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서 론
고려의 전성기인 11세기 후반에는 서북쪽의 거란족인 요 (遼)에 대한 화평정책과 동북지방의 여진족인 금(金)에 대한 교린정책(交隣政策)을 베풀고, 한족인 송(宋)과 교류하면서 비교적 나라의 안정을 회복하였다. 고려시대는 대외적으로 외국의 침략이 많았고, 대내적으로는 무신의 난으로 다사다 난한 시기였다. 고려는 이들 대외교류국과 교류하면서 다양 한 금속기와 청자 식기를 사용한 한국음식의 변천시기라고 할 수 있다(Kang 1989). 그 당시 청자를 식기로 사용한 국 가는 중국과 고려뿐이다. 중국의 경우, 화상석(畵像石)과 고 분벽화(古墳壁畵)에는 실제 생활모습이 기록되어 있어서 당 시 사람들의 의·식·주의 생활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Han 2009; Ji 2011a). 그리고 최근에는 고분벽화 의 도상분석은 물론이고 인문학적 시각으로 작품의 해석을 시도하는 융합적인 연구 방법론이 끊임없이 대두되고 있다 (Zheng 2010).
한반도의 고분벽화는 고구려 시대에 크게 성행했으나, 벽 화를 묘제로 사용하지 않았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벽 화가 급속히 사라지게 되었다. 고려와 조선 초기 고분벽화의 대부분은 북한의 개성주위에 분포하고 있다. 남한에는 안동 시 서삼동(西三洞), 거창군 둔마리(屯馬里), 파주군 서곡리(瑞 谷里)와 조선 초기에 조성된 밀양시 박익(朴翊, 1420년)의 고 분들이 남아 있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회화는 주로 불화(佛 畵)가 많으며 일반 감상용 회화가 많지 않다. 따라서 고분벽 화는 일반회화의 부족한 양상을 보충해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Han 2005). 이와 같이 한반도의 고분벽화는 대 부분 북한과 중국에 위치하고 있어서, 고구려 고분벽화(Park 2007; Jeon 2008), 고려 고분벽화(Ji 2011a; 2011b), 고려 및 조선 초기 고분벽화(Han 2005) 연구는 중국의 고분벽화 와 관련하여 한반도의 고분벽화를 해석하고 있다. 현재 확인 된 고려벽화의 주제는 주로 십이지(十二支), 송(松)·죽(竹)· 매(梅)의 나무와 꽃, 사신도(四神圖), 팔괘도(八卦圖) 등이다 (Han 2013).
고려는 수준 높은 청자제작 기술을 보유한 국가로 다양한 주구(酒具)도 제작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최근에는 태안 마도 1 · 2 · 3호선의 음식명 목간(木簡)은 저장용기인 청자매병 (梅甁)과 도기호(陶器壺)가 함께 인양되어 고려 전·후기의 음 식문화를 다각적으로 알 수 있다(Koh 2014; Koh 2015). 본 논문은 선차적으로 고려 대외교류국의 고분벽화에 묘사된 주 구(酒具)를 파악하여 차후 고려청자의 용도별 연구의 기초자 료로 활용하고자 한다.
II.연구 내용 및 방법
고려는 곡주(穀酒) 중심의 재래주(在來酒)가 있었으며 12 세기 전반부터 외래주(外來酒) 유입이 되기 시작한다(Chang 1996; Koh 2011). 술은 고려 왕실의 공식적인 제사, 향연, 사신접대, 약용, 하사품 및 혼례 등에 사용되었던 필수적인 발효음료로 왕실에서부터 서민층까지 폭넓게 음용되었다(Koh 2011). 특히 고려시대고려도경의 매병(梅甁)은 주준(酒尊), 와 준(瓦尊)으로 술을 저장하는 용기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왕 실에서 술과 관련된 부서인 을유명사온서(乙酉銘司署), 양 온(良), 덕천(德泉), 의성고(義成庫)의 관서명(官署銘) 매병 의 용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Koh 2009). 태안 마도 2호 선에서 인양된<청자 상감국화모란유로죽문 매병 및 죽찰(보 물 제 1783호)>과 <청자 음각연화절지문 매병 및 죽찰(보물 제 1784호)>에는 참기름과 좋은 꿀을 담았다는 용례도 있다 (Koh 2014).
고려시대 매병 연구는 미술사 분야에서 고고학적 연구와 함께 꾸준하게 연구되어 왔다. 매병은 북송 말에서 남송대에 이르는 시기에 널리 유행했던 기물로 주경(酒經), 주경(酒京), 경병(京甁), 한병(韓甁), 외(), 뢰() 등으로 다양하게 불 렀으며, 주로 술을 담던 매병을 지칭하는 용어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 요, 금대에도 매병은 주기(酒器)로 쓰였는데, 관련 기록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매병에 술과 관련된 명문(銘 文)과 산동의 노황옥두단(魯荒王朱檀)과 계림의 정강온유왕 주이도(靖江溫裕王朱履燾)묘에서 발견된 매병 안에는 술이 담겨 있는 실례를 확인할 수 있다. 청대 이전의 원대에 오면 일부에서는 국화꽃이 꽂혀있는 매병을 들고 있는 동자의 모 습을 회화에서 볼 수 있다(Kim 2008). 고려시대 매병에 관 한 최근 연구는 Kim(2008)의 논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이상 과 같이 매병은 음식을 저장하고 담았던 용도 외에도 다양 하게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연구내용은 고려 대외교류국의 고분벽화에 묘사된 주구(酒 具)를 구성하고 있는 기물들과 그들의 용도를 음식 문화적 차원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연구방법으로 첫 번째는 최근에 출판된 Xu(2012)의「The complete collection of murals unearthed in China (中國出土壁全集 1-10卷)」에서 고려 대외교류국인 송, 요, 금, 원의 벽화를 중심으로 술과 관련된 제목과 내용의 벽화 20점을 선정하였다. 동일국가의 중복된 벽화 3-4점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술과 관련된 제목이 있는 벽화에는 대부분 매병이 묘사되어 있었다. 두 번째는 중국학 자들의 벽화를 설명한 내용과 기명(器皿)은 수정 없이 정리 하였다. 다만 술(酒)의 영문 번역을 포도주인 wine으로 표기 한 것이 부적합하여 중국식 발음인 jiu(酒)로 표기하였다. 한 문의 표기방식은 간체(簡體)로 되어 있어서 한국식 번체(繁 )로 변환하였다. 세 번째는 고분벽화에서 묘사된 주구는 상주(商周)시기 고분에서 발굴한 청동주구(靑銅酒具)의 분류 법을 기준으로 하였다(Chen 1994). 주구는 용도에 따라 발 효한 술을 저장하는 성주기(盛酒器), 술을 따르는 주주기(注 酒器), 술을 마시는 음주기(飮酒器) 등으로 분류하였다.
