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Search Engine

View PDF Download PDF Export Citation Metrics Korean Bibliography PMC Previewer
ISSN : 1225-7060(Print)
ISSN : 2288-7148(Online)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Food Culture Vol.41 No.4 pp.340-348
DOI : https://doi.org/10.7318/KJFC/2026.41.4.340

A History of Vietnamese Agriculture

Duk Kyung Choi*
Department of History, Pusan National University, Korea
* Corresponding author: Duk Kyoung Choi, History Department, Pusan National University, 2, Busandaehak-ro 63beon-gil, Geumjeong-gu, Busan, 46241, Republic of Korea Tel: +82-51-624-6194 E-mail: dkhistory@naver.com
August 18, 2026 August 26, 2026

Abstract


This study examines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traditional Vietnamese agriculture and food resources, based primarily on the author’s History of Vietnamese Agriculture. Using agricultural and historical texts from the sixteenth and seventeenth centuries as major sources, it explores how agricultural knowledge and techniques were adapted to Vietnam’s climatic and ecological conditions. Rice cultivation formed the foundation of Vietnamese agriculture through diverse varieties, cultivation methods, and water-management practices, whereas wheat, barley, millet, and soybeans remained limited due to environmental and processing conditions. Vegetables, spices, fiber crops, and various fertilization practices further reflected adaptation to regional environments. These findings demonstrate that Vietnamese agriculture developed not simply through the adoption of Chinese agricultural traditions, but through the selective adaptation and reorganization of crops, techniques, and knowledge according to local conditions, contributing to the formation of Vietnam’s distinctive food resources and food culture.



베트남 농업사
- 전통 농업과 식품 자원의 역사적 전개를 중심으로 -

최덕경*
부산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초록


    I. 서 론

    베트남은 몬순 기후와 풍부한 수자원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업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특히 홍강과 메콩강 유역의 충적지와 델타 지역은 벼농사의 중요한 생산 기반이 되었으며, 지역의 기후와 토지 조건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작물과 재배기술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농업의 발달은 단순한 식량 생산에 그치지 않고 베트남의 식생활과 생활문화 전반을 형성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농업의 역사는 한 사회가 무엇을 생산하고 어떻게 이용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지역의 식품 자원과 식생활이 형성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베트남에서도 벼를 비롯하여 맥류⋅기장 등의 곡물과 채소⋅향신료, 과실, 섬유작물 등 다양한 농업 자원이 생산⋅이용되어 왔다. 특히 작물의 재배와 이용 방식은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노동력, 농업기술, 가공과 저장 방법 등 여러 조건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따라서 베트남 농업의 역사적 전개를 살펴보는 것은 농업기술의 변화뿐만 아니라 오늘날 베트남 식문화가 형성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에도 의미가 있다. 본고에서는 베트남 전통 농업의 전개 과정과 주요 농업 자원의 생산⋅이용 양상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농업과 식품 자원의 변화가 베트남 식생활문화의 형성에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고찰하고자 한다.

    II. 문제의 제기 및 연구 방법

    베트남은 중국과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장기간 정치⋅경제적 영향을 받아왔음에도, 자국 농업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미흡하다. 이러한 공백을 극복하고 베트남 농업을 능동적인 지식 체계로 재조명하기 위해 본 연구는 16~17세기 『NongJiaShuzhanjingyanyaojue (農家述占經驗要訣)』(이하 『NongJiayaojue (農家要訣)』(Trần 17C)을 중심 사료로 삼되, 고대 중국 문헌 『Shuijingzhu (水經注)』[Li Northern Wei (北魏)], 『Hanshu (漢書)』(Ban 105), 『Guangdongxinyu (廣東新語)』(Qu 1678) 등과 근대 피에르 구루(Gourou Pierre)의 『The Peasants of the Tonkin Delta』(1936)에 이르는 방대한 자료를 종합하여 통사적 조망을 시도한다. 특히 필자는 조선의 농서와 농업사를 함께 참조하는 비교사적 방법론을 채택하였다. 조선은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중국 문명권에서 농업기술을 수용하면서도 자체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두 지역 모두 소빙기라는 기후 변동기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은 화북과 유사한 위도에 위치하여 중국의 “전가월령(田家月令)”을 비교적 원용할 수 있었던 반면, 베트남은 위도 차이로 인해 이를 선별적으로 수용해야 했으며, 이는 동아시아 농업 지식의 수용과 지역적 변용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중요한 비교사적 작업이 된다.

    본고는 최근 출간된 필자의 『베트남 농업사』(Choi 2026)를 토대로, 베트남 전통 농업의 역사적 전개와 그 과정에서 나타난 농업기술 및 식품 자원의 특징을 중심으로 논의를 재구성하였다.

    III. 연구 내용

    1. 고대 베트남 농업의 기원

    1.1. 기록의 부재와 중국 문헌에의 의존

    고대 베트남 농업 복원의 가장 큰 난관은 자체 기록의 부재다. 이에 필자는 『Shuijingzhu (水經注)』등 중국 문헌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Shuijingzhu (水經注)』에 따르면, 한 무제 때 설치된 베트남 북부의 구진군(九眞郡)에서는 후한 광무제 때 임연(任延)이 처음으로 쟁기질을 가르쳤다. 이는 그 이전까지 우경(牛耕)과 쟁기 기반의 경작이 일반화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Shuijingzhu (水經注)』가 전하는 핵심 경작 방식은 ‘화누경예(火耨耕藝)’로, “법이 화(華)와 같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강남의 원시적 ‘화경수누(火耕水耨)’와 구별되는 발전된 형태로, 쟁기와 제방(隄防) 시설이 누적된 결과다. 북위 『Shuijingzhu (水經注)』는 약 600여 년에 걸쳐 안남 지역이 중국과 유사한 수준의 화누경예 기술에 도달했다고 서술한다. 이는 중국 농업기술이 베트남에 단기간에 일방적으로 ‘이식’되었다기보다, 베트남의 토지⋅수계⋅노동 조건 속에서 장기간에 걸쳐 선별되고 재구성되었음을 보여준다.

