입고 있다. 신 발은 검은색의 끝이 뾰족한 첨두화(尖頭鞋)를 신고 있다. 양 손으로 사두를 들고 있다. 탁자 좌측에는 나이가 들어 보이 는 시녀 한 명을 그려져 있다. 겉에는 흰색의 긴 옷인 장포 와 흰색의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흰색의 신발을 신었다. 왼 손에는 둥근 부채인 단선(團扇)을 잡고, 오른쪽 손가락을 들 어 가리키고 있다. 세 사람의 얼굴 표정을 보았을 때, 서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Xu 2012, Vol. 1).
<Figure 9>는 산서성지역의 요대(907-1125년)《비차도》 벽화이다. 1991년 산서성 삭주시 시정부 공지(山西省朔州市 市政府工地)묘에서 출토되어 현지에 보존되어 있지 않다. 이 벽화는 묘실 남벽에 그려져 있다. 화면 위에는 액방(額枋)이 묘사되어 있다. 좌측에는 다섯 명의 하인들이 탁자 옆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탁자 앞에 한 사람은 풍로 위에는 탕 병이 있다. 탁자 뒤에 있는 두 사람은 각각 사두, 잔탁을 들 고 있다. 탁자 위에는 탁잔과 차연(茶石展)이 놓여있다. 탁자 좌측의 두 사람은 방합(方盒), 잔탁을 들고 있다. 중앙에 있 는 두 명의 하인은 점차를 하고 있다. 또 옆에는 곤발머리의 남자시동과 유발(梳) 머리를 하고 있는 여자아동은 찻잔 을 들고 있다(Xu 2012, Vol. 2).
<Figure 10>는 내몽고지역의 요대(907-1125년)《점차도(點 茶圖)》모본(摹本) 벽화이다. 1990년 내몽고 파림좌기 사간 합달소 목아노소알사 적수호(內蒙古 巴林左旗幹哈達蘇木阿 魯召滴水壺)묘의 묘실 남벽에 그려져 있고, 현지에 보존되어 있다. 모본은 현재 파림좌기(巴林左旗)박물관에 보존되어 있 다. 벽화에는 세 사람이 주인을 위한 차를 준비하고 있는 장 면이며, 좌측에는 홍색의 장막인 유장(帳)이 걸려 있다. 우 측에 있는 하인은 머리에 검은 흑건을 쓰고, 황갈색의 둥근 목둘레선과 소매가 좁은 긴 옷인 원령착수장포를 입고 있다. 옷에는 단과(團)의 꽃문양이 있다. 허리에는 가죽 허리띠 인 혁대를 하고, 허리띠에는 단도가 걸려있다. 등허리에는 하 얀 수건이 있다. 양손으로 탁잔을 들고 중앙에 있는 사람을 향하여 몸을 굽혀서 차를 받고 있다. 중앙에 있는 하인의 머 리도 검은 흑건을 쓰고 있으며, 단과의 꽃문양이 있는 황색 원령착수장포를 입고 있다. 양손으로 탕병을 들고 점차를 하 고 있다(Xu 2012, Vol. 3).
3)금(金)의 벽화
요와 금의 사람들은 원래 수렵목축 민족이었으므로 곡물 은 식생활의 보조음식이었다. 차를 마시는 풍습이 유목민이 거주하는 북방의 화북 지역으로도 전파되었다.
<Figure 11>은 북경시의 금대 1143년(金皇統三年)《비차 도》벽화이다. 2002년 북경시 석경산구 팔각촌(北京市石景 山區八角村)묘에서 출토되었고, 현재는 수도(首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묘는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묘실 동북쪽 벽 에 그려져 있다. 제일 좌측에 있는 사람은 팔짱을 끼고 있고, 가운데 있는 두 사람은 점차를 하고 있다. 두 사람 뒤에는 식반(食盤)을 들고 있는 하인이 있으며, 제일 우측에 있는 사 람은 골타(骨)를 쥐고 있다(Xu 2012, Vol. 10).