III.결과 및 고찰
1.고려 대외교류국의 고분벽화
<Table 1>은 12-14세기의 고려 대외교류국의 주구와 관련 된 고분벽화를 시대별로 정리한 표이다. 이들 벽화는 1974- 2008년 사이에 발굴된 것으로, 하북성(河北省), 하남성(河南 省), 내몽고(內蒙古), 산서성(山西省), 섬서성(陝西省), 북경시 (北京市) 등에 분포되어 있다. 당대(唐代)에는 후장(厚葬)풍습 으로 분묘의 벽화가 화려하였으나, 송대에 오면 박장(薄葬) 으로 바뀌면서 고분에 벽화를 별로 그려 넣지 않게 되고, 화 려한 분위기의 벽화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요와 금의 침공으로 그마저도 파괴되었다. 요와 금은 유목민족으로 북 송과 남송으로부터 많은 조공을 받아 분묘에도 여유로운 투 자를 하였기 때문에 요대에는 상당히 많은 고분벽화가 조성 되어 당대이후의 중국의 벽화를 대표하고 있다. 이후 원대에 는 그동안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벽화의 고분 수가 급속히 줄 어든다(Han 2009)
1)송(宋)의 벽화
중국을 통일한 송나라와 고려의 외교관계는 문종(文宗)에 서 인종(仁宗)에 이르는 약 1세기 동안 가장 친밀하였다. 송 나라는 해상무역이 발달했던 만큼 해상을 이용한 식품교류 가 많았다. 고려 중엽에 상류층의 기호품이었던 사탕과 조미 료용 후추는 송과의 교역을 통해 들어왔다(Kang 1989). 송 의 문화는 고려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는데 특히 고려청 자의 발달에 이바지하였다. 송의 경제체제를 도입하면서 성 종(成宗) 983년에 주점(酒店)이 개설된다. 목종(穆宗) 1002년 에는 주점과 다점(茶店)이 개설되었다. 숙종(肅宗) 1104년에 는 주식점(酒食店)이 설치되어 화폐사용을 장려하는 송의 경 제체제를 수용한다(Park 2008). 송나라에서 유입된 외래주는 문종(文宗) 1078년과 1079년에 행인자법주(杏仁煮法酒)가 들 어온다. 송의 황제가 보낸 일종의 약용주로 해석할 수 있다. 계향어주(桂香御酒)는 1117년 송나라의 진공사(進貢使)로 갔 던 이자겸(李資謙)에 의해 유입되었다(Chang 1996; Koh 2011).
송대에는 묘주도(墓主圖)가 주로 그려졌으나, 매병과 함께 그려진 묘주도 벽화는 많지 않다. 그리고 술과 관련성이 명 확하지 않아서 본고에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북송시기의《봉 주도(奉酒圖)》벽화는 <Figure 1>에 나타내었다. 2008년 하 남성 형양시 귀서촌(河南省滎陽市槐西村)묘에서 출토되어 원 지(原址)에 보존되어 있다. 벽화는 묘실 북쪽 벽의 하단 좌 측에 있다. 시녀들의 높게 빗어 올린 머리에는 긴 장신구가 꽂혀 있다. 상의는 흑색과 적색의 꽃문양이 있는 교령배자(交 領褙子)를 입고 있다. 좌측 시녀는 옅은 황색 주름치마를, 우 측 시녀는 꽃문양이 있는 주름치마를 입고 있다. 좌측 시녀 는 양손으로 뚜껑이 있는 흑색 매병을 들고 앞으로 향하고 있다. 우측 시녀는 좌측 시녀를 뒤돌아보면서, 양손으로 한 개의 배(杯)가 놓여 있는 화형권반(花形勸盤)을 들고 있다(Xu 2012 Vol. 5).
2)요(遼)의 벽화
고려는 모화사상(慕華思想)의 영향으로 송나라와 외교를 맺고 있었으며 요와는 단순한 국교조차 맺지 않으려고 하였 다. 그러나 939년에 거란의 침입으로 현종(顯宗 10년, 1019) 시기에 정식 국교까지 맺게 되었다. 이로써 각 방면의 문화 적 교류와 함께 음식생활면에서도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 시 기의 교류는 고려 쪽에서 보다는 요나라 쪽에서 고려의 음 식문화를 많이 받아들였을 것으로 보인다(Kang 1989).
<Figure 2>는 내몽고 지역의 요대 1087년(大安三年)의 《봉주도》벽화이다. 1997년 내몽고 파림우기 소불일갈 숙 목요경릉 배장묘 야율홍세(內蒙古巴林右旗所不日口葛肅穆遼慶 陵陪葬墓耶律弘世)묘에서 출토되어 원지에 보존되어 있다. 벽화는 서쪽 귀실(耳室) 복도 남측에 있다. 한족(漢族)의 남 자하인 한명은 검은 두건인 흑건(黑巾)을 쓰고, 조색( 色)의 둥근 목돌레 선이 있는 소매가 좁은 긴 옷을 입고 있다. 안 쪽에는 빨간색 교령(交領)의 상의를 입고, 빨간색 허리띠를 매고 있다. 한 손에는 권반(勸盤)과 잔(盞)을 들고, 다른 한 손 은 주자(注子)를 쥐고 있다.