    1.2. 낙전(雒田)과 조전(潮田)

    해안 하구 충적지에서는 ‘낙전(雒田)’이라는 독특한 경작 방식이 발달했다. 『Shuijingzhu (水經注)』에 따르면, 낙전은 조수(潮水)의 차를 이용하여 개간한 땅으로, 밀물과 썰물의 자연적 작용으로 퇴적된 충적토 위에 형성되었다. 이는 대규모 수리 시설 없이 자연의 힘을 활용한 현실적 선택이었다. 『Guangdongxinyu (廣東新語)』, 『Shiyu (食語)』에는 낙전의 형성 과정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는데, 기존의 모래땅을 ‘모체(母)’로, 새로 쌓인 토사를 ‘자식(子)’으로 비유하였다. 자전(子田)이 형성된 이후에야 조세가 부과되고 수익도 크게 증가했다고 한다. 이러한 형태의 전지는 이후 원대의 도전(涂田), 청대의 조전(潮田)과 비교될 수 있다. 낙전을 개간한 낙민(雒民)은 지역 유력자인 낙장(雒將)을 중심으로 점진적으로 관개⋅배수 시설을 정비해 나갔다. 한(漢)이 교지(交趾)에 군현을 설치한 이후에도 낙왕(雒王)⋅낙후(雒侯)⋅낙장을 그대로 존속시켜 통치를 이어간 사실은, 토착 지배층이 낙전 개발과 농업 운영에 계속 관여했음을 시사한다.

    1.3. 양숙(兩熟)의 실체와 초기 연작의 어려움

    『Shuijingzhu (水經注)』는 백전(白田)과 적전(赤田)이라는 두 가지 토지 유형을 제시한다. 백전에는 백곡(白穀)을 심어 7월에 ‘화작(火作)’으로 경작하고 10월에 수확하며, 적전에는 적곡(赤穀)을 심어 12월에 경작하여 이듬해 4월에 수확한다. 필자는 이 기록을 동일 포장에서의 연속 이모작으로 단정하는 데 신중하다. 백전과 적전이 서로 다른 토지를 지칭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16세기 『Yuejiaoshu (越嶠書)』(Li 1540)에는 ‘한 해 벼 2회 수확하였다(一歲再稻)’는 표현이 보이지만, 명말⋅청초 시기에도 동일 포장에서 수확한 벼 포기에서 싹이 돋아 이삭을 수확한 것을 제외하고, 이앙을 통한 벼 2기작이 널리 정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초기 베트남에서 동일 포장 연 2작이 곤란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우경과 철제 농구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에는 노동력의 한계가 컸다. 백전에서 10월에 수확한 뒤 12월에 다시 파종하려면 제초, 볏짚 처리, 정지, 시비 등 일련의 작업이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인력만으로는 이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둘째, 강우량이 많은 남방 지역에서는 제초 작업이 더욱 어려웠다. 셋째, 이러한 노동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휴경(休耕)이 불가피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만도(晚稻)는 대체로 추분이나 한로 무렵에 수확되었고, 서리가 내리면 수확이 종료되었다. 『Guangdongxinyu (廣東新語)』에서도 조전은 해마다 한 차례 수확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한대 이전 교지군의 낙전 역시 이를 능가하는 생산력을 갖추지는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2. 기후 예측과 농업 지식의 재구성

    2.1. 물후(物候)와 점후(占候)

    『NongJiayaojue (農家要訣)』은 기후 예측을 농업의 핵심 변수로 인식했다. 첫째는 ‘물후(物候)’로, 동식물의 변화를 통해 농시(農時)를 측정하는 방법이다. 전국⋅진한시대에 걸쳐 완성된 72후(候)는 1년을 약 5일 단위로 나누어 자연 변화를 기록함으로써 농민의 일상적 판단을 도왔다. 16세기 이전 농서들이 이런 자연 변화를 주로 계절 순환의 시간 질서 속에서 파악했다면, 16~17세기 동아시아에서도 이러한 변화를 통해 보다 구체적인 기후 변동과 재해 가능성까지 예측하려 했을 것이고, 베트남과 조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둘째는 ‘점후(占候)’로, 천문⋅기상⋅생물 현상의 기후의 징조를 해석하여 단기간의 강우나 풍향을 예측하는 방식이다. 점후는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반복된 경험과 관찰을 통해 축적된 전통적 기후 인식의 한 형태였다. 흥미로운 점은 관찰의 대상과 시기는 베트남과 조선이 상당히 유사하지만, 그 결과까지 일치하는 사례는 많지 않다는 것이다. 한반도는 위도상 중국 중⋅북부와 비슷하여 자연계 변화를 유사한 경험치로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베트남은 위도⋅경도에서 중국 화북과 큰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계절과 월별 변화를 기준으로 한 화북의 전가월령(田家月令)은 베트남 농업 현실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예컨대 베트남 『NongJiayaojue (農家要訣)』에는 “4월 초여드렛날 날씨가 무덥고 맑으면 고전(高田)에서도 낚시하기 좋고, 흐리고 음울하면 고지⋅저지를 막론하고 풍년”이라는 내용이 실려 있어, 화북과는 다른 수전의 풍경과 남방 특유의 농업 환경을 반영하고 있다.

    2.2. 지모경(地母經)과 장기 예측

    셋째는 『Dimujing (地母經)』(Anonymous)을 통한 장기 예측이다. 이는 60갑자의 순환에 따라 해마다 반복되는 풍흉의 양상을 장기적 주기 속에서 파악하려는 체계로, 단기성 점후가 지닌 불확실성을 완화하고 한 해 농사의 전체 윤곽을 미리 가늠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60년 주기의 작물 상태와 풍흉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큰 특징이다. 비록 이러한 점험이 실제 현실과 반드시 일치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불안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미리 전망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농민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이는 마치 오늘날의 일기예보만으로는 구체적인 마을 단위의 평지⋅산지, 음지⋅양지의 미세한 차이까지 설명하기 어렵다는 한계를 과거 물후가 도리어 효과적으로 보완해 주었던 것과 흡사하다.

    3. 『농가요결』에 나타난 16~17세기 베트남 농업

    3.1. 벼 품종의 다양성과 ‘60일도’의 해석 문제

    『NongJiayaojue (農家要訣)』의 곡물 중 첫 항목은 「도품론(稻品論)」으로, 벼의 절대적 위상을 보여준다. 쌀은 주식 외에 볏짚(지붕⋅연료⋅사료⋅비료), 쌀겨(사료⋅비료), 술⋅떡의 원료로 활용되었다. 베트남의 벼농사는 약 1만~8천 년 전 박선(Bac Son) 유적에서 벼 관련 흔적이 확인되며, 신석기 말기에는 베트남 대부분 지역에서 벼농사 관련 유물이 출토된다.