<Figure 12>는 산서성지역의 금대 1161년(正隆六年)《봉 차도》벽화이다. 1990년 산서성 대동시 서구(山西省大同市 徐龜)묘에서 출토되어 현지에 보존되어 있지 않다. 이 벽화 는 묘실 동벽 북측에 그려져 있다. 화면 위에는 대나무발인 죽렴(竹簾)과 장막이 둘러져 있다. 시녀 한명의 머리는 둥글 게 올린모양의 두소원발(頭梳圓)을 하고 있다. 윗옷은 소 매가 좁은 교령착수오(交領窄袖)를 입고, 밑에는 바닥에 끌리는 긴 치마를 입고 있다. 양손으로 찻잔을 들고 있다. 시 녀 우측은 이미 훼손되어서, 현재는 시녀 한 명이 주호를 들 고 점차하고 있는 장면만 보인다(Xu 2012, Vol. 2).
<Figure 13>는 산서성지역의 금대 1195년(明昌六年)《“차 주위”도(“茶酒位”圖)》벽화이다. 2008년 산서성 분양시 동용 관촌 금대 가족묘지 5호(山西省汾陽市東龍觀村金代家族墓地 5號)묘에서 출토되어 현지에 보존되어 있다. 이 벽화는 묘실 동북 벽에 그려져 있다. 벽화 위에는 “차주위”라는 묵서 편 액이 있다. 탁자 위에는 원합(圓盒), 주호, 탁잔 등이 놓여 있 다. 탁자 뒤에는 남자 하인 두 명이 있다. 머리에는 모두 검 은 흑건을 쓰고, 목둘레선이 둥글고 소매가 좁은 긴 옷인 원 령착수포를 입고 있다. 한 명은 탁잔을 들고 뒤돌아보고 있 다. 다른 한명은 탁자 앞에서 차선을 쥐고 격불(擊拂)을 하 고 있다(Xu 2012, Vol. 2).
4)원(元)의 벽화
원은 유목민인 몽고인이 통합한 국가로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전반에 활동한 왕정(王禎)은 농서(農書, 1313)에서 “차 는 명차(茗茶) 말차(末茶), 납차(蠟茶)의 세 종류가 있다”라고 하였다. 원대에는 송대의 말차용 차기와 큰 차이가 없었으며, 송대의 음차법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National Palace Museum 2002). <Figure 14>는 산서성지역의 원대 1265년 (至元二年)《봉차도》벽화이다. 1958년 산서성 대동시 마도 진(山西省大同市馮道)묘에서 출토되어 현재는 보존되어 있지 않다. 이 벽화는 묘실 동벽 남측에 그려져 있다. 벽화의 좌 측에는 호안석(虎眼石)과 모란꽃이 있다. 우측에 대나무 몇 그루가 있다. 대나무 앞에는 차구를 진열한 탁자가 있다. “차 말” 이라는 표시가 붙은 뚜껑이 있는 개관(蓋罐)이 있다. 엎 어 놓은 찻잔과 차선이 놓여 있다. 그리고 겹쳐서 쌓아 놓은 잔탁, 탁반과 과일이 보인다. 중앙에는 동자가 한명이 서 있 고, 왼손에는 물건을 가슴 앞 높이로 들고 있고, 오른손에는 탁잔과 찻잔을 들고 앞으로 나가고 있다(Xu 2012, Vol. 2).
<Figure 15>는 산서성지역의 원대 1276년(至元十三年)《시 녀비차도(侍女備茶圖)》벽화이다. 2004년 산서성 (山西省屯 留縣康莊村2號)묘에서 출토되어, 현재는 장치시(長治市) 박 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 벽화는 묘실 동벽의 위쪽에 그려 져 있다. 벽화에는 검은 테두리가 있다. 우측에 높은 탁자가 있어, 탁자 위에 주존관(酒尊罐), 완(碗), 잔탁 등이 있다. 시 녀 두 명이 탁자 뒤에 서 있고, 머리는 높이 올리고 장식으 로 둘러싼 두류포발(頭梳包)를 하고, 황색과 홍색의 비단 치마인 나군(羅裙)을 입고 있다. 한 명은 주자(注子)를 들고 있으며, 다른 한 명은 찻잔을 들고 차선으로 격불을 하고 있 다. 뒤에는 맷돌인 석마(石磨)가 한 개 있다. 우측의 상단에 는 글자가 오래되고 희미해서 잘 알 수 없으나,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차위□당□한빈□오자□치원□”(“此位□堂□韓□五子□至元□”)라는 묵서로 제기(題記)가 쓰여 있다(Xu 2012, Vol. 2).