하북성 선화(宣化)지역에 몰려있는 장씨 집안과 북경 주변 에 거주한 한족(漢族)의 벽화에는 한족의 문화가 반영되었으 며, 거란인과 한족의 모습이 함께 묘사되어 있다(Han 2013). <Figure 3>은 하북성 지역 요대 1111년(天慶元年)의《향략 도(宴樂圖)》벽화이다. 1990년 하북성 선화 하파리 4호 한 사훈(河北省宣化下巴裏4號韓師訓)묘에서 출토되었다. 후실 (後室) 서남벽에 그려진 벽화에는 음악을 듣는 사람과 금(琴) 의 연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 악무(樂舞)하 는 사람 뒤에 있는 탁자 위에는 다구(茶具)와 주구(酒具)가 있다. 화면의 하단에는 뚜껑이 있는 세 개의 매병이 꽂혀 있 는 병가(甁架)가 있다. 우측의 긴 사각형 빨간색 탁자 위에 는 과합(果盒)과 칠반(漆盤)이 놓여 있고, 하얀 두건으로 머 리를 감싼 부인 한명이 앉아있다. 짧은 웃옷을 입고, 밑에는 긴 치마를 입고 원형 좌돈(坐墩)에 앉아있다. 손에는 탁잔(托 盞)을 들고, 음악과 춤을 열심히 감상하고 있다. 여자 옆에는 양손으로 반(盤)을 들고 있는 연장자 한명이 있다. 화면 좌 측에는 세 사람이 있는데, 중앙에 위치한 어려 보이는 한 사 람은 박수를 치고, 다리 구부리면서 금소리의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다. 중앙 위편에 위치한 사람은 몸은 여자를 향 하여 있고, 얼굴은 금을 치는 사람을 보고 즐겁게 박수를 치 고 있다(Xu 2012 Vol. 1). <Figure 4>는 하북성 지역의 요 대 1116년(天慶六年)《비주도(備酒圖)》벽화이다. 1974년 하북성 선화 하파리 1호 장세경(河北省宣化下巴裏1號張世卿) 묘에서 출토되어 원지(原址)에 보존되어 있다. 벽화는 후실 남쪽 벽의 서측에 그러져 있다. 중앙의 빨간색 사각 탁자위 에는 장반(長盤), 주잔(酒盞), 반구병(盤口甁), 집호(執壺)와 온완(溫碗) 등이 있다. 좌측 남자는 갈색의 목둘레선이 둥근 긴 옷을 입고, 허리띠를 들르고 있다. 양손으로 한 쌍의 술 잔인 주배(酒杯)가 놓여있는 갈색 권반(勸盤)을 들고 있다.
우측 사람은 조색( 色)의 목둘레선이 둥근 긴 옷을 입고, 허리띠를 들르고 있다. 손에는 흰색 집호(執壺)와 온완(溫碗) 을 들고 있다. 탁자 앞의 목가(木架)에는 세 개의 뚜껑이 있는 매병(梅甁)이 꽂혀있다. 매병 위에는 빨간색의 ‘張記’임라는 봉인(印封)이 그려져 있다(Xu 2012 Vol. 1). <Figure 5>는 하북성 지역의 요대 1117년(天慶七年)의《비주도》벽화이 다. 1989년 하북성 선화 하파리 5호 장세고(河北省宣化下巴 裏5號張世古)묘에서 출토되어, 원지에 보존되어 있다. 벽화는 후실 동남쪽 벽에 위치하고 있다. 좌측의 빨간색 탁자 앞에 는 거란인의 곤발( 發)머리를 남자시종의 오른손에는 봉 수주호(鳳首注壺)와 온완(溫碗)을 들고 있다. 흑색의 교각복 두(交月却巾業頭)을 쓴 연장자는 파란색 둥근 목돌레 선이 있고, 소매가 좁은 긴 옷을 입고 있다. 양손으로 화구주배(花口酒 杯)가 놓여 있는 권반(勸盤)을 들고 있다(Xu 2012 Vol. 1). <Figure 6>은 하북성 지역의 요대《비주도》벽화이다. 1998 년 하북성 선화 하파리 2구 2호(河北省宣化下巴裏2區2號) 묘 에서 출토되었고, 현재 원지에 보존되어 있다. 벽화는 묘실 서벽의 남측에 있다. 남자시종은 검은 두건인 흑건(黑巾)을 쓰고, 청녹색의 둥근 목둘레선이 있는 긴 옷에 황갈색 허리 띠를 하고, 검은 신발을 신고 있다. 빨간색의 높은 탁자 위 에는 집호(執壺)와 온완(溫碗), 주배(酒杯) 등의 용기가 있다. 높은 탁자 앞에 있는 노란색 소왜가(小矮架)에는 흰색 뚜껑 이 있는 매병(梅甁)이 한 개 꽂혀 있다. 왼 손에는 한 개의 완 (碗)이 놓여있는 반(盤)을 들고 있다. 오른손의 손가락을 들어 올리고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고 있다. 남자시종은 바쁘게 술을 준비하는 장면이 나타나있다(Xu 2012 Vol. 2).
<Figure 7>은 산서성 지역의 요대《비주, 기악도(備酒伎樂 圖)》벽화이다. 1991년 산서성 삭주시 시정부 공지(山西省朔 州市市政府工地)묘에서 출토되었다. 묘실 북쪽 벽에 있는 벽 화는 현재 보존되어 있지 않다. 좌측의 첫 번째 시녀는 비단 부채인 환선(紈扇)을 들고 있고, 다른 한 명은 탁반(托盤)을 들고 있다. 우측의 천으로 둘러진 높은 탁자 아래에는 세 개 의 주병(酒甁)이 있다. 탁자 뒤에 있는 남자 두 명은 술을 준 비하고 있다. 화면 우측에는 다섯 명의 악인(樂人)이 있다. 앞 에 한 사람은 춤을 추고, 뒤에 있는 네 사람은 연주를 하고 있다. 악기는 박판(拍板), 피리(橫笛), 필률()과 대북(大鼓) 으로 노래와 춤을 추는 장면을 표현하였다(Xu 2012 Vol. 2).