    『NongJiayaojue (農家要訣)』이 소개하는 벼 품종은 매우 다양하다. 생육 기간에 따라 60일도(六十日稻)⋅80일도⋅백일도(百日稻) 등의 조생종과 만생종이 공존한다. 또한 줄기의 색과 건강도, 낟알의 형태와 색, 까끄라기의 존재 여부, 향기의 강도, 찰기 정도에 따라 세분화된다. 자망도(紫芒稻), 호피나(虎皮糯), 향나(香糯), 소향도(小香稻), 소낭나(小娘糯) 등 다양한 품종명은 베트남 농민의 감수성과 세밀한 관찰력을 보여준다.

    점성도(占城稻) 계열은 베트남 중부에서 기원하여 중국 복건⋅강남, 나아가 화북까지 전파된 대표적 품종이다. 그러나 필자는 문헌 속 ‘60일’이라는 수치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종(種)’이 낙종(落種)인지, 수확 후 벼 포기에서 절로 자란 벼 품종인지, 이앙(移秧)을 뜻하는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재난과 흉년 대비용 조숙도 직파(直播)의 경우, 파종 후 60일 만에 수확이 가능하겠지만, 이앙법(移秧法)을 전제로 하면 육묘 기간(약 30~40일)을 별도 계산해야 하므로 파종에서 수확까지의 실제 생육 기간은 90~100일이 된다. 현대 육종학과 피에르 구루의 조사에 비추어 보면, 극조생종이라도 전체 생육 기간은 약 90~120일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60일도’나 ‘80일도’는 실제로 60일 또는 80일 만에 파종-수확되는 품종이라기보다, 이앙 후 여러 조생종 벼를 묶어 부르는 관습적 범주명일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베트남 농업은 외래 개념을 자신들의 기후, 노동 조건에 맞게 용어와 재배 관행을 재구성하는 유연성을 지니고 있었다.

    3.2. 파종⋅수확시기와 재숙도(再熟稻)

    『NongJiayaojue (農家要訣)』에 따르면 베트남 벼의 파종⋅이앙 시기는 대체로 3~5월에 집중되고, 수확은 주로 7~9월에 이루어진다. 60일도를 제외하면 전반적인 생장 기간은 대체로 3~5개월 정도이며, 수확시기는 6~10월까지 약 5개월에 걸쳐 있다. 조도(早稻)⋅중도(中稻)⋅만도(晚稻)의 작황을 좌우하는 결정적 『Nongzhengquanshu (農政全書)』(Xu 1639)에는 재숙도(再熟稻)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이는 벼를 수확한 뒤 다시 그루터기에서 싹이 돋아 형성된 이삭을 수확하는 방식으로, 새로 종자를 뿌린 것이 아니라 한 번 심은 포기에서 다시 결실이 돋아 수확에 이른 형태였다. 예컨대 개하백도(蓋下白稻)는 정월에 파종하여 5월에 첫 수확을 한 뒤, 남은 뿌리에서 다시 싹이 나와 9월에 한 번 더 수확한 품종으로 설명된다. 이 역시 4개월 만에 수확하며, 이는 노동과 자원을 추가로 투입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보조적 수확에 가까운 성격을 띠었다. 필자 역시 『NongJiayaojue (農家要訣)』을 검토한 결과 적어도 17세기까지 베트남 수도작의 기본적 작부체계는 연 1작(年一作)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사쿠라이 유미오(櫻井由躬雄)의 연구에 따르면, 베트남의 “1전(田) 2기작”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8세기 전세(田稅) 종목에서 처음 확인되고, 19세기 초 지부(地簿)에서 “하추전(夏秋田)”이라는 항목으로 나타난다(Yumio 1897). 이런 측면에서 보면 연2작(年二作)이 본격적으로 정착된 것은 이후 수리 시설의 개선과 조생종 품종의 보급이 누적되면서 이루어진 역사적 결과라고 여겨진다.

    3.3. 직파법과 이앙법

    파종 방식으로는 직파법(直播法)과 이앙법(移秧法)이 병존했다. 18세기 베트남 유서(類書)인 『Yuntaileiyu (芸臺類語)』(Lai 1773)에 따르면 모래땅 지역에서는 “매년 망종(芒種, 음력 5월 초순)이 되면 함께 모여 흙을 일구고 곡식을 파종한다. 파종할 때는 곡식 종자를 매우 촘촘히 흩뿌린 뒤 곧바로 가볍게 쟁기(耡)로 갈아서 흙과 모래를 섞어 종자를 덮는다.”라는 직파법이 시행되었다. 직파법의 장점은 수확 후 뿌리를 제거하지 않고 방치하면 뿌리가 썩어 자연스러운 퇴비가 되어 토양의 비옥도를 높이고, 떨어진 낟알에서도 자연히 싹이 터 다시 벼가 자라므로 일종의 자연 낙종에 의한 재생 효과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Yuntaileiyu (芸臺類語)』에는 또한 종자를 물에 사흘간 담가 싹을 틔운 뒤 물이 고인 논에 직접 던져 뿌리는 수중 직파 방식을 소개하고 있다.

    이앙법에 대해서는 『Yuntaileiyu (芸臺類語)』에서 유학자 관점에서 “묵은 것을 밀어내고 새것을 불러들이며(推陳致新), 기운이 서로 교합되어 점차 왕성해지고, 껍질을 벗기고 바탕을 드러내어 정수(精髓)를 얻으며, 정기가 갈마들어 변하여 새 생명이 생긴다(化生).”라고 설명할 정도로 정교한 농법으로 인식하였다. 『NongJiayaojue (農家要訣)』「Jongsi (種時)」에 따르면 “망종 이후 삼시(三時; 15일) 이내에 모를 뽑아 진흙을 씻어 내고(Choi 2026:139), 피와 잡초를 골라낸 뒤, 날이 흐린 때를 틈타서 곧바로 모를 심는다.”라고 하여, 이앙의 적기가 짧고 날씨와 수위 조건을 놓치면 활착률이 크게 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심는 방식에 대해서는 “대략 여섯 줄기(莖)를 한 포기로, 여섯 포기(棵)를 한 줄(行)로 한다. 포기와 줄은 곧아야 김매기와 휘젓기를 하기에 편리하다. 얕게 심으면 피와 모가 쉽게 돋아난다.”라는 규칙적 배치 원칙이 제시된다.