<Figure 16>는 산서성지역의 원대 1298년(大德二年)《비 차도》벽화이다. 1986년 산서성 대동시 치륜창 1호(山西省 大同市齒輪廠1號)묘에서 출토되어 현지에는 보존되어 있지 않다. 이 벽화는 묘실 동벽에 그려져 있다. 중앙에는 긴 탁 자인 장탁이 하나 있고, 탁자 위에는 잔탁, 주호, 개관 등이 놓여 있다. 탁자 밑에서 네모난 바구니 모양의 두형분장(斗 形盆裝)에 과일이 가득 채워져 있다. 우측에는 한 개의 개관 과 화초 한 그루가 있다. 좌측에 서 있는 시녀는 등 쪽을 보 여주며, 이현금(二絃琴)을 안고 있다. 탁자 옆에는 물건을 든 시녀 두 명이 있다. 탁자의 우측에 어린 시녀 한 명은 두 손 으로 잔탁을 들고 있다. 옆에 받침대 위에는 한 개의 합(盒) 이 있다(Xu 2012, Vol. 2).
<Figure 17>은 내몽고지역의 원대(1206-1368)《점차도(點 茶圖)》벽화이다. 1982년 내몽고 적봉시 원보산구 사자산 1 호(內蒙古赤峰市元寶山區沙子山1號)묘에서 출토되어 현재는 적봉시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 벽화는 묘실 동벽에 그 려져 있다. 높은 탁자 위에는 꽃무늬가 있는 하엽개관(荷葉 蓋罐)과 탕병이 있다. 엎어 놓은 찻잔과 차선 등이 있다. 남 자 하인 머리에는 봉황의 꼬리 모양인 봉교복두(鳳翹巾業頭)를 쓰고 있다. 옷은 목둘레선이 둥글고 소매가 좁은 긴 옷인 원 령착수장포를 입고 허리띠를 매고 탁자 옆에 서 있다. 왼손 에는 차발(茶)을 안고, 오른손으로 절굿공이인 저도차(杵 搗茶)를 잡고 차를 찧고 있다(Xu 2012, Vol. 3).
<Figure 18>는 산동성지역의 원대(1206-1368년)《봉차도》 벽화이다. 1985년 산동성 제남시 천불산 북록제노빈관(山東 省濟南市千佛山北麓齊魯賓館)묘에서 출토되어 현재 제남시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 벽화는 전실 서북벽 모서리에 그려져 있다. 벽화의 좌측에 있는 사람은 홍색 상의와 치마 를 입고, 양손으로 찻잔을 들고 서 있으며, 그 뒤에는 온완 탕병(溫碗湯甁)을 들고 치마 입은 사람이 서 있다. 벽화가 오 래되어 그림이 희미하다(Xu 2012, Vol. 4).
2.고려 대외교류국의 음차법과 차구
고려 대외교류국의 음차법은 어느 한 시대에도 한 종류의 음차법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며, 각 시대마다 유행하는 음차 법은 차제조 방법에 따른 지역별, 계층별의 다양한 음차법들 이 함께 공존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송시기 궁정과 상층사 회에서는 병차 음용의 점차법으로 발전하고 있을 때 민간의 음차법은 간편한 산차를 선호하였다(Song 2005). 송말원초 시기에 남방에서는 이미 산차가 더 보편적이었다(Kim 2008).
1)음차법
「차경」에서는 당시 마시던 차로는 “각차, 산차, 말차, 병차 의 네 종류가 있다(飮有茶, 散茶, 末茶, 餠茶;「茶經」六之 飮)”라고 하였다. 각차는 조차(粗茶)라고도 하며 거친 찻잎 을 따다가 잎과 줄기를 잘게 썰어서 솥에 넣고 끓여 마시 고, 산차는 생 찻잎을 그대로 솥에 넣고 끓여 마시는 방법 이다. 말차는 찻잎을 볶아서 가루로 만든 다음 솥에 넣고 끓 여 마시며, 병차는 찻잎을 찌거나 압축해서 떡 모양으로 만 든 다음, 불에 말려서 다시 가루로 만들어 솥에 넣고 끓여 마시는 것이다(Lu 760; Busan Museum 2008). 당대에는 병차를 구운 후 가루를 내어 솥에 끓여서 마시는 자차법(煮 茶法)이 유행하였다. 오대(五代)에는 다법이 변화하여 말차 를 그릇에 넣고 탕병으로 끊인 물을 부어서 풀어 마시는 옥 차법(沃茶法)으로 소금을 넣어 간을 맞추는 방법은 사라지 게 된다(Lee 2010a). 송대에는 병차를 더 이상 굽지 않고, 솥에서 차를 끓이지 않으며, 은이나 철로 된 물병인 탕병을 사용하였다. 먼저 물을 끓이고 뜨겁게 데운 다완에 찻가루 를 넣은 후, 다완에 다시 직접 끓는 물을 조금씩 부어서 차 선으로 충분하게 저어서 혼합하였다. 송대에는 격불로 생긴 포말(泡沫)의 음차 방식의 유행으로 다완도 당대의 청자와 달리 복건성 건안(建安)에서 제작된 천목차완(天目茶碗)의 발달을 가져온다.