<Figure 8>은 내몽고 지역의 요대《봉주도》벽화이다. 1991년 내몽고 오한기 남탑자향 성흥태촌 하만자 5호(內蒙 古 敖漢旗 南塔子鄕 城興太村 下灣子 5號)묘에서 출토된 이 벽화는 묘실 동쪽 벽에 있었다. 현재는 오한기(敖漢旗)박물 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족의 복장을 입은 네 명의 남자 하인 은 모두 머리에 흑색 교각복두(交月却巾業頭)를 쓰고 탁자 옆에 서 있다. 우측의 첫 번째 사람은 흰색의 둥근 목둘레선이 있 는 소매가 좁은 긴 옷과 황색 중단(中單)을 입고, 양손으로 주준(酒尊)을 들고 있다. 두 번째 사람은 짧은 수염을 기르 고, 흰색 둥근 목둘레선 있는 소매가 좁은 긴 옷, 파란색 중 단을 입고, 빨간 허리띠를 하고 있다. 두 개의 황색 소잔(小 盞)이 놓여 있는 황색 권반(勸盤)을 양손으로 들고 있다. 세 번째 사람은 파란색 둥근 목둘레선이 있는 소매가 좁은 긴 옷을 입고 있다. 네 번째 사람은 둥근 목둘레선의 소매가 좁 은 긴 옷을 입고, 옷 앞자락을 허리 뒷부분에 집어넣고, 황 색 중단을 입고 있다. 밑에는 흰색 조돈(吊敦)을 입고, 마장 (麻鞋)을 신고 있다. 긴 수염이 있는 이 사람은 어깨에 양손 으로 뚜껑이 있는 주병(酒甁)을 받치고 있다. 중앙에는 구름 모양의 장식이 있는 다리로 된 사각 탁자가 있다. 그 위에는 과반(果盤), 주주(酒注)와 온완(溫碗)이 놓여 있고, 밑에는 뚜 껑이 있는 경병(經甁)이 하나 있다(Xu 2012 Vol. 3). <Figure 9>는 내몽고 지역의 요대《진주도(進酒圖)》벽화 이다. 1991년 내몽고 오한기 남탑자향 성흥태촌 하만자 1호 (內蒙古 敖漢旗 南塔子鄕 城興太村 下灣子 1호)묘에서 출토 되었고, 벽화는 묘실 서쪽 벽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는 오한 기(敖漢旗)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좌측의 첫 번째 시녀는 빨간색 중단 위에 흰 바탕 검은 꽃무늬 옷을 입고 있다. 그 위에는 소매가 좁은 옆이 트여진 흑색의 긴 옷을 입고 있다. 양손에는 백색의 주잔(酒盞)이 놓여 있는 빨간색 해당형 장 반(海棠形長盤)을 들고 있다. 두 번째 시녀는 올린 머리를 하 고 있다. 흰 바탕에 꽃무늬가 있는 옷 위에는 미색의 소매가 좁고, 옆이 트인 긴 옷을 걸치고 있으며, 검은 신발을 신고 있다. 양손으로 뚜껑이 있는 매병(梅甁)을 안고 있다. 주가(酒 架)에는 매병이 한 개 꽂혀있다. 세 번째 사람은 소매 긴 옷 을 입고, 탁자 안쪽에 서서 탁자 위에 있는 완구(碗具)를 닦 고 있다. 탁자는 빨간 주름이 있는 천과 미색의 검은 꽃무늬 장막으로 둘러져 있으며, 그 위에는 파란색 띠로 묶은 빨간 리본이 달려있다. 탁자위에는 항아리 모양의 관(罐), 완(碗), 식합(食盒) 등이 있다(Xu 2012 Vol. 3).
3)금(金)의 벽화
고려는 개국 초부터 북방에 여진이라는 이민족과 접경하 고 있었다. 여진족은 북방에서도 특히 함흥평야를 중심으로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고려를 침입하는 경우도 있었 으나, 귀화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고려에서는 여진족 귀 화인에게 벼슬을 주어 정착하게 하였으며, 이때 이들이 바친 공물(貢物)은 필마를 비롯하여 많은 문물의 교류가 있었을 뿐 아니라 음식생활에도 영향을 주었다(Kang 1989).
<Figure 10> 북경시 지역의 금대 1143년(金皇統三年)의 《진주도》벽화이다. 2002년 북경시 석경산구 팔각촌(北京 市石景山區八角村)묘에서 출토되어, 이 벽화는 묘실 서북쪽 벽에 있다. 현재는 수도박물관(首都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제일 좌측에 있는 사람은 계퇴병( 腿甁)을 들고, 옆에 사람 이 들고 있는 대준(大尊)에 술을 붓고 있다(Figure 10-detail). 우측의 한 명은 세건( 巾)을 들고 있고, 다른 한 명은 팔짱 끼고 서 있다(Xu 2012 Vol. 10).