    베트남의 수도작 관리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배수-재관개’조절 기술이다. 『농가요결』은 김매기를 마칠 때마다 물을 빼고 뿌리를 햇볕에 쬐어 준 뒤 이틀 후 다시 물을 대면 바람과 가뭄에 잘 견디게 된다고 설명한다. 하지(夏至) 전후에 모내기하고, 모에 이삭이 패면 바로 물을 대지 않으며, 작렬하는 햇볕에 토양이 갈라질 정도로 말린다. 7월 말~8월 초에 비가 오면 흙이 되살아나 벼가 무성해진다. 이러한 반복적 건습 환원 조절은 벼의 내도복성(耐倒伏性)을 강화하고 수량 조절에도 기여하는 베트남 벼농사의 핵심 관리 기술이었다.

    3.4. 델타 지역의 토지 척도 방식

    한편 베트남의 토지 척도 방식은 중국의 면적(畝) 중심과 달랐다. 하노이 인근 경북(京北) 지역의 해양(海陽) 사람들은 자손에게 토지를 분할할 때 “어느 사(社)의 어느 곳에 있으며, 대략 몇 담(担) 나는 논이다”라고 말할 뿐 “천 무(千畝)”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이는 베트남에서 토지의 가치가 물리적 면적보다 실제 납곡 능력, 즉 생산력과 조세 부담을 기준으로 평가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기후와 풍토에 따른 생산량 기준의 토지 인식은 중국 남부와 베트남에 공통된 특징으로 기후와 풍토 조건과 긴밀하게 얽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세기 전반의 통킹 델타에서는 전통 시기와 이앙과 수확시기는 큰 변화 없지만, 관개⋅배수⋅제방 시설이 개선되어 토지가 지나치게 척박하여 발작물 재배에 비효율적인 고전(高田)이나 진흙탕, 또는 관개가 어렵거나 여름 내내 침수 상태에 놓이는 논을 제외하고는, 품종개량을 통해 연 1작을 넘어 집약적인 토지 이용이 이루어졌다. 벼만 연 2~3작을 하는 경우도 있고, 그 사이에 발작물을 윤작(輪作)으로 끼워 재배하기도 했다.

    4. 밭작물(旱田作物)의 재배와 한계

    4.1. 맥류(麥類)의 재배 조건과 한계

    고응징(高熊徵)의 『Jiaozhizongzhi (交趾總志)』(Gao 1419)에는 교주(交州) 사람들이 본래 보리 심는 법을 알지 못했으며, 당대 도호(都護) 조창(趙昌)이 일찍이 그 심는 법을 가르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삭만 패고 결실하지 못했다. 17세기 『농가요결』은 “대맥은 해를 넘기지 못하고, 소맥은 월동하지 못한다”라고 하여 맥류 재배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NongJiayaojue (農家要訣)』은 ‘북맥(北麥)’과 ‘남맥(南麥)’을 구분하는데, 북맥의 꽃은 낮에 피어 사람에게 이롭지만, 남맥의 꽃은 밤에 피어 병을 일으킨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명대 『Qunfangpu (群芳譜)』(Wang 1621)에서는 그 원인을 “북쪽 땅은 건조하고, 겨울에는 눈이 많으며, 봄에는 비가 적다. 이곳의 밀은 낮에 꽃을 피우고, 껍질이 얇으며 밀가루가 많으며, 먹으면 사람에게 좋다. (반면) 남방은 지대가 낮고 습하며,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고, 봄에는 비가 많이 온다. 보리는 낮고 습한 기운을 받고, 또 밤에 꽃을 피우므로, 먹으면 열이 생기고 복통이 나며 소화하기 어렵다.”라고 설명한다. 『Shoushitongkao (授時通考)』(E & Zhang 1742)에도 “북맥은 성질이 따뜻하여(性溫) 먹어도 갈증을 일으키지 않지만, 남맥은 성질이 뜨거워(性熱) 먹으면 답답하고 갈증이 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베트남에서 맥류 재배가 주저된 이유는 이 외에도 수확시기와 노동 배치의 문제가 컸다. 맥의 수확은 대체로 5~6월에 이루어지는데, 이 시기는 양잠(養蠶) 노동이 집중되는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또한 목면(木綿)의 생육 시기와도 겹쳤다. 이처럼 노동과 작기(作期)가 중첩되는 구조 속에서, 부정적 인식을 지닌 맥 재배는 자연히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베트남의 5~6월은 우기(雨期)와 겹쳐 수확 자체가 더욱 곤란하였다. 게다가 수확 직전에 비를 맞으면 익은 곡물 알갱이가 떨어져 수확이 감소되거나 곡물이 상하게 된다. 또한 명대 『Tiangongkaiwu (天工開物)』(Song 1637)에서는 “남방의 도전(稻田)을 비옥하게 만들기 위해 맥을 파종하지만 결실은 바라지 않는다. 봄에 소맥과 대맥이 푸르게 자랄 때 갈아엎어 흙의 성질을 돋우면, 가을 벼 수확이 반드시 두 배로 늘어난다.”라고 하였다. 이는 남방, 나아가 베트남에서도 맥류가 식량 작물이라기보다, 토지 비옥도를 유지하거나 휴경기를 활용하기 위한 보조적 작물로 주로 인식되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맥은 베트남 농업에서 중심 작물로 자리 잡지는 못했으나, 점차 토지 개량, 보조 식량, 특정 지역의 한전 작물로서 제한적이지만 분명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4.2. 기장(穄稷)과 콩의 부재

    기장의 운영은 더욱 험난했다. 1777년 간행된 판딩후(范廷琥)의 『Cankaojazi (參考雜記)』(Pham 1777) 상에는 “서곡(黍穀)은 백곡(百穀)의 으뜸이다. … 한나라 마원(馬援)이 교지(交趾)에 있을 때 일찍이 그 종자를 심었으나, 꽃만 피고 열매는 맺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NongJiayaojue (農家要訣)』에서는 기장이 이슬에 약해 “새벽마다 내린 이슬을 긴 새끼줄에 어저귀(茼麻)를 여기저기 끼우거나 묶어서 두 사람이 서로 잡아당기며, 태양이 뜰 때까지 기장 위에 맺힌 이슬을 쓸어내렸다.”는 번거로운 관리법을 소개하고 있다. 『Fanshengzhishu (氾勝之書)』(Fan. Late Former Han Dynasty) 이후 『Nongsangyishicuoyao (農桑衣食撮要)』(Lu 1314) 「이월(二月)⋅종서제(種黍穄)」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기장을 “이삭이 패기 전, 곧 서심(黍心, 어린 이삭)이 형성되는 시기에 물이 스며들면 이삭이 상하여 열매를 맺지 못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농번기에 기장 재배를 위해 매일 새벽 별도의 노동력을 투입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베트남에서 기장 재배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이것을 화북에서 이주해 온 고대 이주민들의 전통 음식 문화와 연결한다. 기장은 화북 지역에서 술(酒)을 빚거나 제사(祭祀)용 음식을 만드는 핵심 곡물이었다. 베트남으로 이주한 이들은 생존을 위한 주식으로는 벼에 의존하면서도, 조상 제사와 전통 의례를 유지하기 위해 기장 재배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즉 기장은 일상적 주식이 아니라, 이주민의 정체성과 전통을 잇는 의례용 곡물로 제한적으로 재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동아시아 농업의 핵심인 대두(大豆)와 소두(小豆)가 『NongJiayaojue (農家要訣)』에서 보이지 않는 현상에 대해 필자는 기후 조건과 가공 기술의 부조화로 설명한다. 『Qiminyaoshu (齊民要術)』(Jia 6C)에 따르면 장(醬)과 두시(豆豉) 제조는 겨울철 저온과 건조한 환경을 필수 조건으로 요구한다. 장 담그기는 12~2월, 두시 제조는 4~5월에 이루어지며, 이 시기를 벗어나면 발효가 안정적으로 진행되기 어렵다. 이 밖의 시기는 장과 메주(鹽豉)의 제조에 적합하지 않다고 할 정도로 기후에 민감한 공정이다. 그러나 베트남의 연평균 기온은 23~25℃에 달하고, 건조한 겨울이 없어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기 어렵다.