본 연구의 고분벽화에 묘사된 음차법은 송대에 유행하던 음차법인 점차법으로 탕병이 주로 묘사되어 있다. 먼저 <Figures 4, 9, 15, 17>과 같이 차를 가루로 된 말차를 준비 한다. 다음으로 <Figures 1, 6, 9>와 같이 차시로 찻가루인 말차를 차완에 넣는다. 그 후에는 <Figures 1, 6, 7, 9, 10, 12>와 같이 탕병의 숙수(熟水)를 직접 차완에 붓는 점차하는 모습을 묘사하였으며, 동시에 <Figures 13, 15>과 같이 차선 으로 격불하여 생긴 차 거품인 포말을 즐기는 점차법이 표 현되어 있다. 고려 대외교류국의 시기별, 지역별, 계층별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고분벽화에는 그 당시 유행하던 점차법 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명태조 주원장은 1391년(洪武 24年)에 “용봉단차 만드는 것을 금지하고 어디에서나 어린 싹에서 딴 아차를 진상하라 (罷造龍團, 一照各處, 採芽以進)”고 조서를 내렸다. 황제가 단 차(團茶) 제조를 금지시키자, 그 후 궁궐로 헌납하는 차는 모 두 산차로 바뀌면서, 뜨거운 물에 차를 우려마시는 잎차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명대에 이르러 산차가 전면적으로 보급 되기 시작하면서, 차를 끓는 물에 불려서 마시는 산차포차법 (散茶泡茶法)으로 변화한다. 과거의 차를 마시는 복잡한 음용 법에서 벗어나 차의 자연적인 맛을 맛볼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오늘날 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는 음차법이다(Kim 2008; Lee 2012). 이와 같이 다양한 시대적 음차법의 공존은 차 산업과 차구의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Suh 2005).
2)차구
당나라 육우의「차경」에는 스물다섯 가지의 차기(茶器)로 분류하였다. 풍로 또는 재받이인 회승(灰承), 숯 광주리인 거 (), 숯을 가르는 탄과(炭), 부젓가락인 화협(火), 차를 끓이 는 솥인 복(), 솥을 올려놓는 교상(交床), 집개인 협(莢), 차 를 보관하는 종이 주머니인 지낭(紙囊), 차를 가루로 만드는 연(石展) 또는 불말(拂末), 차의 가루를 체치는 나(羅)와 이를 저 장하는 뚜껑이 있는 합인 나합(羅合), 찻숟가락의 일종인 칙 (則), 물통인 수방(水方), 물을 거르는 자루인 녹수낭(水囊), 표 주박인 표(瓢), 대젓가락인 죽협(竹), 소금단지인 차궤(鹵) 와 주걱인 게(揭), 뜨거운 물을 식히는 그릇인 숙우(熟盂), 찻 그릇인 완(), 주발을 담는 삼태기 또는 광주리인 분(), 솔 인 예(), 개숫물통인 척방(滌方), 찌꺼기통인 재방(滓方), 성 긴 비단으로 만든 수건인 건(巾), 찻그릇을 전부 진열하는 구 열(具列), 모듬 바구니인 도람(都籃)으로 구성되어 있다(「茶 經」四之器). 당대의 법문사 지궁(法門寺 地宮)에서 1987년 은제풍로(風爐), 부젓가락인 은제화협(火), 분말차를 만드는 유금홍안문은차연자(金鴻雁紋銀茶石展子), 찻 가루를 체치는 유금선인가학문호문좌차나자(金仙人駕鶴紋壺門座茶羅子), 유금은구합(金銀龜盒), 찻숟가락의 일종인 유금비홍문은칙 (金飛鴻紋銀則), 소금단지인 유금뇌유마갈문삼족가은염태 (金紐摩紋三足駕銀鹽台)와 차의 포말을 뜨는 주걱인 유금 만초문장병작(金蔓草紋長柄勺) 등이 발굴되었으며, 이는 당 의 황제 희종(僖宗, 860-873年)이 생전에 쓰던 실물자료로 868-869년 사이에 왕실공방인 문사원(文思院)에서 제작된 것 으로 파악되었다(Guo & Wang 2007; Lee 2010b).