<Figure 11>은 산서성의 금대 1161년(金正隆六年)의《봉 주산악도(奉酒散樂圖)》벽화이다. 1990년 산서성 상대동시 서구(山西省商大同市徐龜)묘에서 출토되었고, 벽화는 묘실 서 쪽 벽에 있다. 현재는 보존되어 있지 않다. 벽화의 윗부분에 는 대나무로 만든 죽렴(竹簾)과 장막()이 있다. 중앙의 높은 탁자 위에는 과반(果盤), 분(盆) 또는 주완(注碗), 대잔 (臺盞) 등이 있다. 탁자 앞에는 두 개의 주병(酒甁)이 있다. 탁자 좌측에 있는 시녀는 깊이가 있는 심복병(深腹甁)을 안 고 술을 따르고 있다. 탁자 뒤에는 두 명의 시녀가 있는데, 한 명은 얇은 책자를 들고 기록하고 있으며, 다른 한 명은 둥근 부채를 들고 있다. 시녀들은 쟁(箏), 필률(), 피리 (橫笛), 박판(拍板)으로 연주를 하고 있다. 탁자 제일 우측에 있는 시녀 한 명은 권잔(勸盞)을 들고 있고, 다른 한 명은 주 호(注壺)와 주완(注碗)을 잡고 있다(Xu 2012 Vol. 2). <Figure 12>는 산서성의 금대의《봉주도》벽화이다. 1994년 산서성 평정현 성관진 서관촌 1호(山西省平定縣城關金眞巾西關村1號) 묘에서 출토되었고, 묘실 서측 기둥 사이 벽에 그려져 있다. 원지에 보존되어 있다. 머리에 교각복두를 쓴 우측의 사람은 뒤돌아보며 뒤에서 따라오는 세 명을 부르고 있다. 두 사람 은 네모난 상자인 두상(斗箱)을 함께 들고 가고 있다. 상자 안에는 주단(酒壇)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두상 옆에 서 있 는 사람은 탁반(托盤)을 들고 있고, 탁반 안에는 소주병(小酒 甁)이 놓여 있다(Xu 2012 Vol. 2). <Figure 13>는 산서성 금대의《시주산악도(侍酒散樂圖)》벽화이다. 1988년 산서 성 대동시 남교(운중대학) 1호 금묘(山西省大同市南郊(雲中 大學)1號金墓)에서 출토되었고, 묘실 서벽에 그려져 있다. 현 재는 대동시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좌측의 높은 탁자위에 는 얇은 실로 짠 덮개가 있는 식반(食盤)이 있고, 그 안에는 과일이 담겨 있다. 그리고 편제(偏提), 잔(盞), 발(鉢) 등이 놓 여 있다. 탁자 좌측의 시녀와 남자 하인은 쟁반 위에 잔이 놓 여있는 반잔(盤盞)을 들고 있다. 악인(樂人)이 4명이 서 있다. 좌측부터 첫 번째는 필률(), 두 번째는 횡적(橫笛), 세 번째는 박판(拍板), 네 번째는 생(笙)을 들고 있다. 제일 우측 의 남자는 쟁반 위에 잔이 놓여있는 반잔(盤盞)을 들고 있다 (Xu 2012 Vol. 2).
4)원(元)의 벽화
고려는 고종 6년(1219)에 북방일대를 침범한 요나라를 몽 고군사의 힘을 빌려서 물리친 뒤 협약대로 몽고와 국교를 맺 게 되었다. 그러던 중 몽고의 사신이 국경에서 암살된 것을 기화로 고려정벌을 단행하였다. 고려는 원종에서 공민왕 초 에 이르는 약 90년(1270-1356) 동안 고려는 원나라에 예속 되어 간섭을 받게 된다. 그 동안 양국 간의 문화적 교류도 적지 않았다. 몽고의 언어와 풍속이 따라 들어오면서 불교의 영향으로 채식위주였던 고려의 음식은 육식으로 변화되어 갔 다. 특히 고려는 몽고인이 회회인(回回人)과 페르시아인으로 부터 수입한 증류주(蒸溜酒) 제조기술로 소주(燒酒)가 등장 하는 시기이다(Kang 1989; Chang 1996).
<Figure 14>는 섬서성에서 발굴된 1269년 원대(元至元六 年)의《행별헌주도(行別獻酒圖)》벽화이다. 1988년 섬서성 포성현 동이촌(陝西省蒲城縣洞耳村)묘에서 출토되었고, 벽화 는 묘실 서쪽과 서남쪽 벽에 있다. 현재는 섬서포성(陝西蒲 城)에 보존되어 있다. 중앙에는 4명의 남자가 있다. 우측에는 빨간색의 난간(朱欄), 가산(假山)과 파초(芭蕉)가 있다. 좌측 앞에서 오래된 나무에 말 두 필이 묶여 있다. 화면 중앙에는 떠나려고 하는 두 사람이 있다. 앞 사람은 모자챙을 뒤집은 가죽 모자를 쓰고, 좌임(左)의 빨간 긴 옷을 입고 있다. 허 리띠에는 반낭( 囊), 단도(短刀)가 매달려 있다. 흑색 신발 을 신고, 몸을 숙여 손을 내밀어 주잔(酒盞)을 받으려고 한 다. 뒤쪽에 있는 사람은 갓끈이 있는 모자챙을 쓰고, 둥근 눈 과 곱슬곱슬한 수염을 하고 있다. 옷은 담청색 좌임의 긴 옷 을 입고, 허리에는 빨간색 띠로 둘러져 있고, 손을 양 허리 에 대고 있다. 다른 두 사람은 땅에 무릎을 꿇고, 삼가 술을 올리고 있다. 앞으로 살짝 나온 한 사람은 머리에 검은 기왓 고랑 모양의 와릉모(瓦楞帽)를 쓰고 있다. 옷은 흰색 좌임 의 긴 옷을 입고, 허리에는 단도와 반낭이 매달려 있으며, 검 은 신발을 신고 있다. 양손으로 두 개의 주잔(酒盞)이 놓인 권반(勸盤)을 받들고 있다. 뒤쪽에 있는 사람은 갓끈이 있는 모자챙을 접은 가죽 모자를 쓰고, 빨간 목둘레선이 둥근 긴 옷을 입고 있으며, 양손으로 옥호춘병(玉壺春甁)을 들고 있 다. 우측에는 달려온 강아지 두 마리가 있다(Xu 2012 Vol. 7-I).