    그 결과 베트남에서는 동북아시아처럼 두장⋅된장 중심의 발효 식문화가 발전하지 못하고, 대신 고온 환경에서도 안정적으로 제조⋅보존이 가능한 젓갈과 어장(魚醬)이 주요 조미료로 자리 잡았다. 필자는 이 차이를 ‘기술의 부재’가 아닌 ‘환경에 따른 합리적 선택’의 결과로 평가한다. 베트남의 연안⋅하구 환경은 풍부한 수산자원과 소금을 제공했고, 젓갈 제조 기술이 일찍부터 발전했으며, 이것이 다시 풍토상 콩 발효 식품의 확산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런 여건은 한반도와 다른 점이라 볼 수 있다.

    또한 『Nanfangcaowuzhuang (南方草物狀)』(Xu. Southern and Northern Dynasties)에 “남월(南越) 지역의 오곡(五穀)은 갖추어져 있지 않다.”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필자는 이는 남방에서는 화북의 오곡이라는 분류 자체가 곧바로 농업 현실과 일치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고 본다. 즉 곡물의 ‘분류⋅명칭’보다 기후⋅토지⋅노동에 맞는 실용적 선택이 더 중요했을 가능성이 크다.

    4.3. 베트남 특유의 채소와 향신료

    베트남의 고유한 채소로는, 『Nanfangcaowuzhuang (南方草物狀)』에 따르면 교지(交趾)와 구진(九眞)에서는 생강과(生薑科)에 속하는 두구화(豆蔻花)와 산강화(山薑花)가 생산되었으며, 『Annanzhilue (安南志略)』(Ly 1333)에도 다양한 종류의 생강과 율무가 등장한다. 이들은 약용과 식용을 겸한 중요한 부식 재료였다.

    『Qiminyaoshu (齊民要術)』에 따르면 생강은 흰 모래땅에 적합한 작물로, 황하 유역의 토양에서는 겨우 재배할 수 있을 뿐 대량 번식에는 적합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Qiminyaoshu (齊民要術)』은 중원 이외 지역에서 산출되는 ‘비중국 물산’을 서술하면서 『Lushichunqiu (呂氏春秋)』(Lu BC.239)를 인용해 “양념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촉군(蜀郡)의 양박(楊樸)에서 나는 생강이다.”라고 전한다. 이 기록은 생강이 본래 남방, 곧 남월 지역을 중심으로 생산된 작물로서 약용과 식용을 겸하여 활용되다가, 점차 중원 사회로 유입⋅확산되었음을 보여준다.

    『Guangzhouji (廣州記)』(Pei. Eastern Jin Dynasty)에는 물속에서 자라는 공심채(空心菜)를 소금에 절여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공심채는 줄기가 비어 있어 ‘속 빈 채소’라는 뜻으로, 물속에서 자라면서도 아삭한 식감을 지녀 오늘날까지도 베트남을 대표하는 채소로 남아 있다. 같은 책에는 마른 땅에서 자라는 동풍채(冬風菜)를 고기와 함께 국으로 끓여 먹었다는 사례도 보인다. 『Nanyuezhi (南越志)』(Shen 460)에는 바위 위에서 자라는 붉은빛 해조류인 녹각채소(鹿角菜)가 등장하는데, 이름처럼 사슴뿔을 닮은 이 해조류는 베트남 해안 지역에서 채취되어 식용되었을 것이다. 『Lushichunqiu (呂氏春秋)』에는 남쪽 여무(餘瞀) 산의 벼랑에서 자라는 벽옥색 채소인 가수(嘉樹)가 등장하는데, 이 역시 베트남 북부 산간 지역의 특산 채소였을 가능성이 있다.

    비록 베트남의 기록에서 생산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Nanfangcaowuzhuang (南方草物狀)』에는 순무(蕪菁), 가지나무(茄樹), 감서(甘薯), 수총(水葱), 조름나물(綽菜), 옹채(蕹), 야갈(冶葛), 길리초(吉利草), 혜초(蕙) 등 여러 야채⋅약초가 등장하며, 중국 남방 운몽(雲夢)에서 생산된 마늘, 미나리, 물고사리, 그리고 서남 지역에서 산출된 바질(羅勒), 김(紫菜) 등도 유사한 경로로 베트남 식탁에 올랐을 가능성이 크다. 필자는 『Nanfangcaowuzhuang (南方草物狀)』과는 달리 『NongJiayaojue (農家要訣)』에서 채소류의 서술이 소략한 이유를, 채소가 너무나 일상적이고 당연한 존재였기 때문에 굳이 상세히 기록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가능성에서 찾는다. 실제로 『Qiminyaoshu (齊民要術)』에만 31종의 채소가 등장할 정도로, 이미 채소는 동아시아 식문화의 필수 요소였기 때문이다.