송의 인종(1010-1063)시기에 채양의「다록, 1052년」에는 차를 따뜻한 불에 쬐어 색과 향미를 개선하는데 사용하는 대 나무로 엮은 차배(茶焙), 차를 보관하는 대바구니인 차롱(茶 籠), 차를 부수는데 사용하는 침추(砧椎), 금과 철로 된 차를 구울 때 사용하는 차령(茶鈴), 차를 가루로 만드는 차연(茶石展), 차의 가루를 체치는 차나(茶羅), 찻그릇인 찻잔(茶盞), 찻숟 가락인 차시(茶匙), 물을 끓이는 탕병(湯甁)의 아홉가지로 분 류하였다(Cai 1936). 북송 휘종(1082-1135)의「대관다론, 1107년」에서는 차연(茶石展), 차나(茶羅), 잔(盞), 선(), 병(甁), 작(勺)의 여섯 가지로 분류하였다(Suh 2004). 송대 심안노인 의「차구도찬, 1269년」에는 차를 굽는 용도로 사용하는 대 나무로 짠 사각형 차배롱(茶焙籠)인 위홍려(韋鴻月慮), 병차를 부수는 나무망치인 목대제(木待製), 병차를 가는 금법조(金 法曹), 차를 가루로 만드는 석전운(石轉運), 표주박의 호원외 (員外), 고운가루로 걸러내는 체인 나추밀(羅樞密), 차의 표면에 묻어있는 이물질을 제거하는 종종사(宗從事), 옷칠한 잔탁 칠조비(漆雕秘), 세로줄 문양이 있는 도자기 찻잔인 도 보문(陶寶文), 찻물을 끓이는 탕병인 탕제점(湯提點), 격불을 위한 솔인 축부수(竺副帥)와 찻수건인 사직방(司職方)의 열 두 가지로 분류하였다(Guo & Wang 2007).
본 연구의 고분벽화에는 연차, 차연, 석마, 차발, 저도차, 화검, 차검, 탕병, 대반구탕병, 풍로, 탄화분, 집호, 자분, 주 호, 주자, 온완탕병, 찻잔, 잔탁, 탁잔, 봉수차시, 차시, 차선 등이 묘사되어 있다. 이들 차구를 채양의「다록」, 심안노 인의「차구도찬」과 북송 휘종의 「대관다론」의 차구들을 종합하여 기능별로 분류하였다. 먼저 차를 가루로 만드는 석 전운과 같은 기능의 연차기, 찻물을 끓이는 탕병인 탕제점 기능의 탕차기, 도보문 찻잔과 옷칠한 잔탁 칠조비로 구성 된 음차기, 그리고 격불을 일으키는 솔인 축부수와 차선, 찻 숟가락인 차시 등의 부속 차구들의 네 종류로 분류하여 <Table 2>에 정리하였다.