<Figure 15>는 산서성의 원대 1276년(元至元十三年)의《시 녀비주도(侍女備酒圖)》벽화이다. 2004년 산서성 둔류현 강 장촌 2호(山西省屯留縣康村2號)에서 출토되었으며, 벽화 는 묘실 서쪽 벽에 그려져 있다. 현재는 장치시(長治市) 박 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벽화에는 검은 테두리가 둘려져 있다. 좌측의 높은 탁자위에는 뚜껑이 있는 개관(蓋罐), 완(碗), 배 (杯), 권반(勸盤), 주준(酒尊)과 주작(酒杓), 그리고 마우(馬盂) 가 있다. 탁자 앞에 서 있는 두명의 시녀는 빨간색 꽃모양으 로 장식한 올린 머리를 하고 빨간색과 노란색 비단 치마를 입고 있다. 한 사람은 호(壺)를 들고 있고, 다른 사람은 권반 (勸盤)을 들고 있다. 화면 좌측 상단에 묵서로 “차위 한여익거 중(此位 韓汝翼居中)”이라는 제목이 기록되어 있다(Xu 2012 Vol. 2).
<Figure 16>은 섬서성의 원대 1288년(元至元二十五年)의 《진주도》벽화이다. 2001년 섬서성 서안시 원대 한씨(陝西 省西安市韓森寨元代韓氏)묘에서 출토 되었다. 현재는 서안시 (西安市) 문물보호고고소(文物保護考古所)에 소장되어 있다.
벽화는 묘실 서벽에 그려져 있다. 화면 남쪽에 있는 높은 탁 자 위에는 매병(梅甁), 개관(蓋罐), 작배(爵杯) 등이 있다. 탁 자 양 옆에는 다섯 명의 시녀가 있다. 남쪽부터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시녀는 짧은 적삼과 긴 치마를 입고, 신발은 운두 리(雲頭履)를 신었다. 네 번째 시녀는 양손으로 노란색 옥호 춘병(玉壺春甁)을 들고 있다(Figure 16-detail). 다섯 번째 시 녀는 양손으로 권반(勸盤)과 잔(盞)을 들고 있다. 몸은 남쪽 을 향하고, 머리는 뒤돌아서 이야기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 시녀는 높게 올린머리에 잠화(簪花)를 꽂고, 귀고리를 하고 있으며, 표정은 우아하고 생동감이 있다. 얼굴은 풍윤하며 입 술은 빨갛고, 고개를 돌려 뒤쪽을 보는 모습은 매혹적이고 다채롭다(Xu 2012 Vol. 7-II).
<Figure 17>는 1298년 산서성의 원대 1298년(大德二年)의 《온주도(溫酒圖)》벽화이다. 1986년 산서성 대동시 치륜창 1호(山西省大同市齒輪廠1號)묘에서 출토되었으며, 벽화는 묘 실 서쪽 벽에 그려져 있다. 현재는 보존되어 있지 않다. 중 앙에 긴 탁자 위에는 주준(酒樽)과 손잡이가 긴 장병작(長柄 勺), 탁잔(托盞), 뚜껑이 있는 항아리인 개관(蓋罐) 등이 있다. 탁자의 좌측에는 한 그루 화초가 화분 받침대 옆에 있다. 좌 측에는 여자아이 한 명이 팔짱 끼고 서 있다. 탁자 앞에 시 녀 두 명이 바닥에 꿇어 앉아 있다. 가운데는 네모난 두형탄 화분(斗形炭火盆)이 있다. 난로 안에는 탕병(湯甁) 한 개와 주단(酒壇) 두 개가 놓여 있다. 탁자 뒤에 시녀와 탁자 우측 에 있는 여아는 탁잔(托盞)을 각각 하나씩을 들고 있다(Xu 2012 Vol. 2).
<Figure 18>은 원대 1331년(至順二年)의《비주도》벽화 이다. 2002년 하북성 탁주시 화양로(河北省州市華陽路)묘 에서 출토되었고, 벽화는 묘실 서쪽에 있는 벽에 있다. 새로 운 위치에 이전되어 보존되어있다. 중앙의 긴 탁자 위에는 뚜껑이 있는 항아리인 개관(蓋罐), 개호(蓋壺)과 옥호춘병(玉 壺春甁)이 있다. 탁자 앞에는 세 사람이 있고, 탁자 뒤에 병 풍 우측에는 한 사람이 있다. <Figure 18-detail>의 탁자 앞 에 가장 왼쪽에 있는 시녀는 양손으로 과반(果盤)을 들고 있 다. 그 옆의 시녀는 양손으로 옥호춘병(玉壺春甁)과 손잡이 가 옆에 있는 파잔(把盞)이 있는 쟁반을 들고 있다(Xu 2012 Vol. 1). 그리고 도판의 묵서 내용과 해석은 다음과 같다.
“李秉述父積行誌 父正甦賓節生 却三拾餘年 嚴齊正五九月 又常懷濟衆之心 愛成人之美事 故秉知父百千年後 端居神道 也 後若或偶然見此壽堂祝死所 不所 感有吉應見而存 此 實有吉應 端不可以□有兇 □□□神人 李秉謹書□□□□”。
“이병이(李秉)가 아버지의 적행(積行)을 묘지에 기술하였으 니, 아버지는 절도 있게 사셨고, 갑자기 쓰러진 손님을 소생시 키고 절도 있게 산지 문득 30여년이고, 엄친의 초상에 정월, 5 월, 9월로 제사를 지냈으며, 또한 항상 많은 사람을 구제할 마 음을 품고 성인(成人)의 아름다운 일을 사랑하였다. 그러므로 병이(秉)는 아버지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신도(神道)에서 단정하게 살 것을 안다. 뒤에 만약 우연히 이 수당(壽堂)의 묘 를 훼손하는 자는 죽음을 당하리라. 이미 훼손되지 않았으니 느낌이 길하고 응함이 있어서 보존함을 보인 것이니, 이는 실 상 길하게 응함이 있는 것이니 끝에 가서도 □흉함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신인 이병이가 삼가 썼다 □□□□.”