    5. 섬유 작물

    5.1. 양잠: 연 8회의 가능성과 현실

    『NongJiayaojue (農家要訣)』이 제시하는 섬유 작물은 삼(麻), 모시(苧麻), 목면(木綿), 양잠(養蠶)의 축으로 구성된다. 『Annanzhilue (安南志略)』에 따르면 “안남(安南)은 옛 교지(交趾)의 땅으로 전한 이후 중국 내지의 군현이 되었다. 남자는 발을 갈고 장사하며, 여자는 누에치고 길쌈을 했다.” 같은 책에는 중부 일남(日南) 지역에서 1년에 팔잠(八蠶)을 하였고, 3월부터 8월까지 양잠을 하여 고치실로 방직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은 중국의 군현郡縣 체제 편입 이후 양잠이 가속화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한편, 양잠의 주기와 규모가 중국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연간 8회의 양잠이 가능했던 배경으로는 누에의 생장기가 매우 짧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Nongsangjiyao (農桑輯要)』(Officially compiled. 1273)「Benefits of Early Silkworms(稙蠶之利)」에도 “올누에는 곡우(4월 20일경)에 부화하여 23~24일이면 익는다.”라고 하여, 누에의 생장 주기가 대체로 한 달 내외였음을 확인시켜 준다. 이처럼 누에의 생장 주기만 놓고 본다면, 뽕잎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에서 연간 다회 양잠은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 가정이 연중 연속적으로 8회 양잠을 수행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회 양잠에서 핵심은 ‘누에의 종류’ 못지않게 뽕잎의 재생산 능력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연속하여 뽕잎의 공급이 이루어져야 한다. 관리가 어긋나 누에 사육이 늦어지면, 뽕잎을 더 많이 먹는 데 비해 생사량은 오히려 줄어드는 역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다회 양잠은 곧 ‘수익’만이 아니라, 그만큼 높은 ‘리스크 관리’와 ‘정확한 시기 통제’를 전제로 했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생산이 지속되었다면, 생사⋅비단에 대한 수요가 매우 컸거나, 조세⋅공물 등 외부의 요구가 작동했을 가능성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5.2. 목면(棉花)의 전파

    『Guangzhouji (廣州記)』에는 “만이(蠻夷)는 양잠을 하지 않으므로 목면을 따서 그 솜[絮]을 이용한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베트남을 포함한 남방 지역에서 목면이 일찍부터 중요한 섬유 원료로 이용되었음을 보여준다. 『NongJiayaojue (農家要訣)』역시 ‘면화(棉花)’를 중요한 작물로 다루면서 두 종류의 목면을 소개하고 있다.

    첫째는 목면수(木棉樹)로, 서진(西晉)의 『Wulu (吳錄)』(Zhang Jin Dynasty (晉代))에는 “교주(交州)와 영창(永昌)의 목면수는 높이가 4~5장[丈: 진대(晉代)의 1척이 24 cm라면 약 9.6-12 m]에 이르고, 붉은 꽃은 산다화(山茶)와 같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둘째는 1년생 초본 면화이다. 곡우(穀雨) 무렵에 파종하며, 입추(立秋)에 황색 꽃이 피는데 그 모양이 해바라기(秋葵)와 비슷하다. 열매는 작은 복숭아(桃)를 닮았으며, 그 속에 흰 솜과 종자가 들어 있다. 그리고 자색 솜(紫棉)에 대한 기록도 보인다.

    중국으로의 목면 전파는 크게 두 계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길패(吉貝)로 대표되는 남월의 목면수 및 1년산 남방 중면[中綿] 계통이 민광(閩廣) 지역을 거쳐 전파된 남방 경로이고, 다른 하나는 아프리카 기원의 초면(草棉)이 중앙아시아를 통해 중국 서북 지역으로 유입된 서역 경로이다. 후자는 장건(張騫)의 서역 출사 이후 점차 전래되었으나, 서북 지역의 환경에 적응한 채 주로 섬북(陝北) 일대에 머물러 중국 내륙으로 크게 확산되지는 못하였다.

    반면 남방 계통의 면화는 당대(唐代)에 민광 지역에서 재배와 이용이 확대되었고, 송대(宋代)에 이르면 점성도(占城稻)와 함께 중국 내륙으로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원대(元代)에는 면포를 수천 필 단위로 하사하거나 징수할 정도로 중요한 생산물이 되었으며, 이 시기에 화북 지역에서는 서로 다른 계통의 면화가 공존하고 있었다. 원대 『Wangzhennongshu(王禎農書)』(Wang 1313)에 따르면 남방의 초본 면화는 종자 개량과 풍토 적응을 거치면서 관중(關中) 지역까지 확산되었고, 점차 기존의 아프리카계 초면을 대체해 갔다고 한다. 또한 당시 『Nongsangjiyao (農桑輯要)』에서 목면을 ‘신첨(新添)’이라 부른 것은 전통적인 목면수를 대체하는 새로운 초본 면화의 등장을 의미한다.

    『NongJiayaojue (農家要訣)』에서 목면수 이외 1년생 초본 면화를 별도의 「면화(棉花)」 항목으로 설정하여 상세히 기록한 것은, 월남의 면화 생산이 목면수 중심에서 초본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초본 면화는 섬유의 길이와 강도가 좋고 단력성과 촉감이 부드러워 지속적으로 선택, 개량되었으며, 양잠보다 노동 부담이 적고 생산성도 높았다. 또한 저마(苧麻)에 비해 길쌈의 공력이 덜 들면서도 방한과 촉감 및 염색 효과가 우수하였기 때문에 베트남은 물론 중국에서도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 화목(花木)⋅수목: 실용과 심미의 교차

    베트남의 독자적 농서 『NongJiayaojue (農家要訣)』이 여타 동아시아 농서와 구별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Zhongshuzonglun (種樹總論)」과 「Zaihuazonglun (栽花總論)」이라는 독립 항목 아래 화목(花木)과 정원 관리를 체계적으로 다룬다는 점이다. 중국의 전통 농서에서 수목 재배는 철저히 실용적 목적에서 비롯되어 『Fanshengzhishu (氾勝之書)』의 주곡⋅섬유 작물 중심에서 『Qiminyaoshu (齊民要術)』의 다원적 과실수와 염색 작물로, 그리고 『Nongsangjiyao (農桑輯要)』의 남방의 과일나무로 점차 확대되었다. 반면 베트남 북부 통킹 델타에서는 자몽, 오렌지, 리치, 코코야자, 빈랑 등 중국 고농서와는 전혀 다른 품목이 재배되었는데, 이는 단순한 품목의 차이를 넘어 기후⋅토양⋅수계와 베트남 특유의 생활양식이 결합한 생태적 적응의 결과이다.