연차기
연차기는 병차를 부수어 차 가루로 만드는 용도의 차구이 다. <Figures 4, 7, 8, 9>에는 차를 가루로 빻는 연차, 차연 이 있고, <Figure 15>의 왼편에는 차를 가는 맷돌모양의 석 마가 놓여 있다. <Figure 17>에는 저도차를 양손으로 쥐고 차 가루를 만들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Figure 14>에서는 차말(茶末)이라고 쓰인 개관이 있다. 이는 병차가 아닌 말차의 음다법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탕차기
탕차기는 불을 이용하여 차를 준비하는 관련 차구들로 찻 물을 끓이는 풍로와 탕병 등이 포함되어 있다. <Figure 1>의 좌측 바닥에는 불을 지피는데 필요한 부집게인 화검이 하나 놓여 있다. <Figures 4, 6, 8, 9>는 풍로, 탄화분 위에 <Figures 4, 6, 7, 8, 9, 10, 11, 17>와 같이 탕병이 놓여 있고, 차를 위한 뜨거운 물인 숙수를 준비하는 장면을 묘사 하고 있다. 채양의「다록」에서는 탕병, 송대 심안노인의 「차구도찬」에서는 탕제점, 북송 휘종의「대관다론」에서는 병이라는 기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차를 따르는 기능 의 집호, 주호, 주자, 온완탕병이라고 호칭하였다. <Figures 4, 5>에서는 집호, <Figures 12, 13, 16>에서는 주호, <Figure 15>에서는 주자라고 기명으로도 설명하였다. 차구의 탕차기는 주구(酒具)에서 따르는 기능만을 위한 주주자(酒注 子)와 다르게 탕병은 물을 끓이고 따르는 용도를 겸용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Table 2>에서 탕차기는 두 칸으로 나누어 풍로 위에서 끓 이는 기능, 점차하거나 탁자위에 놓인 주차기로 분류하여 정 리하였다. <Table 3>은 고분 벽화에 묘사된 탕병과 점차하 는 장면을 정리한 표이다. <Figure 6>의 경우, 원형의 탄분 위에 있는 탕병과 점차하는 주차기의 탕병은 황색으로 서로 동일한 기형으로 보인다. <Figures 8, 11, 13, 15, 16>의 탕 병은 심안노인의「차구도찬」에 묘사된 탕제점과 유사하며, 특히 주구(注口)가 뽀족하고 길어서 찻잔에 점차할 경우 차 의 거품과 격불이 잘 일어나도록 고안된 형태이다. 이는 당 대에서와 같이 차를 더 이상 굽지 않고, 솥에서 차를 끓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송대에는 주로 은이나 철로 된 물병을 탕병으로 사용하였다(Kim 2008).
음차기
음차기는 차를 마시는데 사용하는 찻잔을 말한다. <Table 4>와 같이 대부분의 찻잔은 잔탁이 받쳐져 있다. 먼저 잔탁 은 찻잔을 받치는 기능의 용도로 간편하고 안전하게 뜨거운 물을 찻잔에 붓는 작업, 찻잔을 이동하기에 수월 하고, 마실 때 뜨거운 잔을 손에 직접 잡지 않고 마실 수 있는 등 다양 한 용도로 고안되었으리라 본다. 잔탁의 기원은 당대 이광우 (李匡又)의「자가집(資暇集)」에서 뜨거운 찻잔을 받쳐서 손 을 데이지 않도록 사용하기 위하여 고안한 찻잔의 받침대라 는 기록이 있다(Xiong et al. 1994). 잔탁이 잔과 함께 조합 되어 있을 때는 탁잔이라 부른다. 잔탁은 남북조 시대 이후 부터 제작되었고 금·은기 및 칠기, 자기 등 다양한 재질로 존재하였다(Lee 2012). 고려의 경우에도 잔탁을 사용하였으 며, Lee(2007)는 생산지와 소비지의 발굴 유물을 통하여 고 려의 자기 잔탁을 분류하여 기형의 변천을 고찰하였다.
음차기의 찻잔은 차의 맛을 직접 음미할 수 있는 용기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본 연구의 고분벽화에는 물 을 끓이고 뜨겁게 데운 찻잔에 찻 가루를 넣은 후, 찻잔에 직접 끓는 물을 조금씩 부어서 차선으로 충분하게 저어서 혼 합하는 점차법이 표현되어 있다. 점차법의 핵심적인 차구는 찻잔으로 밑이 좁고 구연부가 넓은 완의 형태로 대부분 묘 사되어 있다.