묘주의 아들인 이병이가 묘주인 아버지 이의(李儀)의 덕행 을 찬미하는 내용으로 신(神)이 되길 기도하는 뜻에서 수당 (壽堂)을 훼손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 대한 인과응보적인 내 용이다(Hebeishengwenwuyanjiusuo et al. 2004; Zhao 2012).
<Figure 19>는 하남성에서 발굴된 원대의《봉주도》모본 벽화이다. 1993년 하남성 등풍시 왕상촌(登市王上村)묘에 서 출토되었으며, 벽화는 묘실의 서남벽에 위치하고 있다. 현 재는 정주시(鄭州市) 문물고고연구원에 보존되어 있다. 우측 시녀는 키가 크고, 둥글게 올린 머리를 하고 있다. 겉옷은 청 색 배자(褙子)를 입고, 앞이 뾰족한 신발을 신었다. 손에는 작은 술잔인 주배(酒杯)가 놓여 있는 흰색 권반(勸盤)을 들고 있다. 중간에 있는 시녀는 양쪽을 늘어뜨린 머리를 하고, 겉 에는 옅은 초록색 반비(半臂) 상의와 주름치마를 입고 있다. 손에는 살구(杏), 배(梨)와 참외(瓜)의 세 종류의 과일이 담긴 노란색 바구니인 반자(盤子)를 들고 있다. 좌측시녀는 둥근 올린머리를 하고 소매가 좁은 좌임(左) 저고리를 입고, 겉 에는 흰색 반비(半臂)와 흰색 치마를 입고 앞이 뾰족한 신발 을 신고 있다. 양손으로 백색의 옥호춘병(玉壺春甁)을 들고 있다(Xu 2012 Vol. 5).
<Figure 20>은 산동성에서 발굴된 원대의《봉주도》벽화 이다. 1985년 산동성 제남시 천불산 북록 제노빈관 원묘(山 東省濟南市千佛山北麓齊魯賓館元墓)에서 출토되었고, 벽화는 전실(前室)의 동북쪽 모서리(東北角)에 있다. 현재 제남시(濟 南市)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좌측에 있는 하인은 테두리 가 넓은 입모(笠帽)을 쓰고, 교령장포(交領長袍)를 입고 있다. 양손으로 옥호춘병(玉壺春甁)을 들고 서 있다. 우측에 있는 하인은 홍색의 둥근 원모(圓帽)를 쓰고, 소매가 좁은 교령장 포(交領長袍)을 있고, 대잔(臺盞)을 들고 있다. 화면 하단은 많이 훼손되어 벗겨져 있다(Xu 2012 Vol. 4).
2.주구(酒具)의 분류와 용도
<Table 2>는 벽화에 나타난 주구를 용도를 분류한 표이다. 상주시기 고분에서 발굴한 청동주구의 분류법을 기준으로 용 도에 따라 발효한 술을 저장하는 성주기, 술을 따르는 주주 기, 술을 마시는 음주기와 술을 뜨는 용도인 읍주기로 분류 하였다. 기타에는 주구의 부속적 용도로 사용하는 기물과 벽 화에 설명된 내용 중에 주구로 분류하기에 합당하지 않는 기 물이 포함되어 있다. 주구는 원대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정 리하였다.
먼저 원대 이전의 북송, 요, 금의 성주기인 매병은 주병(酒 甁), 경병(經甁), 계퇴병( 腿甁), 대준(大尊), 주단(酒壇), 주 준(酒樽, 酒尊)의 용어를 사용하였다. 매병은 병가(甁架), 목 가(木架), 소왜가(小矮架), 주가(酒架) 등의 받침대에 꽂혀있 다. 매병의 재질은 알 수 없으나 다양한 색깔로 묘사되어 있 다. <Figure 4>는 청자색, <Figures 6, 9, 12>는 흰색, <Figure 11>은 검정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Figures 7, 8, 9, 12-detail 1>의 매병은 붉은색의 뚜껑으로 표현하였다. <Figures 8, 10>의 매병은 가로줄 무늬가 있는 것이 형태적 으로 유사하다. <Figures 8>에서는 경병, <Figures 10>에서 는 계퇴병이라고 설명하였다. 특히 <Figure 4>의 매병 위에 “張記”라는 봉인이 있고 묘주인 張世卿의 성(姓)과 동일하여 묘주를 위해 제조한 술임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 다. <Figure 11-detail 1>에서 매병 뚜껑의 봉인과 매병에 “金□”라는 표시가 있고 정확한 표기를 알 수 없으나 <Figure 4>와 같이 묘주와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주주기는 주자(注子), 집호(執壺)와 온완(溫碗), 주주(注酒) 와 온완, 주호(注壺)와 주완(酒碗)으로 1벌로 구성되어 있다. <Figure 8>의 탁자 위에는 고급스러운 부드러운 곡선의 금 은주기(金銀酒器)의 일종으로 보이는 집호와 온완도 1벌로 구성되어 있다. <Figure 10>에서는 계퇴병( 腿甁) 형태의 매병을 들고 탁자 위에 놓여있는 대준(大尊)에 붓고 있는 과 정을 묘사한 흥미로운 표현이다. 탁자 위에는 집호(執壺)와 온완(溫碗)이 1벌로 구성되어 있다. <Figure 11>에서는 심복 병(深腹甁)을 안고 술을 따르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Figure 13>의 손잡이가 옆에 달린 편제(偏提)는 술을 따르 는 주주기의 용도로 사용한다(Xiong 1994). 음주기는 배(杯), 잔(盞), 주잔(酒盞), 주배(酒杯), 화구주배(花口酒杯), 완(碗), 소잔(小盞), 발(鉢)로 설명되어 있다. 잔의 형태는 다양하나, 잔 받침이 함께 묘사되어 있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원대에 오면 옥호춘병(玉壺春甁), 마우(馬盂), 개권(蓋罐)과 주준(酒尊)이 등장한다. <Figure 15>는 탁자 위에는 뚜껑이 있는 항아리인 개권, 주준과 주작(酒杓), 마우, 배(杯), 완(碗) 이 놓여 있다. 