    전통적으로 송대 이후 중국과 조선의 화훼 문화는 사대부 문인들이 양화(養花)를 통해 도덕적 상징성과 군자의 지조를 기르던 인격 수양의 방식이자 관념적 취미의 영역이었다. 조선의 『Yanghwasorok (養花小錄)』(Gang 15C)이 보여주듯 사대부들은 국화⋅매화⋅난⋅연꽃 등의 생태적 특성에 도덕적 품격을 부여하고 심지를 굳건히 하는 수단으로 삼았으며,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정신을 함양하는 데 몰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목이 농서라는 농업 생산 지식의 체계 안으로 정식 편입된 이유는, 전통 시대 원림 경영과 화훼 생산이 단순한 사치나 풍류를 넘어 시장 경제의 진전에 따라 실질적인 농가 가계 수익을 창출하는 고부가가치 농업 활동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즉, 기후적 이점을 활용한 화목 재배가 농가의 생계 안정과 자산 축적에 기여하는 주요한 소득원으로 부상하면서, 국가와 지식인 역시 이를 필수적인 농업기술로 공인하고 체계화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농가요결』의 화목 서술은 문인적 취향에 경도되지 않고 파종, 접붙이기, 이식, 시비 등 실제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실천적 원예 기술(灌園一事)에 철저히 집중한다. “식물은 흙을 어머니로 삼고 햇빛을 근원으로 삼는다”라는 생태적 원칙 아래 토양과 일조 조건을 과학적으로 통찰하였으며, “부지런한 자는 토지의 재부를 통해 부를 이룬다”라는 구절을 통해 화목 재배를 노동과 기술을 투자하여 부를 축적하는 실리적인 가계 경제의 핵심 축으로 포섭하였음을 입증한다.

    7. 비료와 시비: 지속 가능한 생산의 조건

    『NongJiayaojue (農家要訣)』이 보여주는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비료의 종류와 시비법에 대한 세심한 관심이다. 인분뇨, 가축분뇨, 나무재, 패각회(貝殼灰), 두병(豆餅), 남니(罱泥), 해초 등 다양한 비료의 특성이 제시되며, 부숙(腐熟) 후 사용을 권장하는 등 경험적 지침도 분명하다. 다만 「Crop–Soil Differences (物性土性異同)」에서는 작물과 토양의 성질에 따라 시비의 효과가 달라짐을 지적한다.

    명대 『Shuyuanzaji (菽園雜記)』(Liu 15C)에 따르면, 인축분은 벼와 잡초를 함께 무성하게 하지만, 패각회(貝殼灰)는 잡초는 죽이고 벼만 성장시킨다고 한다. 필자는 이것이 남방 연해 지역의 염분과 습한 환경에서 잡초 억제라는 실질적 이점을 제공했으며, 또한 토온을 높여 차가운 하전(下田)의 생육을 촉진하는 기능성 비료로 인식되었음을 지적한다. 이는 베트남과 중국 남부가 공유한 해안⋅삼각주 생태환경의 산물이다.

    또한 참깨(芝麻)의 알렐로파시(allelopathy) 효과를 인지한 기록도 흥겹다. 『농가요결』「reclamation (開荒)」에는 “민간에서 이르길 황지(荒地)에 참깨를 파종하고 1년이 지나면 잡초는 나오지 않는다. 참깨의 잎이 덮인 위로 비와 이슬이 내리면, 엄청 쓰디써 (주변의) 초목이 살아나더라도 반드시 시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필자는 참깨가 당시 단순한 채소 및 유료 작물을 넘어 토양 관리와 잡초 방제의 도구로도 활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한다.

    『NongJiayaojue (農家要訣)』은 또한 「물성⋅토성 이동」을 통해 작물과 화목의 종류에 따라 거름의 종류와 시비법을 달리할 것을 강조한다. “백곡은 인분 거름이 좋으나, 산약은 유독 인분을 꺼린다”, “죽목을 옮길 때는 숙토가 달린 채로 옮기되, 모란은 흙을 가지고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돼지똥은 마늘과 각종 초목 재배에 좋으나, 귤은 유독 그것을 싫어한다.”라는 등의 세부 지침은, 중국 농법을 기계적으로 모방하는 대신 베트남의 풍토에 맞춰 재해석하려는 의도를 잘 보여준다.

    8. 근대 통킹 델타의 농업

    피에르 구루의 『The Peasants of the Tonkin Delta』(1936)은 『농가요결』과 비교하여 베트남 농업의 장기적 변화를 추적할 수 있는 결정적 자료다. 구루에 따르면, 근대 통킹 델타의 대표적 벼 품종은 90일도(3개월벼, 5월 이앙⋅8월 수확), 5월도(12~1월 이앙⋅5월 수확), 조생종 8월도(5월 파종⋅9월 수확), 연1작 10월도(6월 파종⋅7월 이앙⋅10월 수확), 그리고 육도(陸稻, 6월 파종⋅9월 수확) 등으로 구분된다.

    17세기 이후 약 300년간 이앙 시기(음력 4~5월)와 수확 시기(7~9월)라는 큰 틀은 거의 변하지 않았으나, 근대에는 조건이 좋은 토지에서 연 2~3작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첫째, 관개⋅배수⋅제방 시설의 개선으로 수리 환경이 안정화되어 침수와 가뭄의 위험이 줄어들었고, 둘째, 조생종 품종의 보급으로 생육 기간이 단축되어 같은 포장에서 연속 경작이 가능해졌으며, 셋째, 인구 증가에 따른 토지 이용의 집약화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동일 포장에서 벼와 밀의 복합 경작은 일반화되지 못한 반면, 벼와 참깨, 벼와 채소의 윤작(輪作)은 비교적 활발했음을 지적한다.

    구루는 또한 델타 상부(단구 지대)에서는 10월도만 재배하고 겨울철 휴경하는 반면, 하부 저지대에서는 여름철 침수를 피하기 위해 5월도 위주의 재배가 이루어지는 지역적 분화를 기록한다. 필자는 이러한 지역적 분화가 이미 17세기 『농가요결』의 시대에도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즉 베트남 농업의 기본적 공간 구조는 근대 이전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고, 근대 이후에는 그 위에서 집약도만 높아진 것이다. 또한 “몇 담(擔) 나는 논”이라는 생산량 기준의 토지 가치 평가 관행도 근대까지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IV. 결론: 음식 문화사적 함의

    이 책은 고대 중국 문헌에서 근대 프랑스 지리학자의 현지 조사에 이르는 방대한 자료를 종합함으로써 베트남 농업의 장기적 변화를 통사적으로 조망했다. 필자는 베트남 농업을 중국의 단순한 아류가 아니라, 자신들의 자연환경과 식생활 조건에 맞게 외래 작물과 기술을 능동적으로 선택⋅변용⋅재구성한 주체로 조명한다.