부속 차구들
<Table 2>에서 부속 차구는 차시, 차선 등을 포함하였다. 먼저 차시는 차를 뜨는 숟가락으로 차칙(茶則)이라고도 한 다. 말차용 차시는 손잡이 뒤쪽에 고리가 달려있어 휘저으면 거품이 일어나게 만든 것도 있다(Lee 2004). <Figure 1> 봉 수차시로 찻잔에 차를 넣고 있는 점차 장면을 표현하고 있 다. <Figure 4> 탁자 위에 차선, 차시 등이 있다. <Figure 7>에서는 흑탁백잔의 차말을 차시로 섞고 있으며, 우측 사람 은 황색 탕병으로 점차하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Jung (2010)은 송대에서 원대의 고분에서 발굴된 차시의 변천을 연구하였다. 다음의 차선은 차의 격불을 위한 차구이다. <Figure 8>의 탁자 위에는 차선이 놓여 있고, <Figure 14> 의 탁자 위에는 차선과 “차말”이라고 개관이 있다. <Figure 17>의 탁자 위에는 차선이 있고, 차를 가루로 만드는 저도차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벽화는 다음의 과정이 생략되어 있으나 <Figures 13, 15>와 같이 찻잔의 차를 차선으로 격 불하여 마시는 점차법을 표현하려는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Ko(2009)는 한국, 중국과 일본의 차 그림에 나타난 차선을 통하여 음차문화와 관련하여 비교하였다. 차선은 남송대의 직선형 차선에서 원대의 통형 차선, 무로마치시대의 고산(高 山)차선, 조선 중기의 오죽절(五竹節)차선으로 변천하였다. 본 연구의 <Figure 13>과 <Figure 17>에서 는 대부분 직선형 차선으로 묘사되어 있다. 다음은 기타 차구들로 <Figure 1> 의 과반과 <Figures 4, 6, 7, 8, 9, 13, 17>의 색깔, 크기와 형태가 다른 황색과 홍색의 대함합과 소함합, 방합, 원합의 뚜껑이 있는 바구니 모양의 상자들이다. 재료별로 보면 나무 로 만든 함합, 옻칠을 한 칠합과 등나무로 만든 등투병 케이 스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사두는 퇴주기(退酒器), 타호(唾壺)라고도 부르 며, 송대의 차구에는 분류되어 있지 않으나 <Figures 2, 8, 9>에서 사두를 들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Lee(2010a) 는 사두와 타호의 기능과 용도에 관련하여 중국의 옛 문헌 이나 현대의 연구자들도 혼동하고 있거나 때로는 혼용해서 부르는 경우가 많다고 하였으며, 당, 송, 요대의 유물자료와 벽화의 타호는 차문화와 관련성을 언급하였고, 중국과 고려 청자 타호의 제작시기를 비교 연구하였다. 또한 Suh(2004)와 Kim(2008)은 불교 선종의 선승(禪僧)들이 차를 마시게 되면 서 사원을 중심으로 차와 불교가 융합되면서 서민층과 북방 계 유목민족에게도 널리 보급되었다. <Figure 6>에서는 탁자 위에 불교경전인「상청정경(常淸靜經)」, 「금강반야경(金剛 般若經)」과 향로 등의 불교적 요소가 묘사되어 있으며, 이 는 차와 불교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벽화이다.
IV.요약 및 결론
본 논문은 고려 대외 교류국인 송, 요, 금, 원의 고분벽화 에 나타난 차구와 음차법에 관한 내용이다. 차구는 용도에 따라 연차기, 탕차기, 음차기와 기타 부속차구의 네 가지로 분류하였다. 먼저 연차기는 병차를 차말로 만드는데 필요한 차연, 석마, 저도차 등이 묘사되었다. 탕차기는 물을 끓이는 데 필요한 풍로와 탕병이 함께 묘사된 경우가 대부분이며, 차구에서의 탕병은 끓이는 탕차기와 숙수를 따르는 주차기 의 기능을 함께 겸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음차기는 대부분 찻잔과 잔탁이 한 벌로 된 탁잔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뜨거 운 물을 찻잔에 직접 붓거나, 이동하고 마시는데 불편하지 않게 사용하는 방법들이 표현되어 있었다. 음차법은 송대에 유행하던 점차법으로 탕병의 숙수를 직접 탁잔에 부어 차시 로 혼합하고, 차선으로 격불하는 모습 등도 생생하게 묘사되 어 있었다. 또한 불교경전과 향로 등의 불교적 요소가 묘사 되어 있으며, 차와 불교의 관련성이 흥미롭게 표현되어 있었 다. 남방계 한족의 음차법이 북방계 유목민족인 요, 금, 원대 의 벽화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이후 명대에 는 산차포차법의 간편한 음용법의 등장으로 차구의 변천에 도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원대는 명대 이 전의 차 문화의 과도기적인 시기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에서 다루지 못한 고분벽화에 묘사된 차구와 고고학 적 발굴 유물과의 관련성 연구가 뒷받침된다면 차후 고려청 자 차구의 음식문화적 인식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 기초 자료로 활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