두 명의 시녀는 호(壺)와 배(杯)가 놓여 있는 권반을 각각 들고 있다. 개권은 술을 저장하는 성주기이며, 주주기는 호와 마우이며, 음주기는 배이며, 읍주기는 주작으 로 분류할 수 있다. <Figure 16>은 매병, 개관, 작배(爵杯), 옥호춘병, 권반과 잔이 묘사되어 있다. 성주기는 매병, 개관 이고, 주주기는 옥호춘병이며, 음주기는 작배와 잔으로 용도 별로 분류할 수 있다. <Figure 17>의《온주도》벽화에는 개 관, 주단, 주준과 장병작, 탁잔 등이 있다. 제목으로 유추한 다면 술을 따뜻하게 덥히는 과정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두형탄화분(斗形炭火盆) 안에는 탕병(湯甁) 한 개와 주단(酒 壇) 두 개가 놓여 있다. 읍주기인 손잡이가 긴 장병작(長柄 勺)은 주준 안에 놓여있다. <Figure 18>은 개관, 개호, 옥호 춘병과 손잡이가 옆에 있는 파잔(把盞)이 묘사되어 있다. 성 주기는 개관, 개호이고, 주주기는 옥호춘병, 음주기는 파잔이 등장한다. 그리고 묘주의 아들인 이병이가 묘주인 아버지 이 의(李儀)의 덕행을 찬미하는 내용에서 묘주의 이름도 알 수 있다. <Figure 19>는 주주기인 옥호춘병과 음주기인 주배가 묘사되어 있다. 이상과 같이 원대에 오면 성주기의 경우 매 병 대신에 개권이 등장하고, 주주기는 집호와 온완 대신에 옥호춘병이 등장하고, 그 외에도 마우(馬盂)가 등장한다.
원대의 음용한 주류는 재래주인 황주(黃酒)이외에 서양의 포도주와 증류의 기법을 이용하여 만든 증류주인 백주(白酒), 아라길(阿剌吉)을 들 수 있다. Yang(2008)은 원대의 주구형 태의 변천은 다양한 술의 음용으로 변화하였다고 하였다. 중 국의 증류주 도입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하북성 승덕시 청 룡현(河北省 承德市 靑龍縣)에서 1161년 금대 동증류기(銅蒸 溜器, 높이 41.6 cm)가 발굴되었다. 이는 가열 솥 위에 냉각 기가 조합된 형태이다. 그리고 원대에 오면 증류주 주법(酒 法)으로 술을 가열 증류한 증류주를 합라기(哈拉基)라고 불 렀다(Zhao 2006). 원(元)을 세운 몽고인들은 한인문화와 융 합하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몽고적인 식생활을 유지하였다. 거가필용사류전집(居家必用事類全集)의 주국류(酒麴類)에는 누룩으로 술을 만드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 남번( 南番)의 소주(燒酒)인 아리걸(阿里乞)은 아라비아어의 아라키 를 말하며 제조하는 방법이 수록되어 있다(Shinoda 1995). 그리고 송, 요, 금과 다르게 원대의 증류주의 등장은 주구의 변천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증류 주 등장과 주구 변천과의 관련성에 대한 차후의 연구가 필 요하리라 생각된다.
IV.요약 및 결론
12-14세기에 도자를 음식용기로 사용한 국가는 중국과 고 려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 연구는 고려의 대외 교류국인 송, 요, 금, 원의 고분벽화에 나타난 주구를 살펴보았다. 주구는 발효한 술을 저장하는 성주기, 술을 따르는 주주기, 술을 마 시는데 필요한 음주기, 맑은 술을 뜨는 읍주기로 분류되는 일련의 용기로 구성되어 있다. 원대 이전의 송, 요, 금의《봉 주도》,《비주도》,《진주도》에는 매병이 대부분 묘사되어 있다. 매병은 주병(酒甁), 경병(經甁), 계퇴병( 腿甁), 대준 (大尊), 주단(酒壇), 주준(酒樽, 酒尊) 등의 다양한 용어로 호 칭하였다. 또한 이들은 병가(甁架), 목가(木架), 소왜가(小矮 架), 주가(酒架)라는 받침대에 꽂혀 있었다. 주주기는 대부분 집호(執壺)와 온완(溫碗), 주주(注酒)와 온완(溫碗), 또는 주 호(酒壺)와 주완(酒碗)의 기명으로 모두 1벌씩 구성되어 묘 사되어 있다. 음주기는 배(杯), 잔(盞), 탁잔(托盞), 주잔(酒 盞), 주배(酒杯), 완(碗), 소잔(小殘), 발(鉢)의 호칭으로 설명 하였다. 원대의《봉주도》, 《비주도》, 《진주도》에서는 원 대 이전과 다른 주구인 성주기인 개권(蓋罐), 주주기인 옥호 춘병과 마우, 음주기인 파잔, 읍주기인 주작 등이 새롭게 등 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대의 벽화에는 성주기인 매병과 주주기인 주주(注酒)와 온완(溫碗) 등이 주로 표현되지 않고 개권, 옥호춘병과 마우 등이 묘사되기 시작하였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원대에 등장한 증류주를 음용하면서 주구의 변천에도 영향을 준 것이 아닌지에 대한 가설을 조심스럽게 설정해 본다. 이 연구를 통하여 고려 대외교류국들의 주구를 구성하고 있는 주기(酒器)들이 일련의 어떤 용도로 어떤 장 소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점은 음식문화적 차 원에서는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본 연구에 서 다루지 못한 고려 교류국의 고분벽화에 묘사된 주구를 고 고학적 발굴 유물과의 관련성 연구, 그리고 시대적으로 주류 의 다양한 음용법과 주구의 변천에 관한 융합적 연구가 뒷 받침된다면 차후 고려청자 주구의 연구에 기초적 자료로 활 용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