    음식 문화사적 관점에서 이 책이 주는 함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베트남에서 쌀이 절대적 주곡(主穀)으로 자리 잡은 것은 몬순 기후와 수리 환경, 그리고 쌀을 둘러싼 사회경제적 조건(조세, 공물, 제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재숙도(再熟稻)와 조생종의 활용, 직파법과 이앙법의 병존, 배수-재관개 조절 기술, 생산량 기준의 토지 척도 방식은 베트남 벼농사의 정교한 합리성을 잘 드러낸다.

    둘째, 밀⋅보리⋅콩과 같은 작물이 베트남에서 정착하지 못한 이유는 단순히 환경 적응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들 작물은 겨울철 저온과 건조한 기후, 그리고 봄철 일정한 일조량을 필요로 하지만, 베트남의 고온다습하고 겨울이 온화한 기후에서는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 더욱이 이들 작물을 가공⋅발효하는 기술 체계(장⋅된장 제조)도 베트남에서는 작동하지 않았다. 그 결과 베트남은 독자적으로 젓갈과 어장(魚醬)을 발전시켰고, 이는 오늘날까지 베트남 음식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다. 기장의 경우, 화북 이주민들이 전통적인 술과 제사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 의례용으로 제한 재배한 사례는 음식이 단순한 영양 공급을 넘어 정체성과 기억을 매개하는 문화적 자원임을 보여준다.

    셋째, 공심채(空心菜), 동풍채(冬風菜), 두구화(豆蔻花), 산강화(山薑花), 녹각채소(鹿角菜), 가수(嘉樹) 등 베트남 특유의 채소와 향신료는 열대⋅아열대 환경이 제공하는 식재료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목면(棉花)과 모시(苧麻) 같은 섬유작물은 의복 재료에 그치지 않고, 목면 기름⋅깻묵(餅) 등 식문화와 간접적으로 연결된 자원이었다. 화목⋅수목 재배 역시 과일⋅약용⋅제례 등 식문화의 실용적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전통 농법과 식문화는 결코 ‘원시적’이거나 ‘비과학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을 읽고 공동체를 조직하며 생존을 모색하는 치밀한 합리성이 깃들어 있었다. 기후 위기와 지속 가능한 식품 시스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오늘날, 베트남 농부들이 수백 년에 걸쳐 축적한 이 지혜는 각 지역의 생태적 조건에 맞는 맞춤형 식품 생산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이 책은 베트남의 자연과 공동체가 만들어낸 생활의 지혜, ‘무엇을 먹고 어떻게 길러 왔는가’라는 가장 기초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담은 소중한 성과다.

    저자 정보

    최덕경 (부산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ORCID 10018325)

    Conflict of Interest

    No potential conflict of interest relevant to this article was reported.

    Figure

    Table

    Reference

    1. Anonymous. Unknown. 『Dimujing (地母經)』. China
    2. BanGu (班固). 105. 『Hanshu (漢書)』. China
    3. ChoiDK. 2026. 『History of Vietnamese Agriculture (베트남 농업사)』. Minsokwon, Seoul. Korea
    4. Officially compiled (大司農司). 1273. 『Nongsangjiyao (農桑輯要)』. China
    5. EErtai (鄂爾泰),ZhangTingyu (張廷玉). 1742. 『Shoushitongkao (授時通考)』. China
    6. FanShengzhi (氾勝之). Late Former Han Dynasty. 『Fanshengzhishu (氾勝之書)』. China
    7. GangHA (姜希顔). 15C. 『Yanghwasorok (養花小錄)』. Korea
    8. GaoXiongzheng (高熊徵). 1419. 『Jiaozhizongzhi (交趾總志)』. China
    9. GourouP. 1936. The Peasants of the Tonkin Delta: A Study of Human Geography. Human Relations Area Files, New Haven. USA
    10. Peiyuan (裴渊). Eastern Jin Dynasty. 『Guangzhouji (廣州記)』. China
    11. JiaSixie (賈思勰). 6C. 『Qiminyaoshu (齊民要術)』. China
    12. LaiQuy Tun (黎貴惇). 1773. 『Vandailoangu (芸臺類語)』. Vietnam
    13. LýTrạch (黎崱). 1333. 『Annanzhilue (安南志略)』. Vietnam
    14. LiDaoyuan (酈道元). Northern Wei (北魏). 『Shuijingzhu (水經注)』. China
    15. LiWenfeng (李文鳳). 1540. 『Yuejiaoshu (越嶠書)』. China
    16. LuBuwei (呂不韋) et al. BC 239. 『Lushichunqiu (呂氏春秋)』. China
    17. LuMingshan (鲁明善). 1314. 『Nongsangyishicuoyao (農桑衣食撮要)』. China
    18. LIuRong (陸容). 15C. 『Shuyuanzaji (菽園雜記)』. China
    19. PhamDinh Ho (范廷琥). 1777. 『Thamkhaotapky (參考雜記)』. Vietnam
    20. QuDajun (屈大均). 1678. 『Guangdongxinyu (廣東新語)』. China
    21. ShenHuaiyuan (沈懷遠). 460. 『Nanyuezhi (南越志)』. China
    22. SongYingxing (宋應星). 1637. 『Tiangongkaiwu (天工開物)』. China
    23. TrầnNgọc Trác (陳玉琢). 17C. 『NongJiaShuzhanjingyanyaojue (農家述占經驗要訣)』[NongJiayaojue (農家要訣)]. Vietnam
    24. WangXiangjin (王象晉). 1621. 『Qunfangpu (群芳譜)』. China
    25. WangZhen (王禎). 1313. 『Wangzhennongshu (王禎農書)』. China
    26. XuGuangqi (徐光啓). 1639. 『Nongzhengquanshu (農政全書)』. China
    27. XuZhong (徐衷). Southern and Northern Dynasties. 『Nanfangcaowuzhuang (南方草物狀)』. China
    28. YumioSakurai (櫻井由躬雄). 1987. 『The Development of Asian Rice Cultivation Culture (アジア稻作文化の展開)』. kogakukan, Japan
    29. ZhangBo (張勃). Jin Dynasty (晉代). 『Wulu (吳錄)』. China

    Editorial Office
    Contact Information

    - Tel: +82-10-6369-6955
    - Fax: +82-02-797-6955
    - E-mail: foodculture@food-culture.or.kr

    SCImago Journal & Country Rank